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노역의 섬, 군함도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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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ADAMA

DAMADAMA

9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오다마입니다.
이번 여행 지역은 나가사키의 군함도입니다.
PS. 그냥 징용이었다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사람들마다 분명 의견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개인적인 의견이니 다른 분들의 의견도 존중하겠습니다.
제 채널은 일본 여행에 도움을 드리고 싶은 채널이기도 하니 참고해주세요.
인스타 ▶ / ___damadama
문 의 ▶ odamacinema@gmail.com
#나가사키 #후쿠오카 #유후인 #후쿠오카여행 #다유벳 #벳푸 #벳부 #오이타

Пікірлер: 107
@user-ec8go1jb9s
@user-ec8go1jb9s 8 ай бұрын
오이 오다마, 그런 식으로 증거도 없이 반일선동을 하면 일본인 친구들에게는 부끄럽지 않는가? 반일종족주의로 한번 해보자 이건가 그래 다까자 누가 누군지? 역사의 쇄뇌, 단일민족 조까라 우린 너희들과 씨부터가 틀리다 그래서 친일파 이러면 아가리 묵념할 줄 알았더냐 첫째, 말갈족 너희들, 고려 천리장성 이북사람들, 조선시대 북진정책에 의해 편입된, 주로 함경도와 조선족들 그들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이성계 고려를 쿠데타로 도륙하고 중국 상나라 기자가 발해만에 세운 조선을 기려, 국명을 조선이라 짓고, 나라를 명나라 속국(한 나라의 일부분)으로 팔아치웠던 회령출신, 그것도 모자라 백성의 반수 이상을 노비로 만들었던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실록에 왜군의 반수가 조선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비들과 민초들이 조선왕실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안사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군사반란 두목 이성계의 고조부다 이안사의 할아버지는 이인(李隣)이며 이인의 형이 고려시대인 1170년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이다 이의방은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수립하고 한자리 차지했으나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에 의해 처형되고 이의방의 가족들도 처형된다. 이성계 집구석은 반란을 잘 일으키는 반역도의 집구석이다 이안사는 전라도 전주에서 살았으나 관기(기생)를 빼돌리다가 관청에 발각되어 전주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도주하여 살았으나 전주의 산성 별감(몽고 군대로부터 지역을 지키는 군대의 지휘관)이 다시 삼척으로 부임해오자 또다시 의주로 도주하였다 이안사는 어찌하여 몽고군으로부터 의주를 지키라는 명을 받아 의주 병마로 임명되었으나 군대의 지휘관인 신집평을 죽이고 몽고군에 투항하여 몽고군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의 오동 일대를 다스리는 "다루가치"가 되어 호의호식하다가 죽었다. 고조 할배가 매국노였으니 손자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 듯.. 이성계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조선의 왕이 되자 이안사를 대왕으로 불렀다. 이안사의 무덤은 덕릉이라고 부르며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에 있다 둘째 전라도 너희들, 호남이라는 말은 중국 호남(후난)성을 일컽는 말이다 그 지역이 바로 마오쩌뚱으로 유명한 마오족의 본거지이다 그들 음식이 빨갛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랄 정도로 매우며, 그들은 등뒤에 비수를 숨기고 있다는 속담이 현재의 전라도 사람들이 뒤통수를 잘 친다는 속담과 유사하다 마오족은 중국에서도 범죄율이 높고 견원시되는 집시 정도로 취급받는 족속들이다 이런 그들이 만든 조선왕실이 일본에 의해 폐위되니 그 원한이 오늘날의 반일교육으로 이어지고, 안중근 등 테러리스트들이 영웅화되고 있다 보아라, 이 나라의 주류는 너희들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과 핏줄을 같이하는 야요이계다 mtDNA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고 할 정도로 한일간에 그 구성비율이 유사하고, 삼국시대 가야고분 DNA는 일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언어의 어간은 한일이 동일하고, 조사만 붙이면 단어 배열 순서는 필요없는 지구상 유일한 무순어 문법이다 한국의 야요인들이 갑자기 기원전 4세기경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실크로드가 아열대기후였던 '홀로세'때 유럽인과 함께 한반도로 들어와 농경시대를 연 신석기시대의 야요인들이다 홀로세가 끝나면서 실크로드는 유목민족들로 닫히게 되어 한반도는 독특한 언어권를 형성하게 된다 기원전 1800년경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들이 인도 원주민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동남아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베트남, 중국 광서성 전주 완산, 중국 해남, 호남성 사람들이 둥따오, 이어도, 마라도, 제주도, 전라도 루트로 들어온 고인돌문화의 청동기인들이다 이들이 바로 마한이다
@dama
@dama 8 ай бұрын
왜 반말이세요 생각 존중합니다 생각은 자유이니! 대신 반말은 하지마셔요!
