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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41] 이것이 진짜 진주성전투다(황진vs일본 역사상 all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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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필 한국사

황현필 한국사

Күн бұрын

태백광노가 되어주셔서 영화 《독립전쟁》 제작에 참여해주세요.
/ @hwang_history

Пікірлер: 1 200
@hwang_history
@hwang_history 11 ай бұрын
*황현필의 [임진왜란] 시리즈 몰아보기!* _하단 링크를 클릭하세요._ kzbin.info/aero/PL0lEEgMCRI86oI5zbT1bem9tki9KkmEII
@user-kx4gl3ni9q
@user-kx4gl3ni9q 7 ай бұрын
하.. 저렇게 용맹한 황진 장군님 죄송합니다 고등학교 국사 과목에 나오지도 않으셨는데 참.. 암담합니다 황진 장군님 대한민국 지켜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황진 장군님을 알려야 합니다
@dhkim5609
@dhkim5609 3 жыл бұрын
진주가 고향이고 진주성대첩에 관심이 많아 황진장군의 그 업적을 조금은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잘 정리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황진장군과 김천일등 위국헌신하신분들의 위패를 더 크게모시고 진주성 가장높은곳에서 추모할수있기를 고대합니다. 그리고 진주성대첩 당시의 김시민 황진장군과 시민들의 위국헌신 모습을 더 잘 재현할수있는 충분한 공간 만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Su-jm9zz
@Su-jm9zz 2 жыл бұрын
오.진주..양반도시 서울에서 응원합니다♡♡
@user-lv7fg6sn7c
@user-lv7fg6sn7c 6 ай бұрын
진주성 제일높은 곳에 추모 제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user-no5sf3ty3h
@user-no5sf3ty3h 3 жыл бұрын
황현필선생님...당신이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그동안 몰랐던 내용 이렇게 상세히 알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진정한 역사교육은 이런것이죠. 2차 진주성 대첩은 패전의 역사라 수치로 생각했는데...이제부턴 승전의 역사라 기억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donghyounkim3262
@donghyounkim3262 2 жыл бұрын
그당시 현장에 있는 듯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50중반의 아재지만 황선생님의 방송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들이 꼭 봐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전투 전에 명군은 진주성 동북방의 성주에 약 3만여 명을 주둔했다. 6월 14일 조선군 5만여는 함안에 도착해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일본군은 병 4천으로 이를 패주시켰다. 5일 패주한 일부 조선군은 진주성에 들어갔다. 명군은 원호하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일본이 항복권고를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일본은 29일 귀갑차를 이용해 성벽을 찔러 진주성을 공략했다. 함락한 진주성에서는 倡義使・金千鎰, 그 아이・김상건, 경상우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진주부사・서례원, 의병장・고종후, 김해부사・이종인, 거제 현령·김준민 등의 무장을 포함한 전원이 전사했다. 싸움의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의심스럽게 집결하던 5만 조선군이 너무 약했다. 이것은 모인 의병이 금전 목적이며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거북차. 상자 차를 만들어 불연의 소가죽을 치고, 안에 병사(라고 말하는 것보다 토목 작업원)를 실은 장갑차이다. 이로써 조선의 투석과 화살을 막아 성벽을 부수었다. 거북차는 적어도 전투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다. 전투기록이 없는 거북선이 조선수군의 기함처럼 날조된 것은 일본의 거북차에 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user-gdhutrfhfg
@user-gdhutrfhfg 3 жыл бұрын
황진 장군이야말로 성웅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있으셔야 할 분이네요. 황 선생님 강의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잘 알게 돼서 영광입니다.
@user-bc5cg4gw3z
@user-bc5cg4gw3z 3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 당시 왜놈들에 맞서 싸우신 장졸 모두가 영웅들이지만 으뜸은 당연히 이순신장군이고 황진장군은 이순신장군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율장군이나 곽제우장군도 훌륭한분들입니다. 다만 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에 들어가지는 못했어도 게릴라전술로 치고 빠지며 왜놈들을 교란하거나 밤에도 쉬지 못하게 괴롭혀 줬다면 2차진주성 전투의 결과가 달라졌을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분명 있네요.
@David_H_An0408
@David_H_An0408 3 жыл бұрын
사실 그건좀 오버구요 좋은 장군이가한듯요
@user-ie5dk1mw2x
@user-ie5dk1mw2x 7 ай бұрын
@@user-bc5cg4gw3z 전 밖에서 뭐 그런 것보단, 만약 진주성 병력이 조금 더 많았다면 생각이 드네요. 20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시기때 비잔틴이 졌을 때도 병력은 8000~10000명에 해군의 도움까지 있었는데 이건 그보다도 적은 병력이었으니 정말 황진 장군이 없었다면 이만큼 끌어보지도 못했으리라 생각이 듬. 만약 진주성에 더 많은 병력이 주어졌었다면 최소한 비벼볼 순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듬. 고위 지휘관인 황진 장군이 위험에 덜 노출될 가능성도 있었을 거구요.
@user-xb1jy5sh9b
@user-xb1jy5sh9b 3 жыл бұрын
황현필선생님의 세세한 임진왜란사를 다시금 들으면서 우리나라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건들이 다시금 드러나게 되어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저도 모르는 내용들을 강의들으며 항상 새로이 받아들여 가고 있습니다.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님이 모를만한 내용을 알려 드리죠 새로이 받아들이세요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30년 11월 12일 기해 4번째기사, *전라 우수사가 왜군 앞잡이인 향리 사노 등의 실상과 그 처단법을 아뢰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육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육하였으며, 왜노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모든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왜노에게 아양을 떨었으며, 또 왜진(倭陣)이 철수하여 돌아갈 적에 뒤떨어진 적에게 머물기를 정하여 세 곳에 주둔시켜 놓고서, 그를 빙자하여 온갖 흉악한 짓을 다 하였다고 합니다.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26년 7월 15일 정묘 8번째기사 "신이 이순신(李舜臣)과 서로 약속(約束)하고서 한산도(閑山島) 등지에 진(陣)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흉적이 진주를 함락한 뒤로 전라도 연해(沿海)에 사는 백성들이 적이 전라도 지경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소동을 일으켜 관사(官舍)를 태우기도 하고 혹은 창고의 곡식을 노략질하기도 하는데, 도처가 다 그러합니다."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 선조 26년 7월 28일 경진 2번째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이 진주를 침범하였으니 전라도는 마땅히 엄하게 경계하여 적변(賊變)에 대비해야 하는데도 복병장(伏兵將)이 먼저 도망하고, 연해(沿海)의 수령들은 서로 전통(傳通)까지 하며 창고의 곡식을 흩어 무지한 난민(亂民)들로 하여금 왜놈의 형상으로 꾸며 분탕과 노략질을 하게 하였으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처음 작란을 주도한 자를 잡아다가 효수하소서.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26년 8월 2일 계미 6번째기사 이정암이 명군의 남원성 주둔, 왜적의 구례 침입, 왜적 후퇴 등을 알리다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치계하였다. "우리 나라의 난민(亂民)들이 왜인(倭人)의 형상으로 가장하여 빈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하기 때문에 열읍(列邑)에 행회(行會)하여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
@mylife33712
