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그리워하는 분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냥 추억보정입니다. 그때가 인심이 더 좋았고 정이 많았다고 하는 분들은 지나간 과거의 고통은 빨리 잊고 좋은 것만을 간직하는 좋은 마음씨의 분들이긴 한데, 정말 세세하게 따지면 저때도 많이 힘들었어요. 셋방사는 집은 노비처럼 그 자식들까지 눈치보며 살았고, 애들은 학교에서 돈봉투 노리는 선생들에게 시달리고, 온가족 세끼 겨우 밥먹고 살아서 콜라병 따위도 없는데 폐품 안가져왔다고 싸대기 쳐맞고 나서 울다가 집에 가서는 묵묵히 아무 일 없었다고 하던 시절입니다. 어머니는 반드시 애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알지만 그게 다 당신들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새벽에 찢어지는 마음 부여잡고 싸줄게 김치하고 콩자반밖에 없는 도시락에 콩밥이라도 꽉꽉 눌러담던 시절이었죠...
@구들장군-i7w2 жыл бұрын
동감입니다. 저때도 지금과 다를바 없었을듯합니다. 다만차이라면 못사는 집이 대다수라는게 차이죠. 80년대후반에도 있었던 가정환경 조사서..꼭 받고 기입해야 했는지.. 차라리 학생과의 일대일 면담 을 통해 조사했다라면 더 좋았을.. 그당시 아이들 그런걸로 상처받은 적 많았을듯.. 이웃간 정도 많았지만 사생활 간섭과 침해도 장난아니게 많았음. 옆집에 숟가락이 몇갠줄을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많았죠
@wonjoony2 жыл бұрын
I agreeeeee. 지금보다 더 나았던 점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대부분 지금보다 열악했다고 보는 게 맞아요. 일례로, 80년대만 하더라도 수금하러 가정 방문 다니는 선생들이 많았어요(물론 좋은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제 담임 중엔 무려 별명이 '5만원에 3일'인 선생도 있었죠. 5만원짜리 현금을 갖다 바치거나 5만원짜리 구두표를 선물하면 정말 정확하게 3일 동안만 천사처럼 대해줬어요. 4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찬바람 쌩쌩. 마치 알아서 다음 선물을 준비하란 듯. 그런 놈도 선생이라고 스승의 날엔 "스승의 은혜~" 어쩌고 노래를 불러줬으니...미친 거죠.
@에르메스-z6b2 жыл бұрын
역사를 제대로 안가르치면 나라망하게됩니다 역사의공과를 확실이가르쳐야 나라의미래가 가능합니다 교육이정상적인사고를 가진산생님들이 우리미래세대에게 진실되게가르쳐야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바로섭니다
@지줄대고끄적이고2 жыл бұрын
추억이란 마약은 다 희석시키는 묘한 마법을 부립니다
@a010393263322 жыл бұрын
사람마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추억이 다르죠 본인이 살아온 그날이 악몽일수도 있고 천국일수도있다는겁니다 너무 피해의식만 있는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힘들어도 이겨내신분도 계시는데 말이죠
@거리에서-n2h Жыл бұрын
아주아주 희미하게 조각처럼 남아있는 형의 뒷모습... 나를 구해주고 떠난 형! 형,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났다면 인연이 되어서 나를 만나줘! 너무너무 보고싶은 우리형!
여행자님..부탁이 있습니다. 혹여나 다시 과거의 대구로 가실일 있으시면 저 한번 꼭 좀 데리고 가주십시오. 고생만 하다 갑작스레 떠나가신 울 어무니 한번만 꼭 안아드리고 싶어서요..
@부동산바로TV2 жыл бұрын
눈물이 ㅠㅠ
@mi-tq1iy2 жыл бұрын
왜 울려요 ~~~~
@waterbird-p4r2 жыл бұрын
ㅠㅠ
@황혼-v7v Жыл бұрын
저도요.
