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을 모두 태워라! 흥남철수작전은 미군이 미리 준비했던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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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Box TV, [God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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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1950년 12월 초,
미 8군이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에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서부전선의 미 8군보다 더 순조롭게 북한 함경도까지 진격했던 미 10군단.
하지만 중공군은 이미 원산까지 내려가 미군의 후방까지 차단한 상황.
결국 미 10군단 예하 부대인 미 해병 1사단, 미 7사단
그리고 국군 2군단까지 포위섬멸당할 위기에 빠지게 된다.
탈출할 길은 오직 하나, 흥남항을 통한 철수 뿐.
마침내 1950년 12월 11일 밤,
흥남항에 집결한 아군 병력은 약 10만 5천 명.
하지만 흥남항에 모여든 것은 국군과 미군 병력 뿐만이 아니었다.
흥남항에는 북한을 탈출하려는 엄청난 숫자의 북한 피난민이 몰려든 것.
과연 미 10군단과 그 수많은 피난민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인지?
00:00~00:36: 하일라이트
00:37~05:02: 청천강 전투 패배 후 미군 지휘부의 전략은?
05:03~07:24: 동부전선 미 10군단의 상황.
07:25~11:06: 흥남철수작전의 진짜 진실은?
11:07~14:22: 마지막으로 떠난 메러디스 빅토리 호.
※ 6.25 전쟁 컨텐츠 재생목록: • 6.25전쟁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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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전투#맥아더#흥남철수작전

Пікірлер: 125
@sjyoon0603
@sjyoon0603 5 ай бұрын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영상이었습니다. 한미동맹을 굳건히하여 한반도 자유통일을 하루 빨리 이룩해야 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개인적으로도 마지막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이 도착한 날이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피난민들이 모두 떠나고 밤이 되자 라루 선장은 일기를 쓰죠. 사망자 없음, 항해 중 5명 탄생. 그래서 총 14,005명 모두 무사히 부산항 상륙완료!
@PeterYi7
@PeterYi7 4 ай бұрын
한미동맹보다 우선적인건 자주국방입니다. 미필대통이란 작자가 끄덕하면 전쟁불사 이딴소리말고 적이 못건들정도의 완벽한 대비태세요. 최소생활도 안되는 적은 월급으로 정작 초급간부는 미달되는 작금의상황이 개탄스럽습니다.
@oodg7338
@oodg7338 4 ай бұрын
한미동맹이랑 통일이랑 무슨상관이죠? 전쟁하자는건가요?
@MrFriAng
@MrFriAng 3 ай бұрын
흥남철수작전은 정말 볼 때마다 감동적입니다. 이때만큼은 정말 미군에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3 ай бұрын
무기를 불태우고 대신 피난민을 구한 셈이었습니다. 다만 이 컨텐츠에서는 미군이 즉흥적으로 마음이 바뀌어서 흥남항 현장에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 계획 하에 움직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user-jjy1015
@user-jjy1015 5 ай бұрын
5:53 밀리는걸 보니 참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서 조금만 더가면 통일인데 후퇴라니요....
@user-dj5bb9of5y
@user-dj5bb9of5y 5 ай бұрын
저많은 병력과 피난민을 후퇴시킨것만으로도 천운이죠 인천상륙작전이후로 급조됀부대를 매꾸고 정보부족으로인해 적은병력을 보낸이상 통일은 어려웟을겁니다 물론 급조됀부대다보니 훈련이안돼가지고 중공군만 보면 도망치기 바빳죠 알다보면 38선이라도 그어논게 신의 한수 엿을겁니다 많은 생명을 구할수있는 사건이다보니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My_Style17
@My_Style17 5 ай бұрын
당신들의 헌신 과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저 흥남철수작전 이후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는 흥남을 포함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를 밟을 수 없었다는 점이 눈물이 납니다 ㅠㅠ 기세를 몰아 북진해서 압록강까지도 전진해 갔는데 중공군 남하에 전략적으로 잘 대처하지 못한 대가로 영원히 날아간 북진통일 ㅜㅜ
@user-rg8bg7po7e
@user-rg8bg7po7e 5 ай бұрын
74세 시겠네요.. 5분. 철수때. 태어나신분.