@user-ec8go1jb9s
@user-ec8go1jb9s 8 ай бұрын
​​@@dama 내 댓글이 안 보여서 다시 수정하여 적습니다 본인이 판사역할을 하고 싶으시면, 당사자 쌍방의 주장을 충분히 듣고 서로간의 증거를 비교검토한 후에 일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리세요 어줍잖게 반일 영상물 함부로 만드시는게 아닙니다 억울한 사람들 만들면 천벌받는다는거 잘들 아시잖아요 (일본인의 증언)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 (炭坑の真実と栄光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에는, 필자인 후카마치 준스케(深町純亮) 씨가 '미츠비시 타카시마 탄광(三菱高島炭坑)'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의 기록이 자신의 체험으로서 실려 있다. 타카시마(高島)는 군함도(軍艦島) 즉 하시마(端島)에 가까이 있는 탄광섬으로, 강제연행을 주장하는 서적인 『정산되지 않은 쇼와 (精算されない昭和)』 (2000년,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 박경식[朴慶植], 타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타카시마의 상황을 알게 되면, 군함도의 상황도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미 예전에 기술했던 것처럼, 군함도에는 전시(戦時) 중에, 3채의 유곽(遊郭)이 있었는데, 그 중 1채는 조선인 전용이었다 (「지옥의 섬」 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한 군함도). 조선인을 노예처럼 사역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조선인 전용 유곽'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 전용의 유곽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 또한, 탄광의 가장 위험한 현장에서, 조선인을 일하게 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근본적으로 이상하다.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 (炭坑の真実と栄光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에 따르면, 탄광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장은, 땅속을 파고 나아가는 최선단(最先端)인 '키리하(切刃)'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숙련자가 아니면 채탄 작업 전체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미숙련자를 배치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탄광에서 노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한다. ​ 애초에, 조선인에게 가장 위험한 작업을 시킬 의도였다면, 차라리 전쟁터로 보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병사가 민간인에게 총을 쥐어주고, 뒤에서 총검으로 위협하며 일본군에 대한 전투를 강요한 사례가 다수 있다. 전쟁터와 국내 노동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당시, 탄광 일은 혹독하고 위험한 노동이었지만, 급료가 좋았기 때문에, 이 높은 급료를 바라고 찾아온 탄광 노동자들이 아주 많았다. 순사(巡査)의 초임급(初任給) (처음으로 임명되거나 취임하여 받는 급료) 이 월 45엔(円), 사무 계열의 대졸자 초임급이 75엔이었던 당시, 탄광 노동자는 임금과 수당 모두 합쳐 월 150~180엔이었다. ​ 강제연행설의 거짓을 뒷받침하는 증언 ​ 탄광은, 전전(戦前) (태평양전쟁 개전 이전) 은 물론, 전후(戦後)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일본의 부흥을 지탱한 자랑할만한 산업이었다. 탄광이 있는 지역은 번영했는데, 군함도도 온갖 물자와 시설이 갖춰진 자기완결(自己完結)이 가능한 곳이었다. 군함도에 조선인은 많이 있었는데, 전 도민(島民)들은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 개인적인 차별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고락(苦楽)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을 함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나의 처숙부인,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의 증언이 있다 (출처 - '군함도의 진실[軍艦島の真実]'). ​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는 2016년 12월 31일에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다음 해 1월 6일에 강제연행의 허구에 대해 증언을 할 예정이 있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테이블 위에 하시마(端島)에 대한 기록과 한국의 거짓을 나타내는 기사 등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일부를 소개한다. ​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목욕탕이 전부 공동목욕탕이었는데, 시오부로(潮風呂) (원본 주석 : 바닷물을 끓인 목욕탕) 였어요. 거기에 전부 같이 들어갔어요. 우리 소학교(小学校) (초등학교) 시절의 변소는, 전부 산 쪽에 있었는데, 그냥 구덩이만 파놓은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도 똑같았어요, 전부. 그런 생활이었기 때문에, 아무 차별도 없었어요. 결국, 종전(終戦)이 되어서 단체로 돌아갔지요, 카라후토(樺太) (사할린섬) 에서 응원하러 오거나, 중국에서 온 사람은, 전부. 단베이부네(団平船) (석탄 등의 운반선) 라고 해서 큰 배가 있어요. 그쪽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베이부네(団平船)라고 해서, 결국, 옛날에는 큰 화물을, 그때는 큰 배가 없었을 때니까, 그걸 실어서 뚱뚱한 배인 거예요, 노 젓는 배였지요. 그걸 2척인가 3척 끌고 왔어요. 한국 사람들도 '하시마 소학교(端島小学校)'에 전부 모였는데, 날짜는 따로따로 해서, 아침 6시부터 집합해서, 전부 배웅했어요. 그래서, 결국, 내 입장에서는, 그런 건 (차별) 전혀 없었다는 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이때 헤어질 때 너무 슬펐다고, 배에서 헤어질 때에. 나카노시마(中ノ島)에 배가 들어올 때까지,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 돌아가고 싶어도. 손을 이렇게 흔들면, 상대도 계속 손을 흔들었어요. 그게 점점 보이지 않게 되면 집으로 돌아갔죠」 ​ 「이주할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했으니까, 다 알 수는 없지만, 장우순(張又順)이란 여자는 있었지요. 자녀들 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같이 놀고 그랬어요, 쭉 그랬어요. (중략) 그래서, 아까 말한 고등(高等) 2년까지는 여자도 같은 사무소에 취직을 했다고. 그런 건, 당연하지요, 관계없었어요. 결국, 그런 식으로 학교와 관련해서는, 괴롭힌다든가 하는, 괴롭히기는커녕, 그쪽 사람이 체격이 더 좋았어요. 살집도 더 있고. 힘도 셌어요. 그래서, 스모(相撲)를 하든지 뭘 하든지, 싸움에서도 제일 강했어요, 공부는 잘 못했지만」 ​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하는 한국인의 증언과는 모순된다. 경관(警官)의 조선인 폭행에 대해서도, 「군함도의 진실(軍艦島の真実)」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 경관이 조선반도(朝鮮半島) (한반도) 출신자를 폭행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만, 하시마(端島)에 경찰관은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 「(하시마의 파출소[派出所]는) 하나였고, 순사(巡査) 2명, 순사부장(巡査部長)이 1명 있었어. 그 이외에는 없었다고」 ​ ── 경찰관에 의한 폭행이 있었습니까? ​ 「그건 말이지, 그 말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경찰관은 갱내(坑内)의 일은 관여하지 않았어, 절대로. 보안감독(保安監督)의 감독소(監督所)가 했으니까. 갱외(坑外)의 일은 경찰이 관할했지. 