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놀고 있었던 북한군, 그 진짜 이유.

  Рет қаралды 42,343

Everything Box TV, [God of War

Everything Box TV, [God of War

Күн бұрын

1950년 6월 28일.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리고 6.25 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는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북한군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3일 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시킨 그 기세로
계속해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면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후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막대한 피해를 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북한군은 3일씩이나 서울에 머물렀던 것일까?
서울에서의 3일동안 북한군은 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김일성의 진짜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 구독하기
👉 / @war-history
※ 6.25 전쟁 컨텐츠 재생목록: • 6.25전쟁 (한국전쟁)
※ [자발적 시청료계좌]: 국민은행 442802-01-064997 (예금주 : 이X민)
※ 비지니스 문의: lwc76@naver.com
💛회원가입을 통한 혜택과 커피한잔 후원💛
👉 / @war-history
00:00~00:27: 하일라이트
00:28~04:44: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동안 멈춘 이유
04:45~09:41: 그들이 멈춘 진짜 이유는 이것입니다.
09:42~11:27: 서울에서 북한군이 하려고 했던 것은?
11:28~13:06: 계획을 바꿔 남진을 명령하는 김일성
13:07~15:29: 6.25전쟁 날짜와 작전에까지 모두 스탈린이 뒤에 있었다.
#38선#선제타격계획#한반도전쟁

Пікірлер: 318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38선으로 분단된 당시 서울이 매우 위험햇던 이유는 철원/김화-연천/포천-의정부 축선 때문이었죠 ㅜ 서울로 내려오는 통로들이 다 북한에게 열리고 임진강 중류, 한탄강, 영평천 수계가 전부 북한이 쥐고 있어서 방어에 지금보다 몇배의 부담이 되었죠. 그나마 6사단이 춘천에서 잘 방어해서 시간을 끌어줘서 나머지 사단들이 후퇴해 병력 정비하고 방어선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준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kuya2849
@kuya2849 6 ай бұрын
서울을 넘기고 협상하지 않지요 우리가 평양을 점령하고 협상을 해야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그나마 서부전선이 좀 아래로 내려온 게 아쉽지만 한강하구와 임진강 하류 방어선이 든든히 받쳐주니 서울과 전선 간 최단거리 자체는 38선 분단 때보다 더 짧아졌지만 큰 문제는 없죠. (서울시청과 전선 간 최단거리가 38선 분단 때는 48.26 km, 지금은 38.12km) 물론 한강하구 이북의 공간이 거의 없어졌으니 전쟁 재발시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지연 효과가 없어진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지만요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지금 휴전선은 38선에 비해 중부전선이 북상해 임진강 중류와 한탄강 유역, 연천과 철의 삼각지대 반 이상을 확보했기 때문에 중부전선에서 서울로 남하할 여러 통로들이 다 차단당한 셈이라 6.25 때처럼 서울로 쭉 남하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중동부에서도 춘천 분지를 감제하는 화천과 백암산을 우리가 먹어서 이 쪽으로 내려와 서울을 북동쪽에서 우회 공격 및 포위하는 경로 이용도 불가능합니다
@rlee4805
@rlee4805 6 ай бұрын
영상 해설 최고 십니다 *감사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응원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tassader3317
@tassader3317 6 ай бұрын
저3일 동안 진격 안하고 서울에 있던게 북한군 한테 엄청난 스노우 볼이 되었군요 ㄷㄷ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3일은 이후에 벌어진 일을 보면 천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북한군이 한강을 완전히 도하한 것이 7월 3일이었고 7월 5일 에는 오산에서 미군과 처음 맞붙습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6월 28일에 그냥 내려갔다면 충청도를 지났을거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천금같은 시간인 3일을 그냥 가만히 서울에서 머물렀다는 것은 뭔가 이상합니다. 이 컨텐츠에서는 북한군 장교들의 증언을 다수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박헌영의 남로당 20만이 들고 일어날 거라는 말을 김일성이 믿었다는 사실과 10:39 에 나온 최태환 중좌의 증언을 보면 맥이 닿아 있습니다.
@user-tg2tn3ww3i
@user-tg2tn3ww3i 6 ай бұрын
만일 미군이 빠지고...굳이 핵무기를 제외하더라도...북한군이 다시 남침할 때...한국군이 "2-3일간의 북한군의 파상공세를 견디고 이후 반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지... 참 관심이 갑니다.
@user-ib2uq7uk3l
@user-ib2uq7uk3l 6 ай бұрын
콘테츠가 무궁무궁한 소재인 전쟁 인류에게 전쟁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피눈물의 전쟁. 이 비극 속에서 인류가 겪어야만 했던 처절한 고통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알아야지만 또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것이지만 또다시 시작된 전쟁입니다. 앞으로 많은 프로그램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요.
@user-hf8rz7ry7o
@user-hf8rz7ry7o 6 ай бұрын
투표를 잘 해야하는 이유.
@user-uu3xk5io7k
@user-uu3xk5io7k 6 ай бұрын
전 방송에서 북한군 6사단이 마산으로 진군하려다 다른 전선에서 긴급 배치된 미 25사단에 격퇴되었다고 했는데. 방송간 일관성이 부족하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아니죠! 너무나 일관성이 있죠! 방호산 6사단 이야기를 맨 뒤에 추천영상으로 넣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호산이 6사단이 6.25전쟁 초반 어땠습니까? 신기한 전술로 개성을 접수한 이후 난데없이 사라져버렸잖습니까? 미군도 행방을 모를 정도로. 그런데 낙동강에서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뜬금없이 방호산 6사단은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고 다녔습니다. 바로 이 결정의 뒤에 스탈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라도 지역을 휩쓸게 아니라 진작에 부산을 목표로 하는 공세에 합류를 했어야죠! 훨씬 시간이 지나서 6사단이 낙동강 전선 측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8월에 들어서였고 그때는 이미 미군 정예부대가 다 들어와서 늦어버렸던 것입니다. 방호산 6사단 컨텐츠를 다시 보시면 아귀가 딱딱 다 들어맞는 것을 아시게 됩니다.
@cor4832
@cor4832 6 ай бұрын
50년대는 지방과 서울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서울에 모든것이 집중화 되어있어서 지금이라면 서울만 점령되면 끝나겠지요...
@minkweon7028
@minkweon7028 6 ай бұрын
이 문제에는 여러 추측이 있죠. 이 문제에 대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전회담에 북한측 부대표로 나왔었고, 소련으로 망명했던 이상조입니다. 그가 1989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여러 증언을 하였는데, 3일 지체문제에는 조사/연구가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아쉬운 바입니다.
@user-js3ii8re3w
@user-js3ii8re3w 6 ай бұрын
항상 객관적으로 전쟁 과 전투 를 분석하는 선생님의 영상 애청자 입니다. 비록 적 이라도,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다른 적국 이라고 해도 항상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꼭 필요 합니다. 미군에게서 가장 부러운 자질이기도 합니다. 미육군사관학교 교범에 나올 정도로 6.25 초기 북한군 4사, 6사가 보여준 전술과 전투역량은 뛰어낫습니다. 그리고 대전에서 미 24사를 상대로 올린 전과는 미군을 멘붕에 빠뜨리기에 충분햇구요. 이때 워커 가 전선을 낙동강으로 축소하고, 미군의 장기인 기동방어를 선태한건 신의 한수 입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전략적인 면에서 보면 맥아더가 미 24사단을 투입한 것은 시간 끌기였습니다. 어짜피 24사단은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부대였고 맥아더도 이를 잘 알았습니다. 맥아더가 믿고 있었던 부대는 미 해병 1사단, 제 1기병사단, 제 7보병 사단 등이었는데 북한군이 24사단을 격파하고 있던 동안 이들 부대들이 바다를 건너 오고 있었습니다. 채널에서는 24사단 선발대 스미스 부대의 오산 죽미령 전투 상황을 다룬 컨텐츠인 kzbin.info/www/bejne/inTMaox3a6iXlZI (6.25 초반 북한군을 너무 얕봤다가 오산 죽미령에서 T-34/85에 박살난 미군.) 6.25전쟁 초반 24사단이 북한군에게 밀렸던 상황을 다룬 컨텐츠인 kzbin.info/www/bejne/jGKmi4ykaLJ5osU (세계최강 미군은 왜 한달이 넘도록 (1950년 7~8월) 북한군에게 밀렸던 것일까?) 에서 말씀하신 것들을 다뤘습니다.
@sanbeetal
@sanbeetal 3 ай бұрын
스탈린이 한강 도하장비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고, 당시 스탈린이 미군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서 였다는 여러가지 이우가 있죠...
@user-mn6iq9ft4f
@user-mn6iq9ft4f 5 ай бұрын
지금도 통진당에서 볼수잇듯이 유사시 통신.교량폭파세력이 있지....
@user-fe7st6gv3z
@user-fe7st6gv3z 2 ай бұрын
그리 잘 알면서 감춰주나? 신고해서 잡아야지 한패아냐?
@user-dh5hk6xp2u
@user-dh5hk6xp2u 6 ай бұрын
과연 김일성이가 서울만 점령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려고 했을까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남조선 로동당이 봉기하여도 인민군은 어짜피 부산까지 진격했을 겁니다. 김일성이가 어떤 놈인데... 인민군이 서울서 3일을 머문 까닭으로 저는 춘전의 6사단 김종오장군과 장병들의 승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user-qy5by1bs8e
@user-qy5by1bs8e 6 ай бұрын
그대로 쉬지않고 내려 왔으면 우리는 공산화 됐을것이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아직도 그타령이냐?
