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가족과 분리될 정도로 선택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에 빠지지 마세요 가족과 분리하라는 말은 절대 주의해야합니다 가족이나 삶의 영역에서 분리를 권하는 자들은 대부분 병든 사이비 성향의 교회거나 이단입니다 자기 교회에 가둬두려는 가스라이팅 입니다 스스로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우쭐함이며 교만입니다 먼저 주위 사람 들이 당신을 멀리하는 원인을 스스로의 잘못은 아닌지 살피시고 내가 잘나서 주위에서 시기한다는 엄청난 착각에서 벗어나 겸손하세요 마귀는 당신이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우쭐하게 만들어 인생 을 10련이든 20년이든 허비하게 합니다 겸손하게 기도하며 하나님 은혜가 함께하는 일상에 충실하세요
@ZOO-sv5mh4 ай бұрын
신천지 교리는 잘 모르지만 사이비에서 제일 먼저하는게 가족까지 연을 끊게 하는것이나 이부분은 하나님도 가족과 분리 하시는 부분도 있긴합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연끊는건 아니지요! 그런데 선택받은자 < 사이비의 기본 교리 입니다. 넌 특별해~ 루시퍼의 죄명 교만 입니다! 정말 그사람이 특별하다 하여도 그만큼 교만하기 쉽고 결국 변개하는 종이 수두룩빽빽이기에 하나님은 나무토막같은자들을 찾으십니다. 속된말로 나 아니어도 누구나 쓰실 수 있는분입니다! 왜냐면 그 은사는 내가 만드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전 가족과 분리까지는 좀 들어봐도, 선택받은자 나오면 거릅니다.😅
@HEGE16884 ай бұрын
분리는 성령께서 직접 하십니다. 너희는 주께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97pureable4 ай бұрын
사람들사이의 상식과 자기생각이.아니라.성경을 토대로 판단해보세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부모에게 효 하라고 하시죠. 모순되지요?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주님께서는.가족이.불화하도록 검을.주셨다고 하십니다. 단 한가지 성경은 사람이.인간성을 버리고 천국을 이루는것..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말씀이.깨닫이집니다
@Juneincamel4 ай бұрын
성경 구절 하나에 맹목적인 해석을 하니까 사이비단체가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가족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사랑해야한다. 성경 구절을 자기들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이단이다. 무신론자를 보고 우월감을 느끼며 그들에게 제대로된 복음을 전하려 하지도 않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성경을 미련하게 이해하니까 사이비나 이단에 빠지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주고 모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user-magnificat4 ай бұрын
영상도, 이 댓글도, 둘 다 묵상할 가치가 있음
@Sm-ju9yx2 ай бұрын
아멘아멘..!!!
@구독오케이4 ай бұрын
이 영상을 보시고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은 많은 상징적인 의미와 복합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어요~ 표면적으로 가족과 친구로부터의 분리가 아닌 영적으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의 놓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 각자의 당면한 문제 앞에서 부모 형제를 찾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받는 위로와 성장이 있는거죠~ 그리고 주변관계 속에서 기도하며 분별하는 능력이 생겨 자연스레 가까이할 이와 멀어지는자의 분별이 있는것이지.. 주님이 그런 환경을 만드시기도..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귀가 열려야 곡해 없이 이해될듯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user-only12302 ай бұрын
👏 👏 👏 👏
@주바라기-g9y2 ай бұрын
아멘아멘아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왜 분리되었는지 알게됐어요.주님 뜻대로 사용해주세요 아멘
@아들손-p2l2 ай бұрын
저는 기본적으로 주님은 지켜만 본다고 생각하네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아들손-p2l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마리야-3334 ай бұрын
제가 딱 그래요 교회가면 하는일마다 저만 틔는것 같이 저만 다른사람 보듯이 경계하고 진짜 주만 바라보게 되고 교회에는 원수 들만 있는 거 같은데 이제는 미워하지도 못해요 생명이 주님 손안에 있다는걸 깨닫고 이제는 아무리 저를 조롱하고 수근 수근 대고 미워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네요 아버지는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거 같습니다 아직도 많이 많이 부족하지만요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정지웅-c9u2 ай бұрын
아멘. ~~~ ^♡*
@대박-z2e8n4 ай бұрын
하나님의 목적에 온전히 순종 하길 원합니다 도와 주세요 예수님 ❤❤❤ 뜻 데로 인도하여 주옵소서.나의 주님 사랑합니다 아멘
@Pishon06204 ай бұрын
아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
@prt-qn2rq2 ай бұрын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특별함보다 주님안에서 구별된자 임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unimoon8873 ай бұрын
