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환상😂동북지역은 줄곧 퉁구스 민족, 한족, 유목민이 뒤섞인 지역이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 통지한 사람은 한족이고, 그 다음은 여실인!
@seungwooham32049 ай бұрын
@@知-k3q 어색한 한국어로 후진국 중국 레벌이 모라 하노 ㅋ
@seungwooham32049 ай бұрын
@@知-k3q 응 아냐 너거 황하로 돌아가 중국 인섹 ㅋ
@jospehsuh72639 ай бұрын
@@知-k3q 요서 지역은 대대로 한족이 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호야-j2m6m9 ай бұрын
이게 자꾸 사라진지 1500된 고구려를 들먹이며 한국거라고 하는거임.. 통일신라부터 간도 차지한적이 없는데 말이지. 고려때 아주잠간 여진밀고 올라갓ㄷㅏ 바로 내려온적 잇고 대한제국때 러시아도움으로 10개월간 간도관리사 보내서 간도조선인 관리하다 청나라반대로 쫓겨나고. 그후 일본이 개입해서 조선을 이용해 만주먹으려고 조선편을 잠간 들어주다 철도랑 광산개발권 얻고 물러나고 끝낫는데 일본이 옛부터 조선땅이엇던 만주를 팔아먹은거처럼 왜곡되니.. 중국은 신경도 안쓰는 간도문제를 지금도 얘기하지. 고구려역사분쟁이 졋는데 모름. 2017년부터 미국교과서는 고구려가 중국으로 표기됨. 발해 간도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이미 중국거로 인정햇고 고구려문제로 아직 논쟁이긴 하지만 . 중국은 2017년부터 백제역사를 손대기 시작햇고..
@etltd27969 ай бұрын
아! 윤동주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소대가리-z4q8 ай бұрын
6개시와2개현을 연변이라 부르고 연변이라고 하면 연길시 룡정시 훈춘시 도문시 돈화시 안도현 왕청현 이렇게 나눠졌습니다
@fhdebosdl18129 ай бұрын
윤동주가 대성중학 다닐때 용정에서 몇십키로 떨어진 왕청현안도현 등지에서는 독립군들이 게릴라전 하고 있었지…그들이 공산계열이여서 한국인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거죠
@백승호-g4i9 ай бұрын
연포물개님 여행가는것도 좋지만 중국에 반간첩법이나 데이타 보안법하고 국가 기밀법이 제정되어서 영상이나 사진찍을때 공안한테 검열안당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평화kr9 ай бұрын
영상에 반간첩법 그리고 데이타 보안법에 대해서 위반된게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우리역사에 대해서 찍은것이고 이건 중국에서도 찍지말라고 하지말라는것도 없습니다. 언론에나와 있는 반간첩법 한마디로 중국이랑 북한에 대해서 찍지말고 군사시설에 대해서 찍을경우 잡힐수 있고 사업스파이 그리고 서방세계의 중국에 대해서 허위사실 유포 등 할 경우 잡혀들어갈수도 있음.. 이 영상에는 그런거랑 상관없습니다.우리나라와 서방에 알려진 반간첩법에 대해서 유튜브나 언론은 제대로 안알려주는거임.. 중국 북한 자극하지말고 우리군사시설 그리고 중국과 북한국경지대 촬영 하지말라는거임
@Hanwha_Eagles689 ай бұрын
ㅈㄹ 똥싸고 있네. 반간첩법 시행했다고 해서 아무나 잡는줄 암 ? 그것도 어느정도 급이 돼야지 ㅠ
@partyhu9 ай бұрын
咋地?韩国没有反间谍法?
@의리-o9v9 ай бұрын
영상 잘 보고있어요😊
@losndd40179 ай бұрын
재밌는 영상 감사합니다❤
@mariomina92936 ай бұрын
내가 어렸을때 대부분 한족들이 우리를 고려인이라고 불렀는데, 어느날부터 고려인이란 말이 조선족으로 바뀌었음.
