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 세종대왕의 당뇨증세 🐜 01:14 사탕수수 재배의 장단점 03:47 흑설탕이 먼저일까 백설탕이 먼저일까 07:35 교리 설파에 사용된 설탕 09:20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설탕 13:29 부와 권력의 상징 🤑 16:30 여왕님이 웃질 않으셔 17:48 쓴 물에 설탕 한 스푼을 넣으면 18:53 끓는 솥보다 괴로웠을 현실 20:19 피와 땀을 마신 사람들 🇬🇧 21:30 왕의 어머니도 쉽게 먹지 못한 설탕 22:40 제일제당 & 제일모직 🍬 26:11 국산 단맛에 스며든 국민들
@mjd27859 ай бұрын
26:47 썬킴의 영상편지
@jaehoyi87912 ай бұрын
😮7😢😢😢😢😮😢😢
@kingeast809 ай бұрын
4:04 오랜만에 들어보는 "물상"시간이군요~ㅋㅋㅋ 한 학년(씩) 동안 과학 교과서 안에서 물상 = 물리 3분의 1 + 화학 3분의 1 + 지구과학 3분의 1를 배울 수 있었죠~^^ 과학 교과서 안에 "생물"도 있었지만 "생물"은 일주일에 한 교시에 따로 떼어서 배웠고요~^^ 13:35 저희 외할머니께서도 설 명절과 추석 명절 때 시골에 친척들 만나서 가실 때 명절선물로 설탕 큰거 + 미원 큰거 + 다시다 큰거 꼭 선물하셨어요~^^ 25:15 내친김에 우리나라 양복의 역사도 다뤄주세요~ㅎㅎㅎ
@최우영-x7f9 ай бұрын
영국 찰스 2세 부인이 포르투갈 공주인데 시집올 때 가져온 홍차를 도자기 찻잔에 설탕을 넣어 마셨는데 그것을 귀족들이 따라하면서 홍차와 도자기 문화가 영국에 퍼지고 영국은 백색 고령토가 없자 흰색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소뼈가루를 넣어 만든 본차이나를 만들죠. 중국의 녹차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적도를 지나면서 녹차가 발효가 되어 홍차가 되면서 쓴맛은 강해지만 설탕을 넣어 풍미가 좋아져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 지치고 나른한 오후를 홍차의 카페인이 새로운 활력을 넣어주었죠. 1642~1650년 영국 내전과 청교도 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아들이 호국경으로 집권한 1653~58년을 거치면서 음식의 맛에 신경 쓰는 것도 청교도 정신에 맞지 않다며 규제를 해 영국음식이 맛이 없어진 배경이 되죠. 포르투갈은 동남아시아에서 설탕과 홍차를 실어오면 되지만 영국은 노동력을 지리상 가까운 아프리카사람들로 조달하기 위해 서구의 신기한 물품을 배에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현지 아프리카인들이 잡아온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사서, 동남아시아와 같은 위도의 카브리해(Cannibal은 동족 잡아먹는 행위를 말하는데 스페인인들이 원주민들을 식인종을 오해해 생긴 말에서 '카브리'가 유래)에 심어놓은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들어줄 노동력인 흑인노예를 내려놓고 영국 리버풀항으로 돌아가는 것이 삼각무역의 시초죠. 미국도 영국의 영향을 받아 홍차를 마셨으나 영국이 유럽대륙의 7년전쟁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프랑스를 이기지만 이긴 영국도 재정이 딸리자 아메리카 식민지에게 모든 물품에 세금을 낸 인지를 붙이는 인지세를 도입하자 열 받은 식민지 백성들이 1773년 Massachusetts 보스턴 홍차 사건 이후 영국 잔재를 털어버리기 위해 대용품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죠. 