주님.외롭고 힘든 여정이며 순종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더욱 순종하는 저가 되고 고립이라는 감정을 극복할수있게 도우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김원배-c5o2 ай бұрын
아멘할렐루야~ 말씀 감사합니다~
@in23452 ай бұрын
저도 가족.친구.사회관계 모두 정리하고 혼자 있습 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 아팠지만 너무 신기하 고 감사했습니다. 2보전 진을 위한 1보후퇴라 여기고 주님만 따릅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SSU-19874 ай бұрын
아멘.. 하나님아버지 나의 주님.. 도와주세요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SSU-19872 ай бұрын
@@윤창원-i2e 위로의 말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좋은날 기쁜날 되시길 간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감사 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SSU-1987 아멘 HKY
@user-es2rq7hc774 ай бұрын
가정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다만 가족이 불신자면 기도하며 기다릴수는 있습니다 가정이 사역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영상들 속 내용들이 다소 이상한 메시지가 있는듯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요셉이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이며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함께 예배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 믿는자의 특별함은 먼저 내 가족들과 가정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알곡4 ай бұрын
마태복음 19:3~5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가복음 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린도후서 11: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형제이고 자매이며 높고 낮음을 가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다는 말씀을 공유드립니다. (삼상 15:22)
@김민주-u3c4 ай бұрын
가정을 완전히 떠나고 버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부모. 형제. 친구 .이웃들이 육에 사람들이라... 나에게 성령충만 영적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잠시 떨어져서 나부터 우리가족부터(남편.아내.자녀)를 하나로 묶어 영적으로 단단히 세우고 그 다음 부모님. 형제.이웃 등 영적으로 도우고 구하고 세우라는 뜻입니다. 나부터 성령충만 하고 영적으로 세워져야 영권이 있어 사탄에 공격을 제압할수 있으니깐요... 그래야 가족.이웃을 구할수 있어요 꼭 필요한 훈련 과정입니다.
@user-es2rq7hc774 ай бұрын
이분의 영상 댓글을 보니 같은팀에서 달아주는 것 처럼 바람잡이 댓글로 보이는글들이 있어 노파심 에 댓글 달았습니다 왜냐면 이단들도 너는 특별한 자다 ,세상이 ,교회가 널 알아보지 못하는거다 라며 가정에서 교회에서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해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이분이 자신의 얼굴이나 소속 ,이름 직분정도는 밝히면 좋겠습니다
@dd-mr6nn4 ай бұрын
상황따라 다른거겠죠 항상 그게 가능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JingJing-bo5hb3 ай бұрын
" 선택받은 자요 " 부모를 더 사랑한다던지 자녀를 더 사랑한다던지는 부합하다고 하지 않네요 우리는 가족이지만은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있습니다 매순간을 같이 있을 필요는 없어요
@하명일-p5m4 ай бұрын
힘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경양박-g6q4 ай бұрын
명확한 성경적 해석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은혜-w7h4 ай бұрын
아멘에수님의은혜로영광돌리게하소서!!!나라권세영광이아버지!!!께영원히있사옴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만물박사여2 ай бұрын
나의 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기를 바라는 것처럼 . 이 꿈 하나입니다 . 세상 모든 이들이 이 꿈 하나만 갖기를 바랍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user-lq5qi3ce2c4 ай бұрын
말씀에 은혜받게 하시어 감사드립니다
@주연이-v6y4 ай бұрын
성경적이네요.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이 부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믿음을 바라시는 것일 수 있다고 느껴지네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참꽃마리-p1p4 ай бұрын
저는 주님께서 주변의 모든 이들을 떠나게 하셨어요. 이상할 정도로요. 그래서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되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하였습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이젠 주님만이 나의 소망 나의 사랑 내 삶의 이유되십니다.