그게 제일 틀린 점이야」 ​ 나가사키 사투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당시의 일을 나도 직접 숙부(叔父)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강제연행은 논단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 ​ 한국과 중국, 일부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반일 일본인(反日日本人)'의 선동과 좌편향 언론의 편향보도 · 왜곡보도가 일본의 죄를 부르짖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증거도 사실도 없는,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라는 것이 와타나베 쇼이치(渡辺昇一) 씨, 사쿠라이 요시코(桜井よし子) 씨, 코분유(黄文雄) 씨,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씨 등의 연구와 검증으로 여러 차례 밝혀졌다. ​ 일찍이 일본의 정치가가 중국과 한국의 부당한 트집에 사죄를 함으로써, 이 트집이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인정을 받아 스스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에 타국의 간섭을 허용한다고 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 까지 등장시켰다. 근린제국조항이란, 교과서의 검정기준에 규정된 조항으로, 아시아 각국과의 역사에 대하여 국제이해(国際理解)와 국제강조(国際強調)의 견지에서 배려를 요구하는 조항이다. ​ 강제연행과 종군위안부라고 하는 사실무근의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가 역사 교과서와 참고서에 기재되어, 아이들에게 자학사관(自虐史観)을 심고 있다. 아직까지도 사실을 모르고, 잘못된 역사를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user-ec8go1jb9s
@user-ec8go1jb9s 8 ай бұрын
​@@dama 어이가 없네 댓글은 자꾸 지워지고.. (일본인의 증언)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 (炭坑の真実と栄光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에는, 필자인 후카마치 준스케(深町純亮) 씨가 '미츠비시 타카시마 탄광(三菱高島炭坑)'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의 기록이 자신의 체험으로서 실려 있다. 타카시마(高島)는 군함도(軍艦島) 즉 하시마(端島)에 가까이 있는 탄광섬으로, 강제연행을 주장하는 서적인 『정산되지 않은 쇼와 (精算されない昭和)』 (2000년,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 박경식[朴慶植], 타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타카시마의 상황을 알게 되면, 군함도의 상황도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미 예전에 기술했던 것처럼, 군함도에는 전시(戦時) 중에, 3채의 유곽(遊郭)이 있었는데, 그 중 1채는 조선인 전용이었다 (「지옥의 섬」 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한 군함도). 조선인을 노예처럼 사역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조선인 전용 유곽'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 전용의 유곽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 또한, 탄광의 가장 위험한 현장에서, 조선인을 일하게 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근본적으로 이상하다.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 (炭坑の真実と栄光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에 따르면, 탄광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장은, 땅속을 파고 나아가는 최선단(最先端)인 '키리하(切刃)'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숙련자가 아니면 채탄 작업 전체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미숙련자를 배치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탄광에서 노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한다. ​ 애초에, 조선인에게 가장 위험한 작업을 시킬 의도였다면, 차라리 전쟁터로 보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병사가 민간인에게 총을 쥐어주고, 뒤에서 총검으로 위협하며 일본군에 대한 전투를 강요한 사례가 다수 있다. 전쟁터와 국내 노동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당시, 탄광 일은 혹독하고 위험한 노동이었지만, 급료가 좋았기 때문에, 이 높은 급료를 바라고 찾아온 탄광 노동자들이 아주 많았다. 순사(巡査)의 초임급(初任給) (처음으로 임명되거나 취임하여 받는 급료) 이 월 45엔(円), 사무 계열의 대졸자 초임급이 75엔이었던 당시, 탄광 노동자는 임금과 수당 모두 합쳐 월 150~180엔이었다. ​ 강제연행설의 거짓을 뒷받침하는 증언 ​ 탄광은, 전전(戦前) (태평양전쟁 개전 이전) 은 물론, 전후(戦後)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일본의 부흥을 지탱한 자랑할만한 산업이었다. 탄광이 있는 지역은 번영했는데, 군함도도 온갖 물자와 시설이 갖춰진 자기완결(自己完結)이 가능한 곳이었다. 군함도에 조선인은 많이 있었는데, 전 도민(島民)들은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 개인적인 차별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고락(苦楽)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을 함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나의 처숙부인,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의 증언이 있다 (출처 - '군함도의 진실[軍艦島の真実]'). ​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는 2016년 12월 31일에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다음 해 1월 6일에 강제연행의 허구에 대해 증언을 할 예정이 있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테이블 위에 하시마(端島)에 대한 기록과 한국의 거짓을 나타내는 기사 등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일부를 소개한다. ​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목욕탕이 전부 공동목욕탕이었는데, 시오부로(潮風呂) (원본 주석 : 바닷물을 끓인 목욕탕) 였어요. 거기에 전부 같이 들어갔어요. 우리 소학교(小学校) (초등학교) 시절의 변소는, 전부 산 쪽에 있었는데, 그냥 구덩이만 파놓은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도 똑같았어요, 전부. 그런 생활이었기 때문에, 아무 차별도 없었어요. 결국, 종전(終戦)이 되어서 단체로 돌아갔지요, 카라후토(樺太) (사할린섬) 에서 응원하러 오거나, 중국에서 온 사람은, 전부. 단베이부네(団平船) (석탄 등의 운반선) 라고 해서 큰 배가 있어요. 그쪽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베이부네(団平船)라고 해서, 결국, 옛날에는 큰 화물을, 그때는 큰 배가 없었을 때니까, 그걸 실어서 뚱뚱한 배인 거예요, 노 젓는 배였지요. 그걸 2척인가 3척 끌고 왔어요. 한국 사람들도 '하시마 소학교(端島小学校)'에 전부 모였는데, 날짜는 따로따로 해서, 아침 6시부터 집합해서, 전부 배웅했어요. 그래서, 결국, 내 입장에서는, 그런 건 (차별) 전혀 없었다는 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이때 헤어질 때 너무 슬펐다고, 배에서 헤어질 때에. 나카노시마(中ノ島)에 배가 들어올 때까지,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 돌아가고 싶어도. 손을 이렇게 흔들면, 상대도 계속 손을 흔들었어요. 그게 점점 보이지 않게 되면 집으로 돌아갔죠」 ​ 「이주할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했으니까, 다 알 수는 없지만, 장우순(張又順)이란 여자는 있었지요. 자녀들 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같이 놀고 그랬어요, 쭉 그랬어요. (중략) 그래서, 아까 말한 고등(高等) 2년까지는 여자도 같은 사무소에 취직을 했다고. 