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미군과 두 다리 뿐인 중공군의 대결, 청천강 전투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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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Box TV, [God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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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ай бұрын

1950년 11월 24일, 오전 10시.
마침내 맥아더 장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됩니다.
특히 서부전선을 맡은 미 8군.
그 예하부대는 미 1군단, 미 9군단 그리고 국군 2군단이었습니다.
공세 다음날인 11월 25일 아침,
전방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중공군.
하지만 중공군의 공격은 미군의 예상대로 별게 없었고
미 1군단의 진격은 계속됩니다.
긴장했던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도 마음을 놓게 되고...
하지만 전장에서 언제나 방심은 금물.
중공군의 진짜 타겟은 미 1군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중공군의 타겟은 가장 우측, 낭림산맥 근처에 있던 국군 2군단.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진짜 공세.
노도와 같은 중공군의 공세에 단 하루만에 국군 2군단 전체가 사라지고
중공군은 국군 2군단을 뚫고 미군의 후방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데...
미 8군 사령관 워커중장.
"미 9군단은 국군 2군단이 뚫린 지역을 대신 커버하라!"
국군이 뚫린 곳을 향해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중공군.
그리고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며 시간을 버는 미 9군단.
시간을 벌어야만 하는 미 9군단과 이를 뚫으려는 중공군.
세계 최고로 무장된 미군, 그리고 산악전과 경보병 전술에 특화된 중공군.
6.25전쟁 당시의 중공군과 미군의 강점과 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전투!
과연 미 9군단과 미 1군단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 통일의 꿈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청천강 전투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청천강 전투 1부: • 중공군을 못찾으면 미국은 패배한다! 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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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전쟁#중공군참전#인해전술

Пікірлер: 335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대한민국의 통일이 좌절된 청천강 전투. 역사적 고증과 보는 재미 모두를 잡았습니다. 청천강 전투의 상황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최강의 컨텐츠. 여러분의 구독,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Full HD로 맞춰놓고 시청하시면 더욱 감동적입니다.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6 ай бұрын
만일 맥아더가 미8군단장 워커의 말만 들어서도 한평생 바친 군인생 중 최악의 경우를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 여기서 워커가 북진을 멈추고 방어선을 설정한다면 예전에 운영자님이 청천강~원산에서 방어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하시던데 저는 청천강~함흥에서 방어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견해의 차이가 약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북진을 멈추고 방어선을 설정해야 했었다는 의견에는 크게 차이가 없겠습니다!!
@jtk6911
@jtk6911 4 ай бұрын
@@user-sy9kf9kc7l 한국군이 워낙 싸움을 못해서 전선 붕괴되고 후퇴하는건 매한가지라고 봄
@MVMborzoi
@MVMborzoi 6 ай бұрын
그때 중공군은 일본하고 국지전을 계속 해와서 전투 경험도 많았고, 싸운 장소도 한반도이니만큼 지형을 이용한 전술면에서 더 강세였던 것 같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타지, 소련의 간접적인 견제 때문에 상대 본진은 때리지도 못하고, 극악의 환경에서 싸우는 등 미군에게 있어미리 보는 베트남전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user-tu9kh4xp3o
@user-tu9kh4xp3o 6 ай бұрын
모택동의 팔로군은 모택동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가급적 일본군과의 교전을 회피했으며 팔로군이 주축으로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되려 모택동은 이중간첩을 통해 국민당군의 기밀정보를 일본군에 유출시켜 일본군과 국민당군 양측이 서로 피흘리며 체력을 깎는 걸 원했습니다 한때 중공에서 항일 다룬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영화들 상당수의 주연이 팔로군이 아니라 국민당군이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요 근데 시진핑은 진실을 감추려 영화계에서 이런 항일영화 제작을 중지시킵니다 이후 팔로군이 주인공이 되어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는 거짓 날조 영웅담을 소재로 한 영화로 공산당 선전 영화를 만들게 됩니다 팔로군은 일본군이 아니라 국민당군과의 전투 경험이 대다수
@rlee4805
@rlee4805 6 ай бұрын
언제나 고증된 영상 해설 감사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고증도 고증이지만 끝까지 보신다면 보는 재미도 상당할 것입니다.
