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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의 역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2019년 6월 문화복합공간으로 개관하였습니다.
지상에는 역사공원이, 지하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박물관에는 전시실을 포함해 하늘광장, 콘솔레이션홀, 도서관, 세미나실 등 다양한 문화시설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이곳은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아시아 최초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입니다.
따라서 전시, 공연과 같은 문화지원 서비스체계를 갖추고 있는 공간인 동시에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미사 등 영적지원 서비스도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렀던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1) 일찍부터 큰 시장이 형성된 곳이자
2) 한양의 남북을 흐르던 만초천과 접해있어, 삼남지방의 물류가 집결돼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이기도 했으며
3)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와 접해 있어 외교활동의 중심공간이었습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곳을 “곡물이 폭주하고 수레가 부딪히고 사람의 어께를 부딪히는 곳이다” 하고 표현했는데요.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는 굉장히 번화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역사가 쌓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즉 국가 공식처형지이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번화한 거리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벌백계로 경각심을 조장하던 당시의 공개처형에 부합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정조 사후(1800년)부터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처형이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속에서 천주교 역시 당시 사학으로 규정되어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백여 년간 전국에 걸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선말 서울의 인구가 채 20만이 되지 않았던 때 무려 전국적으로 3만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공식처형터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처형이 주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후 현대에 들어와 이곳에서 처형된 순교자 중 44분이 순교성인에, 27분이 순교복자에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한국 최대 순교성지가 되었습니다.
Music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현정수 신부 곡
2000년 사제서품(수원교구)
현) 수원교구 오정동성당 주임신부
차수한세 (묵상듀엣) 연주
바이올린: 차지원 수산나
피아노: 한신남 세실리아
Meditation Music by ChasuHance
Violin: Jiwon (Susan) Cha
Piano: Shinnam (Cecil)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