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 교수님 인류학에 관심많은 30대 후반 시골총각입니다. 몽골리안루트 KBS 다큐멘터리 때 강인욱교수님의 설명 참 감명깊게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henrythefifth99932 ай бұрын
서울대는 일제 식민사학이 아직도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너무 믿지 마세요. 서울대에서 기존에 일본인이 세웠던 반도 사관을 넘어서는 논문은 아예 쓰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못 벋어나는 반도 사관만 써야 합니다. 한줄요약 : 서울대 역사학은 식민사관 개쓰레기급.
@승원-p7uАй бұрын
시골총각ㆍ공부열심하시네요 할미가 칭찬하고 싶네요 저두늙어두 열심히공😅부합니디ㅡ
@신흥역랜더스씨티Ай бұрын
지금날씨를 8천년전 날씨가 같다는것은 무식 ㅡㆍ2천년전 김해가야 건국해 김해평이는 바다 그때는 지구온난화로 해수위가 상승 /ㆍ8천년전 날씨는 계산홰봐야 /ㆍ스키타이 백인 부족중 하나가 가덕도로 이주
@신흥역랜더스씨티Ай бұрын
@@승원-p7u신라삼국통이전에는 수많은 부족이 자유롭게 이동그러니 한반도에 삼한은 수백개 부족국가 건립 그게 같은 부족일수도 백인부족이 거주할수도 /ㆍ고인돌ㆍ벼농사는 인도 샨스크리트어 부족 /ㆍ고구려 적석총 인도 피라미드 /ㆍ신라고분 스키타이 /ㆍ마한 옹관묘 남중국 /ㆍ전남 전방후원릉. 일본인
@일탈녀-야엘Ай бұрын
고대에는 중앙아시아지역이 거의다 백인종이 살던 지역이었으니깐 한반도로 한명도 안왔다는건 거짓말이죠. 중국 타림분지에서 발굴된 유골은 거의 다 백인종이었고 몽골만 봐도 어린애들중에 어두운 금발이 꽤보이는데
@엔젤가든Ай бұрын
예전에 우리 밭에서 석촉 석부 나와서 대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madfordogАй бұрын
그림이 그려진 고인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칼 꽂는 풍습도 그렇고 첨 듣는게 많네요. 재밌어요.
@전희룡Ай бұрын
창원에보면 산에 버려진 고인돌 많아요.. 탐침봉으로 토기 같은거 발굴해서 가져가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계수나무-p2gАй бұрын
신고합시다. 도굴꾼
@onnya4753Ай бұрын
고대에는 우리 고정관념과는 달리 지역간 폐쇄된 세상이 아니었다는 거겠죠 땅은 다 연결되어있고 이동이 자유로웠으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이 더 사리에 안맞는게 아닐까요 동아시아인골이 서쪽끝에서 발견되어도 이상할것 없지않을까요
@shinhwang885Ай бұрын
정확히 언제부터 지금의 해수면 높이가 되었는지는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서해는 육지였습니다. 일본까지도 작은 배 한척이면 이동이 원활 했다고 하죠. 한강은 중국 대륙의 강들과 연결되어 최종적으로 바다로 빠져나갔을겁니다. 그 만큼 다양한 교류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대구 사람들에게서는 서양인의 유전자가 나타난다고 하죠.
@onnya4753Ай бұрын
@@user-wantmynoseback 그거랑 상관없는데요
@user-wantmynosebackАй бұрын
@@onnya4753 있는데요…
@shinhwang885Ай бұрын
@@user-wantmynoseback 판구조론이 왜 나와? ㅋㅋㅋㅋㅋㅋㅋㅋ 개 웃끼네 ㅋㅋㅋㅋㅋ
@shinhwang885Ай бұрын
@@user-wantmynoseback 인류의 기원은 600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고, 최초의 인류를 390만년 전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보고 있다. 인류가 존재했을 때는 지금과 해안선이 달랐으며, 한반도는 약 4천년 전만해도 서해 전체가 육지 였으며, 제주도와 한반도는 이어져 있었다. 일본열도은 땟목 정도로 충분히 건너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조금만 찾아봐도 다 나오는 내용이야. 제발 모르면 조용히 있어라~ 무지를 자랑하지 말고
@개미100-d6jАй бұрын
내가 어릴적 우리 동네에 고인돌 엄청 많았는데 ....20개 정도 아파트 주택 개발하면서 철거 심지어 집마당에도 고인돌 있는 집도 있었는데...