@daegyunkim7408
@daegyunkim7408 6 ай бұрын
보여주기식 훈련과 무기에만 치중하는 우리군을 보면서 저런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지 걱정이네요.
@user-li1id6oj7e
@user-li1id6oj7e 6 ай бұрын
당시 북진하던 시기 북한 지역에서 활동한 국군 장병들의 군기가 해이해졌다는 기록들이 꽤 있죠 우리가 통일을 못 해서 잊혀졌지만 북진 시기 북한 지역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불필요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이미 전쟁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지 탈영을 한 병사들도 꽤 있었고 현지 약탈하거나 물건을 사재기하고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이 빈번했죠 아마 진격하는 부대원들은 속으로 뒤에서 주둔하는 병사들이 엄청 부러웠을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기습을 당했으니 심리적인 충격이 너무 커서 부대가 무너지는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hawk8873
@hawk8873 22 күн бұрын
곧 통일이 된다는 해이해진 군기도 한몫했겠지만, 근본적으로 당시 국군은 와해되었다가 현지 입대 가깝게 마구잡이로 붙잡아다가 한달도 채 못되는 기본훈련만 채우고 각 사단에 배분된 신병 비율이 높고 고참병들도 주로 빨치산 토벌에나 특화된 충분히 훈련 받은 군대가 아니였습니다. 진격할때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제대로된 반격에 부딪혔을때 순식간에 와해된것도 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게 해결 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용문산 대첩) 걸렸던건 어찌 보면 당연한 문제였습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지금 돌이켜 보면 정주함흥선 이북부터의 좋은 북진 방향은 먼저 서부전선만 압록강까지 올린 후 전선을 서쪽부터 압록강으로 삼아 북동진하면서 점점 압록강에 해당되는 전선 길이를 늘리고 육지의 길이를 줄이는 겁니다. 그 후 동부전선을 북상시키기 시작해서 전선이 동서 방향이 아닌 남북 방향 또는 남동-북서 방향으로 해서 육지 길이는 가급적 최소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북동진하여 개마고원을 차지하고 마천령산맥을 뚫고 두만강까지 가는 그림이 제일 최선이었다고 봅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전쟁지리에서 기본적인 법칙들 중 하나는 이거죠. 지형 조건이 동일하면 전선의 육지 길이가 짧을수록 방어하기 유리해지고 길어질수록 힘들어진다. 평양원산선부터 청천강-함흥선(정주함흥선)까지가 동한만이 가장 서쪽으로 푹 들어와 있고 서해안도 동쪽으로 제일 들어온 곳이라 동서축이 가장 짧았고 200km 약간 넘을 정도였답니다. 괜히 여기를 방어선으로 굳혀놨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죠
@furt7601
@furt7601 6 ай бұрын
청천강 전투에서 박살난 6사단과 8사단은 625 초반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조국을 구한 사단들이었습니다. 즉 국군 최정예 사단이었죠. 6사단(김종오 사단장은 10월경에 교통사고로 요양중) : 춘천-홍천전투, 동락리 전투, 영천-신녕지구 전투 8사단(사단장 이성가) : 강릉 주문진 전투, 영천-신녕지구 전투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6.25전쟁 초반엔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2군단 (국군 6,7,8 사단)은 중공군에게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렸습니다. 당시 국군 2군단장은 유재흥 장군이었습니다. 특히 국군 6사단은 약간 버티다 후퇴하기라도 했지만 국군 7,8 사단은 중공군 공세 후 바로 후퇴하는 바람에 그 구멍을 미 9군단 (인디언 헤드 사단 미 2사단 포함) 이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08:44 에 나오듯이 국군 7,8 사단장에게 실제로 총살형이 선고되었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국군 7사단장은 신상철 준장, 8사단장은 이성가 준장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총살형 판정을 받았으나 집행되진 않았습니다.