@user-js3ii8re3w
@user-js3ii8re3w 6 ай бұрын
항상 좋은 영상 부탁 드립니다. ^-^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항상 감사합니다 😊 많은 응원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user-fg9sc1kx7x
@user-fg9sc1kx7x 4 ай бұрын
3일생각없이 쉬었다고보면안됨 탈출하지못한 남한사람들 이기간동안 북한으로 강제로 보내지고있었음 지금으로말하면 의사, 공무원들 엘리트자원들을 북한으로 납치했다고보면됨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흥미로운 사실을 남한 국회의원들을 모두 붙잡아 조국통일 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모두 도망가서 실패했다는 부분입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간단히 말해 목표(서울점렴)를 달성했는데 추가로 움직일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요? 도하장비(스탈린이 도하장비를 안준게 아니고 휴대를 하지 않았어요 서울점령후 후방에서 부랴부랴 가져오죠:출처는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뿐 아니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3,4사단 병사들의 장비휴대 목록만 봐도 그들은 1주일이상의 전쟁은 상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먼저 인민군은 식기와 담요를 3인1조로 나눠씁니다. 가장 기본적인 개인휴대장비마저 대대적으로 버리고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장기전에 필요한 그 어떤 장비도 선봉 3,4사단 6사단은 휴대하지 않았습니다. 각 사단에는 휴대장비의 최소화를 지시하는 문건이 수두룩하게 작성되고 하달됩니다. 이건 모두 단기전 그것도 초단기전을 상정하고 있다는 정황근거입니다. 인민군 야전사단의 장비목록과 개개병사의 휴대장비만 살펴봐도 인민군은 1주일 이상의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았음에 확연합니다. 결론적으로 3년 1개월 2일의 한국전쟁은 고작 3일치 작전계획만 짠 북한 정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언제나처럼 시작은 쉬워도 끝내기는 지랄맞게 힘들고 어려운 그놈의 전쟁을 너무도 쉽게 시작해버렸다는 거... 거기서 한국전쟁의 비극성이 더욱 배가되었다고 봅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는데 3일 동안 서울에서 뭉개고 있었다는 사실. 그런데 그후 갑자기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며 진격을 닥달했다는 사실.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했던 미스터리는 아직까지 정설은 없습니다만 국군 6사단의 활약보다는 북한군이 3일동안 뭔가를 기다렸다는 설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컨텐츠에서는 그 설에 대한 다양한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찾아 다닌 것은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war-history전쟁은 정치의 또다른 수단입니다. 저들이 국토완정론을 내세우며 통일조국달성을 목표로 삼았을때 1.기습적인 수도 서울 점령 2.남조선 내 대규모 인민 봉기 3. 1과 2를 통한 이승만 정권 붕괴및 남한국회에서의 결의로 대한민국 소멸 을 기도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서울서 3일을 허비한 주된 이유로 저는 저들에게 더이상의 작전계획은 없었다고 봅니다. 목표를 달성(서울점령)했는데 더이상 움직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문젠 고대하던 인민봉기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추가로 미국의 개입징후는 분명해졌고 더구나 대한민국국회의원들은 서울에 몇남아있지도 않았다는 거... 그러니 추가로 계획을 급하게 세우느라 시간을 또 허비해야 했고요. 저들이 서울을 접수하자마자 우리 국회의원들을 모으려고 한 것도 그걸로 북의회와의 통합및 대한민국정부 소멸을 결의케할 생각이었죠. 처음에는. 6사단의 선전은 사실 마이너한고려부분이고요.
@ujgt2873
@ujgt2873 6 ай бұрын
러시아 우크라침공이랑 똑같네. 우크라도 영토 잃게되는 한국형 휴전을 원치 않지만. 그렇게 될수밖에 없네
@hansranda3205
@hansranda3205 6 ай бұрын
​@@ujgt2873우규라는 이미 졷박은 상황이라 쟤들은 한국식 휴전은 불가함 영토 뺏기고 무장 해제되고 팔다리 다 잘린 IS마냥 유사국가로 전락엔딩임
@user-ho5gj6vd3q
@user-ho5gj6vd3q 5 ай бұрын
대단합니다
@kiteblack4360
@kiteblack4360 6 ай бұрын
포위소멸구역이 한강이남 시흥이었습니다. 파주문산, 의정부포천 축선에서 내려온 부대는 한강북단까지만 압박하는거라 일단 한강북단에서 멈추는게 맞는거구요, 김포에서 내려오는 적 6사단이 한강방어선 서쪽 측면을 공격하고 춘천에서 내려오는 적2사단은 서울동쪽을 돌아 시흥남쪽에서 국군의 후방퇴로를 차단해 국군을 시흥북쪽에서 섬멸하는 거였는데 , 좌우측방 우회부대인 적2사단6사단 둘다 제 시간에 도착을 못해 작전계획이 틀어지니깐 얘네들도 대부대기동은 첨해보는거라 어리버리 얼탄거죠
@user-qh1nt3xo6m
@user-qh1nt3xo6m 6 ай бұрын
이번영상은 좀그런게 북한은 당시 진심으로 남한을 전체를 점령할 생각으로 가득차있습니다.당시 미군참전을 걱정했더라도 기습으로 하는만큼 빨리 진격해야 점령을 할수있다는걸 모를리가없죠. 첫째로 춘천지구전투는 중앙에서 방어를 잘했기때문에 두번째는 그와동시에 한강이남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국군의장성덕에 세번째 스탈린의 지원망설임 스탈린이 진격하라고 재촉했어도 당시 소련은 유엔에서 회의불참해서 남한지원을 반대해서 시간을 끌수있음에도 일부러 안한것도 크죠. 이후 유엔군이 반격에성공해서 북진할때도 공군도 탱크도없는 중공군에게 지원해달라는 말했던거보면 소련은 남침을 부추겼다기보단 남침을 실패시켜서 북한과중국을 미국과 붙게해서 미국과 중국을 힘을빼두고 소련의힘을 키우려고한 것입니다.앞서말한것처럼 도하장비를 안준것도 소련공군과 육군이 불참한것도 유엔회의에도 불참한것도 또한 정전협정을 공산군에 유리하게 협상시도해 3년간 질질끌었던것도 소련은 6.25에대해 상관이없다는식을 보여주고 오로지 미국과 중국을 견제하기위해 해왔다는걸 알수있습니다. 그렇기에 소련이 6.25에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는건 말이안됩니다.당시 탱크를 앞세워 전격전을 당해본 스탈린은 누구보다 전격전이 잘먹히는걸 알고있습니다.지금은 안먹히겠지만 탱크가 한대도없고 당시 티거(독일군전차)조차 파괴가능한 무기가있어도 당시 남한은 전투방식을 몰랐고 이걸 스탈린이 잘알고있습니다. 그래서 탱크로인한 전격전 작전을 세워주고 나중에 도하장비를 안준거보면 이해가 빠를것입니다. 스탈린의 계획이였습니다.북한이 머무른3일은 대교복구시도와 춘천부대가 내려온부대의 재정비시간을 벌기위해서였습니다. 국군6사단에 피해입은게 큰건 사실이였기에 도하장비도 안준김에 한번에 같이 도하를 목표로 변경한걸로 해석하는게 맞을거같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댓글을 보니 북한군이 3일동안 지체한 이유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유인 국군 6사단의 춘천전투 활약을 얘기하는것 같네요. 스탈린의 본심은 미국이 중공에 힘이 묶이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이 컨텐츠와 다른 컨텐츠에서도 다룬 부분입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서울에서 남한 국회의원을 찾으러 다닌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10:37에서 나오듯 북한 정치보위부 장교인 최태환도 서울만 점령한 후 대통령을 새로 뽑을거라는 김두봉의 연설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북한군이 국회의원을 찾으러 다닌 사실과 김두봉의 연설 내용을 보면 묘하게 관련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군 자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정설은 현재에도 없습니다만 서울 제한점령은 가능성이 큰 서울 3일 지체의 이유입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3사단 4사단 장병들이 휴대한 개인 장비목록을 보면 1주일이상의 장기전을 계획한 군대의 휴대장비가 전혀 아니었다는 거에요. 국군 6사단이 선전한것도 있지만 인민군 작전계획에서 서울만 있었다고 추정할 근거는 매우 많아요ㅡ 다수의 노획문서 특히.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그리고 탱크를 내세우는 전격전은 소련군도 계획한바 없어요. 걔들이 한반도 지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user-qh1nt3xo6m
@user-qh1nt3xo6m 6 ай бұрын
@@user-zs7eb5uc9r 어찌보면 제가 말을 틀리게한게 맞을듯요.소련군이 폭풍작전을 줬는데 기타도하장비등 지원안해준거보면 전격전이 반은틀린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처럼 탱크앞세워서 포위섬멸후 진격까진 맞으나 문제는 도하장비나 기타수송장비등 지급을안해서 전격전을 구상해서 줬다기엔 무리가 있는건 맞습니다.한반도가 산과바다로 이루어져있기에 이걸 일부러 전격전을 구상해놓고 일부러 안줬다가 맞습니다. 이래서 님말이 반은맞고 반은틀립니다. 계획에없던건아닌데 계획에 중요한 장비를 안준셈이지요. 그리고 폭풍을구상한게 소련고문단입니다. 소련고문단이 대부분 장교였습니다.2차세계대전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경험을 실린장교들요.전격전비슷한 폭풍작전을 구상한것도 소련입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그지형에맞는 장비를 안준거구요.이제 이해되시나요?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user-qh1nt3xo6m 당시에 인민군이 서울점령만 염두에 뒀다는 가장 유력한 근거중 하나가 후방에 소련이 제공한 도하장비를 모두 두고 온거였어요.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은 애초에 사단장비목록에 도하장비가 공병대에 지급되어 있었던 상태였어요. 다만 38선을 넘으면서 들고 오질 않았죠. 저는 북노획문서를 토대로 저술한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북한군이 도하장비를 일부러 휴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고 제가 번역한 영문판 북한군 정찰명령에서도 도하장비를 두고 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스탈린이 도하장비를 안줬다는 서술의 근거는 먼가요?
@user-mj3nv8dc9r
@user-mj3nv8dc9r 6 ай бұрын
재밌네요 편집 연출 목소리 수준이 남다르십니다. 어디 역사렉카놈들이랑 다르시네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음 컨텐츠는 더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touchme6097
@touchme6097 6 ай бұрын
한국전쟁사 가장 미스테리인 서울3일이야기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군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서울부속병원 학살등 괴뢰군에 의한 만행도 있었지만... 그당시 조용한 편이었다고;;;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서울대학병원에서 국군 부상병 사살 만행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6.25전쟁 당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간 머물렀던 미스터리는 정설은 아직없습니다만 북한군이 서울입성 후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잡으러 다녔고 스탈린의 입김으로 북한군 4사단과 6사단과 같은 정예부대를 엉뚱한 곳으로 진격시킨 것은 팩트입니다.
@user-ht2dy2xx1n
@user-ht2dy2xx1n 6 ай бұрын
한국전쟁사 가장 미스테리인거는 이승만이가 막을수 있는것을 왜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거짓말 하고 미국으로 갔는지가 미스테리..
@yijoon99
@yijoon99 3 ай бұрын
이승만이 미국으로 갔다고요? 책 좀 더 읽으시기를
@sjh6492
@sjh6492 6 ай бұрын
소련이라면 수도에 의미부여를 하겠지만 조선은 수도 런의 역사가 상당히 많다라는것을 알텐데 수도만 점령 한다 ?
@Kcia69
@Kcia69 6 ай бұрын
이유야 어쨋든 북한이 포위섬멸을 못한건지 안한건지 전력을 보존할수 있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다행입니다. 만약 북한 군수뇌부에 롬멜이나 만슈타인같은 장군이 있었다면 아마 낙동강전선을 사수할 국군의 주력은 진작에 없어지거나 포로로 잡혔을겁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전력을 보존했다니요? 당시 8만이 약간 넘던 육군병력중 한강으로 무사히 넘어와 수습이 된 병력은 2만 5천남짓이었고 7사단 2사단 3사단 5사단 수도사단이 모두 궤멸되다시피했는데 무슨 전력보존을 했단 건지?
