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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readman
A.D. 1387년 홍건적 출신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봉집현[혼하(渾河)가 있다.『금사』]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삼만위 개원위로 군사를 부려 개원, 철령, 심양, 무순, 요양까지 위(보호장벽 또는 군대막사)를 연결하여 완성하고 '만주평야와 요녕, 길림, 흑룡강의 산로를 차단(연산파절)'한다.
주원장의 철령위 통보에 고리 조정은 정3품 밀직제학인 재상 박의중을 파견하고 황제의 철령위 논의 중지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위(보호장벽)는 완성되고 A.D.1359년 1차, A.D.1361년 2차 홍건적의 20만 군세 중 10만을 죽이고 10만을 쫓아내며 막아낸 원수 6인인 정세운(鄭世雲)·이방실(李芳實)·안우(安佑)·김득배(金得培) 중 1인이었던 최영은 홍건적의 난을 정리하며 동료4명을 잃었고 원수 6인 중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만 남는다.
A.D. 1388년 최영은 요동정벌군을 꾸려 출정하나 이성계의 반란으로 실패한다.
이때 부터 만주평야는 한민족과 멀어져 간다.
그러나 철령 이남인 혼하(渾河)가 있던 봉집현 이남인 요동반도는 명태조 주원장이 '왕국유사'로 나누자고 한 여전한 고리 조선의 강역이었다.
또 동쪽 경계인 두만강 북쪽700리 공험진은 3개의 기록이 충돌하나 종합하면 현재의 흑룡강성 목단강[牧丹江]시로 종합된다.
고리 말까지 요녕, 길림, 흑룡강은 고리의 강역이었고,
조선 초까지 요동반도와 길림 넘어 흑룡강성 공험진(두만강 북쪽700리), 선춘령(두만강 동북700리)까지 조선 강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