@elle_leeАй бұрын
무자비한 개발이 망친경우네요😢
@jaeminim2464Ай бұрын
상고대이전 서해/황해가 아닌 육지설이 있습니다. 아울러 고조선을 중심으로 빙하기때 다양한 민족 이미 한반도내외 혼합민족(중심-동이, 중국넘들이 오랑캐로 비하)있다는 것
@kis012876Ай бұрын
@@elle_lee 너무많아서 관리가안됨 거기다 그냥 돌 얹어놓은형태라 고고학적인 가치도 딱히없음
@shorming2 ай бұрын
전 강인욱교수님이 전해주시는 고고학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요. 귀에 쏙쏙
@비워서채움Ай бұрын
역사는 영어 수학보다 더 가치를 가늠할수 없을정도로 중요한 학문입니다. 지금은 더더욱 그렇구 중국과 역사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 문화공정등 역사를 짜집기하는 중국) 독도도 중요하지만.. 만주와 넓은 평야에 존재했던 고구려 발해사등등 국민들 관심이 필요합니다.. 단군의 홍익인간 으로 고조선건국 하기 그 이전에 있었던 하늘의 자손이 우리의 조상이니까요..
@SbN-o2zАй бұрын
역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을 안다면, 문명의 역사에서 영어와 수학의 의미와 중요성이 역사에 비해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는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실 텐데요. 그래서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신주단지 모시면서 세계 최악의 노예제를 겪은 건가요?
@비워서채움Ай бұрын
@@SbN-o2z 수학 영어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한건 아니구요. 지금 역사 또한 중요하단 걸 말한거구요. 동북공정 그리고 문화공정이 시작 되었으니 역사에 관심이 필요하단 얘기인데요.
@열국지팩트체크Ай бұрын
재미있게 듣고갑니다. 감사합니다.
@하늘빛-r1eАй бұрын
대구는 그 많고 많던 고인돌 다 갈아엎었다죠.. 개발한다는 이유로.. 만일 그 많던 고인돌 잘 보존 했더라면 세계적인인 고인돌의 도시가 됐을 텐데요.
@freddiepark937Ай бұрын
봉덕동 미군기지...
@버들륨Ай бұрын
돈으로도 못 살 평생 갈 관광자원을 없애버렸네요.😢
@내가니형이다Ай бұрын
쌍디언들은 한민족이 아님
@연이-v4sАй бұрын
어렸을때 외가댁에서 살았는데 항상 외할아버지의 외모가 의문이었습니다 크고 찐한 쌍커플에 눈이 푹 들어가있고 회색 카키색 갈색이 섞인 눈동자에 곱슬머리 작은 머리크기와 작은 얼굴 큰키 농부인데 하얀피부 오똑한 코 얇은 입술 아무리봐도 토요명화에 나오는 서양인 외모와 흡사한 근데 고모 할머니를 보고 더 놀람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시고 쪽을 졌는데 레오나드로 다빈치 그림 모나리자랑 너무 비슷해보여서 그 당시 집에 만화로 된 세계사 일본걸 번역한 전집이 있어 보았음 대대손손 그지역 토박이신데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붉은 머리카락에 성격이 불같아서 유명했다고 하셨음 암튼 내가 보는 한국인들과 너무 다른 생김새였어요 그 당시엔 딱히 신경쓰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고 생각해보니 엄청 튀는 외모셨다는 생각 아침에 앉아서 항상 바지 끝 대님을 묶는 모습이 추억처럼 떠오르네요. 한국인들 서양인들 유전자 섞였을수도 있다? 들어보니 깁자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생각나서 ...
@서도현-l7lАй бұрын
혹시 윗어르신중에 남씨 성을 가지신분들이 계셨나요~~?
@연이-v4sАй бұрын
아니요 김해김씨고 윗대윗대 다 선비 집안이었어요 외할머니는 무려 서당나온 여자 안동에서 양반이었고 외할아버지 집안이 양반이라 결혼 시킨겁니다. 쭉 터를 잡고 산 집성촌이 있습니다. 경남이고요 백정이 그 지역에서 성깔 부리며 살 수 있었겠나요 맞아 죽지
@연이-v4sАй бұрын
@@서도현-l7l 김해김씨고 경남입니다
@연이-v4sАй бұрын
@@rokmc822k 생각해 보세요 그 시절 백정 출신이 어떻게 자기 성질을 내며 살 수 있었겠어요 대대손손 그 지역에 살던 선비집안입니다. 엘지집안 구씨분들이 이지역에 고려 중기인가 말기 내려와 터를 잡았고 외할아버지 집안은 그 구씨들 오기 전부터 양반으로 그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안동에 집성촌있는 양반가문인데 서당도 나왔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양반가문이라 결혼 시켰고 외할아버지도 서당나오시고 어렸을때 아침에 시조 읊던 모습도 생각나고 호도 있었고 갓쓰고 두루마기 입고 시조대회도 나가셨어요 동네분들이 외할아버지를 항상 달산?양반이라 불렀고 아주머니들은 달산?나리라고 불렀어요
@연이-v4sАй бұрын
@@rokmc822k 고려시대에도 그지역 향반이었음 백정은 성질 못부림 동네사람들이 외할아버지 달산? 기억은 안나지만 무슨 달산양반이라 부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달산나리라 불렀음
@jhhan9635Ай бұрын
1993년, 95년,97년, 2004년 발견된 쌀의 방사선탄소연대 분석결과 우리나라의 소로리에 발견된 볍씨가 인도, 중국보다 월등히 오랜 BC15,000년에 재배된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 (유전자 분석결과 야생이 아닌 재배된것으로 분석됨) 2017년 "현대고고학의이해"라는 세계적 고고학 입문서 최신 개정판에 쌀의 기원지가 한국으로 표기