@user-dj5bb9of5y
@user-dj5bb9of5y 6 ай бұрын
625때 중공군만 보면 국군이 도망친이유가 있습니다 낙동강전선으로 후퇴할때 많은 실전을 치루던 인력들이 사라졋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할때 새로 편제됀인력은 훈련도 제대로 안됀 굉장히 급조됀 부대엿습니다 이런부대가 중일전과 국공내전으로 다져진 중공군과 싸울려고하면 도망칠수밖에없습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user-dj5bb9of5y 굉장히 착각을 하시는게 50년 6월 개전당시 국군병력은 대전차포용 포탄에 철갑탄이 따로 있다는 것도 몰라서 고폭탄을 넣고 T34에 발사하다가 전차를 못부순다고 도망간 장교와 병사로 구성된 군댑니다. 2.36인치 바주카로도 얼마든지 T-34를 부술방법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미군이 넘겨준 대전차지뢰가 산처럼 쌓여있었어도 전쟁초기 그 누구도 써먹을 생각조차 안했던 훈련부족 초보군대였습니다. 한국군은 개전 10달만에 미군이 공급해준 11개 정규사단분의 장비와 물자를 망실했고 그 대부분이 상대에게 그냥 넘어갔던 창피한 전력이 있습니다. 훈련된 부대요? 그런거 그때는 없었습니다요.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은 그냥 호구였고 깍뚜기였어요. 중국군이 한국군만 노렸던건 가장 만만해서에요ㅡ 병력이 많아도 포위만 당하면 알아서 도망치고 무너지는 군대... 지휘관 상당수가 일본군출신이라 조또 무능하고 단무지 돌격만 할줄하는 병신들이라 제대로 싸울줄도 몰랐던거에요. 하긴 그런 무능무책임한 색히들을 유능하다고 처등용한 초대대통령 10승마니야말로 나라망하게 할뻔한 가장 심각한 님히십알병신이지만... 하긴 국민을 내버리고 야밤도주한 병신중에 상병신이자 비열한 인간쓰레기보고 건국의 아버지.. 국부 운운하는 더 멍청한 등신들도 차고도 넘치지만...
@user-vk9ey5gz3z
@user-vk9ey5gz3z 6 ай бұрын
알려지기론 영상에도 나오지만 동부인가 중부전선에서 지체가 가장 크다고 알려졌지만, 압도적인 화력으로 3일을 공쳤다는건 뭔가 2% 설명이 부족한감이 있었죠. 정말 서울만 점령할 생각이었다면 김일성이 2%부족한 인간이라고 봐야죠(우리에게는 엄청난 운이겠네요). 임진왜란때 한양만 점령하고 왕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오판을 한 도요토미와 판박이네요
@user-kn9zd5bi6t
@user-kn9zd5bi6t 6 ай бұрын
수길이의 왜구 전국시대식 상식으론 왕이 성을 버리고 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긴 했음. 런조의 비겁함 덕에 나라를 지킴
@user-ht2dy2xx1n
@user-ht2dy2xx1n 6 ай бұрын
전쟁 나기전에 막을수 있는데도 불구 하고 이승만이가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6.25는 이상한 애들이 설치는 바람에 전쟁 난거지..안날걸 나게 만드는게 기술인가 봅니다..
@user-fi2xd6xe5g
@user-fi2xd6xe5g 6 ай бұрын
풍신수길이가 더 진격을 하고 싶어도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지배해서 물류보급 이 안되어서 좌절 된 것임
@user-lc6uc1qm7f
@user-lc6uc1qm7f 5 ай бұрын
지금도 한국에 공산당 좋아 하는 댓글다는 사람 있네 적이 서울에 왔고 포격 사거리 안에 대통령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적이노리는 작전이니까 이승만은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갖고 국군 따라 평양 까지 가서 연설 했습니다.4.19에 의해 미국 갖습니다.지금 우리나라의 모든게 80% 서울에 몰려 있습니다.서울 점령 절떼 되어서는 안됨니다.지방으로 이전분산 해야 합니다.
@user-gm9eq5yv4p
@user-gm9eq5yv4p 3 ай бұрын
맞습니다. 아직도 박헌영의 남노당 좀비들이 프라파간다에 열심이지요. 남쪽은 박헌영의 남노당 그리고 북쪽의 북노당의 합작품이 625전쟁이지요. 남노당은 그 당시 20만명의 국내 최대 정치결사조직이고 빨치산 조직이였지요. 김일성이 박헌영을 믿고 전쟁을 시작했는데 나중엔 괘심하기도하고 세력이 커지니 처형해버렸지만.. 지금도 그이상의 남로당 좀비들이 홍위병​으로 지역이기주의 카르텔 만들어서 활동중이지요. 저는 전쟁중에 태어났지만 참전해서 부상으로 제대하신 아버지 말씀은 북한군은 국군보다 아주 훈련이 잘 되어있었고 특히 명중율이 높아서 무섭고 놀랐다고하시더군요. 반면에 국군은 훈련이나 준비가 거의 되지 않아서 고전했으며 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과장 이라며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나네요.@@user-lc6uc1qm7f
@letranger000
@letranger000 6 ай бұрын
영상보고댓글단건가 남로당봉기 기다린거 전쟁끝나고 박헌영숙청당함 딸은 러시아에 10여년전까지 생존중이엇는데 노환으로사망햇을듯
@user-in4ni8lk7m
@user-in4ni8lk7m 6 ай бұрын
서울 경기권이 천만인구의 대도시인데 웬만한 숫자가지곤 점령 통제한다는것도 힘들겁니다. 북한이 다시 침략한다면 굳이 서울을 점령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사정포와 미사일로 서울 경기를 한꺼번에 두둘겨 패고 한미 연합군이 반격할려고할때 시간 끌면서 중국, 러시아를 내새워 휴전을 하면됩니다. 그럼 손해는 한국만보고 북한은 웬만한 목적은 달성될겁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북한이 아직도 수퍼마이티인줄 아는 수구냉전 찐따들 지피지기좀 제대로 하고 소설도 좀 쓰지? 반공병신들인가? 상대를 몰라도 너어어어어무 모르고 하나만 처아는 쪼다들
@kkim2533
@kkim2533 6 ай бұрын
그당시에 서울이 아무리 수도였다지만 뭔 천만이야?ㅋㅋ 현재 인구수를 그당시에 대입함?ㅋㅋ 미췬ㅋ
@user-in4ni8lk7m
@user-in4ni8lk7m 6 ай бұрын
@@kkim2533 난독증이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등학교는 나왔냐? ㅋㅋㅋㅋ
@user-jm8km6zl4d
@user-jm8km6zl4d 5 ай бұрын
@@user-in4ni8lk7m 니가 미필같은대??? 북한이 미사일로 서울과 경기를 한번에 두둘겨패?? 미필틀딱들이나 하는 개소리 아닌가?? 전쟁나도 서울에 포탄 한발 쏘지도 못한다 임마 쏘고 싶어도 못쏴 임마 ㅋㅋㅋ
@user-jm8km6zl4d
@user-jm8km6zl4d 5 ай бұрын
@@user-in4ni8lk7m 수도권이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전방에 엄청난 포전력을 배치해놨지만.. 한국군은 여기에 대응한 강대강 전략으로 북한보다 더 압도적인 포전력을 구축해 놨고... 덕분에 국방부가 포방부라고 불리는거다 임마
@jongmoonshine797
@jongmoonshine797 5 ай бұрын
김일성은 욕심만 앞섰을뿐입니다 김일성이 2차대전 독일 패전에 조금만 관심을 가젓다면 소련에서 허접한 연습기를 원조 받았을까요? 어떻게 제대로된 전함 하나 없이 전쟁할 생각 햇을까요? 소련에 전함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민중봉기 그렇게 믿었으면 정보소집 제대로 햇어야지요
@user-zk5mi4je1i
@user-zk5mi4je1i 6 ай бұрын
1:41: 🤔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3일 동안 서울에서 머뭇거린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는 전쟁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북한군이 3일 동안 서울에서 머뭇거린 이유는 국군 6사단이 춘천에서 북한군을 잘 막아냈기 때문이다. 6:01: 📚 1950년 5월, 스탈린은 소련의 지원으로 한반도 전체를 석권할 계획을 세웠으며, 김일성은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전체가 굴러들어온다는 가정하에 전쟁을 시작했다. 김일성이 박영을 미국의 첩자라고 누명을 씌어 처한 것도 박영의 틀린 판단으로 인해 전쟁을 졌기 때문이었다. 10:43: 📚 김일성의 계획은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이용하여 이승만 대통령퇴진 결정을 내린 후 8월 15일이 되면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조국이 마침내 통일되었다 선언 하는 것이었습니다
@user-zk4kk6jm5s
@user-zk4kk6jm5s 6 ай бұрын
구소련전술에 3일진격하면 보급과 휴식을 가진다는 것이 있었답니다. 여러 이유에 한가지 더 생각해 볼수 있겠습니다.
@jaylee9244
@jaylee9244 6 ай бұрын
서울점령만이 목표였다면 왠놈의 탱크가 그리 많이 필요 했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북한군이 몰고 내려온 탱크가 242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와! 정말 많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1개 기갑사단 규모도 되지 못합니다. 기갑사단은 적어도 280대 이상은 되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군도 1개 기갑여단 규모로 기갑사단을 편성했습니다. 독소전 당시는 한 전투에서 2천대가 넘게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군은 인천상륙 후 북진 당시 탱크가 6.25전쟁 초반 북한군보다 많았습니다. 참고로 현재 국군의 전차는 2,300대입니다.
@user-ht2dy2xx1n
@user-ht2dy2xx1n 6 ай бұрын
지금도 서울 점령 당하면 사실상 끝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user-ht2dy2xx1n 09:42 부분에 요즘 이야기도 했죠. 지금도 북한군은 서울만 점령한 상태에서 평화제의를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럴 경우 남한은 두패로 갈라져 전쟁이냐, 평화냐 갖고 싸울거라고 말입니다.
@user-ht2dy2xx1n
@user-ht2dy2xx1n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아뇨..서울만 점령 당하면 협상이 필요가 없습니다..그대로 밀고 오면 대한민국은 사라지는거랑 같습니다..우리가 이길거라는 착각들 하고 사는게 문제고 인구가 거짐 서울 쪽에 몰려 있는데 뭘 어떻게 할수가 있겠습니까? ㅎ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user-ht2dy2xx1n아직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user-jjy1015
@user-jjy1015 6 ай бұрын
북한이 계속 밀고 내려왔다가 지연되니 보급 여건 안되는 상황에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를 질려 밀린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초반에 서울에 3일동안 놀았던건 첨알았네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해놓고 3일 동안 서울에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부산을 목표로 미친듯이 진격 독촉을 했다?? 이것은 좀 이상하고 납득 불가입니다. 이 컨텐츠의 주제는 북한군이 3일간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직후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user-de1sg1vt5x
@user-de1sg1vt5x 6 ай бұрын
전쟁때 꼭 도망갔다는 이유만으로 씹어대는 사람들이 많이있는데 도망가야할걸 안도망가서 잡히면 그게 더 문제군요 그리고 스탈린이 김일성한테 일을 크게 벌리라고 부추긴게 상황을 꼬이고 꼬이게해서 남한의 생존에 도움이 된거같군요 원래 김일성 계획대로 가면 우리가 북한의 평양 원산라인까지 먹는거처럼 했겠지요
@user-jjy1015
@user-jjy1015 6 ай бұрын
실제로 히틀러, 스탈린이 그짓거리하다 사람 갈아넣었던...