@yvrfhnh
@yvrfhnh 5 ай бұрын
정말 재밌게 잘봤습니다 영상과 분석, 컨텐츠 모두 재밌게 감상했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응원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user-zf5vq2fk4i
@user-zf5vq2fk4i 6 ай бұрын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멸!! 공!!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중공군이 그냥 무식하고 인해전술로 머릿수 빨로 밀고 왔다는 오해가 많은데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을 수없이 치르면서 쌓인 전쟁 경험이 많았고 이를 토대로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장교들이 많았답니다
@libertybellliberty6096
@libertybellliberty6096 6 ай бұрын
지금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북한군은 군 복무기간이 7~8년이고 굶주림과 추운 환경에 익숙하여 오히려 전시 때는 그런 굶주림과 추위를 더 잘 견디는 군대일 것이고 지금 대한민국은 1년 6개월 복무에 배고품과 추위 걱정 없는 환경에 익숙한데 유사시 세뇌 당한 사상으로 정신력이 강인한 인민군이 굶주린 늑대 같이 쳐들어 오면 현역 국군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울지 의심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벌어진 1960년대 월남전 에서도 전투병 파병 10년 동안 보이 않는 베트콩과 밀림 지대 습하고 덥고 벌래 많은 전장에서 미군은 5만 8천명이 전사하고 70만 이상이 부상 당했으니 현대전도 지형의 중요성을 무시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북괴는 남자 10년, 여자 7년이라고 하죠 ㄷㄷㄷㄷ 게다가 남자는 원래 13년이엇고 ㅜ
@riverred101
@riverred101 6 ай бұрын
그당시 미군조차 작정하고 이스라엘 방식으로 밀었으면 그냥 전멸시켰습니다.
@namhunkim2547
@namhunkim2547 6 ай бұрын
정확한 판단입니다!
@user-uc9tl1ek9i
@user-uc9tl1ek9i 6 ай бұрын
ㅁㅊㅅㄲ세요? ㅋㅋㅋㅋ 그럼 서울역 거지가 최강이겠네요?
@gho3828
@gho3828 5 ай бұрын
틀딱새끼들은 아직도 정신력타령 ㅉㅉ 그렇게치면 탈북민들은 정신력이 약해서 북한을 버리고 탈북한거야?
@SsoriM
@SsoriM 5 ай бұрын
이렇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재밌는 영상 언제 입소문을 타려나 항상 보고 있는데 벌써 3만이 코앞이시네요. 요즘 만물상자님 영상을 볼 때마다 그냥 허투루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 배워간다는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몰랐던 정보들을 이렇게 소상히 알게 되니 너무 즐겁습니다. 더더욱 떡상하셔서 10만 20만 유튜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흥미로운 콘텐츠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네 바퀴 달린 차량으로 이동했던 미군보다 두 다리로 이동했던 중공군이 더 빨랐다는 점은 왜 중공군에게 미군이 패배했는지 그 이유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미군이었지만 지형지물을 전략에 활용하는 중공군의 작전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user-tg2tn3ww3i
@user-tg2tn3ww3i 6 ай бұрын
1951년 겨울전투는...미군의 웃픈 패주의 역사입니다. 화력에서 도무지 상대가 안되는 중공군이었어요. 미군은 자기나라 전쟁이었어도 저런 무책임한 후퇴를 했을까 싶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웃픈 패주가 맞는 말 같습니다. 탱크와 궤도 장갑차 그리고 각종 트럭 등,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미군. 그러나 미군이 가진 네 바퀴보다 중공군의 두 다리가 더 빠르게 이동하여 후방을 차단했다는 사실.
