9-14-24 (사 66:6-16) Encountering-224
18:23
9-1-24 (사 65:17-25) 완전한 날들
45:08
8-31-24 (사 65:17-25) Encountering-222
15:53
8-24-24 (사 65:9-16) Encountering-221
18:29
8-18-24 (사 65:1-8) 참가치
38:43
7-14-24 (사 62:1-7) 가슴의 通
56:08
6-27-24 쉐마 : 강미희 성도
18:26
6-25-24 품음 : 이혁 성도
18:50
6-20-24 함께 : 임경화 성도
16:26
Пікірлер
@みな-h3n
@みな-h3n Ай бұрын
목사님 수고하셨어요 이제는 잠시쉬시면서 재충전하셔서 인생과 신앙의선배로써 이끌어주세요 늘 강건하시길요
@정민박-e5k
@정민박-e5k Ай бұрын
여기 한국인데 하나임교회의 말씀만나기교재를 구입할수 있을카요?
@みな-h3n
@みな-h3n Ай бұрын
일본에서살아요 말씀만나기 교재는따로없답니다 전7년쯤된거같아요 하나임교회 말씀만나기함께한지..
@김해숙-j6t
@김해숙-j6t Ай бұрын
찬양을 깊이 감사하며 함께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안정하-d5s
@안정하-d5s Ай бұрын
이혁 화이팅!!
@정민박-e5k
@정민박-e5k 2 ай бұрын
참진리의 말씀 ㆍ 살고싶어요.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나님.구원빋고 싶어요
@정민박-e5k
@정민박-e5k 2 ай бұрын
목사님.말씀을 들으니 거짓을 살고 있어요.깨어지고 싶어요
@JINRI1611
@JINRI1611 3 ай бұрын
[죄와 죽음의 문제] 당신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까? 당신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기독교, 불교 등등), 아니면 뛰어난 재력이나 외모와 명예를 가지고 있던, 아니면 가난하고 못생긴 사람이던지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변개되지 않은 유일한 킹제임스성경(1611)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로마서 3:23] 당신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 요한일서 1:8] 한 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모든 인간은 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실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으니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모두가 탈선하여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이 자기 혀로는 속였으며 그들의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로마서 3:10~13] 모든 사람은 죄 때문에 결국에 몸이 죽습니다! 죄인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 로마서 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 히브리서 9:27]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 시 편 9:17] [그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4] 그럼 죄인에겐 아무 희망도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죄인이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구원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받을까요? 교회를 다녀서? 종교를 가지거나 종교 행위를 해서? 선행을 하고 평생 경찰서를 안 가면? 이제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 세수하는 것보다 쉬운, 구원받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라고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니라. 그리고 그들이 주의 말씀을 그와 그의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니라. 사도행전 16:30~32] 와우!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선행도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그저, 주 예수 그리스도(육신으로 오신 하나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뿐입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선물은 공짜로 노력과 행위 없이, 한 번 받으면 끝입니다! 선물을 다시 가져간다면 그건 선물이 아닙니다!) 지옥의 심판에서 면제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고 싶다면 아래 내용대로 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명백히 자랑할 게 하나 없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겠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저의 모든 죄가 제거된 사실을 믿겠습니다! 절 구원해 주십시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길 원합니다, 저의 인생을 인도해 주십시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 로마서 6:23]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8~9]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요한복음 1: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기 전에 경고합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거부하고, 자신의 의와 종교와 사람과 행위를 신뢰한다면 반드시 불못에서 영원히 울부짖을 것입니다! 당신이 교회를 수십 년 다녔든, 교회 건물이나 거짓 목사들에게 돈을 가져다 부었든, 천주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온갖 종교쟁이의 끝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인 불못입니다! (값없는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자의 최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 예수님이 약 2000년 전에 볼품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기독교란 종교를 만드려고 오신 게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의 노예로 살고 있는 당신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 히브리서 2:14~15]🎉
@옥잠-f8s
@옥잠-f8s 4 ай бұрын
듣는 데 불편하고 거북하고 찔려서 어려운데 계속 듣고 있네요~
@sujung8066
@sujung8066 5 ай бұрын
너무나 정확한 말씀 !!!