@동호김-x2i Жыл бұрын
ㅜㅜ
@robinmeng Жыл бұрын
1971년.... 이런 사진이나 영상들 보면, 대한민국이 잘 살기 시작한지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나라와 자식들을 위해서 열심히 사시고 아끼시던 모든 부모님들 너무 너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STEELOISDOG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눈물이 나네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렵게 청년기를 보낸 대구라서요
@mjc8677 Жыл бұрын
능금꽃 향기로운 내고향이네요 교동시장과 북성로 향촌동 거리 이네요 어떻게 칼라사진이 있네요 국민학교시절에 가본거 같습니다
@oh-happy Жыл бұрын
내 고향 대구 저 시절로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다 너무 그립고 그리워서...😂
@nsk7412 Жыл бұрын
고생 많으셨읍니다! 덕분에 후손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제린파파2 жыл бұрын
그립다..저 시절엔 부모님두분다 살아계서서 저 거리를 다니셨을 생각하니 눈물 납니다... 두분다 편히쉬시고 감사합니다
@구글러-t2e Жыл бұрын
정말 귀한 자료네요...한국전쟁 이후 서울부터 전국에서 대구로 피난와서 살았고 정착을 했으니 대구 인구 바글바글 모든 산업의 메카였던 시절..
@PolarBear02014 Жыл бұрын
저희 엄마는 대전 사람입니다. 현재도 대구 시민은 아니시지만 70년대... 저희 엄마의 20대 처녀 시절 대충 70년~72년도에 대구 원대동 대구중앙교회 근처에 금복주공장(지금은 달서구 장동에 있고)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삼익직물 이라는 옷에 물들어 염색 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저희 엄마께서 20대 처녀 시절 삼익직물 이라는 회사를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장 바로 옆이 금복주 공장이 있다 보니 병 닦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20대 처녀시절 옛추억을 떠올리시라고 대구를 찾아간 적도 있는데요. 여러번 갔었고, 최근에 간게 4년~5년 전이네요. 동인동 찜갈비는 고기 먹는 것 보다 마늘 양념에 밥을 비벼 먹는게 더 좋았다고 하셔서 햇마늘 나올는 시기에 맞춰서 동인동찜갈비골목도 가고 달성공원(4년~5년 전에 갔을때 주변 주차비는 받는데 공원 들어가는건 아직도 무료로 들어간다는거에 놀래고 신기 하셨습니다.), 서문시장, 동산의료원도 오래됬고... 자갈마당(지금은 아파트 공사 하고 있고)은 여자분들에게 위험한 곳이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안 가셨다고 합니다. 엄마 말씀으로는 비포장도로를 다 걸어서 다녔다고 하더라구요. 대구터미널(지금은 동대구터미널과 신세계가 들어와 있는 곳)이 땅이 푹 꺼져 있는 곳에 있어서 장마철이면 침수 한다고 하시고, 동촌유원지도 걸어서 다니시고~ 가로질러서 수성못도 걸어다니셨다고~ 엄마의 20대 처녀 시절 때문에 많이 들으면서 자란 저도 이 영상 보니 눈물이 나네요. ㅠㅠ 70년대 원대동에 있었던 금복주 공장과 그 바로 옆에 있던 삼익직물 공장이 있었던 사진이나 영상 같은거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엄마의 옛추억 속에만 있는 그곳을...
@saengkong6 ай бұрын
저도 노원동 금복주 공장 바로 뒤쪽에 살았어요 엄마 처녀쩍 얘기들 들어보니 그곳에 살던때가 추억 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시절 ㅠㅠ 덕분에 잠시 옛생각에 잠겨봅니다😂😂
저는30대 인데요 여기 먼저 태어나신 분들 글 읽으면 . 지금 제가 좀 힘든상황인데도. 여기 남긴 글들 읽어보니 어머니 살아계시고 아버지 살아계시고 지금 이 시간이, 지금 어머니 아버지 다계시는시간 자체만으로 행복한 시간이구나를 느끼게 되네요
@saengkong6 ай бұрын
저는 71년도때 두살이 이었네요 16살에 3공단 으로 고등학교 때문에 대구로 나왔어요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죠 늘 배고팠고 학교갈때마다 버스비가 없어 매일 걱정을 달고 살았어요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놈에 가난을 못 벗어나네요 개천에서 성공하기란 정말 하늘에 별따기 입니다 대신 조금더 내려놓을줄 알고 게으러지만 않다면 먹고 사는건 문제없죠 71년 저때나 지금이나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포기만 하지않는다면 반드시 웃는날도 온담니다🥲🥲
@진원-i2g Жыл бұрын
이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사진들을 보니 눈물이 날것같아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라이다-g3v Жыл бұрын
나도 ... 먼가 그리워
@금별찌2 жыл бұрын
옛날 교동시장의 골목상가도 보이고 대로변 서문시장의 옷가게 문구점도 보이네요! 어련한 옛추억이 살아납니다...
