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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0일 “성균관을 조명한 날”최종수 성균관 관장의 특별 심층 인터뷰
성균관의 연원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을 설립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 68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고, 백제시대에는 374년에 고흥을 박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로 들어와 930년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고, 992년에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Seonggyungwan's origins begin when 太 was established in the second year of King Soorim of Goguryeo. There is a record that Gukhak was established in 682 during the Silla Dynasty, and Goheung was used as a doctor in 374 during the Baekje Dynasty. Entering the Goryeo Dynasty, a school was established in Seogyeong in 930, and Gukjagam was established in 992.
In the 24th year of King Chungryeol's reign (1298), Gukjagam, a national university in Goryeo, was the 均監 of Seonggyungam (監 of Korea)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제2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 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을 1924년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
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ㆍ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 향교를 중심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유교문화활성화 사업, 사
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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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목) 오늘은 멀리 신정에 사는 한학자 유덕선 선배를 만나고 왔다. 다름아닌 한시를 글씨로 남기기 위해 지난 1월 20일날 만들었던 한시를 멋들어지게 일필휘지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긴 탁자에다가 종이며 먹이며 글씨를 쓰기위해 사전 준비하는 작업도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글씨 쓰는데도 그 환경을 조성한다는게 매우 중요하다. 정신을 가담듬고 붓의 흐름을 고려하여 한자 한자 써야할 곳을 지정
하여 정성스럽게 반듯하게 써야하며 먹의 농도도 조절해야 하는 등 거기에다가, 멋진 한시를 하나 만들기 위해, 고민을 해야 한다. 유덕선 선배와 나는 한시를 놓고 서로 머리를 짜내고 짜내 하나의 작품을 만들려고 여러수
고 끝에 만들어진 이 결과물을 놓고 보면서 만족해 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 일이란 이런 것이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 뭔가 걸작품이 나온다는데 만족함이 생기는 것이니까! 유덕선 선배는 이런 힘든 일은 다시 한번 더 시키
지 말라며 내 눈을 쳐다본다. 나도 “전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앞으로 절대로 이런 부탁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는 오랜 세월 서예를 연구한 학자로, 또한 동양 철학자로 150여권의 동양
서적을 편찬한 권위있는 한학자인 분이시다. 이 분의 글을 성균관장실에 놓고 오는 발걸음이 여간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 한시가 전통과 현대를 잇는 성균관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기록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상
쾌한 기분으로 날 듯이 집으로 돌아 왔다. 다만, 성현의 성현(聖賢)이 평으로 성자(聖者)로 바꾸어야만 할텐데...하는 맘이 자꾸만 되뇌인다.)
그러니까 지난 2025. 1.20일 “성균관을 조명한 날”을 주제로 하여 새한일보의 시사탐방 최종수 성균관장을 인터뷰하였다. 그 날은 매우 특별한 의미 깊은 날이었다. 뭔가 처음한다는 의미가 신성하듯이 뭐든지 신성하게 다가
왔다. 특히 새한방송의 장한조 사장님과도 손발을 맞추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기 일에만 열중하였고, 점심도 잊은채 열심히 방송찍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도 그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전혀 그일에 대해 조금도 알지못한다. 그런덕에 아
무튼 오랜 친분을 맺어온 최종수 성균관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성균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하고, 전통 교육의 현대적 가치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새한일보 주필로서 ‘시사탐방’ 기획의 첫 번째 주제로 성균관을
다루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성균관의 역할과 비전을 국민들에게 더욱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성균관, 천 년의 학문을 이어오다
이른 아침 성균관에 도착하자, 조용한 뜰과 고풍스러운 기와지붕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학문의 중심이 되어 온 이곳에서,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현재 성균관에서
는 중요한 대성전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조선 태조 7년(1399년)에 건축된 성균관 문묘 대성전(보물 141호)을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으며,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공사는 유교의 상징인 문묘를
새롭게 정비하여,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미래 세대에게 더욱 의미있는 공간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특히, 성균관 문묘에 모셔진 39분의 위패를 비천당(丕闡堂)으로 옮겨서 스승님께 예를 표하도록 모셔 새롭게 정리된 공간으로
모실 예정이다. 이는 단순한 이전 작업이 아니라, 성현들의 가르침을 더욱 경건하게 모시기 위함이다. 그분들의 말씀을 경전을 통해 우리 생활에 적응할수 있도록 하고, 정치에도 적용할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써, 성균관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대한민국 유교 정신의 근본이자, 민족의 정신적 요람인 것이다. 즉, 성현의 가르침을 현대사회에서도 실천할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이 이곳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고, 오늘날에도 도덕성과 윤
리를 회복하며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성균관은 234개의 향교인 지방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또한 유림단체인 유도회총본부 조직도 갖추고 있으며, 2024년 1월 성균관·향교·서원 전통문화 계승 발전 및 지
원법」이 발효되었으며, 지금 현재 시행령을 만들고 있으므로 이제 곧 인성교육과 한자교육 등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이를 통해 각 지역의 향교와 연계하여 전통교육을 강화하고, 청소년을 위한 인성교육에 대한 예산지원도 체
계적으로 추진가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