@koochoi4660
@koochoi4660 5 ай бұрын
감동적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감사드립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크리스마스 이브, 모든 피난민이 다 나간 직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일기 내용을 보면 민간선박의 선장이었음에도 모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책임감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Hamzeeeeee7
@Hamzeeeeee7 5 ай бұрын
사실 이를 오마주한 장면이 국제시장 월남전 장면에도 나오죠. 군수물자를 다 버리고 베트남 난민들을 배애 태워서 살아 나오는 장면...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국제시장에서는 이미 철수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젊은 남자 (현봉학으로 추정)가 미군 장군에게 졸라대서 미군 장군이 허락한 것으로 나오지만 진짜 진실은 이미 오래전에 미 10군단 참모장 포니대령과 현봉학이 알몬드 장군에게 부탁했고 알몬드 장군은 맥아더에게 맥아더는 워싱턴에 연락해서 피난민까지 함께 구하는 것으로 정식 지침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동원된 선박은 100척 이상이었고 병력과 피난민 모두를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touchme6097
@touchme6097 5 ай бұрын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고 세계는 각자의 이익으로 움직이지만...그래도 현재 세계최강이 청교도가 세운 미국이라는것이 얼마나 감사한것인지 모릅니다. 지금 최강대국이 중국,러시아,인도등이라고 한번 상상해본다면 끔찍할껄요?~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한반도에서 목이 좁은 평양원산선에서 평양만 빼고 평양동쪽의 강동-회창-양덕-원산 선을 다 중공군이 남하한 상황에서 동부전선의 미10군단과 국군이 육로를 통해 평양원산선을 뚫고 퇴각하는 건 불가능해졌죠 ㅠ 동서폭이 좁은 만큼 중공군이 남하하는 통로들을 빈틈없이 다 막아버릴 것이므로. 그래서 후퇴할 수 잇는 유일한 방법인 흥남철수작전을 감행했고 다행히도 대성공이었죠 ㅠ
@user-zf5vq2fk4i
@user-zf5vq2fk4i 5 ай бұрын
영상 감사합니다. 멸!!공 !! 👍
@user-ix8dp9xs9i
@user-ix8dp9xs9i 5 ай бұрын
솔직히 그 많은 군수물자와 많은 수의 미군+국군 병력과 피난민의 협조를 구해서 흥남항 주변에 방어선을 치고 해안가로 미 해군 전함의 포격+항공모함의 항공기 지원을 받으면서 배수의 진을 치기만 했어도 피난민은 대피시키고 더 많은 유엔군 병력을 수송시키던지 하는 방식으로 교두보라도 만들 수 있었는데..ㅠㅠ 만약에 흥남항을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항공 지원과 포병대를 수송해서 천천히 전선을 확장하는 식으로 했으면..공산군의 최후방에 제 2전선을 형성해서 그것으로 1.4후퇴 이후 밀려난 전선을 더 수월하게 올릴 수 있고..진짜 장진호 전투는 가사회생해서 재반격하거나 할 기회가 많았던 것 같아요ㅠㅠ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말씀하신 것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06:23 부분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컨텐츠에서는 주로 서부전선 (청천강 전투)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동부전선 (미 10군단) 의 상황도 심각했는데 중공군이 이미 원산까지 들어왔습니다. 미 10군단은 아직 함경도에 있는데 훨씬 남쪽인 원산까지 넘어갔다면 후퇴로가 아예 끊겼단 의미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흥남항 주변에 융단폭격, 그리고 함포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그나마 군대와 피난민이 흥남항에서 철수할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철수 교두보는 몰라도 공격 교두보는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user-ix8dp9xs9i
@user-ix8dp9xs9i 5 ай бұрын