@웃겨죽는Ай бұрын
동의합니다. 더욱 3천년후 중국지역에서 발견된건 장볍씨(동남아종) 우린 그때부터 단볍씨 조. 지금 중국도 인정하는건 수수, 콩등 많은 잡곡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간걸 인정 합니다. 단, 중국이 벼농사를 부정하는건 벼농사는 문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소로리 볍씨 같은 경우에는 그 신빙성에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역사시대 이후 도작 문화 및 볍씨 종자 자체는 양자강 기원인 것이 거의 확정된 상황입니다. 애당초 양자강 유역은 1만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도작문화가 조금씩 성숙해나가다가 기원전 6-4000년 경에 이르면 거의 완전한 도작사회로 접어들었던 데에 반해, 한반도는 기원전 13세기 이전까지는 제대로 된 정착농격조차도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기장과 조 농사가 파편적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그 흔적은 기원전 13세기 이전에 비하면 희미하고요. 기원전 13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도작을 중심으로한 농경사회의 유적의 빈도가 급증하여 이 시기에 정착농경의 성립과 이로인한 인구 폭증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정욱-p9jАй бұрын
그렇기 때문에 설령 단편적으로 소로리 볍씨가 아주 오래전에, 현대 한국인과의 연결도 희미한 조상들이 잠깐 시범적으로 농사를 지은 흔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의미를 둘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 농경문화 자체는 이미 고고학, 식물고고학적 방식으로 양자강-산동반도-요동반도을 통해 개량된 방식을 흡수함으로써 정착한 게 명백히 확인됐거든요.
@hirahira0o02 ай бұрын
강인욱 교수님 덕분에 고고학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심쿵두루2 ай бұрын
어릴 때 역사스페셜을 보면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공부를 잘 하지 못 해서....정말 멋지세요
@오리지날-y3jАй бұрын
고대에는 중앙아시아지역이 거의다 백인종이 살던 지역이었으니깐 한반도로 한명도 안왔다는건 거짓말이죠. 중국 타림분지에서 발굴된 유골은 거의 다 백인종이었고 몽골만 봐도 어린애들중에 어두운 금발이 꽤보이는데
@Soul_Flow_19 күн бұрын
백인 유전자 그렇게 원해????
@베이비샤크18호2 ай бұрын
엑스칼리버와 한국 고인돌에 꽂아 놓은 청동검 까지 일맥 상통 한다는게 진짜 신기하네요!!!
@arcyoon2 ай бұрын
??소로리볍씨는 어떻게 되나요? 가장 오래된 탄화미라면서요?
@나는너야-j5iАй бұрын
예전에 한국에서 제일 먼저 벼 농사를 시작했다는 영상을 본적이 있는데 그건 뭔가요??
@fprpvjaj2 ай бұрын
강인욱교수님 팬인데 어제는 역사를 보다에 오늘은 단독영상ㅠㅠ 너무 행복합니다☺️ㅎㅎ
@ccyzzangify2 ай бұрын
손인욱 강인욱 렛츠고우!
@임병-v7u2 ай бұрын
전에는 과학을 보다를 정말 재밋게 봤었는데, 요즘은 역사를 보다가 더 재밋는거 같아요. 과학을 보자 분발합니다 ㅎㅎ
@user-be6mn6kp1u26 күн бұрын
우리 할머니는 경남 북부인데. 키가 크고. 눈이 매우 크고. 깊고 피부는. 백인이었음. /.나도 피부는 거의 백인인데. 우리형제 및 우리 자녀들도 모발은. 거의 밝은 갈색에 가까움( 저의 누님은 어릴때 미국인이냐고. 할 정도)
@robkang3250Ай бұрын
그당시 한반도 기온이 현재보다 높았다고 하는데 그래도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나요?
@dontstopaccelАй бұрын
원래 벼농사가 지어지기 가장 적합한 기온은 아열대이고 인디카쌀이 원류, 자포니카쌀이 변형이라는 섀기도 있고, 발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볍씨인 청주소로리볍씨가 현대의 한반도 볍씨와 종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최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최초와 벽을 나란히 할 만큼 오래전부터 벼를 재배했다는 것은 알 수 있겠네요
@kingsivacivaАй бұрын
아마...한반도가 원래 지금형태라고 생각해서 한반도에 벼가 동남아에서 왔다고 착각을 많이하는데 (지식의 저주 같은?? ) 그런데 본래 한반도 한강위쪽은 지금 대륙판이고 한강아래는 해양판이고 대만 아래 그부근에 있다가 위로 차츰 올라와서 지금의 한반도 모습이 된겁니다. 그래서 남한에 자생하던 벼가 그냥 땅이 이동하면서 자연스레 기후에 적응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벼농사는 한반도에 적응한 벼로 한강이남에서 하던걸 백제이전있던 마한의 강역이 백제가 있는자리와 산동 상해 광동 영역에 걸쳐있으니 한반도에 있던 벼를 중국의 동부연안으로 가져간거죠
@kingsivacivaАй бұрын
우리나라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왔을때 대부분은 추워서 안될거라고 했지만 해남근처에서 3개중에 한개가 다행히 발아해서 우리도 솜으로 된 옷을 입을수 있었듯이요
@편견타파2 ай бұрын
빙하기 때는 서해안은 육지였어요...
