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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 최 씨 무신정권의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든 야별초(좌별초, 우별초)와 몽골에 잡혀간 이들이 탈출하여 만든 신의군이 합해져 삼별초가 된다. 삼별초는 관군이 아닌 최 씨 정권의 이익을 위한 별동대였다.
-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옮겨갈 때, 무신정권의 호위병으로 함께 이동한다.
- 고려 원종 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고 반몽 항쟁을 계속한다.
- 원종이 삼별초의 해산을 명하자, 삼별초는 새로운 정부와 왕을 세운다. 그들은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주변 섬들과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까지 세력권을 넓혀 개성으로 올라가는 조운선을 공격한다. 삼별초는 고려 조정과 몽골에 큰 타격을 주는 가장 강력한 반몽 반조정 세력이 된다. 무신정권의 호위병이었던 삼별초의 항쟁은 점차 몽골의 고려 지배에 대항하는 자주정신의 상징으로 변해간다.
- 부담을 느낀 고려와 몽골의 여몽연합군은 1271년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를 공격한다. 삼별초는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고 크게 패하자, 뒤를 이은 김통정 장군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한다.
- 1271년 (원종 12) 5월 김통정은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미리 제주도에 들어와 있던 이문경과 합세하여 제주도에서의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간다.
- 항파두리에 내성과 외성의 이중으로 된 성을 쌓고, 명월과 애월에 목성(木城)을, 포구에 군항 시설을, 해안 300리에 환해장성을 축조하는 등 치밀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다.
- 1273년 4월, 김방경과 힌두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 만 3천여 명이 160대의 전함에 나눠 타고 거센 풍랑을 넘어 제주 공격에 나섰다.
초기전투에서 어느 정도 견뎌내던 삼별초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다가 대부분 살해되거나 항복했다.
- 붉은오름까지 피신한 김통정 장군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제주 역사상 최대의 전쟁은 대부분의 삼별초군이 처참하게 참살당한 가운데 막을 내렸다.
김통정의 시신은 전투가 끝난 두 달 후에 발견됐다.
이렇게 해서 삼별초의 난은 반기를 든 지 4년 만에 종결됐다.
▶ 파군봉
삼별초와 여몽 연합군이 공방전을 치렀던 격전지가 바로 파군봉인데 파군봉 전투에서 전멸하고,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삼별초는 항파두리로 철수를 했었다.
▶ 애월읍 광령리에 위치한 '붉은오름' - 삼별초 항전의 종착점
이 붉은오름은 그곳의 돌과 흙이 유난히 붉은색을 띠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삼별초와 연관 짓고 있다.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에서 마지막까지 몽골에 대항했던 김통정 장군이 부하 70여 명과 최후의 결전을 치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 그래서 이 주변의 흙이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고 해서 붉은오름으로 부른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 몽골과 제주의 만남은 삼별초의 저항이 그 출발점이 되지만 이후 몽골과 제주의 인연은 한반도의 어느 지역보다 끈질기게 이어져 지금까지도 많은 흔적과 사연을 남겨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