그게 아쉽죠ㅠㅠ 못해도 현재 휴전선에서 조금 올라간 형태로 후퇴를 최소화했다면 모를까..@@war-history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user-ix8dp9xs9i 6.25전쟁은 정말로 아쉬운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채널의 다른 컨텐츠에서 다뤘지만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휴전회담이 벌어지고 있는 서부전선에서는 공세가 어렵더라도 동부전선에서는 해볼만하다고 판단했고 금강산까지 밀고 올라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kzbin.info/www/bejne/iGmzh52heJ2mjqM (휴전 이전에 금강산을 탈환하라! )
@user-zl5gq4sh7u
@user-zl5gq4sh7u 5 ай бұрын
​@@war-history선생님 말씀은 일단 원산이 적 수중에 들어가니 아무리 함흥교두보를 지킨다 한들 원산쪽에서 적 들이 보급을 방해 할수 있고 무엇보다 길주, 원산과 함흥은 평지로 이어져 있으니 대규모 물량으로 밀고 들어가면 방어 조차도 힘들다는 것이니 ㅠ 여러모로 유지하기 쉽지 않았을 예상.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후방이 차단당한다는 두려움! 이것은 미군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멘붕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컨텐츠에서도 중공군이 두려운 이유는 아군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몰래 후방으로 뚫고들어가 차단하는 점이었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지난 컨텐츠인 청천강 전투 1~2부를 보셔도 어떤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rlee4805
@rlee4805 5 ай бұрын
영상 해설 😊 언제나 감사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위 이유들 때문에 평양원산선에 방어선을 만들어서 버틸 수가 없었던 점에서 참 씁쓸하죠 ㅠㅠ 더구나 이 평양 동쪽부터 낭림산맥을 메꿔야 할 미9군단이 중공군의 공세를 받은 국군2군단을 메꾸느라 많은 고생을 했고 또 미1군단이 청천강 라인에서 평양으로 후퇴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었답니다. 따라서 이로 인해 미9군단과 국군2군단이 속한 2사단은 피해가 너무 커서 평양 동쪽부터 원산까지 방어선을 만들 수가 없었고 이 틈을 타 중공군이 원산까지 남하해 먹어버렸죠 ㅠ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지난 청천강 전투 2부에서 다룬 바 있었습니다. kzbin.info/www/bejne/nnK5gGOBr7umjNU (중공군의 인해전술. 그것은 장비 대 인간의 싸움이었다. 청천강 전투 2부.)
@user-rg6bk3ev1h
@user-rg6bk3ev1h 5 ай бұрын
백선엽 장군^의 중앙일보 (생전)연재 기고문에서도.... 평양~원산선^이 언급되었고~ 그 line을 방어선으로 할것을 미군 수뇌부에 직접 건의했지만..... 묵살되었다고 회한^하셨슴!!! (그 당시 미군이 한국 역사/지리에 어두어서 그랬나 봅니다........😭 통일신라 국경이 바로 그 line 이거늘~~)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백선엽이 직접 미군 수뇌부에 건의했다고요? 아마 그런 기록은 없었을텐데요. 수뇌부라면 맥아더를 말하는 것 같은데 백선엽은 맥아더와 다이렉트로 이야기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속으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미국 정부도 맥아더에 이래라저래라 못했는데 백선엽이 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미군이 평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청천강 전투와 관계가 깊습니다. 청천강 전투 2부에서 그것을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kzbin.info/www/bejne/nnK5gGOBr7umjNU
@user-rg6bk3ev1h
@user-rg6bk3ev1h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미군 최 수뇌부에 직접 누구누고라고 언급은 없었고요~~~ 하여간, 미군측에 (백^장군도 장성이니 미군 측도 그 정도나 위는 되었겠지요?) 청천강--원산 라인을 건의했는데 묵살되었다고 쓴 것을 보았어요^^ (2009년 쯤~~중앙일보 기획^연제- 백선엽 전?# 에서요) 그때 그 기사를 읽고....저도 역사/(북한)지리에 좀 관심있어하는 사람이라 참 마음이 저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라인이 소위 한반도 토끼목=거의 39도선^) 참~~~댓글에 첨언해주시니...감사합니다
@user-rg6bk3ev1h
@user-rg6bk3ev1h 5 ай бұрын
하연간~~~청천강 - 원산 라인 만 진격 + 그 선을 지켰으면~~~~~ 그^라인 이북은 인구도 절대치로 많지 않아서~~~(완충지역으로 있다) 벌써 대한민국에 흡수되어 있을텐데^^ (그러나 역사에 IF^가 뭔 소용이 있겠나요😮‍💨)