@user-hk9pf1ng5v
@user-hk9pf1ng5v 2 ай бұрын
적6사단 선두는 이미6월25일 저녁쯤에 김포쪽으로 도강하였고 서울이 점령된 것이 28일인데 그때 1사단은 서울 서북쪽에서 버티고 있어서 적4사단은 1사단의 후방을 차단하는데 일부 투입. 적3사단과땅크사단만 가지고는 국군의 저항과 미공군의 공습을 뚫고 도하가 불가능. 국군1사단이 한강이남으로 후퇴한것이 29일저녁. 그때부터 본격적인 한강방어선전투 개시. 3일동안 놀고있지 않았슴다 ㅋ 다음은 라주바예프 보고서 발췌. 6월29일 새벽 포병은 포 방열지역을 확보한 후 미명을 기하여 15분간의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였다. 이후 즉각 제3및 제4보병사단, 105땅크사단 예하부대들이 모든 도하구역에서 한강을 도하하였다. 종심 2km내지 3km의 교두보를 확보하였지만 곧 적으로부터 조직적인 저항을 받았다. 포병은 적후방 1.5km내지 2km까지의 적 방어체계를 제압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보병에 대한 측면지원에서 취약성을 보였다. 즉 도하한 포병은 탄약이 부족하였고 견인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는 매우 격렬하였으며 1950년7월2일까지 계속되었다.
@shanestory3879
@shanestory3879 6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만물상자님... 그건 생각도 못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높은게 아니라 그게 맞다고 보여집니다. 서울만 점령하면 통일이 완성된다... 제시하신 근거들을 봤을 때요... 박헌영과 북한 고위층은 남로당의 민중봉기가 일어나길 기다렸고 그 민중봉기는 예상과는 달리 일어나지 않았고...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6.25전쟁 최대의 미스터리가 아직도 미스터리로만 남아있는데요. 하지만 이 컨텐츠를 보시면 뭔가 확실히 감이 오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남한의 국회의원을 잡으러 다닌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10:38 에 나온 정치보위부 최태환 중좌의 증언을 들으면 묘하게 겹치는게 있습니다. 정치보위부는 한국으로 치면 기무사 정도 됩니다. 북한에서 김두봉은 유명한 인물이죠. 한글학자. 이 사람이 서울만 일단 먹으면 대통령 다시 뽑을 거라고 했다면 북한군의 의도가 짐작이 됩니다.
@user-jj7fh6yb7v
@user-jj7fh6yb7v 6 ай бұрын
다시 내려온다면, 서울전체를 다 장악할 필요도 없이 한강 이북만 전격전으로 점령하고 나서 승리 선언하며 협상을 시도하겠지요. 미리 충분히 대비해야 합니다
@user-jjy1015
@user-jjy1015 6 ай бұрын
아뇨. 이미 워게임같은 시뮬레이션결과 아파치 6대만떠도 북한 탱크전력이 박살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북한에 딸려들어오는 중공군이죠...
@likephoenix659
@likephoenix659 6 ай бұрын
플랜B정도로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6사단의 지연전이 실패했다면 한강 방어선이 완성 되기도 전에 경기도 정도에 6사단을 막던 부대들이 도착을 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즉 최소한 그 병력을 잡아먹는 거까지는 실행을 했겠죠. 결국 서울 점령 후 세력 분활이라는 건 최초 가장 큰 포위섬멸에 실패로 인한 플랜 B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user-hj1jo5pv6v
@user-hj1jo5pv6v 6 ай бұрын
결국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설계에 제대로 당해버린 것이라는게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이군요.
@user-kn9zd5bi6t
@user-kn9zd5bi6t 6 ай бұрын
방장님 설대로라면 여순 반란과 4.3 사태가 만약 1950년 6월28일 이후에 터졌다면 전쟁은 거기서 끝이었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여순 반란과 4.3 사태 정도로는 국가가 망하질 않습니다. 박헌영이 장담했던 것과 김일성이 기다렸던 것은 제주도와 여수, 순천 등 몇개 도시에서 일어나는 민란 수준이 아닙니다. 전국적 규모, 즉 20만명 이상이 일시에 들고 일어나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릴 정도의 봉기였습니다.
@longtelegram3389
@longtelegram3389 3 ай бұрын
@@war-history 여순 반란 진압 후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숙군을 단행했는데 당시 국군 총병력 10만명 중 약 1만명이 체포 또는 탈영했다고 합니다 숙군이 단행되지 않았다면 6.25 남침 초기에 적전 분열로 대한민국은 소멸되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군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들을 박멸한 숙군은 높이 평가 받아야한다고 봅니다
@user-br9fx8kz4d
@user-br9fx8kz4d 5 ай бұрын
시군구. 청. 주민 활력과. 검토문의해봐라. 현제. 영천 완산동. 인민위원장 활개치고다닌다.
@user-uu7xl7fh2f
@user-uu7xl7fh2f 6 ай бұрын
그 3일간은 어느 방송에서는 이래서,저래서 3일을 허비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보통 국군 6사단이 춘천에서 너무 잘 싸우는 바람에 인민군 1군단이 춘천에서 막힌 인민군 2군단을 기다리느라 3일간 대기했다는 썰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02:31) 하지만 이 컨텐츠에서는 그런 뻔한 이야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를 여러가지 증언을 통해 여러분께 알려드렸습니다.
@user-tt4fk1ji1i
@user-tt4fk1ji1i 5 ай бұрын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서울 점령후 3일간 머물러 😮
@user-vf7zq6ji5m
@user-vf7zq6ji5m Күн бұрын
잘 보고 갑닏자
@user-is3ve4sd8c
@user-is3ve4sd8c 6 ай бұрын
그쵸 스탈린은 동유럽이 목표였으니까
@myself6996
@myself6996 6 ай бұрын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 영상 속 내용은 전형적인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편협적 데이터 수집의 표본 같은데. 소련의 입장은 댓글에도 나오듯이 전쟁의 장기화였을 수도 있으나, 김일성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 적화통일인데, 서울 점령이 베스트 시나리오일수도 있겠으나, 그 오랜 기간 준비한 전쟁에 설마 플랜이 고작 하나? 그리고 박헌영 숙청도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보기 힘든게, 북한 초창기 김일성 원탑 체제가 아니었고, 무수히 숙청당해야 할 인물 중에 핵심인물이었을 뿐임. 드라마 대사를 인용하자면 '틈이 있어야 못이 들어가는게 아니라, 못을 박으면 틈이 생기는 거'. 암튼 누구나 인정하는 오피셜은 김일성의 최종 미션은 한반도 전체 통일이었고, 서울 점령 후 남로당에 의한 체제전복이 하나의 시나리오일수는 있었겠으나, 걍 영상은 순 허구소설. 뒷배였던 소련의 겐세이와, 그리고 애초에 김일성 초기 전략이 서울 집결이었는데, 강원도 쪽 전황 파악이 안 된 시점에서 무리하게 내려올 수도 없었을 뿐더러, 마침 한강다리도 폭파된 시점에서 3일간 정비면 충분한 이유지 싶은데, 그리고 파죽지세로 내려온건 오히려 영상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 실제로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전라도 쪽은 북한 최고 전술사령관이 마산인가? 암튼 낙동강 전선 합류 직전에 주춤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쏜살같이 내려옴. 낙동강 전선은 영상에도 나오듯이 미군을 두려워한 북한군이 전력을 다하는 양상이 당연한거고. 보통 우리보다 체급높은 상대랑 싸울 땐 초반 꼼수로 어찌하려하지, 정석대로 후반가서 싸워야지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함. 서울 3일 체류는 소련의 입장+전황이 상황을 만들었다가 걍 일감이고 합리적임.
@user-op1ph4wt9w
@user-op1ph4wt9w 6 ай бұрын
김일성이 수백대의 탱크를 서울점령에만 쓰고 나머지는, 북한군에 비해 무장도 빈약해서 그 힘은 다합쳐도 북한군에 1%나 될까할 민중봉기에 기댈 계획 이었다는것이 좀 수긍하기 힘듦니다, 힘이 오른 북한군에 명령해서 그냥 부산까지 350 km, 막강한 힘으로 한번에 쓸어버리지, 어느 세월에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당연히 제가 김일성이래도 경인가도에 가장 강력한 부대를 집중하여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는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3일동안 서울에서 놀고 있다가 갑자기 3일 후에 부산까지 진격하려고 혈안이 되었으니 그것이 이상하여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 것입니다. 이 컨텐츠에서 이야기한 대로 원래부터 서울만 노렸고 3일동안 봉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3일 동안 놀고 있었던 것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user-op1ph4wt9w
@user-op1ph4wt9w 6 ай бұрын
@@war-history속전속결이 핵심이란걸 알면서,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란걸 알면서, 수백대 전차를 안쓰고 민중봉기를 기다린다는것은 모순이 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북한군이 3일을 서울에서 날렸기 때문에 북한군은 속전속결이 핵심이란 것을 처음엔 몰랐을 확률이 높습니다. 다음 컨텐츠 때문에 사료를 보고 있는데 소련군에서 세워준 작전계획에 서울 이후의 작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북한군 내부에서 알력이 있었단 기록이 있네요. 다음 컨텐츠 주제이기도 합니다.
