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유적지구 부여 공주 익산은 여행하기 참 좋고 의미있는 곳이죠 아름답고 뜻깊고요...
@이청룡-z6k4 жыл бұрын
백제 국 의자왕에 관한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모두 승리 !!!
@김대순-n6f4 ай бұрын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S호도라3 жыл бұрын
잘봣습니당~^^
@たま-n3p3k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alcohollovetv58934 жыл бұрын
잘봤습니다 굿
@timesun6304 жыл бұрын
오늘날까지 남자의 가슴을 울리는 사나이 계백
@하이러너-s3r4 жыл бұрын
북한에 정통성을 둔 전교조 교육과 지역주의 열등감이 뒤섞여 신라 통수 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름 하여 "백제의 뒷통수 열전" ------------------------------------------------------------------------------------------------------------------------------------- 백제는 항상 왜의 군사지원을 받음 광개토대왕비에는 유독 백제를 “ 백잔”이라 비하함 고구려가 거란의 공격을 받을때 백제는 고구려의 뒷통수를 쳐서 공격함 393, 4, 5년 백제 아신왕은 왜의 도움을 받아 숙부인 진사왕 뒤통수를 쳐서 죽이고 왕위에 오름 392년 왕권 교체 구테타도 왜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 백제 아신왕은 직접 광개토한테 무릎을 꿇고 "앞으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 맹세함 396년 또다시 뒤통수를 계획한 아신왕은 왜의 군사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냄 397년 왜와 통교를 끊겠다고 무릎꿇고 서약했으나 또 뒤통수를 치고 왜를 끌여들임 399년 왜를 끌여들여서 한 짓이 신라를 공격한것임 ㅋㅋ 이때 또다시 고구려 뒤통수 칠 준비하자 백성들이 신라,왜로 도망가고 백제왕족 유즈키노키미 가 대인구를 이끌고 야마토로 망명 399년 이때 왜국의 군사지원을 얻으려고 태자도 보내고 아직기,왕인도 보내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왜국을 키워줌 (6.25때 일본이 폭풍성장 한것처럼)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무릎 꿇고 맹세했던 백제는 또다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침 그것도 왜놈을 끌여들어 고구려를 또 침 404년 심지어 고구려는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종특 뒤통수가 제대로 나온거임 404년 백제 아신왕이 죽자 동생 훈해가 섭정을 했는데 막내동생이 뒤통수를 쳐서 형을 죽이고 왕이 됨 405년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왜에 볼모로 갔던 전지가 왜의 도움을 받아 삼촌을 뒤통수 쳐 죽이고 왕이 됨 405년 또다시 왕권 교체 구테타를 왜의 도음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ㅋ 이게 수백년에 걸친 사건이 아니라 단 10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로 백제의 통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굉장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배신과 뒤통수의 심볼이 바로 "백제"임 2탄 왜놈을 끌여들여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비유왕) 고구려에 밀려 수세에 몰리자 염치없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 ㅋㅋㅋㅋ 그것도 비굴하게 3번이나 조공 갖다바치며 요청함 433년 7월, 434년 2,9월 그 후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여러번 도와줬지만 백제는 또 신라의 뒤통수를 침 (관산성전투 후술하겠음) 백제 개로왕은 중국에 비참하게 구걸하면서 고구려 좀 쳐달라고 애걸복걸 함 472년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위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정벌에 나섬 475년 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뒷구멍으로 도망쳤는데 백제인 배신자 재증걸루, 고이만년의 뒤통수에 참수당함 475년 이때 먼저 도망간 백제 개로왕 동생 문주는 신라에 구원 요청을 하고 신라는 구원군 1만명을 보냄 이때 백제 귀족 군사는 신라 지원군 보다 더 늦게 도착하는 뒤통수를 때림 ㅋㅋ 백제 문주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비참하게 살아남음 한국사 역사상 강제로 쫒겨서 수도를 옮긴건 백제가 유일함 ㅋㅋㅋ 이때 또 골때리는건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일부 지방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는 통수까지 침 한성이 무너진 이후로 백제 왕권은 그야말로 좁밥이 되어 대성팔족의 뒤통수가 시작 됨 결국 백제 문주왕도 백제 배신자의(좌평 해씨가문) 뒤통수로 죽임당함 477년 문주왕이 죽자 아들인 심근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심근왕 세력인 진씨 가문과 해씨 가문이 서로 배신하며 뒤통수 쳐서 수천명의 군사가 죽음 ㅋㅋㅋ 결국 심근왕도 3년만에 의문사로 죽음 (진씨 가문의 뒤통수로 추정함) 479년 진씨 세력은 다음으로 동성왕을 지들 손으로 뽑음 479년 왜를 끌여들여 계속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 염치없이 동성왕때에 또 비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 청혼을 요청함 493년 신라왕은 자신의 여식을 보내지 않고 신하인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냄 ㅋㅋㅋ 493년 동성왕은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결혼 함 동성왕 또한 어김없이 백제 배신자 백가의 뒤통수에 의해 죽임당함 501년 백제왕은 대부분이 배신자의 통수 통수 통수에 의해 죽었음 ㅋㅋㅋ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뒤통수로 죽임을 당함 21대 개로왕은 고구려 뒤통수 치다 백제인 배신자 고이만년에게 참수당하고 26대 성왕은 신라 뒤통수 치다 참수당함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뒤통수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함 백제는 정권 교체 자체가 곧 왕의 시해 즉, 뒤통수를 뜻하는거였음 3탄도 기대하세요^^ 아 참고로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예요 백제 말기까지 백제와 군사충돌이 있었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벡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예요
@kyucho32512 жыл бұрын
계백 장군이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장군임
@뒤자인어2 жыл бұрын
정말충신이죠 계백은
@뒤자인어2 жыл бұрын
장군 최고의장군이죠 계백장군님은
@wealthyj423411 ай бұрын
무령왕도 일본출생 일본놈. 일본은 백제와 마한은 같은 피. 마한과 백제 지역의 반일은 일본과 같은 혈통을 숨기기 위한것이고 신라와 가야지역의 반일은 마한, 백제와 민족도 다르고 나당연합군과 일본연합군과 싸울때부터도 그렇고 백제패망후 마한, 백제의 혈통 일본이 신라를 많이 공격했고 눌지왕 셋째 동생 미사흔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 박제상이 구출해오던 사건도 있었기에 마한과 백제의 같은 혈통 일본에 쌓이고 쌓인 정신적 반일이고 고구려지역의 반일은 김정일 생모도 재일교포이고 김정일 아버지 김성주도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을 베낀 인물이라 인민을 통치하기 위한 도구적, 통치적, 정치적 반일이지. 대마도인들은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압력을 행사 배 900척, 고려병사 2만명 차출을 요구(충선왕처럼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 정통 몽고인은 아니지만) 몽고혈통 충렬왕이 이를 받아들여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1274년 10월 30일 출정 10월 5일에 대마도에 도착하였으나 태풍으로 실패. 이때 나온 말이 카미카제이고 1281년도 재침략했으나 실패. 후에 1389년 창왕의 명령에 의해 대마도가 정벌. 그 후 대마도인들은 대마도에서 147킬로 떨어진 일본보다 대마도에서 49킬로 떨어진 조선에게 대마도에 편입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선이 버림. 그리고, 일본이 2차대전 패망후 이승만이 이승만 라인을 그어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하려 했으나 한국전쟁 발발해서 우리가 스스로 놓친 곳이고 그래서 대마도인들은 조선때 자신들을 받아주지도 않고 고려때도 몽고와 함께 공격당해 자신들의 고향땅임에도 조선과 한반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고 또, 1592년 정명가도 외친 토요토미(하시바) 히데요시도 백제계임. 자신을 따르지 않는 영주들에게 토지보상 해줄곳이 없어 베이징에 본부를 설치하고 인도까지 처들어간다는 골조의 임진왜란도 실제는 신라에 패해 한반도에서 쫓겨난 자신들의 선조 백제의 고향땅을 찾기 위함이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신라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무리들의 선봉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이시다 미츠나리, 모리 데루모토 등의 백제계를 물리치고 일본 전국통일을 완성. 그때부터 영주들의 재산을 탕진시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과 에도에 짱박혀 조선에 침공하지 않은 신라계 장수라는 이유가 맞아 떨어져 1607년부터 1801년까지 총 12회 이즈하라 서산사에서 묵게하고 이끼와 하카타 통해 (1번은 일본과의 의견이 맞지 않아 대마도에서 되돌아감. 그래서 일본 방문은 총 11회) 닛코까지 방문하게 되었는데 조선통사사도 도쿠가와 막부가 맞아들임. 그뿐 아니라 역관들도 다녀감. 아이러니한게 일본에 맞서 항일운동 하시던 대마도 수선사의 최익현 선생 기념비는 뜻있는 일본인과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하나회에서 만듦. 그외 어느 대통령 및 여야 정치인들은 다녀가지도 않음. 나가사끼 원폭 기념관 엘리베이터 타는 곳 옆에 세로 약 70. 가로 30 정도 되는 재일조선인 원폭 피해자 기념비는 대통령 및 여야 정치인들은 관심도 없었고 뜻있는 일본인들과 재일교포분들이 세움. 이즈하라의 가네이시성터 근처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의 그 주인공 덕혜옹주께서 매일 정신이 아프셔서 한밤중에 소복만 입고 돌아다니신다는 것도 육영수여사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알려서 1969년 한국으로 모신거임. 일본에 의해 이병도가 집필한 역사책으로 좌파, 우파가 지들 꼴리는대로 역사 만드는 나라가 한국이지만 마한과 백제는 정통 일본은 맞는데 정작. 마한, 백제 지역인들은 일본의 우수한건 자신들로부터 건너갔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한테 불편한 진실은 반일로 커버 치는 이중잣대 오짐. 마한,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다 민족이 다른데 마한을 흡수한 친일국가 백제가 친중국가 신라에게 패하고 또 663년 일본에서 나니와에서 4만2천명을 교코쿠가 해동증자 돕자고 부여풍,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에 유능한 아베노 히라후까지 나섰는데 패해서 이스라엘처럼 한반도를 노린것이고 신라시대때 신라를 못살게 군것이지. 천황의 부계 무령왕도 일본 각라도 출생, 모계도 백제 귀족 화을계 딸 고대신립. 하시바 히데요시도 백제계. 분로쿠게이초 이후 세키가하라에서 신라계 도쿠가와가 승리하고 1607~1801년까지 영주들의 재산을 탕진 쉽게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던 그와 조선 임진왜란에 출전하지 않은 것 그다음에 신라계 후손이라는 게 맞아 떨어져 조선통신사가 다녀 가게 됨. 그래서 오리지날 토착왜구는 우리나라 서쪽 지역임. 그래서 우리나라는 위쪽으로 고구려. 좌측으로는 백제. 우측으로는 신라계. 좌측 지역이나 좌파 지역에서 하는 반일 운동은 자신들의 핏줄을 속이기 위한 반일운동임. 진짜 토착왜구는 우리나라 서쪽 지역임. 매년 천황 제 사단들이 부여에 와서 제사 지내고 감. 그리고 일본 전역에 있는 전방 후원분은 영산강 아래쪽에 분포 되어 있음. 6.25전쟁 전에 북한의 내각이 진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조사받던 친일파 였음. 남한의 내각은 항일 운동가였음. 그리고, 김정일 앞 어머니도 일본 재일교포. 북한과 남한의 남로당과 그리고, 특정지역과 남로당과 빨치산 그 후손에 의해서 남한의 역사가 완전히 토착왜구를 다른 지역에다 덮어씌움. 자신들이 일본인의 선조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하긴. 고려 충선왕도 쿠빌라이칸 손자. 아직도 우린 하나의 나라가 아님. 매년 부여에 천황사절단 제사 지내러 옴.