@mylife33712 3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 강의 들으면서 소름 돋고 눈물도 났습니다.또한 나라를 지켜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에 숙연해집니다. 황진장군님 감사합니다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30년 11월 12일 기해 4번째기사, *전라 우수사가 왜군 앞잡이인 향리 사노 등의 실상과 그 처단법을 아뢰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육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육하였으며, 왜노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모든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왜노에게 아양을 떨었으며, 또 왜진(倭陣)이 철수하여 돌아갈 적에 뒤떨어진 적에게 머물기를 정하여 세 곳에 주둔시켜 놓고서, 그를 빙자하여 온갖 흉악한 짓을 다 하였다고 합니다.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26년 7월 15일 정묘 8번째기사 "신이 이순신(李舜臣)과 서로 약속(約束)하고서 한산도(閑山島) 등지에 진(陣)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흉적이 진주를 함락한 뒤로 전라도 연해(沿海)에 사는 백성들이 적이 전라도 지경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소동을 일으켜 관사(官舍)를 태우기도 하고 혹은 창고의 곡식을 노략질하기도 하는데, 도처가 다 그러합니다."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 선조 26년 7월 28일 경진 2번째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이 진주를 침범하였으니 전라도는 마땅히 엄하게 경계하여 적변(賊變)에 대비해야 하는데도 복병장(伏兵將)이 먼저 도망하고, 연해(沿海)의 수령들은 서로 전통(傳通)까지 하며 창고의 곡식을 흩어 무지한 난민(亂民)들로 하여금 왜놈의 형상으로 꾸며 분탕과 노략질을 하게 하였으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처음 작란을 주도한 자를 잡아다가 효수하소서.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26년 8월 2일 계미 6번째기사 이정암이 명군의 남원성 주둔, 왜적의 구례 침입, 왜적 후퇴 등을 알리다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치계하였다. "우리 나라의 난민(亂民)들이 왜인(倭人)의 형상으로 가장하여 빈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하기 때문에 열읍(列邑)에 행회(行會)하여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
@nature5120
@nature5120 2 жыл бұрын
선조 26년 9월 6일 정사 8번째기사 유성룡이 남쪽의 군량 공급 사정과 대책, 유희선 처형 사실을 보고하다 "신이 다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가 기율(紀律)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방자하게 된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었을 때에 전라도 복병장(伏兵將)인 장흥 부사(長興府使) 유희선(柳希先)이 두치진(豆恥津)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병이 처음 그 나루를 건너지 않았을 적엔 나루의 물이 바다에 잇닿도록 넓었으므로 배가 없이는 백만의 적병이라고 하더라도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희선은 소문만 듣고 도망가면서 광양(光陽)·순천(順天) 지경을 지날 적에 적병이 온다고 크게 외쳤으므로 광양·순천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고 난민(亂民)들이 이로 인해 창고를 불지르고 노략질하여 남아난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낙안(樂安)·강진(康津)·구례(求禮)·곡성(谷城)까지도 하나같이 동요되어서 백년 보장(保障)으로 웅부(雄富)하던 지역을 까닭없이 잿더미가 되게 만들었으니 저만 살려고 도망하면서 무리를 현혹시킨 죄는 만번 죽어도 속죄(贖罪)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즈음 장수들이 이미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진주(晉州)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데 단 한 명의 군졸도 동원하지 않았고 도리어 적병의 선구(先驅)가 되어 인심을 동요시켜서 양남(兩南)의 10여 고을을 단번에 쓸쓸하게 만들었습니다
@neonfishplus
@neonfishplus 3 жыл бұрын
지역감정은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입지강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MrWhitengine12
@MrWhitengine12 2 жыл бұрын
진주면 제가 공군 훈련소 받은 곳이라 더욱 뇌리에 꽂힙니다 얼마나 처절했을지...피가 끓습니다!
@user-gl7gr9up5u
@user-gl7gr9up5u Жыл бұрын
지역감정은 허상? 친일세력과 보수권력이 만든 희대의 사기극에 많은 국민들이 희생되었죠!
@user-by2or7tq1b
@user-by2or7tq1b Жыл бұрын
​@@MrWhitengine12 ㅈ
@tae-wonjung570
@tae-wonjung570 3 жыл бұрын
나라가 잘 되려니까, 이런 선생님이 나오셔서 역사를 올바로 이끌어 주신다고 생각됩니다. 이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깨우침을 얻을 것입니다. 아아! 한국은 강성해질 것 같습니다. 아, 진정 고맙습니다. 선생님...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전투 전에 명군은 진주성 동북방의 성주에 약 3만여 명을 주둔했다. 6월 14일 조선군 5만여는 함안에 도착해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일본군은 병 4천으로 이를 패주시켰다. 5일 패주한 일부 조선군은 진주성에 들어갔다. 명군은 원호하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일본이 항복권고를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일본은 29일 귀갑차를 이용해 성벽을 찔러 진주성을 공략했다. 함락한 진주성에서는 倡義使・金千鎰, 그 아이・김상건, 경상우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진주부사・서례원, 의병장・고종후, 김해부사・이종인, 거제 현령·김준민 등의 무장을 포함한 전원이 전사했다. 싸움의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의심스럽게 집결하던 5만 조선군이 너무 약했다. 이것은 모인 의병이 금전 목적이며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거북차. 상자 차를 만들어 불연의 소가죽을 치고, 안에 병사(라고 말하는 것보다 토목 작업원)를 실은 장갑차이다. 이로써 조선의 투석과 화살을 막아 성벽을 부수었다. 거북차는 적어도 전투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다. 전투기록이 없는 거북선이 조선수군의 기함처럼 날조된 것은 일본의 거북차에 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nd_Tree2048
@End_Tree2048 Жыл бұрын
그와중에 떡열이와 그 똘마니들이 이 나라에 또다시 일제의 말뚝을 박으려 하고 있으니
@changwonlee3009
@changwonlee3009 Жыл бұрын
​@@End_Tree2048 4111 20:50 20:50 20:50
@user-nw6sk4pv2r
@user-nw6sk4pv2r Жыл бұрын
​@@End_Tree2048그만해서 좋은 강의듣고 헛소리하지말고
@user-of5uq8cq9h
@user-of5uq8cq9h 3 жыл бұрын
다행입니다. 선생님의 역사 강의를 들음으로써 이렇듯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조들을 알 고 갈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건강한 정신을 깃들게 합니다.
@honey7856
@honey7856 3 жыл бұрын
이런분을 조선일보와 토착왜구들이 공격중이죠..
@dobanri
@dobanri Жыл бұрын
진주성 안에 장수들이 전부 1593에 돌아가신거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조상님들 .
@mylovebye4982
@mylovebye4982 3 жыл бұрын
진주에서 나고 자랐는데 황진 장군님을 처음 들었습니다. 어쩌면 논개 이야기에 그냥 흘려 보냈을지도 모르지요...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다음 영상 빠른 업로드 기대해 봅니다..
@dongihin4647
@dongihin4647 3 жыл бұрын
싸운건 충청병사 충청방어서 군인들입다. 진주목사가 진주성 총지휘관이고요. 황진은 진주목사보다 게급이높은 충청병마사라. 진주목사가 진주성 탈출해야한다는 입장이라고 몰아내고 게급 넢은 황진이 지휘한거고요 성안에 수만 백성들은 탈출한번못하고 왜군놈들이 그냥 몰아놓고 학살한전투입니다. 진주 목사가 계속 지휘하고 탈출했다면 백성들은 살수있었죠
@GMCOMT
@GMCOMT 3 жыл бұрын
@@dongihin4647 그래서 성을 버렷어야 햇다고??이런 븅을 봣나???
@user-qp5rr4lf3e
@user-qp5rr4lf3e 2 жыл бұрын
@@dongihin4647 그렇게 억지로 갇아뒀다면 저토록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겠죠? 뭐 황진장군 혼자만 싸웠나?뭘 가둬여
@chulunjung-dg7kn
@chulunjung-dg7kn 7 ай бұрын
싸운건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의 황진휘하 정예병들입니다.. 그리고 진주시민들은 대부분 죽지않고 구례곡성쪽으로 피난가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저희 조상도 진주에서 넘어왔으니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변명을 위한 거짓 기록입니다. 그래서 황진장군이 역사책에 나오지 않았던겁니다.