@hie-eunlee6213
@hie-eunlee6213 5 ай бұрын
중공군 인해전술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떼거지로 공격하는게 절대 아니다 교묘한 전술로 약한 방어선을 찾아 집중적으로 밀어 붙이고 뚫는 작전은 고도의 전투 방식이다 항상 대비해야 한다
@vanilla_ice_no1
@vanilla_ice_no1 Ай бұрын
피흘리며 희생된 분들때문에 이렇게 살고있는걸 모르다니..... 이러다가 진짜 나라 기부할까 걱정된다
@user-ig3bp4je4y
@user-ig3bp4je4y 3 ай бұрын
장비와 화력이 월등한 미군은 산악지형에서 싸울게 아니라 평지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싸웠어야 했다. 제아무리 장비나 화력이 좋더라도 결국 전쟁은 보병이 한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준 전쟁,,
@user-ib2uq7uk3l
@user-ib2uq7uk3l 5 ай бұрын
좋은 프로 감사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북한 동해안이 원산-함흥에서 동한만이 움푹 서쪽으로 파고들었답니다. 보시면 원산이 충북 청주, 전남 순천과 경도가 거의 같고 서울에 비해서도 크게 동쪽에 위치하진 않는답니다 ㅋ 서울에서 정북쪽으로 올라가면 황해도가 아닌 강원도가 나오죠. 북한 강원도의 최서단은 판교군 지하리로 동경 126도 40분인데 당진시내, 전곡항, 한강하류(김포-파주 경계)와 무려 같은 경도랍니다. 서울시청과 같은 경도가 판교읍이고 이천과 안협(북한 철원군 철원읍)은 서울시청보다 더 서쪽에 위치한답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그런데 사실 지금 시점에서 저 시기를 돌아보니 계속 북진하지 말고 평양원산선이나 정주함흥선에서 방어선 굳힌 다음 천천히 올라가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거지 당시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맥아더가 아니라 리지웨이, 밴 플리트 장군이었어도 계속 북진통일 열망 속에서 북진에 전진하다 갑자기 저 라인에서 멈춘다는 결정을 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중공군 잠입 및 발견 못한 것도 중공군이 야간에 주로 움직이고 은폐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유엔군이 일부러 무시하고 오만했다기 보단 정말 중공군의 속임 전략이 생각보다 뛰어났습니다. 1달 동안 북한 전 상공을 꼼꼼히 정찰했는데도 중공군을 발견 못했다고 하니 ㅜ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상식적으로 250킬로 전선이 갑자기 750킬로가 되는데 아무런 플랜B도 없이 마냥올라가는 거에 일선지휘관 대다수는 반대했다는거.. 이제와서 돌아봐서 나오는 얘기는 절대 아니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user-zs7eb5uc9r 함흥 이북부턴 동해안이 갑자기 2시 방향으로 급격히 북동진해 동서 폭이 급격히 넓어지기 시작하죠 ㅜ. 당연히 청천강-함흥 라인에서 가다듬고 정비해야 맞는데 저 당시 북진 열풍이 불던 분위기에서 저기서 멈춘다는 게 싐지 않았을 겁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무엇보다 8군사이에 맥아더 직속 10군단이 끼어있었던게 화근이었고 누구나 예상가능했던 국군 2군단붕괴도 큰 원인중 하나죠. 2군단 위치생각하면 누구도 예측못한 불가항력이 절대 아니었다능... 한국전서 지는 전투는 불가항력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관은 버려야합니다. 더구나 50년 겨울참패는 미국육사에서도 필수로 가르치는 케이스에요. 이걸 예측못할수밖에 없던 불가항력으로 모는 건 너무 안이하고 뻔한 발상이죠. 그런식으로 해서 한국전에서 멀 배우겠어요?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6 ай бұрын
미군은 아직도 진주만에서 먼가 더 배울게 없나를 따지는데 50년 겨울참패가 어쩔수 없었다뇨? 그런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user-zs7eb5uc9r 제 말은 당연히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이에 대해 고찰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전쟁을 너무 결과론적인 관점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거죠. 당시 상황에서 생각하는 거랑 나중 후대에서 다 알고 나서 그 상황을 판단하는 거는 다를 수 있답니다
@user-dj5bb9of5y
@user-dj5bb9of5y 5 ай бұрын
비록 전략적판단이 어긋나는 경우도 많앗지만 그당시 우리나라에 역량을 생각하면 미국이 지원해준것만하더라도 천운일겁니다 유엔군과 우리 국군이 없엇더라면 역사가 참많이 변햇을겁니다
@user-dk9cs2rj4k
@user-dk9cs2rj4k Күн бұрын
어떻게 이런 걸 영상으로 만들지 대단하다 제가 읽었던 두꺼운 책 두개 1950-52 이 책도 천페이지가 넓었는데 그 책 보다 훨씬 디테일함
@war-history
@war-history 22 сағат бұрын
감사드립니다. 중공군 개입 초반의 상활을 그 어떤 컨텐츠보다 자세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압축해 다뤘습니다.
