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태평양전쟁 시리즈에 원폭 관련 특집이 있었습니다. 그 특집에선 원폭의 작동 원리를 세밀하게 다루었고, 맨허턴 계획도 상당 부분 다룬. 방송 시간 제약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을 소개합니다. 오펜하이머 관련 내용도 조금 포함해.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 미국에 과학기술 제공을 통해 미국의 대규모 물적 지원을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미국의 시혜-자비만이 아닌 엄격한 기브앤테이크. 2차대전 초 미국이 보관중이던 1차대전 때 구식 구축함 약 50척 인수받는 댓가로 영국은 전세계 요충지 해외 기지들의 미군 사용 허가 99년과 교환했으며 약 8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20년 정도 남았지만 연장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표적인 곳은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샤, 대서양 한복판 어센션 등으로 미국과 영국이 함께 사용 중. ---------------------------------------------------> 2차대전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넘긴 과학기술과 해외 기지 사용권, 사실 미국의 운수대통 성격도.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원자핵 변환을 통해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에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본격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우라늄광 확보 등 물리적 조건에서 미국 우세.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미국에서 행해진 맨허튼 프로젝트. 실제 핵심 중의 핵심 주도한 두뇌는 유럽 국적이거나 막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 출신 과학자. 1. 중성자 예측 및 확증 ( 영, 캠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및 채드윅 ) 2. 중성자가 실제 핵 연쇄 분열 일으키는 우라늄 연쇄 핵분열 발견 ( 독-헝가리, 오토한 + 마이트너 ) 3. 핵폭발 임계질량 ( 영 ) 4.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실시된 인위적 우라늄 연쇄 핵분열 ( 이태리, 페르미 ) -------------> 맨허턴 프로젝트, 가장 결정적 단계. 5. 임계 핵폭발 일으키는 폭축 렌즈 ( 헝가리, 폰 노이만 ) ----------------------------> 무기로 실제 사용 가능한 단계로의 전환에서 가장 중요. ( 채드윅 + 페르미 --------------> 2차대전 전 이미 노벨 물리학상 수상, 오토한은 후에 노벨상 수상했지만 마이트너는 여성 물리학자로 수상에서 제외. ) ( 마이트너는 맨허턴 프로젝트 참여 권유받았지만 거부했고, 전후 독일-스웨덴에 머물다 친지 대부분이 살던 영국에 최종 정착 사망. DNA-이중나선 노벨상 수상 제외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과 함께 노벨상의 큰 오류.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이 가장 결정적 데이터. 캠브리지 연구소측 크릭-왓슨은 허가받지 않고 사실상 도용했고 + 도용 사실을 인지한 캠브리지측이 프랭클린 연구소측과 타협해 프랭클린 연구소측 상급자와 함께 3명이 공동 수상. 프랭클린은 DNA-이중나선 이후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 ) ( 현대 컴퓨터 인공 지능의 시작 앨런 튜링의 스승? 성격의 노이만 역시 2차대전 이후 노벨상 수상했을 것. ) ( 오펜하이머는 노벨상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 미국에서 태어난 순수 미국 과학자들은 최고 관리자 또는 하부 기술적 작업 성격 + 안전한 핵무기 개발 장소와 막대한 자본 투입이 미국의 핵심 기여. 오펜하이머. 하바드 대학 화학과 졸업. 