@elite05064 жыл бұрын
예식진 개새만 아니었어도 천혜의 요새 웅진성에서 버티는 동안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 포위해서 백제가 생존했을 수도 있는데... 너무 아쉬움
@은나라가고조선4 жыл бұрын
그 예식진 놈 신라의 뇌물을 잔뜩 쳐먹었겠죠. 신라가 대륙의 멸망잔존세력이 한반도에 잠입해 세력을 굳힌후 신라라 칭한거라면서요
@완안뿅4 жыл бұрын
@@은나라가고조선 신라뇌물 먹은애는 임자라는애고 예식진은 중국뇌물먹었겄지
@은나라가고조선4 жыл бұрын
@@완안뿅 와 정말 대단하군요, 여튼간에 그신라지배층흉노눔들이 아직도 일제시대때패권잡아 이나라를 다스리니 답답하여이다
@완안뿅4 жыл бұрын
@@은나라가고조선 흉노는중국이아니다 싫어할이유는없다
@완안뿅4 жыл бұрын
@@은나라가고조선 임자가 좌평이었나 암튼 백제는 끝났다고봐야지 좌평은 최고관직인데
@어찌끄나.테니스노래4 жыл бұрын
힘든 마지막왕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user-oj4fq5gg1b2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중 신라는 비단과 나침반으로 유명했던 나라입니다. 양자강 근처에 경주,팔공산,토함산,대구,등이 있고,신라가 양자강에 가까이 있었기에 배기술과 항해술이 발전했고, 비단을 만들어 냈고, 나침반을 만들어 무역을 할 수 있는 나라 였죠. 이름 자체도 비단:신, 나침반:나 신라 입니다.(구당서 ) 이런 신라가 1000년간 중국대륙에 강성하게 존재했기에 아랍에 신라=신나= 실라=실나=지나=CHINA 로 아랍에 알려줬죠.(알 리드리시) 장보고의 청해진이 산동반도 이며, 그 곳에 장보고의 기록과 같이 나오는 법화원이란 절이 존재하고, 해상왕 장보고 동상을 모셔 놨죠. 장보고는 재물의 신이 되어 아직도 사랑 받고있습니다. 신라1세기 신라의 남쪽에 금관가야가 나라를 세웠다.(삼국유사) 금관가야도 초기는 중국대륙에 존재했다는 증거죠. 신라의 일식기록위치가 양자강부근 일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해상왕국으로 22담로를 거느린 대제국이 됐고요. 백제도 황하부근에서 배기술과 항해술을 발전시켜 무역과 국방력을 강화시켰죠. 백제가 위나라를 쳐들어가 격파했다(남제서),백제는 벽돌로도 성도 쌓았습니다. 고구려,백제 전성기에 유,연,제,노,오,월나라를 빼앗아 취하였다.(삼국사기) 백제가 강성해지자 한반도, 일본,타이완(와=왜) ,마카오,홍콩,등 22담로를 두어 다스렸죠. 일식기록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그 나라 일식기록은 다른 나라, 다른 땅에서 관측할 수 없습니다. 그 일식이 일어나는 그 지역에서만 관측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 일식기록은 과학적 증거입니다. 백제가 패망하자, 그 땅을 고구려의 전신 발해와 신라가 나누어 가졌다.(구당서) 백제가 망하고 당나라가 백제땅에 5도독부를 두었다.(구당서) ㅡ대륙백제의 영토영역인 지역에서 (산동반도와 산동반도의 서쪽,남쪽,서남쪽) 5도독부중 덕안과 동명이 존재하며, 그 주위에 당항성,침구(탄현),무녕이 존재합니다. 계백장군이 전투하다 전사한 곳 황산벌이 한반도에 없습니다. 황산벌이 있다는건 황산이 있다는 것입니다.산동반도에 황산이 있고, 웅진성이 있고, 백제의 강 -백강(백마강)이 존재합니다. 이 지역에서 수 많은 백제의 유적,유물,지명이 나옵니다. 전주,기린봉,태평,안덕,화산,원산이 대륙백제의 영토에 똑같이 존재합니다. [삼국의 일식기록 고구려-바이칼호수부근 백제-황하부근 신라-양자강부근(삼국사기)] 요는 태행산맥입니다. 북에서남으로 흐르는 황하의 동쪽에 북에서남으로 길고 아주 험하게 뻗은 태행산맥이 요입니다. 태행산맥 (요)동쪽에 요동성이 있고,고려성,고려진,고려영, 안평,동황성,평양,고려촌,바닷가에 고려포,가 있고, 태행산맥 남쪽끝에 아버지 광대토대왕을 기리는 영락궁이 있고,역락성,영락진,영락영 이 있고, 태행산맥 (요)서쪽에 태원이 있습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산동반도에서 남진하여 한성을 빼앗은 겁니다.(한나라가 있던곳이어서 한성,한수가 있는 겁니다.그곳이 세월이 흘러 백제의 영토가 된것 이고요)한성,한수가 회수서쪽에 있습니다.양자강 근처지요. 이것이 황하에서 양자강까지 차지한 남진정책이죠.수 많은 고구려 유적, 유물 ,지명 이름, 등이 존재합니다.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우물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고 당나라가 탑을 세운 곳인 몽룡보탑위치 산동반도 남쪽에 있고요-(현존) 살수대첩에서 살수의 뜻은 누렇다는 뜻의 투르크어 사르와 같습니다. 즉 누런 물을 뜻합니다.(아직도 사용하는말 -살구,살색 의 살과 같습니다.-살는 누런색 입니다. 황하는 누런바다이고(하는 바다다 ㅡ사마천 사기;황하를 바다로 인식), 누런 바다(하)로 연결된 지류중 누런물이 흐르는 물줄기 입니다. 이 곳이 살수입니다.(을지문덕 살수대첩) 서해바다 북쪽 바다는 "발해만" 이라고 표기ㅡ산동반도와 한반도 사이 북쪽바다.(구당서)당나라가 차지했으면 당만이라고 했어야죠. 그리고 후삼국, 신라,후백제,후고구려를 통일한 고려(고리) 또한 신라와 백제의 배기술과 항해술을 이어받아 무역을 통해 고려(고리)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요소중 하나가 됐죠. 그래서 고려(고리)도 아랍에 알려지며 고리=KOREA 로 알려졌죠. 이렇듯 우리나라는 배기술과 항해술이 뛰어나서 아랍까지 무역을 하던 나라입니다. 고려는 요의 10만대군과 싸워 이긴 나라 입니다. 송나라는 졌죠, 고려가 송보다 크고 강하다는 겁니다. 명나라 주원장이 송과 고려의 땅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송은 망하고 없어 인사를 못했지만, 그때까지 고려는 존재했기에 주원장이 고려왕에게 , 옛 주인에게 인사를 한겁니다. 조선에 와서는 고려때의 배기술의 하나인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활용했고요. 우리나라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발해,고려는 강성해질때 마다, 육지로 이어지지 않아도 배로 진출하여 동떨어진 지역을 차지하기도 하고, 땅이 넓거나 멀어 서경,동경,남경,북경을 두기도 했습니다. 일식기록 지역에 가면 그 곳에 유물과 유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메여서 연구하면, "모른다, 알수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많습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일본 등 모든 곳을 연구해야 합니다. 동이족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이다. 왜는 와다.(구당서) 왜의 초기 일식기록 타이완(=타이와=대와=대왜) 고대(고조선)로 가면 더 넓은 영토가 우리나라 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제대로된 역사를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나라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알려하면 역사들을 두죽박죽 섞어서 알지 못하게 하죠. 그런 일을 하는 곳이 교육부,강단사학계,국사편찬위원회,문화재청,등 이죠. 그래서 교육부,강단사학계,국사편찬위원회,문화재청 등을 개혁해야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일제시대때 일본식민사학자놈들 쓰다소키치,이케우치 히로시,이마니시 류,가루베 지온,등이 써준 역사입니다. 일제식민사학자 놈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교육부,강단사학계,국사편찬위원회,문화재청,등을 완전히 장악하여 100년 가까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가들은 한곳에만 그 나라가 있는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도 우리나라의 영토가 있었기에 일제식민사학자 놈들이 조작하기에 그 럴듯하게 보이기 좋았죠. 그리고 한반도에서 못 찾으면 억지로 지정하거나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이 깨어나서 역사를 지켜줘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일제 마지막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한말이 "조선은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섞어서 재창조해 놨거든.... 우리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정말 아베노부유키가 있는 듯이 똘뚤 뭉쳐서 일제식민사학자 놈들이 써준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매년 일본 천황 생일잔치에 인맥 쌓으려고 참여하는 정치인도 있고, 일본 군대창립기념일에 참여하는 정치인도 있겠습니까! 이런 글을 보면 공격하는 놈들도 있고요, 우리나라 사람이면 좋은 정보 공유받아 좋아하는것이 당연한 마음인데....... 그 놈들은 이런 글 조차 단속 차원에서 공격하는 거죠. 아베노부유키 후손이나 다름 없는 놈들이죠. 얼마나 개혁이 필요한 부분인지 공유합니다. 많은 분들이 역사 채널 시청 할 때마다 이 글을 올려주어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하고 역사계쪽 개혁에 동참하길 바랍니다.ㆍㅡ