@rkswlwhe9253
@rkswlwhe9253 6 ай бұрын
고작 공상과 망상이 전쟁계획이라니ㅋㅋㅋ
@sangmyeongshin
@sangmyeongshin 3 ай бұрын
2024, 2, 22, 14:25 잘 보고 있습니다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6 ай бұрын
한국 🇰🇷 군 6.25전쟁때 대전차 훈련 제대로 안했군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전차에 대비한 훈련은 아예 안했다고 봐도 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관련 컨텐츠 : kzbin.info/www/bejne/mICQn4GFotxliZo (6.25 전쟁 당시 중공군만 만나면 도망친 국군. 사실 국군은 많이 억울했다)
@user-jv2cp2vx8x
@user-jv2cp2vx8x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미국은 일제를 전쟁에서 무찌르고.일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국을. 점령한 나라요 , 해방국입니다.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의무가 있었읍니까? 기본사실을. 정확히. 관찰하고나서 , 그 다음순서의. 사고와 논리. 추론을 전개시켜 가야함이어늘. 기본사실을. 인지도 못하고 논리를 전개하니 , 논리정연한. 나라사람들을. 만나면. 무시당합니다.기본도. 모른다고 .. 한국사람병 이것 매우 고질적이고 심각합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이런식으로 나가니 아연실색함을. 일으키고 얕잡아보임 당합니다. 조선시대 왕과 왕실과 명문세도정치가들이 형편없이. 엉터리. 방터리로. 국정을 운영하다가. 일본의 노예국으로.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읍니다. 민족의 행복과 영광을 위하기는. 커녕 .! 어찌어찌하여 미국이 크나큰 희생을 치루고 큰. 전쟁을 종결짓고. 승전국으로서 한국을 점령했읍니다. 일본국을 대체하여 .. 한국인들은. 미국에게 미국의 의무를. 이행하고.. 한국에게 좋은 일만. 해주라고 요구하듯이. 주문해. 왔읍니다 . 미국이 한국에게 진 의무는 무엇이었을까요 ? 1945년도에 ? 미국군대가 한국에 들어왔을 당시에 .있어서 ...? 한국인은 생각을 고쳐서 다시. 시작 해야합니다. 1945년도에 미군이 일본을 전쟁에서 이기고 점령군으로 한국에 .들어 온 그 시점에. 서서 ! 그 시점에 서서. . 생각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
@user-jv2cp2vx8x
@user-jv2cp2vx8x 6 ай бұрын
훌륭한 자료를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즐겁게 유익하게 봤읍니다 . 훌륭한 작품입니다! . 많은. 사랑을. 받으실. 것입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 내셨으니 ! 지금 한국은 먹고 살 만하고 기술이. 발달하고 , 지식되는 자료들도 접근이 가능하고 국제적으로도 여러 여건들이 허락되어져서. 역사(지나온. 세대에서 있어왔던 일들 ,민족에게 중요한)를. 알아보고. 음미해 볼 수 있는 때가 됐읍니다! 또한 , 나라의 지도자가 잘 만. 지도한다면 세계탑클라스에도 이르를 수. 있는 기초역량을 갖추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에게. 있어서. 역사를. 정직하게. 보고. 지혜롭게 배운다면 세계탑클라스에 올라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일해주는 민족의. 참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때입니다 .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user-jv2cp2vx8x 좋은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user-yg7ug2ut1n
@user-yg7ug2ut1n 5 ай бұрын
그냥 서울만 점령하는게 목표였는데 밀고 내려가래서 그런거 아녀?!이것밖에 읎는것 같은디..아님말고..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만 점령하고 상황을 관망하는 것이 애초 목표였습니다. 3일 지체의 이유가 그것이었고 그 후에 계획이 남진으로 바뀐 것이죠. 이 관점으로 보면 서울에서 3일간 놀고 있었던 북한군 미스터리가 풀립니다. 실제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던 북한군은 통일선포를 위해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user-fy6ew7sx8b
@user-fy6ew7sx8b 2 ай бұрын
최용건! 그에게 승패가! 한국을 하느님이 도왔어요!
@unguchoi8094
@unguchoi8094 6 ай бұрын
러시아가 작전지시를 하지 않아서 머물렀지요..아닌가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북한군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이나 그냥 날린 이유. 아직까지 정설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컨텐츠에서는 그 이유를 북한군의 초기 작전 계획이 서울점령까지만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다시말해 소련이 만들어준 초기 계획이 4일만에 서울점령만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user-dn1wl3zm4o
@user-dn1wl3zm4o 6 ай бұрын
맞아요 소련이 만들어준 작전계획에는 춘천을 단수에 점령하고 수원 화성으로 진격해서 서울을 남북으로 협공하기로 햇으나 춘천에서 3개 사단이 6사단에 몰살되어서 작전에 차질을 가져옴 그래서 소련놈들에게 작전을다시세워달라고 요청함 소려롬들이 작전 다시 만들어서 3일후에 인민군에 전달 인민군 지휘부는작전을세울 유능한 두뇌가 없엇음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이 부분은 아마 다음 컨텐츠에서 더 자세히 나올 것 같습니다. 북한군도 따로 작전계획을 세웠는데 소련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고 합니다.
@user-co3mo8gy8i
@user-co3mo8gy8i 6 ай бұрын
춘천에서 3개사단 몰살?무슨 얘기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춘천쪽으로 진격한건 북한군12사단입니다.중공군 43군단156사단466연대를 주축으로 조직된 중공사단입니다.466연대는 간도경비여단 제2연대 최춘국 연대입니다.최춘국이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연대 군관들이 팔로군 출신들로 교체됩니다.중국내전에 참가한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이지만 6사단에 의해 춘천에서 개박살납니다.결과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고,최춘국이 12사단장으러 임명됩니다.이것이 북한군 제3,제4사단에 이어 근위 칭호를 받았다는 "근위안동제12최춘국사단"입니다.우리의 주적을 정확히 아셔야 백번싸워 위태롭지 않습니다.
@user-cq5cz7zd5c
@user-cq5cz7zd5c 6 күн бұрын
김일성 모택동 미국이 스탈린의 농간에 놀아난 비극이 625전쟁이지...
@jongmoonshine797
@jongmoonshine797 5 ай бұрын
모든것이 김일성 오판 이었지요 김일성 역량은 여기 까지 엿습니다 먼저 김일성은 미공군을 과소 평가 햇습니다 실제로 미공군 폭격에 북한군 큰피해를 봤습니다 그리고 남한 해군을 너무 얕잡아 봤고요 실제로 북한군에는 제대로 된 해군 전투함이 없었고 부산 기습상륙이 우리나라 백두산함에 무산 되었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김일성은 그저 T-34/85전차와 국공내전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조선족 출신 병사들만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전쟁 초반에는 김일성의 생각이 반은 맞았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의 중요성을 모른 채 3일간을 날려버린 것은 이후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후과가 됩니다. 후에 역사학자들은 그 3일간의 귀중한 시간을 날리지 않고 곧장 내려왔다면 국군과 미군은 아예 낙동강 방어선을 칠 새도 없었을 거라는 점에 거의 동의하고 있습니다.
@jongmoonshine797
@jongmoonshine797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김일성이 전쟁 전문성 그런거 애시 당초 없었습니다 욕심만 앞서고 게릴라전 좀한거 자신이 부족한거 알면 공부라도 햇어야지요 이게 제일 큰 문제 아니었을까요? 지적하신 3일동안 꾸물거린것도 문제엿고요 제가 생각하는 미 공군을 과소 평가 한것도 문제 아니었을까요? 박헌영의 남로당 조직 과대 평가 한것도 문제이고요 스탈린 탓 할거 하나도 없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jongmoonshine797 12:16 부분에 김일성이 주일미군은 우리의 상대가 안된다! 이 말은 맞긴 맞는 말입니다. 실제 주일미군은 일본 게이샤 품속에서 즐겁게 보내던 병사들이 대부분이라 북한군에게 연패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에 그토록 빨리 파병되고 그토록 열심히 도와줄거라곤 미처 예상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jongmoonshine797
@jongmoonshine797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주일미군 중 공군을 과소 평가 한거 말입니다 실제로 북한군 전차 대부분은 미국공군 폭격으로 파괴 되고 부속 공급 못받고 기름 공급 못받아 운용 불가가 되고 김일성이 믿는 조선족 의용군도 전사 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김일성이 얼마나 욕심만 앞서고 현대전쟁에 무지 햇는지 보여 주지 않을까요? 2차세계대전때 초반 독일공군의 활약 그리고 독일 패망때 미공군 활약 일본 패망등 김일성이가 전쟁에 관심이 있었으면 충분히 공부하고도 남았습니다 모택동이 북한에 참전 결정하면서 소련에 공군 지원 요청한거 미국 공군 공습 피하기 위해 야간만 움직인거 하고 정말 대조 적인거 아닐까요? 참고로 육이오때.북한에 제대로 된 전투기가 있었나요?
@jongmoonshine797
@jongmoonshine797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북한공군 200여기 있었는거 같은데요 그중 최신예인 yak18의 경우 훈련기로 되어 있더라고요 훈련도도 낮고 기체도 중고 이고요 이걸로는 애시당초 주일 미국공군 상대가 되었을까요? 김일성이가 얼마나 전쟁에 무지햇는지 보여 주는 대목 아닐까요?
@sungminhwang1700
@sungminhwang1700 6 ай бұрын
어떤 것이 사실이든간에 전쟁에서 적의 심장부이자 두뇌인 수도 함락이 중요하다는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네요. 특히나 가장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전쟁목표에서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대한 목표가 급조된 느낌이 그것이기도 하였죠. 마포 나루터 뿐만이 아니라 폭파가 진행된 한강철교도 완전히 끊어진것이 아니기에 북한은 얼마든 도하가 되었죠. 중요한건 수도 서울 먹었다는 것에 북한이 일찍 축배를 터뜨린셈이네요. 언젠가는 북한군의 보급라든지 스탈린의 의중인지 김일성 생각이든 다 나오더라도 그만큼 수도 서울이 가진 상징성을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그런점에서 여수-순천 14연대 반란사건이 중요한 요인인것 같은데 이것도 다뤄주실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여담으로 역전다방의 이야기까지 합치면 스탈린은 체코에게 UN에서의 불참석을 변명하지만 점차 시간을 두고 본 결과 그 이점을 알게되면서 미국의 유럽시선 분산 및 중공의 세력 약화를 부추기위해서란 생각이 정리됩니다. 뭐든간에 북조선 김씨의 무능과 멍청함은 여전하조 ㅋㅋㅋ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북한이 이기면 좋고 혹시 져도 상관없고... (스탈린의 생각) 북한 남침 후 UN안보리에서 북한이 침략자로 낙인 찍히고 UN 군이 결성되는 상황에서 마음만 먹으면 비토를 놓을 수 있었던 유엔 상임이사국인 소련 대사의 불참. 이제 그 비밀은 밝혀졌습니다. 아래는 체코 수상에게 스탈린이 보낸 서한 내용입니다. 안보리 불참은 내가 지시했소. 저 멍청한 미국을 아시아에 묶어놓고 힘을 뺴놓고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내가 지시한 것이오! 역전다방이 다루기 전에 이미 채널에서 다뤘었습니다. kzbin.info/www/bejne/jqqWdXqDjMqnj9E 6.25전쟁은 사실상 스탈린의 농간이었다. (6.25전쟁 3대 미스터리에 모두 스탈린이 관련됨)
@sungminhwang1700
@sungminhwang1700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저도 시청한 입장으로서 알고있습니다. 앞으로 글쓸때 더 조심하도록해서 오해없도록하겠습니다. 어찌되든 박헌영이든 김씨든 참으로 멍청하기가... 물론, 그들도 계산이 있지만요. 어찌보면 이승만이 대단하기도하고 여순사건의 여파가 큰것 같네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사료를 계속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소련에서 6.25전쟁 초반 계획을 서울점령까지만 세워준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음 컨텐츠 주제가 "6.25전쟁을 반대했던 김일성의 부하가 있었다"입니다. 북한군 지휘부 내에서 소련의 전쟁계획이 잘못되었다는 항의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북한군이 3일동안 머무른 것은 국군 6사단의 활약이 아니라 원래 작전대로 했던 것이 거의 맞는것 같습니다.
