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만행부터 나치가 바꾼 식습관까지! 나치의 모든 것 몰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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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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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Пікірлер: 119
@junek293
@junek293 4 ай бұрын
집에서 밥먹을 때 차분하게 들으면서 먹기도 하고, 게임할 때 틀어놓고 듣기도하고, 혼자 일할 때 듣기도 하고, 잠잘 때 듣기도 하고... 내용 유익하고 목소리 발성도 좋아서.......
@yyhan2000
@yyhan2000 4 ай бұрын
만사로 바쁘신 와중에도 잊지 않고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TV-wm2pb
@TV-wm2pb 4 ай бұрын
엄청나게 실속있고 유익한 독일현대사의 자료영상!!!
@Sputnik_tebe
@Sputnik_tebe 4 ай бұрын
식사 시간 최고의 선택
@빵댕빵
@빵댕빵 4 ай бұрын
모음집 짱 좋아요 잘 볼게요 😊
@wepo511.
@wepo511. 3 ай бұрын
죠앗쩌용?😊
@ck1737
@ck1737 4 ай бұрын
저때도 가짜뉴스 와 거짓선동 만이 살아 남았구나. 괴벨스의 거짓 선동 방식은 정치권 에서 교과서 로 쓰는듯
@user-wj3ud7lv5n
@user-wj3ud7lv5n 4 ай бұрын
혹시 나치에 비판적이었거나 저항했던 일부 독일인들에 대해서도 다뤄주실 수 있을까요?
@user-px7ol8jh6e
@user-px7ol8jh6e 4 ай бұрын
독일 베를린 레지스탕스 박물관이 있긴 합니다.
@veritas_ac3537
@veritas_ac3537 4 ай бұрын
kzbin.info/www/bejne/o2LLmp15lN9_a68si=vRxNdWVfpXPIit2K 이 영상에서 다룬 적 있습니다.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4 ай бұрын
백장미단 사건이 있는데 영화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 에서 자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으니 참고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그리고 책도 있는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이라는 재목이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의 필독서이자 입문서로 아주 유명했다고......
@Flyingori
@Flyingori 4 ай бұрын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까지 상세히 다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내용 보면서 인류는 역사에서 배우는 게 맞는가? 하는 회의가 드네요 ^^...
@user-ut1ry5sd3w
@user-ut1ry5sd3w 4 ай бұрын
이런 유익한 영상을 방구석 에서 볼 수 있는게 너무 행복하네요
@user-rz9tx1bx5f
@user-rz9tx1bx5f 4 ай бұрын
15:34 홍위병의 정서와 동일
@user-fo8ms9nz7c
@user-fo8ms9nz7c 4 ай бұрын
몰아보기가 주말끝날때 올라오다니😂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4 ай бұрын
금연정책과 동물보호 정책을 나치가 만들었더는 것이 진정한 아이러니.......
@Tamakisan1
@Tamakisan1 3 ай бұрын
절.대.악은 없으니까.
@kitsuneOvO_
@kitsuneOvO_ 4 ай бұрын
목소리의 발성 톤 등이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지식류 유튜버중에서도 젤 좋네요
@user-rax146
@user-rax146 3 ай бұрын
히틀러는 여자들에게 일종의 아이돌이었죠. 지금의 우리는 믿기힘들지만 여자들을 정치적으로 정말 잘 이용했습니다. 사진과 영화를 이용한 선전선동이 여자들에게 잘 먹혔죠
@lIlilIiiIIlliIliil1
@lIlilIiiIIlliIliil1 3 ай бұрын
어어 더 말하지마라
@carpy_1
@carpy_1 6 күн бұрын
질문이 하나 있어요. 메포 채권 금융사기로 30년대 독일 경제가 무리한 군사산업 집중으로 파산위기가 닥치고, 이것이 전쟁의 이유 중 하나라는 통념을 믿어왔는데요, 어디서 글을 읽었는데, 비록 금융사기일지라도 선순환을 유도해서 건실한 경제를 이루고 메포어음 회수를 꾸준히 진행했다는, 통념과 반대되는 걸 읽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래는 그 글의 일부입니다
@carpy_1
@carpy_1 6 күн бұрын
히틀러 정부의 경제정책과 독일 부활 이 글은 나치 집권 시기 경제문제에 대한 글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기침체와 미국 연준 대공황뿐만 아니라 미국을 주기적으로 엄습한 경제위기의 본질은 과잉경쟁이나 과잉생산이 아니라 과잉투기였다. 과잉투기의 본산은 은행투기였고 은행의 투기를 방치한 건 연준이었다. 연준은 투기를 방치한 것을 넘어 투기의 앞잡이였다. 1913년 미국 연준이 탄생했는데 이름만 보면 국가기관처럼 보이고 실제로 미국의 통화공급과 금리조절로 중앙은행 역할을 맡았고 지금도 그렇지만 민간은행들이 지분을 가진 민간은행이다. 연준은 주주들에게 매년 배당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국고로 귀속시킨다. 은행들에게만 돈을 빌려주지 일반 투자자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진 않는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안 그랬다. 수익을 주주들이 독차지했고 주식중개인에게 직접 돈을 빌려줬다. 연준은 19세기 후반 미국 경제를 주기적으로 강타한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는다는 핑계로 만들어졌지만 ‘지킬 섬의 괴물’을 쓴 에드워드 그리핀에 따르면 연준 설립을 주도했던 미국 동부의 은행가들이 정말로 걱정한 것은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였다. 1910년 당시 미국 남부와 서부에서는 지역은행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지역은행은 불과 10년 전보다 2만 개로 증가했다. 지역은행의 비중은 1896년 예금 총액의 54%에서 1913년 57%로 늘었다. 대은행들의 입장에서 더욱 우려인 것은 은행에서 돈을 안 빌리고 이익금으로 재투자하는 기업이 증가하는 현실이었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 기업의 성장 동력 중 70%는 은행이 아니라 자체 조달한 자본에서 나왔다. 