@n0780
@n0780 3 жыл бұрын
그당시 진주성안에 있던 6만이 전부 죽었다고 하지요~ 1차 진주성 전투때 진걸로 히데요시가 빡쳐서 진주성에 살아있는건 모두 죽이라고 했다네요. 진주성에서 며칠간 잠도 못자고 싸운 우리 조상님들께 묵념의 시간을 가져봅시다.ㅜㅜ
@blackjaguar1234
@blackjaguar1234 11 ай бұрын
소수 몇몇은 살아남음
@n0780
@n0780 11 ай бұрын
@@blackjaguar1234 기생들은 살려두었을까요?
@user-si5xh2di4c
@user-si5xh2di4c 11 ай бұрын
이런 역사가 있음에도 뉴라이트같은 악마들 친일대두가 이를 모르고 친일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paulryan5294
@paulryan5294 7 ай бұрын
어째 이순신장군이랑 황진장군이 돌아가시는것도 비슷하게 돌아가셨네요
@Darsvader76
@Darsvader76 3 жыл бұрын
19:06에 나오는 장윤 장군님이 저의 10대조 할아버지 입니다. 감사하고 자랑 스럽습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황현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user-xm3yz1zf3g
@user-xm3yz1zf3g 3 жыл бұрын
오모나...
@user-py4fx1vm9v
@user-py4fx1vm9v 2 жыл бұрын
족보가 아직 있습니까??
@hyungjoochoi
@hyungjoochoi 3 жыл бұрын
와... 눈물날라 그런다.. .황진장군 정말 가슴에 새겨야 겠다... 이건 영화로 나와서 전국민이 알도록 만들어야한다 진짜 ㅜ.ㅠ
@puco113
@puco113 3 жыл бұрын
2차 진주성 전투 영화로 꼭 만들어서 청소년들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wa-bp7sg
@wa-bp7sg 3 жыл бұрын
영화 나오면 최소 1000만 찍을듯
@vcapell4370
@vcapell4370 3 жыл бұрын
실상은 당시 명하고 왜가 강화협상 하고있었고 왜군은 토요토미 다이묘서군들이 전부 출정한 전투라 명군 지원없으면 싸우기 힘든 전쟁이고. 진주성 탈출해야한다는 논란도 있었어요.성안에 너무많은 백성들이 있었고 거기 성밖 조선군까지 성안으로 들어가면 권율 명령을 따라야하기때문에 지휘권 혼란도 생기고 . 저때 백성들 무기조차 없었던거로 보여지는데 숫자적으로만 본다면 조선군이 이길수도있는 상황인데 .거이 희생이큰거로 봐선 무기도 없는상황에서 싸움도 못하고 희생당한거로 보여지고요.차라리 권율이 지휘하고 무의미한 전투는 참가 안하는 권율 방식이라 권율이 백성들 탈출시키는게 좋았을법도합니다.
@user-mq1xs7ik9l
@user-mq1xs7ik9l 3 жыл бұрын
아 황진 장군!! 우리는 왜 그를 몰랐을까ㅠㅠ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tae2142
@tae2142 2 жыл бұрын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요 제가 저 당시에 저 자리에 있었다면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리네요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kodol17
@kodol17 2 жыл бұрын
황현필선생님 덕분에 역사를 새롭게 인식합니다. 지금 들어도 우리 조상님들의 고군분투에 가슴이 메어옵니다.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구나) 진주성 제대로 한번 곱씹으며 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in6fn3md5y
@user-in6fn3md5y 3 жыл бұрын
충의공 최경회 장군의 후손으로 몰랐던 역사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myungheekang1862
@myungheekang1862 3 жыл бұрын
정말 재미있어요 전혀 몰랐던 사실들 훌륭했던 조상님들에게 무심했던 자신을 돌아보게해주시는 황현필님 감사하구요 지역감정이란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씀 동감하구요 방송 항상 기대됩니다...
@user-fq8ho6uf2y
@user-fq8ho6uf2y Жыл бұрын
권율 선거이 곽재우 장군이 외곽에서 도와주었더러먄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황진 장군 혼자 너무 애쓰시고 무거윤 짐을 홀로 드셔서 마음이 아픕니다.
@user-gy9to4rj1h
@user-gy9to4rj1h 3 жыл бұрын
저렇게 용맹하게 싸우고 나라를 지켜낸 황진장군님을 국사책에서 본 기억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tofulife
@tofulife 3 жыл бұрын
아..황진장군이시여! 돌아가실걸 알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마지막에 '전사' 라는 단어가 너무 아픕니다. 모쿠소라는 일본의 괴수는 김시민장군과 황진장군의 결정체가 아닐까요. 이토록 훌륭했고 왜란 동안 왜적을 가장 많이 죽이신 장군님의 이름과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장군님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신건가요. 웅치이치전투로 나라를 구하고 무쌍으로 안성을 탈환하시고. 죽을자리인걸 알면서도 진주로 들어가신 장군님... 역사는 바로 쓰여져야합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 새벽에 일하다 영상 보며 그냥 먹먹합니다.. 황현필 선생님. 부디 황진장군을 널리 알려주소서.
@user-ot1vi7lg4m
@user-ot1vi7lg4m 3 жыл бұрын
👍👍👍👍👍
@first3122
@first3122 3 жыл бұрын
이런분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시고 역사책에 이순신과같이 추앙받고 후대에 길히 전해져야 하시고 이순신장군과똑같은 동상및 사원을 걸립해야합니다 역사스페샬에서 다시한번 재조명되야 한다고보고 아울러 영화가제작되어 널리국민들에게 알렸으면 하는바램임니다 대한민국 화이팅
@suny1074
@suny1074 3 жыл бұрын
하... 진주성에 갈 때 마다 슬픈건 조상님들의 넋 때문 일 듯 합니다 슬프다...
@user-iw3yk6xg2z
@user-iw3yk6xg2z 3 жыл бұрын
진주성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네요.
@TheDynamo808
@TheDynamo808 3 жыл бұрын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역사교육을 해야합니다.
@user-kc9dm6rq1l
@user-kc9dm6rq1l 3 жыл бұрын
잘 몰랐던 황진 장군의 애국심과 2차 진주성 전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감동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을 느낌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전투 전에 명군은 진주성 동북방의 성주에 약 3만여 명을 주둔했다. 6월 14일 조선군 5만여는 함안에 도착해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일본군은 병 4천으로 이를 패주시켰다. 5일 패주한 일부 조선군은 진주성에 들어갔다. 명군은 원호하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일본이 항복권고를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일본은 29일 귀갑차를 이용해 성벽을 찔러 진주성을 공략했다. 함락한 진주성에서는 倡義使・金千鎰, 그 아이・김상건, 경상우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진주부사・서례원, 의병장・고종후, 김해부사・이종인, 거제 현령·김준민 등의 무장을 포함한 전원이 전사했다. 싸움의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의심스럽게 집결하던 5만 조선군이 너무 약했다. 이것은 모인 의병이 금전 목적이며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거북차. 상자 차를 만들어 불연의 소가죽을 치고, 안에 병사(라고 말하는 것보다 토목 작업원)를 실은 장갑차이다. 이로써 조선의 투석과 화살을 막아 성벽을 부수었다. 거북차는 적어도 전투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다. 전투기록이 없는 거북선이 조선수군의 기함처럼 날조된 것은 일본의 거북차에 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puco113
@puco113 3 жыл бұрын
2차.진주성 전투..우리 조상님들 정말 힘겹게 싸우셨네요..후방에서 응원 좀 했더라면..역사의 가정이란 없지만 그 전투 중에 안에 있던 병사와 장군들은 응원병을 목 빠지게 기다렸을텐데...
