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하셔서 대한민국 일본에 공유에 장을 만들어 주세요^^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건 형제 자매 남매도 합니다 결론은 어떠하죠 서로 위로해주고 서로 협동해서 나아갑니다 그게 방향이구요...서로를 보완해서 나가는게 미래에 방향인거 같아요 백프로사람 없잖아요^^
@Bb_lllllllll3 жыл бұрын
오사카 아줌마와 부산 아저씨가 만나서 이야기하는거 기대해 보겠습니다 ㅎ
@composure733 жыл бұрын
가성비가 좋군요!잘보고 갑니다.계속 좋은 맛집 알려주세요~^^
@johnyu20033 жыл бұрын
푸근한 옆집아저씨 샤쪼상..오늘도 역시 맛집을 소개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처음처럼-j2q3 жыл бұрын
전 서울 촌놈 입니다 덕분에 다시 부산 가보고 싶어 졌습니다 물론 전에 몇 차례 가 봤습니다만 회만 먹고 와서 잘 몰랐던 부산을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VOID-bw5jc3 жыл бұрын
감자탕의 유래는 국어사전이나 지식사전에서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로 나옵니다. 돼지 해체?작업 하는 분들이 '감자'라 부르는 척수 부위가 있습니다. 그 이름따라 감자탕이라 불렀는데 손님들이 자꾸 감자탕에 감자가 없다고 문의가 쇄도하니 대답하기도 귀찮고 아예 야채 감자도 넣었다는 설과 1900년도에 경인선 철도 공사장 근처에서 한동길이라는 사람이 당시 유행하던 감자와 돼지등뼈 시래기 등을 넣어 만든 탕이 인기를 끌면서 감자탕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정육점등 축산업 유통업자들은 감자라는 부위는 들은 적 없다는걸 근거로 후자가 강력했으나 지역에 따라 은어로서 돼지 척수를 감자라 불렀다는 옛분들이 꽤 있었기에 사전에도 여러 설들을 소개만 할 뿐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진 않습니다.
감자탕의 감자는 뼈를 의미하는 건 아니고 감자 맞답니다 ㅎㅎ. 먹을 것 부족하던 시절에 고기집에서 살 발라내고 남은 뼈를 가지고 국물을 내고, 배부른 건더기로 감자를 넣어서 만든 거에요. 그때는 감자탕이 지금처럼 비싸지도 않았어요. 언젠가부터 감자 보다 뼈고기가 메인이 되고 가격도 올랐답니다. 파는 곳도 많지 않았고 시장 순대국 파는 곳에서나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문점까지 생겨났지요. 그런 음식이 많아요. 아구도 살이 물러서 잡히면 버리던 거였는데 배고프고 아까우니까 가격 싼 콩나물 잔뜩 넣어서 찜으로 먹기 시작한 거에요. 모두 궁휼요리라고나 할까요 ㅎㅎㅎ.
@shibato47333 жыл бұрын
"장수통을 밝힌 가로등은 일본 분위기가 넘치는 야점(야시장)으로 부산 중심시가지로서, 부산의 대표적 상점가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밤에 거니는 광복동거리는 낮보다 더 정겹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가지각색의 조명으로 더욱 아름답게 보이면서 다정하게 다가온다. 광복동거리는 초량왜관시절(1678∼1876) 동관과 서관을 잇는 길이었다. 이 길 좌우(남북)에 집들이 들어선 것은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하고 난 뒤의 일이다. 왜관시절 대마도에서 건너온 왜상들만 띄엄띄엄 주택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었으나, 1877년 이후 범선(帆船)과 어선들의 입항이 빈번해지면서 당시 남포동(미나미하마)은 선창으로서 곡물과 해산물 거래처로 번창하고, 그 배후도로로써 이 길도 발전해왔다. 이 길 한복판에 작은 도랑이 있고 그 양쪽으로 오래된 소나무와 벚나무가 방죽 위에 있어서 풍치가 매우 아름다웠으나 점차 벌채되고 혹은 말라죽고 말았단다. 일본인들은 이 도랑이 끝나는 북쪽을 `나와테(繩手)'라고 하였는데 `논두렁 길'이란 의미였다. 그 후 나와테가 와전되어 `나가테(長手)'가 되었고, 일제 때는 이 거리를 나가테도리(長手通)라 부르게 된다. 