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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백기천'이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뜻으로 12살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의 삶의 모토였다. 당시 6두품 집안이었던 최치원은 왜 그처럼 어린 나이에 조기 유학을 떠났을까? 그것은 그 당시 6두품 계급의 한계성에 있었다. 신분에 의해 오를 수 있는 관직에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외국의 유학을 보편적으로 만들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관직에 올랐다. 마침 그때 전국적으로 민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황소의 난이 그 중 하나다. 황소의 난을 물리친 이른바 '토황소격문'은 최치원이라는 인물을 중국은 물론 국제적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20대 후반 조국을 위해 신라로 귀국한다. 그러나 최치원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신라였다. 그는 왕에게 시무10조와 民本의 사회 계혁안들을 계속해 올리며 신라의 회생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개혁의지는 당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후에 새로운 왕조 고려의 통치이념으로 그 의지는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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