@astrowinsky Жыл бұрын
멋지네요. 대구에서만 몇백년 살았네요.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쭉요. 잘봤습니다.
@eroomi5372 Жыл бұрын
인간은 지나고 나서 그때가 행복했다고 느낀다 고로 지금 내옆에 있는 사람 내 환경을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자 금보다 더 중요한건 지금!
아마 1974년인것 같은데 남산동 대도극장에서 이수미씨가 주제가를 부른 여고시절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당시 제일여상 3학년에 재학중인 누나가 그 영화를 너무 보고 싶어했는데 당시만해도 고교생이 그정도 수준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다가 교사 합동순찰조에게 걸리면 정학내지는 경고를 당하는데요 부모님까지 학교에 불려가 사과를 하고 할때입니다 그래서 누나는 어머니 바바리코트를 입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간 저를 데리고 애엄마 인 척하며 극장에서 영화를 다봤는데 아직 어린애였던 저는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되는 영화를 억지로 꾹참고 끝까지 보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벌써 50년전 일입니다
@금독수리-s3e Жыл бұрын
아련한 옛추억 젖어봅니다 아주 소중한 영상입니다 그시절로 돌아갈수는 없지만 그립습니다 좋은 영상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h플러스로 Жыл бұрын
제가 두살때네요~~ 장사하는 엄마대신 저를 업어키우신 외할머니가 너무너무 보고싶어요.. 휴대폰에 외할머니 사진을 봐도 그리움만 더해지고 너무 너무 보고싶어 김천대덕 산골짜기 산소에 찾아가도 외할머니 향기는 느낄 수 가없고 ........... 20년전에 돌아가셨지만 외할머니의 사랑은 죽는날까지 소중히 간직하렵니다. 제 어린시절 전부셨거든요~~
@냥-q5e2 жыл бұрын
추억보정이든 뭐든 현실에 지친사람들이 자신만의 추억에 눈시울 붉히며 감성에 젖느것도 나쁘지않다고 생각함.
@mi-tq1iy2 жыл бұрын
그럼요~~~
@블랑누아-k9b Жыл бұрын
인정~
@Amy-yf4qw Жыл бұрын
아버지 보여드려야겠어요.자료 감사합니다.
@sillugi3607 Жыл бұрын
시골에서 살다가 부모님따라 1975년도에 대구로 이사 왔었는데 73년도에 국민학교(당시는 그렇게 불렀음) 수학여행을 경주가기전에 대구 당일치기로 영남일보(?),달성공원을 구경했던 기억이 납니다..대구로 이사온 뒤 당시 여동생이 5원짜리 핫도그 먹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대구 온지 48년... 부모님,처가부모님,여동생,집사람,학교 친구....제 주위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세월이 화살 같이 날아가는 듯 합니다.
@innovator1087 ай бұрын
세월이 금방 지나가네요😂
@k477004 ай бұрын
건강하시고 즐겁게 사세요~~
@user-man7503 ай бұрын
광음여시..인생 선배님 늘 건강챙기시고 행복한 나날 보내소서..
@leahgil2417 Жыл бұрын
어딘가에 우리 아빠가 있을것 같은… 그땐 총각이셨을텐데ㅠㅠ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 맘이 찡 하네요😢
@aljja88ify2 жыл бұрын
추억의 대구아가씨. 예쁘장하고 당찬 목소리. 영화 보디가드. 잘 살지 혜정아 😁
@한군-h Жыл бұрын
울아부지 연애하시던 시절이겠네요 ㅎㅎ좋은영상 감사합니다 ^^
@볼빨간갱년기-l8f Жыл бұрын
70년대 말쯤에 대구 고모님댁에 간 기억이 있습니다.그때 허허 벌판에 아파트단지가 한창 들어서던때 같았어요.지금의 대구와 완전 딴판이었죠.
@kingdeum Жыл бұрын
너무나 그리운 가슴가득 아련함만 남아있는 옛공간들 아스라히 사라진줄 알았지만 바래진 사진한장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입니다. 아직도 우리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사랑과 함께
@인벤터-n9q Жыл бұрын
만경관에서 아버지와 누나와 벤허를 보앗던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때가 그립습니다
@새론별새론별 Жыл бұрын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생만하다 돌아가신 울어머니. 71년도에 영천에서 대구로 이사나왔네요.