@bts849Ай бұрын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쌀이 우리나라에서 별견됫다던데..
@xero2250Ай бұрын
벼의 기원은 아직도 미스터리함
@purplehaze7572Ай бұрын
혹시 마늘먹고 곰이 사람된 얘기도 믿으시나요
@user-jp8ev1eh8nАй бұрын
현재 고고학쪽 관련해서 수업듣는데용 이거 맞아용
@bts849Ай бұрын
@@purplehaze7572 기사찾아보고 그런말씀하시져 ㅋ
@장도섭-c5kАй бұрын
맞아요 청주근처서 제일 오래된 볍씨가 발견 됬지요. 학설과 역사는 다를 수 있으니 참고 사항 이지만...
@Kim-se8ow3 күн бұрын
3000년전 기후는 지금이랑다릅니당
@포도씨-d2x2 ай бұрын
어릴적에도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오히려 강인욱 교수님 덕분에 더 다양한 지방의 고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davidyang8550Ай бұрын
이 분 주장대로라면,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현대인과 비교한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어짜피 조각들이고 오염가능성이 큽니다.
@프리티걸-q8z2 ай бұрын
불교의 전파만 생각해도 예전 인류 문화 물류 교류는 현 우리생각 이상일듯
@걍옹Ай бұрын
한국에서 재배되는 아시아 쌀의 가장 유력한 기원지는 인도 북부 아삼지역과 중국 윈난지역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충청북도 소로리의 구석기 시대 토층에서 볍씨가 발굴되면서 쌀의 기원과 전파 경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hempenfulАй бұрын
소로리 볍씨가 쌀의 기원이고, 한반도 에서 시작된 벼가 중국을 거쳐 동남아로 가면서 점점 아열대 기후에 적응한겁니다. 이게 바뀐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모르십니까
@sirenk3126Ай бұрын
소로리 언급하면 실직 당할 걸요~
@onnya4753Ай бұрын
원래 고대인류는 다 장두형(앞뒤로 긴 타원형 두개골)에서 시작되었고 지역별로 서서히 단두화(원형두개골) 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따라서 장두형이 나왔다고 모두 서양에서 왔다고 단정짓는건 신중해야하지 않나 싶네요. 유럽지역 또한 서서히 단두화가 진행되어서 장두형과 단두형이 혼재해있습니다. 우리쪽도 원래 장두형이었다가 형질변화등 여러이유로 단두화가 어느시기 빠르게 진행되어서 같은시기 혼재해있었을수도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의 설명은 전무한것같아 아쉽네요
@LBJ00Q12Ай бұрын
한국이 최초의 쌀 재배지 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넘어 왔다고요?
@동의보감구수략2 ай бұрын
잘 보고 갑니다.
@drchoe7720Ай бұрын
뒤배경에 깔린 음악이 전화벨소리 비슷해서 집중에 방해가 되네요.
@cssshhh53012 ай бұрын
한국이 최초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소로리볍씨에 대해서도 다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ridish7383Ай бұрын
소로리볍씨는 야생벼일 가능성이 많고, 추가적인 발굴조사 없이는 뭐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하던데요?
@카이사르-c2sАй бұрын
@@tridish7383 재배볍씨 입니다 영상에 아열대 작물이라고 나오네요 야생벼 일수가 없는거죠
@cssshhh5301Ай бұрын
다시 찾아보니 인류 최초라기보다는 제일 오래된 볍씨라는 타이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네요
@@tridish7383 야생 벼가 아니라 개량된 벼라는 것은 이미 검증이 끝났습니다. 문제는 연속성의 문제죠. 즉, 그 때 일시적으로 벌어지고 그 이후에 사라진 문화인지, 아니면 주변에 영향을 주면서 계속 이어져서 중국과 동남아까지 영향을 준 문화인지의 문제인 것이죠. 전자라면 가장 오래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후자라면 입증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현재로서는 불가능 한 일이죠.
@토왕윈저Ай бұрын
벼농사는 한반도가 세계 최초 원류임. 중국에서 벼농사가 넘어왔다는 것은 사대적인 생각이고 잘못된 생각임. 또한 인도에서 넘어왔다는것도 말이 안됨. 오히려, 한반도가 예전에는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었는데, 다른 기후의 지역으로 퍼져갔을 확률이 높음. 그당시 만년전에는 지금의 기후와는 전혀 다르니까.~
@user-be6mn6kp1u26 күн бұрын
어원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 왔을가능성. 많음
@이명주-c8i2 ай бұрын
교수님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오의선-s8jАй бұрын
벼농사와 관련이 있으면 고인돌은 무덤이 아니라 제단이 분명하다고 본다. 추수감사 제단. 서족에 주로 분포 한 이유는 단군제단이 서쪽을 향한 것으로 유추해 보면 우리 민족이 서족에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고향을 향해서...