그런 건, 당연하지요, 관계없었어요. 결국, 그런 식으로 학교와 관련해서는, 괴롭힌다든가 하는, 괴롭히기는커녕, 그쪽 사람이 체격이 더 좋았어요. 살집도 더 있고. 힘도 셌어요. 그래서, 스모(相撲)를 하든지 뭘 하든지, 싸움에서도 제일 강했어요, 공부는 잘 못했지만」 ​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하는 한국인의 증언과는 모순된다. 경관(警官)의 조선인 폭행에 대해서도, 「군함도의 진실(軍艦島の真実)」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 경관이 조선반도(朝鮮半島) (한반도) 출신자를 폭행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만, 하시마(端島)에 경찰관은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 「(하시마의 파출소[派出所]는) 하나였고, 순사(巡査) 2명, 순사부장(巡査部長)이 1명 있었어. 그 이외에는 없었다고」 ​ ── 경찰관에 의한 폭행이 있었습니까? ​ 「그건 말이지, 그 말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경찰관은 갱내(坑内)의 일은 관여하지 않았어, 절대로. 보안감독(保安監督)의 감독소(監督所)가 했으니까. 갱외(坑外)의 일은 경찰이 관할했지. 그게 제일 틀린 점이야」 ​ 나가사키 사투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당시의 일을 나도 직접 숙부(叔父)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강제연행은 논단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 ​ 한국과 중국, 일부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반일 일본인(反日日本人)'의 선동과 좌편향 언론의 편향보도 · 왜곡보도가 일본의 죄를 부르짖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증거도 사실도 없는,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라는 것이 와타나베 쇼이치(渡辺昇一) 씨, 사쿠라이 요시코(桜井よし子) 씨, 코분유(黄文雄) 씨,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씨 등의 연구와 검증으로 여러 차례 밝혀졌다. ​ 일찍이 일본의 정치가가 중국과 한국의 부당한 트집에 사죄를 함으로써, 이 트집이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인정을 받아 스스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에 타국의 간섭을 허용한다고 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 까지 등장시켰다. 근린제국조항이란, 교과서의 검정기준에 규정된 조항으로, 아시아 각국과의 역사에 대하여 국제이해(国際理解)와 국제강조(国際強調)의 견지에서 배려를 요구하는 조항이다. ​ 강제연행과 종군위안부라고 하는 사실무근의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가 역사 교과서와 참고서에 기재되어, 아이들에게 자학사관(自虐史観)을 심고 있다. 아직까지도 사실을 모르고, 잘못된 역사를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dama
@dama 8 ай бұрын
전 지운적이없는뎅..
@user-yh4qg4eh3c
@user-yh4qg4eh3c 8 ай бұрын
댓글에다가 욕까지 하시는건 좀 그렇지않나요. 개념없어보이네요.
@user-jf1vm1lp2q
@user-jf1vm1lp2q 7 ай бұрын
젊은 청년에게 감동 받는게 흔치 않은 시대에 이런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namheepark8140
@namheepark8140 9 ай бұрын
마음이 무겁고 먹먹하네요. 영상 올리시는거 쉽지 않았을텐데 수고 하셨어요. 하루빨리 군함도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가 세계에 알려졌으면 합니다. 고생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user-qz9gq5dv6x
@user-qz9gq5dv6x 9 ай бұрын
군함도 영상이라니ㅜ 가이드에게 한국인임을 밝히고 질문하신 부분 너무 멋있었어요! 예상했던 대답이라 아쉽긴하지만-_-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당~
@user-xs4rm3lj3u
@user-xs4rm3lj3u 9 ай бұрын
이야~~영상 정말 좋은데요 ㅎㅎ 수고하셨습니다
@user-zj9nq5it8o
@user-zj9nq5it8o 8 ай бұрын
영상 퀄리티가 너무 좋네여👍
@tunakimchisoup
@tunakimchisoup 3 ай бұрын
군함도 처음 유네스코 지정한다고 시끄러웠던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 소식이없어 궁금했는데 알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 영상입니다.
@ohjin1034
@ohjin1034 9 ай бұрын
마음이 무거워 지내요...ㅜㅜ수고 많으셨습니다~잘 봤습니다~감사합니다
@user-nl5js3fo6u
@user-nl5js3fo6u 8 ай бұрын
고생하셨네요...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pi9so6gn8y
@user-pi9so6gn8y 9 ай бұрын
잘 봤어요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user-ql9kh7rl1z
@user-ql9kh7rl1z 8 ай бұрын
오다마님이 이런 군함도의 실황을 알려주시니 더더 가보고 싶어집니다. 대신 영상으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user-ou4ss4yt8n
@user-ou4ss4yt8n 9 ай бұрын
생각이 많아지는 영상이네요 잘봤습니다
@user-fy7bg6nn2r
@user-fy7bg6nn2r 9 ай бұрын
이번 영상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고구마 한 100개쯤 먹은 이 기분은 뭘까요 다마님 좋은 영상 감사드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상이네요
@jbjj2041
@jbjj2041 9 ай бұрын
정말 퀄리티 높은 영상입니다 응원합니다 빨려드네요 영상에
@user-yh4qg4eh3c
@user-yh4qg4eh3c 9 ай бұрын
가슴이 먹먹하네요 눈물이 납니다 다마님 덕분에 이렇게 자세하게 군함도를 보게되었네요 귀한영상 촬영 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user-ec8go1jb9s
@user-ec8go1jb9s 8 ай бұрын
(일본인의 증언)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 (炭坑の真実と栄光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에는, 필자인 후카마치 준스케(深町純亮) 씨가 '미츠비시 타카시마 탄광(三菱高島炭坑)'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의 기록이 자신의 체험으로서 실려 있다. 타카시마(高島)는 군함도(軍艦島) 즉 하시마(端島)에 가까이 있는 탄광섬으로, 강제연행을 주장하는 서적인 『정산되지 않은 쇼와 (精算されない昭和)』 (2000년,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 박경식[朴慶植], 타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타카시마의 상황을 알게 되면, 군함도의 상황도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미 예전에 기술했던 것처럼, 군함도에는 전시(戦時) 중에, 3채의 유곽(遊郭)이 있었는데, 그 중 1채는 조선인 전용이었다 (「지옥의 섬」 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한 군함도). 조선인을 노예처럼 사역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조선인 전용 유곽'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 전용의 유곽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 또한, 탄광의 가장 위험한 현장에서, 조선인을 일하게 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근본적으로 이상하다.