정부도 금을 비축하면서도 빚을 꾸준히 줄여나갔다. 은행들은 기업과 정부의 은행의존도가 낮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업과 정부가 은행에 의존하도록 만들려면 아껴쓰는 쪽보다 빌려쓰는 쪽이 낫다는 생각을 하도록 이자를 낮춰야 했다. 그래야 기업과 정부를 빚더미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없고 경쟁은행이 많아서 이자가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이자를 일률적으로 낮추기가 쉽지 않다. 은행들이 연준을 만든 중요한 의도중 하나는 돈을 펑펑 풀어서 기업과 정부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대공황은 자연스런 그 결과였다. 군수산업 미국 실업률이 정부의 과감한 재정지출로 내려가던 1937년부터 다시 상승한 바 있다. 실업률이 다시 상승한 이유는 기업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가격담합으로 물가가 폭등해서 소비자의 소비력이 감소한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소비력이 감소한 또다른 이유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가 방대한 재정지출을 뒷받침하느라 세금을 크게 인상해서였다. 소득세와 법인세같은 직접세의 최고세율도 물론 높였고 유류세나 전기세같은 간접세도 크게 높였다. 루즈벨트 정부에서 늘어난 세금은 직접세보다 간접세가 액수로 따졌을 때 더 많았다. 간접세는 소득과 무관하게 모두 동일하게 부담하므로 간접세 증가는 저소득자에게 불리하다. 고소득자는 세금인하한다고 해서 소비를 확 늘리지 않는다. 어차피 필요한 지출은 이미 하고 있었으니 저축만 늘어날 수 있다. 저축증가는 경기회복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고소득자는 감세로 수입이 늘었다고 해서 투자를 확 늘리지도 않는다.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가 투자와 경기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소득자의 소비력이 늘어났을 때뿐이다. 그런데 고소득자에게 감세하면 정부는 그만큼 다른 부문에서 지출을 줄여야되니 저소득자의 소비력이 늘 수가 없다. 반면에 저소득자는 세금부담이 줄면 소비를 바로 늘리는 편이다. 부자들은 얼마든 살 수 있는 물품을 저소득자는 돈이 없어서 못 사던 것을 바로 사는 것이다. 빈부격차는 늘어나서 서민은 힘든데 부자들의 돈은 쓸 곳이 없어 고여있는 것이다. 저소득자의 소비증가로 인한 수요증대는 경기회복으로 이어지고 경기회복은 일자리를 늘린다. 루즈벨트 정부가 간접세를 크게 늘린 것은 결국 경기회복에 악영향을 미쳤다. 루즈벨트가 취임하기 전이었던 32년도 1138만명이던 실업자는 37년 6월에 446만까지 감소했다. 그 뒤로 실업률이 급증해서 37년 11월에 700만으로 증가했다. 38년 1월 내부보고서에서는 실업자를 1000만명으로 추산했고 조만간 118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전임 정부의 최고 실업자 수를 능가했다. 실업률이 다시 오르면서 루즈벨트의 입에서 전쟁을 암시하는 발언이 나왔다. 원래 미국에서는 1차대전 때처럼 다시 전쟁이 발생해도 미국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반전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미국 해병대 사령관 출신이며 미국이 벌인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스메들리 버틀러는 자신이 자본가의 개 노릇을 했음을 깨닫고 ‘전쟁은 사기다’라는 글도 쓰고 전국적인 반전 연설을 할 정도였다. 루즈벨트도 1936년 대통령 재선 유세기간 동안 미국은 절대 유럽 전쟁에 다시 끼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압승을 했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원인이 영국에 빌려준 거액의 전쟁빚을 안전하게 돌려받으려는 은행들의 압력 때문이었음을 규명하려고 조사위원회를 만든 상원의원들에게 미국의 대외 전쟁개입을 불허하는 중립법을 제안하고 1935년 말에 통과시킨 주역도 루즈벨트였다. 1936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루즈벨트는 바로 중립법을 적용해서 불개입 원칙을 지켰다. 같은 해 스페인 내전 때도 개입 안하도록 중립법 개정을 의회에 요구했다. 그런데 미국이 다시 불황으로 확실히 진입한 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공했을 때는 선전포고가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일본과 중국 모두에게 무기를 판매했다. 37년 10월의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무법이라는 전염병이 퍼진다면서 미국은 개입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하겠지만 확신과 안보가 깨진 무질서한 세계에서 완벽한 보호는 있을 수 없다며 전쟁을 암시하는 듯한 충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carpy_1
@carpy_1 6 күн бұрын
적자재정을 감수한 과감한 지출에도 실업률이 다시 급증해서 의기소침했던 루즈벨트에게 다시 자신감을 준 것은 하버드대학의 앨빈 핸슨을 필두로 하는 일군의 소장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미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인구증가, 서부개척, 신기술 혁명이었지만 이제는 이 셋 모두 끝나서 더이상 성장동력을 잃었고 민간부문도 이를 알기에 투자를 꺼리는 것이므로 이럴 때는 공공부문이 더 적극 투자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미국 국내에서 이뤄지는 공공시설 건설은 지방정부에서 유지비 부담을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마침 유럽과 아시아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루즈벨트가 착안한 것은 군수산업이었다. 38년부터 루즈벨트 정부는 군수산업에 거액을 쏟았고 실업률은 다시 내려갔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아무 존재도 아니고 평범한 일반인이었을 때, 즉 1차대전 종료 직후부터 사실 2차대전은 예견되어 있었고 독일 민중들은 연합국의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 민족이 말살에 처해 있는 상황에 분노해 복수를 부르짖고 있었으며 대전쟁을 예견하는 학자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연합해야 한다는 학자들도 이미 있었다. 1차대전을 겪고 경제가 멸망 수준으로 파탄났음에도 독일이 부활한 근본 원인은 미국 영국이 프랑스 견제를 위해 독일의 회생불씨를 남겨두었기 때문인데 독일의 산업시설은 멀쩡했었다. 