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회 무삭제 확장판] 하늘길을 통해 전쟁터로 향하다🪂, 공정부대 2부 ㅣ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 YT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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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Пікірлер: 114
@류고12
@류고12 Жыл бұрын
임용한 교수님 사랑합니다
@아..대한미인국추모성
@아..대한미인국추모성 Жыл бұрын
오래 사세요ㅋㅋ 이분 때문에 토전사 할때 많이 배우게 돼었음요 역사를 보는 관점
@Dr.Strange.K
@Dr.Strange.K Жыл бұрын
42:51 민채님 넘 귀여우심~
@gamevideochannel1550
@gamevideochannel1550 Жыл бұрын
오늘도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높은구름-b8w
@높은구름-b8w Жыл бұрын
감사드립니다.
@myoungkim1680
@myoungkim1680 Жыл бұрын
폴란드 공정대가 최대 피해자죠. 처음부터 작전이 무리임을 주장하고, 죽을걸 알면서도 영국군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어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몽고메리가 모든 작전실패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지휘관은 경질되고.
@대한민국만세-s6e
@대한민국만세-s6e Жыл бұрын
어쩔수 없는 계급사회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죠. 하지만 인재라면... 진정한 장교라면 옷벗어도 할말은 해야조. 후일 그런사람을 등용하는개 맞는데.. 정치는 그렇지 않다. 는게 함정
@은하수푸른하늘-v3g
@은하수푸른하늘-v3g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는 진짜 무능한 장군이었는데, 평가가 좋은게 어이가 없는 사람.
@myoungkim1680
@myoungkim1680 Жыл бұрын
@@대한민국만세-s6e 계급도 계급이지만 나라 없는 설움이 크죠.
@streakk.4700
@streakk.4700 Жыл бұрын
너무 훌륭한 강의입니다 !!!
@아..대한미인국추모성
@아..대한미인국추모성 Жыл бұрын
끝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두 박사님 연구원님 말씀을 들으니
@쁘O
@쁘O Жыл бұрын
잘보겠습니다.
@귀요미-y1k
@귀요미-y1k Жыл бұрын
임박사님 스웨터 예쁘다 ㅋㅋ
@아..대한미인국추모성
@아..대한미인국추모성 Жыл бұрын
임용한 박시님 하고 방종관 연구원님 보면 옛날 전쟁에서 책사를 보는것 같다
@naya0768
@naya0768 Жыл бұрын
임용한교수님 공정의 대명사라고 생각합니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free and open way of life💜
@eliyahaverial
@eliyahaverial Жыл бұрын
재밌따!
@아린플레이저
@아린플레이저 Жыл бұрын
정치장군 몽고메리 롬멜이긴것도 롬멜상황이 너무 않좋아서 이긴것뿐 동일한 상황에서 붙으면 백프로졋을듯
@쁍삡
@쁍삡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가 똥별인건 맞지만 침착맨의 한마디가 생각나네요 "나도하기싫어! 근데 누군가는 해야하잖아~"
@marksmithcollins
@marksmithcollins Жыл бұрын
전쟁중에는 승리도 하고 패배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에 회고록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은 영영 무마할 수 없다
@j.svaraba9193
@j.svaraba9193 Жыл бұрын
믿고보는 전쟁사 역사 삼국지 임용한 박사님 허준님 샤를님 윤아나님 토전사 그립습니다! ^^
@승이당-u9j
@승이당-u9j Жыл бұрын
저래서 몽고메리가 후대에 절라 까이는거...내로남불도 저런 내로남불이없음.......
@냥냥이-v8v
@냥냥이-v8v Жыл бұрын
마켓가든의 실패원인 : 아몰랑 내가 생각한 부대만 있고 내가 생각한 계획대로 움직일꺼야 그리고 현실은 ......