@unsukjones9316
@unsukjones9316 5 ай бұрын
역시..목사님께서는 목사님 답습니다!강건 하시고 늘~~승리 하세요!
@ronniejung5368
@ronniejung5368 5 ай бұрын
목사님 말씀 그리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습니다 역시 이학권목사님 멋 있어요 👍
@하미-z1s
@하미-z1s 5 ай бұрын
삶은 도전이다
@하미-z1s
@하미-z1s 5 ай бұрын
좋아요 댓글이 일등이네용 🎉 잘 듣고 있어요
@carrieJ-v1z
@carrieJ-v1z 6 ай бұрын
아멘
@이숙용-x9q
@이숙용-x9q 7 ай бұрын
아멘입니다
@byungranghwang4734
@byungranghwang4734 8 ай бұрын
구원 1+1=1 Make heart pure
@한성영-g3n
@한성영-g3n 8 ай бұрын
율법으론 구원받을수 없지요 그러나 은혜안에선 그나라를 가진자는 유법의 모양을 자라게하니 믿음으로 주께드러간자는 그나라가 있는자는 율법 이땅도 더하여 준다합니다
@산골김목사
@산골김목사 9 ай бұрын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
@옥잠-f8s
@옥잠-f8s 11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어제와 오늘 제 자신을 너무나 잘 표현 해 주셔서 들으면서 박수를 쳐 가며 듣고 있답니다 특히 오늘 종교인 부분은 참 놀라워요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죠
@옥잠-f8s
@옥잠-f8s 11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잘 듣고 있습니다 성경 읽을 때 가나다라 읽기가 뭐예요? 몇 십년 동안 글씨만 읽었어요 도와 주세요
@hyeonnanoh4743
@hyeonnanoh4743 Жыл бұрын
안녕하세요 이 말씀 설교영상 전체를 듣고 싶은데 ..무슨 제목으로 찿을수 있나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브라질에서 살고 있어요
@hanaimchurch
@hanaimchurch Жыл бұрын
아래 링크된 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kzbin.info/www/bejne/Z3KzZ62aa7yCoKs
@sujung8066
@sujung8066 Жыл бұрын
삶에서 이것을 생생히 실감합니다 - 감사합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35 요리사들. kzbin.info/www/bejne/eJqsinaNeq18hsU 이학권 cafe.daum.net/rnjstlgur/9oZC/450 권시혁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가장 순수하고 온전한 인격이에요. 온전하다는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complete 그러니까 갈등이 부재한 것이지요. 자, 그러므로 말씀을 만나고 사귀면 순수 관계가 깊어져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순수한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에요. 깊어질수록 인간 게임과 파워 게임에서 순수해져요. 거짓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어린아이같이”라고 표현했는데 종교에는 없는 것이에요. 왜요? 설교가 주범입니다. 설교는 성경에 없는 것이에요. 설교는 같은 사람이 같은 회중에게 정기적으로 행하는 것을 설교라고 합니다. 이것은 BC 5세기에 헬라 소피스트 전통에서 나온 것이에요. 가운을 입고 같은 회중에게 정기적으로 연설했습니다. 목적은 성공과 인기예요. 인기가 있으면 돈 많이 받고 더 큰 도시로 픽업되고 그랬거든요. 성경에는 예언입니다. 설교가 아니에요. 예언자라는 말의 대표적인 말이 나비인데 그게 대언자.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이 설교에는 말씀 전달은 없고 요리사들만 가득합니다. 양념을 멋대로 갖다 붙이고 온갖 갖다 붙이기를 해서 이게 무슨 요리인지 재료는 알 수도 없는 게 허다합니다. 이게 이사야 말씀인지, 마태복음 말씀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해요. 목적은 파워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설교를 잘해서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한 것이 목적이에요. 그래서 설교의 홍수는 났는데 말씀 자체를 만나는 성도는 참으로 희귀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수록 어린아이같이 순수해지는 사람은 드물고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사나워져서 우리가 맞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적대의식, 정죄가 높아지는 이러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33 주권: 위하여. kzbin.info/www/bejne/fWqYXql_qstkrtE 이학권 cafe.daum.net/rnjstlgur/9oZC/448 권시혁 성경 해석의 이슈가 주권의 문제다 그랬지요? 그러므로 성경을 내 주권으로. 다시 말해서 내 머리로 나를 위하여 내가 이해하면 그 하나님은 결국 나의 수호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수호신화 시킨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십계명을 보면 제1계명이 No other God. 다른 신을 두지 마라. 3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값없이 부르지 말아라. 4계명이 안식일 마음대로 지키지 말아라. 하는 것인데 이 중심이 2계명에 있어요. 2계명의 시작이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것이 2계명이거든요. 그러니까 나를 위한 신이 우상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내 주권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에요. 창조주 하나님은 선과 의와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그 창조하신 것을 선과 의와 사랑으로 섭리하시고, 그래서 선과 의와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때 나를 사랑하셔서 내 삶에 잘못되고 잘 되고, 모든 것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영원히 하나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돼요. 