독일 경제부흥과 실업률 감소 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으로 유럽에서 군수물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미국 대기업들의 나치독일 후원 및 돈벌이에 관련해서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참고하기 바란다. 미국은 일본에 석유금수조치를 함으로써 사실상 미국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고 일본군은 항공기도 못 굴리고 전함도 못 띄우게 하는 석유금수조치로 나라가 마비될 수준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제재로 자원부족이어서 동남아 자원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걸림돌이었던 진주만의 미 해군을 박살내기 위해 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에 직접 뛰어들면서 미국 실업률은 더욱 하락했다. 미국을 1929년 대공황의 늪에서 구한 것은 사실상 뉴딜정책이 아니라 전쟁준비였다. 뉴딜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나온 대대적인 전쟁 관련 투자가 미국을 뉴딜을 루즈벨트를 구한 셈이었다.
@carpy_1
@carpy_1 6 күн бұрын
루즈벨트는 1933년 3월 4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히틀러는 그보다 한달 앞서 1월 30일 독일 수상이 되었다. 독일 경제는 1920년대에 미국에서 투자되는 달러에 기대어 공장을 가동해서 상품을 수출하면서 전쟁빚을 갚아왔지만 29년 미국발 대공황으로 자본이 독일 밖으로 유출되자 치명타를 입었다. 히틀러가 취임했을 때 독일 실업자는 600만이 넘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데 히틀러 정부가 집권하면서 독일 실업자 수는 급감했다. 무너진 인프라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히틀러는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폭스바겐(국민차라는 의미)을 보고 만족했다. 33년 1월부터 35년 7월까지 독일의 취업자는 1170만에서 1690만으로 증가했다. 안정된 생활급을 주는 5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나치당의 독일경제는 전쟁준비를 위한 군수산업 투자가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치독일은 집권 초반 폴란드가 독일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여도 아무 대응을 못할만큼 군사력이 약했다. 그렇게 군사력이 나약했는데도 1935년까지 독일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의 4% 수준이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국방비는 8% 소련은 9%였다. 나치당은 집권하자마자 줄곧 다른 열강들에게 군비축소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하면서 위협을 느끼고 뒤늦게 재무장에 나섰지만 독일 재무장 본격화 이전에 독일의 실업률은 이미 낮아진 상태였다. 히틀러 정부가 독일 실업률을 낮춘 방법은 루즈벨트가 했던 것과 비슷하다. 투자를 민간보다 국가가 적극 주도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나중에 실업률이 다시 급증했지만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엇다. 루즈벨트 정부는 세금을 올리고 국채를 찍어서 돈을 마련했다. 세금이 오르면 소비력이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 소비력이 줄어들면 기업은 여유자금이 있어도 위험부담이 큰 생산부문에 투자하기보다 안전한 국채를 사서 이자수입을 얻는 데 만족한다. 민간부문의 투자는 점점 줄어든다. 증세와 긴축 회피 히틀러 정부는 당장은 세금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이었던 1928년만 해도 2%대의 지지도였던 독일 나치당은 32년과 33년에 각각 33%와 44%가 넘는 득표율로 정권을 잡았다. 대공황으로 인해 생긴 수많은 실업자를 선동해서가 아니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자들은 나치당보다 독일 공산당이나 사민당을 더 많이 지지했다. 선거에서 나치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중하류층 이상의 유권자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대공황 이후 증세와 긴축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하려고 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였다. 1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수립된 ‘독일 바이마르 체제’는 헌법이 아름다운 허울만 민주주의 정부였으며 정치 혼란으로 가득한 무질서 수준이었고 국민들의 여론은 황제가 통치하던 제정 시절로 돌아가자는 쪽이 강했다. 대공황이 닥치자 독일의 브뤼닝 민주정부는 보건복지예산, 교육예산, 주택예산을 각각 14%, 33%, 38%나 삭감했다.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 하락하던 사망률도 1932년에 다시 상승했다. 사망률이 다시 오를 정도였으니 민주정부에 대한 불만은 폭발하고 있었다. 1918년~1933년까지 연합국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독일 민주정부는 수많은 총리가 수시로 교체되며 국정마비 상태였다. 인기있던 나치당과 히틀러를 이용해먹어 정권을 유지하려던 세력은 오히려 몰락했다. 히틀러 정부는 당장 증세도 긴축도 피해야 했다. 그 방법은 돈을 찍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돈풀기는 무책임한 국가로 낙인 찍힐 수가 있다. 1차대전 직후 경험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의 악몽이 있었다. 히틀러 정부는 간접적 방식으로 돈을 찍었다.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시행하는 사업자에게 노동창출증이라는 어음을 지급했다. 어음은 나중에 현금으로 갚겠다는 약속이다. 노동창출증의 만기는 3개월이었지만 20번까지 연장가능했다. 당장 돈없는 사업자는 노동창출증을 만기가 되기 전에 은행에 갖고가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물론 은행은 만기가 되기 전에 어음을 현금화해주는 것이었으니 액면가보다 돈을 깎아서 지급했다. 이걸 할인이라고 한다. 은행이 노동창출증을 받고 사업자에게 현금을 내준 것은 은행이 다시 이 노동창출증을 중앙은행에 제시하면 중앙은행에서 현금을 지급해주어서였다. 