영국 캠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로 유학. ( 캠브리지는 뉴턴의 모교인 이론 물리학의 성지이자 + 원자핵-전자-양성자-중성자 모두를 확증한 실험 물리학의 메카 ) ( 캐번디시 연구소 내에서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며 노벨 물리-화학상 수상 약 30개 + 2차대전 후 분리된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그 유명한 DNA-이중나선 ) ( 분리된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수상한 노벨 화학-생리의학상 약 15개 ) ( 캐번디시-분자생물학 연구소에 유학왔던 독일-소련-덴마크-미국-인도-이스라엘 등 다른 국적 과학자들도 노벨상 수상. ) -----------------------------------> 캠브리지 유학 후 오펜하이머는 독일 괴팅겐 대학의 막스 보른 밑에서 공부. -----------------------------------> 막스 보른은 2차대전 터질 무렵 영국으로 망명. 2차대전 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현 양자역학의 기본 입장인 파동함수를 확률 밀도로 처음 해석 양자역학 초창기 대가 중 한 사람. -----------------------------------> 함께 망명한 막스 보른의 딸이 캠브리지 또는 옥스포드 대학의 독일어-문학? 전공한 -----------------------------------> 영국 학자와 결혼해 낳은 딸이 팝스타 올리비아 뉴턴 존, 노벨 물리학상 수상한 외할아버지 보다 훨씬 유명한 손녀. 미국이 왜 오펜하이머를 맨허튼 프로젝트 최고 과학기술 책임자로 임명했겠습니까? -----------------------------------> 미국 과학자 중에서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던 오펜하어머는 영국-독일 유학한 경력. -----------------------------------> 오펜하이머가 유학한 캠브리지 캠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는 사실상 핵에너지 과학이 시작된 곳이며, -----------------------------------> 오펜하이머의 독일 스승인 막스 보른은 영국에서 영국 핵무기 프로그램 자문. 핵임계질량은 핵무기 개발의 핵심 중 핵심. 영국이 구한 임계질량은 약 10~20kg 수준, 그 상태에서도 핵폭탄 전체 무게는 b29에 겨우 탑재할 수준. 만일 임계질량 수치가 당시 폭격기 탑재 불가능한 수치였다면, 세계대전 상황에서 그런 곳에 자원 투입할 국가 지구촌에 없음. 따라서 핵임계질량 확인은 기초 중의 기초, 독일은 임계질량 구할 능력은 있었지만 멍 때렸고 영국은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임계질량 확인에 나섰던.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 본격 핵무기 개발에 나섰고 충부한 자원과 인력으로 완성시킨.
@hangledotcom Жыл бұрын
@@scz8333단순한 밀덕에 대한 호기심인데요 댓글으류직접 바로 타이핑한건가요?? 복붙인가요?아님 미리 요점을 정리해 놓은 건가요?
@scz8333 Жыл бұрын
@@hangledotcom 미리 정리한 글을 올렸습니다. 여기 올린 글은 원래 태평양전쟁 원자폭탄 영상에 원폭 개발 과정 소개로 올린 글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펜하이머 관련 부분은 없었기에, 오펜하이머 부분 및 미국내 맨허턴 계획을 주도한 유럽 과학자 부분을 추가해 올린 겁니다.
@hangledotcom Жыл бұрын
@@scz8333 매 대댓글마다 그렇게 길게 복붙하면 다른 댓글 읽는데 스크롤 엄청 돌려야 돼요 ㅠ 대댓말고 그냥 댓글에 달면 스킵 가능합니다.훨씬 내용을 보기도 편하고.
@scz8333 Жыл бұрын
@@hangledotcom 영상과 직접적 관련 없는 내용은 영상의 댓글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대댓글로 올려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올릴만한 필요가 있는 적절한 위치에 대댓글로 올린 겁니다. ------------------------------------> 여기 영상 제목, 이라크 방공망 초토화 작전. ------------------------------------> 오펜하이머 관련 글을 1차 걸프전 이라크 방공망 초토화 영상에 댓글로 올린다는 것은 정상일 수 없습니다. ------------------------------------> 오펜하이머 관련 궁금하다는 내용의 댓글이 있어서, 그 댓글에 대한 답으로 대댓글 단 겁니다. ------------------------------------> 또한 역전다방의 많은 댓글들에서 보이는 편향적 내용 또는 특정 이념적 입장에 대해서도, ------------------------------------> 반론할 정확한 위치에 반론하는 의미로 대댓글로 올리는 것이 + 영상 내용과 상관 없는 댓글 다는 것 보다 합리적일 겁니다.
@치즈피자치즈추가 Жыл бұрын
걸프전이 미디어 전쟁이라고 하셨는데 전보도 미디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엠스 전보 사건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러한 미디어를 이용하여 원하는(?)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을 안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제국의 통일 전쟁 한 번은 해주실 거죠?
