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전의 앞, 뒤 사라진 부분은 그 시기에 해외에서 유학왔던 유학승들 중 누군가 잘라서 자기 글에 붙여 자기의 글로 둔갑시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긴 기간 동안 단 두 편의 글을 남긴 것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시에서 나타난 혜초의 정서나 글 솜씨로 보아 순간순간이 감격스러워 쓰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을 텐데 두 편의 글이라... 많은 과제를 남기시고 계시네요. 동북공정으로 고구려까지 자기의 속국이라 일컫는 중국에서 혜초가 50년 생산한 모든 것들은 중국의 것으로 됐겠다 싶은 맘을 버릴 수 없어 한번 더 일하지 않는 상태에서 동영상만 들여다 꼼꼼히 보고싶은 자부심이 불쑥불쑥 솟게 하는 정말 재밌는 역사스페샬입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한 조상이 있어 이런 훌륭한 동영상을 만들어냈다는 건 대한민국의 긍지요 자부심입니다. 최고입니다!
그 시대에 배출(?)보다는 태어나주신 자랑스러운 인물. 고려시대 의천이라던지...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읽기도 벅찬 경서를 번역하고 해석하고 주석달고, 경전 간행까지...뭐 조선시대전에는 왕족, 귀족 같은 엘리트스님들이 많았으니 가능했겠지만요.
@안기훈-x8s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였습니다..
@남미용-r3m3 жыл бұрын
고생하셨겠어요.그시절에
@PD-ns1es4 жыл бұрын
나를 찾는 위대한 오딧세이네요...그것도 기록으로 남기다니..정말 먼 미래를 내다보다..천재 스님
@안알랴줌kr4 жыл бұрын
그냥 혜초라고했다거나 계림 이라고 안했다면 그냥 중국인이라고 되어버려 한국역사에 없었을듯. 다행이다. 저 먼길을 가다니.
@정연호-p6d3 жыл бұрын
부처님고맙씁니다
@chriskim29584 жыл бұрын
아쉽네요. 기록이 온존했다면 어마어마한 세계기행서가 될텐데.
@남상학-x8g4 жыл бұрын
새로운 생각을 하는사람은 염원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존제 가치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고 보니까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이 내가 있는곳과 같은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제가 있는 이곳에서 많은꿈을 꾸어보려합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미래의 경험들을 공상하면서 꿈에 젖게 합니다. 잡힐듯 잡히지 않은 먼 미래의 일들도 언젠가는 모두 풀리겠지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미래를보며 삽시다.
@이현숙-t7n9s Жыл бұрын
아 ! 신라의 구법승 혜초스님..어떤 한 생각이 떠올라 그 먼곳까지 법을 구하러 가셨을까 ? 그나마 왕오천축국전을 남겨 고행의 길에 나섰던 자신의 존재를 후세에까지 알릴수 있었으나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BianJinyan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파시모늬3 жыл бұрын
침착맨 따라 재밌는 인문학 방송
@jt6113 Жыл бұрын
왕오천축국전이 일부라도 발견된것이 정말 기적입니다
@이동연-c6d4 жыл бұрын
그나저나 나침반도 없이 어떻게 그 머나먼 곳까지 여행을 갔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ㅎㅅㅎ
@hoonjee26984 жыл бұрын
이동연 이미 한나라 시절에 실크로드가 문을 연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그 당시로는 천년 전에 ...그 긴 세월 동안 거기 가는 건 아마 일도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super-JEI4 жыл бұрын
나침반은 단어뜻 그대로 신라의 침 바늘입니다. 나침반은 신라가 발명한 것입니다. 나침반은 중국인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속에 그 주인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중국인들도 나침반을 나침반 한자로 그대로 씁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왜 나침반을 나침반이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원래 신라에서 만든 나침반이니까 중국인들도 나침반 단어를 함부로 바꿀수 없었지요.
100년쯤 뒤엔 혜초보다 무하마드 깐수가 더 신비롭고 드라마틱 한 캐릭으로 역사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성일경-d2q2 жыл бұрын
공감 합니다ㆍ
@kumaenc2 жыл бұрын
저 시대때 여행이란 생사를 넘는 목숨을건 순례였을듯.