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 (炭坑の真実と栄光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에 따르면, 탄광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장은, 땅속을 파고 나아가는 최선단(最先端)인 '키리하(切刃)'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숙련자가 아니면 채탄 작업 전체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미숙련자를 배치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탄광에서 노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한다. ​ 애초에, 조선인에게 가장 위험한 작업을 시킬 의도였다면, 차라리 전쟁터로 보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병사가 민간인에게 총을 쥐어주고, 뒤에서 총검으로 위협하며 일본군에 대한 전투를 강요한 사례가 다수 있다. 전쟁터와 국내 노동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당시, 탄광 일은 혹독하고 위험한 노동이었지만, 급료가 좋았기 때문에, 이 높은 급료를 바라고 찾아온 탄광 노동자들이 아주 많았다. 순사(巡査)의 초임급(初任給) (처음으로 임명되거나 취임하여 받는 급료) 이 월 45엔(円), 사무 계열의 대졸자 초임급이 75엔이었던 당시, 탄광 노동자는 임금과 수당 모두 합쳐 월 150~180엔이었다. ​ 강제연행설의 거짓을 뒷받침하는 증언 ​ 탄광은, 전전(戦前) (태평양전쟁 개전 이전) 은 물론, 전후(戦後)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일본의 부흥을 지탱한 자랑할만한 산업이었다. 탄광이 있는 지역은 번영했는데, 군함도도 온갖 물자와 시설이 갖춰진 자기완결(自己完結)이 가능한 곳이었다. 군함도에 조선인은 많이 있었는데, 전 도민(島民)들은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 개인적인 차별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고락(苦楽)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을 함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나의 처숙부인,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의 증언이 있다 (출처 - '군함도의 진실[軍艦島の真実]'). ​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는 2016년 12월 31일에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다음 해 1월 6일에 강제연행의 허구에 대해 증언을 할 예정이 있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테이블 위에 하시마(端島)에 대한 기록과 한국의 거짓을 나타내는 기사 등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일부를 소개한다. ​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목욕탕이 전부 공동목욕탕이었는데, 시오부로(潮風呂) (원본 주석 : 바닷물을 끓인 목욕탕) 였어요. 거기에 전부 같이 들어갔어요. 우리 소학교(小学校) (초등학교) 시절의 변소는, 전부 산 쪽에 있었는데, 그냥 구덩이만 파놓은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도 똑같았어요, 전부. 그런 생활이었기 때문에, 아무 차별도 없었어요. 결국, 종전(終戦)이 되어서 단체로 돌아갔지요, 카라후토(樺太) (사할린섬) 에서 응원하러 오거나, 중국에서 온 사람은, 전부. 단베이부네(団平船) (석탄 등의 운반선) 라고 해서 큰 배가 있어요. 그쪽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베이부네(団平船)라고 해서, 결국, 옛날에는 큰 화물을, 그때는 큰 배가 없었을 때니까, 그걸 실어서 뚱뚱한 배인 거예요, 노 젓는 배였지요. 그걸 2척인가 3척 끌고 왔어요. 한국 사람들도 '하시마 소학교(端島小学校)'에 전부 모였는데, 날짜는 따로따로 해서, 아침 6시부터 집합해서, 전부 배웅했어요. 그래서, 결국, 내 입장에서는, 그런 건 (차별) 전혀 없었다는 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이때 헤어질 때 너무 슬펐다고, 배에서 헤어질 때에. 나카노시마(中ノ島)에 배가 들어올 때까지,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 돌아가고 싶어도. 손을 이렇게 흔들면, 상대도 계속 손을 흔들었어요. 그게 점점 보이지 않게 되면 집으로 돌아갔죠」 ​ 「이주할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했으니까, 다 알 수는 없지만, 장우순(張又順)이란 여자는 있었지요. 자녀들 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같이 놀고 그랬어요, 쭉 그랬어요. (중략) 그래서, 아까 말한 고등(高等) 2년까지는 여자도 같은 사무소에 취직을 했다고. 그런 건, 당연하지요, 관계없었어요. 결국, 그런 식으로 학교와 관련해서는, 괴롭힌다든가 하는, 괴롭히기는커녕, 그쪽 사람이 체격이 더 좋았어요. 살집도 더 있고. 힘도 셌어요. 그래서, 스모(相撲)를 하든지 뭘 하든지, 싸움에서도 제일 강했어요, 공부는 잘 못했지만」 ​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하는 한국인의 증언과는 모순된다. 경관(警官)의 조선인 폭행에 대해서도, 「군함도의 진실(軍艦島の真実)」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 경관이 조선반도(朝鮮半島) (한반도) 출신자를 폭행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만, 하시마(端島)에 경찰관은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 「(하시마의 파출소[派出所]는) 하나였고, 순사(巡査) 2명, 순사부장(巡査部長)이 1명 있었어. 그 이외에는 없었다고」 ​ ── 경찰관에 의한 폭행이 있었습니까? ​ 「그건 말이지, 그 말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경찰관은 갱내(坑内)의 일은 관여하지 않았어, 절대로. 보안감독(保安監督)의 감독소(監督所)가 했으니까. 갱외(坑外)의 일은 경찰이 관할했지. 그게 제일 틀린 점이야」 ​ 나가사키 사투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당시의 일을 나도 직접 숙부(叔父)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강제연행은 논단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 ​ 한국과 중국, 일부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반일 일본인(反日日本人)'의 선동과 좌편향 언론의 편향보도 · 왜곡보도가 일본의 죄를 부르짖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증거도 사실도 없는,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라는 것이 와타나베 쇼이치(渡辺昇一) 씨, 사쿠라이 요시코(桜井よし子) 씨, 코분유(黄文雄) 씨,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씨 등의 연구와 검증으로 여러 차례 밝혀졌다. ​ 일찍이 일본의 정치가가 중국과 한국의 부당한 트집에 사죄를 함으로써, 이 트집이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인정을 받아 스스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에 타국의 간섭을 허용한다고 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 까지 등장시켰다. 근린제국조항이란, 교과서의 검정기준에 규정된 조항으로, 아시아 각국과의 역사에 대하여 국제이해(国際理解)와 국제강조(国際強調)의 견지에서 배려를 요구하는 조항이다. ​ 강제연행과 종군위안부라고 하는 사실무근의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가 역사 교과서와 참고서에 기재되어, 아이들에게 자학사관(自虐史観)을 심고 있다. 아직까지도 사실을 모르고, 잘못된 역사를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jl1831
@jl1831 9 ай бұрын
개인 유투버로써 이렇게 좋은 컨텐츠 참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user-rf2fl2tm4i
@user-rf2fl2tm4i 3 ай бұрын
이렇게 용기내서 가신것도 너무 멋지시고 가이드분께 직접 여쭤보신것도 좋았던것같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감동적인 영상이였고, 다시 일본 사람들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하게되네요..
