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보고 왔습니다. 백제 유물은 왠지 슬프다고 하던데 미륵사지 석탑은 정말 웅대하고 멋진 백제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분홍이네-i5i3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에서 제일 일 잘하는 공기관은 문화재청인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고 정직한 모습들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문화재 정립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야의 모든 분들이 애써주신 덕분에 우리 역사가 더 빛을 더해 간다는 것,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전해줄 역사를 지금 이 시간에도 기록해 주시느라 애 많이 쓰신다는것 다 압니다! 모두 힘 내십시요!!
@Judsking392210 ай бұрын
그곳에도 도둑놈들과 비리가 무지하게 많습니다.
@but20002 жыл бұрын
어제 익산 미륵사지 다녀왔어요. 정말 인상적이더군요. 푸르른 들판에 서있는 석탑이 자연과 어우러져 넘 아름다웠고 곳곳에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이 많은 것도 좋았어요. 박물관은 깨끗했고 유물들도 국보급이 많아 간만에 좋은 관람했습니다.
@생활행복4 жыл бұрын
내 어린시절 무심코 봤던 미륵사지.항상 봐왔기에 무덤덤하게 봤는데.내가지나쳤던 한자리 한자리가 그렇게 역사적으로 뜻이있는곳이었다니 세롭게 느껴지내요. 왕궁터도 세롭게 자리매김 해야겠습니다.왕궁이란 동네도 너무 홍보가 안돼있고요 대한민국에 어디 면소재지 이름이 왕궁이란 이름이 있던가요?지금도 왕궁면은 천년전부터 면소재지 입니다.익산시 왕궁면..
@yangy91894 жыл бұрын
훌륭한 계획이며,복원작업 이였던것 같습니다. 관계자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게임플레임완수6 жыл бұрын
잘 보았어요. ^^ 꼭 가보고싶네요.
@virtualinsanity87306 жыл бұрын
최대한 원형을유지한 복원 과정과 구부재가 80프로이상이라는점이 너무 멋집니다
@Seongseo-x2o4 жыл бұрын
명품배우 강신일
@김프로-x2b2 жыл бұрын
어릴때 해체전의 모습을 봤던게 생생한데 그새 20년이 넘게 흘러서 멋지게 복원되었네요. 세월이란..
경찰 전문배우님 반갑습니다^^ 문화유산을 소개해주시는것이 잘어울리시네요 목소리까지도 저 작업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고생하셨을지 짐작도할수없지만 정말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준도르-q4s6 жыл бұрын
문화재 복원의 의의는 그 모습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에 있기에 앞으로도 미륵사지석탑과 같이 정확한 학술 조사 등을 통해 전통기법으로 문화재를 복원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virtualinsanity87306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 문화재복원의 역사를 다시쓸 익산미륵사지석탑 빨리 보고싶네요
@진진진-u2m6 жыл бұрын
작년 여름에 보고 왔는데 정비가 끝났다니 얼른 가서 보고 싶네요.^^
@junhyuk90004 жыл бұрын
한국의 피사의사탑이네요 ㅎㅎ 지나친 추정복원으로인한 훼손보다 무한한 영감을 줘서 이게 더 좋은거 같습니다
@godiamond96192 жыл бұрын
해설허시는 분 자주 뵈었음해여~♥
@koreanheritage2 жыл бұрын
앞으로도 더 좋은 콘텐츠로 만나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 문화유산채널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람설정까지!!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TheRPMx4 жыл бұрын
다른영상 댓글에서 왜 저렇게 복원했냐는 댓글들이 많았었는데 여기서 해설 히니주시니 이해가 갑니다. 시멘트 발라둔건 그당시 일본도 최신의 소재라고 했는데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을까요? 그래도 쓰러지기 직전인 탑을 무너지지않게 해둿기에 오늘날 볼 수 있어서 다행 입니다
@조성빈-k7p6 жыл бұрын
저 사찰 그대로 복원을 하면 대박이겠다
@오리-p6g4 жыл бұрын
백제 장인 아비지가 세우고 현재에 사라진, 미륵사지와 황룡사지를 복원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불교국가도 아니고 기독교,천주교와 각종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세상이라 아마 불가능할 듯...
@sadasfasdf4 жыл бұрын
@@오리-p6g 종교가 판치는 세상이라서 복원을 못하는건 아닙니다. 복원을 못하는 이유는 1. 역사학자들의 반대: 복원을 하는데 가장 힘이 필요한 역사학자들이 현재 삼국시대 건물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재창조가 물다피하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2. 나무 부족. 조선시대의 건물들은 모두 금강송을 써왔는데 그렇기에 현재 복원 나무로 금강송을 안쓰면 부실 공사라는 편견이 팽배함. 3. 예산 부족. 미륵사는 동양 역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목탑이 존재했던 절이기에 복원 비용이 많이 든다. 4. 심주석등 문화재 훼손이라는 종사자들의 반대: 기록이 부족하고 복원시에 천년이 넘은 터와 돌 위에 복원을 하게 되는데 그 복원이 훼손이라는 주장
@onestepahead26306 жыл бұрын
헉!! 강신일님!! 익산에 언제 오셨던가요 ㅠㅠㅠㅠ 촬영오실 줄 알았으면 뵈러가는거였는데...
