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장군 김윤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최초의 의승병장. 김윤후 승장을 화폐도안에 넣어야...
@푸른이리-d5v Жыл бұрын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폐지한 이율 모르겠음
@flyhigun5 жыл бұрын
"김윤후"라는 이름을 얼마나 신뢰했길래... 분노한 노비군의 마음까지 돌렸을까요. 저런분이 많이 계셔야 하는데.
@전으뜸-p1n Жыл бұрын
다음편은 동북면으로 가나요?
@samueloh9026 Жыл бұрын
영화만들면 대박날 소재 1. 여몽전쟁(처인성, 충주성 전투), 2. 삼별초 항쟁
@이젠살자2 жыл бұрын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반란 진압하고서야, 아니면 김윤후가 노비문서 태운 것에 대한 사정설명을 하고 난뒤에서야 알았을거라 봅니다. 도망갔던 귀족과 관료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조정 모르게 죽이거나 단순 횡령죄로 노비들을 죽였다고 보고했을 테고, 그뒤 반란보고서에는 노비들의 도둑질을 처벌했더니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을테니까요.
@롤로토마시-n7e4 жыл бұрын
못난 사람이 있으면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일지라도 다음을 지켜봐야 한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5 жыл бұрын
여기 가봤는데 등산로 입구 찾느라 산 한바퀴 돌고 등산도 힘들어서 고생한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럴 가치가 있었어요 ㅎ
@희안해希安해4 жыл бұрын
그 정도로 험하군요. ㅠ
@력사티쳐5 жыл бұрын
앗 수정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ㆍ
@오디세이-p8w5 жыл бұрын
청나라 깃발
@THEHORSFIELDII5 жыл бұрын
썩은 상류층을 그대로 두면 토사구팽 당합니다. 그러니 서민일수록 더 정치에 신경 써야 합니다.
@yena-coco5 жыл бұрын
너무 재밌어요!!!
@qor28805 жыл бұрын
와...재미있다
@수찬-c3r5 жыл бұрын
너무 좋아요!!!
@이정욱-p9j5 жыл бұрын
김윤후가 기록이 없길래 아무래도 나중에 충주가 몽고군에게 함몰될 때 죽었겠거니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전쟁 끝나고 원종 시기까지 멀쩡히 살아서 관직을 받은 게 고려사 원종세가에 나오더군요. 전쟁 뒤에도 멀쩡히 살아있었는데도 기록이 별로 안 남은 건 후손이 없어서 그랬었던 건지 아님 관직 내린 기록 자체가 그냥 추증이었던건지 모르겠네요.
@ttlqk48472 жыл бұрын
잘 봤습니다. 이 사례를 보면서 지역방위 사단이 어떻게 싸워야할까 생각하게되네요. 구심점도 있어야하고 평소에 조직상태도 중요하고 구성원간에 소속감도 필요하죠, 충주의 중요성과 명장 김윤후에대해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핵심 11:49~ 현실 9:45~ , 무장은 하되 전쟁은 일어나서 안된다, 독립투사를 쇼맨쉽에 활용할 뿐이지, abnormal korea office
@hey-say5 жыл бұрын
양반은 조선시대이고 귀족 아닌가요?
@이정욱-p9j5 жыл бұрын
조선이 양반사회고 고려가 문벌귀족 사회라고 하는 건 그냥 역사학적인 평가에 가까운 것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고려시대에도 양반이라는 개념 자체는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지배계층이 주로 과거제도를 통해 지위를 유지하여 관료로서의 성격이 좀 더 강했다고 보기에 양반사회라고 하는 거고, 고려시대는 근래까지 통설에 따르면 음서제도를 통한 세습적 기반이 좀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귀족사회라고 역사학자들이 평가했던 것이죠. 다만 그걸 떠나서 박사님이 영상에서 언급한 양반이라는 건 이 당시 고려의 군사제도로서 양반별초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몽항쟁기에 지방 향촌의 군사제도는 향리나 귀족, 관리 등 여타 지배계층에 속하는 양반별초와 그 이외의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된 잡류별초로 나뉘어 있었는데 1232년 충주 노군의 항쟁 때는 몽고군이 침공하자 정작 양반별초로 징집돼야 할 사람들이 전부 도망가고 잡류별초만 남아서 투쟁했다가 나중에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잡류별초를 사사로이 처벌하다가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