@아이러브유-r3x3 жыл бұрын
좋아유
@전투불패3 жыл бұрын
삼국사기 최치원열전....'고구려 백제가 강성할때는 백만 강병으로 오나라, 월나라, 제나라, 연나라 를 침공하여, 중국의 아주 큰 해가 되었습니다.'
@ManChoitube3 жыл бұрын
소중한 영상 고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예식 장군의 배임도 언급되면 어땠을까 합니다. 최만드림
@천재인가바보인가4 жыл бұрын
36:34 여기서 부터 보시면 ᆢ
@귀한얼굴4 жыл бұрын
언제 제작된 영상이지? 예식의 배신으로 의자왕이 잡힌 걸 모르나? 아무래도 예전 영상 같군.
@조남정-y9v4 жыл бұрын
초선인 부여군수가 인터뷰 나온거 보면 2018년 이후 같네요.
@northwingvoidby58674 жыл бұрын
전라도하면 반역, 배신이제~
@Espresso_crema4 жыл бұрын
@@northwingvoidby5867 이러니 우리나라가 발전이 없는겁니다. 그냥 조선인들 국민성이 누구에게 이용당하기 딱 쉽습니다 몰아가기 잘하구요
@northwingvoidby58674 жыл бұрын
@@Espresso_crema 조선족놈은 중국으로돌아가라
@northwingvoidby58674 жыл бұрын
@@Espresso_crema 대깨문들 하는짓거리나 전라도 종자들 하는 짓거리나 똑같은걸 보니 인터넷의 거지 종자들이 다 전라도 것들~ 개소리 적어놓고 댓글은 막고 지우고 ㅋ
@박민준-x9x8j4 жыл бұрын
백제의자왕♥계백장군님 성충흥수백제영웅입니다
@박민준-x9x8j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하이러너-s3r4 жыл бұрын
북한에 정통성을 둔 전교조 교육과 지역주의 열등감이 뒤섞여 신라 통수 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름 하여 "백제의 뒷통수 열전" ------------------------------------------------------------------------------------------------------------------------------------- 백제는 항상 왜의 군사지원을 받음 광개토대왕비에는 유독 백제를 “ 백잔”이라 비하함 고구려가 거란의 공격을 받을때 백제는 고구려의 뒷통수를 쳐서 공격함 393, 4, 5년 백제 아신왕은 왜의 도움을 받아 숙부인 진사왕 뒤통수를 쳐서 죽이고 왕위에 오름 392년 왕권 교체 구테타도 왜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 백제 아신왕은 직접 광개토한테 무릎을 꿇고 "앞으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 맹세함 396년 또다시 뒤통수를 계획한 아신왕은 왜의 군사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냄 397년 왜와 통교를 끊겠다고 무릎꿇고 서약했으나 또 뒤통수를 치고 왜를 끌여들임 399년 왜를 끌여들여서 한 짓이 신라를 공격한것임 ㅋㅋ 이때 또다시 고구려 뒤통수 칠 준비하자 백성들이 신라,왜로 도망가고 백제왕족 유즈키노키미 가 대인구를 이끌고 야마토로 망명 399년 이때 왜국의 군사지원을 얻으려고 태자도 보내고 아직기,왕인도 보내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왜국을 키워줌 (6.25때 일본이 폭풍성장 한것처럼)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무릎 꿇고 맹세했던 백제는 또다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침 그것도 왜놈을 끌여들어 고구려를 또 침 404년 심지어 고구려는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종특 뒤통수가 제대로 나온거임 404년 백제 아신왕이 죽자 동생 훈해가 섭정을 했는데 막내동생이 뒤통수를 쳐서 형을 죽이고 왕이 됨 405년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왜에 볼모로 갔던 전지가 왜의 도움을 받아 삼촌을 뒤통수 쳐 죽이고 왕이 됨 405년 또다시 왕권 교체 구테타를 왜의 도음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ㅋ 이게 수백년에 걸친 사건이 아니라 단 10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로 백제의 통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굉장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배신과 뒤통수의 심볼이 바로 "백제"임 2탄 왜놈을 끌여들여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비유왕) 고구려에 밀려 수세에 몰리자 염치없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 ㅋㅋㅋㅋ 그것도 비굴하게 3번이나 조공 갖다바치며 요청함 433년 7월, 434년 2,9월 그 후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여러번 도와줬지만 백제는 또 신라의 뒤통수를 침 (관산성전투 후술하겠음) 백제 개로왕은 중국에 비참하게 구걸하면서 고구려 좀 쳐달라고 애걸복걸 함 472년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위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정벌에 나섬 475년 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뒷구멍으로 도망쳤는데 백제인 배신자 재증걸루, 고이만년의 뒤통수에 참수당함 475년 이때 먼저 도망간 백제 개로왕 동생 문주는 신라에 구원 요청을 하고 신라는 구원군 1만명을 보냄 이때 백제 귀족 군사는 신라 지원군 보다 더 늦게 도착하는 뒤통수를 때림 ㅋㅋ 백제 문주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비참하게 살아남음 한국사 역사상 강제로 쫒겨서 수도를 옮긴건 백제가 유일함 ㅋㅋㅋ 이때 또 골때리는건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일부 지방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는 통수까지 침 한성이 무너진 이후로 백제 왕권은 그야말로 좁밥이 되어 대성팔족의 뒤통수가 시작 됨 결국 백제 문주왕도 백제 배신자의(좌평 해씨가문) 뒤통수로 죽임당함 477년 문주왕이 죽자 아들인 심근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심근왕 세력인 진씨 가문과 해씨 가문이 서로 배신하며 뒤통수 쳐서 수천명의 군사가 죽음 ㅋㅋㅋ 결국 심근왕도 3년만에 의문사로 죽음 (진씨 가문의 뒤통수로 추정함) 479년 진씨 세력은 다음으로 동성왕을 지들 손으로 뽑음 479년 왜를 끌여들여 계속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 염치없이 동성왕때에 또 비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 청혼을 요청함 493년 신라왕은 자신의 여식을 보내지 않고 신하인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냄 ㅋㅋㅋ 493년 동성왕은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결혼 함 동성왕 또한 어김없이 백제 배신자 백가의 뒤통수에 의해 죽임당함 501년 백제왕은 대부분이 배신자의 통수 통수 통수에 의해 죽었음 ㅋㅋㅋ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뒤통수로 죽임을 당함 21대 개로왕은 고구려 뒤통수 치다 백제인 배신자 고이만년에게 참수당하고 26대 성왕은 신라 뒤통수 치다 참수당함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뒤통수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함 백제는 정권 교체 자체가 곧 왕의 시해 즉, 뒤통수를 뜻하는거였음 3탄도 기대하세요^^ 아 참고로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예요 백제 말기까지 백제와 군사충돌이 있었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벡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예요
@insideq49904 жыл бұрын
@@하이러너-s3r 잘보았습니다, 6부촌중 하나인 마한 ,모르는 분들 많을겁니다 .