@Jt-678Ай бұрын
뱃길이 고대부터 있었고 잠긴곳도 많기때문에 지금에 인구가 고대에도 동일하다고 보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충분히 서양인골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바다였던곳이 땅이였고 땅이었던곳이 바다가 되었다면 충분히 발견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그러더군요 한핏줄이라 한민족이아니라 어떤 외모를 갖추었든 한국말을 쓰면 다 한민족이라구요
@승원-p7uАй бұрын
인류는 다 연결 되있어서죠 그시대도 다 교류있어겠죠 식량확보나 땅 차지때문에
@K-ECHOАй бұрын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유독 까다롭게 과학적 증거와 분석을 요구하는 듯요 다른 나라는 부풀리기 많이 하던데
@sirenk3126Ай бұрын
일본인이 정해준 식민사관 에서 벗어나면 밥줄 끊기거 든요... 그동안 거짓말로 국 민 속인게 너무 많아서~~
@H2CO3_h2co32 ай бұрын
세상에 .... 옛날 역사를 현재의 지리와 기후로 해석을을 하시다니 ....
@냠냠-q2l3tАй бұрын
우와... 나랑 사진똑같아.. 소름...
@홍명기-z7mАй бұрын
어릴적 아버지 친구 아들이 갈색머리였는데 양키, 자연산염색 이라고 놀리고 그랬음
@KminjunАй бұрын
오히려 고대에는 인류 이동이 제한적이지 않았음 나라와 국경이 들어선 지금시대 기준으로 고대인을 한정적으로 생각하면 절대안됨 한반도는 유라시아 평원을따라 멀리는 유럽이랑도 연결되 있다. 모계가 백인인 유골이 나온것도 백인이 실제로 한반도에 소수가 살았거나 스키타이, 신라 흉노족과도 관련있을듯함 신라가 골품제한 이유도 그렇고
@glistenbong3745Ай бұрын
품종에 따른 것은 왜 안안려주세요?? 극동쌀품종이랑 동남아쌀품종이랑
@조민수-x5oАй бұрын
우리 조상님들이 요서에 살다가 한반도 남부까지 이주해 왔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럽에서도 온 사람들이 있었네요.
@kjh3217Ай бұрын
10:30초 - 조사할 때마다 다르게 나온다면,,,, 지금의 과학적인 조사 방법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또, 그러한 방법으로 조사해서 나온 것이라면 역사로 가르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comarchi2000Ай бұрын
그 중국에 고인돌 있던 지역이 다.. 동이족 살던 지역임. 고조선은 산동반도까지도 영역이었고..
@지퍼맨-d3o2 ай бұрын
흥미롭네요
@ryg120810 сағат бұрын
국민학교때 같은 반에 외국인 혼혈처럼 생긴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가까운 친척이었고, 집안 사람이라 혼혈하고 상관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친구여서 참 신기했다.
@하늘-q9j4iАй бұрын
고고학자는 정말 머리가 좋아야할 듯
@jmkhan2292Ай бұрын
고대 동아시아의 민족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공부할 수록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과 아프리카 기원설에 대한 회의감만 들더군요. 고대의 동아시아인들의 민족들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불분명한데, 인류의 기원을 그리 간단히 설명하는 사람들... 특히 생물학 쪽의 인간진화론자들 보면 이들이 과연 양심있는 학자들인가 하는 생각만 드네요. 그리고 진화론이 우생학과 같이 인간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생각은 하고 사는지도 궁금하고요. 솔직히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인문학적 소양이 모자라다는 생각만 들고, 그건 접어두고라도 그들이 말하는 진화론만해도 애초에 그리 간단하게 증명 될 수 없는 것인데 말이죠.
@HgK-pl7stАй бұрын
지금 이야 3만지 정원 만들겠다고 고인돌 그거 먼데 하면 가저다 사용한 곳이 없을까 그리고 토지계발 한답시고 파해진 곳중에 고인돌 패기 않했다는 보장도 없고... 고인돌이 최소 지금에 1.5배 에서 2배이상 까지도 있었다는 소리임...
