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어진은 용두산 대화재 때 일부 살아 남은 홍룡포도 있지요 후대에 청룡포 색을 홍룡포로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네, 맞습니다. 화재 때 불에 타다 남은 반소 상태의 왕실 초상화 가운데, 영상에도 나왔던 연잉군초상, 철종어진 이외에 홍포본 태조어진, 익종어진(효명세자) 등이 있습니다. 태조어진이 처음 홍포본으로 그려진 것은 헌종 때인 1837년이에요. 어진을 모셔둔 전각 가운데, 준원전의 어진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모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청포를 홍포로 바꾸었습니다. 현재 반소 상태로 남은 홍포본 태조어진은 다서 이모한 것으로, 광무4년(1900년)에 이모했다는 표제가 있습니다. (경기전의 청포본은 태조 당시의 복색 그대로 1872년에 이모한 것이고요.) 이 내용 다른 분들도 궁금해하실 수 있으니, 고정댓글로 올려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훑핥뚫홅짧훑10 ай бұрын
간만에 양질의 컨텐츠가 듬뿍 담긴 채널을 발견했네요 ㅠ_ㅠ 차분한 어조로 들려주시는 그림과 역사 이야기들이 너무 좋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LoVe_Me_LoVe_U10 ай бұрын
정말 좋은 채널 발견 앞으로도 잘부탁드립니다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따뜻한 인사 감사합니다! 주변에도 널리 알려주시길요^^
@aragakiyuiii10 ай бұрын
어진 관련된 영상 볼때마다 그 당시 화재가 비껴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그리고 태조의 어진에서만 곤룡포가 청색이었던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요. 유익한 영상 잘 봤습니다.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어진 소실 넘 안타깝죠!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zanka207Ай бұрын
잘 보고 갑니다! 어진이 보다 더 많이 남아있다면 곤룡포의 흉배의 변화과정도 더 잘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항상 곤룡포의 흉배는 언제 측면상에서 정면상으로 바뀌었나 의문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ㅠㅜ
@동동이-m1e10 ай бұрын
와.... 구독박고 갑니다!
@tazza838710 ай бұрын
6.25 때 불타기 이전에 영정들 사진을 하나도 찍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한 의문으로 여겨집니다.
@daug_jang10 ай бұрын
전근대 청색염료가 상당히 귀한 염료입니다. 지금이야 화학염료로 청색을 쉽게 만들수 있지만 전근대에는 청금석(Lapis Lazuli)으로 청색염료를 만들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당시 만들수 있는 가장 귀한 염료로 곤룡포를 만든게 아닌가 합니다. 이후에 청룡포가 아닌 아청색(鴉靑色)의 곤룡포를 홍룡포와 함께 입었다고 합니다. 실록에보면 언제 아청곤룡포를 입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대개 사신을 맞이하는 경우와 연회때 입어야한다는 신료들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imonyang784310 ай бұрын
우리 역사의 흐름을 어진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복식 조차도 스스로 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서 오늘날의 우리가 어떻게 국가의 미래를 염려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옳은 말씀이세요. 우리의 미래... 좋은 하루 보내시길요^^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당연히, 당시와 현재의 외교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해야 할 현실은 다르지 않기에,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화이팅-l1e10 ай бұрын
@@ChacaChacaBuco비슷하지요 ㅋㅋㅋ 지금은 미국 따까리
@숨비-w1p10 ай бұрын
어진이라는 주제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군요.😅 매주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왕조시대이다 보니 임금의 모든 것이 다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응원 감사합니당😆
@사하원-p9l10 ай бұрын
어진의 곤룡포 색깔에 중국왕조와의 관계가 반영되었었군요 일반 서민들의 복식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까요?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중국이랑은 참말로 긴...^^;; 일반인의 복식도 그림에서 찾아보면 좋겠네요. 차차 준비해보겠습니다.
@keugene9910 ай бұрын
외할아버지께서 전쟁 때 민병대로 활동한 이후에 전후에 군대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이때 민병대 활동 덕분에 후방 부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복무 중에 화재를 여러번 목격하셨는데 굉장히 무서우셨다고 하셨죠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외할아버지께서 겪으셨던 화재로 인해서 어진을 비롯한 문화재들이 사라졌는데 진짜 안타깝네요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외할아버님께서 직접 겪으셨다니...이 역사들이 그리 멀지 않은 시대였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한번 사라진 문화재는 돌이킬 수 없고요... ㅠ
@Kimchi_season_leader10 ай бұрын
후후 저도 제 프사가 저희 집안 할아버지 김응서장군을 해놔서 그런지 되게 흥미로운 영상이네여 ㅎㅎ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상님 초상을 프사로 하셨군요 ㅎㅎ^^
@다춥-t1t10 ай бұрын
그게 누구??
