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 공수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진게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겁니다. 그 연대가 아틸라 훈제국이 존속하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훈제국에 조공으로 보낸 금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 한반도에 온 것이 아닌가하고 추정을 하고 있는거죠.
@최명근-q9n3 жыл бұрын
@@大신라혼 X도 모르면서...ㅋㅎ!
@men98903 жыл бұрын
@@최명근-q9n 댁은 얼마나 잘아는가..?
@귀여운밀크-y5k2 жыл бұрын
해상 무역을 백제가 했죠 백제 비단이 명품으로 유명해서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갔다고 합니다.
@prestetuu2611 Жыл бұрын
그때 많이 있었으면 지금도 나와야 되는데 사실 그당시에 무역이 활발했음 삼국이 발전한 이유중 하나
@노지웅-z2r6 жыл бұрын
옛날엔 금이 많았지 다들 시집갈때 금고락지 하나씩 장만할 수준은 돨 정도로
@부르니부름2 жыл бұрын
뺀치로 잡고 잡아 당기면 엿가락 처럼 쭈욱 계속 계속 늘어나서 실처럼 뽑을수 있음 반도체 회로도 은으로 하면 되는데 금으로 하는게 가장 가늘게 실로 뽑을수 있어서임 녹도 안슬고 고밀도 집접회로에 필수임
@chunjaekim44528 жыл бұрын
신라금관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그것부터 밝혀야 금관의 비밀을 풀 수 있다. 알려진 것은, 금관이 출토된 고분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경주 외곽에 분포된 왕릉들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은 금관이 왕권의 상징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과연 금관은 누가 왜 썼던 것일까? 이것이 핵심인데, 이 프로그램은 개천에 가 사금이나 찾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27gracekim4 жыл бұрын
역사를 해석할려면 다양한 자료와 앞선 기술의 결과과 나와야 합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게되면 그게 바로 역사 왜곡이 되는 것입니다.
@men98903 жыл бұрын
농경사회는 금을 숭배하지않는다. 금은 유목민들이 숭배하지.. 흉노의 영향이야
@tv-rv2fy3 жыл бұрын
고대에 광산은 못파지 낙동강 유역 김해 . 경주 금성. 금강 . 김제. 금산 등등 큰지명만 봐도 금이 많이난 지역이네요 고대에는 강유역에 모래와 같이 사금이 많이 썪여있었고 금은 토기문화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을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토기구울때 흙이 바닥에 달라붙지않도록 모래 모래를깔았고 고온일때 썪여있던 금이녹아 덩어리된것을 발견하고 금제련 기술을 발전시켰을것이라고 추정되네요 금문화가 북방에서 전래되었다고보는 사대주의사상 좀버렸음좋겠네요 고조선이나 단군이나 우리조상으로 추앙하는것도 좋지만 만년전에도 4대강 유역에는 많은 조상들이 살고있었네요 ㅡㅡㅡ 모래에 썪여있는 금모래들은 순도가 높아서 오늘날같이 복잡한 제련과정없이도 제련되네요 세공기술만 발달하면되지 우리조상들이 손기술이 세계최고잖아요
@jaehoonjun12789 ай бұрын
❤🎉🎉🎉❤ 금은 옛날에도 귀했고 좋아했네.
@박연호-w1y5 жыл бұрын
아라비아 상인들은 유리공예품을 신라로 가져와 금과 바꿔갔다
@정연호-p6d3 жыл бұрын
어디박가요
@정연호-p6d3 жыл бұрын
경주 정가
@stellakim68053 жыл бұрын
오죽하면 금씨것쓔 ~쇠금김씨 ~내도 금 억수로 좋아요 ~~~
@lgbtaresins9 жыл бұрын
김해대성동고분은 신라 유적지구가 아니라 가야유적지구입니다.
@大신라혼6 жыл бұрын
신라 왕족들 자체가 가야에서 왔습니다. 즉, 신라 유적지구가 맞는겁니다.