@박신숙-o9k4 жыл бұрын
참 이해가 안가네요 ㅠ ㅠ 자기네들 지금 그 시대 사람들이고 ? 지금은 다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들 아닌가 ? 왜들 역사를 말하면서 싸우고 난리들이고 지금 시대에 고구려가 어디있고 신라가 어디있고 백제가 어디 있는고 역사는 알아야 하겠지만은 지역감정 싸움은 좀 불필요한 감정싸움인뜻 싶은데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미제드론4 жыл бұрын
과거의 사실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마음보다 현재의 불만과 열등감을 폭발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어그로끌어서 선동하는 사람들이 문제이지요 사실 예식이 의자왕을 강압적으로 결박하여 끌고나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당측에서 그런 사실이 있다면 기록 안할 이유가 없는데 다만 의자왕과 같이 나왔다는 점 그리고 당에 가서 예식집안이 벼슬 얻고 지냈다는 점을 근거라고 예식은 배신자 매국노 의자왕은 비운의 군주 이런 식으로 여론을 형성하는데 사실 당시 백제가 처한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당군 13만이 바다를 건너는 시점부터 99%는 백제멸망을 피할수 없었습니다. 의자왕은 백제 필생의 전략을 제안한 윤충 성충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이 바다를 설마 건너겠어 하는 심정으로 외교를 등한시하다가 동서 양면으로 침공군을 맞이했고 상륙한 당군을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했지만 백제군이 야전에서 계속 패하고 결국 한다는게 자기 아들에게 도성을 맡기고 본인은 기껏 코옆인 공주로 도망칩니다. 이건 그냥 혼돈의 카오스 상황인거지 무슨 전략적 대비책 그런게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미제드론4 жыл бұрын
예식 배신자설 이야기가 갑자기 대두된게 역사추적이라는 케베스에서 오래전에 내보낸 프로였습니다. 시청률을 높이려면 어그로성이 짙은 제목과 내용이 있어야 하는거 이해는 하지만 확실하게 검증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공산성주 예식의 배신으로 백제가 결정적으로 무너진것 처럼 대중들이 인식하게 했으니 그 해약이 좀 지나친것 같습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미지를 예식에다 투영해서 분노의 댓글들을 달게 되었습니다. 의자왕의 행적과 백제의 상황에 대해 조사해보면 백제로서는 뭘 어떻게 할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sangjunlee7939 기벌포에서 참패 / 의직2만군사 전멸 / 도성 30리밖 1만 전사자 내고 참패 / 태자에게 도성 맡기고 웅진으로 도주 / 항복 - 이게 전략적 판단이라고요?? 신당서 삼국사기 예식진묘비 어디에도 포박이니 압송이니 하는 내용 없는데요 신라 보급로 남천정(이천)에서 옥천 금산추부면까지 확보한지 이미 수십년 넘었고(금산 추부 동편에 신라석성과 고분 수십기 확인됨) 거기서 대둔산 지나면 바로 논산 연산면 즉 황산벌입니다. 보급에 아무 문제 없습니다. 백제 10만 군에 근접 자료 없습니다. 사상자와 부흥전쟁시기 각 성 수비병들 추산해서 아무리 높이 잡아도 5만 넘기기 어렵습니다. 웅진성이 난공불락의 요새마냥 역사추적에서 이야기했는데 공산성 한번 가보시면 느낌이 많이 다르실 겁니다. 성벽이 금강과 면해있는 옛나루터 앞에 배 붙여놓고 보병들 쏟아내면 대책 없습니다. 더군다나 육지쪽 성벽도 방어력이 그닥 좋지 않으며 성곽길이에 비해 내부 면적이 좁은 구조라 많은 인원이 오랜시간 버틸수도 없습니다.
@미제드론4 жыл бұрын
@@sangjunlee7939 첫번째 상륙을 막지 못해 패한것을 기벌포전투로 잘못 썼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예산 대흥면의 임존성과 공산성은 서로 옆에 있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숲-y8n Жыл бұрын
부여를 갈 때마다, 계백장군을 본다. 의자왕의 패배는 아쉽다. 그래도 신라 대야성을 정복한 때도 있었는데...
@쎔워카-t4v4 жыл бұрын
가슴이 아프다~~~~22담로를 보더라도 동 아시아 강국인 백제가 무너졌다는거~~
@scap44374 жыл бұрын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전라도는 백제가 아닙니다 전라도는 6세기까지 독자세력을 유지하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동성왕 무령왕때에도 여러차례 전라도 정벌의 기록이 있으며 백제 말기에 식민지 형태로 복속되었을뿐 벡제인의 정체성은 한번도 가진적 없던 지역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왜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전라도에만 있다는것이 그 대표적 근거죠 백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고 많이쳐줘봤자 익산까지이며 그 밑 전라도는 백제인의 정체성과 다른 지역입니다 정작 충청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전라도 사람이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우기는거 보면 너무 웃기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mun49464 жыл бұрын
@@scap4437 그것도 그렇고 각종 영화에서 백제는 전라도 방언, 신라는 경상도 방언을 썼으니 일반 국민들 인식이 그래된 영향도 클듯 합니다.
@초현-q8y4 жыл бұрын
@@scap4437 공부좀하시오 아님 조용히 하던지 아직도 저런상식을 가진사람이 있네ㅉㅉ
@투투-b6q3 жыл бұрын
@@초현-q8y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는 시점은 문헌에 기록된 백제 지방제도인 5방제 정비와 옹관고분이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는 6C 중엽. 완주 배매산성, 순천 검단산성 등은 6C 초까지 영산강 유역 마한이 백제 영역이 아님을 보여줘. 5C 말 제작된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 제작 기법·양식, 백제 출토 금동관과 크게 달라. 5세기 후반 들어 차령산맥을 넘어 전북 지역으로 남하하던 백제는 노령산맥 이남 진출이 강력한 마한 남부 연맹체의 반발로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지리산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남원을 경유하여 섬진강을 통해 광양만으로 나아가려 했다고 본다. 그러나 상기문, 마련 등의 국가들이 6세기 중엽 무렵까지도 독자적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이러한 의도는 여의치 않았다고 본다. 말하자면 6세기 중엽까지도 마한 연맹체는 굳건히 연맹체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병도 박사는 왜 마한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나? 양직공도 백제 방소국 기사는 간접적이나마 521년까지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에 통합되지 않은 마한 제국들이 상당수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며, 이것만으로도 기존 통설인 369년 근초고왕 병합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마한의 기록을 볼 때, 근초고왕 때 분명히 멸망하였다고한다. 하지만 후에 다시 등장하니 나는 이게 큰 의문이다. 5세기 이후 금강 이남 지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中國正史 百濟傳, 『日本書紀』 應神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두 종류의 사료 모두 5세기까지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역화를 관철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5세기 이후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여러 사료 『三國史記』·『日本書紀』, 中國正史 百濟傳 등 여러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영산강 유역이 6세기 중반의 어느 시점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무령왕대까지 ‘복속’에 머물렀던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소국들이 성왕대에 영역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한이 빨리 사라졌다는건 친일 논란이 있는 이병도 박사의 주장인데.. 마한이 부끄러운 나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부정하시나요;
옛날에도 동맹! 지금 21 세기도 동맹 ! 자유 국가와 동맹! 힘길러 세계를 이끌어갈 1위 국가로 만들자!
@허황후-y7x4 жыл бұрын
상고사를 들먹이지 못 하게 하는 중국의 개입 된 법안입니다.
@산모롱이-h9y4 жыл бұрын
예식장군의 반란으로 묶여 항복당한 의자왕.예식은 당나라에서 대장군이 되어 출세했다.