중앙은행이 은행으로부터 어음같은 증권을 받고 대신에 현금을 지급하는 것을 재할인이라고 한다. 결국 히틀러 정부가 발행한 노동창출증이 유통될 수 있었던 건 중앙은행이 지급보증을 해줘서였고 이건 결국 정부가 노동창출증이라는 어음을 필요에 따라 발행한 만큼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었다는 뜻이다. 발행한 어음이 한꺼번에 몰리면 중앙은행이 어음을 결제하려고 돈을 찍어낸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티나니까 이목이 쏠려 중앙은행으로서는 부담이다. 그런데 은행들은 사업자에게 할인을 해서 현금을 건네주고 넘겨받은 노동창출증을 바로 중앙은행에 가져가서 재할인을 통해 현금화하지 않고 그냥 갖고있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창출증에 4%의 이자가 붙어서였다. 은행 입장에서는 노동창출증이라는 어음이 투자대상으로서도 요긴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많은 군소 독일은행이 파산했지만 대형은행들은 파산한 은행, 기업의 주식과 부동산을 똥값에 매수해서 순자산이 더 불어났다. 투자대상이 마땅치 않았을 뿐이다. 노동창출증을 바탕으로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시행하게 된 기업은 고용을 늘렸고 새로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소비했고 세금을 냈다. 기업이 내는 법인세, 취업자가 내는 소득세가 늘어나고 실업률 감소로 실업수당 지급액이 줄어드니 정부는 재정여력이 생겼고 기왕에 발행한 어음을 갚아가기 시작했다. 민간부문에서도 소비가 늘고 따라서 수요가 늘고 수요가 늘어서 기업은 투자를 늘렸다. 은행들도 잠자던 돈을 기업에 빌려주기 시작했다. 국가가 중앙은행의 도움을 얻어 먼저 당겨 쓴 돈은 마중물 노릇을 하면서 나치독일의 경기는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바뀌었다.
@carpy_1
@carpy_1 6 күн бұрын
나치당 집권과 독일의 변화 흔히 알려진 바로는 독일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35년 3월 자를란트 귀속, 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 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38년 9월 나치의 체코 주데텐 점령, 39년 9월 1일 폴란드 선전포고에 이르는 과정을 히틀러 정부의 호전성과 전쟁광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설명된다.(히틀러 정부가 대규모 전쟁을 벌일 의도가 별로 없었을 때도 있었다는 것은 히틀러 정부가 선택한 해군력 증강 추진 사업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38년도 말에 에리히 레더 제독은 히틀러에게 2개의 해군력 증강방안을 건의했다. 하나는 잠수함, 기뢰부설함 건조 사업이었고 하나는 10년 계획의 최신 수상함 건조 사업이었다. 히틀러는 10년 계획을 6년만에 달성하라는 조건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당장 전쟁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지휘로 명성있는 미국 체스터 니미츠 제독도 ‘대해상전’에서 히틀러가 왜 후자를 택했는지 의문을 표명하면서 히틀러 정부의 해전 준비가 별로였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자를란트부터 주데텐까지 모두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해 빼앗긴 땅이었거나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타국 영토가 됐지만 절대 다수의 독일인이 살던 땅들이었다. 히틀러 정부가 들어선 뒤 독일 경제가 눈부시게 부활하자 재외 독일인들은 독일로 귀속되기를 열망했다.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에서 패배한 국민투표로 나치독일과의 통일을 결정했지만 승전국들이 불허했다. 대공황 시기 경제난 속에서 집권한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반나치 노선을 추구했지만 오스트리아 대중들 중에는 독일과 통일을 원하는 여론이 점점 강해졌다. 나치당 집권 이후 독일 실업률이 갑소하고 국경 너머 독일 경제가 번영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38년도에 국민여론의 압박으로 독일과의 통일여부를 묻는 투표를 시행하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투표권을 24세로 올리는 등 부정투표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일 찬성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공정한 투표가 보장되도록 선거절차를 바로잡으라는 요구에 오스트리아가 응하지 않자 투표가 예정됐던 3월 13일 군대를 보냈다. 이듬해 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독일과의 통일은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성인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던 심각한 경제파탄의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통일한 후에 실업률이 1년 만에 1.2%로 감소했다. 1차대전 뒤 체코 땅이 된 주데텐의 다수 주민도 독일인이었다. 타국에서 소수민으로 차별과 폭력을 당하며 살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경제가 부활하자 주데텐의 독일인도 독일로의 귀속을 열망했다. 그런데 1차대전 패전 직후 독일의 여러 공국들은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시키기 이전, 즉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전의 지방분권 시절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1차대전 승전국들은 평화조약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교적 훈련과 질서를 존중하는 국민성을 가진 독일인의 단결을 막을 기회를 연합국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빌헬름 1세 독일 황제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가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는 등 프랑스인에게 엄청난 민족적 치욕을 안겼고 1차대전 승전 후 프랑스는 베르사유조약으로 이를 그대로 독일에 보복한다. 민족말살 수준의 평화조약을 겪은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없던 시절에도 전쟁을 외치고 복수를 부르짖었다.