@닥터푸우-y4b Жыл бұрын
마지막 전함의 시대 역시 거함거포는 낭만이야
@bkjeong4302 Жыл бұрын
이미 그 시대는 끝난 뒤 “이미 이것 만드느라 돈 낭비했으니까 아무대로나 써 보자” 는 것이었지 아이오와급이 전략적으로 중요했거나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스펙은 압도적이나, 결국에는 아이오와급마저도 이미 2차대전에 첫 취역했을 때부터 존재할 명분이 없었던 많은 전함 중 하나일 뿐입니다. 차라리 에섹스급 항모를 4척 더 뽑았다면 그게 미 항모전단에 더 큰 기여 (이미 많았지만 그래도 항모가 진짜 주력인데…)
@청인-x9i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 종군기자분 여성기자였지요 걸프전때 대단해요
@Skjdvdm Жыл бұрын
제 45분 돌려주세요..
@방가-d6e Жыл бұрын
역전다방 쭉 보면서 느끼는게 미국은 대체 뭘까요? 혼자 치트키 쓰고 전쟁하는 느낌이네요
@lovelys8639 Жыл бұрын
팍스 로마나처럼 지금은 정말 팍스 아메리카나 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시대네요
@倭寇씇 Жыл бұрын
show me the money. operation cwal.
@S_TRA Жыл бұрын
사실 2차대전 끝난 시점부터 미국은 넘사벽이었죠 ㅋㅋ
@scz8333 Жыл бұрын
2차대전 후 미국의 군사 개입, 사실 제대로 된 승리가 없습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불과 5년 뒤 한국전쟁 비기기로 시작해서 줄줄이 쓴 맛.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이 왜 베트남에서 패배성 철군했고, 중동에서 겉보기 사상누각 승리 수렁에 빠졌겠습니까? 냉정하게 본다면 미국은 사상 최약체 패권일 수도, 패권 장악 확인 도장 찍고서 고작 5년 후부터 저런 허약한 패권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2차대전 후 미국이 대응에서 실패했던 중국 공산화,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한국전, 최초로 패배성 철군 당한 베트남 및 수렁에 빠진 중동 개입에 대해. 중국-베트남 --------> 저들의 반외세 투쟁은 왜 좌익의 최종 승리로 끝났을까요? ----------------------------> 저들 내부의 우익은 왜 좌익에게 패배당했거나, 아예 존재감 자체가 없었을까요? 중국-베트남 공산화 모두에서 서방측 책임은 치명적 결정적. 그에 비해 한반도의 반식민지 항일투쟁은 폭 넓은 좌우 스펙트럼, 왜? 중국-베트남, 특히 베트남과 한반도의 반식민 독립투쟁의 좌우 스펙트럼 차이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2차대전 직후 미국이 압도적 국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제대로 된 개입과 승리가 없었던 원인에 다가설 수도. 1. 중국 공산화 : 미국이 아무리 장개석 지원해도 막기 힘들었던. 아편전쟁 이후 반식민지 상태의 굴욕을 당한 중국인들 입장에선, 자신들에게 치욕을 안긴 주도 세력은 영국-미국-일본 등 우익 자본주의 국가들. 국공 내전 당시 미국-영국 지원받는 장개석 아닌 미영일 모두의 적인 소련의 지원받는 모택동에 민심 쏠린. 즉 중국 공산화는 아편전쟁 이후 서방 주도의 중국 반식민화 침략에 대한 중국의 저항으로 해석할 수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미국이 장개석 정부 지원했지만, 부패한 장개석을 파고든 교활한 모택동 무리들에게 어리석은 중국인들이 현혹된 공산화라고 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2. 베트남 민족주의는 왜 좌익-공산주의 일색이었나? 베트남의 반프 독립투쟁, 프랑스의 동맹이자 식민지를 보유했던 미영은 지원할 수 없음. 베트남의 반프 독립운동이 지원받을 유일한 곳은 미영프 모두의 적인 공산주의 소련 밖에 없었던 상황. 즉 베트남 민족주의는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닌, 국제정세 제약 조건으로 좌익-공산주의를 반식민지 투쟁의 유일한 도구 선택 몰려버린. (철수하는 프랑스 대타로 개입한 미국, 민심을 얻지 못했기에 패배성 휴전, 휴전 후 철군, 철군 후 공산화.) 