@monkey3-
@monkey3- 3 жыл бұрын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솓구치네요..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화도나고.. 이렇게 위대한 장군님과 병사들이 우리 조상이었다는 사실과 잘 알지 못했던 우리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하게되는 저녁이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Doi0724
@Doi0724 3 жыл бұрын
아재요 ㅜ
@98179820a
@98179820a 2 жыл бұрын
다시도ㅡㄹ 려 보는데 정말 드라마보다 더 재밌고 감동입니다 생생 역사 눈 물까지 솟아지다니 완전 최고강의십니다
@MDkarma
@MDkarma 3 жыл бұрын
ㅋㅋㅋ 이시다 미츠나리 설명 때 ... '세키가하라에서 승리 했으면 이 세키 가문이~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완전 사이다 해설~~ 라임도 멋지고~
@hyuongjeon1641
@hyuongjeon1641 3 жыл бұрын
영웅 황진장군님을 임진왜란 역사에서 알게해줘서 감사합니다.
@vpm8675
@vpm8675 3 жыл бұрын
처절하다는 표현도 부족한 싸움이었네요.. 2차 진주성 전투를 몰랐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short_00700
@short_00700 3 жыл бұрын
황진 장군님 !! 정말 멋진 위인이십니다
@user-vb1hr8lz5v
@user-vb1hr8lz5v 3 жыл бұрын
강의.. 정말 시원시원 합니다. 역사 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en9ys1ve2l
@user-en9ys1ve2l 3 жыл бұрын
진주성이 저렇게 버티는 동안 외부에서 후방을 공격했다면 충분히 수성 성공했을텐데.. 강건너 불구경만한 다른 장수들이 원망스럽네요
@user-mm2ds8dt4f
@user-mm2ds8dt4f 3 жыл бұрын
전 그래서 권율장군은 과대평가 되엇다 봅니다
@dedulus0916
@dedulus0916 3 жыл бұрын
그건 선조나 할 수 있는 생각이구요. 이미 적장이 성을 비워서 인명피해를 줄이라고 충고까지 해줬는데 끝까지 그들과 맞선 이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야지요
@REDFILL1115
@REDFILL1115 3 жыл бұрын
@@dedulus0916 적장 고니시가 한 말이 충고라네.ㅋㅋ 그런것을 기만책 이라고 하는거야.
@user-ui1lv8re9r
@user-ui1lv8re9r 3 жыл бұрын
@@dedulus0916 우리 피흘리기 싫으니까 공짜로줘잖아 님 집에 불한당이와서 아재 나여서 살꺼니까 디지기 싫으면 나가소 하는게 충고임?ㅋㅋㅋㅋㅋ
@user-ui1lv8re9r
@user-ui1lv8re9r 3 жыл бұрын
아마 적병력도 병력이거니와 의병대들의 주전략이 게릴라를 통한 후송대나 후방대 공격이다보니 방비를 했겠죠
@user-mr4by7tu1w
@user-mr4by7tu1w 3 жыл бұрын
이렇게 옛일을 어제 일처럼 되살려서 생생한 역사를 알려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황현필 님 최고의 강연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벅찬 감동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전투 전에 명군은 진주성 동북방의 성주에 약 3만여 명을 주둔했다. 6월 14일 조선군 5만여는 함안에 도착해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일본군은 병 4천으로 이를 패주시켰다. 5일 패주한 일부 조선군은 진주성에 들어갔다. 명군은 원호하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일본이 항복권고를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일본은 29일 귀갑차를 이용해 성벽을 찔러 진주성을 공략했다. 함락한 진주성에서는 倡義使・金千鎰, 그 아이・김상건, 경상우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진주부사・서례원, 의병장・고종후, 김해부사・이종인, 거제 현령·김준민 등의 무장을 포함한 전원이 전사했다. 싸움의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의심스럽게 집결하던 5만 조선군이 너무 약했다. 이것은 모인 의병이 금전 목적이며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거북차. 상자 차를 만들어 불연의 소가죽을 치고, 안에 병사(라고 말하는 것보다 토목 작업원)를 실은 장갑차이다. 이로써 조선의 투석과 화살을 막아 성벽을 부수었다. 거북차는 적어도 전투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다. 전투기록이 없는 거북선이 조선수군의 기함처럼 날조된 것은 일본의 거북차에 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jajajamjom
@jajajamjom 3 жыл бұрын
황진장군을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사 늘 100점이었는데, 대둔산 이치대첩비에서 황진장군을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 또 이런 가슴 먹먹한 황장군의 이야기 또 처음 들었습니다. 😭😭 우리 교과서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쓰는 것인지...ㅠ.ㅠ
@user-KIATIGERS.
@user-KIATIGERS. 3 жыл бұрын
맞습니다.지역감정은 없어져야합니다
@user-nr8sz1hm3l
@user-nr8sz1hm3l 3 жыл бұрын
지역감정은 정치인이 만든 허구 입니다.한명이 거짓을얘기하면 거짓이지하지만 만명이얘기하면진짜가 되는 효과지요.우리는 깨어있어야합니다
@bokhanlee4049
@bokhanlee4049 3 жыл бұрын
실제 다녀보면 없어요 착각임 저 익산 살아요 경주출생 ~ 정치적으로 만든거 정치만 있음 ~ 귀촌 텃세 정도는 어느 지역에도 있음 지역감정 아님 ~ 통증도 뇌가 착각함 오래 지속되면 안 아픈대 뇌각 착각
@user-KIATIGERS.
@user-KIATIGERS. 3 жыл бұрын
@@bokhanlee4049 저도 광주사람이고 여자친구가 부산이라서 부산에서 1년정도살아봤는데 그런것못느끼고잘지내다왔습니다. 그런사람들 어디에있는건지...인터넷만보면많은데ㅋㅋ
@blueskykee4
@blueskykee4 3 жыл бұрын
지역감정을 만든 이가 바로 개대중 전 대통령이죠. 선거에서 안 될 것 같으니, 당시 호남에서도 박정희를 밀어주고 있는 상황이였는데 이때 지역감정을 만들어 호남과 경남을 쪼갠 바로 장본인이 개대중이죠. 북한에게 돈 퍼줘서 핵도 만들어주고... 개 대 중.
@user-vg2fp6nx3o
@user-vg2fp6nx3o 3 жыл бұрын
@@blueskykee4 떠라이시키 몇조해먹은 명박이 욕을하던지, 해먹은거 1도안보이는 최초의 민주적인 대통령을 욕하다니, 이빨뽑아블고싶네...