@제이큐티9 ай бұрын
윤동주 선생의 조부 윤하현은 청국적조례에 의거해 청나라 국적을 취득했고, 윤동주 부친인 윤동석은 당시 미성년자라 아버지의 국적 취득에 따라 청나라 국적법상 자동 귀화 대상이 됩니다. 즉 윤동주의 조부가 청나라 국적을 취득했기에, 미성년이던 아버지까지 청나라 자동국적 취득이 됐으며, 1917년 윤동주 출생엔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중화민국 자동국적이 대상이 됩니다. 국적법상 윤동주는 혈통주의로 중국 국적법서 자동 취득이 된것이고, 용정서 부호 가문으로 중국 국적이 아닌 사람에겐 토지 취득을 어렵거나 불가했던 당시 시대상서 조부 윤하현이 청나라 국적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saturnmun86819 ай бұрын
그땐 다 고려인이 라 불렀고 한국인 이라 부르지 않았 습니다. 그리고 고려라 중 국에서 널리 불리 웠고 광복후 조선 이라 불리웠으며 1952년 중국연변 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되면서 조선 족이라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김구, 김좌진, 홍범도, 윤봉길, 안 중근 북한의 김일 성도 모두다 중국 에서 대한독립과 조선독립으로 항 일투쟁 하여 일제 와 밀정들이 우글 거리는 고국을 되 찾으려 광복 맞아 남북으로 갈라지 면서 한반도가 두 동강 난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전쟁 까지 겹쳐져 북한 에서는 중공군 끌 어들이고 남한에 서는 미군을 끌어 들여 4년간 지루 한 전쟁이 1953년 7월27일에 정전 협정을 하여 70년 간 서로 적으로 간 주하며 한민족끼 리 대립대치 상태 로 있을 때 한국후 세대들의 기분은 어떻겠는지 본인 도 알겁니다. 500번 외래침략 과 민족갈등으로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워 왔던 한민족 8,000여만 세대들 곰곰히 수난수치 역사를 되새기며 강대하게 단합되 길 소원할 뿐입니 다.
@고고싱-p3g9 ай бұрын
와우~ 근대사를 세밀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pppp-q4n9 ай бұрын
친구분 자주 같이 여행 다녔으면 좋겠습니다ㅋㅋ 중국 여행 가고싶어지는 영상이네요
@zheli239 ай бұрын
친구분은 뭘 드셔도 꼭 한가지씩은 만족스럽지 않은부분이 있는거같애요.음식에대해 꼭 한마디씩 하누 습관 같은거
@flower-up1tx9 ай бұрын
역사공부도하고일석이조 울동네도조선족분들 많이사는데 😅😅😅😅😅😅짜요짜요😂😂❤❤❤❤❤❤
@meishanshen91929 ай бұрын
영상감사합니다 . 늘건강하세요 👍👍👍❤❤
@Jae0926s29 ай бұрын
친구분이랑 케미가 좋네요 ㅋㅋ😊
@bunketuryo29639 ай бұрын
전 조선족 이지만 유튜버 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가 돌아가신후 현재 중국과 대한민국이 건립됐으므로 조선족이나 한국인보다 조선인이 맞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윤동주 생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조선족이라고 하는것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내하면 한국인이라고 했을때 사드처럼 중한관계가 악화될시 극단애국주의 세력들이 생가를 부시자고 하거나 국가에서 지시가 내려지면 현지인들도 감당하기 어렵거든요. 조선족이라고 함으로써 그럴수 있는 명분이 사라지니깐 생가를 보호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周星馳-l2d9 ай бұрын
맞는 말씀입니다 한국인 혹은 조선인 애국시인이라고 하면 지금까지 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일송정도 그런 맥락에서 몇번 훼손(폭파)됐다가 겨우 복구된것입니다
@paldogangsantv9 ай бұрын
항상영상재밌게보고있어요.응원합니다.
@antenna..9 ай бұрын
이거 위험함 생각입니다. 생가를 없애고 부스는 자체가 중국이 몰지각한 나라 라는 반증인거죠. 역사의 산물인데 윤동주 국적이 한국이라고 해서 부스는걸 두려워 해 국적이 바뀌는걸 용인 한다면 그대로 역사는 굳어 정말 그대로 굳어질겁니다. 중국이 신장 위구르 지역을 탄압하도 지배하고 공안을 투입해 이제는 포기해 버린 그들 처럼 인정해 버리는 수순으로 가는겁니다.