베트남 공산화 이후 얼마 뒤, 바로 미국과 수교하고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으로 명백. 3. 왜 한반도의 항일투쟁은 좌우익의 폭 넓은 스펙트럼이었나? 한국전 --------------> 2차대전 후 처음 터진 대규모 국지전 아닌 국지전. 미국 이외의 모든 강대국들이 초토화된 상태에서, 미국은 단독도 아닌 유엔군과 함께 하고도, 거기다 소련의 직접 개입 없는 상태에서, 49년 막 공산화 직후 아직 내부 혼란 상태였던 중공 상대로도, 미국은 비겼습니다. 대한민국 내부의 수 많은 미국 우호 세력이 없었다면 그 마저도 힘들었을 수. (한국전에서 초라했던 중공 상대로도 승리하지 못한 미국이, 21세기 G2로 변해버린 중국 상대로 동북아의 전면전에서 승리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베트남과 한반도, 어떤 차이점이 있었겠습니까? 지난 세기 초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러시아-소련 남하 막는 미영의 방패로 선택된 일본. 하지만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게 뺨싸대기 쳐맞은 이후 미영은 비로서 우리 항일독립 투쟁 지원 시작. 만일 진주만으로 일본이 미영의 적이 되지 않았다면 미영은 우리 항일투쟁에 그 어떤 지원도 없었을 것. 즉 진주만 기습 이후 미영이 일본의 적이 된 조건 하에 우리 우익 독립투쟁이 미영의 지원을 받은 것. 대한민국엔 천만다행으로 미국의 항일 독립투쟁 지원으로, 해방 후 38선 남에서 대한민국 우익이 미국 지원을 정당화할 명분을 획득. 그런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터져 미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있었기에 비기기 정도로 마감된 것. 만일 한국전쟁이 베트남과 유사하게 철수하는 일본 대타로 미국이 개입하는 형식이었다면,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과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베트남 처럼 한반도 공산화로 마감 가능성. 그런 상황에선 한반도의 민심은 미국에게 향할 수 없기 때문. 모든 인간은 시대 조건이라는 제약에 예속됩니다. 4. 중동의 반미 반영 반서방 정서 걸프전-이라크전-아프칸전, 겉보기엔 엄청난 대승. 하지만 최근 아프칸 사태에서 보듯 사상누각-임시방편 수준 승리에 지나지 않는. 아프칸에서 미군과 미국인 철수 완료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이 함락당할 정도로 황당 사태. 이라크 역시 미국 철수 즉시 원위치 될 가능성 큰. 십자군 부터 21세기 현재 까지 서방측의 무력 개입이 잦았던. 투르크 시절 발칸반도와 스페인 일부 점령한 시기를 제외하면 서방측의 중동 개입이 주였던.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 2차대전 후 철수하는 영국 대타로 개입한 미국이었기에 민심을 얻을 수 없는. 근본적 해결책은 미영을 필두로 한 서방측이 무력에 기반한 중동에서의 이권 유지를 포기하는 것. 아프칸에 1,000조 투입했는데도 부패한 정권과 군 때문에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복귀했다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하는. 미국이 퍼부은 1,000조 중 아프칸의 헐벗은 주민들에게 지원된 비중은 아마 극히 일부이고, 거의 대부분은 미군수업체-국방부-미민간군사업체 쪽으로 투입되었을 것. 미국은 중동인들의 마음을 얻는 곳에 별 투자하지 않았기에 미군과 미국인 철수 완료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이 함락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인. 현재 미국이 어떤 깃발을 내걸고 중동에서 군사개입 하건, 명백한 것은 21세기 현 시점에서 미국은 중동인들에게 불청객임을 부인하기 힘든. 