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과 런던 사이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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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J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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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2011년, 폴란드 바르샤바
통통한 기대였다. 호텔을 빠져나와 상점이 있을만한 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도로가 너무 한산해 '혜성이 떨어지기 전 지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는 너무 과장이 심하지만, 혼잡하던 도로가 한꺼번에 그렇게 일괄적으로 텅텅 빌 수 있다는 것, 주변에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그 위를 걷고 있는 게 나뿐이란 게 기묘했다.
혼자 살아남은 좀비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텅 빈 도로변 인도를 2킬로쯤 걸었을까? 결국 공항에까지 이르렀다. 그제서야 드문드문 보이는 자동차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인간은 쉽게 혼잡함을 불평하고 타인의 존재를 진저리치지만 이 세상에 나 혼자 뿐이라 생각되는 감정은 아주 공포스러운 것임을 깨달았다.
공항조차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다. 이미 휴가를 갈 사람들은 진작에 떠나버린 공항은 썰렁했다. 출국을 기다리는 들뜬 얼굴들보다는 마지못해 어디론가 출장을 가야 하는 무표정한 사람들 몇몇으로만 채워진 듯했다.
공항 안에서도 장을 볼 만한 슈퍼는 발견하지 못했다. 한 나라 수도의 공항 내 편의점조차 문을 닫는 기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모두가 문을 닫는 게 ‘정상’인데 ‘비정상’적으로 공항을 이용하는 소수의 사람들 탓에 마지못해 문을 연 듯한 식당 두 개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 중 한 곳으로 들어가 기름져 보이는 뭔지도 모르는 폴란드 음식을 주문했다. 튀긴 돼지고기와 양배추 샐러드 같은 것이었는데 돈까스도 슈니첼도 아닌 그저 살찔 것 같은 애매한 맛이 났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요 며칠 있었던 일을 기록하려고 메모장을 꺼냈다. 눈이나 손이나 귀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성격이라면 혼자 밥 먹는 일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 편하기도 하다. 애써 상대방과 대화를 이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모습으로 음식을 입에 넣어도 민망하지 않으며, 식사 속도를 조절하지 않아도 되니까.
메모장을 펼치니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그 친구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몇 분 동안이나 아아… 뭐였지… 하며 고민하다 아! 하고 떠올려 두 글자를 적었는데 거짓말처럼 눈 앞에 그가 나타났다.
그도 밥 먹을 곳을 찾지 못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나보다 좀 똑똑한 그는 식당과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은 순간 공항으로 직행했다 했다. 모든 게 다 닫아도 공항은 열려 있어야 하는 공간이라며.
그렇군… ‘열려 있어야 하는 공간’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것이로군…
마침 그도 음식을 주문했는지 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활짝 싱긋하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동석해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최대한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론”이라고 답했다. 그가 기다란 상체를 천천히 접듯이 자리에 앉았다. ‘역시 북유럽 사람들은 키가 크구나’ 감탄한다.
그가 유독 눈에 띈 것은 차림새 때문이었다.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복장에 관해선 거의 전무하다 싶을 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론 그들 나름의 스타일은 있으나 차려 입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달랐다.
어느 날은 회사에 한 쪽엔 노란 양말, 한 쪽엔 오렌지색 양말을 신고 나타났고, 자주 H&M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얇은 광택 블랙 점퍼를 작음직하게, 무릎 위 기장의 반바지는 헴을 말아 올려 입었다. 짧게 면도한 머리도 매일 조금씩 묘하게 달라졌다. 늘 신경 쓴 게 분명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 샌들에 발목 양말을 신는 남자를 (예의바르므로) 속으로 안타까워할 것 같은 스타일의 남자였다.
성격은 ‘나이스 가이’의 전형. 채식주의자에,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 늘 활짝 미소를 짓고, 싫은 소리나 욕은 여간해선 안 할 것 같은 사람… 패스트푸드점이 아닌 일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도 쟁반이 보이면 빈 그릇을 모두 부엌까지 옮겨주는 성격의 남자였다.
어르신들과 여자들은 ‘참 사람이 착하네…’ 하며 엄마 미소를 짓지만 남자들은 “저 쉬퀴 뭐야” 할 만한 캐릭터였다.