@귀여운피노코-g5e
@귀여운피노코-g5e 11 ай бұрын
몽고메리는 연합군의적이엇네 저렇게 말아먹어도 해임안된고 훈장까지 받앗다니
@donghyunlee9411
@donghyunlee9411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가 폴란드 지휘관에게 한 짓을 보면, 진 짜 ㅆㄹㄱ네요~
@다좋아이거저거
@다좋아이거저거 Жыл бұрын
실패와 포기는 다른 거죠. 공정부대를 이용한 작전이 실패했다고 해서 공정부대 자체를 포기하면 안되겠지요. 왜 실패했는지 왜 장점을 살리지 못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해피엔딩-x1o
@해피엔딩-x1o Жыл бұрын
이 정도면 공수 부대 포기해야 되는거 같은데요. 아까운 유능한 병사들을 왜 저런식으로 사지로 몰아요...원시인들하고 싸울때나 통할듯...막말로 중세 기마병들이 낙하산 내려오는거 보고 달려가서 싸워도 섬멸할수도 있을듯...이거는 그냥 상대가 준비 안되어 있는 오합지졸 일때나 먹히는건데...오합지졸하고 싸우는데 굳이 공수 부대가 뭐하러 가요. 퍼포먼스 하러?
@klausfeuermann3825
@klausfeuermann3825 Жыл бұрын
원래...군사적 무능은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그 스탈린도 주코프에게만은 영광을 양보했을까...처칠? 처칠을 자꾸 일반 시민 출신으로 포장하는 것만 봐도, 그가 군사적 능력이 없는 인간임에도 군관련 업무의 장관을 시킨 것에 대한 위장작업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1차대전 당시 제1해군경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집안이 당시 독일계 영국왕족들과 달리, 영국계 스펜서 가문 중애서도 서열이 높은 '말버러 공작'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세습귀족 출신이 정치적 판단은 타고날 수도 있지만, 군사적 재능은 다른 문제다. ...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복무 면제가 된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가지 의미로.
@권오영-q3m
@권오영-q3m Жыл бұрын
영화(멀고먼 다리)에서 소사보프스키-진 해크만
@whysoserious7058
@whysoserious7058 Жыл бұрын
영화'머나먼 다리'의 배경이 된 작전이고 아른헴 다리에서 영국군을 돕던 레지스탕스 소녀는 훗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배우가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오드리 햅번' 입니다.
@아..대한미인국추모성
@아..대한미인국추모성 Жыл бұрын
아..
@digduck9463
@digduck9463 Жыл бұрын
크 오두리햅번 은 처음알았네요
@권오영-q3m
@권오영-q3m Жыл бұрын
헵번에대한 상상력이 동원된 뇌피셜입니다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9 ай бұрын
마켓 가든 작전에서 영국이 실패한 이유가 저는 저 지역 독일군 지휘관이 발터 모델이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현대전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방어지휘관이 바로 모델이니....... 아직도 모델의 가장 뛰어난 전공으로 알려진 르제프 전투는 러시아에서 아직까지 기밀로 취급하니까 말입니다.
@Jjomjjom
@Jjomjjom Жыл бұрын
밴드 오브 브라더스 재시청 마렵넹ㅋㅋㅋ
@승이당-u9j
@승이당-u9j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가..영국의 대표적인 정치적 똥별이죠 .
@푸른미르-z6v
@푸른미르-z6v Жыл бұрын
임용한 교수님 맨투맨 브랜드가? 공구 추진 부탁이요
@javaxerjack
@javaxerjack Жыл бұрын
아프리카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침착하게 공격을 하던 몽고메리가 이렇게 무책임하고 조급한 행동을 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처칠 탓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미국에 쳐지기 싫다고 생각한 처칠이 조급하게 다그 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대한미인국추모성
@아..대한미인국추모성 Жыл бұрын
오.. .
@happyhour2133
@happyhour2133 Жыл бұрын
전투를 책임진 지휘관이라면 작전실패시 '절대' 다른누구를 탓할순 없음, 이순신장군 또한 비슷한 압박을 받았지만 명을거부하고 삭탈관직당했듯이 작전실패가 확실한정치인의 비군사적압박을 이겨낼수없었다면 차라리 사퇴했어야함.