@user-pv5vi9ks4s
@user-pv5vi9ks4s 6 ай бұрын
제일 유력한것은 박헌영이 주장한 남로당봉기를 유도했다는것입니다.전쟁후 전쟁책임을 박헌영에게 뒤집어 씌워죽인것을 보면 가장 유력합니다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6 ай бұрын
만물상자님 북한군이 왜 서울에 머물었는지
@user-rr8xf4qv3d
@user-rr8xf4qv3d 6 ай бұрын
ㅋㅋㅋ 북한이 3일동안 쉰이유가 인터넷 약정때문인줄 알았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보시는데 큰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user-ep5ur2og3c
@user-ep5ur2og3c 6 ай бұрын
호랑이와 하이에나 한 개인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물며 그 무수한 개인의 집합체인 국가나 민족단위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를 선출해야하는 지금, 과연 무엇을 판단의 기준과 지표로 삼아야하는가? 천인이면 천색이요, 만인이면 만설이 분분할 것이 분명코도 지당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즉, 필부인 나도 천색만설 중, 비루한 첨언을 하나 더 보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름지기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수단은 신언서판이라는 고색창연한 방법이 있다. 부연하면 그 사람의 몸가짐과 말투와 글씨와 구체적 상황에서의 판단력의 적합도를 형량한다는 뜻일게다. 참으로 이설을 제기하기 어려운 진리임을 부정키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지근거리에서 직접 관찰이 가능한 조건에서는 합당하다 하겠으나, 각종 언론과 방송 등 매스미디어의 제한적이고 상이한 보도나 전달로 인해서 그 진실된 전모를 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기자는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방송은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이미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지 오래다. 학문을 빙자하여 그릇된 이념을 전파하는 지식판매원이 교수이고 학자연 하고, 종교와 공존할 수 없는 헤겔좌파 유물론을 신봉하는 위선자들이 소위 종교지도자라고 추앙 받는 세태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이 나라가 과연 정상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몾하고 홀로 고립되고 이미 진작에 화석화된 전근대적 사고의 도그마에 매몰된 골동품이지는 아닌지, 우려와 염려와 심려에 기우 까지 보태서 심한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곡필부권, 곡학아세, 혹세무민이 천하를 뒤덮고, 그 기세는 가히 범접불허 유아독존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는 지경이다. 각설하고 적반하장이라! 도둑이 매도 아닌 몽둥이도 아닌,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질곡에서 신음하는 가련하고 피폐한 백성을 도둑이라고 징치하려들고, 소위 착한가격이라는 무식한 유행어를 만들어 시장을 통제하려 드는 바, 이는 가히 도덕선생이 경제학을 재해석하는게 지극히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내년에 농사 지을 씨나락은 남겨두고서 떡을 해 먹든, 술을 해 먹든 해야할 것인데, 지금 당장 배를 채우자고 분배의 정의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양심이라고 칭송하는게 작금의 지성인이요, 지도자라 자칭한다. 그야말로 가난을 무기화하여 땀과 눈물로 부를 획득한 근면성실한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여 타도와 절멸의 대상으로 가르친다. 한 마디로 21세기판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선동한다. 도덕과 경제의 원리를 구분하지 몾하는 이데올로기의 맹신자들이 유능한 경제전문가라고 자신을 포장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실수나 과오는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공과라 칭한다. 특히 역사적 인물에게는 후세들에게 공과의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공칠과삼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공이 과 보다 많으면 무난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는 가히 존경할만한 인물이라는 역사평가의 보편타당한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인된 평가기준 조차도 갖가지 트집잡기로 부정하고, 나아가 폄훼하거나 왜곡하여 명예를 실추 시키고 모욕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즉 역사를 왜곡 날조하여 자신의 불순한 목적달성의 도구로 악용한다. 이들은 호랑이나 사자가 아니다. 그저 들개나 하이에나처럼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약자나 자기들 패거리가 아닌 대상들을 집단으로 집요하게 공격하다가, 자기들의 패거리가 충분히 수가 많아지면 호랑이나 사자에게 달려든다. 참으로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치사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들에게는 진리와 진실과 진정이 없다. 그렇지 아니한가? 진리의 반대는 무리이고 진실의 반대는 허위이며 진정의 반대는 가식이지 않는가! 밝은 태양 아래서는 곰팡이가 슬지 않는다. 사회의 음습한 구석구석에서 이들은 창궐한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유명한 대석학은 정의의 본질은 평등이라고 갈파했다. 그런데 평등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본시 천학무식한 필부이기에 나의 무지와 과문의 탓이겠지만, 나는 아직껏 이에 관한 명징한 답변을 주는 대스승을 알지 몾한다. 그런 소이로 나는 내 스스로의 어설픈 정의(定義)를 내린다. 평등의 본질은 (자연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을 진리로 인정하되,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식으로 자연상태의 본질적불평등을 최대한 완화시키려는 이타적이고도 실천적 행동이다. )라고. 그렇다. 세상은 정의가 지배해야 마땅하다. 기회는 평등해야하고 과정은 공정해야하고 그 결과는 정의로워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과연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멀지 않은 과거에 건국과 중흥이라는 호랑이가 있었다. 나는 육십년 전 임인년 출생이다. 내가 태어나기 불과 일년 전 신축년에 5, 16 군사혁명이 있었다. 미군의 잉여구호물자 즉, 미국과 자유우방국들의 원조물자인 덩어리진 우유와 옥수수가루와 밀가루를 먹고 자랐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고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곳은 대한민국이지만, 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뼈와 살과 피가 이들 자유우방국들이 보내준 영양분으로 인해 자라고 배우고 또, 내 후손들에게 생명을 전달해줄 수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6, 25 전쟁시에 수도사단과 8사단 등에 소속된 보병장교로서 낙동강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북진도 했고 1, 4 후퇴도 당했고, 그 후 중동부전선의 고지전도 겪었다. 총 세번의 부상을 입고, 그 중 한 번은 허파에 총탄이 박히는 중상이었다. 그 때 나의 아버지를 살린건 국군이 아니라 미군포병대의 전방관측장교였다. 피범벅이 되어 정신을 잃은 아버지를 그 미군장교와 짚차의 운전병이 발견하고 후송해주어서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더 이전에는 미국의 태평양 전쟁의 참전으로 인하여 나의 조부모님들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지금 내가 이곳에서 이 글을 쓸 수 있게된 인과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친미파다. 비난을 하던, 비판을 하던 감수하겠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해야겠다. 한 개인이던 국가던 도움을 받았다면 보은은 몾할지라도 배신하거나 은혜를 원수로 갚아선 안 된다. 그것은 금수도 하지 않는다. 소위 강남좌파는 반미는 직업이고 반일은 부업이며 친중종북은 취미활동이라고 한다. 나는 시골뜨기 출신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국가대전략이 친미(親美). 연러(聯露),협일(協日).호중 (互中). 통북(統北)이라고 감히 천명한다. 비웃어도 좋다. 다만 그 대안을 제시하고 필요충분한 국제정치학적 논거를 적시하라. 그리고 나는 핵잠수함에 핵항공모함에 핵폭격기에 단 한발이면 유라시아대륙을 몽땅 날릴 수 있는 고위력 수소폭탄도 가지고 싶다. 왜냐하면 다시는 나의 할아버지가 겪어야했던 식민지의 피지배민족이 되기 싫기 때문이다. 짚신을 신고 눈 보라 휘몰아치는 만주벌판을 헤메이며, 아무런 보상도 확신도 없이 독립투쟁을 할 만큼, 나는 고매한 인격과 자질을 갖추지 몾했기에 그렇다. 또한 나의 아버지가 겪었던 참혹한 전쟁이 싫고 더군다나 그 필설로 형언키 불가능한 총포탄의 부상통증과 풍우한서와 굶주림의 기약 없는 고통의 세월을 묵묵히 인내하며 견뎌낼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나의 후손들에게도 그러한 비극이 재현되지 않기를 간곡히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제 머지 않아 이나라의 미래가 걸린 투표일이다. 독선, 위선, 허위, 가식, 불의, 부정, 부패, 이율배반, 교언영색, 양두구육 등 가히 아름답지 몾한 이런 단어들이 그저 사전 속에만 머물러 있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대석학은 일찍이 갈파했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통치자를 가진다. 자유대한민국에서 가장 몾난 필부 涯黎 謹抄
@raonJK
@raonJK 5 ай бұрын
저때 통일 되어야 해었는데
@jaeinjung1213
@jaeinjung1213 6 ай бұрын
오 새로운 관점인데요 신선한 관점임니다.좋은 영상감사합니다.근데 제2의 한국전쟁 일어나도 서울을 점령하기 싶지 않습니다.핵무기를 쓰지 않는한 3세대 전차 수만 해도 전체 유럽을 합친거 보다 많습니다.아파치 헬기대대는 요 놀고 있나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6.25전쟁 당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해놓고 3일동안 서울에서 멈춰 있었던 북한군. 그 동안 주구장창 나왔던 이유 중 하나는 춘천에서 국군 6사단이 잘 싸웠기 때문에 북한군 2군단과 함께 포위작전을 구사하기 위해 북한군 1군단이 3일을 지체했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이 컨텐츠에서 각종 증언을 통해 다뤘듯이 서울 점령 후 통일 선포였습니다. 김두봉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북한의 정치국원이기도 했는데 6.25전쟁 3일전, 북한군을 모아놓고 서울만 점령하면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통일선포를 할 거라고 밝혔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원래 38도선과 지금 휴전선 간 위치와 지형의 차이를 보시면 지금 휴전선은 북한이 서울을 절대 함락시킬 수 없는 라인인 걸 알 수 있습니다 ㅋ 중부전선이 대폭 올라간 게 서울 보호에 이점들이 매우 많습니다
@JS-wr7vq
@JS-wr7vq 6 ай бұрын
북한보다는 중공 쏘련쪽이 더 신경쓰이네요. 중공군 100만명과 전차 1만대를 갈아넣는다면 어떻게 될지....
@user-dy6li1cc8u
@user-dy6li1cc8u 27 күн бұрын
도하장비가 없었다고 하자 그당시 1950년에 남쪽에는 군대가 없었다. 미군은 우리 군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user-le2re6ys2w
@user-le2re6ys2w 6 ай бұрын
작계 102에 대해서 알려하지마라. 하늘의 비밀은 나와 호국영령들과 왕급하늘의 범들의 왕인 링컨님. 오로지 하늘의 계신 아버지께서만 아는 일이다.
@jtk6911
@jtk6911 4 ай бұрын
독일군이 왜 모스크바 바로 공략 안하고 남부지방으로 공격 했나도 미스터리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채널에서 지금 질문에 대한 답을 밝힌 바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히틀러는 전쟁이 길게 갈거라고 봤고 길게 끌고가기 위해서는 전략적 목표인 모스크바보다 자원이 무진장 묻혀있는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의 유전지대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데리안은 독일 장성 중 거의 유일하게 이를 반대하여 히틀러와 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kzbin.info/www/bejne/ane8kJyJerFkg6c (구데리안 3부)
@MHK1871
@MHK1871 6 ай бұрын
하일 만물상자!