@Xjtyuzxd4 ай бұрын
잘못알고계신듯 잠언서에도 한사람은 패하겠거니와.. 성경에도 단독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없었어요 훈련시키기위해 광야는 잠시 허락하셔도. 예수님역시 하나님과의 교류시간외에는 늘상제자들. 이웃들과 동행하셨죠.. 그리스도인은 나홀로가 아닌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도 동행할줄알아야합니다 연단의 시간 외엔 하나님은 결코 외롭게 외딴섬으로 두지안으세요 님이 오인하신듯요
@홍루미나4 ай бұрын
아멘 입니자 저도 지금 그러한 광야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괴롭긴 합니다
@user-love72772 ай бұрын
이단 쪽 이셨나요. 이단성 이단적인 사람들 가스라이팅 하는 가장 첫번째 일삼는것 이 고립 시키고 모든 인간관계,이성사랑 까지 단념,방해,오해 광신도처럼 보이게 만들어 이성들이 오해하고 떠나게 하고,신도들이 가스라이팅 하고 조종하고 지배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사탄은 조종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빛을 가장하거나, 말로는 안하고 행동으로 모르는 사람들이나,힘들게 하는일들, 일어나는 힘든말을 믿어주지 않으며 자신의 말이 다 옳다 의지하라 힘든것 알면서 예민하다 반응도 나르스시스트 성향이거나 일부러 하거나 . 옳다 라는 따르라는 사람들은 이 일어나면 먼저 경계할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알고 보면 그들의 실체에 느낌이 느껴질때가 있읍니다. 가정을,사랑하는존재들,감사한이들, 다 끈고 고립시킴으로 써 그들의 도구로 쓰려는 이단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들이 가장 먼저 주변에 가정을 갈라서게 하거나 가까운 이성교제나 그틀의 걸림돌이 될만한 것들을 떨어뜨려놓으며 힘들게 시험하며 메이게 합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이단성 이나 사이비에 가깝다고 보셔야 됩니다. 종교 뿐만아니라 교인이 아닌 사람들중에 악인 악질나르스시스트 ,소시오패스 들이 하는 비슷한 행동패턴, 말은 선하거나 거룩한척 하나 닮은성향이 있고 같은 가스라이팅과 후버링 의 방식을 씁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Xjtyuzxd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홍루미나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wjdtlsdlfehgktkqnftjd12344 ай бұрын
당신은 누구시길래 성경을 이렇게 잘 해석하시나요...제 생각 정리를 잘 해주셨습니다. 엄지척.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순복-v1n4 ай бұрын
아멘❤❤❤
@최영님최영님4 ай бұрын
하나님이말씀데로이루지게화소서. 감사함니다 아멘아멘
@박민영-f2o2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gotothelegend3802 ай бұрын
부모 누이와 연을 끊었습니다 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날 속이고 이용하고 괴롭히는 자들인걸 알게 됐을때 세상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가 핏줄이라는걸 알게됐습니다 지금도 날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왜 끊어내게 했는지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Mz1945전북일기4 ай бұрын
ㅡ 4달전부터저도 여러사건들로 분리가 되는것이 아닌 하나님이 분리를 시키시는것같다 . 라는 생각을했었고.. 내주위를 다 바꾸시려 하시는것같다..라고 도 생각했었거든요 인간은 관계가 상당히 중요한데 그부분에 내가 기도가 없었구나 ..라는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은 한살이라도 어릴때 관계에대해 깊이생각해보시고 . 기도를 많이 하시길. .영상 감사합니다 ❤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경희-g6e1y4 ай бұрын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제인생이 망한줄로 알았어요 아무리 하나님을 믿었어도...정말 감사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prt-qn2rq2 ай бұрын
우리가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처럼 될수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속에 시대 상황별로 그 분들을 사용해서 오늘을 살아기는 저희들에게 영적 교훈을 얻게 하시려는 삼위일체 성령 하나님의 뜻 입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홍루미나4 ай бұрын
아멘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능선김4 ай бұрын
아~멘!! 하나님이 저를향하신 계획이 놀랍고 100%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HEEB-h1c3 ай бұрын
1.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될 때 이것을 부정하며 낙담시키는 질투를 제거하기 위하여 2. 기존의 위치는 경험과 관점을 제한한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전에 방해가 될 요소를 제거하신다. 4,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여정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5.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옛 과거는 청산해야 한다. 6. 모든 사람이 나와 하나님과의 여정에 동참할 수 없다. 7. 아브라함처럼 본트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롯과도 다툼 없이 떠날 시기를 정확히 파악했다. 8. 정련된 후에는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9.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할 이전 상태 사람들로부터 분리 하신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유현숙-r7s2 ай бұрын