@강지원-z4s3 жыл бұрын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나라인 인도를 못가본게 아쉽네요 열반하신곳도 꼭 가보고싶네요
@진이기리3 жыл бұрын
그는 위대한 한국인
@johnathanha93403 жыл бұрын
크리쳔들에게나 불교가 힌두교도들에게나 세례는 정화되어 온전하게 되는 시간이고 물은 거룩함을 상징이네요. 아멘+
@관조바르기2 жыл бұрын
길을 따라 길에서 돌아가셨네요!
@hongyukim47894 жыл бұрын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삼보에 귀의 합니다.
@곰발바닥-h6u Жыл бұрын
시의 내용으로 보아 당나라가 있는 서쪽땅의 끝을 말하고, 헤초의 고향은 은하수 북쪽을 말하고 있으니, 지금의 북경 부근이 된다. 행정상으로는 신라의 9주안에 있고, 위계상으로는 안동도호부가 있는 부근이다. 당나라가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얻는것이 무엇인지는 알수가 없다.
@강대봉-e9d4 жыл бұрын
혜초 스님의 역사스페셜에 감사드립니다ㆍ 하지만, 끝 부분에서, "인도를 다녀온 혜초가 고국으로 안 돌아가고 중국 오대산에서 여생을 보낸 이유"를 안 밝히고 끝내셨는데, 참 궁금합니다 ^^ 저는 혜초가 여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오는, 성공한 순례여행이었음에도 '왜 왕오천축국전은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었을까?'도 궁금했습니다 ^^ 다 알기 어려운 과제입니다만, 혜초가 신라로 귀국하지 않은 점은, 그의 골품이 진골이 아니었을 거란 강한 느낌이 듭니다ㆍ 8세기 신라는 3국 통일 신라 시대이고, 신라 불교계는 원효(6두품)계와 의상(진골)계로 나뉘어 꽤 어지럽던 시기였고, 의상계의 승리로 판가름 났지만, 진골이 아닌 승려는 실력이 있어도 소외될 게 뻔했기에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으리라 짐작됩니다 ^^ 남은 유적으로 보아, 중국에선 꽤 유명했고 대우도 좋았던 싶습니다ㆍ 황제의 부름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등 예우는 받았던 듯 싶습니다^^
@장동건-b4h4 жыл бұрын
박학다식하시군요 제 가려운 부분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gatsbyjay17074 жыл бұрын
최치원의 예를 살펴보면 그럴듯 하다고 생각됩니다.
@강대봉-e9d4 жыл бұрын
@@gatsbyjay1707 네, 저는 최치원 샘은 살해되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ㅠㅠ "가야산 바위 위에 신발만 있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가야산에서 살해한후 주검은 유기하고서, "신선이 되었다"고 소문 낸 건 고대에 왕권 수준에서 완전범죄로 삼던 방식이었죠 ㅠㅠ 이후, 최씨 3대 천재들은 견훤에게, 왕건에게 가버리거든요
@super-JEI4 жыл бұрын
당시에 신라의땅이 어디였느냐가 중요한 단서입니다. 신라라는 나라가, 그것도 3국을 통일한 나라가 한반도 절반밖에 안된 작은 나라였을까요? 아닙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통일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통일된 신라의 영역은 어디였을까요? 김유신이 고구려 신라를 정복하고 그 땅을 당나라에 송두리째 바쳤을까요? 아입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땅을 버린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통일신라의 영역은 어디일까요? 가장 쉽게 생각해도 고구려, 백제를 합한 영역이어야 합니다. 중국 오대산이 어디에 있나요? 그 영역이 바로 신라의 영역입니다. 돈황 막고굴이 어디에 있나요? 그 영역이 바로 옛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바로 통일 신라의 영역입니다. 실제로 돈황 밍사산에는 삼족오 벽돌이 선명한 고구려 고분이 있습니다. KBS 뉴스에 돈황 고구려 고분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결국 혜초는 신라땅 오대산에서 입적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강대봉-e9d4 жыл бұрын
@@super-JEI 신라가 양자강 유역이란 김정민 박사의 설도 있지요ㆍ천문학 일식 기록이 일치한다더군요ㆍ 석가모니가 입적한 바라나시가 '신라'란 주장도 있는데 저도 연구 중입니다^^
@Aseandonjuan5 ай бұрын
除了钦佩,还是钦佩!