@carpy_1
@carpy_1 6 күн бұрын
이런 흐름으로 보복이 이어지고 민족감정이 서로 악화되었다. 이는 2차대전의 도화선 중 하나였고 베르사유조약 체결 당시에도 엄청난 우려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체코 실업자의 60% 이상이 주데텐 거주 독일인이었다. 사망률은 폭등하고 혼인률과 출산률은 추락했었다. 그러나 38년도에 독일 귀속 이후 주데텐의 혼인률과 출산률은 급등했다. 1940년의 출산률은 37년보다 60%가 늘었다. 히틀러 정부에서 독일인의 출산률이 증가한 건 젊은층의 혼인을 정부가 장려한 덕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신혼부부에 낮은 이자로 1000마르크의 혼인 자금을 대출했다. 9개월분의 봉급 수준이었다. 아이 1명 낳으면 양육비 보조금 명목으로 대출상환 부담을 250마르크 덜어줬다. 아이 4명 낳은 부부에 혼인지원금이 양육지원금으로 고스란히 전환됐다. 정작 히틀러 본인은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었으나 히틀러 정부는 결혼장려정책을 추진했다. 직업을 갖기보다 가정주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에게 혜택을 줬다. 현대 페미니스트가 보면 여자가 애낳는 도구냐고 분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집에서 아이 기르고 살림하는 여성에게 혜택준다는 것은 가정주부를 어느 직업보다도 대우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당시는 여성들까지 주부가 되길 포기하고 노동시장에 뛰어들어 남자와 힘든 경쟁을 마구 하던 때가 아니다. 구직자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준 게 아니라 남자 혼자 일해도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꾸리도록 안정된 생활급을 지급했다. 한국은 빚쟁이가 되어 서민층 학생들은 대출받은 학자금 대출 갚느라 힘들고 금융위기를 핑계로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미국의 돈찍어내기로 전 세계 부동산 폭등과 양극화를 겪고 집세내기도 힘들어졌다. 현대에 흙수저 집안에 태어난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취업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시도가 되었다. 경제발전의 성과에 똥칠하는 민주주의 정부 특유의 천박한 적자 정치로 사회가 병들어 서민층은 고통받고 있는데 이런 사회를 만든 사악한 위선자이며 국민을 떠받드는 척하는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그저 독재자라는 단어로만 폄하하기 바쁘며 그 시대의 특징과 그런 사건들이 벌어진 일련의 과정은 전부 무시하고 전쟁 중에 당연히 일어나는 학살과 참사들만 부각한다. 중국의 고도성장으로 인해 전 세계 대기업들이 중국에 공장을 지어 저렴한 인건비로 생산하여 저물가의 혜택을 누렸고 과학과 산업 발전 덕분에 민주주의로 인한 폐해는 전부 커버되고 있으나 미국 연준의 정책으로 악영향받아 외환위기와 국가부도를 겪고 금융수탈을 당해 국가경쟁력이 떨어져가는 몇몇 민주국가들과 개도국은 특유의 사회적 질병을 앓고있다. 유럽의 각국의 영토 경쟁 나치당이 집권한 1933년부터 전쟁이 터진 1939년까지 독일의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1.2% 상승했다. 집권 전과 집권 후를 비교하면 1932년과 38년 사이에 독일인의 실질임금은 21% 상승했다. 집세는 안정됐고 난방비와 전기요금도 내렸다. 고정 지출이 감소하니 가계 지출은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독일인의 식량소비는 6분의 1, 의류 지출은 25%, 가구 포함 가사용품 지출은 50%, 와인 소비도 50%, 샴페인 소비는 무려 500% 증가했다. 관광비 지출은 2배, 자동차 소유는 3배 증가했다. 히틀러 정부 시절에 국내총생산은 인플레이션 없이 연평균 11%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보여주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36년 8월 히틀러 정부는 독일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경제회복을 선전하고 과시하고 독일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뽐냈으며 세계 최초로 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하였다. 당시 독일의 텔레비전은 유럽에서 가장 품질이 좋았다. 일본선수로 출전한 식민지 조선의 손기정은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고 한민족 중에 유일하게 히틀러를 대면하여 악수를 한 사람이 되었다. 1937년 중반부터 다시 실업률이 치솟던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경제난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1925년 36살의 젊은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영토확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했다. 매년 90만명 씩 증가하는 7천만 독일 민초들을 나날이 올라가는 생활수준에 부응하여 뒷받침하려면 기존의 토지 생산력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이유였다. 히틀러 정부는 1차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복기하면서 독일이 영토확장을 추구했으려면 방대한 땅을 가진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했었고 반대로 수출확대로 국민을 먹여 살리는 산업경쟁전략을 추구했으려면 영국에 맞서 러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여야 했었는데 아무 실익도 없는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전쟁에 휘물려 패전했다고 ‘나의 투쟁’에서 진단했다. 식민지 침략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진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되는 것이다. 