@antenna..9 ай бұрын
더불어 윤동주는 한자가 아닌 한글로 일제 강점에 항거한 우리의 저항 시인이며 윤동주의 글에는 중국을 본인의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 라고 쓴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우리 역사 학자들이 보여주어도 막무가내 동북공정을 멈추지 않는 중국공산당을 절대 이해 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조선족분들의 이야기 처럼 공산당과 중국 국수주위자들 협박에 넘어가면 한복 김치도 진짜 다빼앗기는거에요. 이미 본인들의 소수민족이 입고 먹는게 한복 김치라해서 중국꺼라 우기고 있잖아요
@幽兰-t2s8 ай бұрын
黑帮流氓组织中共中国가 정상적인 나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데, 억지로 中共中国의 눈치를 보면서 대처해서는 안된다 생각합니다. 윤동주는 당연히 大韩民国 사람입니다. 역사는 계승이라는 것이 있어서 왜넘강점기에 살았던 모든 분들은 大韩民国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大韩民国 사람들의 역사관입니다. 그럼 中共中国의 朝鲜族은 그들은 中共中国의 국적을 가졌으므로 黑帮流氓组织中共中国人입니다. 朝鲜族은 그저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中共中国 사람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loveHK-h5l9 ай бұрын
오늘 영상 올라왔다고 본거 같은데 잘못봤나....
@너굴한억울이-i5f9 ай бұрын
뭐야 저도 보다가 밥 먹고왔는데 사라짐
@YeonPoMulGae8 ай бұрын
영상에 문제가 있어서 삭제 후 재업로드 했습니다ㅠㅠ
@shin-8269 ай бұрын
용정에 더 맛있는 집도 많은데....맛이 없는데만 찾아 갔네요 😅😅
@gom9417 ай бұрын
1박2일 백두산 특집때 나온곳이다
@TV-em2wo9 ай бұрын
선구자 노래를 모른다는게 놀랍고 신기함. 국사 수업이 절실히 필요함. ㅠㅠ
@jospehsuh72639 ай бұрын
요즘은 "선국자"를 잘 부르지 않습니다, 작곡자 조두남과 작사자 윤해영이 대표적 친일 작가이고 "선구자" 노래에서의 선구자가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친일 만주 앞잡이를 지칭한다는게 현재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taemoojin99 ай бұрын
친구분하고 케미가 좋네요. ^^
@춘향골산약초9 ай бұрын
오늘도좋은 정보감사합니다
@이동환-l5b9 ай бұрын
우리집 도 보여서 감사합니다 😊
@눈꽃참새9 ай бұрын
🎉🎉🎉🎉🎉 항상응원합니다 재미있는 영상 ㅎㅎㅎ
@MyFaceTime8 ай бұрын
처음 만난 사람은 말투 들으니 한족같은데요.
@myengseoppark39669 ай бұрын
선구자 라는 노래를 모른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Bigheal9 ай бұрын
불철주야 수고 많으십니다 ❤
@周星馳-l2d9 ай бұрын
비석에 일송정 잘 살펴보면 소나무 (송)자를 승자로 잘못 새겨져 있는것을 발견할수가 있습니다 이게 인제는 거의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수정이 되여있지 않고 그대로 있네요 그러니 에휴~ 참고로 저 용정사람입니다
@周星馳-l2d9 ай бұрын
그리고 용정지명지기원우물 비석도 문화대혁명때 기둥째로 뽑혀 두동강내서 용정축구장(공원)입구 왼쪽에 방치되여 있다가 분실되였는데 지금 세운 비석은 원비석의 옛날 사진을 참고해서 재복구 한것으로 진짜가 아닙니다 저의 푸샤사진이 진짜 비석 모습입니다
@Lfwzy5379 ай бұрын
요즘 학생들은 우리가곡 안배우나 보네...우리때는 음악 실기 시험에 필수 곡 중 하나가 선구자였는데
@남자청산9 ай бұрын
영상감사합니다 🎉🎉🎉
@서관-f3z5 ай бұрын
연포물개=깨인청년
@진품명품9 ай бұрын
🎉 관대토대왕 비석 촬영 해주세요 구독자입니다 🎉
@흑금성-y4x9 ай бұрын
선댓글 후감상..감사^^
@xiyuan919 ай бұрын
이분은 한국어 중국어 둘중 어떤게 더 편하실까 궁금하다ㅋㅋ
@YeonPoMulGae8 ай бұрын
비교가 안될 정도로 한국어가 훨씬 편합니다!ㅋㅋㅋㅋ
@howbrotravel9 ай бұрын
역사랑 재미를 둘다 잡음 영상이네요
@류율-l6s9 ай бұрын
제가다니던 초중은 일본인이 창립했고 중국이 해방후에 그는 일본 돌아가서그냥 우리학교에 후원금 보냈어요..
