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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욥32:1-5
제목: 건강한 프레임의 중요성!
설교: 엄인영목사
들꽃푸른샤론교회 주일오전예배(241222) 실시간 방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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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요약
1. 욥이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자 참다못한 엘리후가 나섰습니다. 엘리후는 연소해서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을 꾹 참고 듣고만 있었는데, 듣다 보니 “어른들도 별 것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포도주를 담은 가죽부대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엘리후의 마음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2. 엘리후가 욥을 비판하는데, 엘리후도 결국 욥이 지은 죄가 있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차원이었습니다. 엘리후는 “당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것만 봐도 당신은 죄인이 틀림없다.” 고 했습니다. “당신 죄는 당신이 알아서 회개해야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네가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맞는 거다. 이렇게 알려주고 때리시란 말이냐?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당신은 당신의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야. 당신이 맞을 짓을 해서 맞아놓고 끝까지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면 되겠느냐? 당신 잘못은 당신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3. 또 엘리후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욥에게 알려 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본인에게 직접 깨달게 할 수도 있고, 그것이 안되면 꿈과 환상으로 깨닫게 하시고, 그것도 안되면 천사가 와서 깨닫게 해서 어떻게든지 그 영혼을 멸망치 않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깨닫게 해서 “내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져주셨고 빛 가운데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간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엘리후의 말은 보편적으로는 맞지만, 욥의 경우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4. 엘리후는 나아가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였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니까, 당신을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주시려고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이 죄를 범할 때 깨달을 수 있도록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 의인이 어둠의 세력들에게 고난받는 경우입니다. 경우가 다릅니다. 엘리후도 세 친구들처럼 “의인도 고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겁니다.
5. 엘리후는 욥을 악인들과 한패라고 단정하면서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는 욥은 위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평가하신 욥을 악인과 한패라고 하고 위선자로 몰아세우는 악한 짓을 했습니다.
6. 인과응보의 틀 안에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하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인과응보의 결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례 요한도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까 예수님도 큰 죄를 범한 자가 되는 것이고, 바울도 평생 고난과 고통이 끊이질 않았으니까 큰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또 12사도가 다 순교했고 초대교회 교인들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인과응보의 틀 안에서 보면 모두가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죄가 있어서 순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단지 인과응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는 수준은 고난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7. 예수님 당시에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예수님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인데,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그 아비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본인의 죄도 아니고 아비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이렇게 고난의 원인이 다양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8. 프레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레임이라는 것은 세상을 보는 틀이나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나 상황에서도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봅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어떤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프레임, 좀 더 성숙하고 수준높은 프레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9. 특히 고난을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난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는 인과응보라는 프레임으로 욥의 고난을 보고 해석하니까 잘못된 해석을 낳았습니다. 욥의 고난은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는 프레임으로 봐야 제대로 보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십자가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프레임으로 욥의 고난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욥의 고난을 제대로 보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 no sweat no sweet! “고난 없이는 영광의 면류관이 없다”는 이 프레임이 성경의 가르치는 건강한 프레임이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프레임입니다.
10. 엘리후의 말을 종합해 보면, 세 친구들보다는 진일보한 측면이 있습니다. “욥이 만약 죄를 지었으면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알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꿈이나 이상으로 분명히 알려줬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천사라도 보내셔서 알게 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다 욥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시치미를 뚝 떼고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뻑뻑 우기니, 죄 위에 죄를 더하고 있다는 거지요. 이런 엘리후의 말은 욥에게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엘리후가 지금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이 판사였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11. 오늘 우리도 엘리후와 같은 실수를 할 때가 종종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프레임에 빠져서 그 창문으로만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면서 함부로 평가하고 오해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이런 엘리후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샤론의 교우들은 언제나 십자가의 도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나와 이웃에게 닥치는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성숙한 신앙인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