@00ahn
@00ahn 5 ай бұрын
유엔군이 최초로 참전했다만 .. 참전+전사자수 살펴보렴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따라서 서부전선의 미1군단으로만은 평양원산선을 만드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고 게다가 빨리 후퇴하지 않으면 매섭게 남하하는 중공군에 의해 후방까지 차단되어서 자칫 평양에서 궤멸될 위험이 너무 컸죠 ㅜ 이러한 상황에서 평양원산선은 커녕 빨리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한계령-양양까지 전략적 후퇴를 한 다음에 병력 보강, 방어선 확충을 한 후 중공군을 막고 다시 재북진을 바랄 수밖에 없었죠 ㅠ
@djcjfisjsq
@djcjfisjsq 5 ай бұрын
많이도 내려왔네요
@user-zl5gq4sh7u
@user-zl5gq4sh7u 5 ай бұрын
​@@djcjfisjsq그니깐요 ㅠㅠ 그 넓은 황해도땅 다 내주고 원점으로 내려온 ㅠ 차라리 황해도 사리원쪽에서 좀더 방어선 만들고 싸우지 ㅠㅜ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zl5gq4sh7u 전쟁사 보시면 평양에서 후퇴하면서 서부에서 멸악산맥을 끼도록 하는 해주-평산-신계-이천-평강-김화-화천-양구-인제-양양 선을 방어 및 남하 지연선으로 사용했습니다 ㅜ 그런데 워낙 유엔측 병력 손실이 크고 중공군 남하규모가 많은데다 황해도에 제대로 된 방어선 구축을 미리 해둔 것도 아니라 결국 38도선 근처까지 쭉 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ㅜ 후방에 게릴라들도 군데군데 창궐해 괴롭히고 있는 것도 크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zl5gq4sh7u 그리고 지도 보시면 대동강선이 뚫리면 그 다음은 멸악산맥 선입니다 ㅜ 사리원에서 방어선을 만들 수가 없는 게 서쪽에 구월산, 동쪽에 정방산맥이 있지만 그 사이로 재령평야가 뻥 뚫려 있고 재령강이 남북방향으로 흐르고 위로 대동강까지 다 개활지라 방어선으로 사용하기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zl5gq4sh7u 과거 재령평야 일대가 재령만이었던 고대, 고려시대에는 바다가 깊숙히 들어와 있어 사리원 일대에서 자비령을 전선으로 삼는 게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 만이 평야가 되어 위로 뻥 뚫린 구조죠
@Lee-sv4yi
@Lee-sv4yi 2 ай бұрын
감동의 눈물로 ~~~~ 감사감사 감사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2 ай бұрын
개인적으로는 군인도 아닌 민간인인 레너드 라루 선장의 책임감이 감동적이었습니다.
@kju42
@kju42 5 ай бұрын
여기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중공군도 미해병을 잡으려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황 사실 흥남에서 미군한국군이 중공군보다 병력도 화력도 다 우세한 상황이었다 특히 화력은 항모의 지원을 받아서 압도적으로 구사할수 있었다 방어라인을 세우고 싸웠다면 얼마든지 버틸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 중공군은 산속에서 공격하다보면 상당수 얼어죽을 판이었는데 후퇴해줘서 그들은 살아남을수 있었다. 포병도 전차도 항공지원도 못받는 중공군 얼마든지 격퇴할수 있었을 텐데.... 이 후퇴로 서울까지 와르르 무너져 버린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때는 기습을 받아서 혼비백산할때인데어떻게 그걸 아냐고 따질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포로로 잡은 중공군은 알아서 중공군의 규모와 작전계획을 줄줄줄 다 불었다 중공군은 무전기가 없어서 모든 병사가 사단규모의 작전전술까지 전부 외우게 하고 싸우게 하는 상황이었다.
@user-zl5gq4sh7u
@user-zl5gq4sh7u 5 ай бұрын
님 말씀도 맞아요 ㅠㅠ 당시 병력,물자만 충분 했다면 함흥 교두보를 구축해 함경도 전선으로 몇달만 더 버텼다면 많은 중공군 병력들이 발이 묶여서 서울 점령까지도 힘듷었을테고 다시 우리가 반격해 치고 올라갔다면 황해도와 원산까진 수복 가능했을거에요 ㅠㅠ 함경도 전면 철수는 너무 뼈 아픔 ㅠ
@user-gs5hv6rc6u
@user-gs5hv6rc6u 5 ай бұрын
입만 살아가 전쟁이 그렇게 입으로 나불거리는거야 혹시 절라도 좌좀 좌빨들
@hks1safety
@hks1safety 5 ай бұрын
나라힘을 키워야죠 뭐. 아무리 국가 이익이 최고라지만 남의 나라니 자국의 젊은이들이 죽는건 못보니까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5 ай бұрын
흥남철수작전
@user-cl8kr3jq2u
@user-cl8kr3jq2u 3 ай бұрын
라루 선장님, 천국에서 복 받으시기를........