@이명준-k2uАй бұрын
인골이 없는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흔적도 없이 흙으로 된것으로 보입니다 또 일본이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거인이라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하니 우리조상이 좀 큰 사람이 많았다고 봅니다
@노답-o7xАй бұрын
댓글창 괜히 열어봤네 ㅋㅋㅋ 방구석 고고학자들 ㅈㄴ 대단하네 ㅋㅋㅋㅋ
@shindler1275Ай бұрын
니 글 보고 방구석 평론가라고 조롱하는 사람이 더 많을듯
@bc-tp6btАй бұрын
@@shindler1275어서와 방구석 고고학자
@oh38552 ай бұрын
바다밑에 잠긴거도 많겠네요
@yourworstnightmaretonightАй бұрын
무덤 위에 칼을 꽂아 놓는 행위는 조선시대에 상상도 할수 없는 행위이며 오히려 저주를 내리는 행위로 생각이 들 것 같은데, 고대 한반도에서는 전사를 숭배하고 정신을 기리는 행위였다는게 참 흥미롭네요. 우리나라는 확실히 북방계 문화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고 고구려 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전통이나 고위급 계층의 문화만 봐도 유라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대 한반도에는 중국의 문을 중시하는 한족의 문화와 다르게 무와 전사를 숭배하는 문화가 더 강세했던 것 같고 그런 문화가 일본에도 흘러들어가 현재 일본 문화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일본이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런 면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끔 개인적으로 일본 문화들을 볼때 한반도 고대 문화도 저들과 많이 유사했지 않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도 합니다 ㅎㅎ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 중, 후기 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중국의 문화 사상이 (유교, 도교 등)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현재는 일본과 정반대이면서 중국과 더 비슷한 문화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일수도 있겠죠.
예전에 어떤 영상에서 본건대 경상도 대구나 뭐 그쪽에서 백인dna를 가진 사람들이 꾀 많다고 들었는데 이이야기랑 다른내용인가요? 갑자기 생각나서 궁금해요
@이정호-x5dАй бұрын
그래서 대구에 미녀가 많음 ㅋㅋ
@이상화-s6qАй бұрын
이미 벼농사의 기원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역사학계가 인정한 사실입니다 충북 소로리에서 출토 되었으며 조사결과 심지어 순환볍씨로 밣혀졌으면 말그대로 야생벼에서 지금의 벼의 중간단계로 만삼천년에서 만오천년경의 연대측정으로 나옵니다 이미 한반도는 최소 기원 만년전부터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위영상처럼 오천년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맞지않다고 봅니다
@shinhwang885Ай бұрын
당시에는 한반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의 서해는 해수면의 높이 증가로 만들어진 바다입니다. 당시에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의 구분이 없었겠지요.
@이상화-s6qАй бұрын
@@shinhwang885 아맞아요 황해는 거대한평원이었고 일본또한 연결되었죠 일본 규슈지방의 흑요석이 한반도 많은곳에서 발견되었고 위성사진으로 서해에 황하.양쯔강.한강 압록강.금강 영상강등 수많은 물줄기가 연결된 거대한 강줄기흔적이 남아있더라구요 한반도에 야생벼의 존재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너무많으셔서 전 이곳을통해 야생벼를 발견하고 여러지역에서 벼농경문화가 시작된다 생각됩니다 또한 여런연구로 추운곳에서도 벼는 잘자란다고 공식발표도 있었고 기원3000년전에는 만주지방도 지금보다 온화한 기후였다는 사실에 한반도에서 쌀의 기원지라는것에 의심하지않습니다
@최초이-c8dАй бұрын
이거 순다랜드 통해서 해안선으로 올라왔다고 본듯한데
@usakim4140Ай бұрын
우리나라 사람들 피부가 하얗고 종종 자연 노란 빨간머리 다 이유가 있는게 아닐지
@은객-r8cАй бұрын
12 만년전에 빙하기 엿을 때는 서해는 육지엿고 일본도 한국과 육지로 연결되있엇음..그러므로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백인들도 한반도로 올수 있엇지..그리고 그 백인이 지배층으로 자리해서 고인돌에서 백인 유골이 나오는겁니다. 신라의 왕족중에 진성여왕까지가 백인이엇고 그 후로는 순수 백인은 사라지고 혼혈백인인 성골이 왕이 됫습니다. 그래서 신라를 스키타이 문화라고하죠.
@yongsungcho3520Ай бұрын
가덕더 유골 학계에서 잘못 분석했다고 한거 같은데 최신 자료 맞나요?
@DragonBubbleCrapsАй бұрын
많은 정보를 다뤄야 합니다!😂😂😂
@moonjaelee16522 ай бұрын
아시아 민족들이 빙하기에 아메리카로 넘어간 것처럼 초기에는 유목 반 농경 반으로 살던 민족도 많았으니 요서에서 기장 심던 사람들도 이동 가능하겠죠. 또 기후 변화나 주변 민족과의 전쟁 등으로 농경민족이 이동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서-u4b2 ай бұрын
기후가 지금과 같다는 전제를 깔고 가는게 맞을까 의문이 듭니다
@물멍-d8bАй бұрын
역사학계에서는 고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지리나 기후적 측면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음..