이 영상 단순히 들어보면 이상한것 같으나 왜곡으로 생각치 마시고 하나님 자녀의 구별된 자녀의 인도과정입니다 구원에 이르기까지 칭의 - 성화- 영화의 과정이 구원에 이르도록 과정에 필요한 구별된자로 살라는것이죠~~ 내양은 내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말씀있지요~~ 가족 친구를 멀리하라는 것은 가장 가까운 것으로부터 시험이 있고 방해되는 시간들로 하나님 자녀의 인도하는 여정에 가로막혀 세월을 더디게 가게 돌고돌아 선순환이 아닌 악순환이 될수가 있지요 구별된 자녀들의 믿음이 반석위에 세워져 강성해져 다스릴 수 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믿음의 반석에 세워질때까지 집중케하십니다 사람마다 구원의 여정이 얼마만큼 순종 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가나안 땅 들어갈때까지 갈렙과 같은 강성한 믿음으로 세우신 다음 믿지않는 가족 이웃을 전도할 수있는 영혼들을 세울 수 있는 강서한 전사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게 사명이되고 소명입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복자-k4r4 ай бұрын
감사 드립니다
@주선화4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목사님 .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용수권4 ай бұрын
아멘 좋아요 내키
@미미-h4n3c4 ай бұрын
내용이 항상 질적으로 좋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해야하고 예수님께 집중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가짜사도가많습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김오남-y8t4 ай бұрын
아 ~ 예 그러 시나 봅니다 저는 온 집안 가족 분들 모두다 챙기면서 하나님 의 은혜로 살려고 했는데 맞습니다 대와중에 도 시기 질투 앞당겨서 잘못된 말을 하고 힘들렀 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감사 합니다 답을 알려 주셔서 요 ❤ 아멘 🙏 아멘 🙏 할렐루야 🙏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립니다 🙏
@행복하다-o9j4 ай бұрын
이 분 교회 표시인지 십자가 밑에 성경책 아래 한글을 읽어보려고 하니 글도 아닌 것이 써있네요. 모두 분별 잘 하시길 바랍니다.
@spacemechman4 ай бұрын
네 저도 저 마크 캡쳐해서 확대하니 이상한 글씨가 써있네요 이상하다
@홍연희-c4i4 ай бұрын
저도 좀 이상 한것 같은데 뭐라고 쓴건가요
@ZOO-sv5mh4 ай бұрын
그리고 매일 영상 올리는것도 절대 개인이 아니네요.
@이꾸꾸3 ай бұрын
음모론자들아 다꺼져러
@Gomdori00702 ай бұрын
그거 ai로 이미지 생성하면 글씨가 이상하게 나오는거에요 걍 성의없게 만든 썸넬임..
@빛과소금-o4l4 ай бұрын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니라 아멘 🙏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빛과소금-o4l2 ай бұрын
@@윤창원-i2e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에게 찾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썩어 없어지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되리라 아멘 🙏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빛과소금-o4l 아멘 HKY~!
@prt-qn2rq2 ай бұрын
성경을 1차적으로 나에게 바로 적용 하는것은 무리입니다. 요셉은 그 시대의 하나님의 특별 하심으로 사용하신 자이며 우린 그 말씀에서 교훈을 성령님께 배웁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rumie64164 ай бұрын
정신적인것을 말합니다. 남편과 친구와 자녀와 사람들의 관계에 내 안에있는 하나님 나라를 로고스의(말씀) 빛이 내 안에 임하여 주님이 통치 하시길 원하시지 남편 자녀 친구가 하나님을 대신해 의지 되고 우상이 되는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잘 읽고 분별 하셔야 해요. 밑에 몇몇 여러분들이 계시는데 정말 말씀을 안읽고 진짜 말씀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은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늘 말씀 가까이 하라 하지만 정작 그것을 게을리 하고 사람을 따르고 분별력을 잃어서 성경을 읽지 않고 어디서 들었던 구절만 인용해서 사람들 정죄하기 바쁜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발 이러한 영상은 참고만 하시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원하시는지 성경을 읽어보세요. 제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이분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루의 삶을 승리로 이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승리하길 바랍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rumie64162 ай бұрын
@@윤창원-i2e 알파와 오메가는 그럴때 적용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과 끝이라는 분임을 인용 할때에 히브리어 처음 단어 알파 끝단어 오메가라는 말을 사용 하십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상실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들은 상실을 그리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성령님을 통해 예수(말씀)을 통해 우리가 상실 할지라도 완전하신 아버지께서 이미 이루시고 계획하신일에 우리가 함께 함을 확신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불완전 하다는 것을 알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깨어질 수 없습니다. 어찌 부모가 자식이 불안해 하고 약하다고 버리겠습니까- 우리는 약한 존재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 하며 아버지께 나아갈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하심이 주님 안에서 완전함을 이룹니다. 기쁨 희락 평강 유익 이 모든것이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자유함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예수님께 보내지 않고 서는 예수님의 어린양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것 입니다. 마귀에게서 떠나시고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예수님을 믿으세요.