@dreaming6065 күн бұрын
세계 4대 여행기! ❤❤❤
@장다름-i6h4 жыл бұрын
존경하는 정수일 '무하마드 깐수'선생님을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국제문명교류사에서 혜초스님 만큼의 큰 업적을 기대해봅니다요~!
@이동연-c6d4 жыл бұрын
장다름 저 양반 간첩인데 쓸떼없는 자료만 보내서 북한에서 이딴거 올리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 등 아주 최악의 간첩 이라고.
마하보디사 대탑 8개의 탑 중에 한개 보리수나무 금강보좌 마게타국 1908년 감숙성 돈황막고굴 2400개 천불동 ↔️펠리오☸일체경음의 동국대 대흥선사 시안소재 혜초 ➡️금강지 불공제자
@aprillaurel79563 жыл бұрын
좋은 프로 감사합니다. 혜초스님이 열반하신 곳이 바로 통일신라땅이었던 거죠. 출발지를 중국 광주로 표현하는데 그 당시는 중국땅이 아닙니다. KBS 백제 22개 담로의 비밀, 백제가 베이징과 베트남 북부까지 22개 제후국을 거느린 황제국이었고 통일신라는 이 지역까지 통일을 한것이죠.
@JJ-uq8lp4 жыл бұрын
통일신라시대 불교에 대한 열정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명현이-x9e4 жыл бұрын
이미 서역순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고향이 신라이기는 해도 대국의 사이즈와 문화권에서 구도의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큰 문명을 두눈으로 보았는데 시골로 가고 싶었을까요?
@hahaho3337 ай бұрын
신라천년 진정 불국토을 이룬 나라여서 행정 경제 안보 문화등 엄청난 나라였어요. 당시 페르시아 대국에서도 신라로 간 이는 살기좋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당나라와 7년 전쟁하여 승리하는 힘있는 나라였어요. ㅎㅎ 혜초구루가 밀교를 직접 인도인에게 배우고 직접 인도로 가서 밀교를 배워 신통력이 출중하여 당에서 허락을 하지 않았을수도 있지요. 당대의 출중한 신라출신 원측 스님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을 반대한 이유가 당나라 황실에서 생불처럼 모신 이유로 신라로 귀국을 반대한 이유이지요. 암튼 혜초 구루의 기록이 자세히 없는게 안탑깝네요...
부처님이 열반전 건넜다는 이라발저강. 부처님 입멸직전 목이 마르다며 아난에게 3번이나 물좀 떠달라고 시키신 그 강일까? 아난이 말하기를 방금 장사꾼들의 수레가 그강을 지나가서 물이 흐리다 하여 부처님의 청을 2번 듣지않고 3번째 내가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떠다주면 좋겠구나. 라는 말에 마지못해 아난이 물을 떠기위해 강으로 갔다는 이야기.
당시는 뜻이 곧은 사람은 의지를 위해서라면, 제아무리 큰 고행의 길 이라 하드래도 마다 하지 않은 것 같 습니다.
@시크릿미라클2 жыл бұрын
대 신라국 승려 혜초 스님
@JanmangMix Жыл бұрын
지금에사, 혜초가 중국땅에서 입적한 것 같지만 당시 그곳은 신라의 땅이고, 바로 거기가 계림 신라이지.
@moonsuper19783 жыл бұрын
33:00 ㅇㄷ
@cottagelife_withdogs7 ай бұрын
정말 멋지다.. 그 시절 세계를 보며 시야를 넓히던 식견이 조선시대로 이어졌다면 식민지 시대는 오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ㅠ
@yya26782 жыл бұрын
'왕오천축국'을 읽을 때는 '왕오 천축국'이라 읽습니다. '왕오'라는 뜻은 갔다 왔다라는 말이어서 '천축국을 다녀왔다' 라는 의미로 '왕오'띄고 '천축국' 이라 읽어야 합니다.