@tridish7383Ай бұрын
@@물멍-d8b 몰라서 그래요
@장동욱-n7vАй бұрын
멀 몰라서 그래요 다 알고 사기치는거죠 역사조작하고 세뇌시켜서 역사축소시키는거지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든 역사조작해서 과거보다 엄청나게 부풀리고 어떻게든 자기땅이라고 주장할려고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어떻게든 조작해서 땅을 축소시키고 은폐하고 문화재 정책등으로 스스로 문화재 없애버리고있죠 지금도 제대로된 이야기는 안하고 엉뚱한 소리만 그럴듯하게 조작해서 하고있죠
@이정욱-p9jАй бұрын
빙하기가 지난 이후면, 이미 기원전 6000년 경 이후 나타나는 식생, 동물상 조건이 현재와 거의 유사하다는 게 이미 오래전부터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기후학 연구에서도 근래 1만년 이내에는 간간히 일시적인 한랭화의 영향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지금 평균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게 여러차례의 연구로 확인되고 있고요. 많은 고고학자들이 고기후학에도 많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신석기-청동기시대에 있어 이런 기후조건에 대한 언급이 적은 이유는 1만년 이내에는 그다지 큰 특이기후가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서-u4bАй бұрын
@@이정욱-p9j 지금만 해도 사과농사가 되던곳이 안되기도 하고 온난화의 영향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6000년 전이라면 아무리 비슷하다해도 조금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군요
@승원-p7uАй бұрын
영남지방은 외국인이들어왔을 확률높죠 신라시대 석상보면
@diquasoldiquasol8807Ай бұрын
결론 : 타임머신 타고 가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수없다
@bhh76982 ай бұрын
강인욱 그는 goat다
@nasin832 ай бұрын
우리나라가 독특했으면 좋겠어요 많이 튀자자요 ㅋ
@이창민-y4zАй бұрын
고대의 유럽인들의 유전자가 지금의 유럽인들에게 이어져 온게 지금의 현대 유럽인들의 유전자겠죠 여러 인종들의 유전자가 나오는게 그렇게 이동한거겠죠 이동을 인정안하는것도 한 학설이고 인정하는것도 한 학설이죠
@hongsokoh4460Ай бұрын
박세민씨가 개그 그만두고 고고학자가 되셨군요
@종혁-r9nАй бұрын
그럼 고인돌이 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인가요?? 쌀루트가 동일하다고하니
@freddiepark937Ай бұрын
세상에 모든 유골 얼마나 된다고 한자루나될까..?루시는...외치는...가덕도 유골은 그 흔한것 제치고 나왔는데 그걸 뒷받침할게 없다고해서 의미를 두지않는다니....
@sirenk3126Ай бұрын
진화론이 억지 주장인 것 알 사람은 다 알죠~
@harrylee61929 күн бұрын
같은 작물을 한해 여러번 하는것은 기작입니다 벼와 보리의 2모작 벼의 2기작 이렇게요
@LCHXXCIVАй бұрын
확실히 지구본 모양으로 보면 북극해 쪽으로는 가까워 보이긴 하네요.
@토왕윈저Ай бұрын
이거 너무 쉽게 이유를 찾을 수 있음. 지금 자꾸 민족으로 엮어서 이해하려고 드는데, 고조선때에는 민족개념으로 엮이는게 아니라 부족연합개념임. 즉, 부족체 연합개념이었으므로, 인종이 다양했음. 고문서들 보면, 고대인들을 색목인으로 묘사하는데, 백부인, 황부인, 적부인 등으로 특징을 불렀음. 신라 성골의 선조들은 흉노가 원류였고, 묘사하기로 ;백부인'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음. 우리가 아는 진흥왕도 2미터의 거구라고 했는데 신체특징보면 거의 현재의 위구르계열 또는 중앙아시아지역 카자흐 우즈벡 인종들하고 비슷함. 화랑이 전투할때 얼굴을 하얗게 화장하는데, 이게 성골이 무너지고 진골로 넘어가면서, 혼혈들이 점점 백색 얼굴을 잃어가니, 화장을 하얗게 해서 자기들은 성골의 후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이려하는 노력중 하나였음.
@juwonchoe88Ай бұрын
쌀이 참 대단혀. 밀먹는 애들은 일단 수가 적음. 근데 쌀먹들은.. 대표적으로 중국 인도만 해고 전체 인구의 얼마를 차지 하는겨..
@tirase23242 ай бұрын
보다 구독하고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데요. 한국은 참 발굴이 어렵겠네요..ㅜㅜ
@rosak22952 ай бұрын
고고학 항상 재미있게 듣고 있어요.❤❤❤ 다만 벼에 대한 기원이 중국이었다가 한국 소로리 볍씨로 공인됐다는 기사를 봐서 업데이트 부탁 드리고 앞으로도 재미있는 고고학 이야기 많이 부탁 드려요~~❤❤❤
@0lsc2866Ай бұрын
히말라야 산중턱에서도 수천년전에 묻혀진걸로 추정된 이탈리아인과 비슷한 유골이 발견됨
@난이름-v2l2 ай бұрын
교수님 초반에 말씀하신 벼농사의 전파와 고인돌과 청동 문화의 연관 관계에서 의혹이 드는 것이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 주로 재배하는 자포니카 품종에서 동남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인디카 품종이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어서요....