@왓더쿼카5 жыл бұрын
@@大신라혼 신라에 합병되기 이전이니까 가야로 보는게 맞는거 같아요
@大신라혼5 жыл бұрын
신라에 합병되는게 아니라 애초부터 신라와 같은 민족이었을 뿐입니다. 가야는 신라의 지방명이지, 국명이 아닙니다.
@희안해希安해5 жыл бұрын
@@大신라혼 국사시험에 그렇게 답한다면, 정답일까요? 오답일까요?
@大신라혼5 жыл бұрын
정답입니다. 애초 가르칠때부터 잘못 쳐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유니-d1u1l2 жыл бұрын
곡옥이 너무 아름답네요
@jayyoo9066 жыл бұрын
Stone Henge의 Brythonic Celtic 용어는 Dolmen이다. 만주어 Dolmang이나 한국어 '돌맹이'와 일치한다. 지금도 프랑스에 있는 고인돌을 Dolmen이라 브른다. Stone Henge는 근세에 조어되 었다.
상명여대 박선희교수님~^^ 순간적으로 숫자를 잘못 해석 하셨네요. 5:10~ 5:21세계 금관이 13점이라고 하셨는데요. 그중 신라 7점, 가야 2점, 나머지3점은 다른나라~ 1점이 없어요 ? 더 궁금하네요~ 교수님 댓글 부탁드립니다.
@권태호-l7y5 жыл бұрын
만약 새숭배의 상징하는 금관이라면 곡옥은 어떻게 설명하죠? 곡옥은 모양이 마치 태아 형형 가진 모형인데요
@eugenekahlil5 жыл бұрын
초산 분석법 → 질산 추출법 멘트, 자막의 초산 → 질산
@운지룡풍지호4 жыл бұрын
내용이 너무 부실해서 너무 놀랐다 아까운 내 시간 ㅡㆍ ㅡ
@보봐르남5 жыл бұрын
110명이 15일간 사금을 캐야 한다는 식의 계산방법은 참으로 무식한 생각이라고 본다. 그런 계산법은 지금의 상황이지, 그 옛날의 신라 금관을 만들 때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지금은 당시와는 달리 수천 년 이후이다. 즉 고서에 따르면 한반도 서해안에는 모래밭에 금덩어리가 마치 자갈처럼 지천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개울가에서 금으로 된 자갈을 채취하는 영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사람들의 접근이 없는 곳에서 노다지를 자갈처럼 줍고 있는 영상들이 많이 있다. 따서 과거에는 금덩어리를 확보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으로 본다.
@명호송-i9g4 жыл бұрын
금 세공 기술은 철 가공 기술보다 뒤떨어지는 것 아닌가. 쇠 주철 방식과 달리 금은 두드려서 펴기만 하면 되는데
@nonokjh4 жыл бұрын
양산의 부부총을 아시나요 전 일본이 가지고 갔습니다. 유물 수준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고근초4 жыл бұрын
신라김씨왕족이 중국에서 이주해온 흉노족이기 때문입니다. 흉노족은 금을 숭상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모르는건 아니죠? ㅎㅎ
@윤석환-r6z2 жыл бұрын
맞아요 그런대왜 조용하죠
@weolshon63714 жыл бұрын
고박사님 건강은 잘챙기셔야 합니다 ^^
@ll-tg7xz Жыл бұрын
신라 시대에 땅을 어찌 팔수 있었겠어요. 사금 채취가 가장 근거 있는 주장이라고 봅니다.
@행복-s9p4 жыл бұрын
그래도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왕은 선덕여왕이 듯
@knowledge_store586 жыл бұрын
한국역사는 소중합니다 재채널에도 놀러오세요~^^
@미응사랑5 жыл бұрын
의외로 신라에서 나오는 금 장식품이 백제와 비슷해서 놀랬다. 백제릉에서 나온것도 곡옥에 금귀걸이가 신라와 거의 흡사. 나는 신라에서 금을 숭배해서 신라의 전형적인 금장식품인줄 알았는데 백제에서도 쓰다니. 그리고 백제에서 나온 금관모도 백제 전용인줄 알았는데 신라에서도 금관모가 나옴...