@user-magnificat4 ай бұры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김영미-t6s7o4 ай бұрын
신천지 아닙니다 훈련받아야하는 자녀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위로와 힘이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garden38803 ай бұрын
사단은 교묘하게 말을 비틀어서 계속 헷갈리게 만든다. 가족과 친구와 거리두기를 하라? 신천지가 자녀와 부모를 분리 시켰더랬지. 주님은 네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선택 받았으니 멀리하라구?ㅎㅎ
@이은희-k6e5o2 ай бұрын
믿지 않는 가족들은 이해를 못해요 그냥 이상한 사람 취급해요 뭔 하나님이 있느냐는 식이죠 그래서 선택 받은 우리는 집에서도 구원 받지 못한 가족으로 부터 앖는 신믿는 바보 취급 받아요 십일조도 못하게 하고 주일성수 못지키게 하고 이해하면서 답답해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김오남-y8t4 ай бұрын
사진 건물이 무서 워요
@grace.obedience2 ай бұрын
밸런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그건 너만큼 믿는 가족들일 경우야~!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돌보는 것과 거리를 두는 건 별개다. 돌보는건 생계이고, 거리를 두는건 마음이란 거다~! 이걸 잘 분별하라고 친구~!
@yjrm76343 ай бұрын
예수님도 공생애 나서기전 세례요한에 세례받은 후 성령께서 광야로 인도 40일 금식하게 하시고 마귀에게 3번 시험받았지. 완전분리 완전 고립을 통해 성령의 내적 충만시기. 이런 시기를 거치지 않으면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참된 괸계가 불가능함. 바울도 회심후 예루살렘에 바로가지 않고 아라비아에서 3년간 고립의 시간을 가짐(갈1:17~18)
@Juneincamel4 ай бұрын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좋지만, 제목만 보고 극단적으로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떠나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들을 떠나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늘 서로 배려하며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사이비나 이단과 진짜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점에서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이웃들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잘못된 신앙 때문에 자신의 가족과 가까운 이웃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마음을 떠나버리란거야~ 생계는 책임지되~! 잠수는 타지말고, "요즘 머 하는 일이 바빠서~"라며, 거리를 두란거다~! 그들이 널 훼방놓지 않도록~!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God: What if you make a new decision to part ways with your family and your friends? What will be the result? I'll tell you. You will live like Buddha, like Jesus, and like all the saints you once worshipped. But, as with many saints, people will not try to understand you. And if you try to describe the serenity you feel, the joy of life, and the Dharma connection in your heart, they will listen to you, but they will not accept you. They will repeat what you say, but they will try to add to it. They'll wonder how you found what they didn't, and they'll grow jealous. Jealousy will soon turn to anger, and they will get angry and try to convince you that you are the one who does not understand God. But if you do not take yourself away from the joy you feel, they will be filled with great anger and will try to hurt you. And if you say that it is useless, that even death cannot interrupt your joy and change your truth, they will surely kill you. And when they see the serenity with which you accept death, they will call you a saint and love you again. It's human nature to love what you hold most dear, then destroy it and love it again. Me: But why? Why do we do that? God: All human actions begin at their deepest level with one of two emotions: fear or love. In fact, there are only two emotions, two words, in the language of the soul. These are the two extremes of the great polarity that I created together when I created the universe and the world as you know it today. These are the two poles, the Alpha and the Omega, which allow the system you call "relativity" to exist. Without these two poles, without these two conceptions of phenomena, there can be no other conception. All human thoughts and actions are rooted in either love or fear. There is no other motive for action. All other concepts are only derivatives of both. They are just variations of the same theme, different twists. Think deeply about this. Then you will know that it is true. This is what I call "support thinking." Supporting thoughts are thoughts that come from love or fear. This is thought after thought. This is the original thought, the primordial force, the raw energy that drives the engine of human