@해외뀨삐트2 ай бұрын
그리고 한반도에서 최근에 1만 5천년 전 쌀이 발견되기도 했죠...
@별나무-c8e2 ай бұрын
@@해외뀨삐트 소로리볍씨와 현대 재배벼 즉 청동기 시대 때 들어와 현재 재배되는 벼와 인과관계는 없습니다.유전학적으로 전혀 다른 식물입니다. 인간하고 침팬지가 98프로인가 같은데 소로리벼와 재배벼는 30 몇 프로 밖에 안 됩니다. 전혀 다른 식물이죠.
@떠도는이야기-j6c2 ай бұрын
@@별나무-c8e 소로리 볍씨가 인류 최초의 벼입니다. 그 이상 오래된 볍씨는 현재까지 나온게 없지요. 그래서...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아니 중국도 빼고...벼의 기원을 한국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정욱-p9j2 ай бұрын
사실 강인욱 교수가 이 부분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도록 말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장강 유역에서 발원한 자포니카 품종이 한반도로 들어온 게 맞습니다. 벼 자체의 기원에 대해서도 장강 유역이 먼저냐, 동남아가 먼저냐의 논쟁이 있긴 한데, 아마 강인욱 교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남아 기원설을 지지하시는 것 같고요. 근데 뭐 어느 쪽이건 장강과 산동반도-요동반도를 거쳐서 한반도에 벼가 들어온 것은 대체로 다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별나무-c8e2 ай бұрын
@@떠도는이야기-j6c 최초가 아니라 발견된 것 중 제일 오래된 겁니다.어 다르고 아 다른 겁니다. 그리고 현재 재배벼와 유전적 연관성 없는 전혀 다른 종 입니다. 그래서 유사벼라고도 하죠. 재배벼의 기원은 중국 주강지역입니다. 유전학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 생태학적으로도 여기가 맞습니다. 이 벼가 한반도에 후기 신석기나 청동기 시대에 유입 된 거구요.한반도가 벼 기원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한반도에는 야생벼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후 조건이 더 좋은 일본에도 야생벼는 자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야생벼를 가지고 쪼물딱 거리며 재배를 시작하며 종자 개량을 하게 되는데 한반도에는 야생벼가 없기에 기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로리볍씨는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보는 겁니다.
@탄탄대로-v4d2 ай бұрын
암사동 거주해서 고인돌 흔하게 봤네요 ㅎㅎ
@g04jee2 ай бұрын
말씀 중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벼에는 밭벼 논벼가 있고 오늘날은 모두 논벼를 재배합니다. 제가 중학생때 배우길, 논벼는 조선 왜란 이후 전국으로 확대됐다 들었습니다.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논벼로 전환됐고 다만 그 이전에는 논벼 재배를 법으로 금했는데, 물과 기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뭄이나 홍수(논벼를 재배하려면 당연히 지형 중에 낮은 땅에서 재배)로 인해 생산 변동량이 크니까요. 생산량이 비록 적다하더라도 그건 단순히 재배면적을 넓히면 되니까 화전을 해서라도 경작면적만 넓히면 되었고, 밭벼는 평평하든 경사진 산지든 재배가 가능하며 안정적 소출이 가능합니다. 과연 이런데도 선사시대때 농사를 지금의 농법과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dioxin27682 ай бұрын
똑똑하다....
@6sinegohwan3362 ай бұрын
동의합니다. 또한 당시의 쌀은 원시 쌀로 야생 쌀에서 현재 우리가 먹는 재배종의 중간 단계라 재배하는 양과 품질이 달랐을 것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농사법이 원시적이었던 것도 고려해야하구요
@Gogiphilia2 ай бұрын
밭벼라 해도 농한기가 없는건 아닐텐데요?
@박사이다-f5j2 ай бұрын
이양법에 대한 설명은 말씀하시는게 맞는데, 그거랑 상관없이,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에 걸쳐있는건 논벼나 밭벼나 동일한거 아닌가요? 그러니 밭벼건 논벼건 농사를 망칠수 있는거구요. 이양법은 기본적으로 물을 많이 필요로 하기때문에 가뭄에 더 취약하다는거일뿐, 밭벼가 추운 기후에도 잘 자란다는 의미는 아닌것 같은데요.
@g04jee2 ай бұрын
@@Gogiphilia 맞습니다. 농한기는 있죠. 그리고 일손도 논벼 모내기 할때처럼 많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 많은 땅을 경작해야 소출이 비슷하게 맞춰지니 더 넓은 땅에 그만큼의 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날의 농사 개념으로 친다면, 한반도를 동서로 나뉘었을때 그리고 남북으로 나뉘었을때 농업생산량은 당연히 서쪽, 그리고 남쪽일 겁니다. 그럼 옛날부터 우리나라 인구는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혹 역사에서 농업 생산량이 국력을 결정한다 가정한다면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한건 고려, 삼국을 통일한건 백제가 아닌 신라, 후삼국을 통일한 건 후백제가 아닌 고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