@javaxerjack
@javaxerjack Жыл бұрын
@@happyhour2133 근데 동시에 영국인 특유의 자존심이 낙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죠.(양키들도 해내는데 대영 제국이 못하리?)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kzbin.info/www/bejne/pl6cqGWAathjrrc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약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거의 모든 판터 및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판터나 타이거는 거의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 등 피해나 전차전 때 궤도 손상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력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kzbin.info/www/bejne/aWXSg2V6ZqyJi5Y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crazyuncletv8408
@crazyuncletv8408 Жыл бұрын
임용한 교수님 제2신속대응사단이 징집병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할수 있는 지 궁금합니다 ㅎㅎ그리고 bob를 보면 정규군으로는 가장 먼저 들어가 제일 먼저 죽던데...이들이 안전하게 임무수행 할 방법이 없을까요? 노도부대 전역자가 올림
@오영권-u7k
@오영권-u7k Жыл бұрын
영화 멀고먼 다리(A bridge too far 1974) 참조 영화도 엄청 재미짐
@khd5031
@khd5031 Жыл бұрын
저 101사단이 밴드오브브라더스에 나오던 주인공들이 소속된 사단이었군요 아직도 남아있고 최정예라니 ㄷㄷ
@유툽으-c2d
@유툽으-c2d Жыл бұрын
한국군이 90년대 후반에 수년간 강습여단을 운영한 과거가 있는대 그 부대는 지금의 신속대응여단과는 성격이 다른 아마 북이 남침 할 시 역습하는 휴전선이남이 작전지역인 부대 옛던 듯 합니다. 그 부대나 지금의 신속대응사단이나 자체헬기는 둘째치고 한국군이 지원해줄 헬기가 충분할지 의심이 드는데 이는 한국 강습부대의 큰 아쉬움입니다.
@pillseung1804
@pillseung1804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 돌대갈 같이 생겼음 꿈깨 몽장군
@myoungkim1680
@myoungkim1680 Жыл бұрын
정보의 실패. 이미 독일군은 끝장났다고 믿었기에 공중정찰로 독일군 전차가 발견되도, “독일군은 끝장났어. 전차따위 없다!” 라고 우기고 밀어붙이다가 멸망한거죠. 임박사님이 항상 말씀하시듯 사람은 믿고싶은대로, 자기 수준에서 생각한다고.
@belleepoquela3271
@belleepoquela3271 Жыл бұрын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들은 2번 이상 실패한 창업자를 더 높이 평가한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으로 성공확률이 더 높기에.
@1004-RIDER
@1004-RIDER 5 ай бұрын
❤❤❤❤
@shkang8058
@shkang8058 Жыл бұрын
공정이랑 공수랑 원래 다른 개념이 아닌가? 내 동기가 cct였는데 그때도 정식명칭이 공정통제사였는데. 아 참고로 20년 전임. 공수는 수송기에서 뛰어 내려서 직접 전투하는 부대고 공정은 뛰어 내려서 임무 수행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 참고로 cct는 전투요원이 아니고 전투기 폭격 좌표 찍어주는 스타의 고스트 같은 역할임.
@추철구
@추철구 Жыл бұрын
공수는 소수정예 공정은 대규모 군사작전 강습부대는 적지종심 차단
@fierwalt
@fierwalt Жыл бұрын
영국군의 쓸데없는 자존심세우기였달까...
@moon_00k
@moon_00k Жыл бұрын
민채아나는 공주님 같아요 넘예쁨 목소리도👍
@oankiekim9128
@oankiekim9128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는 과대 포장된 평범한 장군일 뿐이다.
@TV-tq6go
@TV-tq6go Жыл бұрын
커레이~~~
@라면먹고자자
@라면먹고자자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 넘 치졸하내요
@wonhahm
@wonhahm 5 ай бұрын
영국의 식민지를 주도적으로 포기했다고 임용한교수가 제대로된 연구없이 틀린 주장을 하는군요.처칠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루즈벨트를 계속 설득했었답니다
@jcavalry4237
@jcavalry4237 4 ай бұрын
무능한 몽고메리 때문.
@derosa8810
@derosa8810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는 개쓰레인건 확실히 알았내
@남자탁용삼
@남자탁용삼 Жыл бұрын
공수보병과 공수특전단의 차이는 뭘까요 🤔?!
@추철구
@추철구 Жыл бұрын
공수특전은 소수정예로 가벼운 무장에 게릴라전과 비밀임무 수행이고 공수보병이란 말은 처음 듣는데 중무장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할때는 공정사단이 투입되는 차이 둘다 헬리본이나 낙하산 강화로 투입하는 점만 같음
@남자탁용삼
@남자탁용삼 Жыл бұрын
마켓가든작전 실패원인이 뭘까 🤔?!
@유성상-d1p
@유성상-d1p Жыл бұрын
2:00에 나오는 마지노선 그림이 틀렸습니다. 마지노선은 독일 국경까지만 있고 룩셈부르크,벨기에 국경에는 없었음
@유성상-d1p
@유성상-d1p Жыл бұрын
@@andrea4277 지크프리트선 말고 마지노선 그림도 있습니다.