@왓더쿼카5 жыл бұрын
신라에서 발견된 초기 금관들은 공작의 깃털을 세운금관형식으로 고구려의 금관들하고도 유사해요 삼국이 모두비슷하다가 통일신라시기쯤되어서 갈라진듯
@이희정-e6m1i3 жыл бұрын
다시 생각해도 일본은 나뿐놈들이다 강도도 그런 날강도가 없지 않나요? 살인자이기도하고요 우리것을 빼앗아 부국한 일본이잖아요 경계를 넘어 . . . 받아내야하는것이 답일진데 안타깝기만합니다
@행호할캥홍3 жыл бұрын
아주 적은량의 금으로 가장 반짝거리는 효과를 주는 아주 능률적인 생김세의 왕관인데 저걸착용하고 국민들 앞에서 무슨말을 했을지 세금징수를 줄이자
@davidking80833 жыл бұрын
김알지 금관 신라 김일제 사금 경주 고경 영천
@박연호-w1y5 жыл бұрын
신라금관은 아프카니스탄금관과 매우유사하다. 당시 아프카니스탄은 중근동의 대국이었다. 관음상은 그리스의 여신상이 실크로드를 통해들어오면서 관음상으로 변한것이다
@davidjacobs85585 жыл бұрын
대형 인물상을 만드는 문화는,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해서, 그리스에 전파 되었다가, 알랙산더 대왕이 인도침략때 인도와 박트리아에 전해지고, 또 불교와 접목되어서, 중국에 전파되고, 그후 한반도와 일본 열도 까지 전파되는거죠. 관음보살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이 뒤바뀐건,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죠.
한반도 원주민들은 유리 구슬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고...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인 신라 김씨 왕조는 금을 귀히 여김. 왕족의 문화와 백성들의 문화가 다른 경우... 어쩌면 당시 백성들에게 신라 귀족은 허접한 금을 사랑한다고 하여 욕을 먹었을듯...
@신현국-b3e3 жыл бұрын
1⁰00년의신라의 역사는 세계사에등제되어잇다 삼국통일의위업과 영왕의 탄생 사양의 왕들과 비교해도 우위에잇는 것이 신라의 역사이다 ㅇ 리민족의 자랑이다
@행호할캥홍3 жыл бұрын
누금기법에는 어떤 종류의 풀로 결합시키는건가요
@大신라혼9 жыл бұрын
금관의 비밀을 푼다고 하더니, 비밀은 조또 풀도 몬한 것들이 제목만 거창하게 쳐 달아놨네.
@RaphaelO.P4 жыл бұрын
ㅋㅋㅋㅋㅋㅋㅋ그러게 말입니다
@행호할캥홍3 жыл бұрын
이미 중앙집권이 확립한 나라이죠 왕관 기술력은 지금이랑 비교하면 초보수준 아닐까 모양은 독특하고 의미가 탁월하기는 하다 보석도없고 루비나 이런거
@Jeong-eun3 жыл бұрын
한반도 사람들은 물질 만능이 아니기 때문에 부장품으로 묻었고 서양은 물질이 중심이기 때문에 매장을 안해서 없는 거 같은데 외국 인간들이 더 금에 환장하지
@song4do3 жыл бұрын
'金' 광산! = 울산 두서면 구량리, 언양면 다개리 일대에도 有!