experience. Therefore, it is for this reason that human beings experience their actions over and over again, and this is why they love, destroy, and love again. Human beings are always fluctuating from one emotion to another. Love begets fear, fear begets love, love begets fear...... ...... And the reason for this is found in the first lie that God is unbelievable, the very lie that you consider to be the truth about God. In the first lie, that you cannot rely on God's Love, that God accepts you conditionally, and that the ultimate outcome is uncertain, if you cannot rely on God's Love, which is always there, whose love can you rely on?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수수꽃다리-g8i3 ай бұрын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친구와 가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그들을 섬기며 선교사로 살아야지요. 요셉의 경우, 그러한 고난을 받아 원치않는 분리를 당했는데 슬기롭게 난관을 극복해 하나님의 영광을 이끌어낸 것 뿐이지 그게 모든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친구와 가족에게서 분리해야 한다는 계시는 절대로 아니예요. 이 사이트 조심해서 들어야겠어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너 여기서 가장 위험해 보인다...닝겐...왜 인간을 섬기지? 하나님을 안 섬기고? 하나님이 인간 섬기라고 하던가? 누굴 섬기라고 하던가? 왜 스스로를 노예로 하락시키지? 인간이 하나님의 노예였던가? 자녀가 아니고? 사단의 노예였던가? 사단의 장막속에 드리워진 인간을 섬기라는 건 사단이자나~! 너 정말 귀신 들린 것 같다. 정말 조심해라!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최유정-g5t4 ай бұрын
아멘 🙏
@chloeh14082 ай бұрын
국가는 브라질, 이사한 모양의 십자가, 비성경적인 내용. 열심은 있으나 사랑이 없으면 이단입니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죄감을 준다면 이단입니다. 마일리지 쌓듯이 내 노력과 열심을 쌓으라고 가르친다면 이단입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belita_5Ай бұрын
조현병 아닌 거 알아요😂 힘들어.... 하느님한테 버림받은 자는 ㅂㅋㅂㄹ된다고....
@이순-f4f4 ай бұрын
이건 성경 말씀 을 이용해서 인간 관계를 분리 시키 는것같아요
@바람불어-e4m4 ай бұрын
이게맞는말인뜻,주위사람들,다손까락질하네요 찬구고 가족이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정신이상자로 취급,,너무외롭습니다,외로움도 악에유혹이러는데,,,
@user-love72772 ай бұрын
일부러 그러는것입니다. 주변인이나 가족, 알던 사람들 중에 이단성 이나,사이비종교 성향 못느끼셨는지요 . 점검 해보시는것도 지혜 입니다 몰아세우고 자괴감에 실망 그리고 꿈을 단념하게 하는 말은 그리 안 하나 행동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잘 관찰하시고 본인의 느낌과 감정,생각을 무시하지 마세요. 교회는 기독교 안에 모이는 자리 말씀을 듣는 자리이지 때론 성도들간에 기도도 하여줄수있고 하지만 타인의 인생자체를 그들의 잣대로 판단되게 하거나 들으시면 안됩니다. 이단성이나 사이비종교 는 수법이 교묘하고 일반 교회처럼 보여도 아닌 마음을 갖은곳도 있으며 가스라이팅,시험 많이 일어나는곳은 그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며 사탄론을 많이 이야기 하며 말은 안해도 요즘은 스트레스 나 고립, 암묵적인 스트레스로 강요,조종, 지배하는 게 느껴진다면 그들의 조언 말도 필요없이 본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들의 말보다 태도를 생각을 보시면 알수 있읍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user-love7277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로윤-p6i4 ай бұрын
진리 아닙니다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이런말씀에 대해 분별하십시오
@이은희-k6e5o2 ай бұрын
믿지 않는 가족과 있거나 믿지않는 친구들 이웃들과 있을때 이런 현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남우디-s1s4 ай бұрын
아무일도일어나지않는건..잘못된걸까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그런건 없어요. 영원한 건 없듯이, 영원한 변화도 영원한 불변도 없습니다. 님이 그 변화를 못 볼뿐ㄴ입니다.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남우디-s1s2 ай бұрын
@@윤창원-i2e 변화를 못느끼는게아니라 정체되잇단생각이들어서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남우디-s1s 그 정체 되었단 느낌도, 다른이면에는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겝니다. 물은 99도까진 아무 변화가 없죠. 머든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까진, 내면의 준비 70%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소. 나도 답답한데,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ㅎㅎ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남우디-s1s 암튼 님의 그 느낌도 층분히 공감하고 존중합니다...기다려봅시다 ㅎㅎ
@남우디-s1s2 ай бұрын
@@윤창원-i2e 감사합니다
@webid36674 ай бұрын
이 영상 분별 잘 해야 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hh56694 ай бұрын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빛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분리, 떠남 이게 맞는건가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사실 제일 어려운것일수 있고 이 속에서 갈등이 생길때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기위해 노력하는것 아닌가 하는데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jjkim21044 ай бұрын
누구이신지 궁금합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신의한수-h3l2 ай бұрын
천국갈려고 가족 버리라 이말인가요?