@paran822 Жыл бұрын
영천은 제가 86년 군에 있을때 육본검열로 포사격하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ㅡ시골 마을에 있던 꼬맹이들 군인아저씨 왔다고 좋아하고 그랬었는데 나중에 위문편지도 받았던 기억이 있네요.
@hjwwinner Жыл бұрын
@@paran822 그땐 우리모두 순수했는데,,,,,
@geobing63 Жыл бұрын
저는 71년도 영천중앙국민학교1년 다니다가 다른 도시로 전학갔었지요..
@dokdo69036 ай бұрын
위문편지 나도 보내고 답장도 받고 신기했었는데ᆢ😅
@샨샤댐폭파범6 ай бұрын
저희는 60년도때 영천오미동에서 월배 희망원밑으로 이사왓어요
@y60716 Жыл бұрын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기억보다 더 낙후한 것으로 보이네요. 시내 중심가는 제법 큰 건물도 있었는데~~~
@bradpark-ce8yq2 жыл бұрын
여기 나오는 30대 이상 분들은 대부분 고인이시겠네요. 참 인생사 길지가 않다는걸 느낍니다.
@기분나쁜세상2 жыл бұрын
예 화살입니다..... 인생 매우 짧습니다
@조안나-y1j Жыл бұрын
아~~ 옛생각이 새록새록나네요~ 저 거리 어디쯤에 나도 있을것 같은... 같은세월입니다. 20대 난 어디서 헤메이고 있을까?
@플라워-n8c Жыл бұрын
이영상보다가 저도 눈물흘리네요 71년 국민학교2학년 시골에서 살다가 대구로 온해는76년 처음왔을때 평리동은 미나리깡이고 연탄제 쓰래기장이였는데~ 편지쓸때주소는 경상북도 대구시해서 참 뿌듯했었죠 영상에 중앙로 한일극장이네요 떠나신지30년이된 엄마생각에 눈물이하염없이흘러ᆢ 영상 감사합니다 친구들께 보낼까 합니다
@나깡이닷 Жыл бұрын
평리동의 추억에 .. 아직도 본집은 평리네거리 쪽 입니다. 겨울 되면 미나리깡 에서 시게트 타고 많이 놀았는데..ㅋ
<a href="#" class="seekto" data-time="43">0:43</a> 지금 시내 따로 국밥집 건너편에 있었는 박성규비뇨기과 의원이 보이네요. 71년이후 30년 지난 2001년까지 가끔씩 갔는 병원이네요. 그 당시 일흔이 훨씬 지난 의사 선생님여섰는데 지금은 고인 되었겄네요. <a href="#" class="seekto" data-time="134">2:14</a> 신한아케이드 지금은 일흔된 둘째누님이 거기서 일을하셨는데 지금 교동 먹자골목 입구에 있었던 아케이드입니다. 기억이 나네요.
@douglaspark9432 Жыл бұрын
그때 그시절 나도 그곳에 있었다. 사람냄새 물신 풍기는 아름다운 정감넘치는 그시절이였다.
@bhenchung9041 Жыл бұрын
1971년이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데 편집된 사진들이 다 그때 사진인지 모르겠네요. 일부 사진은 너무 오래된 거같고 아무튼 지금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습니다. 진짜 오래된 기억의 저편입니다.
@방울이맘-g9m2 жыл бұрын
귀한영상 잘봤습니다
@paran822 Жыл бұрын
71년도때면 국민학교 2학년때네요. 외가집 조치원을 가기위해 기차를 많이 타고 갔는데 학교가기전에 동대구역이 아니라 대구역에서 탔을듯 하네요. 추억의 대구, 세월은 흐르고 부모님은 연로하여 돌아가시고 저희도 늙어가고 추억은 남네요. 저 동성로 거리를 수없이 다녔을텐데 기억엔 별로 없네요~
@tribe5761 Жыл бұрын
💥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감동) 옛 추억에 잠기네요!!