@user-wj3ud7lv5n
@user-wj3ud7lv5n 6 ай бұрын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서울 사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방비를 잘해놓더라도 트럼프 말마따나 서울은 너무 지나치게 가깝습니다.. 서울협상론이 나온 이유도 지나치게 높은 수도 리스크 때문이죠.. 그냥 차라리 서독의 본처럼 임시수도 만들어서 수도 기능을 분산시키는 게 여러 모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전선과 최단거리가 객관적으로 너무 짧은 게 사실이죠 ㅠㅠ 평양은 전선과 최단거리가 140km 정도라 우리의 3.5배 이상이니 훨씬 안전하죠
@peterlee0306
@peterlee0306 5 ай бұрын
부산을 점령하려고 했던 부산해전은요? 서울점령 + 부산점령 = 이승만정부와 타협과 선거 이런식으로 가려고 했지요 ㅎㅎ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예리한 질문이십니다. 그러나 대한해협 해전은 이렇게 봐야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벌어진 대한해협 해전 당시 북한군 수송선에는 600명의 인민군이 타고 있었습니다. 600명이면 연대가 아니라 대대급 병력입니다. 대대급 병력으로 부산이라는 큰 도시를 점령하려 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남한 전체를 점령하려는 계획으로 침투시킨 것보다 단순한 후방 교란 목적이었다고 생각하는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JohnDoe-ik8gb
@JohnDoe-ik8gb 6 ай бұрын
서론이 쓸데없이 길다 04:52 부터봐라
@user-nt9cu1ri9s
@user-nt9cu1ri9s Ай бұрын
스탈린 꼭두각시
@jgd824
@jgd824 20 күн бұрын
말이 좋아 협상이지 실상은 협박일듯
@user-zz1tq1yo3d
@user-zz1tq1yo3d 6 ай бұрын
서울(한강)정도 차지 하겠다고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쩌둥을 그렇게 설득하러 다녔을까?
@keepeast1
@keepeast1 6 ай бұрын
이번에 서울 점령하면 확실히 전라도에서 봉기할듯
@user-jb7du3qm6l
@user-jb7du3qm6l 6 ай бұрын
나라를 구하려 봉기하겠지요...후백제가 그러했고 조선말 동학도 그러했고
@user-je7sw3uu9x
@user-je7sw3uu9x 6 ай бұрын
니들이 나라 팔아먹은건 뇌에서 지웠냐?
@user-sanaekochiya
@user-sanaekochiya 3 ай бұрын
부대 열중쉬어도 할줄 모르는 군통수권자를 위해 싸울 군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kdwni03
@kdwni03 6 ай бұрын
3일 동안 서울에 머물렀던 덕분에 미군한태 무기지원를 받을수있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3일간 그 귀중한 시간을 북한군이 내버리고 있을 때 미군이 부산에 들어왔고 7월 5일에는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산해보면 북한군이 6월 28일에 바로 남진했다면 7월 5일 쯤에는 오산이 아니라 충청도를 지났을 것입니다.
@kdwni03
@kdwni03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근데 탱크 지원은 왜 늦었었을까요? 전투기.전투함은 빨랐는데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당연히 탱크 지원이 늦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부대가 일본 주둔 미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대는 일본에서 편히 놀고 지내던 부대였고 정예부대가 아니었습니다. 속된 말로 하사관급은 모두 일본에 현지처가 있을 정도로 편했던 부대였습니다. kzbin.info/www/bejne/fHeqdYSEo7mrnJI (한국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 부대의 진실) 이 부대들은 훈련도 부족했고 북한군 전차를 저지할만한 중전차도 장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군에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미 해병 1사단, 미 제 1기병사단 등 최정예 부대가 부산으로 들어올 시간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대들이 모두 8월에 들어옵니다. 북한이 낭비한 3일이 그래서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kdwni03
@kdwni03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그당시 북한은 폭격기까지 보유한 강군이지 않았나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장비도 장비였지만 무엇보다 실전 경험이 있었습니다. 국군이나 가장 먼저 투입된 미 24사단이나 모두 실전경험이 없는 군대였지만 북한군은 국공내전, 항일전에서 실전 경험을 갖춘 부대가 다수였습니다. 이 사실은 6.25전쟁 초반 미군이 북한군에게 패배했던 이유에서 다뤘습니다. kzbin.info/www/bejne/jGKmi4ykaLJ5osU
@DreamOn_TV
@DreamOn_TV 6 ай бұрын
추측 이유가 몇가지가 있죠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고 최단기간 서울을 점령하면, 협상을 하던, 정부가 무너지던 해서 알아서 무너질(박헌영 남로당원 봉기등등 다 여기에 포함이 되죠)꺼라고 생각해 보급을 그정도만 가지고 왔고, 이후 전선에 필요한 보급을 기다리느라 그랬다는 이유가 있는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건 말씀하신 6사단의 춘천이죠 원래 계획이 북한군이 춘천을 돌파하고 서울 이남으로 진출하여 서울에 정치인, 주력부대등을 포위를 하여 남로당의 봉기등으로 맨붕에 빠진 서울의 정부를 압박을 한다는 것이었죠 이미 다큐멘타리등에서 북한의 작전계획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춘천에서 막히게 되어 그것을 기다렸다는 것이죠 또 이승만등 수뇌부들이 빛의 속도로 도망을 가면서 서울에 없었죠 암튼, 그 결정적인 3일이 맥아더가 한강이남에 와서 강북을 바라보게 하였고, 파병을 결정했으며, 그 3일에 UN이 소집되고 연합군의 참전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아정당이 뭔지... ㅡㅜ 컨텐츠 질이 뚝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잘 보다가 정말 뜬금없네요 ㅜ
@user-im9ji4bc9d
@user-im9ji4bc9d Ай бұрын
스탈린 중국 🇨🇳 경계가 맟을듯.
@genosyde78
@genosyde78 3 ай бұрын
도하자입도 없었다. 그 이유는 소련에서 짜준 작개가 3일전쟁만을 염두에 뒀던 이유임. 서울만 점령하면 끝이라고 생각함
@user-vc2vi4hk2e
@user-vc2vi4hk2e 5 ай бұрын
3일동안서울에서. 쉰것은.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을거라 했는데. 전쟁을 일으키고보니 좀 그렇지 않는거였을까?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에 나온 그대롭니다. 서울을 점령하고 나면 전국적인 봉기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별로 큰 소요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서울 점령 후 남한 국회의원들을 잡아놓고 통일선언을 하려고 했지만 다 도망치는 바람에 그것마저 실패했고 또 돌아가는 꼴을 보니 미군이 벌써 참전까지 했고... 이런 상황에서 계속 남진하여 끝을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초반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성이 큽니다.
@user-ux3do6pc5x
@user-ux3do6pc5x 5 ай бұрын
만약 3일동안 쉬지 않았다면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user-ux3do6pc5x 이것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채널에서는 대한민국 최대 위기의 순간이라는 컨텐츠를 공개한 바 있었는데요. 이것은 모두 사실로 이미 나온 이야깁니다. kzbin.info/www/bejne/pmGbn4adg72HeZI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에도 한국을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서사모아 섬에 주요 인사만 이주시킬 계획을 실제 세웠습니다. 북한군이 3일동안 쉬었는데도 포기하려고 했었을 정도인데 안 쉬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아마 한국은 미국령 서사모아 섬에서 작은 섬나라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user-hf5vl7uf1e
@user-hf5vl7uf1e 6 ай бұрын
갈수록 그러하네 ..
@khyoonphd
@khyoonphd 6 ай бұрын
같은 방송 내용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점이 보입니다. 스탈린이 중공과 미국사이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전쟁을 시작하였다고 한 것과 서울 만을 점령하는 초기 계획은 서로 모순이 됩니다. 북괴가 서울 만을 점령하고 박헌영의 남로당이 봉기하여 적화가 되었다면, 결국에 미국과 중공이 한국에서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 검토 바라겠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아주 예리한 말씀이십니다. 다음 컨텐츠에서도 약간 다루게 되겠지만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 간의 사료에 나온 대화를 보면 그 의문점이 풀리게 됩니다. 소련이 핵을 개발하고 배치한 후인 1950년 4월 스탈린의 말입니다. "당신의 전쟁 요구를 조건적으로 허락한다." "우선 중국의 마오쩌둥 동지에게 가서 지지를 받아내라." 그런데 이건 명심하라! "만약 이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여 설사 북한이 패배한다 해도 우리 소련은 손가락 하나도 들지 않겠다." 이 말을 보면 어떻습니까? 뭔가 염두에 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중국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보험용이었습니다. 핵심은 중국에 가서 지지를 받아내라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참전해도 손가락하나 들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즉 스탈린은 김일성이 망하길 바란게 아니라 김일성이 이기면 좋고 혹시 미군이 개입하여 북한군이 밀리는 만약의 사태. 그럴 경우 벌어질 미국과 중국간의 대결을 염두에 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v-lz2vg
@tv-lz2vg 6 ай бұрын
김일성의 계획은 서울점령 일수도 있지만 스탈린은 결코 거기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을거란 예측을 했을수도.. 겨우 서울이 함락되었는데 남한이 항복을 한다? 말도 안되죠.. 나중에 고지전과 휴전에서도 김일성은 조기 휴전을 원했는데 스탈린은 원치 않았다고 들었죠.. 사실상 미중 전력소모 고지전이 최고였죠.. 당시 스탈린은 독일패망이후 동유럽의 안정에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tv-lz2vg 매우 정확합니다. 다음 컨텐츠에 관련 내용을 약간 다룰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스탈린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승리해도 좋고 패배할 경우에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보험을 이미 들어놨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었습니다. 다음 컨텐츠를 보시면 완벽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user-nc2hs4rp7l
@user-nc2hs4rp7l 3 ай бұрын
​@@tv-lz2vg맞아요 khy님은 북한과 소련은 엄연히 의사결정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주체임에도 동일시해서 사고를 하고 있네요
@user-gr6dw6kf5w
@user-gr6dw6kf5w 6 ай бұрын
유튜브에서는 북괴군이라 부르셔요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아직도 수구냉전 반공병신들이나 처쓰는 용어를 쓰자는 시대착오가 있네? 너 괴뢰의 뜻은 알고나 써라. 니놈 말대로면 아직도 전작권없는 한국군대야 말로 괴뢰군아닌가?'
@joelee1467
@joelee1467 6 ай бұрын
​@@user-zs7eb5uc9r빨갱이가또...ㄷㄷㄷ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joelee1467 너랑 생각이 다르다고 함부로 빨갱이 운운하는 건 스스로 반공병신 수구찐따라는 인증은 아닌지? 21세기다. 아직도 빨갱이가 이나랄 망친다고 착각하는 거 그거 정신병이야. 빨랑 상담받고 약먹어라.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약정이 끝났다면? 지금 바로 최대 77만 원 받아가세요~!(인터넷tv47+정수기30) 인터넷 가입할 때 가장 많은 현금 주는 아.정.당 #인터넷가입 #정수기렌탈 #알뜰폰 까지 한 번에!?! ☞ 전화 한통만 하면 77만원이 내 지갑으로 쏙 ☞ 카카오톡 상담하기 pf.kakao.com/_RGxcFxb/chat ☞ SK KT LG 헬로비전 정책표 : cafe.naver.com/movedance/837204 근거 있는 가입자수 1위 아정당!! 1. 당일지급 원칙! 2. 많이 드림! (단통법 내 최대상한 지급) 3. 365일 밤 10시까지 전화상담! 문의만 해보셔도 됩니다. 지금 바로 ☎ 1833-3504 ☎ 무료 전화주세요!
