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에 철갑 거북선 완성 되었다 위에는 돛을 달고 거북 등껍질 닮은 철판와 송곳 조종한 방 머리에 용 도깨비 달고 중앙에 화포와 대포를 쏘는 방 밑에 거북 지느러미 모형와 노를 젖고 닻을 달아 조종한 방 여기서 나무로 만들었다 그래서 남해안 지역에서 지켜 일본군이 처리하는 거북선 이라고 부른다
@user-pb6ll3rn8y14 күн бұрын
근데 고려의 고종은 23대 왕 인데 26대 왕 이에요 조선의 고종과 헬갈로 나요
@user-sf4ku3bd1r14 күн бұрын
주제를 넘어서면. 이렇게되는것이지
@leejeonghanlee785615 күн бұрын
🎉
@user-oz1cr5yn9n16 күн бұрын
을지문덕만세
@user-oz1cr5yn9n16 күн бұрын
흥선대원군😊❤팬하자
@CP1-speed18 күн бұрын
류관순 열사님 영어 명칭 Miss (x) Martyr (o)
@user-td9hi7jg6w18 күн бұрын
양자역학 아인슈타인이랑 비슷하냐
@user-pd9tb9ki8n18 күн бұрын
사랑해요 ❤
@user-mj6uq6zy6p18 күн бұрын
오프닝 왜 피치 떨어짐?
@Lee-oc4gy18 күн бұрын
힘들겠다
@seok72042919 күн бұрын
어린이들을 위한 역사관련 유튜브 인가본데요 실록에 기초해서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기에 덧붙이고자 합니다 1.당파싸움이 심해서 전쟁준비를 소홀히 한거라 하시는데,당파논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는 정치현상 입니다 당시 토요토미의 국서에서도 중국을 치러간다고 했으니 당연히 조선에서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왜구들처럼 노략질 위주로 침략할꺼라 예상하고 평시보다 2배 많은 수군들과 함선을 각 수영에 준비 시켰습니다 이순신만 준비한게 아닙니다 경상좌수,경상우수,전라좌수,전라우수,충청경기 이렇게 각 수영별로 판옥선25척씩 그리고 기타함선 40~50척씩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표준설계도 대로 판옥선을 제작햇으며 탑승인원도 조정에서 할당해주었기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만 전쟁을 잘 준비했다는건 억측입니다 2.임진왜란이 끝날때까지 일본은 이순신이란 장수를 몰랐습니다 전쟁후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서 히트를 치면서 그제서야 그런 장수가 있었는지 알게됐죠 전쟁당시엔 권율과 김시민 정도 알았던걸로 보여집니다 3.이순신이 개량했다는 거북선은 태종때부터 귀선 이라고 제작되어 온 함선입니다 판옥선의 탑승인원 125명보다 많았다하고 천장을 목재로 덮어서 거기에 칼과 못들을 박아놓은 형태라 합니다 거북선 설계도는 전해지지 않는데 사방으로 화포를 쏘면서 적진 중앙에서 전투하는 배였습니다 전쟁초기엔 효과적이었지만 이후 일본의 배가 커지면서 거북선의 효용이 떨어져서 더이상 만들지말라고 조정에서 명합니다 일본측 기록에는 거북선을 장님배 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산도에서 전투한 일본 배는 안택선이 아니라 세키부네 입니다 4.이순신이 학익진을 써서 대승했다고 하시는데, 실록에는 많은 장수들이 예전부터 학익진을 쓴걸로 나옵니다 그리고 한산도 지형은 이순신이 그렇게 잘 알수가 없습니다 전라도의 이순신이 항상 경상도 바다로 나아갈땐 경상지역 만호를 향도(길잡이)삼아 진격했다고 나옵니다 그걸 무시하고 부산 가덕도 등지를 공격하다가 이순신의 배가 몇번이나 좌초된 적도 있죠 그래서 20번의 합동작전때 경상우수사 원균의 배가 선봉에서 전투를 하고 이순신의 함대는 뒤에서 화포를 쏘았다고 합니다 한산대첩 이후 남해를 순시했던 유성룡의 보고에서는, 우리의 판옥선이 크고 화포가 잇어서 크게 승리할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배에는 화포도 거의 없었고 배또한 작고 약해서 전투에는 불리했죠 5.