@user-qm2qi2ei6p
@user-qm2qi2ei6p 3 жыл бұрын
황 선생님의 말씀대로 임진왜란을 공부하고 자세히 아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관심도가 그리 높지는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논개)라는 인물을 통해 임진왜란 때 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구나 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당시 성 외부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 선거이, 곽재우의 조선군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싸웠더라면 진주성을 지킬 수도 있었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이지 외로운 항전이었습니다. 마음은 무겁지만 이번 강의도 잘봤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user-bk8dn6mo2m
@user-bk8dn6mo2m 2 жыл бұрын
맞는 말씀 입니다. 우리는. 역사교육이 너무나 안되. 있습니다. 이늠 기득권자들이 역사교육을 말살하고 있지요. 중국은 철처하게 역사교육 제1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전투 전에 명군은 진주성 동북방의 성주에 약 3만여 명을 주둔했다. 6월 14일 조선군 5만여는 함안에 도착해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일본군은 병 4천으로 이를 패주시켰다. 5일 패주한 일부 조선군은 진주성에 들어갔다. 명군은 원호하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일본이 항복권고를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일본은 29일 귀갑차를 이용해 성벽을 찔러 진주성을 공략했다. 함락한 진주성에서는 倡義使・金千鎰, 그 아이・김상건, 경상우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진주부사・서례원, 의병장・고종후, 김해부사・이종인, 거제 현령·김준민 등의 무장을 포함한 전원이 전사했다. 싸움의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의심스럽게 집결하던 5만 조선군이 너무 약했다. 이것은 모인 의병이 금전 목적이며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거북차. 상자 차를 만들어 불연의 소가죽을 치고, 안에 병사(라고 말하는 것보다 토목 작업원)를 실은 장갑차이다. 이로써 조선의 투석과 화살을 막아 성벽을 부수었다. 거북차는 적어도 전투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다. 전투기록이 없는 거북선이 조선수군의 기함처럼 날조된 것은 일본의 거북차에 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user-es3un9bq8n
@user-es3un9bq8n 3 жыл бұрын
황진 장군님 진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않고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paulhidetoshigonno2851
@paulhidetoshigonno2851 3 жыл бұрын
진주는못지켰지만 조선을지키셨지요
@dongihin4647
@dongihin4647 3 жыл бұрын
직접 싸운건 충청병마사 군사들입니다. 황진은 충청병마사 지휘관리고요. 그리 고2차 진주성전투는 백성들만 희생당한 전투이고요. 조선군 6천대 왜놈 8만명 그러는데 ㅡ 상황은 조선군백성이 3만레서 6만 백성이 있었고. 왜놈은 2만정도고 나머지 6만른 구경만 했다고. 그래서 총지휘 진주목사 책임론이 중용하다는거. 진주목사를 무시하고 성을 탈출해야한 한다는 작전이 더 올은 결정인 전투인데 몇몇 무능한 지시로 백성들만 희생한 전투입니다
@lya0144
@lya0144 3 жыл бұрын
그렇게 2개월이 지나고.. 댓글과 함께 잊혀진 황진 장군
@dsafsd6227
@dsafsd6227 3 жыл бұрын
@@dongihin4647 진주 사람으로서 진주성에 가본 적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데, 물론 지금과 그때의 진주성은 다르겠지만 천혜의 요새로서 의병과 관군들이 들어가 결사항전 했더라면 100프로 수성에 성공했다 장담은 못하지만 수성에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생각합니다. 발표준비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깥에서 도우기로 한 의병들은 일본군에 겁을 먹고 도와주지 않습니다.(물론 소수는 있었겠지만은) 날고기는 적병9만을 상대로 정예군 약간에 일반군이 약간 섞인 6천으로도 몇날 며칠을 버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는 결코 헛된 희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user-gl7hq1gs3p
@user-gl7hq1gs3p 3 жыл бұрын
@@paulhidetoshigonno2851 ]
@user-ri8tx6vo1n
@user-ri8tx6vo1n 3 жыл бұрын
부산 사나이 사나이 하는데~ 오늘부터 되찾자. . . 진정한 사나이는 호남 사나이그만~~한번뿐인 목숨을 나라를 위해 경남을 위해 바치신 호남장수님들 눈물나게 고맙습니다.
@user-mm2ds8dt4f
@user-mm2ds8dt4f 3 жыл бұрын
눈물나네요 황진장군님 ㅠ
@koreajinwoo1
@koreajinwoo1 3 жыл бұрын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선생님 강의의 최고 매력은 그 당시를 실제 상상하며 느낄 수 있는 점입니다. 그 당시 내가 그 성에 있었다면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얼마나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전투를 치렀을까요. 6만 백성.. 그 한 명 한 명이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꿈이 있는 나와 같은 소중한 삶일 텐데요.. 결국 흥분한 일본놈들 얼굴 마주해 목소리 들으며 고통스럽게 칼에 베이고 조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먹먹합니다. 400년이 지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ashijin2002
@ashijin2002 3 жыл бұрын
마지막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황진 장군이 전사하셨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구나"
@user-gdhutrfhfg
@user-gdhutrfhfg 3 жыл бұрын
ㅠ.ㅠ 부끄럽네요. 저희 가문의 조상이셨네요. 황진 장군이 황희 정승의 5대손이라고 하네요.
@byungmin9974
@byungmin9974 3 жыл бұрын
@황진영. 황현필 장군도 계시 잖아요..
@user-kg5jt9ov5r
@user-kg5jt9ov5r 3 жыл бұрын
장하십니다, 장군님의 자부심을 항상 간직하세요,
@user-mn4dy1tu9g
@user-mn4dy1tu9g 3 жыл бұрын
님 혹시 조상이 황진인데 수도권 타지역 사시는거 아니죠? 지역살면 개망신인데..
@user-zb1lk5kr4k
@user-zb1lk5kr4k 3 жыл бұрын
ㅋㅋㅋㅋㅋㅋ
@pauleungsookim8985
@pauleungsookim8985 3 жыл бұрын
2차 진주성 전투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황진 장군 같은 분을 몰랐다는 사실이 죄송스럽습니다. 황선생님 감사합니다.
@MrHancity
@MrHancity 3 жыл бұрын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일본 전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 서군으로 나뉘어 싸웠던 일본 장수 올스타가 2차 진주성 전투 때 다 모였다는 것을 이번 강의를 듣고 알았네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본군 총전력이 진주성에 다 모인 것 맞습니다. 정말 대단한 전투였다는 것을 오늘 강의를 듣고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sonkim3601
@sonkim3601 3 жыл бұрын
선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었다는 기록이 있다.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들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일본에의해 노예해방될 당시 조선백성의 70프로가 성이 없었다고한다.노예들의 이름은 개똥이 등으로 불렸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노예국가였다.노예는 사고팔고 매매 됐으며 대물림 되었다. 노예주인 양반은 맘대로 노예를 죽일수 있었다
@srhode2704
@srhode2704 3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은 거진 일본 서부지역 다이묘들이 참여한걸로아는데 총전력이라기보단 반토막난 전력이 갔다고생각하면됨 ㅋㅋㅋ도쿠가와도 참전안하고 가만히있었다는것 자체만 봐도 머
@user-gv7ff1qy8f
@user-gv7ff1qy8f 3 жыл бұрын
@@sonkim3601 뭔소리?
@user-mu8hs2vf4d
@user-mu8hs2vf4d 3 жыл бұрын
@@srhode2704 수길이가 대륙정벌이라는 명재하에 군을 15군으로 편성하는데 서쪽 규슈전력부터 1군으로 시작해 동쪽전력이 15군으로 편제되었죠. 임란때 투입된 병력은1~9군으로 그중 5개군이 규슈 병력입니다. 서쪽병력 위주로 투입된건 수송과 이동에 용이한것도 있고 규슈의 영지가 작은 다이묘에게 충성의 댓가로 보상할것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 병력들 상당수가 노략질하던 해적출신이고 일본내에서도 백병전에서 최강이라 불리던 놈들이었죠. 10~12군은 간사이 13~15군은 간토의 도쿠가와.호조.겐신가문으로 이들은 끝내 파병되지않아 세력을 그대로 유지해 나중 에도막부를 세운 기반이 되죠.