@스타-g7h
@스타-g7h Жыл бұрын
마지노선은 스위스 바젤에서부터 룩셈부르크까지 강한 방어라인을 구축하다가 벨기에와의 국경에서는 약한 방어라인으로 구축되어있습니다 보시기 편하시게 이미지 보내드리니 참고해주세요 en.wikipedia.org/wiki/Maginot_Line#/media/File:Maginot_Line-en.svg
@남자탁용삼
@남자탁용삼 Жыл бұрын
미드 BOB 미육군 제101공수사단 이 부대가 공중강습사단으로 바뀌었구나
@paekman63
@paekman63 Жыл бұрын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에 가든 작전인 육상 공격 작전을 조오지 S 패튼이 지휘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생각해 봅니다.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kzbin.info/www/bejne/pl6cqGWAathjrrc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약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거의 모든 판터 및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판터나 타이거는 거의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 등 피해나 전차전 때 궤도 손상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력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kzbin.info/www/bejne/aWXSg2V6ZqyJi5Y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니지-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미국의 1차대전 대독 선전포고 1917년 4월경. 하지만 미국이 대규모 징집하고 훈련한 다음 본격 유럽에 지상군 투입한 것은 1918년 5월 부터. 독일의 항복이 1918년 11월임을 고려한다면, 미군의 1차대전 실전 경험은 몇 개월에 불과. 1차대전 참전한 롬멜-몽고메리 대비 패튼 실전 경험 무시해도 되는.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롬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라면 패튼은 비판의 칼날을 더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패튼은 아주 이색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맥아더의 명령을 받아 실행했던. -----------------------------------------> 대공황 당시 미 1차대전 참전 예비역들이 생활고에 처해, -----------------------------------------> 미 정부가 그 동안 지급을 미루었던 참전 보상금 지급을 요구하며 시위, -----------------------------------------> 당시 미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저 시위대를 공산주의 선동이라 여기고 패튼 중령?에게 해산 지시. -----------------------------------------> 패튼은 탱크까지 동원하며 시위 해산했으며 + 시위대와 가족들이 머물던 텐트도 불태우며 그 과정에서 부상자 발생.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사실상 전멸급 패배.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패튼에 대해 사실상 멍 때리며 방치한 이들, 특히 전문가들이 왜 롬멜에 대해선 그렇게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겠습니까?
@ohjookwon42
@ohjookwon42 Жыл бұрын
멍고메리가 왜 명장인지 많은 물량으로 겨우 럼멜 한테 이기고 삽질 졸라해서 수많은 군인 죽게 만든 인간인데
@digduck9463
@digduck9463 Жыл бұрын
머나먼 다리 보면 참 처절함
@푸르메-f4t
@푸르메-f4t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 별로네.
@kwangshin3128
@kwangshin3128 19 күн бұрын
무능한 2차대전 두장군 몽고메리 그리고 프랑스 샤를드골...
@sungminkim6309
@sungminkim6309 Жыл бұрын
몽고메리는 상대보다 10배 우세했을 때 실력을 발휘하는 장군! ㅎㅎㅎ
@조현규-q8p
@조현규-q8p Жыл бұрын
아 AI WAR 게임 개발할때 현직 군인들이 만드는게 아니라 현직 프로 게이머들과 함께 만들어야지요 현직 군인들은 각종 무기들의 활용 정보와 기능들을 잘 알려주고 인식시켜주고 하는 협조만 제데로 하면 게임왕국인 한국은 미국보다 이스라엘 보다 더 우수한 AI WAR 작전지도를 만들수 있지 않을까
@조현규-q8p
@조현규-q8p Жыл бұрын
최고 리더의 오판을 막기위해 AI WAR 작전을 빨리 도익해야 겠네요 무인정찰기의 항공사진 및 적 자산을 산정해서 워게임에 입력하면 ÀI분석에 의해 가장 적합한 공격방법 공격 진로등을 제시받아 객곽적인 증거를 삼아 최고 리더의 오판을 수정 보완할수 있게 말입니다 과학이 발달된 나라이기에 가능한 게임 개발을 꿈꿔 봅니다 구글 바둑게임을 보면 알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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