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카무니의 교단은 후반기로 갈수록 커지면서, 당초에 가비라성 출신 석가족 위주였던 지도체제가 대규모 신도 유입과 함께 들어온 타 지역 출신 제자집단들과의 분권화가 필요한 상황으로 변화 되었고( 10대제자에서 가비라파가 절반으로 줌 ), 석가족의 종방간 왕위이양 전통에 따라서도, 교단내 차기 교주의 자리를 기대하였었던 사촌 제바달타의 좌절감에서 비롯된 반역 쿠데타가, 아난을 비롯한 가비라파 내부의 비협조로 실패한 후, 교단 내부의 힘의 질서가 급격히 외부세력의 입지가 강화로 이어지면서, 석가모니의 입적시에는 사리불, 목건련 등의 외래파 대 제자들이 이미 선졸한 상황에서 그 중심 헤게모니를 장악한 인물이 율법중심주의자 마하가섭이었다 봄. 그리하여, 앞 선 교주중심의 중앙집중적 교단 전통이 끊어지고, 서로가 자신들의 권한을 양도하기 싫기에 만들어지는 조직형태, 공화제로 분권화된 교단의 편성이 이루어져, 2차 결집에서는 실권에 반발해 1차에서 이탈했던 아난 중심의 가비라파도 재합류 하게 됨. 교조이신 석가와 직관련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대 제자들의 출가 전 신분이 왕족과 귀족으로서 고귀했던 것으로 보아, 고행과 수행을 통해 진리를 탐색하는 성향으로 당대를 풍미하던 사문그룹들 또한, 카스트적 신분 프리미엄을 어필하여야만 그 위상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겠으며, 마하가섭은 물론이며, 애초에 석가모니 또한, 기존 사문그룹에서 이미 유통되던 절대개념 '붓다'의 자리로 인증되는데 주요한 배경이 되지않았을까도 여겨짐. 후대 동아시아에 크게 발흥 유행하는 선종에서 그 정통성을 교조로부터 차용해 오기 위해, 일부 위경들을 더하며, 염화시중 미소, 의발의 전수 등을 창작하면서 그 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 선택된 인물이 석가 사후 교단의 중심자 마하가섭이 된 것이라 봄.
@김상기-p1e2 ай бұрын
아난존자의 얘기가 없어서 조금 아쉽네요 ㆍ 불교경전은 머리의 아난존자의 기억으로 석가의 말씀을 한 점 틀림없이 기억 해냄으로 다른 제자들의 인가를 받아 경으로 만들어 지고 후대에 전해지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