이때 사랑은 징계가 들어 있어요. 히브리서 12:7절에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아요. 자녀가 아니다 하시는 것처럼. 그래서 징계가 올 때도, 어려움이 올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돼요. 앞에서는 “나를 위하여” 였지요. 그래서 모리아 산에 이삭이 제사로 드려지고,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순종이 드려지는 것이에요. 아주 선하고 신실하고 자유로운 왕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그 왕,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여서 닮고 싶고 따르고 싶었습니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따랐지만, 그렇게 해야 유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것이 신앙이냐? 우상숭배냐를 가르는 것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32 종교와 삶 (773) 7-11-23 종교와 삶 : Aware-통찰 - 732 - KZbin 이학권 권시혁목사 | 732 종교와 삶 - Daum 카페 권시혁 성경은 본질계, 보이지 않는 생명 세계를 계시하는 것이라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선악으로 되어 있는 현상계를 넘어선 깊이의 세계, 입체의 세계를 계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악으로 되어 있는 현상 세계는 나 중심으로 선악을 구분하니까 주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내가 중심이란 말은 관계가 없다는 말이에요. 왜? 파워게임 뿐이에요. 나도 내가 중심이며, 너도 너가 중심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이기는 자가 중심이에요. 그러니까 온 세상은 파워 게임밖에 없어요.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6장에서 18장까지가 이 세상에 환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시작에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그러니까 세상이 환난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안식과 주권이 회복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는 데에 핵심. Key는 주권 문제예요. 성경을 안다 그럴 때는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야다를 말하는 것인데요. 성경을 알 때 내 중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알아야 돼요. 나 중심적으로 아는 것을 이해라고 합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말은 주권이 나에게 있어요. 내가 내 머리로 해석해요. 그러니까 나에게 맞게 해석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해서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해 대상이 아니고 들음의 대상이에요. 들음이라고 할 때는 가슴에 울리는 거예요. 가슴은 내 맘대로 할 수 없어요. 슬픈데 기쁘다 할 수 없고 기쁜데 슬프다 이럴 수도 없어요. 그러므로 가슴에 울릴 때 말씀에 붙들림 받아 가슴에 어울림이 말씀과 내 가슴에 어울림이 일어나면 그것은 반드시 삶으로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해가 아니라 들음의 대상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31 선악을 넘어 kzbin.info/www/bejne/iIHEg4Kfnsd3fdU 이학권 권시혁목사 | 731 선악을 넘어 - Daum 카페 권시혁 이번 주부터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영계 또는 본질계를 계시합니다. 영계는 너무 오염이 많이 되어서 본질계라는 의미가 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는 보이는 형태의 세계예요. 본질계는 그 형태 속에 안 보이는 생명 세계예요. 자! 이 꽃은 보이시지요. 형태입니다. 현상이지요. 그러나 이 꽃 속에는 보이지 않는 꽃의 생명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는 평면의 세계요. 보이기가 전부니까 보이기입니다. 깊이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 중심에서 우리의 삶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심지어 교육까지도 다 보이기예요. 한국은 지금 사교육 없애겠다고 난리인데 사람들이 안 보면 사교육은 저절로 없어져요. 이 사람이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 그런 겉에 것, 보지 않고 이 사람 존재의 존귀함. 생명의 귀함을 봐주면 사교육은 단번에 없어지지요. 이 말씀의 기능적 중심은 본질계를 계시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고 그러면 선악을 넘어서도록, 이 선악과의 세계는 평면의 세계예요. 잘했다. 못했다는 평면에서만 가능해요. 잘못했다는 것에서 깊이 들어가면 그것이 오히려 잘 되는 일일 수도 있고 또 반대일 수도 있고 그래요. 그래서 선악계는 평면의 세계이기 때문에 나 중심으로 조작된 세계예요. 그러니까 어느 것이 좋으냐는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이 나쁜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 중심적으로 조작되었다는 말은 거짓에 세계라는 말이에요. 선악은 현상 세계의 필수입니다. 현상이 있기 위해서 선악이 있어야 되는데 목표는 그 현상 자체가 아니라, 현상이, 본질에서 피어나는 현상이 목표예요. 다시 말해서 본질과 현상이 하나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선악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 된 현상. 