히틀러 정부가 39년에 폴란드 침공에 이어 41년 소련을 침공한 건 나의 투쟁에서 주장했던 영토 팽창 야욕의 자연스런 결과로 보일 수 있었다. 패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던 1925년의 파탄난 독일과 경제부활하던 1939년의 독일은 너무나 달랐다.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하면서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 민족 말살 수준의 배상금과 처벌을 받았고 당시 명성이 자자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패전국을 이 따위로 취급하는 1차대전의 베르사유조약은 잘못됐다며 영국측 협상 대표단에서 사퇴해버렸다. 식민지와 영토를 많이 잃었지만 특히 폴란드에게 많이 잃었다. 1차대전 이후 폴란드 땅이 된 서프로이센 지역이다. 당시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한 지도를 찾아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서프로이센에는 독일인이 엄청 살았지만 승전국들은 투표를 실시하지도 않고 폴란드에게 서프로이센을 넘겨주었다. 승전국들이 서프로이센을 폴란드에게 넘긴 중요한 명분의 하나는 폴란드에게 바다로 통하는 항구를 내줘야한다는 핑계였다. 그 항구가 바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단치히였다. 단치히는 공식적으로 국제연맹(국제연합 UN 전신) 관리 아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폴란드가 통치하고 있었다. 국제연맹의 관리로 넘어간 1922년 단치히의 폴란드인 비중은 겨우 2%였고 1939년 시점에서도 4%에 불과했다. 분쟁의 씨앗인 것이다. 독일에게 더 큰 문제는 서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가 되는 바람에 동프로이센이 독일 본토로부터 뚝 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user-kk1yt4ve4h
@user-kk1yt4ve4h 4 ай бұрын
최근에 일본육군자위대 공식계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표현을썼는데 일번제국의 악행영상도 만들어즈세요!ㅏ
@komericanblues643
@komericanblues643 4 ай бұрын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인척 기생하는 이런 연변 조선 족 영상도 만들어 주세요
@wnb7276
@wnb7276 5 күн бұрын
예전에 서구에는 인지행동학인가 하는 학문이 잇는것 같은데. 히틀러가 가장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게 살앗다고 하더만.. 사랑과 교육과 친분이 결핍된 초기인류의 행동 이라고..
@salmonaoa5697
@salmonaoa5697 3 ай бұрын
노딱을 두려워하지않는 역사채널 응원합니다
@user-sz3nb9zk6v
@user-sz3nb9zk6v 3 ай бұрын
먹거리도 외면하고 했던게 투자가 주식으로만 갔나봐요, 뭐 뉴턴도 말년에 조진거 보면, 독일에게 2차대전은 또하나의 직장이었겠네요, 영화처럼 딱딱함이 불러온 비극이 자살로 이끌었나봐요
@sangminlee1325
@sangminlee1325 3 күн бұрын
정치는 돈이죠
@mv6wy8td3q
@mv6wy8td3q 2 ай бұрын
나치는 대다수 독일에 국민들이 지지를 받았으며 보통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유대인 학살과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지지했다. 다만 독일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보상 이루어졌지만 일본은 역사왜곡 침략에 책임을 정당화시키며 전범자들마저 신격화 시키는것은 독일과 다름점
@skyyu8777
@skyyu8777 2 күн бұрын
지금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은데,북한과의 전쟁을 원하는 세력도 있고
@user-bn4og8dh7u
@user-bn4og8dh7u 15 күн бұрын
그들의 작품 환타
@digitalpay
@digitalpay 13 сағат бұрын
연결짓지 않으고해도 국힘당이 대대로 해왔던게 나치와 너무 똑같네요
@qkrtntjdalsrks
@qkrtntjdalsrks 4 ай бұрын
그래서 독일인들은 습관적으로 굶주림을 느끼지 않는가 봅니다
@whoami-mx5sm
@whoami-mx5sm 2 күн бұрын
펨베들 싱글벙글
@user-gt2ge6np1c
@user-gt2ge6np1c 9 күн бұрын
나찌의 여성 정책이 군수 공장 인력난이 한 원인
@sangminlee1325
@sangminlee1325 3 күн бұрын
하이고 로칠드가 밀어준거죠 그당시 독일이 뭔 돈이 없죠 일본이 부품을 만들어 보내고 독일은 조립하고
@쌈뽕카카룬
@쌈뽕카카룬 4 ай бұрын
세계한텐 대역죄인,지구에겐 평화위원장.
@sangminlee1325
@sangminlee1325 3 күн бұрын
전쟁동안에 유태인이 돈벌어요
@MRSnO84
@MRSnO84 4 ай бұрын
좋구먼
@user-uh1hb2jm5q
@user-uh1hb2jm5q 3 ай бұрын
만행? 글쎄..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하는 행위들을 보면 만행이라고 생각안한다. 유대인이 나치의 피해자라고 동정만 했지.. 그들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만행은 왜말하지 않는가!!!
@user-id6nw7jb3l
@user-id6nw7jb3l 4 ай бұрын
노딱 드셨나요???
@Nosce_te_ipsum0
@Nosce_te_ipsum0 Ай бұрын
15:26 이게 정녕 한문장이 맞냐 독일어 왜이렇게 길어...
@user-cx3hu2vc6d
@user-cx3hu2vc6d 4 ай бұрын
나치 영상답게 정치병자들이 꼬이네 ㄷㄷㄷ 우리나라에 나치 비슷한게 있다고 생각하는건 그냥 정신병이라고 봐도 되나 ㄷㄷㄷ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4 ай бұрын
개딸, 윤핵관, 친문, 조국만세들이지 그들은 모두 이재명, 윤석열, 문재인, 조국을 하나님처럼 따르고 있으니까.