@이지은-i8b1y10 ай бұрын
옛 그림에 화려한 색깔이 많이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어진도 다른 그림보다는 원색이 많이 쓰였지만 그래도 서양화와 비교하면 색채가 담담한 편인데요. 재료의 문제일까요? 안료가 부족했다거나, 아니면 안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쉽게 변색되었다거나...그러면 안료가 풍부해진 다음에는 색채가 화려해졌을까요? 동시대의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원색의 선명함이 부족하단 생각이 언뜻 드는데요, 그림의 장식적 기능이 강조되지 않아서였을까요?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서양 그림에 비하면 아무래도 차분해 보이긴 하지요?^^ 채색을 한다 해도 먹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 안료 자체가 다르니 색의 느낌도 다르겠죠. 템페라나 유화 등, 바탕을 드러내지 않고 완전히 덮어 그리는, 불투명한 느낌의 서양화와는 다른 점도 많고요. 안료 값이 비쌌으니 안료 사용이 제한적이긴 했겠지만. 이것만이 원인은 아닐 거에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의 차이도 있지 않을까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채색화가 꽤 많습니다. 진채로 그린 (일월오봉도나 화조도 병풍 같은) 경우라면 꽤 원색의 선명함이 느껴지긴 하죠. 재미있게 봐주시고 긴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은-i8b1y10 ай бұрын
진채로 그린 그림들이란 것이 있군요. 답글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 그림들 중에는 불화만 색채가 화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진도 선명한 색으로 다시 제작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진채로 그렸지만 세월이 지나 빛바랜 그림들을 모사해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처음 그렸을 때 느낌은 이랬다!> 전시회 같은 것^^? @@JongSu_ArtQandA
@kosoonchul10 ай бұрын
잘들었습니다. 그런데 태조의 용포색이 푸른색인 이유가 중국에 비해 동쪽에 있고 동쪽의 색이 청색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조선을 스스로 청구라 칭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청구, 청구영언 등을 보면 그렇게 해석 하는 게 맞을 듯 싶습니다. 꾸벅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네. 확실한 자료가 아직은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생각해보는 즐거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추봉애-g1h10 ай бұрын
태조 이성계도 파란색을 좋아하셨구나 ㅎㅎ
@사랑인가10 ай бұрын
파란색이 동북아에서는 신하를 상징하기 때문에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파란색 입은 것 아닌가요? 1. 고종이 태극기 관련 파란색은 신하를 상징한다고 한 기록이 있고, 2. 후한 유충에게 항복한 사마치도 파란색 옷을 입었고, 3.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도 파란색 옷을 입었으니.
@사랑인가10 ай бұрын
파란색이 동북아에서는 신하를 상징하기 때문에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파란색 입은 것 아닌가요? 1. 고종이 태극기 관련 파란색은 신하를 상징한다고 한 기록이 있고, 2. 후한 유충에게 항복한 사마치도 파란색 옷을 입었고, 3.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도 파란색 옷을 입었으니.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주신 의견처럼, 태조 입장에선, 괜한 문제 생기지 않을 색을 고르는 게 당연했겠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의견들이 있고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그 이유에 대해 추정만 하는 기록(숙종실록)이 있는 걸로 보면. 당시에도 똑 떨어지는 답은 없었던가 봅니다. 이런저런 정황들...생각해 봅니다.
@Daniel-zx1yn10 ай бұрын
친왕의 홍룡포를 받기 전에 청룡포를 착용한 이유가 천자인 황제의 동쪽에 있는 나라의 왕이기 때문임을 얘기해 주었다면 더 좋은 컨텐츠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왜 하필이면 청룡포인가에 대한 견해는 아직 정확히 정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래 정도의 의견들이 있는데, 명확하지 않아 영상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조선 숙종 대에도 이미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요. 숙종 14년 4월 경술조에 보면, 왜 청색을 입었느냐는 숙종의 물음에, 고려에서 청색을 숭상했고 조선국초는 고려와 멀지 않으니 이를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는 영부사 김수흥의 답이 나옵니다. 이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는 분도 계시고, 타당하지 않다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이를, 상복과 관련지어 보기도 하는데요. 단종 대에, 아청색 곤룡포를 입고 명 사신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착용 이유는 제가 아직 알지 못하는 내용이어서요. 어느 자료에서 나온 것인지 그 출처를 알려 주시면, 이 글을 보는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 있으실 것 같아서 이 글은 고정댓글로 올려두겠습니다.
@Daniel-zx1yn10 ай бұрын
@@JongSu_ArtQandA 정설인 줄 알았더니 정리되지 않은 견해였군요. 이민주님의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가 출처였습니다. 고려에서 청색을 숭상한 이유는 ‘해동천자’를 표방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태종은 정식책봉되지 않은, 조선왕이 아닌 고려권지국사였기 때문에 홍룡포를 입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JongSu_ArtQandA10 ай бұрын
@@Daniel-zx1yn 이민주 선생님의 의견은 제가 읽지 못한 자료네요... 그 엄격한 시대의 국왕 복식이니 허투루 색을 끌어쓰지는 않았을 테고요. 정식으로 인준 절차 거치지 못한 때라...조심스레, 다소 안전한 선택지를 고민했을 것 같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금빛무한햇살10 ай бұрын
태조 이성계 을해생!~천간이 목이므로 파란돼지띠여서 천문관이 파란색으로 정했을것입니다!태종 이방원 정축생!천간이 불이므로 붉은 소띠여서 붉은색! 고종은 임자생 쥐띠로 천간이 검은색인데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므로 곤룡포 색깔을 밝은 황색으로 했을것이옵니다!~마마!😊
@다춥-t1t10 ай бұрын
사실 고종은 전주이씨 피는 한방울도 없는 왕아닌가 ㅎㅎ
@Lord_of_Nightmare_66610 ай бұрын
아들은 50% 유전자를 이어 받고, 손자는 25%, 세월이 지나면 더 희석된다. 여러 외가의 유전자가 섞이면서 완전히 유전자가 다른 남이 된다.
@곧은마음10 ай бұрын
1번째 왕이라 파란색인가요
@검막리10 ай бұрын
조선 혐오.. 고려 황제국 올려치기는 언제 끝날까 싶네요. 댓글들 보면 어디서 정치적으로 들어오는건지 늘 똑같은 논지의 댓글들이 다른 영상에서도 보이고
@반일센숭이10 ай бұрын
한반도에서 있어서는 안될 사대굴종의 노비왕조 개창 진짜 세계사적 유래가 없을정도로 한심한 왕조.
@군침이싸악도노-q2b10 ай бұрын
한국도 화폐 개혁해야됨. 조선이랑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인데 근대화에 악영향만 끼쳤고 바꺼야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