@user-bt7cm1iu8s
@user-bt7cm1iu8s 5 ай бұрын
역전다방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봐야겠어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아마 만물상자TV [전쟁의 신]이 더 풍성한 자료화면을 통해 더욱 리얼하게 그리고 디테일한 내용을 다뤘을 것입니다. 이 컨텐츠와 함께 kzbin.info/www/bejne/a6vRoquqmtlpmqc (한국의 운명을 바꾼 장진호 전투)를 함께 보신다면 흥남항에서 아군병력과 피난민들이 얼마나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는지도 보시게 될 것입니다.
@user-ei8vr8yn5n
@user-ei8vr8yn5n 4 ай бұрын
엄청난 결정이다 힘든 결정 이였고 참 고마운 일이었네요
@yeong-peomchoe1095
@yeong-peomchoe1095 3 ай бұрын
2시간 반을 쉬지않고 집중해 보게 하는 영상. 잘 만드십니다. 그때 태어난 다섯 아이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50년생이니 아직 생존할 나이인데.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근데전쟁때 전투기.전투함지원은빨랐는데 탱크지원이좀아쉬웠네요 m4셔먼전차 m36잭슨자주포 지원이빨랐으면좋았을텐데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중공군이 참전했을 때는 이미 미군에게 탱크는 많았습니다. 문제는 6.25전쟁 초반 북한의 T-34/85전차에 맞설만한 전차가 없었다는 점. 미군은 경전차인 채피 전차로 대응했다가 북한 T-34/85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한반도에는 산이 많아 탱크가 필요없다던 전쟁 전 미군 지휘부의 판단은 반만 맞는 말이었습니다. 산이 많아 대규모 전차전은 어려웠지만 탱크는 한반도에서도 진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한미상호방위조약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되었을까요?
@user-dj5bb9of5y
@user-dj5bb9of5y 5 ай бұрын
​​​@@war-history탱크가 없엇더라도 제대로 대천차포가 있다면 더오랫동안 지연시킬수있긴햇습니다 물론 당시 국군이 가지고있는 대전차포로는 t34에는 미미햇고 사용법도 제대로 몰랏기때문에 t34를 상대할수없엇죠 물론 미군이 어디까지나 경무장만 시킨것은 이승만이 원인이죠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user-dj5bb9of5y 이승만에 북진발언 때문에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user-dj5bb9of5y 말씀하신 것과 관련된 좋은 관련 컨텐츠가 있습니다. kzbin.info/www/bejne/qH-sl5ikq7CNpaM (6.25전쟁 초반 국군은 정말로 북한의 T-34전차를 막을 수 없었을까?) 6.25전쟁 발발 전에 국군에게는 2.36인치 바주카포와 57밀리 대전차포가 있었습니다. 한반도에는 산이 많기 때문에 탱크는 소용이 없다며 미군이 줬던 무기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 무기들은 T-34/85전차를 잡는데는 불충분했습니다. 하지만 2차대전 당시 유럽전선의 미군 수준으로 훈련만 받았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군은 그 부족한 무기조차 100%활용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DDK-zs3fy
@DDK-zs3fy 5 ай бұрын
배 안에 재앙의 씨앗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지...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
@user-vx6he1rc2i
@user-vx6he1rc2i 5 ай бұрын
단군이래 최고의 음흉한놈이자라고있었지
@ulrichkesler1220
@ulrichkesler1220 5 ай бұрын
그 때 부두에 쳐 박아 놓고 왔어야 했죠 ㅋㅋ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ulrichkesler1220 😁ㅋㅋㅋ. 그것은 순전히 미국의 호의였습니다. 인도적 차원이라고 하는데 국제시장 같은 영화에서는 피난민이 앞에서 아우성치자 한국인 청년이 사정사정해서 마음을 바꾼 것으로 묘사됩니다만 실제로 미국은 훨씬 이전에 병력과 피난민 모두를 구출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ulrichkesler1220
