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주는 책-문희공 전기소설 (조선의 스승 劉敞) 실록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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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 전하, 용서하시옵소서. 국가장래를 생각하니 만감이 서려 죄를 지었나이다. 개국해서 10여년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나라는 바로 서고 든든한 반석 위에 올라서서 전도양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금상은 세자에게 양위하겠다 하셨습니다. ”
“ 양위라고? 이제 마흔 다섯, 젊은 나이에? 이유가 뭐 라든가? ”
“ 세자도 왕위에 나갈만큼 모든 걸 갖추었으니 물려주고 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만....”
“ 다른 이유가 있구먼? ”
“ 황공합니다. 태상왕께서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금상을 용서해 주옵소서. ”
“ 그만하면 용서한 것인데 뭘 어떻게 더 하란 소린가? ”
“ 진정으로, 진심을 다해서 용서를 하시진 않으셨잖습니까? ”
“ 뭐라구? ”
이성계가 화를 냈다. 권근이 당황하여 수습을 하려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성계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금상은 골육상쟁을 벌인 원흉이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닌 두 번 씩이나. 벌인만큼 똑같이 당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나라가 흔들리고 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물론 그 아들을 원수보듯 계속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관상 용서하고 화해한 것처럼 만들었다.
“ 전하! 아직도 금상의 가슴 복판에는 말뚝만한 대못이 박혀있습니다. 그 가슴을 안고 국가를 자랑스레 통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지요. 양위하고 물러나겠다는 건 바로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라 봅니다. ”
권근은 전전긍긍이었지만 유창은 거침 없이 태조 앞에서 직언하고 있었다. 태조는 묵묵히 들으며 침통하게 술잔을 비워냈다.
“ 알겠다. 내 가슴 복판에도 그 대못이 박혀있노라. 내 가슴의 대못은 누가 뽑아준단 말이냐! 물러가라. ”
더 이상 말을 붙일수가 없어 두 사람은 물러 나왔다.
저녁이 다 돼서 금상은 덕수궁에서 태상왕이 찾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금상은 즉시 덕수궁으로 나갔다.
“ 불효자, 태상왕 전하를 뵙습니다. 원기를 다시 찾으신 걸 보니 기쁘기 이를데 없습니다.”
“ 전위를 하겠다고 발표했다면서? ”
“ 송구하옵니다. ”
“ 어쩨서 나라를 전하는 대사(大事)인데 과인에겐 미리 상론하지 않았느냐? ”
“ 용서하옵소서. ”
“ 조정의 일을 나에게 전해주는 대신들도 없는데 오직 옥천군 유창과 길창군 권근만이 달려와 울면서 고했다. 금상을 모시는 충신은 오로지 이 두 신하 뿐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왕은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았느냐 귀밑머리가 희어졌느냐.그래서 학문이 통하지 못하였나 사리를 알지 못하는가? 갑자기 물러나 편안히 쉬려하는 것은 그 무슨 뜻인가? 내가 백수를 다한 뒤에는 왕 마음대로 하는걸 그냥 놔두겠지만 아직 내가 죽기 전에는 두 번 다시 전위란 말은 듣고싶지 않으니 그리알아라. ”
“ 지은 죄 망극하옵니다. ”
“ 누가 뭐라든 금상, 너는 자랑스런 내 아들이며 이 아비의 모든 것이다. 과인은 너 밖에 없다. 부디 성군이되고 명군이 되어라. ”
태조의 그 말 한마디에 임금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 도승지! 그대의 왕에게 가장 큰 대접에 술을 가득 부어 권하라. ”
임금 곁에 있던 도승지 황희에게 명했다. 임금은 스스로 잔에 술을 따라 황희에게 주고 태상왕에게 먼저 바치게 하고 자기도 받아 마셨다.
역시 사람의 목숨은 무한하지 못한 것이어서 강건하던 태조도 앓아 눕는 날이 많아졌다. 금상을 불러 깊은 감동을 남기고 난 뒤 2년 후에 태조는 노환으로 창덕궁 광연루에서 눈을 감게 되었다. 국상(國喪)이 났던 것이다. 1408년 5월 24일이었고 보산 74세 때였다.
국장에 맞게 장례 의식을 위한 각부서가 정해졌고 유창은 모든 장례 일체를 치루고 감독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다. 임금이나 왕비가 서거하면 장례를 완전히 다 마칠 때까지 보통 삼 사개월 걸린다. 장례를 치루기 위한 각부서가 정해지고 임금의 시신이 능에
묻힐 때까지 대궐 안에는 빈청(賓廳)이 마련된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장지(葬地) 선정이 이뤄져야 한다. 장지 명당을 알아보기 위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 하륜이 각처를 돌며 탐색한 끝에 경기도 구리(九里)로 정해졌다. 붕어한지 두 달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런 다음에는 능지 축조공사를 해야 한다. 수백 명의 인부가 한달 넘게 공사를 해야만 축성이 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발인(發靷)을 하게 된다. 발인은 4개월 후인 9월 7일에 빈전에
서 백관을 솔거한 태종 임금이 나가서 시신과 혼백을 떠나보내는 견전례(遣奠禮)를 행하고 발인을 했다. 마침내 태조는 구리 건원릉에 묻혔다.