중동에서 미군이나 영국군 1명 전사할 때, 그 상대편은 아마도 수 십배 비율로 죽어나갈 겁니다. 저런 식으로 중동인들 마음이 열릴 수는 없기에, 저런 식의 중동 개입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 되는. 이런 관점에서 2차대전과 그 후 미국의 군사개입을 바라본다면, 2차대전은 미국이 마땅히 수행해야 했고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던 전쟁이었지만, 2차대전 이후 잦았던 미국의 군사개입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던 성격이라 초래된 차이 아닐까 합니다. 2차대전과 종전 후 미군의 정신력과 태도 차이. 대공황-풍요 경험 차이라기 보다는, 왜 전쟁 군사개입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정당성과 국민적 합의 여부. 그리고 미국의 군사개입을 바라보는 개입 대상 지역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태도 차이. 2차대전 때 미군은 어디서건 환영받았지만, 2차대전 후 미군은 자신들을 배척하는 이들도 만나게 되는. 1차대전 윌슨 민족자결주의에서 벗어나 프랑스 대타로 개입하는 등의 미국의 변화가 초래한. 그리고 사실 미국은 아직 독일, 영국 수준의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단독으로는 특정 시점 최강 적성국과 붙어본 적도 없는 지극 취약함도. 1. 미국이 독일 수준의 경험을 하려면, 미국을 제외한 사실상 전세계인 중-러-유럽연합과 동시에 투쟁해 저들을 그로기로 몰아야. 그것도 2번 연속을. 미군과 미국 민간인 수 백만이 희생되면서, 적들에게 수 천만의 인명피해를 강요하는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지만 미국이란 공동체는 한국전이나 베트남전 수준의 인명 피해 에도 즉시 휴전이나 철군 여론 빗발침을 고려한다면 미국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2. 미국이 영국 수준이 되려면, 앞으로 수 백년 매 시기 가장 강력한 적성국을 상대로, 단독이건 동맹과 함께건 투쟁해서 최강의 적을 모두 패배시키고 승리해야만. 그러나 이미 한국전-베트남전 비기기-패배성철군으로 불가능해졌고, 그 기초 단계를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미국은 영국 레벨이 될 수 없습니다. 영국은 패권을 잃을 때 조차도 적대세력의 패권 장악을 저지하며, 같은 언어-문화-가치관을 가진 미국이라는 대체 세력 자체도 파생시키면서 패권을 평화적으로 잃었기에.
@scz8333 Жыл бұрын
2차대전 종전 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거의 함께 싸웠습니다. 투입한 병력 규모에선 미국이 압도적이었지만, 전장의 다양성 측면에선 의외로 미국이 뒤진 면도. 미국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쟁을 영국은 경험했으며, 같은 전투에서 조차 미국이 뒤쳐진 부분도. 1. 제트기-미슬 시대의 함대 방공전 -------------------> 미국 실전 경험 없음, 영국만이 포클랜드전으로 유일 포클랜드전에서 시스키밍 대함미슬 요격에 실패, 종전 뒤 세계 각국은 본격 근접방어 체계 도입 시작. 2차대전 후 실전 함대방공전에서 적기를 격추한 경험은 영국 해군만이. 2. 잠수함의 적함 격침 -------------------> 미해군 아직 없음, 단 2건의 기록 중 1건이 영국 핵잠의 기록 잠수함 등장 이후 21세기 현재까지 잠수함 : 잠수함의 수중 전투에서 적 잠수함 격침 기록 역시 45년 종전 직전 북해에서 수중 항해중이던 영 잠이 수중 항해중이던 독 유보트 격침한 사례가 유일한 전과. 3. 대함미슬을 함대공 미슬로 요격 ----------------------> 미해군 전과 없음, 오직 영 해군이 걸프만에서 사상 최초 요격. 걸프만에서 재취역한 미 전함 아이오와급이 포함된 미 함대를 호위하던, 영 방공구축함 T42가 이란의 실크웜 대함 미슬을 시다트 함대공 미슬로 요격한 것이 유일한 전과. 당시 그 함대 소속 미 이지스함의 CIWS는 근처의 미 함정 을 향해 오발 사고. 