@user-yk9fw7ip5c
@user-yk9fw7ip5c 8 ай бұрын
저도 다음주에 후쿠오카에 가는데 아무래도 쇼핑이 주된도시이기에 쇼핑에 관심이 없는 저는 여기저기 알이보다가 군함도 투어까지 예약을 했네요. 영상만 봐도 뭔가 알수없는 기운에 힘이 빠지는데 막상 가서 보면 어떨지 한편으로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user-zk7dp6ol2j
@user-zk7dp6ol2j 3 ай бұрын
차ㅁ고되었어요🎉
@satorukentoji
@satorukentoji 9 ай бұрын
마음이 너무 먹먹해지네요......
@user-es3si8zf8d
@user-es3si8zf8d 8 ай бұрын
역사를 널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user-xv1jv8fq7b
@user-xv1jv8fq7b 9 ай бұрын
자세한 설명을 못하는 이유는 본인들이 더 잘 알듯하내요 오늘도 좋은 영상 잘 보고 갑니다
@q__lee
@q__lee 9 ай бұрын
이번 영상 퀄리티 역대급이네요..
@dama
@dama 9 ай бұрын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yain3786
@yain3786 8 ай бұрын
저도 11월에 군함도를 갑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가볼려고 하던 차에 우리와 역사적으로도 잊지 말아야 할 군함도가 생각나서 첫번째로 군함도을 가볼려고 합니다. 오다마님의 영상을 보니 그 군함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무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영상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bluesky-iv5ev
@bluesky-iv5ev 9 ай бұрын
일본을 여행했을때 군함도 퍼즐을 만들어서 파는걸 봤습니다, 일본 아이들에게는 그저 자랑할 만한 곳정도겠지만 그걸 본 저는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오다마 님 의미있는 영상 감사합니다
@user-fm5cc4db6v
@user-fm5cc4db6v 3 ай бұрын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만 하는 일본을 보면서 화가 많이났지만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기위해 직접 가신 그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user-td2yf2fd6o
@user-td2yf2fd6o 19 сағат бұрын
그 시절에 저런 대단지 아파트를 그것도 섬에 지어서 탄광공장을 만들었다는게 건축과 중공업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심지어 섬에 저런 아파트 단지를 만들고 그 아파트에 에어컨도 있었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shkim9188
@shkim9188 9 ай бұрын
오다마 가이드님 오사카에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귀무덤도 알수 있었고 슬플 역사도 일본에 대한 역사도 잘 배웠습니다
@user-ov1ny4kw7l
@user-ov1ny4kw7l 7 ай бұрын
다마님 영상 퀼리티 최고임돠👍 전 유네스코 등재 당해년에 나가사키를 갔는데 아쉽게 군함도는 못가고 인근 이오섬에서나마 망원경으로 군함도 봤어요😢 또 원폭기념관에 가면 조선인 추모비 있는데 그때 당시 정말 많은분이 찾아주셨고 헌화하시고 가셨더라구요😂
@user-dk4nn7ws2b
@user-dk4nn7ws2b 7 ай бұрын
잘 쉬고계시죠? 보고파용😊
@marimarihosp3035
@marimarihosp3035 7 ай бұрын
강제징용이 아니라 징용! 징용노동자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국가 건설에 공헌했다. 한자를 공부하고 당시의 신문을 읽으십시오. 동아일보 1946.3.17 - 徴用 (징용) 가서 "배워운" 技術 (기술) 祖国再建 (조국 재건) 의 産業 (산업) 에 動員 (동원) 技能別 (기능별) 로 配置 (배치)
@user-yc2hg4pq4s
@user-yc2hg4pq4s 5 ай бұрын
​​@@marimarihosp3035당시 동원은 처음에는 자유의사를 빙자한 강제였다. 예를 들어 일본 기업에 조선인 노무자를 징용할 권한을 준다. 그러면 그 기업의 사원이 조선의 특정 지역을 찾아가서 면사무소, 주재소, 경찰을 동원해 징용 대상자를 모집했다. 면장, 호적계 면서기, 순사 등이 젊은이를 직접 찾아간다. 징용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폭행이 가해지고 배급을 끊으며, 도망가면 연좌제를 통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므로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형식적인 절차 없이 바로 잡아갔다. 원칙적으로 아동노동은 금지였으나, 인원수가 모자랄 때 억지로 규정을 무시하고 끌고 간 경우 현지에서 아동이라는 점이 발견되어도 고국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14세에 하시마섬에 징용된 사례가 있다. 当時、ドンウォンは最初は自由医師をかき混ぜた強制だった。 例えば日本企業に朝鮮人労務者を徴用する権限を与える。 その後、その企業の社員が朝鮮の特定地域を訪れ、面事務所、駐在所、警察を動員して徴用対象者を募集した。 面長、戸籍界の面書記、巡査などが若者を直接訪ねていく。 徴用に出ないとすれば、その場で暴行が加わって配給をやめ、逃げれば連座制を通じて家族たちに被害があるので参加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後には形式的な手続きなしですぐに捕まった。 原則として児童労働は禁止だったが、人数が足りないときに無理やり規定を無視して引っ張っていった場合、現地で児童という点が発見されても故国に返してくれなかった。 14歳には島島に徴用された事例がある。
@Jinny302
@Jinny302 9 ай бұрын
흡연하지 말라고 적혀있는데 흡연하는 사람은 뭔지..영상 잘 보았네요. 수고하셨어요.