@user-cq2yj4ye3s
@user-cq2yj4ye3s Ай бұрын
목소리가 ㅈ뜌브나 하는가?
@kju42
@kju42 6 ай бұрын
잘못알고 컨텐츠를 만든듯! 오성장군이라는전투경험이 아주 많은 김홍일 장군이 후퇴하는 국군부대들을 잘 수습해서 북한군도하를 막는 작전을 잘 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있다. 북한군은 뭘 기다린게 아니라 도하를 빨리 못해서 애를 먹었던 것이다.
@user-uj3mw4zg8h
@user-uj3mw4zg8h 6 ай бұрын
정설이 아니라 가능성이라 말해줘도...에휴
@kju42
@kju42 6 ай бұрын
​@@user-uj3mw4zg8h 전제부터 틀린 사실 어디서 부터 그런 얘기가 나와서 여기저기 확인된 진실처럼 나오는데 한강방어선전투는 공식적으로 기간은 1950년 6월 28일 ~ 7월 4일로 1주일(7일)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바로 도하해서 쳐내려오려고 했는데 김홍일 장군이 명령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알아서 병사들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요소요소에 구축해서 싸우게 하여 쉽게 도하해서 뚫고 내려오지 못한 것이지 북한군이 3일 기다린 사실 자체가 없다. 김홍일장군은 국군내 사단이상의 병력을 지휘해본 유일한 사람이라 그야말로 상부의 명령도 없이 알아서 할일을 했다는 게 놀라운 사건이었는데 이 잘알려지지 않은 명장을 미군장성들과 작전협의과정에서 미군지휘에 닥치고 복종보다는 자꾸 다른의견을 내놓으니깐 미군의 요구로 이승만 조기에 현장지휘관에서 빼버렸다는 후문이다. 나중에 김홍일장군의 의견들이 옳았다는게 낙동강까지 계속 패퇴하면서 증명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중위 대위급이었던 자들이 한국군의 장성이 되어 큰 병력을 지휘할려니 모든게 엉망진창이 될수밖에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미군 합쳐서 그 어렵다는 후퇴지연전을 해본 유일한 사람이 한강을 틀어막고 지연전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아니고는 설명이 안된다.
@juliocesarchavez4184
@juliocesarchavez4184 6 ай бұрын
6.25 는 기획전으로 누구도 승자가 되어서는 아니될 전쟁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논거다. 영등포 방어선? 그거 조선인민군 립장에서는 애들 장난이었다ㆍ. 논거 맞다.
@kieyang
@kieyang 6 ай бұрын
립장이 뭐야 ? 립장이 ... 남한말도 제대로 못하네
@user-kb6im5uj6c
@user-kb6im5uj6c 6 ай бұрын
춘천에 2군단을 막아서 병력이 못합쳐져서 못내려간거로
@user-wr3fp4re8l
@user-wr3fp4re8l 5 ай бұрын
평양.바닥에에.핵ff16전투기로3개만쏘면.이순신함정바다배에서핵을쏘든지간에..전쟁없이..대한민국.태국기가평양에.휘날린다.간단하다..
@user-km5xv9bk4f
@user-km5xv9bk4f 6 ай бұрын
1빠
@user-gb5pn5jg1w
@user-gb5pn5jg1w 2 ай бұрын
보다 피씩 웃었네요. 일단 두가지로. 첫번째 지금 서울은 중국이 대규모로 몰려 와도 안될것 같은 요세화된 도시인데 더군다나 중국군보다 더 떨어지는 북한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게 아닌지, 두번째로 6.25 땐 춘천에서 6사단이 버텨준게 크죠. 밀덕이라면 다 제말 이해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걍 지나가면서 웃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2 ай бұрын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을 3일만에 함락한 것은 팩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서울은 요새화된 도시라니? 지금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 동안 널리 알려져 온 국군 6사단의 활약은 이 컨텐츠에서도 얘기를 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북한군이 3일간 머물렀던 이유의 전부라기엔 부족합니다.. 이 컨텐츠의 내용은 개인 주장이 아니라 언론에도 보도가 되었고 최근 자료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특히 김일성이 박헌영 말만 믿고 남한 내 봉기를 기다렸다는 사실, 그리고 스탈린이 도하장비를 주지 않아서 한강 도하가 늦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사실로 밝혀진 내용입니다. 이 컨텐츠는 누구나 아는 춘천 국뽕이야기만 하는 컨텐츠와는 다른 컨텐츠입니다.
@tysong6445
@tysong6445 Ай бұрын
박헌영의 남로당 5만명 유입썰, 그러나 실제는 500명도안됐다는..
@fischergraham678
@fischergraham678 Ай бұрын
쥐뿔 누구나 아는 이야기 하면서 뭘 아는척 하냐. 거기다 컨텐츠하고 맞지도 않는 얘기하며 피식 웃다니 ㅋㅋㅋㅋ
@Phd-gp1kw
@Phd-gp1kw 6 ай бұрын
그럼 스탈린이 한국의 스탈린 개승마니에게 연민의 정을 ?
@user-wt8xu1rt2w
@user-wt8xu1rt2w 6 ай бұрын
멸~공
@user-dq9gn7gm5p
@user-dq9gn7gm5p 6 ай бұрын
김일성이 육이오 벌여서 UN공식통계로 군인 민간인 백만명 죽였구만. 한반도 역사상 최악 학살자는 김일성.
@user-nc2hs4rp7l
@user-nc2hs4rp7l 4 ай бұрын
비록 이승만 개인 영달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정치적인 안정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
@user-re1zw8gh5c
@user-re1zw8gh5c 3 ай бұрын
건국전쟁 보세요
@culcul-gn8mm
@culcul-gn8mm 3 ай бұрын
줫도 모르면서 역사 왜곡 선동을 사실로 인지하다니, ㅉㅉ
@dolgum826
@dolgum826 3 ай бұрын
헛소리 하고 저빠졌네.무식한 ㅉㅉ
@popsad2445
@popsad2445 3 ай бұрын
ㅇㅇ 자아 욕구가 대한민국 건립 생존 민주주의 확립이었지 이를 위해서 진짜 미친듯이 일했고 너처럼 자아 욕구가 술쳐먹고 기집질하는게 아니라서 다행
@user-by9xj7cg2u
@user-by9xj7cg2u 9 күн бұрын
@@user-re1zw8gh5c 나는 개독 리숭만이 싫어요.. 끝!!
@user-fe7st6gv3z
@user-fe7st6gv3z 2 ай бұрын
난 진짜 궁금한게 북한군은 38선에서 서울까지 80KM 3일 만에...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에서 서울까지 40KM 14일 만에...? 이승만이 키워낸 한국군의 수준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한국군은 최고의 사단이 전방에 주둔한 상황이고 북한군은 찌끄레기 2선 후방 부대가 지키는 지역인데... 한국군이 얼마나 무능하게 무너진 건가? 어디서 격렬하게 막아서 몇 일을 버틴 작전이읍네? 인민군은 연희고지에서 탱크 있어 버텼냐? 그리고 한국전쟁 초기에 발생한 후퇴하지 못한 수많은 전우를 포로로 돌려받지 않고 모두 싸그리 사망 처리 한 건가? 하물며 자신의 사단 부하를 싸그리 사망 처리로 묻은 사단장? 휴전 담당자 본인이 직접 묻어 아오지 막장으로 몰아넣은 그 당사자? 보통의 인간은 아닌 것 같네...? 보통 싸이코페스 아니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그 동생도 군량 슈킹해 부하 굶겨 죽이고 했으니... 자신의 지휘력 부족으로 후퇴 후퇴하다 한강 다리가 끊겨 후퇴를 못했는데... 그런 부하들이 포로로 잡혀 북에서 고생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망 처리하고...? 심장이 두개? 아니면 스텐? 그리고 더 웃긴건 존경 받는다는 거... 만주군 출신 일본군 출신을 존경하고 광복군 출신은 천대하는 육사 후배들은 그런 선배들의 뜻에 따라 부하가 포로로 잡히면 싹 사망 처리하고 돌려받지 않고 입 닦을 듯... 70 너머 살아 돌아온 육군 소위 출신 탈북인를 만나주지 않았던 합참의장, 국방장관 출신이 생각나네... 덕분에 전작권 넘겨주고... 지금도 3.1절 행사에 자위대를 크게 걸고 대한독립만세가 아닌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왜구들이 있으니 전쟁나면 도망가는 게 정상인가?
@user-mf9gw5hc5q
@user-mf9gw5hc5q 2 ай бұрын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직후부터 정권잡고 소련지원받아 전쟁준비 남한은 좌우 대립으로 지속적 분란 미국은 군사지원 안해줬음 역사공부하면 왜그런지 알게됨
@joonnam501
@joonnam501 2 ай бұрын
그게 왜 이상해? 북쪽 것들은 모든 준비를 하고 치고 내려왔으니 3일, 준비 없이 당하다 남에 도움 받아 치고 올라가려지 14일 왜 이게 이해가 안되지?
@user-mh9ub5mi1z
@user-mh9ub5mi1z 22 күн бұрын
소련도 북한을 진심으로 도와준것이 아니다
@user-mh9ub5mi1z
@user-mh9ub5mi1z 22 күн бұрын
소련이 진심으로 도와줄 맘이 있었으면 전투기 지상군 다 파병 했겠지
@user-ml6ji1hq4e
@user-ml6ji1hq4e 6 ай бұрын
?? 서울은 평양이 아니다 북한은 소수정예 특별층 들만의 핵심 기지인 평양만 복속 시키면 되지만 서울은 인구가 가장 많은대도시이며 군 대와 민방위. 경찰청 군부대 미합참 등 ㆍ다국군본부도 서울에 있고 또 핸드폰을 가진 2000만명의 서울시민들로 정보로 게임 속의 전사같은 현대판 능동적인 민방위군이 상시 있기때문이다 천년왕국
@user-lg1jv3xn7x
@user-lg1jv3xn7x 6 ай бұрын
야 바보야 서울에서 미군의힘을 빼기위래서야 그래야 유럽을 공상화 할수 있으니까
КАХА и Джин 2
00:36
К-Media
Рет қаралды 3,9 МЛН
Тяжелые будни жены
00:46
К-Media
Рет қаралды 5 МЛН
[역사 속 그날들/풀버전3시간] 한국전쟁 그날ㅣKBS 방송
3:34:17
KBS역사저널 그날
Рет қаралды 520 М.
KF-21·한국형 사드, UAE 수출 길 열리나? [이슈분석]
6:04
6.25전쟁 동안 대한민국이 멸망할 뻔했던 최대 위기의 순간.
15:12
만물상자TV [전쟁의 신]
Рет қаралды 103 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