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탐(探) - 영산강을 품은 나주의 2천 년의 역사 / YTN D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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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dmb

9 жыл бұрын

영산강의 중심에서 영산강 문화를 꽃피운 나주에서 고대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고분 속 유물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 했던 나주의 2천 년 역사를 알아보고자 한다.
‘소경’이라 불리며 작은 한양이라 불렸던 나주는 전라도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였다.
우리나라 4대 강에 속하며 호남의 젖줄인 영산강은 350리를 흐르며 나주민의 삶의 문화이자 문화의 통로였다. 그 흐름의 중심에 나주가 있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많은 역사 기록에 나주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북동에서 남서로 나주 땅을 가로지르는 영산강은 나주평야를 기름지게 만들고 내륙과 해양을 연결해 나주를 교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주가 호남의 중심지로서 나주목사는 나주뿐만 아니라 호남을 대표해야 했기에 직책은 막중했고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들을 나주목사로 파견했다.
나주는 2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영산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고분군에서도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며 그동안 감쳐줬던 마한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거대한 고분이 존재했음에도 마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발굴되고 있는 영산강 유역 고분의 유물은 그 역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으며 마한이 독자적 문화권을 유지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산강의 중심에서 호남의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나주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 같은 역사도시이다.
[YTN DMB 기사원문] www.ytndmb.co.kr/mytn/program_view.php?key=201507271451416468&s_mcd=0089

Пікірлер: 8
@user-uk7xv5it3z
@user-uk7xv5it3z 4 жыл бұрын
나주호족들이 왕건을지지했다
@user-ox6uy9vw2t
@user-ox6uy9vw2t Жыл бұрын
담양에서 의병일으킨 분이 강 먼저라고 합니ㄷᆢ 유팽로 님
@user-ox6uy9vw2t
@user-ox6uy9vw2t Жыл бұрын
나주오씨가 고려건국에 도움주었는데 이후 인물 배려가 있는가요 배신당한것 아닌가요
@user-ox6uy9vw2t
@user-ox6uy9vw2t Жыл бұрын
나주에는 마한에 대한 문헌 기록도 없는데 왜 마한의 중심인가요 그리고 고고발굴이 마한 이라는 확증있ㄴㅏᆢ요 경상도에도 고고발굴 자료가 나오면 마한인가요
@qnseksrmrqhr
@qnseksrmrqhr 2 жыл бұрын
영산강이라고 하는 부분은 나주의 모든 역사 문화가 만들어지고 키워지고 꽃을 피웠던 본 무대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나주라고 하는 곳이 바로 영산강이라고 하는 천혜의 뱃길을 가지고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서로 나주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했던 그런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만약 후삼국의 견훤을 견제하기 위해서 육로로 할 수 있지만 바다를 통해서 전쟁을전쟁을일으킬 수 있는 곳이잖아요 태조가 나주에서 오다련의 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29 토호 세력을 만나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과연 고려라는 나라가 건국되었겠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나주사람들의 전푹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후백제의 견제 세력이 되어서 결국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수 있겠끔 해ㅐ 준곳이 나주라고 볼 수가 있지요. 고려 시대에 지방의 편제를 정리하게 되는데 그때 목이라고 하는 행정구역이 생기게 되고(왕건이 하사한 포상의 의미가 있음) 나주는 983년에 처음 목이 생길 때 전주, 승주(순천),나주 이렇게 세 개의 목이 됩니다.그러다가 1018년에 나주만이 유일하게 호남에서 목이라는 행정구역으로 개편이 되면서 그 지위를 유지하게 되고 호남을 실질적으로 관할하게 되는 행정 도시로 승격하게 되지요 나주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작은 한양이라 불릴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250년전만해도 인구가 7만5천명이 될 정도로 큰 도시였으며 전체적으로 봐도 조선시대에 5손가락 안에 든 고을이다.동점문이라는 이름은 시경에 나오는'동점우회'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나간다는 뜻으로 나주라는 고을의 이름도 큰 바다로 나가길 바라는 뜻에서 작명되었던 것이니 이문은 동쪽에 있으면서 영산강과 접해 있기 때문에 4대 성문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이였고.............환절기 날씨 주의하시어 늘 건강하시길........
@user-ox6uy9vw2t
@user-ox6uy9vw2t Жыл бұрын
익산 금마는 조선시대까지 마한을 언급한 바 그런즉 마한중심지 아닌가요
@user-po6fj4qz5q
@user-po6fj4qz5q 6 ай бұрын
마한 가야국과 동시대 인데 마한 역사 일제강점기때 지운 역사 마한 역사 찾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