@김매니저-z4x9 ай бұрын
술은 하깐이라고 그거 요즘 다 먹구요 양다리는 전문점 진짜 싼곳잇어요 분점 같은곳 잠내도 없고 가성비 좋은곳
@ghjeon47669 ай бұрын
중국어 이렇게 잘할수가.
@제이큐티9 ай бұрын
조선족의 근원을 19세기 후반으로 보기에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 조선인도 조선족으로 보는게 자연스러운겁니다, 신중국서 민족식별공작으로 56개 민족을 정의하며 조선족으로 칭한거지, 조선족을 신중국 이후로 정의한다는게 아닙니다. 민족의 근원을 시초해 해당 민족으로 추종한다는게 타당한 것이고, 그렇게 비유하자면 신중국 이전의 한족, 몽골족, 회족 , 만주족 인물까지도 민족식별공작서 정의한 민족명을 사용하면 안 맞게끔 되는겁니다
@@独来独往-q6u그 민족의 해당 근원을 삼아 정의한다고. 조선족의 근원은 19세기후반 간도이주민 정착부터 보니 19세기 후반 이후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조선족으로 삼는다는 뜻임. 신중국 수립 기준이 아니라 ㅉ, 만주족, 몽골족도 다 마찬가지라고
@diegochoi9 ай бұрын
죄송합니다만 조선족 여러분, 제발 역사공부를 하시길 바랍니다. 고종 께서 엄연히 대한제국의 만드시고 조선은 그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나라입니다. 물론 당신들은(조선족) 중국인,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태어닐때 만주국에서 태어나서 서울 연희학당을 다니시고 한국,일본식 교육을 받으신 분 입니다
@diegochoi9 ай бұрын
참고로 윤동주씨는 태어날때, 일본인(외지인) 조선출신 이라고 합니다. 즉, 당시는 조선을 일본의 지방으로 여겨지는 시기 이었습니다. 예) 대만,후쿠오카, 홋카이도,오키나와 등등..
@diegochoi9 ай бұрын
@@williamdr5551 Puyi[c] (7 February 1906 - 17 October 1967) was the final emperor of China, reigning as the eleventh and final monarch of the Qing dynasty. He was later ruler of the puppet state of Manchukuo under the Empire of Japan from 1934 to 1945. He became emperor at the age of two in 1908, but was forced to abdicate in 1912 as a result of Xinhai Revolution at the age of six. During his first reign, he was known as the Xuantong Emperor, with his era name meaning "proclamation of unity". Puyi was briefly restored to the Qing throne by the loyalist general Zhang Xun from 1 July to 12 July 1917. He was first wed to Empress Wanrong in 1922 in an arranged marriage. In 1924, he was expelled from the Forbidden City and found refuge in Tianjin, where he began to court both the warlords fighting for control over parts of the weak Republic of China and the Japanese who had long desired control of China. The 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in 1932 resulted in the puppet state of Manchukuo being established by Japan, who chose Puyi to become its chief executive, using the era name "Datong." In 1934, he was declared emperor of Manchukuo, prompting writer Wen Yuan-ning to quip that Puyi "holds the world's record for the number of times that any mortal may ascend and abdicate the throne."[1] Puyi nominally reigned under the era name "Kangde" until the end of the Second Sino-Japanese War in 1945. This third stint as emperor saw him as a puppet of Japan; he signed most edicts the Japanese gave him. During this period, he largely resided in the Salt Tax Palace, where he regularly ordered his servants beaten. His first wife's opium addiction consumed her during these years, and they were generally distant. He took on numerous concubines, as well as male lovers. With the surrender of Japan in 1945, Puyi fled the capital and was eventually captured by the Soviets who had occupied the country; he was extradited to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1950. After his capture, he never saw his first wife again; she died of starvation in a Chinese prison in 1946.