영국은 설탕은 해결했으나 기본적 홍차는 청나라의 녹차 재배지를 철저하게 감추므로 자급자족이 어렵운데 티타임을 없애질 모하자 막대한 은이 청으로 넘어가자 아예 청나라를 털어먹으려고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풀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죠. 1840년 1차 아편전쟁은 청나라와 영국 해군이 아닌 1600.12.31 출범한 영국 동인도회사와 청나라 수군이 한판 붙은 것이죠. 그리고 설탕을 짜고 남은 찌꺼기로 발효시킨 술인 Rum을 선원들과 흑인 노예들이 물 대신 마시고 고된 노동을 견뎠죠. 제일제당이 있던 자리는 부산 서면 부산교통공사 건너편 포스코아파트인데 그앞으로 동천이 흐르는데 동천 정화사업을 위해 파보니 각종 화살촉 등이 나왔고 임진왜란 때는 인근에서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전투가 있었다고하더군요. 이승만 정부의 일본인의 한국 입국금지 정책으로 일본에 기술자를 보내 설탕 제조시설 작동법만 배워 제조시설 가져와 기계를 돌리는데 설탕이 안 나와 전 직원들이 당황했는데 이 현장을 지켜보던 한 직원이 원당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다고 해서 그 직원이 말한대로 원당을 줄여넣으니 설탕이 나와 그 말을 한 직원은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간부사원이 되고 퇴사 때까지 고위직에 계셨죠. 이병철 회장의 친형 이병각 씨는 삼강유업의 창업주인데 1960년대 도굴품 장물 사건에 연루되면서 롯데에 매각해 롯데삼강이 되었죠. 원래 방직도 부산이 유명한데 일제 때부터 범일동 조방으로 유명한 조선방직이 있었고 해방 후 1936년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생님도 해방 후 근무한 조선방직과 서면 근처에 경남모직이 있었죠. 제일모직은 대구시민운동장 근처에 지었는데 대구가 섬유도시가 되는데 현 대구은행 본점 근처 코오롱 나이론 공장과 대구 토착 섬유기업 갑을그룹과 경산에는 제일합섬이 있었죠. 청와대 투서를 넣은 둘째 이창희 씨가 미국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제일합섭을 물려받아 사명을 새한으로 바꾸고 경영하다가 별세 후 일본인 부인이 물려받아 아들들과 경영하다 IMF시절 부도가 났는데 세계 MP3플레이어는 새한에서 만들엏죠. 1982년 삼성라이온즈 창단 후 연습장이 대구시민운동장 근처 제일모직 안에 있었는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장효조와 김시진 선수는 경리단길로 유명한 육군 경리단 군인 신분이라 특혜없이 만기제대 후 1983년 삼성에 입단한 김시진 투수 얘기로는 제일모직 삼성라이온즈 훈련장에 어릴 적 꼬마 이재용 회장이 삼성 선수들 보고싶다고 아버지 이건희 부회장에게 부탁해 따라와 따로 만나봤다고한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네요. 1979~1980년 일본 히로시마 도요카프를 일본 시리즈 2연패 시킨 장명부 투수의가 1982년 꼴찌 삼미에서 1983년 30승이란 대기록을 세우며 재일교포 투수 신드롬을 일므키자 1983년 연말에 삼성과 OB간의 요미우리자이언츠 김일융 투수 스카우트전쟁에서 진 OB는 김일융 스카우트에서 아낀 비용으로 1984년 지은 이천 베어스파크에 더 좋은 시절을 들여놓은면서 화수분 야구를 이끌 수 있었죠. 삼성은 1984년 롯데 자이언츠에 진 후 1985년 2월 한구프로야구구단 최초로 미국 플로리다주의 미국 LA다저스 베로비치 캠프에서 마무리 훈련을 하고, 1985년 통합우승 후 경산에 라이온즈 훈련장을 짓죠.
@yeomjiwon9 ай бұрын
엄청난 잡지식입니다.
@norantweety23953 ай бұрын
정말 잡지식이네요 ㅋㅋ
@희춘이10 күн бұрын
삼성의 역사를 꿰고 계시네요~
@최강쌍용레오맘9 ай бұрын
오늘 편집장님❤의 곰돌이 맨투맨 티셔츠가 엄청 귀엽고 스윗했습니다 71친구 썬킴님❤의 사탕수수 이야기...재미있게 잘 들었어요 두 분 승승장구 하시길 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