@Kokopoko-qw9dr
@Kokopoko-qw9dr 3 ай бұрын
이러니 일본을 좋아할래야 좋아할수가 없음
@dyqpqp
@dyqpqp 9 ай бұрын
❤❤❤❤❤
@8439hauy
@8439hauy 9 ай бұрын
시원하게 몸을 풀으러 왔구만
@user-pz2kk5ph6c
@user-pz2kk5ph6c 4 ай бұрын
15:58 ...
@LUNA-hs2is
@LUNA-hs2is 9 ай бұрын
과거엔 많은 사람을 징용하고 죽게한 기업이지만 지금의 현대자동차, 나아가 지금의 발전된 한국을 만든 온갖 기술과 기반을 전수해준 미쯔비시 참 기묘하네
@sepia9282
@sepia9282 8 ай бұрын
중국 가면 6.25는 남측이 침공 했고 미국을 막기 위해 참전 했다고 학교애서 가르칩니다. 그리고 휴전 상태라 전쟁에 대한 피해보상과 책임을 전혀 따지지도 못하는 상태이죠.
@user-pn6wb5hv7f
@user-pn6wb5hv7f 9 ай бұрын
그곳에서도 지옥이었고 탈출하고자 바다에 빠져서도 목숨을 잃어 결국엔 탈출할 수 없었던 진정 지옥의 섬 ㅜㅜ
@kayjoe8919
@kayjoe8919 4 ай бұрын
노동환경이 혹독했던건 사실이지만 강제징용까지는 부풀려진거 아닌가요? 저기 환경 ㅈㄴ 헬이라사 일본인들도 꽤 많이 죽지 않음?
@skyrimsonata3629
@skyrimsonata3629 3 ай бұрын
강제노역을 자발적인 노동이라니 노동 대가로 하루 한끼주고 도망자는 죽창으로 찔러죽였다 ㆍ일본총독부 기록 그대로 가져옴
@candy-qh5si
@candy-qh5si 9 ай бұрын
귀한영상 감사합니다. 일본에게 있어 역사는 입맛대로죠. 후손들에게도 나쁜기록은 안가르치니까 혐한극우세력이란게 활개지겠죠. 잘못한것도 없는데 왜미워하냐는 거죠. 참으로 희한한 민족입니다.
@sepia9282
@sepia9282 8 ай бұрын
중국 가면 6.25는 남측이 침공 했고 미국을 막기 위해 참전 했다고 학교애서 가르칩니다. 그리고 휴전 상태라 전쟁에 대한 피해보상과 책임을 전혀 따지지도 못하는 상태이죠
@bin6474
@bin6474 5 ай бұрын
진짜 개인이 촬영하신거 맞나요?! 영상퀄리티 너무 좋은거 같아요🎉
@dama
@dama 5 ай бұрын
호..혼자서 2박 3일 촬영했습니다ㅎㅎ
@user-si8fo1vv6p
@user-si8fo1vv6p 9 ай бұрын
오 섬에 들어갈 수도 있네
@user-zc5or5eu8u
@user-zc5or5eu8u 9 ай бұрын
몇분정도 될까요? 길었으면..
@dama
@dama 9 ай бұрын
어떤게요~~~^^??
@NOVITA_Tv
@NOVITA_Tv 8 ай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를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로 배운다
@cap42sin
@cap42sin 9 ай бұрын
저는 문화 역사 정치 이런것들을 다 따로따로 보기는하는데 참 뭐랄까요.... 뉴스에서도 나왔고 정부간의 약속인데 안지키는거보면....나중에 항의하면 가이드의 말을 따서 우리는 말해주고있다 라고 할것같은 느낌이네요....
@kuroneko9292
@kuroneko9292 9 ай бұрын
교과서로 역사의 치부 등을 잘 배우지 않으니 모르는 사람이 많죠..맞은 사람은 기억해도 때린 사람은 기억 못한다라는 말이 이럴때 쓰이는건가 싶습니다. 또 당시 2차 대전 당시 타국을 착취하는 국가들이 꽤나 부유했던걸 생각해보면 전쟁에 참여 안하고 일이나 하셨던 현재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온라인게임처럼 win이냐 lose냐 그거만 궁금했을 수도 있겠죠.. 귀 닫고 입 닫고 있는 상대와 대화자체가 성립이 안되니 당했던 국가의 입장은 참..
@안먹어
@안먹어 9 ай бұрын
타 영상에서 군함도 영상을 봤었는데 그때 관광하러 온 일본인 몇 몇 한테 물어보고 실제로 이런 곳이었다 라고 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고 하던데. 근데 그 몰랐다는 게 진짜로 모르는 건지, 어찌 보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는 그 아무도 모를 듯;;
@youngilman
@youngilman 8 ай бұрын
좋은 일본 분들도 많다는 걸 잘 알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분들은 본인의 선조 또는 할아버지 세대들이 어떤 만행들을 했는지 잘 모르고 아는 사람들은 그걸 덮고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게 문제 인 것 같습니다 최소한 부끄러운 줄 만 알아도 좋으려만 ...
@NoJam-co4cc4vs6d
@NoJam-co4cc4vs6d 9 ай бұрын
일본어 모르고 투어를 가면 몰랐을 내용인데 이렇게 들으니 정말 답답하네요.
@Gekogoblin
@Gekogoblin 9 ай бұрын
저도 군함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입장이라 일본인 가이드분 이야기를 최대한 수용적으로 들어보면 징용된 사람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나 보네요...
@sepia9282
@sepia9282 8 ай бұрын
일본에서는 삼청교육대 같은 역할 한거죠 마루타 부대에 일본인도 있었다고 하며, 독일 나치도 반대하는 지식인이나 의원들 유태인 포로와 함께 수용 했다고 합니다
@Alex99tlqkf
@Alex99tlqkf 7 ай бұрын
일본인이 징용됐을 때는 말 그대로 돈이 필요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잣대도 조선인한테 들이밀어 조선인들이 돈 때문에 일을 한것이지 강제징용을 하지는 않았다 라는게 늘상 있었던 일본의 주장이죠. 실제론 가족들을 들먹여 협박을 하기도 하고 돈을 벌게 해준다며 속이고 끌고 왔지만 실제 급여 명세서에서는 교묘하게 숙박비니 식비니 절감해가며 월급도 주지않고 제일 위험한 구간에서 일을 하도록 시켰어요. 기록되어 있는 조선인 사상자만 120명 정도인데 영상에서 220명 정도가 사상자라고 하니 100명은 다른 외국인이거나 일본인이 포함되어 있겠네요.