@아델-b1u Жыл бұрын
저 시대땐 많이 어려 거리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한일극장만은 또렷이 기억나네요^^ 그리고 교동시장의 모습도 어렴풋하게 비슷 하고... 바나나나 토마토도 요즘은 없는 품종이라 그맛이 그립네요^^
@정원묵-v1s Жыл бұрын
추억을 되살려주신 시간여행자님 고맙습니다 ^^ 님 말마따나 지금이나 저때나 사는게 힘든건 마찬가지겠죠. 물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요즘 젊은 세대가 저런걸 상상이야 하겠습니까만.. 단지 차이라면 저 시절에도 우울증으로 공황장애로 고생하던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그냥 뇌피셜이었어요
@파프리카-u6o Жыл бұрын
1970년대 초 국민학교 다녔는데, 누나가 저보다 2년 먼저 국민학교 다닐 때 누나 소풍 갈 때 어머니랑 따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누나 담임이 저보고 "나중에 니 담임하면 좋겠다"라며 귀여워 해주셨는데, 나중에 제가 학교 들어가서 보니, 소풍, 운동회에 바나나 한송이, 찬합 몇개에 각종 도시락, 미제 맥주 한박스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담임이 남 선생이면 담배 한보루, 여 선생이면 외제 화장품에 봉투까지 줬으니 선생님들 입장에 귀여울 수 밖에 없었죠. 당시 육성회비 한달 300원인데, 새학기 시작하면 1년치 완납하고, 학교 행사 있으면 어머니 와서 도와주고 하니까 부모님 덕분에 국민학교는 아주 편하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paran822 Жыл бұрын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이었죠~ 지금은 사라져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도 추억은 추억으로 남으니까. 저도 누나랑 6살 차이나는데 누나소풍때 따라가서 찍은 사진이 있더라구요. 그리운 시절^^
@masalee13262 жыл бұрын
교동시장 골목 그 공간속 어디에 아버지가 계신다 생각하니 감회가....
@낭인-g3i Жыл бұрын
이거참...눈물 이... 대한극장. 시장길...사라진 기억인줄 알았는데...
@e-2694 Жыл бұрын
평리국민학교 1학년때네.평리국민학교 앞 서구청 자리가 그 당시 연못이었는데.아련한 추억...
@제갈공명-d1j8 ай бұрын
저는 60년생 남산국민학교 대성국민학교 원대국민학교 최종졸업 계성중1년 서울로 전학 서울서 중고등나오고 서울 모의대졸 피부과 전문의 대구처자와 결혼 군의관 공군 대구 K2 비행단 3년 복무 지금 제대후 서울서개원 남산국민학교때 평리동으로 소풍갔습니다 그때 그기는 산 들판 완전 야외였는데
@준삼-b7x7 ай бұрын
큰못이라고 불렀죠. 도롱뇽들이 많았던...
@이통영-y9v7 ай бұрын
그당시 달성군은 대구시가 아니였는데 달성군청이 서부정류장 바로 앞에 있었고 서부정류장이 바로 대구시와 달성군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70년대의 일이고 1960년대 서부정류장은 지금의 대구대 (당시 한국사회사업대 (한사대) 당시는 사회복지라는 용어가 없어 사회사업이라고 했음) 대명동 캠퍼스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캠퍼스 부근은 공동묘지와 논밭만 있었습니다
@이태환-k9n6 ай бұрын
@@준삼-b7x 매립고 아마 아파트 다 들어섰지요. 연애상남밭(향나무밭)도 있은 기억
@이태환-k9n6 ай бұрын
@@이통영-y9v 1960년대 서부정류장은 내당주차장이라고 했지요.내당사거리부근.. 한사대가 인근에 있기는 했지요. 거긴 대명동이고..
@찐찐-s2v6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게다가 칼라영상이라니. 많은 생각이 드는 고마운 채널이네요~.
@외로운늑대-w1g2 жыл бұрын
너무너무 정겹고 아름 답네요~~ 지금은 살기는 편한 세상이지만 사람들 마음은 너무 삭막해지고 평안이 없이 살고 있죠ㅜㅜ 저때로 한번 돌아가서 살아보고 싶네요
@김병기-v9o Жыл бұрын
1971년도 풍경이 아니다.. 71년, 대구역 근방은 정비가 되었고, 차도는 전부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70년대 초에 동대구역이 새로이 완공된, 현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미르말뫼사람 Жыл бұрын
그러네요! 그리고 반야월 여관골목은? 그때도 대구백화점은 있었던 같은데?
@니릴리-y6q Жыл бұрын
맞아요 60년대 사진들고 온거같음
@신평신평이 Жыл бұрын
69년도 경주 기차타고 소풍갓는데 선생님께서 기차역 이 16개라고 .. . 증기차는 아닌것 같네요 60년대 한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