장수통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 개천 앵천(櫻川, 사쿠라가와) 또는 유천(柳川) 위에 나무다리(15개)를 놓아 개천 양쪽을 오갈 수 있게 하였다(2007년 광복로 시범가로사업을 추진하면서 굴착한 도로 아래에서 앵천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정교하게 견치석(犬齒石)으로 쌓은 암거(暗渠) 양벽도 확인되었다). 일본인의 증가로 도심지가 확장되자 1888년 6월 이곳 개천은 매립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수통은 변천정·남정·행정 등의 행정구역이 된다. 장수통은 일본조계의 중심거리가 되었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유명 상점들이 들어서고 상업활동이 활발히 벌어진다. 용두산공원에 설비된 용두산신사도 있어서 신사를 참배하는 등 대제(大祭)가 있을 때는 장수통은 인파로 넘쳐났었다. 1892년 10월이면 남변정과 행정일대에 큰 불이 난다. 1902년 4월 장수통거리에 가로등이 밝혀진다. 용미산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로서 불을 밝힌, 부산전기의 시초가 되며 장수통을 밝힌 가로등은 일본 분위기가 넘치는 야점(야시장)으로 부산 중심시가지로서, 부산의 대표적 상점가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1917년 12월엔 장수통에 전차가 개통되어 해방전까지 운행된다. 해방이 되자 장수통의 주택(적산가옥)은 일본인과 연관 있거나 일본인에 고용되어 있던 종업원이 인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때로는 힘 있는 자들이 강탈하다시피 호화로운 건물을 차지하는 등 주객이 전도되기도 했다. 해방 후 동명을 개칭할 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하였던 곳인데다 일제의 침략에서 해방된 조국 광복을 기리는 뜻에서 장수통 일대를 광복동이라 하고 장수통거리를 광복동거리라 부르게 된다. 문의 부산민학회장
전 돼지껍데기 선지 좋아하진 않지만.... 저 배추에 된장소스 넣어서 먹는걸 좋아해서 다른음식에 예로 시켜서 그안에 고기 건져서 쌈싸먹어도 좋을거 같음^^ 선생님들은 얼굴이 너무 선해보임^^ 얼굴에까지 표시가^^;; 근데 선지 안을 보니 선지만 빼면 딱 비빔밥에 고수나 고사리만 빼면 다 먹는거처럼 선지만 빼면 다 먹을수 있는 비쥬얼임^^
@DayWalker81283 жыл бұрын
크
@masaohashi64313 жыл бұрын
カボルカ イェ〜
@itsukohirose11563 жыл бұрын
早く、釜山にいきたーい😣
@주정희-v8t3 жыл бұрын
대선. ㅋㅋ부산사람 이네요.
@군필여고생-c2r3 жыл бұрын
리노상 둘리 닮음 ㅎㅎㅎ
@100jinho3 жыл бұрын
정말 아재들의 성지에 어울리 않는 두 아가씨^^
@mschoi78able3 жыл бұрын
감자의 의미를 일본분에게 배우네요ㅋㅋㅋ
@이순욱-s8r3 жыл бұрын
엄청 푸짐하네 :)
@RamenDaisuki69743 жыл бұрын
이거 완전 부산사람 다 됐구먼요 ㅋㅋㅋㅋ
@eppest90783 жыл бұрын
경남 언양 촌구석도 선지국밥 8000,감자탕 중은 30000인데.자갈치가 저 가격이라니 말잇못. 리노짱은 껍데기도 선지도 못먹나봐요? 사실 부산식 껍데기는 냄새가 나긴 합니다.저집은 모르겠지만. 사쬬아재 혼자 잘드셨네요
@to-ma-to-3 жыл бұрын
ももか、りの、社長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user-le2yo8oo9v3 жыл бұрын
부산은 맛집이 없어 서울이 젤 많고 절라도가 맛집이지
@말쭉거리박3 жыл бұрын
와 샤쬬님 감자가 돼지 등뼈 강원도 방언인데 그걸 다 아시네요 ㅎ 항상 잘보고 있고 좋은 영상 감사 드립니다
@seonmic3 жыл бұрын
엥 ㅋㅋ 강원도 방언이란 얘기는 또 처음 듣네요 그럼 강원도에서 감자는 뭐라고 불러요? 그리고 감자탕이 강원도에서 생긴 요리인가요?
@말쭉거리박3 жыл бұрын
@@seonmic 예전 음식 다큐에서 들은 걸 전달했을 뿐입니다 샤쬬님도 어디서 들어셨나 본데요 감자탕 설명하시는 거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