이것을 하나님의 세계,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며, 그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30 행복. (731) 7-7-23 행복 : Aware-통찰 - 730 - KZbin 이학권 권시혁목사 | 730 행복. - Daum 카페 권시혁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가슴이지요. 그러니까 선과 의와 사랑뿐이에요. 하나님은 악과 저주가 없으세요.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악과 저주가 없어요. 고린도전서가 말하지요. 고전13:5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하나님 사랑이시지요. 우리를 보실 때는 선과 의와 사랑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깨끗함에 감동되게 되어 있어요. 더러운데 감동되는 사람은 없겠지요. 감동된다는 것은 주파수가 같은 주파수로 동조된다. 어울린다. 그런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동될 때, 하나님의 주파수에 우리의 주파수가 감동되는 것이에요. 그 사랑에 내 생명이 연합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에 사랑은 깨끗함이지요. 다른 동기가 없어요.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 다른 아무 동기 없이 오직 사랑일 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존재 중심에 울리게 되어 있어요. 우리 존재의 중심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그 하나님의 형상에 울릴 때 그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가슴이 열리고 피어나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 그럴 때 머리가 아닙니다. 머리는 필요해요. 머리가 하는 일은 전부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하는 계산하고, 보호하고, 지키고 이런 것을 하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필요한 일이고 꼭 해야 되지만, 머리로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어요. 머리로 사는 부부가 행복할 수 없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가슴일 때 행복합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사회는 하나인 사회예요. 자식은 가슴으로 생각하지, 머리로 계산하지 않지요. 그러므로 내가 가슴일 때 존재의 만족감이 피어나는데 이걸 행복이라고 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전15:10 I am who I am by the grace of God.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나 되었다 할 때 이것은 가슴의 고백이지요. 이건 행복한 고백을 얘기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 됨이 피어나고, 이것은 하나님의 가슴과 동조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이 하나님의 울림에 하나 될 때 우주 만물에 주파수와 또한 동조되는 것이에요. 그때 비로소 우주와 하나 되고, 우주 전체를 유업으로 누리는 하나님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29 합력선 (729) 7-6-23 합력선 : Aware-통찰 - 729 - KZbin 이학권 권시혁목사 | 729 합력선 - Daum 카페 권시혁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에게는 혼돈이에요.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는 무한하니까 우리에게 이해가 다 안 되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미완성이거든요.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에게 혼돈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혼돈으로 보이는 세계 속에 사는데 그 삶은 예상하고 계획하고 통제해서 사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예상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을 마귀는 선악과로 속였어요. 이 혼돈 속에서 나 중심으로 선과 악을 규명하여서 나 중심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에요. 이게 대표적인 사람이 가인이에요. 가인은 피하고 유리하고 성 쌓기 했거든요. 그러니까 나 중심으로 진실은 피하고 그다음에 유리하고는 실제를 그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요리조리 내 마음에 들게 만나고 이해하고, 그다음에는 뭐 하는 거예요? 성 쌓는 거예요. 내 세계를 세우는 거예요. 내 세계가 얼마나 크겠어요? 좁쌀 세계를 세우는 만들고 그거 지키는데 평생을 보내는 것이에요. 그런데 십자가는 이 예상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함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리아가 눅1:38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마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계획하고 통제하지만, 내 뜻대로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하는 것이지요. 요렇게 하려면 두 가지가 믿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1) 하나님의 창조는 선과 의와 사랑의 창조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선과 의와 사랑으로 나를 창조하셨다. 2)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과 의와 사랑을 이룬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해요. 상황이 전부면 절대로 믿을 수 없어요. 상황의 평면 밑에, 섭리에 입체성을 볼 때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여호와 이래래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갈 때 반대쪽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숫 양이, 뿔이 큰 숫양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어야 해요. 그 입체성을 보는 자만이 여호와 이래를 누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황진아-j9p