@이원준-j8v6 жыл бұрын
전북익산 미륵사지탑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된 호남 유일의 적멸보궁 당연히 미륵사지 사찰도 그자리에 원형 복원 지어지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baerinhee4 жыл бұрын
강신일 아저씨 해설 잘하네
@새옹지마-c2c6 жыл бұрын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를 보고 대충이라며 한민족의 민족성이 원래 그렇다는 스스로의 민족을 비하하는 어리석은 글을보고 몇자끄적여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거처 우리나라에 전래 됐듯이 탑의 형태도 그렇습니다. 인도에서는 흙을 이용한 봉분 형태 중국에서는 나무를 이용한 전각형태 그것이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을 이용한 석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각각 그런 자재들이 그곳에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전래된후 삼국시대 한반도의 초기탑들은 중국의 전각 모양을 돌로 본떴기 때문에 단지 그런 구조가 생기는겁니다.(미륵사지석탑,분황사모전석탑등) 그러던것이 통일신라가 되어서 한민족 고유의 석탑형태(불국사3층석탑)를 갖추고 꽃을피우게 됩니다. 대충대충이라는 표현과 그게 민족성이라 그렇다는 비약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스스로를 모르는 멍청한 소리입니다. 일제가 한국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위해 만들어낸 이론이 한민족 타율성론이니 당쟁이니,이씨조선(이조)이니 임나일본부니하는것들이 한민족 비하 이론입니다. 그러한 식민사관의 관점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날조하기위해 조선사 35권을 이미 1938년에 지들 기준으로 편찬합니다. 그게 한국 역사 날조에 이용됩니다. 한국은 40년후인 1978년도나 되서야 한국사 25권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게 되고 그때부터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위해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 근대 한국 역사학자들도 일본의 조선역사교육아래 성장하신분들이라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던것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세대가 몇번바뀌면서 민족 정체성이 그나마 회복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민학교를 초등학로 바꾸고 너무늦어 구분기준도 애매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친일파를 숙청하자는등 오늘날에도 이런의견들을 제시되는게 그러한 맥락이라 보면 될겁니다. 당파싸움이나 하며 민족스스로 발전할수 없었다는 이론이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한민족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대표적인 이론입니다. 당쟁이란 왕이 다스리던 봉건주의 사회에도 가신들이 참여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합리적인 토론과 이를 정치에 반영하던 보다 확대된 민주정치의 한형태로 보게되죠. 한민족은 작지만 강하고 대단한민족입니다. 동방예의지국,퇴계,이기일원론의 율곡,유교의 꽃을피운것도 화엄과 대중불교, 불교의 꽃을피운것도 중국민족이아니라 바로 한민족입니다. 세계최고의 과학적인 문자를 창제한것도 한민족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민족을 비하하는 어리석은 의견들을 볼때마다 아직도 일본의 식민교육에서 완전히 벋어나지못했구나하는 개탄을 합니다
@KBKim-jt6uj6 жыл бұрын
우리 역사 통틀어 백제가 공예 기술 수준이 제일 높은듯. 저 금색 사리 디테일한거 봐라. 일본이 물건 잘만드는게 백제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크흠..
@WisassyMissАй бұрын
원나라가 태워버린 목탑도, 정비가 시급합니다
@maha-windy30854 ай бұрын
미륵사지가 조선시대보다 천년은 더 과거인데도 더 우월한듯.
@임환균-z8f6 ай бұрын
미륵사지석탑이랑 금동대향로는 꼭봐야함
@대왕세종이도4 жыл бұрын
문화재를 망가트리는데는 한순간인데 복원에 들여가는 시간은 어마어마하구나...
@윤경화-m2f6 жыл бұрын
미륵사지 ᆢ 전체를 다 복해하시오ᆢ
@동네형-y9w7 ай бұрын
사리함도 같이 넣어주세영.
@ofparasite6 жыл бұрын
강신일님 뭔가 발굴 복원 책임자 느낌.
@미니애-s7h6 жыл бұрын
익산사람인데요. 지금은 가지 마요 막상 가면 좀 휑합니다.
@이게뭐라꼬-c3r4 жыл бұрын
원래부터 휑했는데 새삼스레
@dy5hxf7yw33 жыл бұрын
탑 보러 가는건데 주변이 휑하니까 가지말라하네 ㅋㅋ
@forget45456 жыл бұрын
신라에 멸망당한 망국의 역사라 남아있는 유물유적이 별로 없음ㅠ
@이상-f3e6 жыл бұрын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겠지만 부재가 많이 갈렸다는 느낌이 드네요. 최대한 살리는 방향의 복원이었길 빕니다.