@하이러너-s3r4 жыл бұрын
배신의 아이콘 백제 개로왕 또한 백제 배신자들에 의해 참수당함 의자왕 또한 백제 장군 예식이 당나라에 갖다 바침
@madebycorea4 жыл бұрын
@@하이러너-s3r 배신과 뒤통수의 아이콘 신라 역사적 진실 외면말것
@user-yy6gv6bg6i4 жыл бұрын
@@하이러너-s3r 배신의 아이콘은 신라임 키워준 고구려 배신. 200년동맹인 백제배신하고 황해도접수. 의자왕에게 수도경주까지 털리고 멸망까지간거 당나라가 백제 없애주니 당나라배신. 후백제 견훤이 신라 경애왕으로만들어주니 백제에게 또다시배신하고 뒤질까봐 후백제배신 왕건에게 나라바치고 왕족.귀족들 도주ㅋㅋㅋ 신라역사자체가 시작부터 망할때까지 배신.찌질.뒷통수밖어없음 이건팩트ㅋㅋㅋ 스스로해낸건 왕건에게 나라바친거ㅋㅋㅋ 성장은 고구려덕분 최전성기는 진흥왕때 동맹백제통수치고 황해도 접수 망할때는 좁밥찌질이를 아량으로 대한 후백제통수 그뒤 뒤질까봐 왕건에 나라바치고 목숨부지ㅋㅋㅋ ㅆㅂ 역사랄게있냐? 찌질.배신.통수 뿐인데? 삼국통일? 너는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제일약한 찐따족노예삼아 아프리카정복하면 찐따족이 아프리카정복한게 되는거였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분이 당나라 노예였는데 통일드립은 너무웃기지 않음?ㅋㅋㅋㅋㅋ
@user-yy6gv6bg6i4 жыл бұрын
@@하이러너-s3r 신라가 가야에게 안뒤지고 생존가능했던이유는?ㅋㅋㅋㅋ 신라가 백제에게 안뒤지고 생존가능했던이유는?ㅋㅋㅋ 신라가 황해도 접수가능했던 이유는?ㅋㅋㅋ 신라가 백제접수 가능했던 이유는?ㅋㅋㅋ 신라 왕족.귀족이 생존가능했던 이유는?ㅋㅋㅋ ㅆㅂ 스스로한건 왕족.귀족들 백제에게 안뒤지고 살려고왕건에게 나라갖다 바친것뿐... 내말중 팩트아닌거 반박바람 ㅋㅋㅋㅋ 그래서 그지역이 좁밥정신발상지라 불리는거임ㅋㅋㅋ
@user-yy6gv6bg6i4 жыл бұрын
@@하이러너-s3r 신라왕은 초기 고구려가 임명했고 후기는 백제가 임명한건 아는지? ㅋㅋㅋㅋㅋ신라는 이간질.뒷통수.배신.구걸.찌질.말고 말할만 역사가 있는지 댓구점 ㅠ
@사극저장소3 жыл бұрын
발해도 한때는 해동성국이라 불리는 대제국이였는데 실제로 고구려보다 땅도 넗었는데 망하는데 2주걸림 내부배신으로 멸망한나라의 특징내부배신임 부흥군도 스스로무너진거지 나당연합에 져서 무너진거아님
@tschung53222 жыл бұрын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물리친 신라는 청천강이남을 차지하고 그넓은 고구려땅으ㄹ 당에 뺏아긴 서글픈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400년 역사를 넘어 고토를 수복해야합니다.
@jenith774 жыл бұрын
신라의 어이없는 당나라 끌어들이기. 사대주의의 비극
@hwashin18883 жыл бұрын
ㅋㅋㅋ 당은 선비족임 애초에 신라 왕가가 북방 민족인데 당이랑은 남남이 아님 여진이 애신각라 청의 기원이고.. 그리고 백제가 왜구랑 손잡고 신라 친거는 잊었는가?? 우리나라는 삼한에 기초를 두고잇음 애꿎은 역사 선동에 당하지마라... 제발좀 밑에댓글도잇네 북한에 정통성을 둔 전교조 교육과 지역주의 열등감이 뒤섞여 신라 통수 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름 하여 "백제의 뒷통수 열전" ------------------------------------------------------------------------------------------------------------------------------------- 백제는 항상 왜의 군사지원을 받음 광개토대왕비에는 유독 백제를 “ 백잔”이라 비하함 고구려가 거란의 공격을 받을때 백제는 고구려의 뒷통수를 쳐서 공격함 393, 4, 5년 백제 아신왕은 왜의 도움을 받아 숙부인 진사왕 뒤통수를 쳐서 죽이고 왕위에 오름 392년 왕권 교체 구테타도 왜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 백제 아신왕은 직접 광개토한테 무릎을 꿇고 "앞으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 맹세함 396년 또다시 뒤통수를 계획한 아신왕은 왜의 군사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냄 397년 왜와 통교를 끊겠다고 무릎꿇고 서약했으나 또 뒤통수를 치고 왜를 끌여들임 399년 왜를 끌여들여서 한 짓이 신라를 공격한것임 ㅋㅋ 이때 또다시 고구려 뒤통수 칠 준비하자 백성들이 신라,왜로 도망가고 백제왕족 유즈키노키미 가 대인구를 이끌고 야마토로 망명 399년 이때 왜국의 군사지원을 얻으려고 태자도 보내고 아직기,왕인도 보내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왜국을 키워줌 (6.25때 일본이 폭풍성장 한것처럼)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무릎 꿇고 맹세했던 백제는 또다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침 그것도 왜놈을 끌여들어 고구려를 또 침 404년 심지어 고구려는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종특 뒤통수가 제대로 나온거임 404년 백제 아신왕이 죽자 동생 훈해가 섭정을 했는데 막내동생이 뒤통수를 쳐서 형을 죽이고 왕이 됨 405년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왜에 볼모로 갔던 전지가 왜의 도움을 받아 삼촌을 뒤통수 쳐 죽이고 왕이 됨 405년 또다시 왕권 교체 구테타를 왜의 도음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ㅋ 이게 수백년에 걸친 사건이 아니라 단 10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로 백제의 통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굉장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배신과 뒤통수의 심볼이 바로 "백제"임 2탄 왜놈을 끌여들여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비유왕) 고구려에 밀려 수세에 몰리자 염치없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 ㅋㅋㅋㅋ 그것도 비굴하게 3번이나 조공 갖다바치며 요청함 433년 7월, 434년 2,9월 그 후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여러번 도와줬지만 백제는 또 신라의 뒤통수를 침 (관산성전투 후술하겠음) 백제 개로왕은 중국에 비참하게 구걸하면서 고구려 좀 쳐달라고 애걸복걸 함 472년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위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정벌에 나섬 475년 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뒷구멍으로 도망쳤는데 백제인 배신자 재증걸루, 고이만년의 뒤통수에 참수당함 475년 이때 먼저 도망간 백제 개로왕 동생 문주는 신라에 구원 요청을 하고 신라는 구원군 1만명을 보냄 이때 백제 귀족 군사는 신라 지원군 보다 더 늦게 도착하는 뒤통수를 때림 ㅋㅋ 백제 문주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비참하게 살아남음 한국사 역사상 강제로 쫒겨서 수도를 옮긴건 백제가 유일함 ㅋㅋㅋ 이때 또 골때리는건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일부 지방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는 통수까지 침 한성이 무너진 이후로 백제 왕권은 그야말로 좁밥이 되어 대성팔족의 뒤통수가 시작 됨 결국 백제 문주왕도 백제 배신자의(좌평 해씨가문) 뒤통수로 죽임당함 477년 문주왕이 죽자 아들인 심근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심근왕 세력인 진씨 가문과 해씨 가문이 서로 배신하며 뒤통수 쳐서 수천명의 군사가 죽음 ㅋㅋㅋ 결국 심근왕도 3년만에 의문사로 죽음 (진씨 가문의 뒤통수로 추정함) 479년 진씨 세력은 다음으로 동성왕을 지들 손으로 뽑음 479년 왜를 끌여들여 계속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 염치없이 동성왕때에 또 비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 청혼을 요청함 493년 신라왕은 자신의 여식을 보내지 않고 신하인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냄 ㅋㅋㅋ 493년 동성왕은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결혼 함 동성왕 또한 어김없이 백제 배신자 백가의 뒤통수에 의해 죽임당함 501년 백제왕은 대부분이 배신자의 통수 통수 통수에 의해 죽었음 ㅋㅋㅋ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뒤통수로 죽임을 당함 21대 개로왕은 고구려 뒤통수 치다 백제인 배신자 고이만년에게 참수당하고 26대 성왕은 신라 뒤통수 치다 참수당함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뒤통수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함 백제는 정권 교체 자체가 곧 왕의 시해 즉, 뒤통수를 뜻하는거였음 3탄도 기대하세요^^ 아 참고로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예요 백제 말기까지 백제와 군사충돌이 있었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벡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예요
@Silla__Kim.Yu-shin Жыл бұрын
속이다 시원하다 @@hwashin1888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아니야, 님 혹시 사비 출신이세요. 전 경주에 시조 본가가 있음, 사실 이런 말씀 하기 뭐한데 그때 문제가 있어요.6세기 그 있잖아요. 신라신국인거 유신공께서 기어이 일냈어요. 산신을 불러서 신검을 얻어 사비를 치죠. 산신께서 김유신공 많이 좋아하시더라고요. 대인 평가를 하셨어요. 경주 사람이면 단석산 다 알죠. 님이 그걸 아셔야 당니라도 이용함은 당은 백제와 존속 전쟁을 포기하지 않죠. 운명이라 신라가 알고 이용한 겁니다. 당나라 백성도 얼마나 노력했으면 당나라에 헌원인간 천신이 나타났다고 당서 6세기 기록되 있습니다. 신이 나타날 정도면 음양운동을 많이 쌓은거죠. 백성이 정성이 크다란 뜻입니다. 불평불만 적고 근면하고 즐겁게 학업을 이루고 국력을 오래 키우죠. 아시죠.