@diegochoi9 ай бұрын
@@williamdr5551 un Dong-ju or Yoon Dong-ju (Korean: 윤동주, Korean pronunciation: [jundoŋdʑu]; 30 December 1917 - 16 February 1945) was a Korean poet. He is known for his lyric poetries and for his poems dedicate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the Empire of Japan. Yun was born in Longing, Jilin, China.[1] After studying at the Myeongdong School, he moved to Pyongyang and graduated from Soongsil Middle School (now Soongsil High School in Seoul[clarification needed]). He later moved to Seoul and attended Yonhi College. During his second year at Yonhi College, he published a poem in the boy magazine, and officially appeared in the paragraph. After crossing over to Japan, he entered Kyoto Doshisha University in 1942 but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for alleged anti-Japanese movements in 1943. While imprisoned in a Fukuoka, he died at the age of 27, leaving over 100 poems. His cause of death in Fukuoka prison is uncertain, but theories have been raised based on accounts of saltwater injections and medical experiments performed at that prison. His book, The Sky, the Wind, the Stars, and the Poem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was published posthumously. He was recognized as one of the conscientious intellectuals in the latter half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his poems were based on criticism and self-reflection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and the Joseon Governor-General. His friend and cousin, Song Mong-gyu [ko], was also arrested while trying to join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was classified as a subject of Japanese experimentation in Japan. While in Japan, he adopted the Japanese name, Hiranuma (平沼). In addition to his Korean name, the nicknames Dongju and Yunju were also used.
@diegochoi9 ай бұрын
@@williamdr5551 Emperor of China (1908-1912) 1908 portrait Chosen by Empress Dowager Cixi,[2] Puyi became emperor at the age of 2 years and 10 months in December 1908 after the Guangxu Emperor, Puyi's half-uncle, died childless on 14 November. Titled the Xuantong Emperor, Puyi's introduction to the life of an emperor began when palace officials arrived at his family residence to take him. On the evening of 13 November, without any advance notice, a procession of eunuchs and guardsmen led by the palace chamberlain left the Forbidden City for the Northern Mansion to inform Prince Chun that they were taking away his two-year-old son Puyi to be the new emperor. The toddler Puyi screamed and resisted as the officials ordered the eunuch attendants to pick him up. Puyi's parents said nothing when they learned that they were losing their son. As Puyi wept, screaming that he did not want to leave his parents, he was forced into a palanquin that took him back to the Forbidden City.[3] Wang Lianshou, Puyi's wet nurse, was the only person from the Northern Mansion allowed to go with him.[4] Upon arriving at the Forbidden City, Puyi was taken to see Cixi.[5] Puyi later wrote:
@diegochoi9 ай бұрын
@@williamdr5551 According to Elliott, the Manchu imperial lineage believed that their original homeland was the Changbai Mountains. The Qing court endeavored to create a regional identity focused on the Changbai Mountains, which gradually became a symbol of Manchu identity. However, it is uncertain whether that notion was shared among ordinary Manchus, and there is evidence that part of that effort was to combat widespread acculturation among Manchus, resulting in the loss of their language. As part of this effort, Jesuits were commissioned to create maps that enhanced Manchu conceptualization of their homeland, which Elliot believes to have been the original impetus to label the region as Manchuria in European and Japanese maps. In 1877, Manzhou was used as a toponym in an essay by Gong Chai, a scholar from Ningbo. The description of Manzhou located it to the northeast of Beijing and identified it as the birthplace of the dynasty. Manzhou was used as a place name again 20 years later by Qing officials. Manzhou began to appear on Chinese maps in the first decade of the 1900s. Maps that used Manzhou were in the minority during the early Republican period but the name remained in common use among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to the 1930s. Names for the region were relatively fluid before the Mukden Incident of 1931, after which alternative names in Japanese were discarded for Manshū, and Dongbei (Northeast) and Dongsansheng (Three Eastern Provinces) became the orthodox names for the Chinese. According to Mark Gamsa, Manzhou was not widely used among the Chinese but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disapproved of it anyways. By the 1950s, Manzhou had virtually disappeared as a toponym although some still used it out of habit.[1][2][18]
@bbbccclove01089 ай бұрын
ㅋㅋㅋㅋㅋㅋㅋ인생을 적셔 ㅋㅋㅋㅋㅋ
@yonglee46809 ай бұрын
나는 왜 둘이서 다니니까 전보다 어수선한 느낌이들지? 😂😂😂
@KR-Zzzzzz9 ай бұрын
빙천 9도 맞습니다 ….