@user-vj4pu3tj1c
@user-vj4pu3tj1c 9 ай бұрын
강제징용 사실 안 숨기면 터치 안하겠다했는데 대체 왜 한마디도 안하는지...
@nekosensei744
@nekosensei744 2 ай бұрын
한국군이 베트남양민학살한곳도 리뷰부탁합니다
@user-wy1uc6go9h
@user-wy1uc6go9h 9 ай бұрын
씁쓸한들,먹먹한들,일본여행 제일 많이 가는 한국인, 일본귀화 많이 하는 것도 한국인, 욕할게 있나?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잘 먹고 잘 산다,
@jeedms
@jeedms 9 ай бұрын
진짜 먹먹하구만~~~~~~~~~~~~~~~~~~~~~~~~~~
@suzzang5279
@suzzang5279 9 ай бұрын
유네스코 문화유산 담배 피는데 아무도 제지안하는것도 이해가안가네ㅠ
@jnk8845
@jnk8845 8 ай бұрын
ㅡㅡ.
@ygkim7718
@ygkim7718 28 күн бұрын
한국인들이 그곳에 가고싶겠어요?? 가슴아픈곳이고 간다해도 화가 치밀어오를텐데 조선인 강제징역 당한곳이 유네스코에 등재 됬는데 가고싶겠어요???
@user-lgwgbmsh16
@user-lgwgbmsh16 27 күн бұрын
@user-wt9sn7yh5f
@user-wt9sn7yh5f 23 күн бұрын
그럴수록 더더욱 가야죠... 우리 선조분들이 어떤곳에서 어떤 고통을 받으면서 강제로 일을 하셨는지 직접 보고 직접 느껴야죠
@NOVITA_Tv
@NOVITA_Tv 8 ай бұрын
징용단어는 이미 강제입니다. 강제징용.한국어 공부 조금 더 .그리고 용산역앞 울산공원 전국각지에 징용상 동상이 있습니다. 또 설치하려고 하고요(거제) 그 모델이 조선 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60년대 일본인 모델입니다.
@user-kr2mc3ge6o
@user-kr2mc3ge6o 4 ай бұрын
과거는 과거인데
@user-pz2kk5ph6c
@user-pz2kk5ph6c 4 ай бұрын
너 일본인이냐? 과거는 과거인데 ㅋㅋㅋㅋㅋ ㅇㅈㄹ 하네 과거에 일본이 잘못했으니까 이러는거 아냐 ...
@marimarihosp3035
@marimarihosp3035 7 ай бұрын
強制徴用ではなく徴用だよ。 日本まで来てなに勉強してんだよ。
@Alex99tlqkf
@Alex99tlqkf 7 ай бұрын
강제징용 맞아요. 모르면 공부를 해야합니다
@marimarihosp3035
@marimarihosp3035 7 ай бұрын
@@Alex99tlqkf 「徴」という漢字には義務、強制の意味がある。 漢字を勉強しなさい。 징용 / 위키백과 징용(徵用)은 전쟁, 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때에 정상적으로 인력을 모집할 능력이 없는 국가에서 행정상, 혹은 군의 작전상 필요한 인적 자원을 강제적으로 집합시켜 착취하는 무자유 노동(강제노동)의 한 형태이다. 징용노동자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국가 건설에 공헌했다. 한자를 공부하고 당시의 신문을 읽으십시오. 동아일보 1946.3.17 - 徴用 (징용) 가서 "배워운" 技術 (기술) 祖国再建 (조국 재건) 의 産業 (산업) 에 動員 (동원) 技能別 (기능별) 로 配置 (배치)
@user-yc2hg4pq4s
@user-yc2hg4pq4s 5 ай бұрын
당시 동원은 처음에는 자유의사를 빙자한 강제였다. 예를 들어 일본 기업에 조선인 노무자를 징용할 권한을 준다. 그러면 그 기업의 사원이 조선의 특정 지역을 찾아가서 면사무소, 주재소, 경찰을 동원해 징용 대상자를 모집했다. 면장, 호적계 면서기, 순사 등이 젊은이를 직접 찾아간다. 징용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폭행이 가해지고 배급을 끊으며, 도망가면 연좌제를 통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므로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형식적인 절차 없이 바로 잡아갔다. 원칙적으로 아동노동은 금지였으나, 인원수가 모자랄 때 억지로 규정을 무시하고 끌고 간 경우 현지에서 아동이라는 점이 발견되어도 고국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14세에 하시마섬에 징용된 사례가 있다. 当時、ドンウォンは最初は自由医師をかき混ぜた強制だった。 例えば日本企業に朝鮮人労務者を徴用する権限を与える。 その後、その企業の社員が朝鮮の特定地域を訪れ、面事務所、駐在所、警察を動員して徴用対象者を募集した。 面長、戸籍界の面書記、巡査などが若者を直接訪ねていく。 徴用に出ないとすれば、その場で暴行が加わって配給をやめ、逃げれば連座制を通じて家族たちに被害があるので参加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後には形式的な手続きなしですぐに捕まった。 原則として児童労働は禁止だったが、人数が足りないときに無理やり規定を無視して引っ張っていった場合、現地で児童という点が発見されても故国に返してくれなかった。 14歳には島島に徴用された事例がある。
@marimarihosp3035
@marimarihosp3035 5 ай бұрын
@@user-yc2hg4pq4s 애국가 작곡가 안익테는 일본 통치 시대 일본에 끌려가서 도쿄의 음악학교에서 음악을 강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롯데 창업자 신격호도 강제동원으로 일본에 와 강제노동으로 롯데를 창업했습니다. 현재 많은 한국인이 일본 관광 여행에 강제 동원되고 있습니다.
@user-em6vn9eq9e
@user-em6vn9eq9e 12 күн бұрын
@@marimarihosp3035 넷우익 토나오긴하네요
@yasashiboy8709
@yasashiboy8709 9 ай бұрын
씁쓸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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