@Redbackkk2A7K2AS214 жыл бұрын
땡큐
@행호할캥홍3 жыл бұрын
저런놩관을 착용하고 일식이나 월식때 군중들 앞에 나타나면 효과가 클텐데
@브로컴온 Жыл бұрын
12:35 금관총 금관이 아니라 금령총 금관임
@천마총마립간 Жыл бұрын
화면중에 금강공방 최장인 님 계시네요....진정한 마립간시대 신라 금속공예 장인의 후예^^
@행호할캥홍3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 신라때 유럽에서는 바이킹이라든가 로마 카토릭 교왕이라든가 천둥치면 하늘이 벌준다고 벌벌떨던 때 아닌가요
@ysng-yz7xe Жыл бұрын
人+光=金ㅡ신격화 사람이 빛나는 샤머니즘 글자 ㅡ알지(순수국어 金) 금관은 불교가 들어오면서사라졌다
@jrjin94423 жыл бұрын
그게 아니라 금관을 무덤에 부장한 나라가 신라뿐이라는 거지.... 그건 금관이 살아서 쓴게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실사용하는 거라면 묻을게 아니라 물려줬겠지. 그리고 실제 사용하기에는 금을 너무 아꼈어. 금 총량이 얼마 안돼.
@행복-s9p4 жыл бұрын
저렇게 사치를하니 가난한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삶을살았으고 넘 맘 아픔
@귀여운밀크-y5k2 жыл бұрын
해상 무역을 해서 비단을 팔아서 금을 받아온거죠
@개난리-p6d5 жыл бұрын
금관, 계림로 단검등을 보건데 신라는 카자흐스탄의 후예, 탱그리의 후예였음이 분명해졌다.
@jaekunyoo85094 жыл бұрын
kzbin.info/www/bejne/aKbci6Zupclradk 신라 시조 추적
@ahbeautifulim7170 Жыл бұрын
김일제 후손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가져온 금.......유독 김씨 성의 신라 왕릉에서만 나옴. 경주 김씨는 흉노(훈)의 후손으로 흉노는 유목민, 이들은 금을 재산의 소중한 것으로 여김...
@행호할캥홍3 жыл бұрын
나라가 배고프고 경제가 엉망일때 한번씩 쓰고 나와서 열십히 일해라 쨍하고햇뜰날 돌아온다라고 한번씩 놀리고 들어갈때 쓰기 좋은 👍
@jaehoonjun12789 ай бұрын
❤😂🎉🎉❤ 굳이 무덥을 안파도 나온다면 성골이나 귀족 왕족이 모두 장례식때 쓴것 아닌가요? 땅에 금이 엄청 뭍혔겠네..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표-y2r15 күн бұрын
대조영 부금 보소
@srl58164 жыл бұрын
하나 갖고싶네..
@Hongcacola992 жыл бұрын
이거보고 든 생각이 금관가야는 금관이 많이나와서 금관가야인가?ㅋㅋ....
@한소리-v1o2 жыл бұрын
추모라고 부르는 유일한 역사학자시네요. 지금까지 주몽이라고 하는 사람들뿐이였는데.