@metalkokorea4 жыл бұрын
조선의 위정자들과 땡중들은 저런 거대하고 위대한 사찰이 무너지는 데도 아무 조치도 안 하고 일본인들이 했다니. 이제와서 일부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윤경화-m2f6 жыл бұрын
찬란한 백제문화는 신라에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왜냐 신라하고는 비교할 수없는 고도로 발달되 문화였기에 ᆢ
@munc904 жыл бұрын
신라 파괴설보단. 임진 파괴설이 더설득 할만한데.... 왜냐 하면 유물로보나 기록으로 보나 태종 때까지 고을 사찰로 존재했다고.
@youngjunyoon16 жыл бұрын
씨발, 식민지 한국전쟁 지나면서 얼마나 수탈당하고 파괴가 되었겠나.....힘을 길러야한다. 군사력은 물론이고 민주주의, 문화의 힘이 융성한 국가로....
@강인규-e1w6 жыл бұрын
어서 가설물 해체해주세요~
@송칠호-y5g5 ай бұрын
미륵아 너의 이름을 뜻하는 75개 댓글이 올랐네
@theisapen53655 ай бұрын
사리는 DNA 검사를 안하나요? 누구의 사리 인지..
@wenmi77866 жыл бұрын
백제자료가 너무 적어요ㅜㅜ
@박인우-b1d4 жыл бұрын
팔봉
@vedo70654 жыл бұрын
잘한다 농촌에는 보수할집이 넘쳐나는데 ㅉㅉ
@짱구는목말러-z4x5 жыл бұрын
미륵사지 석탑 일제가 파손한거 아닌가?
@ranomu86064 жыл бұрын
미륵사터는 그 훨씬 이전부터 버려져 있었고 관리가 안되어 대부분 무너져 있었습니다 물론 시멘트 이전에 뒤에 조선시대에 벽돌로 보강 해놓은 부분도 있습니다 당시 시멘트로 보강안했으면 완전히 다 무너졌을거에요
@大韓帝國-e3h4 жыл бұрын
미륵사지 석탑을 진짜로 파손시킨건 조선왕조지 숭유억불이라는 이데올로기때문에 불교문화재들을 그냥 냅뒀고 거의 폐허수준의 미륵사지 석탑과 석굴암을 일제가 공구리질로 그나마 원형이라도 살려놓았던건데 공구리질이라도 안했으면 완전히 무너져서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었을것
옜다 관심 일본이 그렇게 좋으면 떠나던가. 어차피 그럴 머리랑 재력도 없으니 평생 너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해준 부모를 원망하며 살던가
@새옹지마-c2c6 жыл бұрын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거처 우리나라에 전래 됐듯이 탑의 형태도 그렇습니다. 인도에서는 흙을 이용한 봉분 형태 중국에서는 나무를 이용한 전각형태 그것이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을 이용한 석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각각 그런 자재들이 그곳에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초기탑들은 중국의 전각 모양을 돌로 본떴기 때문에 단지 그런 구조가 생기는겁니다.(미륵사지석탑,분황사모전석탑등) 대충대충이라는 표현과 그게 민족성이라 그렇다는 비약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일제가 한국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위해 만들어낸 이론이 한민족 타율성론이니 당쟁이니 임나일본부니하는 한민족 비하 이론입니다. 일제가 식민통치하면서 한국 역사의 조선사 35권을 이미 1938년에 지들 기준에서 써놨고 그게 한국 역사 날조에 이용된겁니다. 한국은 40년후인 1978년도나 되서야 한국사 25권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게 되고 그때부터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위해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 근대 한국 역사학자들도 일본의 조선역사교육아래 성장하신분들이라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던것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민족 정체성이 그나마 회복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친일파를 숙청하자는등 너무늦어 구분기준도 애매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에도 이런의견들을 제시되는게 그러한 맥락이라 보면 될겁니다. 당파싸움이나 하며 민족스스로 발전할수 없었다는 이론이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한민족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대표적인 이론입니다. 당쟁이란 왕이 다스리던 봉건주의 사회에도 가신들이 참여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합리적인 토론과 이를 정치에 반영하던 보다 확대된 민주정치의 한형태입니다. 한민족은 작지만 강하고 대단한민족입니다. 이기일원론의 퇴계,율곡,유교의 꽃을피운것도 화엄과 대중불교, 불교의 꽃을피운것도 중국민족이아니라 바로 한민족입니다. 세계최고의 과학적인 문자를 창제한것도 한민족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민족을 비하하는 어리석은 의견들을 볼때마다 아직도 일본의 식민교육에서 완전히 벋어나지못했구나하는 개탄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