@황진아-j9p Жыл бұрын
아멘아멘
@엄마사랑이-y6l
@엄마사랑이-y6l Жыл бұрын
주님울 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28 새로워짐. (716) 7-5-23 새로워짐 : Aware-통찰 - 728 - KZbin이학권 권시혁목사 | 728 새로워짐. - Daum 카페권시혁 십자가를 만나면 자유해집니다. 많은 것에서 자유해지지만, 무엇보다 인간 게임에서 자유해져요. 이간 게임은 뭐로 되어 있느냐? 비교로 되어 있어요. 네가 잘 났느냐? 내가 잘 났느냐? 비교 의식에서 자유해져요. 그런데 비교 의식에 숨은 동기가 뭐냐 그러면 이기고 또 이기려 하더라. 요한 계시록은 6장부터 세상의 역사, 환난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그 시작이 이기고 또 이기려 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에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도 서로에게 이기려고 해요. 부모 자식 간에도 이기려고 해요. 그래서 십자가는 성밖에 세워졌습니다. 마27:31절에 보면 십자가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히11:13절에는 우리도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요? 성안은 인간 게임의 세계예요. 이 세계에는 십자가 가지고 왜곡시켜요. 십자가 가지고 종교 만들어요. 인간 게임의 세계에는 평면 세계거든요. 그러니까 깊이와 진실은 감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게임의 삶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셨어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평면 세계니까 보이기만 잘 보이면 돼요. 거짓이어도 상관없고, 사실은 모든 것이 거짓이지요. 보이기라는 자체가 거짓이지요. 있는 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기를 만드니까 거짓이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만나는 사람은 성 바깥에서 만나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성 바깥에서 비로소 인간 게임의 나가 아니고, 나의 나, 진실을 만나게 돼요. 나의 나는 뭐요? 거짓밖에 없지요. 그래서 나의 거짓을 만나는 자리가 성밖에 십자가요. 그런데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은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 밖 십자가에서 나의 진실, 내가 거짓임을 만날 때 깨어짐으로 하나님의 새 생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26 헛되지 않다. (695) 7-3-23 헛되지 않다 : Aware-통찰 - 726 - KZbin이학권 권시혁목사 | 726 헛되지 않다. - Daum 카페 권시혁 우리의 삶은 상황에 re-act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존 survival이라고 하지요. 삶의 반사뿐이니까 주체성은 상실되었어요. 진정으로 내가 선택하고 사는 삶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삶을 열심히 살고도 허무해집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나의 삶. 나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종신토록 수고하지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거둔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허무에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한다. 허공을 치는 주먹질을 하고 향방 없는 달리기를 한다. 이런 표현들을 쓰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의 초월성을 확증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모든 죄를 지었어도, 또는 모든 죄로 정죄되었어도, 또 거짓과 왜곡으로 내가 억울하게 당했어도, 또 악이 모든 악으로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내 존재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내 존재, 내 생명을 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보여준 것은 죽음까지도 상황일 뿐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그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셨지요.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 존재와 이 생명의 무한하며 영원함을 증거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현상에서는 죽음이 끝이지만, 영원한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에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관문이에요. 새로운 과정이 열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부활장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only in 현상)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상에서만, 그러나 진정한 존재의 세계는 아니지요. 그래서 부활의 세계에서는 허무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래서 부활장 마지막이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지 말고 항상 주의 일(생명 피움)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제 생명을 사는 사람은 더 이상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를 피우는 것입니다.