@user-gf9tp4td8l
@user-gf9tp4td8l 2 жыл бұрын
@@sonkim3601 ㄴ ㅣ ㅇ ㅔ ㅂ ㅣ도 노예였다
@lee2060
@lee2060 3 жыл бұрын
"사람 취급하기 싫습니다 " ㅎㅎㅎㅎㅎㅎㅎ빵터짐 소인배일수록 남 험하길 좋아합니다 그러고보니 제자신도 돌아봐야겠습니다 ㅎㅎㅎ
@songkim6408
@songkim6408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편 보는 족족 눈물이 나네요...저런 상황에서 버티고 막아낸 것도 대단한데 왜 이제야 알았는지...ㅜㅡㅜ
@user-cl1ow8xt2z
@user-cl1ow8xt2z 3 жыл бұрын
2차 진주성 전투를 패배했다고 하는데 사실 전투에서는 졌을 지 모르지만 실제 진주성 전투의 중요성은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진입을 막는 것이 전술적 목적이였고 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너무 많은 왜군의 손실로 더 이상 전라도로 진입 못 하게 막았다는 것은 전술적 승리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다만 너무 많은 안타까운 희생이 많았는 것과 황진장군의 죽음은 우리에게도 많은 손실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user-rm9hx4nu4j
@user-rm9hx4nu4j 3 жыл бұрын
가슴 뜨거워지는 강의 잘 들었습니다.
@user-bk8dn6mo2m
@user-bk8dn6mo2m 2 жыл бұрын
저가 고향이 그쪽 지역역인데 황샘의 역사 강의가 밤낮으로 쟁취합니다.감사드립니다.
@onej45
@onej45 3 жыл бұрын
늘 감사히 보고있습니다. 내심 그 가운데서도 이순신장군 해전이야기를 더 기다리는데 진주성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 뭉클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유의하시구요
@choichad3017
@choichad3017 3 жыл бұрын
2차 진주성 전투는 영화로 제작해도 가치가 있을거 같네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패전사이지만, 패전이 패전이 아닌, 아름다운 패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적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부운 총력전에서 적의 전력을 끝까지 소진시킨 군사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전투인거 같습니다. 권율과 곽재우 등 임란 영웅들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과 함께 일본의 네임드 무장이 등장하고 황진 등 역사적 인물을 조명할 수 있어서 영화산업 입장에서도 흥미롭겠네요
@user-tk9pu3to6z
@user-tk9pu3to6z Жыл бұрын
국민감정 생길수 있을까바 드라마, 영화에서도 안나온거 같습니다. 실제론 처참했을테니.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전투 전에 명군은 진주성 동북방의 성주에 약 3만여 명을 주둔했다. 6월 14일 조선군 5만여는 함안에 도착해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일본군은 병 4천으로 이를 패주시켰다. 5일 패주한 일부 조선군은 진주성에 들어갔다. 명군은 원호하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일본이 항복권고를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일본은 29일 귀갑차를 이용해 성벽을 찔러 진주성을 공략했다. 함락한 진주성에서는 倡義使・金千鎰, 그 아이・김상건, 경상우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진주부사・서례원, 의병장・고종후, 김해부사・이종인, 거제 현령·김준민 등의 무장을 포함한 전원이 전사했다. 싸움의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의심스럽게 집결하던 5만 조선군이 너무 약했다. 이것은 모인 의병이 금전 목적이며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거북차. 상자 차를 만들어 불연의 소가죽을 치고, 안에 병사(라고 말하는 것보다 토목 작업원)를 실은 장갑차이다. 이로써 조선의 투석과 화살을 막아 성벽을 부수었다. 거북차는 적어도 전투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다. 전투기록이 없는 거북선이 조선수군의 기함처럼 날조된 것은 일본의 거북차에 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user-rh2xk5vu1l
@user-rh2xk5vu1l Жыл бұрын
진주성내 6만 시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항복없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지만, 6만이나 되는 국민들을 도륙한 일본일들의 승리의 전투를 영화로 만들면 너무 가슴 아플것 같네요. 그리고 일본을 너무너무 저주하고 싶을것 같아요
@user-vl3jt9lq7n
@user-vl3jt9lq7n Жыл бұрын
​@@user-rh2xk5vu1l6만보다는 요즘 학계에서는 학살된 민간인을 2~3만 정도로 봅니다.
@n0780
@n0780 11 ай бұрын
@@user-vl3jt9lq7n 어떤근거로 그수치를 예상한건가요
@user-mz5sh1tt1u
@user-mz5sh1tt1u 3 жыл бұрын
황진장군님 전사 소식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user-ey7eo4lj9h
@user-ey7eo4lj9h 3 жыл бұрын
살아선 패배했지만, 죽어서 승리한 2차 진주성 전투~ 감사합니다~^^
@Ah-kw3uo
@Ah-kw3uo 3 жыл бұрын
진주 살아서 어렸을때부터 진주성이랑 촉석루 자주가고 집이랑도 가까워서 엄마랑 산책겸 운동도 자주가는데, 이렇게 힘들게 지켜낸거라고 보니 느낌이 확 달라집니다. 감사합니다..!
@user-vq5rb5dy4f
@user-vq5rb5dy4f 3 жыл бұрын
오늘도 귀한 강의 잘 들었습니다 황진장군이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지금이라도 알게 해주셔 감사합니다 ~💙
@user-to6ie7ty6v
@user-to6ie7ty6v 3 жыл бұрын
볼때마다 눈물나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다시한번 황진장군님과 같이 싸우셨던분들 감사합니다.
@foodandtravel7
@foodandtravel7 3 жыл бұрын
고려시대 양규, 임진왜란 황진 장군님.ㅜㅠ 두 분 다 엄청난 분들이고, 두 분 모두 전장에서 돌아가시죠 ㅜㅠ
@user-er6gy4vk5c
@user-er6gy4vk5c 3 жыл бұрын
울었습니다...
@user-df7bw1bl9z
@user-df7bw1bl9z 4 ай бұрын
강의 듣는 중에 눈물이 나네요 황진 장군님 🙏🏻
@chglee5703
@chglee5703 3 жыл бұрын
진주성 동문 쪽이 지금의 시외버스 터미널 지역이죠. 제가 어릴 때 저긴 비만 오면 침수되는 지역 이었죠.
@user-pg7jk1nt3e
@user-pg7jk1nt3e 3 жыл бұрын
상당한 거리네요 촉석루에서 터미널
@user-pq7wv9ut9w
@user-pq7wv9ut9w 3 жыл бұрын
뒤벼리 침수되면 뜰채들고 나갔더랬죠
@user-rx3ws7ep8k
@user-rx3ws7ep8k 3 жыл бұрын
정확한 지역은 지금의 동방호텔 자리입니다.
@user-td5fl9xb9p
@user-td5fl9xb9p 3 жыл бұрын
황진장군은 교과서로 드라마로 영화로 조명 되어야 할분
@user-ly7ex8mc6m
@user-ly7ex8mc6m 3 жыл бұрын
하모.
@user-pm7qv1dj5w
@user-pm7qv1dj5w 3 жыл бұрын
권율 곽재우 재평가하게되네ㅡㅡ 물론 나쁘다기보단 황진장군이야말로 이순신장군급으로 대우해드리야됌
@user-ho5qp3lv8b
@user-ho5qp3lv8b 3 жыл бұрын
황진 장군 같은 위대한 분이 2차 진주성 전투 때 계셨던 것도 모르고 그동안 김시민 장군이 1차 때 돌아가셔서 2차 전투때 패배 했다고 생각했으니.... 참... 사람은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user-md8fz5mm4u
@user-md8fz5mm4u 3 жыл бұрын
황진 장군님이야 말로 우리민족의 최고의 영웅중 한분이시군요~ 황진 장군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bipo0080
@bipo0080 3 жыл бұрын
당시 일본군이 느낀 미스터리: 와, 저 적은 병력으로 어떻게 막아내는거지?? 90000 vs 6000인데 우리가 못 뚫는 이유가 뭐지? 지금 우리가 황쌤 영상을 보며 느끼는 미스터리: 저런 엄청난 전투가 왜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지?? 진주성 전투하면 다들 김시민 장군만 기억하고 황진 장군이 잊혀진 이유가 뭐지?
