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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이야기
1940년 2월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나그네 설움'은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으로 백년설 선생님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입니다. '번지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와 함께 백년설 선생님의 3대작으로 손꼽히는 노래로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군에 세워진 백년설 노래비에도 이 '나그네 설움'의 가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남인수, 이난영 선생이 속해있던 오케레코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태평레코드는 '나그네 설움'의 출시 2개월만에 1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순식간에 대형 회사로 성장합니다. 동시에 남인수 VS 백년설이라는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고, 양대 레이블간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작사가로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던 백년설 선생은 1939년 '유랑극단'으로 데뷔한 후 1년에 한번씩 큰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1940년 '나그네 설움', 1941년 '대지의 항구', 1942년 '고향설'로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 전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조경환 선생은 고려성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는데, 그의 셋째 동생이 바로 '무너진 사랑탑', '닐리리 맘보', '울산 큰 애기' 등을 작곡한 나화랑(본명 조광한) 선생님입니다.
식민지인으로서 나라를 잃은 절망을 '나그네'라는 은유로 아련하게 표현해 낸 '나그네 설움'은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되었지만 당시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 총독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년설 선생은 일본의 '국민가요(國民歌謠) 정책'에 따라 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을 독려하는 친일가요 '아들의 혈서'를 부르게 되면서 현재까지도 그가 친일파였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해방 후 백년설 선생은 1953년에 서라벌레코드사를 창업하고 1960년에는 가수협회 초대회장의 자리에 오른 뒤 1963년 은퇴했습니다. 부인인 가수 심연옥 선생님와 함께 1979년 미국 LA로 이민을 떠난 뒤 1980년 돌아가시게 됩니다.
자신이 부른 노래들 때문에 늘 일제의 고문과 핍박을 당했던 가수, 또한 일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아직까지도 '친일부역자'라는 낙인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가수. 어느 쪽이 실제 그의 모습에 가까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시대가 남기고 간 아픔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