@komericanblues643
@komericanblues643 4 ай бұрын
유사성을 니스스로 쳐판단을 해야지 가방끈 짧은 너같은 인생이 뭘 안다고 정신병 운운하니 같잖아 죽겠네 ㅋㅋㅋ
@user-lx2qd9oi3s
@user-lx2qd9oi3s 3 ай бұрын
라고 이런 극좌파들이 불리할때 빠지지 않고 하는 소리
@jean8223
@jean8223 4 ай бұрын
그들은 영웅이다.
@wj8671
@wj8671 4 ай бұрын
0:35 한국여자와는 달리 독일 여성분들은 남자들처럼 거시적 애국심이 있었군요
@user-iq5uj1fd1j
@user-iq5uj1fd1j 3 ай бұрын
모든것은 극으로 치달을수록 위험한 것임. 지금은 나치즘의 반대극이 극성인 시대인거고. 밸런스라는 것은 중요함.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면 지금과같은 사회혼란이 야기됨. 국수주의가 극으로 치닫는것도 위험하지만 범세계화 및 pc주의를 통한 사회혼란도 나치즘에 못지않은 위험요소임. 지금은 나치즘을 통한 국가론 결집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미디어적으로 노출하지만, 이민족허용, 성별갈등, 세대갈등을 유발하여 국가론결집을 방해하는 현시대에서 얼마나 사회가 혼란스러운지가 그의 방증임. 이미 범세계적인 대세가 나치즘의 반대극이 활개를 치는 세상인 것처럼. 어떤영상이든 어떤책을 보든 대다수의 군중은 why?라는 사고적회로를 장착할 필요가 있음. 교육이나 미디어 세뇌도 무서운것임. 모든 이론은 역기능만 있는게 아니기때문에 적절하게 받아들여야하는 스스로의 분별력을 길러야하는 것임. 오히려 현재의 세상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이 더 적용되는 세상임. 어떤 영상이든 기사든 미디어든 작성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기때문에 가치중립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함.
@user-hj3yr5xm7d
@user-hj3yr5xm7d 3 ай бұрын
PC주의가 백색테러보다 더나쁨
@AGAIN-zs4fd
@AGAIN-zs4fd 4 ай бұрын
민주당과 많이 닮아 있네요. 자신들은 여러 성추문과 김준혁과 같은 여성비하 발언을 서슴치 않는 그들! 정작 그들은 이대녀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별 지랄을 다하는 게 너무나 닮았네요.
@F117-NH
@F117-NH 4 ай бұрын
이런건 도움이되지 않아요
@habuhamu
@habuhamu 4 ай бұрын
​@@F117-NH도움이 되고 안되고와는 별개로 사실이죠
@kiyongkim7651
@kiyongkim7651 4 ай бұрын
제발 역사고 과학이고 모든 게시판에 와서 정치글 좀 쓰지 맙시다. 정말 측은해 보여요.
@ignisilluminati
@ignisilluminati 4 ай бұрын
뭐 굳이 따지자면 NL이 반서방 + 민족주의 + 개인숭배적 전체주의 체제 (북한 백두혈통, 나치 지도자원리) 옹호라는 점에서 나치같은 파시즘 국가들이랑 비슷하긴 함..
@johnmj1004
@johnmj1004 4 ай бұрын
​@@habuhamu원래 반대쪽에선 뭐든 나쁘게 보이는 법이죠
@user-px7ol8jh6e
@user-px7ol8jh6e 4 ай бұрын
호밀빵!
@you-xk1wo
@you-xk1wo 4 ай бұрын
왜 이런분들 말을 안듣는건지. 정치 외면하고 싶어지는데 들으면서 더 관심 가져야겠다는 생각을.진짜 보수의 품격 느껴집니다.
@MadHyeok
@MadHyeok 4 ай бұрын
뭔 보수의 품격ㅋㅋㅋ설마 이 영상에서 우리나라 좌우를 생각한건 아니겠지? 진짜라면 불쌍한데
@tomorrow3887
@tomorrow3887 3 ай бұрын
우리나라는 보수참칭하는 극우가있고
@bbang-si7fd
@bbang-si7fd 3 ай бұрын
보수의 품격이라면 국힘에서 찾겠다? 개가 웃겠다.
@user-lx2qd9oi3s
@user-lx2qd9oi3s 3 ай бұрын
여기 나치 같은 인간 보이네 사회주의가 독일로 나치임. 지금 개딸도 그렇고지지하는 인간들 주디 터는거보면 나치랑 똑같음. 빨갱이 사상으로 독일의 나치 중국의 홍의병 대한민국의 개딸.
@user-hm1of7qt5o
@user-hm1of7qt5o 3 ай бұрын
극우 민x당 수구 국x 대단하다!
@sm6964
@sm6964 3 ай бұрын
선전ㆍ선동의 달인 민주당이나 나치나...
@user-lx2qd9oi3s
@user-lx2qd9oi3s 3 ай бұрын
나치가 독일어로 사회주의임. 민주당이 극좌로 가고 있는거 보면 역사는 반복되고 있음.