@kyopark3824
@kyopark3824 Жыл бұрын
귀한 찬양 감사드려요 .. !! 😊😊😊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724 일상 누림. (650) 6-29-23 일상 누림 : Aware-통찰 - 724 - KZbin 이학권 권시혁목사 | 724 일상 누림. - Daum 카페 권시혁 십자가 신앙의 중심은 존재 무한 영원이 확정되는 거요. 이 존재, 다시 말해서 내 하나님 형상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니까 무한 영원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내가 현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의 상황은? 억만 상황의 그걸 다 합쳐도 존재 무한의 영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상황은 일시적이지요. 왕이 스승에게 “내게 진리를 한 마디로 가르쳐 주세요.” 그러니까 스승이 “This shall pass too” 그랬습니다. 이것도 지나갑니다. 맞았습니다. 모든 상황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일상의 모든 상황에서 실제를 누리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신앙이요.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상황 만들지 않습니다. 상황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상황에 본질을 보고 그 깊이를 누리는 것이지요. 롬1:2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물을 통해서,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에 사랑의 깊이를 점점 더 느끼고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 숨겨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사람은 생존의 어떤 사람도 이 사람을 종노릇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평면, 현상의 평면이 아니라, 일상 밑에 있는 그 깊이를 누리게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더 이상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생명 피어나는 기쁨을 누리는,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가면 내 뿌리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나 됨에 그 선과 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피어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최경호-v7h
@최경호-v7h Жыл бұрын
자주 뵙게되니 감사합니다!
@똑똑초이최서영
@똑똑초이최서영 Жыл бұрын
,,,
@blessingsong3372
@blessingsong3372 Жыл бұрын
👍영적으로 깨어있고, 현실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의 정체성🙏을 제시하는 말씀이네요
@유유-s5w3p
@유유-s5w3p Жыл бұрын
도둑정권에 나라가 왜 이럴까 하면서 세상의 바른해법 찾던중 태평TV와 김시환목사님 활동영상 을 시청중 김시환목사님 성경말씀 해설에 해답과 길이 있다고 귀 기우려오는 시청자 이지요 세월 위험속에 정의를 외치는 김시환목사님 해설은 모든 희망과 용기가 함께파어나지요 항상 기도와 함께 한밝방송 모든 관계 운영진분 들께 도 응원 드립니다
@코코-k1i
@코코-k1i Жыл бұрын
감사드립니다~🙏 🙏 🙏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63 사랑스러움-생수의 강. kzbin.info/www/bejne/oX_Fe4pnl6ppkJo 이학권 cafe.daum.net/rnjstlgur/9oZC/427 권시혁 우리 현대인은 우주와 이 세계에 많은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몰라요. 옛날 사람들보다 더 모릅니다. 더 모르는 이유는 우리는 나를 아는 것보다 나 만들기에 더 열심이 있어요. 우리는 신분사회로부터 성과사회로 옮겨왔어요. 신분사회는 왕이냐? 귀족이냐? 뭐 양반이냐? 상놈이냐?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한번 태어나면 태어난 그 자리에서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신분사회가 끝나고 성과사회로 옮기면서 성취를 통해서 나를 증명하는 거지요. 나, 이만큼 성취한 사람이야. 나, 이만큼 성공한 사람이야. 이런 성취에 미친 사회가 됐어요. 내가 뭘 성취하면 내가 뭐나 된 것으로 착각한 거지요. 내가 성취한 것은 성취한 것이에요. 나 됨과 상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 상관이 없어요. 우리 세상 사회 구조가 거짓되기 때문에 사실은 나 됨에 거짓과 속임수가 많을수록 성취를 잘 할 수 있는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취 지향적 삶에는 관계를 상실해 버렸어요. 관계는 진실로만 되잖아요. 거짓 관계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관계가 아니지요. 관계는 진실로만 되는데 우리는 100% 진실이 없으니까 뭘로 돼요? 중심의 진실로. 우리 자녀를 생각하면 아시지요. 우리 자녀를 100% 완전히 사랑하는 게 아니지요. 그렇지만 우리 중심은 분명한 사랑이지요. 그래서 관계를 상실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를 상실한 것이에요. 왜냐 그러면 존재라는 것은 보이는 게 아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뭘로 존재가 존재해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해요. 그런데 우리는 존재를 상실하고 레이블만 가지고 있어요. (레이블-브렌드 또는 상표) 레이블링, 내 꼬리표, 내 외모가 어떻다. 학력이 어떻다. 지위가 어떻다. 수입이 어떻다. 내 소유가 어떻다. 등등등등 이런 것들이지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레이블링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인데 역설이 있어요. 내가 평가하는 나는 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you can’t understnd what you judge 내가 이미 판단한 것은 이해할 수 없어요. 내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그렇게 판단해 버리면, 그 사람의 좋은 면은 있어도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you can’t know what you desire yo change 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 저러면 안 돼. 