보통 왕릉이든 어떤 무덤이든 둥근 봉분(封墳)은 금잔디가 입혀지게 돼 있는데 태조의 건원릉은 잔디로 덮힌게 아니라 억새풀로 덮었다. 태종의 뜻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이성계의 고향은 함경도의 영흥(永興)이었다. 태종은 그 고향집 뒷마당에서 흙을 퍼오게 하여 무덤을 덮고 뒷마당 뒤에 울창하게 피던 억새풀을 가져오게 하여 심게 했던것이다.
장례가 완전히 다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왕성으로 돌아가는데 유독 한 사람만 남았다.
수릉관(守陵官)으로 자청하여 제수받은 유창이었다. 건원릉 수릉관을 자청하여 능지기가 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북청으로 귀양 간 막내아우
유치(劉治)의 일로 항간에 유창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이상 기류에 대한 금상의 심려를 혜아려 조정을 떠나있으려는 것이다. 수릉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3년상(喪)이 끝날 때까지 무덤 속에 있는 태상왕과 함께 지내며 능을 지키는 관리이다. 수릉관은 아무나 되지 못한다. 학덕이 높고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제의(祭儀)에 달통하고 무엇보다 망자(亡者)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깊으냐를 따져서 명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태조를 지키는 신하로 유창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없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생전에 태상왕(태조)의 지우(知遇)와 신임을 제일 가까이서 받은 재신(宰臣)이고 금상(태종) 역시 가장 신임하는 대신이었기에 수릉관에 명한 것이었다. 그의 나이 56 세 때였다.
왕릉인 건원릉에는 능 주위에 사당 빈전 사무소 등 부속 건물들이 여러채 들어서고 수릉관 밑에는 수릉사 외에도 여러명의 관리와 하인들이 있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새해를 맞았다. 임금은 중신들과 함께 부왕의 능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자 집무소 강당에 들려서 수릉관 유창을 위로하고 점심 수라를 들었다.
“ 새해부터는 전번에 유도감께서 새롭게 만든 삼장(三場) 통고법(通考法)에 의한 과시(科試) 제도에 따라 문과 중시는 치뤘으니 이번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를 치러 우수한 무장을 뽑아내시오. ”
“ 분부 받잡겠습니다. ”
“ 아다시피 우리나라 삼면의 바닷가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그치지 않아 곯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태조대왕의 홍산대첩으로 왜구를 응징한 뒤부터는 나라가 평안해졌지만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그동안 원의 지배를 받아오던 북방의 여진족(女眞族)들이 머리를 들고 소란스럽게 하기 시작했소. 국방에 만전을 기해야 할 때입니다. 실력있는 무장들을 길러내어 나라의 안전을 맡기려면 무과시험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뽑혀야 하니 유도감께서 각별히 유념하여 뽑도록 하시오. ”
임금은 유창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 분부 받들어 행하겠나이다. ”
문과.무과 과거시험 제도를 새롭게 제정한 사람은 유창이었다.제 1회 문과시험은 이미 시행했고 무과시험을 실시하란 상감의 명이었다. 무과중시(武科重試)는 3년에 한번 씩 초시(初試)를 실시하여 중앙에서 70명,지방에서 200 명의 합격자를 뽑아 향후 7년동안 복무를 시킨 뒤 7년에 한번씩 승진시험을 실시하는데 이것을 복시라 했다. 초시,복시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임금 앞에서 전시(殿試)를 보는 영예를 얻게 되어 있었다.
석달이 지나갔다. 과시준비로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추석이 돌아왔다. 추석이라해도 능을 지켜야 하는 것 때문에 집에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추석날 오후가 되었는데 능에서 일하는 사인(舍人)이 방으로 들어와 수릉관 도감판사를 찾아 온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했다.
“ 어디서 온 사람들이라더냐? ”
“ 댁에서 오신 분들이라 했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
“ 아니야.내가 나가 보지. ”
유창은 밖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능의 정문(旌門) 뒤 공터 잔디밭에는 일곱명이나 되는 유창의 직계 식구들이 찾아와 서있었던 것이다.
“ 이게 웬일이냐? ”
“ 아버님,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
큰아들 인통(仁統)이 절을 하며 아버지 손을 잡았다.
“ 형제,그리고 손자들까지 다 왔습니다. ”
“ 추석 차례를 지냈으면 조상님들 계신 선영으로 가서 차례를 다시 드리고 성묘나 할 일이지 여긴 왜 다 왔느냐? ”
“ 지금 저희들은 선영에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아버님. ”
자식들과 손자들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 갔다.
“ 사당 혼전에 계신 태조대왕은 잠시후에 뵙기로 하고 우선 아버님부터 뵙겠습니다. 절 받으세요. ”
금년 37세된 큰아들 인통이 먼저 절을 했다. 그에 따라 인통의 자식들인
18세 난 첫 째. 지주(智周. 經歷公派시조) 둘 째인 16세,신주(信周.兵使公派조) 셋 째인 14세 계주(繼周.佐郞公派시조)가 함께 절을 했다.
이어서 인통의 형제들인 둘째 34세,인제(仁悌.郡守公派시조). 셋 째 31세.인길(仁吉.監察公派시조)이 절을 올렸다. 넷 째. 28세.상우(尙友.御使公派시조)는 출계(출계를 해서 보이지 않았다. 인통의 다른 형제들은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술잔를 받고 자손들을 둘러 본 유창은 만감이 서리는듯 자신의 수염을 쓰담았다.
( 아아,나에게도 벌써 이렇게 장성한 손자들이 있었단 말인가? 내 나이 올해 몇인가? 쉰여섯. 56세런가 무상한 세월이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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