@남상학-x8g4 жыл бұрын
기상 상태는 그저 그런 보통...먼산은 흐릿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햇빛의 강도는 따스함을 넘어서 약간 덥덥...그래도 일하기에는 괜찮음...오늘도 삶을 한올 한올 야무지게 엮어서 뒤돌아 볼 때는 인생의 허전함을 덜 느끼게 최선을 다해본다...우리님들 이 시간 즐겁고 행복함을 가득 담는 좋은 시간 되십시오!
@남상학-x8g4 жыл бұрын
5월의 시작 계절의 여왕이라고 말하는 5월 가정의 달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명분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여왕답게 5월은 우리가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시고 긴 연휴가 시작되는 5월 첫날 우리 모두 즐거운 가운데 코로나 방역 소홀하지 마세요 생각나고 보고싶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건 행복한 사람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괴로운 4월이였네요 새로운 마음으로 5월에는 더욱 건강 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요
혜초는 수많은 백제인들의 흔적을 북인도에서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에서는 수많은 고구려인들의 흔적을 보았을 것입니다. 너무나 작아진 신라인의 스케일이 싫어서 돌아와서 어떤 말도 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aprillaurel79563 жыл бұрын
혜초스님이 신라에 귀국안한게 아니라 대륙의 통일신라 땅에서 열반하신 것이죠. 백제가 대륙의 요서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다스렸고 통일신라는 백제지역을 통일한 것으로 보이고 고구려 지역에는 우리 민족의 나라 발해가 들어서는 거죠.
@가람엔산넘어3 жыл бұрын
걸어서 세계속으로
@남상학-x8g4 жыл бұрын
저는 충분히 락다운 없이 잡아 나갈수 있다고 봅니다. 제대로 된 치료제로 치료를 받으면 가능합니다. 지금 여기저기 미국 의료진들이 FaceBook 이나 Instagram 에 올린 비디오를 보면은 뉴욕이나 사망자가 많은 도시들은 여러 도시에서 volunteer 로 온 의료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제나 치료를 못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벌써 예전에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난 입장에서 말씀 들이지만, 물론 태어나서 많이 다쳐보고 아파도 봤지만 정말 일종에 플루 때문에 아파서 병원에 간건 처음인데, 제대로 치료받고 약먹고 하면서 나았습니다. 참고로 병원에 데려다 준 동생도 전염이 됐지만 완쾌 됐고, 아내는 전염이 안됐습니다.
@Davaraya4 жыл бұрын
죽으면 죽는거지만 죽지말고 계속 살아가라는 세상의 부름은 아마도 그안에 부처님의 뜻이있나봅니다 위대한 혜초는 이것을 앎에 깨달아 그 위대한 업을 이룬것이지요 남상학님도 요근래 세계로 퍼지는 전염병에 완쾌되시니, 이는 혜초스님이 남기고간 가르쳤던 업이 이제서야 세상이 허물어지메 나타나니, 좋고 나쁜것을 떠나 세상돌아가는 이치는 부처님입니다
@bby29583 жыл бұрын
사실 당의 수도 장안에서 바라나시까지 가장 가까운건 촉 운남 미얀마 갠지스유역으로 들어가는게 가장 가까운 길임. 거리 자체는 오히려 신라보다 가까울 지경. 이미 그보다 800년전 한의 장건도 운남 인도를 통해 촉의 비단이 서역으로 들어간다는걸 발견한바 있기도 하고...