@이은희-k6e5o2 ай бұрын
그런뜻이 아닙니다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leontryto4 ай бұрын
몇장몇절 이라고 말씀 안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뀨-v8i2 ай бұрын
ㅅㅊㅈ
@로윤-p6i4 ай бұрын
진리 아닙니다. 여러분 조심하시고 분별하십시요
@돼지안-m5o4 ай бұрын
왜요?
@허영희-q2o4 ай бұрын
바른 성경해석 감사하니다
@jh_toge4 ай бұрын
제 임무가 무엇입니까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최거인2 ай бұрын
이 유투버 신천지?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sujeung57914 ай бұрын
하나님께서 가족 버리고 지 혼자 구원 받고 올라오라고 하셨다구요??? 그 말씀이 아닐텐데요 주의 뜻을 행하면 얻는다고 버린다는게 실제로 버려라는 뜻이 아니고~ 신앙을 지키면 잃은 가족을 찾는다는 그런뜻~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쩡쩡이-x5iАй бұрын
외롭게 두시지 않으시던데요 하나님은 고립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화목하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안에서 관계하게 하시고 공동체를 주셔요 그리구 가족들과도 소통하고요 ~~ 나도 우월감 특별한 선민의식에 살ᆢ잡혀있엇음을 교만을 회개합니다 그게아닌데... 참 교묘하게 사단이 ....... 노리네요 구독취소합니다 ㅠ 너무좋앗엇는데요 이말들이 ~~ 근데 제가 지금 느끼기에는 아니구나 라는 분별이 깨달아 집니다 마지막때 진짜 조심해야함을 느낍니다
@Minitslove3 ай бұрын
선택받은게 아니라 너가 존나만만해서 찍힌거다 이용당하는거다 이얘기임 너 존나 호구라 우리가 너 찍은거임 이얘기
@김영희-l7z6o4 ай бұрын
분리시키는 자!!!
@hh56694 ай бұрын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빛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분리, 떠남 이게 맞는건가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사실 제일 어려운것일수 있고 이 속에서 갈등이 생길때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기위해 노력하는것 아닌가 하는데요,,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위해 방해요소들로부터 분리되어 집중하라는 메세지를 들어보면 마치 스님이 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네요 사명을 다하기 위해 분리, 떠난다? 사명은 세상에서 하는건데? 그리고 하나님말씀은 그렇게 쉽게 정답맞추듯 탁탁 척척 해석되는것이 아닌데 듣고있다보면 너무 속시원한 정답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아요 영상메인화면에 십자가이미지는 또 뭔가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hh56694 ай бұрын
그리고 하나님말씀은 그렇게 쉽게 정답맞추듯 탁탁 척척 해석되는것이 아닌데 듣고있다보면 너무 속시원한 정답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아요 영상메인화면에 십자가이미지는 또 뭔가요?
@돼지안-m5o4 ай бұрын
사진들이 무서워요
@hh56694 ай бұрын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위해 방해요소들로부터 분리되어 집중하라는 메세지를 들어보면 마치 스님이 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네요 사명을 다하기 위해 분리, 떠난다? 사명은 세상에서 하는건데?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스칸디아-f5sАй бұрын
구독 취소합니다
@ddolddolkim63604 ай бұрын
아, 이 분 신천지구나. 가족과 분리 +선택된 자. 신천지 맞네. 아니시면 아니라고 답글을 달아주세요.좋은 이야기도 많은데 문제는 특별히 선택된 자,가족이나 누굴 떠나야한다고 강조하시면,신천지처럼 신앙에 방해되는 가족 떠나서 선택받은 자,집단생활하게 되는건가....하는 생각이듭니다./신천지 아니라면 밝혀주시면 됩니다
@전다연-v9e4 ай бұрын
ㅇ.ㅇ진짜요? 신천지가 이렇게 하나요?
@braveh70424 ай бұрын
신천지가 어떤걸 가르치는건 모르지만 하나님은 광야의길 또는 고난받는 자녀가 성장하기 원하시고 온전히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있도록 주변의 불필요한 가족이나 친구나 주로 악한 자들을 치워주시기도 해요. 치워 준다는 말이 좀 그렇지만 자녀가 하나님께 집중하기에 방해되는 주변을 정리해 주시 더라구요.