또한 그 무렵 걸프만의 다른 미 이지스함은 이란 여객기를 적기로 오판 격추해, 민간인 수 백명 이 희생되는 대참사. 뿐만 아니라 그 무렵 걸프만의 또 다른 미 수상함은 고무보트 자살 폭탄 테러당해 함정 옆구리 구멍 뚫려 바지선에 태워져 후송. 분명 미 이지스함이 영 T42 보다 고성능인데 막상 실제 상황에선 저런 일 터진. 4. 전차 : 전차, 최장거리 격파 기록 -----------------> 1차 걸프전 때, 영 챌린저1 약 4.7KM 거리에서 적 전차 격파 저 당시 미군이 병력과 투입 전차 수에서 압도적이었지만, 소수의 영국 전차부대가 최장거리 격파 기록. 사막 지형이라 가능한 기록. 한반도의 굴곡진 지형에선 저 정도 거리에선 적 전차 관측할 곳도 별로 없음. 걸프전 영국과 미국의 전차전 전과는 이렇습니다. 영국은 192대? 전차 투입하고서 300 : 0 전과를 기록했고 특히 전차전 교전 손실 0 달성. 미국은 영국 보다 압도적인 수량의 전차 투입, 끝 자리 수에서 0을 하나 더 붙여 투입하고 600 : 2 전과, 하지만 전차전 전투 손실 2 발생. 우크라이나 전쟁 진행중인 2023년,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에서 실시된 나토 기갑부대 경연에서, ----------------------------------------> 주력 전차 MBT 부분 성적, 1위 영국 챌린저2 + 2위 스페인 레오파드2 + 3위 미국 에이브럼스2 5. 아프칸 등에서의 최장거리 저격 기록 -------------------> 캐나다 영국이 주도하며 미국이 뒤 따르는. 투입 병력은 미군이 압도적이지만 소수의 영국군과 더욱 소수의 캐나다군이 우세한 저격 기록. 캐나다 1위-3위-4위 영국-2위 미국-5위 캐나다의 1위 기록은 2위 이하 기록과 차원이 다른 초장거리, 기억으로 약 3.5KM, 2위~5위는 2KM대 기록. 미군이 투입 병력은 많음에도 실전 기록은 저런. 2차대전 이후 최강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 냉정하게 평가하면 덩치에 비해 내실 부족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지난 70년. 투입한 병력과 보유한 장비 및 과학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믿기지 않는 비효율적 개입과 철수 반복된. 21세기 현재, 서방측에서 미군이 가장 거대하고 장비 또한 최상이지만 미군의 질적 수준이 그렇다는 아무런 보장 없고,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아직 까지 경험하지 못한 단독으로 최강 적성국과 전쟁에서 승리 기대하기 힘들 것. 생각해보길, 2차대전 이후 그리고 21세기 현 미국이 단독으로 중국이나 러시아 국경 근처나 국경을 넘어 침공해 재래식 전쟁 벌여 승리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지를. 미국과 달리 영국은 안쑤시고 다닌 대륙이나 국가 찾기가 힘들 정도, 그것도 지극히 적은 병력으로 치명적 승리를 거두며. --------------------------------------------------------------------------------------------> 미국은 아직 단독으로는 최강의 적성국과 붙어 승리해본 경험도 없는. 21세기 미 핵항모전단
@김재민-v4b4k Жыл бұрын
최소 50분은 보장해주시지말입니다?
@Mrthinkbeforewrite Жыл бұрын
여기서 말하는 boys는 남자들인데 좀 철없는 느낌(전쟁터니까) 한 스푼, 창의적인거 한 스푼 들어가서 보이즈 라고 하는 거 같내요. 악동 느낌? 저는 북미 오래살아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ㅋㅋㅋ
@몸부림-b3c Жыл бұрын
보이는적은 두렵지않다. 보이지않는 적이 두렵지. 정글>사막😢
@robokim9790 Жыл бұрын
중앙군사령관의 별명이 휘몰아치는 노먼
@황영준-b4k Жыл бұрын
1나라에 한 20나라의 최정어군과 당시 신혓 무가와 미국 제례무기(전시장에가야할 무기들 총동원 햇던 전쟁 소모전과 최상무기들이 다 나온 전쟁
@프로짜치러 Жыл бұрын
양아치 양키의 이라크 뒤통수전쟁
@하지마이상해 Жыл бұрын
실패하는 군대는 늘 자만하고 오만한가봐요...