노테는 “아… 또 그 스웨덴 녀석은 오늘도 예의상 미소를 날리며 뭘 도와줄까 하겠지..." 하며 그의 간지러움을 투덜댔다. 핀테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나는 녀석의 지나친 나이스함이 견디기 힘들어”라며 동의했다.
재밌게도 이성에게 호감이 될 만한 성향이 동성에겐 반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너무 선량한 것도 흠이 될 수 있다니... 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인 듯 하다.
나는 혹시 그가 게이가 아닌지를 강렬하게 의심했다. 나중에 직접 슬쩍 물어보니 그는 자주 듣는 말이라며 별로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하하 웃었다. 여자 친구가 주말에 폴란드로 놀러오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이런 저런 분위기가 게임업계에서만 쭈욱 일한 사람이 아니란 게 느껴졌다. 골수 게이머가 아닌 게임 번역가는 의외로 많다. 물론 게이머이면서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게임 번역가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지만, 전자보다 후자가 부족한 사람이 많기에 게이머가 아닌 게임 번역가들이 존재한다.
그는 한때 영화에 심취했었고, 도쿄와 뉴욕에 산 적이 있고, 이따금 일본 정부기관에 북유럽 이야기를 기고한다고 했다. 문화적 소양이 깊고, 뼛속 깊이 도시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대화는 영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최근에 영화 박물관을 다녀왔다고 했다.
“나도 예전엔 하루에 서너 편의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광이었어.”
“오 그래?”
그가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근데 지금은 아냐.”
“어째서?”
“음… 어느 순간부터 감독과 배우의 필모그라피를 외우고, 영화의 장면 장면을 쪼개어 숨은 의도를 파헤치는 일련의 활동과 사람들의 지식 대결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어.”
“……”
“그 모든 게 영화의 본질을 죽이는 행동 같이 여겨졌거든… 영화 평론가는 과연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도 그 중 하나였어.”
그의 말투에 사실은 과거형의 문장이 아님이 느껴져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그는 내게 재택 근무만으로도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어째서 현장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현장에 나와야 사람을 보잖아. 가끔은 이렇게 바깥 바람을 쐬는 것이 몸은 더 힘들어도 정신 건강에 좋은 것 같아.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있고,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보고, 다른 직원들에게서도 많이 배우잖아.”
해외 출장이라 신난다는 말은 제외했다. 유럽인들에겐 국경의 개념이 너무 작아 그런 것에 흥분감을 표시하는 것이 어쩐지 좀 쑥스럽게 여겨졌다. (얘네들도 공짜 여행이라며 신나하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유럽에서 사는 거 어때?”
“좋지. 사람들이 하도 다양해 재밌어.”
“정말 다 다르지. 네 눈엔 더 다르게 보이겠다.”
“응. ㅎㅎ… 근데….”
“응.”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음… 아다시피 난 여기에서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잖아. 동유럽인도 서유럽인도 북유럽인도 아니니….”
“그래.”
“그래서 내 눈엔… 음… 북유럽이나 서유럽인들이 좀….”
“괜찮아. 말해.”
그가 온화하게 웃었다.
“동유럽인들에 비해 너무 Spoiled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
“물론 그래. 우린 너무 배가 불렀지.”
“응. 어제만 해도 러시아 친구는 점심을 10분 만에 먹고 급하게 사무실로 돌아가더라고. 내가 점심 시간이 30분 아니냐며 왜 그리 서두르냐 했더니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잘 해줘야지 하며 얼른 갔어.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애는 거의 40분을 채우고도 사무실에 빨리 돌아가기 싫다며 괜히 마트 주변을 산책하더라고… 허허….”
“하하하… 걔는 진짜 못 말린다.”
출장 온 친구들 대부분이 개인사업자, 즉 프리랜서였기에 퇴근 후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매일 나만큼 많은 양의 일을 처리하는 친구는 없는 듯했다. 그들에겐 내가 ‘지독한 워커홀릭, 못 말리는 한국인’ 정도로 비춰지는 듯했다.
프랑스어 테스터는 출근 후 근무 시간 땡 하면 곧장 일을 시작하는 (한국인에겐 지극히 당연한) 내 모습에 “스위스 사람 같다”며 혀를 내둘렀고, 독일어 테스터는 내 빠른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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