@수타벅슈짜장면4 жыл бұрын
절에 가면 탑이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탑이 뭘 의미하는지 관심도 생각도 없다. 탑은 인도말 스투파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음차하여 솔탑파(率塔波)라 한 것이고 후에 솔자를 빼고 탑파로 축약되었고 그마저도 후에 파자가 없어져서 탑만 남은것이다. 탑자도 당시 한자에 있던 글자가 아니라 솔탑파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낸 문자다. 마치 오늘날 외래어를 표기하기 위해 중국이 새로이 만들어낸 글자처럼 말이다. 스투파는 부처님의 무덤을 뜻하며 그 안에 부처님의 뼈가루를 보관한다. 우리가 흔히 사리라 부르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샤리라라고 부르는데 사리가 샤리라의 음차인 것이다. 오랜 수행을 통한 높은 법력을 지닌 고승이 입적하면 그 시신을 화장을 하는데 이때 나오는 구슬같은 결정체를 사리라 부르며 고승에게서 나오는 진귀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사리는 위에 설명했듯 산스크리트어 샤리라를 음차하여 사리라고 한 것이고 이 말은 그냥 뼈라는 말이다. 고승을 화장했을 때 나오는 결정체같은걸 의미하는게 절대 아니다. 시신에서 그와같은 결정체가 나오는거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뼈 말고는 남는것이 없어야 한다. 사리 역시 불교의 왜곡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불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며 불상을 잘 보면 고대 그리스 석상에서나 볼수 있듯 옷주름이나 curl(곱슬머리)이 특징이다. 승려들이 입은 승복도 로마시대 토가와 같은 형식임을 알수 있다.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을텐대 무슨 돈으로 여행했을지 궁금하네요 ㄷㄷ 공용화폐도 없었을텐대..
@김젠틀-u4x Жыл бұрын
금 은
@fogtfoomf57639 ай бұрын
불교의 기원인 인도. 사실 불교는 대중적인 종교가 되기 어려운 특성이 있는데 인도인들은 결국 종교로서 아주 접근성이 좋고 편안한 기복신앙, 힌두교로 회귀함. 사실 고대 인도에 미친듯이 퍼진 종교는 불교와 결이 비슷한 브라만교였다는 게 아이러니 함.
@민흘림 Жыл бұрын
내용중 오랜고행 끝에 깨달았다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되네요 깨달은 것은 오랜 수행끝에 연기와 중도를 깨친것이다 격렬한 고행도 했지만 고행으로서는 열반에 들 수 없음을 깨친것이다 왕자시절 감각적 쾌락도 열반이 아님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당시대에 수많은 구도승들이 여행했지만 너무 오랜시간이 걸리다보니 건강이 쇠약하여 귀국은 엄두에 두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한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이징 길 따라서 인도네시아에서 인도말 배우고 인도 간게 맞는것 같은뎅 인도네시아간건 기록이 안 남아있으니
@하늘-m1j3 жыл бұрын
그부자가왕자가 뭘보셨나요왕자여
@하늘-m1j3 жыл бұрын
식구들도 다버리시고 뭘보셨나요부타여
@ysa4473 Жыл бұрын
Hyecho를 구글 번역기에 넣으니 일본어라고 나옴 Hyecho=ヒェ著 Hyecho의 영어의 의미는 Written by Hie (혜가 쓴 것이라는 의미)
@하늘-m1j3 жыл бұрын
누집아들인가요 고아인가요부모님 안게시나요 부모니이 반대하시 진않아나요 스님이여. 대단하다
@버들유-d9r4 жыл бұрын
공시생이라면 구독 ㅇㅈ?
@Lilyal-k4z4 жыл бұрын
유용수 놉
@vict89404 жыл бұрын
꿈의 여행지가 인도라고..? 티벳이겠지..더 자세히는 ...파미르
@East-Angan-Dalma4 жыл бұрын
개인적으로는 혜초스님이 과연 인도와 아랍을 여행한 최초의 한국인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기록으로 증명되는 최초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에는 과연 인도로 부처님의 흔적과 원본적 가르침을 찾아 떠났던 승려들이 한명도 없었을까하는 의문인 것이죠.. 혜초 스님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기 전에는 국적도 모르는 미지의 승려였던 것처럼 지금껏 찾아지지 않은.. 혹은 소실된 기록을 남긴 다른 승려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특히나 신라시대 때 아랍과의 교류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만큼 아랍과 인도와의 교역과 체험기를 기록으로 남겼던 무역상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어쨌든 어떤 의미든 간에 혜초스님이 위대한 여행기록을 남긴 자랑스러운 해동인.. 한국인인 것은 분명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