@user-tr5xx3dp7w
@user-tr5xx3dp7w 3 жыл бұрын
친일 국사학자들이 왜 패전을 감춘거 같아요.
@user-tj5jk4ix5u
@user-tj5jk4ix5u 3 жыл бұрын
죽은자는 말이 없고, 전멸했으니 기록믈 남길 수 없었으며 생존자들은 자신의 정치성향에 따라 말글을 썼을테니..
@user-ui1lv8re9r
@user-ui1lv8re9r 3 жыл бұрын
졌잖아요..... 졋잘싸는 부각 안시킨다 이거죠....
@user-xm3yz1zf3g
@user-xm3yz1zf3g 3 жыл бұрын
엄청난 막차인 진주 대첩의 경우 너무나도 비극적이라 잘 알리지 않은것 같아요ㅠㅜ...
@dorianfa4209
@dorianfa4209 3 жыл бұрын
@@user-tr5xx3dp7w 국뽕 학자들이 일부러 패전한 전투를 감춘거지. 친일 국사학자들이 그걸 왜 감춰 ??
@shieldbearer1975
@shieldbearer1975 2 жыл бұрын
2차 진주성.. 황진 장군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joongkoolee5639
@joongkoolee5639 3 жыл бұрын
와 황진 장군 진짜 대단한 장군이었구나... 권율 곽재우 이것들은 진짜...
@sia.T
@sia.T 2 жыл бұрын
이길수 없는 전투였고 그래서 냉철한 판단을 내린거라 보여집니다. 권율, 곽재우 모두 당대 불세출의 장수였고 더구나 선거이 장군은 명나라 출신 가문(할아버님이 명의 사신으로 왔다가 조선의 문화에 감복해 조선인으로 귀화하심)으로서 대쪽같은 성정으로 친구가 거의 없었다고 알려진 이순신 장군님의 가장 절친한 벗이자 임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왜군들과 싸우다 역시 최후를 맞이하신 분인데 그런 분조차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셨으니.. 그 분들이 용기가 없었던게 아니라 그럼에도 진주성에 들어가 싸우신 황진, 김천일장군님들을 비롯한 5천명의 열사들이 실로 엄청난 분들이라고 봐야할 듯 합니다. ㅠㅜ
@admiralyisoonshin4995
@admiralyisoonshin4995 2 жыл бұрын
눈물이 나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제 2차 진주성 전투는 그 당시에도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예상한 전투였으나, 조선군과 장수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원 전사했습니다. 6천 대 10만 대군의 대혈전! 왜군들은 진주성 함락후 조선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닥치는 대로 도륙해 버리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진주성 혈전!
@user-nq4ge4ly6f
@user-nq4ge4ly6f 3 жыл бұрын
피가 끓어오르네요...!!
@user-el9jh2ss3t
@user-el9jh2ss3t Жыл бұрын
아니 진짜 황진 장군 왜 안알려진거지 기묘하네;; 아무튼 기억하겠습니다
@str0579
@str0579 3 жыл бұрын
이순신 장군 曰 :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구나." 임진왜란에서 황진 장군이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알게 해주는 말이네요. 지금까지 임진왜란에서 황진 장군이 왜 재조명 되지 않았는지 참 모를 일입니다. 황현필 선생님 덕분에 역사 속에서 빛을 못 보고 있던 위인들을 알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인물들 많이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kanghyunnatural
@kanghyunnatural 3 жыл бұрын
선생님은 정말 최고십니다.
@user-yp8vl1we3k
@user-yp8vl1we3k Жыл бұрын
넘재밋게얘기해주시네요😊
@bupjin1
@bupjin1 3 жыл бұрын
권율과 곽재우 장군 등이 협공을 하고 명나라 군이 진격한다는 소문만 냈어도..... ㅠㅠ
@user-rx3ws7ep8k
@user-rx3ws7ep8k 3 жыл бұрын
당시 상황을 지금의 잣대로 재단하기는 곤란하고 여하튼 진주 2차 전투는 치열했고 삼장사 중에 젊고 핵심 무장출신인 황진장군이 전사한 것은 넘 안타까운 일입니다.
@user-vl6gy2lf8z
@user-vl6gy2lf8z 2 жыл бұрын
정치인이 지역 감정을 만든 놈은 역적으로 간주 해야함.
@proheo1072
@proheo1072 3 жыл бұрын
권율 곽재우는 익히 알았는데 진짜 영웅은 황진장군이었네
@user-xs9dn2tq8d
@user-xs9dn2tq8d 2 жыл бұрын
황진 장군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rf5ow1zq4c
@user-rf5ow1zq4c 3 жыл бұрын
김해부사 이종인장군도 기억해주세요 아주 휼륭한장군이예요 혼자서 수많은일본군을 죽였는데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그시체가 산이나 언덕을 이룰정도래요 힘도 천하장사였군요 완력으로 일본군병사 5명을 혼자서 해치워군요 궁술도 매우 뛰어나 일본군수십명을 활로 쏘아죽였죠
@user-ro1vd6pn3x
@user-ro1vd6pn3x 2 жыл бұрын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user-bw7ky1yq2l
@user-bw7ky1yq2l 3 жыл бұрын
좋은강의 감사합니다‥토착왜구들은 슬퍼할내용이네요!
@cyx0406
@cyx0406 3 жыл бұрын
무관이 아무리 엘리트 군인이지만 지휘가 아닌 일신의 무력으로 한명이 전투에 판도를 뒤엎을만한 활약을 하는게 다수vs다수 전투에선 정말 힘든데 황진 장군께서는 진짜 용력이 뛰어난 무관이셨던것같습니다
@hair112
@hair112 3 жыл бұрын
안타깝습니다... 황진장군이이렇게무쌍을찍고있을때 권율하고 곽재우가 후방공격했으면 이길수있지않았을까 아쉽네요
@user-fu3if9wp3c
@user-fu3if9wp3c 3 жыл бұрын
선비 출신은 어쩔 수 없습니다 계산부터 하지요
@user-uy6es8bg7t
@user-uy6es8bg7t 3 жыл бұрын
조선이 일본군을 공격할 군사가 얼마나 있었을까요.또한 조선군은 그리 강군이 아니었을 겁니다.군사가 십만에서 수십만이었으면 뒤로 공격을 했겠지요.겨우 몇만 안돼는 군사로 전투에 능한 왜군을 공격 하다간 역습을 당하면 전쟁을 지겠지요.그 당시 사람들도 어쩌지 못 했을 겁니다.왜는 200년간 전쟁을 했고 조선은 200년간 평화로운 시기였으니...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걸로 보아 전쟁초기에는 병력이 이삼만밖에는 없었을 겁니다.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생각입니다.
@byungmin9974
@byungmin9974 3 жыл бұрын
@@user-uy6es8bg7t 상상은 자유이나...