@whdeka773 жыл бұрын
♥
@당가-c9r7 ай бұрын
2024 6월11일 지금. 낙화암에서 백마강 보며
@dong-t2h4 жыл бұрын
중국사람(한족)이 아닌 북방의 유목민선비족이 세운 당나라, 당나라는 수나라와 같이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 이걸 둘다 이겼던 고구려 대단하다 우리민족
독립운동가겸 역사가로 유명하신 단재 신채호선생님께서 하신말씀 : 김춘추와 김유신이 외세를 끌여들여 우리형제국가를 친 죄는 용서할수없다 이들이 설령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되찾고 더나아가 중국본토까지 우리땅으로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이들의 죄를 용서할수 없을진데 작금의 학자들이 이들을 통일의 영웅이라 칭송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투투-b6q3 жыл бұрын
@@나라-y4g 신채호의 사학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교조주의적이며, 부정확한 사료 분석 및 자의적이고 왜곡된 해석 등으로 비판받고 있기 때문에 사학자로서의 주장은 대부분 한국 사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투투-b6q3 жыл бұрын
@@나라-y4g 신채호는 신라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24]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문제는 백제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개인적인 감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런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저서에 적었다는 점이다. 한때 교과서에 수십 년 동안 실려 있었던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설도 사실은 정인보와 신채호의 사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수준으로 쓴 것인데 과거 역사학계가 신채호를 맹목적으로 높이 평가하던 시절에 '신채호 선생이 이렇게 쓴 데에는 분명히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교과서에까지 수록해버린 것이다. 이후 오랜 재검증 결과 아무리 찾아봐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현재는 완전히 부정되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삭제되었다.
@HABAK-r6f5 ай бұрын
, 김홍정 장편소설
@유재훈-w2s4 жыл бұрын
왜 여전에 방송한 내용하고 다른거죠?
@saladin44914 жыл бұрын
일본서기 주장을 그대로 참고한 것도 보이네요. 타국 왕을 목메어 관청바닥에 묻는 행위는 일본같은 나라나 하는 짓이지 신분제가 철저한 당시 삼국시대에 타국왕이라도 대접을 해주는게 보통인데 거기다 성왕의 공주가 진흥왕에게 시집까지 간 마당에 그렇게 했다는건 말이 안되죠. 전멸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패했다는 것만 봐도 난전중에 사망했다는 게 맞는거 같습니다.
@투투-b6q3 жыл бұрын
일본서기가..우리 삼국사를 왜곡하는 사료도 보이긴 하나, 참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무조건적인 참조가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사료들을 철저히 교차검증해서 결론 내립니다
@timo11154 жыл бұрын
인재활용 실패와 외교력의 부재. 그리고 자만심 지금 시대에도 교훈이 될거같다.
@김대순-n6f4 ай бұрын
❤계백 충신 명장❤
@빠빠라빠삐코-b1c3 жыл бұрын
49:18
@JCST-TV4 жыл бұрын
三天을 패주라해서 승자의 장난질이 겠죠
@김영원-w3q4 жыл бұрын
역사 조작하지 마세요..... 세종실록에도 평양이 어딘지 모른다고 써있습니다. 즉, 세종당시의 조선에 평양이 없다는 얘기입니다...지금 평양은 세종때 정한겁니다. 알려진 평양만 7군데입니다.....평양은 수도 라는 일반명사입니다.
@nature51204 жыл бұрын
세종실록 몇년 기사예요? 좀 찾아보려구요
@김영원-w3q4 жыл бұрын
@@nature5120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중국 요녕성에 있었다...라는 중앙일보 신문기사 먼저 소개합니다. news.joins.com/article/17932613 다음은 원사 지리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東甯路 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 晉義熙後,其王高璉(장수왕)始居平壤城。 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 至王建,以平壤為西京。 - 元史 지리지2 동진 의희(연호) 이후, 고구려 장수왕 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했는데,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정벌한후, 그 영역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의 동남 천여리로 이동했는데, 옛 평양은 아니다. (고려왕)왕건 때에 이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현재의 압록강 - 평양거리는 200 km 미만이고요. 500여리 정도 됩니다. 1000리 떨어져 있지 않아요. 압록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죠. 난하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압록수 라고 적혀있죠. 현재의 압록강이.... 어떤 강의 지류 이던가요?...아니죠. 이 평양성도....원래의 평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장수왕이 천도한 것이니까. --- 세종실록에서 --- 정사를 보았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중략) 이렇게 해서 임금이 조선의 강역에 평양의 위치를 정하고 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된 것입니다. 즉, 장수왕의 평양성도...지금의 평양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 평양성.안시성이 다 만주에 있습니다. 처음 중앙일보 기사글에 보면 지도가 나오는데 그게 조선중기의 지도입니다. 그때의 평양위치가...지금의 평양위치죠. 세종실록의 기사 위치는 모르겠으니 님이 직접 함 찾아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nature51204 жыл бұрын
@@김영원-w3q 백제가 전주라니? 후백제를 말하는거 같은데 후삼국을 말할거 같으면 고구려의 수도는 개성이 되겠지요 백제의 수도도 모르는데 고구려의 수도를 알리는 만무하고 저도 평양성이 몇군데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백제가 371년 고구려를 공격해서 고국원앙을 죽인곳이 평양성인데 평양성 위치가 중앙일보 기사에 나오는 곳이라면 꼬여도 상당히 꼬이는데요?
@김영원-w3q4 жыл бұрын
@@nature5120 우리 역사서를 다 없애 버렸으니 그 역사를 찾는데...중국사서의 기록을 참고할수 밖에 없습니다. 왜 기를 쓰고....한국 역사책을 없앴을까요? 다만.... 지금의 역사는...일제가 조작해 만든 그런 역사라는 거죠. 지금 있는 내용이..맞지가 않아요. 하나씩 퍼즐을 찾아 나가야합니다. 지금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죠. 하다못해 한사군의 낙랑군땅에 패수가 흐르는데 발원지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써있습니다. 그게 왜 청천강입니까? 청천강은...서쪽으로 흐르는 강인데. 대한민국에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습니까? 그런 강줄기는...북경부근에 많이 있습니다. 물론...일본도. 중국도 자기네 사서쓸때 지들 유리하게 씁니다. 그래서 더 수수께끼 같지요. 그 틈새를 비집고..진실을 찾아가야 합니다. 임나의 북쪽은 바다에 접해있다. 이게 일본서기의 기록입니다. 임나가 한반도 남부지방이 될수가 없죠. 그런데...그렇게 일본이 주장하는대로 중국이 주장하는대로 그걸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쳐죽일 놈들입니다. 사서에 대한 검증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컴퓨터. 인터넷...세상 참 좋아졌네요. 거짓말을 할수가 없게 되었으니.....
@nature51204 жыл бұрын
@@김영원-w3q 말을 하실때는 피해의식은 최대한 숨기고 말씀하세요 ㅋㅋㅋ 참 안타까운게 한국인은 역사로부터 피해의식과 증오심만 배운다는것입니다 물어보지도 않은 일제가 어쩌고.. 중국이 어쩌고.... 임나일본부가 어쩌고....이런 얘기는 갑자기 왜 나오는건지? ㅋㅋㅋ 제가 묻고 싶은건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앙을 죽인곳이 평양성인데 님 생각은 어떤가 하는것입니다 백제가 요동만주 지역까지 진군하여 고국원앙을 죽인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근초고왕 광개토대왕 이런 분들 논하자. 정확한 도리를 많이 얻는다.
@허황후-y7x4 жыл бұрын
젤 먼저 심판의 나라는 중국입니다. 6개의 성으로 나뉘어 질 중국입니다. 중국 3세대는 사회주의를 무너 트립니다. 이젠 말세 끝에서 태평신대로 가야 할 시국입니다. 사회주의+자본주의=공존공영 중산주의!!!
@메리-n9k4 жыл бұрын
👍
@myeongcheolsin45524 жыл бұрын
편협한 반도 사관으로 편견을 가진 강단 사학자들 두뇌를 바꾸지 않고서야 우리 고대사를 밝힐수가 없다!
@luisj.91854 жыл бұрын
일부러 쌈싸먹으려고 사비성 비우고 웅진성으로 간건데 웅진성주의 통수로 의자왕이 잡혔음 아무설명없이 그냥 항복했다니요 여기까지 볼께요 ㅉㅉㅉ
@미제드론4 жыл бұрын
쌈싸먹긴 커녕 기벌포에 상륙하는 당군을 막지 못했고 의직을 막으러 보냈다가 패하고 의직 자신도 전사하고 도성 30리 밖에 온 나라안의 군사들을 긁어모아서 여섯군데 진을 치고 당군을 막았는데 그것도 대패하고 그러자 왕자에게 도성 맡기고 의자왕 본인은 공주로 튀고 이건 그냥 정신줄 놓은 상황입니다. 공산성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호왈 13만이라는 당군의 포위공격을 견딜수 있는 성이 절대 아닙니다. 의자왕이 좀더 현명했더라면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했고 너른 들에서 당군과 회전을 하지 말았어야 하며 청야를 할거면 공산성이 아니라 차라리 칠갑산이나 오서산 같은 산악지역으로 갔어야 그나마 견딜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의자왕의 실정도 분명 백제멸망의 한 원인인 것입니다.