@ulrichkesler1220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그러믄요 이 노무 나라 미디어가 워낙 좌향좌에 감성팔이에 특화되어 있으니 그런 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더라고요 주인장님의 노고에 항상 감사 드립니다 😎😁👍
@shanestory3879
@shanestory3879 5 ай бұрын
흥남철수에 관한 영화도 있지 않나요? 들은 것 같은데... 한번 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ㅠㅠ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 맨 첫 시작이 흥남철수 장면입니다. 영화상에서는 한국사람 한명이 나와 미군 장군에게 사정사정해서 계획을 바꾼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상 미군 지휘부의 명령 자체가 북한 피난민 모두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컨텐츠 맨 마지막에 추천영상으로 장진호 전투를 다뤘습니다. kzbin.info/www/bejne/a6vRoquqmtlpmqc (미 해병대의 명예를 빛낸 해병 1사단의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영상과 이 영상을 함께 보시면 확실히 느끼시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user-rg6bk3ev1h
@user-rg6bk3ev1h 5 ай бұрын
영하 30도~35도^지역은. 장진호--혜산진등 개마고원이지~~~~ 흥남은. 동해의 (해양)기후덕?을 보는 지역이라~~~~ 영하 30도로 가진 않았을겁니다^^ 🌡인터넷에서...........날씨 검색^중 경기 북부 지역(일산/파주/연천/포천..) 중남부 내륙지역(양평/영동/무주/봉화/청송....)~~보다^ 함흥 --성진-- 청진 등 함경북도 지역이 훨씬 따스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람! 아마~~~~~^ 그 당시(1950년대)가 지금 보다 추웠으니~~~ 그때 흥남 날씨는.... 영하5도--영하10도 정도가 아니였을까요????????? ♡♡ 눈보라 심했으면 체감 온도는 그 아래였겠고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흥남항이 영하 30도라는 말은 기록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진호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더군요. 하지만 라루선장이 흥남항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면서 가장 걱정한 것이 추위일 정도로 1950년 겨울은 지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가 정말 오지게 추웠음을 강조하기 위해 썸네일 제목만 저렇게 지은 것입니다. 1950년 당시 흥남으로 모여든 당시 피난민은 영하 30도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user-rg6bk3ev1h
@user-rg6bk3ev1h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네~~~감사합니다^^ 하긴 경기 서북부^도 70년대 초엔 겨울에 영하 20도 이하로 자주 내려 갔습니다... (그러니) 1950년엔 .. 오죽했겠어요!!!!!!!!!!! (요사이는 확실히 덜 추워요^^)
@user-tt5gb7nw3b
@user-tt5gb7nw3b 2 ай бұрын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찬 부산항에 정박하지는 못했습니다 부산외항에서 대기하다 거제 장승포항으로 가라는 명령에 거제도 장승포까지 더 항해를 헤야했습니다 장승포와 지심도 사이 외항에 닻을 내리고 전차 수송선과 어민들의 도움으로 1만4천 5명의 피난민들이 12월25일 크리스마스에 육지땅을 밟았습니다^^;
@smlaelwa8914
@smlaelwa8914 3 ай бұрын
흥남 철수.. 누군가에겐 희망 누군가에겐 재앙의 시작
@woori4565
@woori4565 Ай бұрын
우리 큰아버지도 40년생인데 피난민중에 지금 현재 살아 계시는중 몸이 좀 불편 하시지만 건강하심
@war-history
@war-history Ай бұрын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user-yw9ot7zq3n
@user-yw9ot7zq3n 4 ай бұрын
거제도 도착 아입니꺼?
@user-nv2jk8dx2s
@user-nv2jk8dx2s 5 ай бұрын
미국의 노고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중공은 만고불변의 적 입니다.