일본의 조총은 공성전 같은 대단위 밀집전투 에서는 효과가 있었으나 사거리가 50m에 불과했고 바람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장전이 힘들었습니다 반면 조선의 활은 사거리가 150m가 넘었고 여러종류의 화포도 있어서 전쟁후반엔 많은 효과를 보앗습니다 그래서 점차 전투에서 불리해진 일본은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방어에 들어간 겁니다 6.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택한거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른겁니다 전국각지에서 올라오는 수백,수천의 보고를 선조가 직접 받는게 아니라, 신하들이 먼저 토의하고 선조에서 권유해서 결정을 이끌어내는 시스템인거죠 예를들어 임진왜란 2년전에 왜군이 쳐들어올꺼 같으니 남해안에 유능한 장수들을 배치해야 한다고하여, 각 신하들에게 장수를 추천을 받은적이 있죠(불차채용) 그때 30명의 장수들이 발탁되는데 그중 한명이 이순신 이었죠 현감에 불과하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앉히기 위해 사간원의 반대를 무릎쓰고 선조가 연속승진을 시켜서 결국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합니다 그게 임진왜란 발발 1년전 일이죠 7.사람들이 그동안 조선은 태평했고 일본은 전국통일 해서 전투력이 높았다라고 생각하는데 조선의 무과 출신들은 대부분 초임때 북쪽에 파견되어 여진족과 전투를 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도 일본뿐만 아니라 여진족과도 싸우고 있었죠 그러니 항복한 항왜 수천명을 북쪽에 파견해서 여진족과 싸우게 한거죠 8.선조 때는 정철,이이,이항복,이덕형,유성룡,권율 같은 뛰어난 신하들이 많은 시기입니다 멍청한 임금밑에 뛰어난 신하들이 있을수도 없으며 그런 뛰어난 신하들을 조율할줄 아는것또한 임금의 능력인 겁니다 그리고 전쟁중에 당파싸움을 하는 미련한 신하들은 없습니다 당장 이스라엘만 봐도 예비군들이 파업하고 정국불안이 심각했는데도 하마스의 테러가 발생하자 온국민이 똘똘 뭉치자나요 9.선조가 피신가자 백성들이 한양을 불태웠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는 항왜도 많았지만 순왜도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조선군이 성을 공격해보니 우리에게 활을 쏘는 절반이 조선백성 이더라 라는 기록도 잇을까요 또한 전쟁중이라 의병을 가장한 도적떼들도 많았습니다 원래 전쟁이나 폭동이 나면 그걸 이용해먹는 나쁜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인거죠;; 10.이순신이 준비 잘해서 일본수군을 막은거다? 이순신이 원균의 수십차례 구원요청을 받은후 거제도에서 원균을 만난게 임진왜란 발생 20일째 입니다 그땐 한양도 적에게 넘어갔을때죠 그동안 이순신은 뭘했을까요? 일단 전라좌수영 각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배들을 집결시킵니다 그배를 운행하기 위해선 격군들이 필요하겠죠 마을에 흩어져잇는 격군들을 호출하고 배에다 장비를 싣는거죠 그렇게 모든 배를 다 모으는데 1주일이 걸렸던거죠 그러면 그때라도 바로 부산으로 달려가면 될텐데, 이순신은 왕명이 있기전엔 관할지를 벗어날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답답한 정운 같은 부장들이 이순신을 베려고까지 하죠;; 그동안 경상우수사 원균은 거제현령과 더불어 수시로 침입하는 왜군들을 4척의 판옥선과 10여척의 협선으로 막고있었던 거죠
@kshhdeh719 күн бұрын
Qㅕㅇ신
@MrJoongwook20 күн бұрын
아직도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잡아야 합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를 반대했을 뿐입니다! 반대한 무리가 한글창제를 했다? 논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사료에는 분명히 (!) "세종 어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친제입니다!!! 친제!!!!!! 왕이 직접 만든 작품이란 말입니다!!!!! 세계 유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