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역사 상황을 모르는 우리는 최영장군의 노망인가? 앞날을 내다보는 장군인가?망하는 나라의 비운의 장수인가
@hanhan49809 ай бұрын
고려와의 경계인 철령성에 철령위를 설치하다 ㅡㅡ 고려사 홍무(洪武) 21년(1388) 3월에 옛 철령성(鐵嶺城)에 설치하였다. 〈홍무〉 26년(1393) 4월에 옛 은주(嚚州)의 땅으로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는 범하(汎河)가 있으며 또한 남쪽에는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남쪽에는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1396)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의 남쪽에 있는며 범하성(汎河城)이라고도 하는데, 정통(正統) 4년(1439)에 범하천호소(汎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는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 고려(高麗)와의 경계에 접해 있으며, 홍무 초년에 현(縣)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하였다. 또한 함평부(咸平府)는 원의 직예(直隷) 요동행성(遼東行省)이다. 지정(至正) 2년(1342) 정월 항복하여 현이 되었다. 홍무 초년에 폐지하였다.】 남쪽으로 도사(都司)까지 240리 떨어져 있다.
@일석-t8j7 ай бұрын
장마철 지나서 출병했어면 좋았을 텐데...🕺
@김광석-p4q8 ай бұрын
李成桂의 秋侵功이 禹王에 依해 受諾되었다면, 回軍은 없는 事😊 최영崔瑩將軍이시여!必復活하소서!😂 유文體部長官은 戰略,戰術的 歴史Special 스페셜 부활 하시길 懇望!!^。😂
@glow2899 ай бұрын
원명 교체기, 대단히 좋은 기회였다. 이성계의 안된다는 이유도 정말 구차 하다. 몽골도 여진족도 시작 할 때는 변방의 작은 부족이었다.
@yun-geonho9 ай бұрын
여진,몽골은 유목민족이었고 요동정벌할 때 5만명을 끌고 갔는데 명나라의 수십만대군을 어케 이김?
@user-ni3ti9oj5d9 ай бұрын
서울대 한영우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 사실과 맞지 않다. 이성계가 두려워한 명은 276년만 존속하여 조선의 600년에 비해 절반만 존속했지만, 이성계는 쓸데없이 겁먹고 위화도 회군을 하여 명의 졸개가 되었다. 그런데, 명이 망한뒤 300년을 더이상 존속한 조선은 그야말로 운이 너무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일본이 쳐들어온 임진왜란에는 임금인 선조는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가지만, 불세출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격파하여 나라를 구했다.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청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위협하긴 했지만, 우리의 적은 명이니 너희들은 안 건드린다라는 운빨로 조선이 존속한 것이다. 물론 청의 여진족이 애신각라라는 성을 사용하며 신라출신이란는 신라와 혈연상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형제끼리 서슴없이 죽이는 중국의 역사를 봤을 때 그냥 행운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지 않고 살아 남은 동안 조선은 천자국의 지위를 잃어버린 후 명과 청의 제후국으로 살아온 것은 이성계가 뿌린 나쁜 씨앗의 결과라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조선이 건국한 뒤 6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Freedomisnotfree189 ай бұрын
저당시 민족이란 개념이 있었다고????
@hanhan49809 ай бұрын
세종대왕께서 말씀하신 고려영토 ㅡㅡ 고려사에 우리역사 최대의 영토 ㅡ 고려국경은 북경에서 선춘령으로 우라역사 최대의 영토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고 이거보다 정확한 중거는 없습나다 고려사에서 검색어 지리 서문 ㅡㅡ 압록은 북경 서북 안문 ㅡㅡ고려사애서 검색어 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