@scap44374 жыл бұрын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전라도는 백제가 아닙니다 전라도는 6세기까지 독자세력을 유지하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동성왕 무령왕때에도 여러차례 전라도 정벌의 기록이 있으며 백제 말기에 식민지 형태로 복속되었을뿐 벡제인의 정체성은 한번도 가진적 없던 지역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왜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전라도에만 있다는것이 그 대표적 근거죠 백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고 많이쳐줘봤자 익산까지이며 그 밑 전라도는 백제인의 정체성과 다른 지역입니다 정작 충청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전라도 사람이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우기는거 보면 너무 웃기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의자 부여 신 내가 도울수 있는데 산왕으로 임명해 주면 내가 도울수 있소. 의자 지금 천국서 내글 보고 연락 주시오. 광주서 다시 시작합시다. 그리고 다시 사비로 옮깁시다. 찾아주오. 저주가 다 풀리길 바라나이다. 의자, 다시 도전하십시요. 그까이꺼 다시 시작해서 민심을 얻으소서. 삼신께 귀의하소서. 패망업이 커 죄가 크옵니다. 하오나 천손입니다. 죄를 빌고 다시 시작하죠. 자신감을 가지소서. 백성은 의자를 사랑합니다. 의자 할수 있소. 삼신께서 어찌 미워하 하겠소. 의자 능력 있소. 성충이 있고 계백이 있소. 나라는 곰이 지킬 것이니 편안함이 많소.
@ghwnsha6 ай бұрын
@@미제드론그당시 백제가 선택한 전략은 사비 포위전이 맞아 역알못아 ㅉㅉ 평지성이라 수비하기 어려운 사비성을 버리고 수비하기 좋은 웅진성으로 가서 지방군과 함께 사비성을 포위하는게 백제의 전략이야 ㅉㅉ
지금 사람을로서 백제인이니 신라인이니 고구려인이니 하는 것은... 맹신, 정확한 근거를 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tschung53222 жыл бұрын
의자왕의 3천궁녀라는 허무맹란한 거짖기록을 남긴 나뿐넘... 철저히 연구하여 바로잡아야합니다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사비 그터서 궁궐의 축조규모로 볼때 3000명이 들어갈 규모냐 아니다. 삼천명이 먹고 살궁터는 아니다.
@김재중-g5h3 жыл бұрын
뭔 3천 궁녀냐? 어떤 자식이 확인없이 노래로 만드냐 사자 명예훼손이다. 그만해라.
@강효-n1h4 жыл бұрын
그때 고구려가 3국 통일 혔다면 만주땅은? ㅋ! 아깝다!!!!
@zzohhodduoccohlh3493 Жыл бұрын
그럴수가 없어요 고구려는 말갈 거란등 유목민족들도 섞여서 살았는데 유목민들이 반란일으키는 경우도 있어서 내전도 났었고 고구려 지배계층들인 평양성파와 국내성파와의 갈등이 심했었고 그리고 요동지역의 국경을 안정시켜야 백제 신라를 칠수있었는데 양면전선은 고구려에겐 큰부담이었고요
@한배달-s3r3 жыл бұрын
대백제 마지막왕의 가묘를 만들면서 저리 초라하고 볼품없이 만들다니.
@cadet2644 жыл бұрын
역사만따로 모아주세요
@장미경-n2b4 жыл бұрын
삼천궁녀? 삼십궁녀겠지! ㅜ ㅜ ㅠ
@도비-u6o4 жыл бұрын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게 비하라고 말하는 사람들 조금 웃김..;; 당연한거지 나라가 멸망하면 약탈 당하고 수탈 당하고 유물이나 기록들이 사라져서 극소수만 남을꺼고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500년후에나 써졌는데 그때 남아있는 기록들 모아 썻을껀데 많을리가 만무하지..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고작 5권임..고구려본기는 그래도 9권정도 쓸정도 남았는데 같은 700년 역사에 이정도...신라도 천년이나 되는데 12권밖에 안되는데 이정도 기록으로 역사 다 안다는듯 운운하는게 웃긴일인듯 우리가 모르는역사는 많아요 ㅋㅋㅋㅋ;;
서동""무왕""왕자 과 선화공주 아들의자왕 과 손자의 부여융 공산유적(웅진)645 의자왕피신처 660.08.02사비성 소정방ㆍ김춘추 앞에서 의자왕의 항복선언배 하다
@정근도-x6e4 жыл бұрын
당나라ㆍ모사꾼의 신라 김춘추 연합군 의해서 700년역사 660년 신라에게 무너지다
@조기종-h4m3 жыл бұрын
백제의 멸망은 신라의 교활함 이였다
@zzohhodduoccohlh3493 Жыл бұрын
외교가 원래 다그럼 그리고 내부적으로 말년의 실책과 배신자때문에 멸망했고 특히 당나라와 신라를 상대할때 어딜먼저 막아야할지 정할때 옥에갇힌 성충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은게 치명타였음 신라가 백강을건너지 못하게 막아야했는데
@Silla__Kim.Yu-shin Жыл бұрын
백제의 멸망은 형제 고구려와 다투다 다시 손잡고 신라를 공격한 대가이다
@soonchanghong36164 жыл бұрын
잘못해석된 백제역사를 또다시 반복하는군요. 부여지방에 남겨진 흔적들은 위 내용과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데.....
@terry76104 жыл бұрын
의자왕은 전략가이며 위대한 왕이었음,,, 청야전술로 나당연합군은 위기에 처혔으나,,, 당시 의자왕이 있던 성주가 배반을 하고 왜에 있던 부여풍의 성급한 공격으로 폐하고 왜로 물러감 당시에 점령된 몇몇의 성을 빼고 대부분의 성들은 무너지지않았음,, 부흥군의 대장을 부여풍이 죽이고 청야전술을 안 따르고 성급히 공격 후 실패,,,
@terry76104 жыл бұрын
역사를 아주 개차반으로 만드네,,당시 백제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였음,,, 고구려와 맞짱 뜨던 나라였는데,,, 22담로를 거느리는 위대한 왕국이었음,,,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존속 부실로 몰락이니 백제 당시 백성들이 반성 많이 해야 하고 하늘삼신께 참회하고 선행을 부디 많이 닦으시게 무왕ㅡ 마를 캐던 아이는 고통을 참아 사비민가서 오래 버티니 사비를 백제를 백성을 지키려는 마음과 의지를 길렀다 이런 뜻이 크니 나라를 잘지켰다.
@서울사람-x3h4 жыл бұрын
방심의 대가
@kmyungsic4 жыл бұрын
일본이 시멘트를 발라서 훼손시킨게 아니라 복원하려고 한 겁니다. 시멘트?? 당시 가격은 고가였어요...^^
@하늘비-g5c4 жыл бұрын
아니 신라가 데려갔어야지 왜 당나라가 데려간거야 김춘추가 나쁜놈이야
@user-yy6gv6bg6i4 жыл бұрын
당시 신라신분이 당나라노예였음 ㅠ
@신선대만수르-y9y4 жыл бұрын
당나라가 제일 큰 전리품을 신라에 양보할리가 없지.
@미제드론4 жыл бұрын
신라로 갔으면 최소 사약드링킹 입니다.........ㄷㄷㄷ
@안진영-h7f4 жыл бұрын
@@미제드론 그렇죠
@안진영-h7f4 жыл бұрын
@@미제드론 김춘추 사위 김품일이랑 딸을 참수했으니
@청포도-q2m Жыл бұрын
신라의 삼국통수로 만주의 드넓은 땅을 잃어버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구나
@Silla__Kim.Yu-shin Жыл бұрын
허허벌판 만주 가져서 뭐하게? 지금 북한 꼬라지도 해결 못하는데 같은 민족이니 영토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하고 있네 애초에 고겨루 백제 두형제 싸움으로 한반도가 개판된거지 그걸 해결하고 한민족 만든 게 가야+신라고
@sonbongkyu77562 күн бұрын
삼천궁녀 진실좀 백마강 거짓이라고 하던데요
@김광석-p4q4 ай бұрын
百済 依子王,階伯將軍의 血鬪에도 不句, 熊津 避身,泗琵의屈服!!。😂
@kimmingu1004 жыл бұрын
궁녀가 3천명이나 될 정도로 국력이 강성했다고 해석할수 있지 않을까?
@은나라가고조선4 жыл бұрын
백제가 그런정신의 나라였다면 그많은 담로들을 지닌 제국이될수가없습니다 그것은 백제공격을 정당화시키려는 훙노신라세력의 의도된 역사왜곡짓거리인것입니다 정신바로차라고 역사를 공부하세요
@은나라가고조선4 жыл бұрын
그들경상도의 그들세력이 익산의 미륵사지 서쪽탑도 촟아와서 깨부셨다네요 아직도 그들세력의 잔존들이 중국과 일본과 손잡고 기승을부리며 안하무인 실존하고있어요
@kimmingu1004 жыл бұрын
@@은나라가고조선 궁녀의 개념이 지금과 다를 수도 있고 진정 백제가 22담로를 갖춘 해양 제국이었다면 오히려 그 국력에 걸맞는 숫자일것 같은데.. 개인적 견해입니다!
@미제드론4 жыл бұрын
@@kimmingu100 낙화암에 삼천명 올라갈 자리도 없습니다.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의자왕 그시녀 나 둘만 주라. 그럼 내가 해결해줄께 의자 듣고 있소. 성 암 산 여기서 기다릴께 빨리 내려와 다시 사비에 백제 세우자.
절대 방송은 왕옆에 눈과귀가되는 정치인 잘못은 일언반구 안하는구나 정치인 비하는 금기사항이야?