이래야 되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실제로 누구인지 보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 레이블링에서는 더 잘해야 돼. 앞으로 이렇게 해야 돼. 등등등이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알 수 없어요. 이것은 비극이에요. 왜냐 그러면 모든 존재는 사랑스럽기 때문이에요. 예, 그러니까 자식은 부모에게 다 사랑스럽잖아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사랑스럽잖아요. 부모는 뭐라고 해도 레이블링을 보는 게 아니라, 존재를 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래서 사랑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 안에 순전함이에요. 그래서 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랑스러움이 내게서 느껴지고 피어날 때 에너지에 화산으로 솟구쳐 오르는 거예요. 생수의 강이 솟아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잃어버린 현대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이 심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의한 병들이 그렇게 쌓여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회복할 시간입니다.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성구 수정 마13:3을 막13: 3로 수정합니다.
@윤진-d6t
@윤진-d6t Жыл бұрын
영상을멀잡아내보세요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52 전락된 삶. kzbin.info/www/bejne/o3KkY42LrcmSeLc 이학권 cafe.daum.net/rnjstlgur/9oZC/416 권시혁 이 세상에서 나는 억눌려 있고, 종교 안에서는 참 나, 나의 실체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종교 행위는 많지만, 성화도 성육도 Sanctification 센티피케이션도 incarnation 인카네이션도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종교의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나는 세 가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1. 가인의 후예 된 삶입니다. 가인은 뭐 했습니까? 피하고 유리하고 성 쌓기 했지요. 다시 말해서 self sufficiency 내가 나로 충분해야 됩니다. 담을 쌓고 나는 나를 지키는 것에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무저갱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 때까지 결핍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다 피하고 내가 성을 쌓아서 나를 지키는데 결핍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마귀의 속임수는 미래의 결핍까지 우리로 보게 합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습니다.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결핍까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현대의 삶은 전부가 무저갱에 빠진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도 결핍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앞으로도 있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좀 들어보십시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러니까 배운 것이지요.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왔든지 내가 거기에 처할 줄 앎을 배워가는 것이지, 내 속에 있는 불안 때문에 있는 허상의 결핍을 메우려고 살면 가인의 후예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2. 삶=문제 해결 그 결과로 삶은 문제 해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resolving the problem 이것은 저주입니다. 문제가 없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삶은 자체가 문제입니다. 문제가 끝나면 삶이 끝납니다. 삶은 문제 속에서 문제를 뚫고 걸어감으로 말미암아 나를 피워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어야 되니까 우리는 모두 에고의 미치광이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말은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약하다는 말입니다. 3. 관계=거래. 그래서 우리는 모두 척하면서 삽니다. 프리텐스 문제가 없는 것처럼. I am fine 이걸로 살아가는 거지요. 그 결과로 관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제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거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관계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calculation 계산밖에 없습니다. 관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지지요.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크고 작은 희생과 헌신속에서는 너는 내 안에, 나는 너의 안에 침투해 들어가면서 너와 내가 우리로 자라가는 것이 관계인데 희생과 헌신이 없으니 참 나도 없습니다. 참 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외롭지요. 그래서 우리가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로멘틱 러브입니다. 로멘틱 러브는 허상입니다. 그것은 욕망이고 호르몬에 불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 갈 수 없지요. 관계의 사랑은 나로 너가 피어나고, 너로 내가 피어나고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안에 있는 신비, 나의 신비를 스스로 알 수 없지요. 그러나 너로 말미암아 내 안에 신비가 일깨워지고 나로 말미암아 너 안에 신비가 일깨워지는 진정한 사랑은 상실해 버렸습니다.