@somersetyi9 ай бұрын
맛에 대한 친구분의 묘사가 엄청 세밀하네요. 즐겁게 여행하세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cider-m9d9 ай бұрын
선구자…흠
@이경숙-k1k9 ай бұрын
인생을 적실뿐이야 ㅎㅎㅎㅎㅎㅎㅎㅎ명언 빵터짐
@류율-l6s9 ай бұрын
거기 닭발하구 순대 유명해유
@치차-p3f9 ай бұрын
크으 양갈비 지린다..
@myd56099 ай бұрын
친구분이 말만 하면 불안불안하다,,,
@motohyun93599 ай бұрын
룡정 🌠감개 무량 ! 합니다 민족시인 "윤동주 에 고향은 마음이 설레인다 누구라도 ㅡ 그러하듯이 '별 헤이는 밤🌠🌠🌠🌠🌠🌠🌠⭐⭐⭐⭐ 운동주시인 이 태어나고 자라 신곳 용정' 에서 멀지 않은곳에도 - 고려 왕족에 무덤이 수백군에 때무덤이 보입니다 고구려 " 광개토태왕 애 장손 장수왕 무덤이 거대한 피라밋 형식으로 빌드업 되 있습니다✨🌏🥋🥋🌠⭐
@한나-s3o9 ай бұрын
친구말이 맞고 판단잘하네. 지금 조선족들은 중국정치의 영양을 받아서 완전 중국인이라는것 . 암튼 둘이 여행하니까 혼자 하는것과 또 다른 재미가있음 오디오가 또 다른 특색의 오디오라 재밌음
@___whoops9 ай бұрын
국적이 중국인데 당연히 중국인이지 요즘 바보들이 왜 이리 많노? ㅉㅉ
@한나-s3o9 ай бұрын
대한민국에 있는 조선족들을 말한것 . 안보인다고 말 함부로지껄이지 마
@o3.278 ай бұрын
@@___whoops 느그들은 앞으로 중화민족이라 해라 우린 느그이랑 같은 민족이라 생각 한적없으니
@___whoops8 ай бұрын
@@o3.27 이것도 형편없는 바보네 피차일반이다 천한상것아
@Barbara-ib7vc8 ай бұрын
@@o3.27 🤣🤣
@motohyun93599 ай бұрын
20:22) 친구분이 정면으로 보면 완전, 김하늘( 연기자) 이네요 룡정시 명동촌 ' 윤동주 시인 이 찍은사진 절,친구와 사촌 과 찍은 마지막사진 아마도 두분과 거의 비슷한 연령대 일지도 모르겠네요 😅ㅋㅋㅋㅋ
@seungwooham32049 ай бұрын
댓글 조낸 웃기네 조선인이락고? 대한제국 선포한 이후 정식적인 정부로의 전환은 오로지 대한민국 하나만이 합법적인 국명인데 무슨 조선인 드립이냐 대체 ㅉㅉㅉ 그럼 중국인은 청나라인이냐 ㅉㅉ
@gaeul73099 ай бұрын
현명한 조상만 잘 만났으면 그 땅이 다 한국 거였을 땐 대 조상이...... 중국은 신라인들을 모라 내고 부활 했고 반도는 신라 인들이 점령 하면서 끝 났다
@마파람-b6d9 ай бұрын
흠정만주원류고 는 청나라의 정통역사서로 자기들은 신라출신으로 신라의 수도가 만주 길림이라고함 길림성의 길림, 길림의 중국발음은 지린 지린은 계림의 중국발음이기도함. 천년실라는 만주에 수도가 있다는말 우리는지금 조선도 마찬가지이지만 그이전도 백제 고려 고구려등 위치도 파악못하고 왜인들의 친일파제자 들에의해 조작된역사를 배우고있음 너무 한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