@해바라기-b7q4 ай бұрын
@@braveh7042저도 동감
@ZOO-sv5mh4 ай бұрын
신천지 교리는 잘 모르지만 사이비에서 제일 먼저하는게 가족까지 연을 끊게 하는것이나 이부분은 하나님도 가족과 분리 하시는 부분도 있긴합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연끊는건 아니지요! 그런데 선택받은자 < 사이비의 기본 교리 입니다. 넌 특별해~ 루시퍼의 죄명 교만 입니다! 정말 그사람이 특별하다 하여도 그만큼 교만하기 쉽고 결국 변개하는 종이 수두룩빽빽이기에 하나님은 나무토막같은자들을 찾으십니다. 속된말로 나 아니어도 누구나 쓰실 수 있는분입니다! 왜냐면 그 은사는 내가 만드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전 가족과 분리까지는 좀 들어봐도, 선택받은자 나오면 거릅니다.😅
@다연-w7f4 ай бұрын
으이그 교회다닌다고 다 믿음의 분량이 다 같지 않은데. 성경을 좀 깊이 있게 읽으면 좀 알텐데.. 여기서 자세히 알려주고 있네..
@goodday299944 ай бұрын
Yesu not lord. (*(*((*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God: What if you make a new decision to part ways with your family and your friends? What will be the result? I'll tell you. You will live like Buddha, like Jesus, and like all the saints you once worshipped. But, as with many saints, people will not try to understand you. And if you try to describe the serenity you feel, the joy of life, and the Dharma connection in your heart, they will listen to you, but they will not accept you. They will repeat what you say, but they will try to add to it. They'll wonder how you found what they didn't, and they'll grow jealous. Jealousy will soon turn to anger, and they will get angry and try to convince you that you are the one who does not understand God. But if you do not take yourself away from the joy you feel, they will be filled with great anger and will try to hurt you. And if you say that it is useless, that even death cannot interrupt your joy and change your truth, they will surely kill you. And when they see the serenity with which you accept death, they will call you a saint and love you again. It's human nature to love what you hold most dear, then destroy it and love it again. Me: But why? Why do we do that? God: All human actions begin at their deepest level with one of two emotions: fear or love. In fact, there are only two emotions, two words, in the language of the soul. These are the two extremes of the great polarity that I created together when I created the universe and the world as you know it today. These are the two poles, the Alpha and the Omega, which allow the system you call "relativity" to exist. Without these two poles, without these two conceptions of phenomena, there can be no other conception. All human thoughts and actions are rooted in either love or fear. There is no other motive for action. All other concepts are only derivatives of both. They are just variations of the same theme, different twists. Think deeply about this. Then you will know that it is true. This is what I call "support thinking." Supporting thoughts are thoughts that come from love or fear. This is thought after thought. This is the original thought, the primordial force, the raw energy that drives the engine of human experience. Therefore, it is for this reason that human beings experience their actions over and over again, and this is why they love, destroy, and love again. Human beings are always fluctuating from one emotion to another. Love begets fear, fear begets love, love begets fear...... ...... And the reason for this is found in the first lie that God is unbelievable, the very lie that you consider to be the truth about God. In the first lie, that you cannot rely on God's Love, that God accepts you conditionally, and that the ultimate outcome is uncertain, if you cannot rely on God's Love, which is always there, whose love can you rely on?
@로윤-p6i4 ай бұрын
어쩐지 좀 요상하더라 적그리스도네
@seantheshiningstar4 ай бұрын
1
@하몽이-z6p4 ай бұрын
아멘
@hh56694 ай бұрын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빛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분리, 떠남 이게 맞는건가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사실 제일 어려운것일수 있고 이 속에서 갈등이 생길때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기위해 노력하는것 아닌가 하는데요,,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위해 방해요소들로부터 분리되어 집중하라는 메세지를 들어보면 마치 스님이 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네요 사명을 다하기 위해 분리, 떠난다? 사명은 세상에서 하는건데? 그리고 하나님말씀은 그렇게 쉽게 정답맞추듯 탁탁 척척 해석되는것이 아닌데 듣고있다보면 너무 속시원한 정답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아요 영상메인화면에 십자가이미지는 또 뭔가요?
@윤창원-i2e2 ай бұрын
하나님: 네가 너희 가족과 너희 친구들과 이별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속의 법연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 안 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개념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다. 따라서 인간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러한 사정 때문이며, 인간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