@Vivian25124 жыл бұрын
김해가그이금관있는덴가? (참고:김해에서태어남:참고:10세
@성수경-w9c6 ай бұрын
0:34
@ydHong-fx6jl4 жыл бұрын
정말 금관이 순록의 뿔처럼 생겼구나...신기하내ㅎ
@jayyoo9066 жыл бұрын
신라 금관에 대한 비밀에 관한 두곳의 업로드에서 여기에다 내 의견을 쓴다. 너무 지나친 상상력으로 이 금제품을 토속화하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만 쓰겠다. 그 금관들은 셀틱족의 한 분파인 브리톤 Brython들 갖여 오거나 도착후 지참한 금판을 잘라 제작한 것이다. 금관만 그런게 아니고 황금검, 금장신구, 금신발등,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의문의 금제품은 한반도에서 생산된 금이 아니고, 코카서스 산맥에서 생산된 것이다. BC450 년 이후 5세기 까지, 유라시아대륙에서 최고의 금 생산지는 거기였다. 금이 노천상태로도 발견된 곳이다. 금광은 염광, 은광, 동광과 혼재한다. 그러면 왜 브리톤인가? 이들은 인류역사상 처움으로 천일염이 아닌, 광산염을 개발한 민족그룹으로 독일의 salzburg, 오스트리아의 Halstatt을 개척했고, 이후 코카서스 산악에서 소금광을 생산한다. 그들은 왜 소금이 필요했을까? 소금 자체가 금 못지않는 중요 상품임은 물론, 사슴류의 고기를 절여, 말에 싣고 유럽은 물론 극동까지 진출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여정에서 광산염 제염기술을 전파한다. 이 최초의 Salts Road가 나중에 Silk Road로 개명된다. 실크의 유럽쪽 수출은 해상루트가 절대적이 였다. 한민족이 중앙아시아에 거주할 때 부터 '배달족'으로 불렸다 한다. 배달이란 아무런 뜻도 없다. 그저 한민족의 선조를 지칭하는 표음어로 고유명사로 썻다한다. 그러나 나는 배달의 어원은 이 Brython과 공유한다고 본다. Brython은 합성어로 Bright + Stone이다 즉 금인 것이다. 배달을 "밝다"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비슷한 감이다. 그러면 배달족의 제사장겸 정치적 지도자 '단군'이란 존재가 Brython족에도 있을까? 있다. Druid이 바로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면 사회관습은 어떨까? 매우 유사하다. 소위 Cairn은 석총묘이고 Stone Henge는 고인돌이다. 한강 중류에 광산염을 정제한 가마솥이 발견되었다 한다. 이들이 도입한 기술이다. 그러면 유전적 공유는 없을까? 있다. 한민족의 DNA에 영국 셀틱족의 그것이 발견된다. 한반도의 금광은 이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하천의 모래를 걸러 생산하는 기술도 전수한다. 사금이다. 코카서스산맥의 노천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이들에 의하여 전수되는 기술은 동제품에도 있다. 수많은 동제품 즉 동거울, 동마구, 농기구등이 그것이다. 견직물을 가공하는 물레나 직기도 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갖여 온 것으로 본다. '신라'라는 이름은 이들이 붙인 이름 Sereca를 한자음으로 표기한다. 그들은 일찌기 글로벌화 된 사람들로 신라의 견직물이 최고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누에 똥을 '실'이라 부르고 베를 "라"라 부르것을 듣고, 지역을 표시하는 -ca를 붙인 것이다. Brython의 언어는 고대 그리스어의 문어 (syntax)와 단어(vocable)를 많이 차용해서 발전되었다. 물론 그들의 고대의 금관, 사슴장식의 금관이 현존한다. 사슴은 그들의 경제수단이면서 동시에 숭배하는 동물이다.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들이 기마민족이 였다는 사실, 전투장비로 석궁을 썻다는 점, 이 모든 점들의 유사성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바란다.
@아기새-k6n6 жыл бұрын
@@cjk7721 욕하지 마시죠!
@아기새-k6n6 жыл бұрын
이게.....간략?
@아기새-k6n6 жыл бұрын
@Amicus 👏👏👏👏👏👏👏👏👏👏👏👏
@사막오장육부5 жыл бұрын
경주에서 발견된 둥근 귀걸이 세공을 살펴 보았더니 완벽하게 둥근 세공이어서 당시에 저렇게 완벽하게 원이 나올 수 없다고 했어오 알고보니 경주 개울에 금들이 물에 흐르고 굴러서 원이 된 걸 그대로 붙였다고 들었는데 한국에 금이 없었다니요? 당신 어느나라 사람인가요?
@왓더쿼카5 жыл бұрын
단군과 드루이드가 같다는 뜻?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톨킨님
@yaahoo5022 ай бұрын
일제가 도굴해가고 강탈해간 문화재가 너무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것은 가치가 떨어져서 일제가 그냥 남기고 간 것들이 대부분이고 일본에 훨씬 예술적으로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