@코코-k1i
@코코-k1i Жыл бұрын
감동적인 참 말씀~~감사드립니다,목사님^^ 중2때 찾아나선 참 목사님 이제 뵙네요.
@권시혁-u1x
@권시혁-u1x Жыл бұрын
18위선=외식. kzbin.info/www/bejne/d3aYo6R7l7OlndE 이학권 cafe.daum.net/rnjstlgur/9oZC/383 권시혁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핵심 문제를 위선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외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hypocrisy 이게 예수님께서만 사용하신 단어인데 복음서에 20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에 중심이 6장인데 그 6장의 시작을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의 의를 행치 말라.” 이렇게 시작해서 마감이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하면 인간 문제는 죄나 악이나 이기심이 아니고, 또 발전을 더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더 평화롭게 만들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의가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참 혁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참 성경입니다. 사실은, 창세기 2장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은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심히 좋았습니다. 왜요? 창2:25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은 조건이 없는 것이지요. 그지요? 이 세상에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아니하였으니 존재 자체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뭐예요? 서로가 뭐예요. 창2:23절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보았습니다. 무슨 말이지요. 너, 남인데 나보다 소중하게 보이는 거지요. 우리가 자녀를 이렇게 보지요? 이건 굉장히 역설적인데요. 이 사랑은 부족함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완벽하려고 해요. 그런데 완벽하면 사랑할 거리도 없고 사랑받을 필요도 없지요. 부족하기 때문에 나에게 너의 존재 자리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또 너가 부족하기 때문에 너에게 나의 존재 자리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이 그렇지요. 자녀 낳아놓으면 연약하고 부족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스럽지요. 왜냐 그러면 그 연약함 때문에 부모의 자리가 그곳에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위선이 문제라고 할 때 위선은 윤리적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적입니다. 존재적이란 말은 내가 부족하면 그만이에요. 피조물은 다 부족하게 되어 있으니까 부족한 게 당연한 거지요. 그런데 그 부족함을 허용하지 못하고 창세기 3장에서 마귀에게 속으면서부터 완벽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래서 나뭇잎 치마를 만들기 시작하는 거지요. 이것이, 마귀의 거짓에 속은 것이 우리의 존재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중심 문제는 내가 나일 수 없는 것에서 출발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이라면 우리는 서로 허용되고 평화롭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거짓에 속아서 내가 나일 수 없는 것이 영원한 저주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에서 시작 부분에서 뭐라고 합니까? by the grace of God. I am who I am.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나 됨을 회복 받았다. 나는 나 됨으로 족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코코-k1i
@코코-k1i Жыл бұрын
하나.임 채널 응원합니다. 제 신앙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최경호-v7h
@최경호-v7h Жыл бұрын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하나님의 섭리로 살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서열-o2n
@윤서열-o2n Жыл бұрын
겉사람.속에.나.이십대나.보고.무식한자가.오립니다.속사람.천국가요.천국은.노인이.없어요.다이십대.속에.머리를덜고.있는모섭보고.올립니다.화장할때.나옵니다.속사람 보았어요.이십대속사람.속에서숨쉬고.코도곱니다.가끔.목사님.이사람곧가리라.개명성.
@약초-g6t
@약초-g6t Жыл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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