@user-ow8kw1gi2n
@user-ow8kw1gi2n 3 жыл бұрын
@@byungmin9974 상상은 자유가아니라 사실입니다 곽재우 권율이 진주성이 전략적중요성을 몰랐을까요? 조선은 임진왜란당시 육군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상대가되질않았습니다 또한 숫자면에서도 턱없이 모잘랏죠 진주성에 싸운장군들이 잘못된건 아니지만 권율은 총지휘관으로써 확률없는전투에 귀한조선군을 잃는일을 할수없었던거죠 후방에서 지원또한 실질적으로 불가능한것이라 안따까운전투였습니다
@user-ll2oc3bk9x
@user-ll2oc3bk9x 3 жыл бұрын
군사수가너무부족했음 일본군은 93000명이투입했었음 한전투에 병력이 이렇게투입됐는데 그에반해 조선군은 많아도 수천명이라 이들을 공격하기에 다소무리가있었음 그리고 일본의 수많은 주력군,장수들이 다모인상태에서 조선후방군이 급습한다한들 반격을당해 잘못하면 후방이 전멸당해서 비어버리게됨 그래서안타까운역사임 그만큼 우리군사수,전투력이 일본보다 약했음
@user-ve6ms2xu6q
@user-ve6ms2xu6q 2 жыл бұрын
우리 황진장군님 그간 몰라뵀습니다 후손으로서 너무감사드리며 깊이 기립니다. 진주시민으로서 영호남이 하나라는 선조들의 뜻이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user-bc5cg4gw3z
@user-bc5cg4gw3z 3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 최고의 육군장군은 황진장군이군요.
@user-up2ql8zc6l
@user-up2ql8zc6l 3 жыл бұрын
권율 곽재우 너무 몸사리고있었네요.. 진주성에서 존버 하고있을때 외곽만 건들어줬어도...함락은 안당했을텐데 아쉽네요
@user-pl6fo6zl6x
@user-pl6fo6zl6x 3 жыл бұрын
당시 일본군은 접근전과 공성전에 달인들이었습니다 조선군은 근접각개전투에 취약해서 수성전에서 백전백패 했던 경험으로 곽재우는 게릴라전 을 중심으로 해야 승산이 있다고 각군수장에게 파발을 띄워 연합작전을 건의했으나 좌절되었고 결국 공식적으론 6만6천 비공식적으로는 15만이상의 양민들이 학살되었으며 실제로 조선의 진주병졸 의 수는 6천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성안의 전투병은 주민 6만3천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승산없는 싸움에 무모하게 휘하병사들을 투입시키게습니까
@user-ly7ex8mc6m
@user-ly7ex8mc6m 3 жыл бұрын
에이그 불쌍한 진주성민들.권율.곽대우등 겁장이들 때문에, 어육때삔네요잉.으으으흐흐흐흐흑.
@Courteous0809
@Courteous0809 3 жыл бұрын
이런 황진 장군을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없다니.. 국사편찬위원회 기가 차네요
@user-pt5fe8kt2l
@user-pt5fe8kt2l 3 жыл бұрын
너무 일찍 죽어서 그런듯요.. 충무공이 거의 부산포해전때 죽은거랑 느낌이 비슷할듯요.
@Courteous0809
@Courteous0809 3 жыл бұрын
@@user-pt5fe8kt2l 아무리 시간적으로는 일찍 죽었다고 해도 활약은 이미 엄청나고 공도 많이 세우셔서.. 부산포 해전보다는 한산도 대첩 때 죽은 느낌인데요ㅠ 신립이가 더 유명한 게 말이 안됩니다.
@user-kv4pu8ix1m
@user-kv4pu8ix1m 2 жыл бұрын
성으로 들어가지않고 백성들과 빠져나갔으면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진주성에 있는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도륙당하였다
@xellossn6683
@xellossn6683 2 жыл бұрын
싸우지 않고 도망만 가면 후손들이 존재하기나할까요??? 명분도 중요한 겁니다
@user-qs5iq6dn7t
@user-qs5iq6dn7t 3 жыл бұрын
좋은 역사 내용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현필 선생님!
@user-ku9jm8ym9c
@user-ku9jm8ym9c 3 жыл бұрын
진주성 2차 전투가 왜 이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데.. 많이 많이 알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기억해야겠습니다~!
@batuu2601
@batuu2601 3 жыл бұрын
정문부 장군이 함경도 기마병으로 후방을 휩쓸었으면 왜병도 싹쓸이 당했을텐데 모함만 안당했어도
@user-bc5cg4gw3z
@user-bc5cg4gw3z 3 жыл бұрын
2차 진주성전투 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논개였는데 더 훌륭한 황진장군을 몰랐군요. 너무큰 전력차이로 결과는 패했지만 사실상 대첩이라해야 마땅한 전투였네요.
@user-yb2zd2fz2g
@user-yb2zd2fz2g 3 жыл бұрын
애초에 3년에 한 번 시험 보고 검술, 창술, 궁술, 기마술 까지 다 평가해서 28명씩 밖에 선발 안 하는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라는 자체에서부터 전투력 보장되는 건데 황진 장군은 그 중에서도 탑이니 말 다했지
@johnpetrucci8500
@johnpetrucci8500 3 жыл бұрын
거기다가 +병법까지도 같이 시험 보죠ㅎㅎ 그냥 초인 뽑는 시험임
@user-ri8hq1jb9s
@user-ri8hq1jb9s 3 жыл бұрын
근데 거기서 가장 에이스가 신립 아니었나...
@qaz75382
@qaz75382 3 жыл бұрын
머 신립이야 초기 조총에 무서움을 제대로 알기전에 기병이 찢겨버렸으니 적을 너무 몰랐죠
@REDFILL1115
@REDFILL1115 3 жыл бұрын
@@user-ri8hq1jb9s 신립이 뛰어난 장수인것은 확실해 보이나 그 배경이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경 무시 못합니다.
@jjc1722
@jjc1722 3 жыл бұрын
@@user-ri8hq1jb9s 가장 에이슨지는 몰겠는데 북방 에이스였던 건 맞음
@user-ey2iv2jr6r
@user-ey2iv2jr6r 3 жыл бұрын
비분강개 이말밖에 할말이 없습니다 이 전투는 꼭 다시 재조명되어야 하고, 민족반역 강단사학자들이 임진왜란을 패배의 역사로 기억하게 하는데 이걸 바로잡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나중에 자식들에게 선생의 가슴뜨거운 강의 꼭 들려줘야겠습니다. 항상 진짜역사를 가슴뜨거운 강의로 들려주시는 황현필샘 당신이 이시대의 황진장군입니다.
@youngsimyun8736
@youngsimyun8736 2 жыл бұрын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으로서 넘 자랑스럽습니다. 진주성전투... 덕분에 더 상세히 알게되었습니다. 넘 감사합니다.
@LEE-ld8fp
@LEE-ld8fp 2 жыл бұрын
제일 보수 꼴통들이 많은곳... 역사의 아이러니
@user-co8dq2ku6g
@user-co8dq2ku6g 3 жыл бұрын
그동안 몰랐습니다. 반성합니다.
@user-di4dp8uz4m
@user-di4dp8uz4m 3 жыл бұрын
황진장군님은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user-di4dp8uz4m
@user-di4dp8uz4m 3 жыл бұрын
@@user-hl2qv2pg1e 그러는 당신은 도요토미한테 선동당했수? 되도 않는 이념분쟁은 하지마슈ㅋㅋ 뇌에 우동사리 찬 사람들 정말 많아ㅋㅋ
@user-gj3nx8ju3q
@user-gj3nx8ju3q 3 жыл бұрын
@@user-hl2qv2pg1e 전쟁나면 바로 도망갈 극우보수들
@Darsvader76
@Darsvader76 3 жыл бұрын
@@user-hl2qv2pg1e 부탁이다 제발 그냥 일본에 가서 살아라 응???
@user-jd1zh7ur3i
@user-jd1zh7ur3i 3 жыл бұрын
@@user-hl2qv2pg1e 보수 욕먹이지 말고 ㅇㄷ해주세요
@user-nq6cs9rr6w
@user-nq6cs9rr6w 3 жыл бұрын
일본 전설의 1군이 이때 전멸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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