@user-bl9cu6cp4c
@user-bl9cu6cp4c 3 ай бұрын
​@@user-lx2qd9oi3s이거 특수반출신이노 ㅋㅋ 나치가 뭔 사회주의야 민족사회주의지ㅋㅋ 이거 사회주의랑 공산주의랑 구분 못할게 뻔히 보이노ㅋㅋ
@user-bl9cu6cp4c
@user-bl9cu6cp4c 3 ай бұрын
​@@user-lx2qd9oi3s엄마 없는거 티내노
@eunsanglim1708
@eunsanglim1708 4 ай бұрын
1
@user-ps2ih9st5l
@user-ps2ih9st5l 2 ай бұрын
함께하는 세계사' 너무 쇠뇌 당했어 ㅎㅎㅎ
@user-ps2ih9st5l
@user-ps2ih9st5l 2 ай бұрын
나치, 힛틀러'에 대한 모든 기록 영,미국이 기록 한거, 실제 나치 힛틀러 그리 세지 않았어,, 허접한 프랑스나 이겼지 영국 미군 아니 대 쏘련 전에 대패 한게 힛틀러야,, 물론 1차 대전 참패 후 견제 속에 독일 부활 시킨거 대단 했지,,,
@sebin6974
@sebin6974 12 күн бұрын
쇠뇌? 활 맞았다는 뜻임?
@mkgamaga681
@mkgamaga681 4 ай бұрын
오늘날의 개딸의 원조였네
@user-ilovekkh
@user-ilovekkh 4 ай бұрын
나치당의 여성들도 각 임무에 충실하는데 여성가족은 그 많은 국가예산을 받고 대체 무슨 일을 하는건지 쓰잘데기없는 여성전용주차장을 만들지않나 강남 고속터미널 뉴코아아울렛 3층 여성전용주차장은 살아온 이래 최고의 놀라움을 선사했지, 폐지한다더니 공존하는 거 보면 실세가 있다 분명
@user-li2rg5bz5r
@user-li2rg5bz5r 6 күн бұрын
나찌의 악랄한 행태를 가장 많이 참고하고 써먹은 집단이 한국 좌파입니다. 특히 괴벨스를 굉장히 좋아했죠.
@bbk4892
@bbk4892 2 ай бұрын
슬라바 우크라이나!!! ....아조프 반자이!!! ....네오콩 반자이!!!... 윤서결 반자이!!!
@user-tp2sx5it3i
@user-tp2sx5it3i 4 ай бұрын
나치는 아르헨티나의 헌법을 바꿔 놓았다.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로 도망가자 아르헨티나는 이 유대인을 보호하기로 결정. 자국으로 이민 오는 유대인에게 아르헨티나 국적을 부여한 뒤 영원히 포기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이게 굳어져서 아르헨티나는 한 번 국적을 취득하면 영원히 포기하지 못한다.
@nekosensei744
@nekosensei744 4 ай бұрын
조선왕조의 만행도 만만치않음
@user-uu8be2fz7v
@user-uu8be2fz7v 4 ай бұрын
쇼군막부체제는 그럼 지옥이겟네..
@user-hj3yr5xm7d
@user-hj3yr5xm7d 3 ай бұрын
조선왕조가 나치보다 더악질이고 해적질했던 영국보다 더나쁨
@losblancos0607
@losblancos0607 4 ай бұрын
(당연히 나치는 절대악입니다. 그들의 긍정적인 면 뒤에는 훨씬 큰 부정적인 면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사실 많은 여성이 나치를 충분히 지지할만했죠. 일단 당시 독일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라 가부장적 가치를 긍정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에 가부장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일부 여성들에게만 문제였지 다수의 여성들에게는 문제가 아녔잖아요. 또한 사회적 혼란과 불안한 치안은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성에게 더욱 치명적입니다. 물리적 폭력에 취약하니까요.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 점에서 문제가 많았고 나치는 사회적 혼란을 정리하고 치안을 개선했기에 지지를 얻을 만했죠. 덤으로 나치는 이상적 남성성을 강조(물론 이상적 여성성도 강조했죠)했기에 나치당원과 나치 지지자는 사나이다운 멋있는 남성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것 또한 여성에게 먹힐 만했죠. 이상적인 아리안 남성, 즉 '혈통 좋고' 잘생기고 키크고 근육질이고 지적이고 책임감있는 남성이 인류사에 인기 없던 적이 없는데(하다 못해 지금 woke도 여성은 다양성을 가져도 되고 모든 다양한 여성이 긍정되어야 하나 남성에겐 스테레오타입을 강요하잖아요), 나치는 그러한 사람의 집단이란 이미지를 구축했으니까요.
@user-uu8be2fz7v
@user-uu8be2fz7v 4 ай бұрын
나치의만행은 곧 미국의 만행이지...
@bluesea2148
@bluesea2148 4 ай бұрын
생일 축하합니다 총통 각하! 당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당신의 영혼과 정신은 영원히 세상에 존재할 것입니다.
@mrdrillfpv8716
@mrdrillfpv8716 4 ай бұрын
항상 재밋게 보고있긴한데, 중간 중간 불분명한 표현이 거슬립니다. 주인장 스스로 알거라고 봐요.
@user-fn2qm5dt7y
@user-fn2qm5dt7y 4 ай бұрын
어떤 표현이 거슬려요? 몰라서 묻습니다
@user-sc4gy8uo5v
@user-sc4gy8uo5v 4 ай бұрын
본인이 모른다고 불분명한게 아닐텐데요..
@mrdrillfpv8716
@mrdrillfpv8716 4 ай бұрын
@@user-fn2qm5dt7y 중간 중간 "불분명한' 표현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모르겠다면 방법이 없네요..ㅠ
@mrdrillfpv8716
@mrdrillfpv8716 4 ай бұрын
@@user-sc4gy8uo5v 그럼 님은 분명하게 이해하심 될일인듯.. 지나가셔요~~
@q-onelee2443
@q-onelee2443 4 ай бұрын
쫌 웃긴다~
@user-ul3kd2bk2l
@user-ul3kd2bk2l 3 ай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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