@수진순국학기공수련라 Жыл бұрын
미군 기병사단과 기갑사단이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세요 ^^??
@GEZZI Жыл бұрын
이거 괜찮나 했던 m60전차 이야기도 나오려나
@user-ssrshin Жыл бұрын
왜 이시기에 대한민국 군은 준비태새를 했는지 궁금해요
@Yoda012 Жыл бұрын
미국이 다른쪽에 큰힘을쓰고 있어서 북한은 이때가 반백년에 한번오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수도 그래서 반대로보면 우리는 위기니 준비테세 한것일듯 북한이 이상황을 노린것처럼 중국이 러시아와 올림픽기간중협상하고 날잡고 우크 처 들어간것도 우크 대만 양쪽 수비한다고 미국힘이 절반씩 나눠져있을때 다이다이로 먹거나 한쪽은실패해도 다른한쪽이 먹을확률 높다라고 생각은 한거같는대 실상은 미국이 전부 알고 무기만 우크보내고 군인은 아시아에서 안움직였죠 분위기 심상치않을때 미리 알레스카공군 일본에 다 왔음 중국이 대만 침공 원래계획이면 이때였는대 미국이 생각과 다르게움직이고 미리 공군까지 전부오고 준비다하니깐 잠시 침공보류하고 지금까지 이어진게 지금상황같음
@es1727 Жыл бұрын
당시 휴가정지 명령 떨어졌습니다
@user-ssrshin Жыл бұрын
@@es1727 저하구 비슷한 군번이신듯 이시기 부터 어설픈 개구리복이 지급 되었습니다 민무니 2벌 개구리 1벌
@루카치-u3m Жыл бұрын
이스라엘 : ??? 난 왜 때림???? (황당)
@PINQUBE Жыл бұрын
미사일과 항공전 그리고 사막을 돌격하는 기갑으로 표현되는 전쟁
@gustavjung63 Жыл бұрын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각국 정상에 핫라인으로 쉬지 않고 직통전화로 각국 정상들을 설득하여 다국적군을 규합하고 사막의 방패/사막의 폭풍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아버지 부시의 노력에 대해 별 언급이 없네요. 아들 부시가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아버지 부시와는 다른 철저한 일방주의로 이라크 침공을 한 것과 너무 비교되는 훌륭한 전화외교였습니다.
@SMAsiklaoid Жыл бұрын
이렇게 보니까 오히려 이라크가 타협했으면 오히려 미국에 더 큰 타격을 줬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aspiresamori9696 Жыл бұрын
러시아에도 저렇게 할수 있지 않았을까?
@전차-d9f Жыл бұрын
6.25때 대만이 덕받았네요.
@민들레-j5s Жыл бұрын
누구나 줘 터지기전엔 계획이 있다~~!!!
@sangnamja3135 ай бұрын
세계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녔는데 그걸 지휘하는게 세계최고의 현대전 능력을 지닌 지휘관들 ㄷㄷ
@조나단-ectrs Жыл бұрын
도대체, 언젯적 얘기를 ......
@woonphilkim Жыл бұрын
7:40 노태우 정부도 지금보다 더 외교관계를 고민했군요
@TheThirdEYE637Shinhan Жыл бұрын
결국은 미국측에 들어가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 우리에게 더 도움된다는 결론인거죠. 어떤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결국 중요한것은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가 모든 것을 수렴하죠. 대한민국은 미국측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 언제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였죠..
@박용덕-q6t Жыл бұрын
중국이나 일본과 국지전이라도 발생한다면 최단기간에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끌어올 전략과 실행할 조직이 필요할거 같은데 국방부에서 그것도 준비하고 잇겟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