@yoojustice4 жыл бұрын
일본은 백제가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한듯ㅎㅎ
@japanchina32984 жыл бұрын
독도가 일본땅이면? *독도를 포함한 일본 열도는 우리의 한반도 선조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땅이다!!! *애초부터 일본 열도는 고대 한반도 *백제와 가야 *도래인 조상들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현 시대의 문명 국가를 탄생시킨 땅이다. 즉, 일본은 *원래 우리 한반도 대한민국 *소유의 진정한 주인 땅이며, 이는 틀림없이 명확히 *역사과학적으로 증명된 기록이다!!!
한심한 댓글들이 많이 보이네요. 아무리 신라가 고구려 뒤통수치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당시 신라가 망했으면 한반도는 중국 놈들 땅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에그런것도있는거4 жыл бұрын
정말 흉노새끼대운 댓글이군
@신선대만수르-y9y4 жыл бұрын
엥? 무수 소리요?
@Silla__Kim.Yu-shin Жыл бұрын
연남생 사건 모르나? 신라 아니 었으면 고구려는 중국한테 멸망 @@신선대만수르-y9y
@세영최-m2t Жыл бұрын
시민들 당시 신라 우습나요? 신라신국이요. 당서에 천신이 나타나 김유신은 신라의 성스런 신하라 했소. 중국 천신도 언급했을 만큼 신라는 강성하고 영리한 화랑이 많았죠. 시민들 성충의 말처럼 탄현이외다. 오직 그시기는 계백.의자가 뭐하고 뭐하고 시간이 촉박합니다 당시 탄현 뿐이요. 국력이 신라 당으로 많이 기운듯 하나 탄현은 웅진 근처에 있어 의지할수 있는 곳이요. 이곳은 나당을 지킬수 있소. 지금 공부 그리 가르치지 민중이 교육담당해야지요.
@ghwnsha6 ай бұрын
뭔 개소리야 이 ㅂㅅ은 ㅉㅉ
@kyucho32514 жыл бұрын
왜 삼천궁녀 야? 삼천만궁녀라고하지. 일본의 개들이 역사조작을.
@scap44374 жыл бұрын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전라도는 백제가 아닙니다 전라도는 6세기까지 독자세력을 유지하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동성왕 무령왕때에도 여러차례 전라도 정벌의 기록이 있으며 백제 말기에 식민지 형태로 복속되었을뿐 벡제인의 정체성은 한번도 가진적 없던 지역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왜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전라도에만 있다는것이 그 근거죠 백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고 많이쳐줘봤자 익산까지이며 그 밑 전라도는 백제인의 정체성과 다른 지역입니다 전라도 사람이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우기는거 보면 너무 웃기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kilee29514 жыл бұрын
6세기엔 전라도 뿐만 아니라 가야라는 이름의 여러 나라도 있었음. 대가야, 금관가야, 소가야 다 6세기에 망함. 그리고 니가 말한 일본태생 무령왕이 한 전라도 정벌은 전라도를 일부 점령한 가야랑 전쟁한 거겠지. 전라도 큰 세력은 근초고왕이 충청도 먹을 때 함께 먹음. 큰 전쟁 통해서. 그때 일본(왜)도 가야정도 나라였음.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은 택도 없고. 역사가지고 지역감정 장난질 좀 그만쳐. 쪽팔리니까. 백제 망할 때까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죄다 전쟁했는데.. 뭘. 그럼 충남만 백제냐? 1. 백제 한강 지배기에 전라도 독자 해상세력 존재 확실 근데 당시엔 고구려, 백제, 신라 세력 자체가 작았음. (당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도 나라가 여럿 있었고 백제랑 신라 사이 가야도 수십개의 국가 연합체이고 한반도에 이런식으로 나라 엄청 많았음) 2. 백제 초기 한반도에 있었던 수많은 국가 중 전라도에 있던 해상세력이 백제와 큰 전쟁을 벌일 정도로 규모컸음 (중국에서는 전라도가 백제에 흡수되기 전 신미제국이라 백제나 가야와 구분해 부름, 그래봤자 지방 호족, 임나일본부 이딴거 아님, 이후 전라도 남부는 다양한 세력에 의해 지배됨. 한반도 다른 지역처럼) 3. 한강 뺏기고 백제는 그동안 무시했던 충청도 지역 마한 세력과 국가 운영. 하지만 왕권 강화 실패 후 당나라에 축출 (백제 의자왕과 백제 백성 전체가 중국으로 끌려감, 당시엔 성 단위로 국가를 판단하는 시기였음, 영토가 아니라) 4. 백제가 당나라에 축출 당한 뒤 전라도를 포함 마한세력 신라와 끝까지 싸움 5. 나당전쟁 본격화 시기 마한세력 신라와 전쟁 중단하고 삼국 연합해 당나라와 전쟁, 신라 완전한 한반도 통일 6. 나당전쟁으로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하나의 나라라는 정체성 생김 (그전엔 그런거 없었음) 충청도와 전라도가 백제에 의해 무력으로 흡수된건 근초고왕 시기 길어야 20년 사이. 충청도 정벌한 뒤 한참 뒤에 전라도 먹고 그런거 아님. 물론 백제 왕권이 워낙 불안해서 일본에서 나고 자란 왕도 모셔오고 그랬을 정도. 당연히 왕에 충성하지 않은 성 단위 세력 많았음. 가야나 신라 세력에 넘어간 전라도나 충청도 경기도 지역에 백제왕이 전쟁하기도 했겠지. 백제 수도 성 외곽은 그런일 빈번했음. 신라나 고구려도 비슷한 상황. 전라도만 특별한거 아니고. 이후 충청도나 전라도는 차차 백제땅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리게 됩. 신라말 전라도에서 후백제가 일어난 것이 그 증거. 한강지역은 당시 고구려라는 인식이 강했고 그래서 고려 수도가 개경이 됨. 전라도가 백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충청도도 백제가 아닌거죠. 힘들게 한 나라가 됐는데 왜들 갈라치기 하려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scap44374 жыл бұрын
@@kilee2951 문장 보니까 학력이 많이 낮아 보이는데 나가서 육체근로나 하세요 님 수준에 역사는 무슨 역사입니까?
@saladin44914 жыл бұрын
뭐...그래도 6세기 중반엔 거의다 점령했으니 그냥 백제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전북지역은 그래도 더빨리 점령되었으니 또 그렇고.
@scap44374 жыл бұрын
@@saladin4491 6세기에 복속됐다 하더라도 백제는 왕권이 워낙 약해서 전라도 까지 세력이 미치지 못했고 지방 호족의 간접통치 방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마저도 간접통치 실시 여부와는 별개로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전라도는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와 세력이였다는게 정설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에 관한 얘기 입니다 같은 문화를 영유하고 같은 생활방식을 가지고 같은 제도 아래 동류의식을 느꼈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서 말하자면 아니라는 것이죠 점령한적 있었냐 없었냐 하면 점령한적은 있다고 말해야하는건 맞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를 36년간 직접통치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인인건 아니잖아요? 현재 학자들은 삼국시대 전라도 지역의 명칭을 따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지역적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굉장히 조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전라도의 전방후원분 문제는 임나일본부와 엮여 아예 쉬쉬하는 분위기죠
@kilee29514 жыл бұрын
ㅋㅋㅋ 그렇게 따지면 백제는 충남만 해당하나? 백제는 망할 때까지 경기도, 충북 전라도에서 늘 전쟁했는데 다 백제 땅 아니네. 당시 남해안 일대는 중국 한국 일본 해상 교역료 중간 기착지였음. 그리고 경상도에 삼포 개항 했다고 부산 일대가 일본땅이었습니까? 임나일본부설 쉬쉬가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각 국가 세력들이 들어와서 살 수도 있는 거지. 당시에 일본이 통일 국가도 아니고. 해상교역항 주변은 원래 그래요. 나중에 중국에 있었던 신라방도 그렇고. 그리고 삼국시대 당시는 중앙집권국가 형태가 아니었고 고을 단위 성별로 거의 독자적인 세력이 대부분이었는데 너무 지금 잣대로 편협하게 역사를 보는 건 아닌지. 그렇게 따지면 충청도가 부여 기마민족 중 한 갈래한테 먹혀서 백제 된거 밖에 더 되요? 당시에 고구려도 평양이랑 국내성 파로 갈리고 또 성마다 지배세력 따로 있을 정도로 분권형태였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충청도만 진정 백제다, 충청도만 백제라고 하기가 규모도 작고 그러니까 한강이랑 경기도도 다 백제였다 그러고 싶은 거 같은데 백제가 한강에 터 잡을 땐 충청도 세력 뭣으로도 안봤고 한강에서 쫓겨난 다음엔 일본에서 살던 백제 귀족 모셔와서 왕으로 삼을 정도, 딱 그정도였어요. 그리고 충청도 백제도 결국 당나라에 망하잖아요. 의자왕한테 팽당해서 사씨 세력 몰락하고 다른 호족들은 나몰라라해서. 제대로 뭘 알고 말씀을 하세요. 당신 논리대로면 백제도 일본이지 뭐. 그 잘난 무령왕도 일본에서 살다 건너온 사람인데.
@신익순-c7g4 жыл бұрын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작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신변안전과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