@user-sf2df1vt2w
@user-sf2df1vt2w 5 ай бұрын
@user-tg2tn3ww3i
@user-tg2tn3ww3i 5 ай бұрын
1950년겨울전투때...미군이 싱겁게 후퇴하지 않았으면 평양-원산라인에서 방어선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었죠 그 선에서 휴전도 바라볼 수 있었고 ... 문제는 미국이 100% 한국의 관할로 인정했을 지 알 수 없지만...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100%한국 관할로 인정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맥아더라도 미국정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맥아더는 당연히 한국 관할 100%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 당시 미국 정부도 한국이 주인이 된 한반도 통일이 목표였습니다. 때문에 무조건 한국 관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입장에서는 아쉽게도 미국이 정책목표를 한반도 통일로 정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user-gu7st3pj5m
@user-gu7st3pj5m 5 ай бұрын
흥남철수의 진실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는 사실 중국이 2000년까지 50년간이나 중국인들에게 거의 말하지 않았던 전투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미군에 크게 승리한 전투인데 왜 50년동안 입다물고 있었을가요? 북한도 이 전투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고 미국도 오래동안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에 대해 입다물고 있었습니다.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는 6.25전쟁의 기타 모든 전투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규모 피난민과 함께 철수한 유일한 전투입니다. 미군은 장진호전투에서 처음에는 포위되여 큰 병력손실을 보았지만 그후 100키로이상 철수하는 길에서는 병력을 거의 잃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그 "피난민"들때문입니다. 사실 미군은 "피난민"을 구조해서 같이 철수한것이 아니라 북한의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서 억지로 "피난민"을 만들고는 이들을 인질방패로 삼아 앞에서 막는 중공군의 총탄을 물리치고 뒤를 쫒아오는 중공군의 총탄을 막았던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인츰 알수있습니다:어느나라 피난민들이 전쟁터에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처음 보는 심지어 참새까지 총으로 모조리 쏴 죽이는 극악스런 미군과 비밀작전으로 한번도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생면부지 중공군사이에 끼여들어 총탄을 맞으며 피난할리가 있어요?) 당연히 인질방패로 끌려다니던 북한의 "피난민"들은 중공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람도 꽤 많이 있어 중국은 오래동안 이 사실을 숨겨왔고 미군도 이런 비인도적인 사실을 말할리 없으며 북한도 자기들의 이런 치부를 들어낼수 없었습니다. 인질방패로 되였던 이들 피난민들이 없었다면 미군은 그 깊은 100키로이상의 험난한 산길을 전혀 빠져나갈수 없어 전멸할것은 불보다 뻔한 일이였습니다. 6.25전쟁시 북위 39도선이북은 소련이 제공권을 확보한 지역으로 미군공군이 힘을 별로 쓰지 못해 미군이 운산이나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많이 밀려 큰 손실을 보았던 지역입니다. 미군이나 한국군 유엔군도 공중우세를 확보하지 못한곳에서 싸우니 겁에 질려 허겁지겁 남쪽으로 퇴각하고 도망쳤습니다. 당시에는 미국과 소련이 둘다 3차대전으로 확대되는걸 꺼리여서 39도선이북 소련공군의 제공권에 대해서 함구하고있었고 중공군도 제공권이 보장된 39도선이북에서는 마음놓고 인해전술을 썼습니다. 39도선이남에는 소련군의 전투기가 하늘에 없었기에 미공군의 역할이 컸습니다.미군도 39도선이남에서는 큰 피해를 안보았구요. 중국이나 러시아 둘다 39도선이북 자기집앞마당에 미군의 전투기나 탱크가 있는걸 용납하지 않을겁니다.
@djcjfisjsq
@djcjfisjsq 5 ай бұрын
피난민
@irnavy0613
@irnavy0613 5 ай бұрын
당시 중공군의 보급 능력만 제대로 파악했더라면 8군이나 10군단이 자기들 후방이 차단된다는 걱정 때문에 이토록 허무하게 철수하는 결정은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user-zl5gq4sh7u
@user-zl5gq4sh7u 5 ай бұрын
ㅋㅋㅋ 그걸 생각못하고 전멸 될까 겁나서 평양부터 황해도 전체를 적들에게 공짜로 다 내주고 ㅋㅋ 다시는 황해도쪽으론 올라가지도 못함 ㅋㅋ 휴전 회담을 호구처럼 개성에서 하기로하곸ㅋ 최소 사리원이나 평양에서 회담 열도록 더 치고 올라갔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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