@sungjoohan1316
@sungjoohan1316 5 ай бұрын
아프칸이나 베트남전에도 보았듯이 미국은 항상 산악지형이나 정글, 숲 지형에서 게릴라전 펼치는 적에게 곤욕을 치루더군요 확 트인 개활지에서 정면승부 하면 미국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으니...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6 ай бұрын
오늘 동영상 두번을 보고 있는데 사실 중국군이 먼저 한국군 2군단을 치고 미8군을 칠무렵에 미군이 상황파악이 안되고 동영상에서 지적하듯이 너무 기계화에 의존한 나머지 후퇴중에도 중국군의 기습공격에 미 제2사단이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결국 이 전투는 나중에 장진호전투에도 재연되어 미 10군단이 겨우 빠져나와 흥남에서 철수한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이 청천강전투 말고도 나중에 운산전투에서도 미 1군단 산하 미 제1기병사단 제8연대 3대대,한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와해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너무 무리하게 북진을 추진한 결과는 그 폐해가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에서 다룬 청천강 전투가 끝난 얼마 후 동부전선에서 장진호 전투가 시작됩니다. 장진호 전투는 미 10군단, 즉 미군에서 가장 강력한 미 해병대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도 이 컨텐츠 앞부분에서 자세히 다뤘기에 전체적인 상황을 조망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중공군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는데 지난 1부 영상에서도 얘기했던 적유령 산맥은 되넘이 고개라해서 역사적으로 늘 중국의 왕조가 넘어왔던 경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운산전투. 그리고 청천강 전투에서도 중공군은 낭림산맥에 숨어서 미군의 대대적 폭격을 피했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도망치는 미군보다 먼저 이동하여 매복했던 사실. 이런 내용을 통해 중공군은 단순히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자연조건을 이용해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군의 탱크도 강력한 콜세어 전폭기도 자연조건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중공군앞에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오늘도 그걸위해 동영상을 두번보고 다른 동영상을 보고 참조한 것입니다!!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4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9병단 와해가 중요한게 아니라 미 해병대가 겨우 겨우 빠져나왔는데,비록 온전하게 병력을 유지하지 못했지만 철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psycho803
@psycho803 5 ай бұрын
조선족이나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 조롱댓글 다는데 차단해 주세요.
@user-ms8bm7nc1d
@user-ms8bm7nc1d 3 ай бұрын
영화제목좀요
@user-ci5tt9bo2p
@user-ci5tt9bo2p 3 ай бұрын
중공군은 손자병법을 교과서적으로 충실히 구사하여 함정으로 유인했던 것. 유엔군이 이것을 알았더라면 전진을 멈추고 평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우회전술로 적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며 일주일만 기다려도 중공군은 자멸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war-history
@war-history 3 ай бұрын
맞습니다. 손자병법이나 삼국지 등에서 늘 나오던 방식. 적을 자신이 가장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인 후 포위섬멸. 그 오래된 수법에 미국이 당할 줄은...
@tassader3317
@tassader3317 6 ай бұрын
지금은 싸우면 어케될지 모르겠지만 한반도 산악 지형하고 겨울은 미군도 견디기 힘든거 마찬가지 인거 같음 ㄷㄷ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장진군이 저 때 11월인데도 영하30도까지 내려갔다죠 ㅜ 지금은 북한도 이상고온이 와서 요즘 강계, 장진 심지어 삼지연도 낮 기온이 영상이랍니다 ㅋ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낮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0도였습니다. 중공군이 참으로 현명했는데요. 낮에는 무조건 참호 파고 들어가서 자거나 휴식,. 밤에만 미친듯이 행군했습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중공군은 개마고원과 비슷한 만주의 혹독한 겨울을 매우 잘 알았기 때문에 추위에 매우 익숙한 반면 미군은 장진호가 북위41도라 뉴욕과 비슷한 위도니 별 추위 없겠지 했다가 엄청난 한파에 많은 병사들이 죽었답니다
@jdr.431
@jdr.431 4 ай бұрын
우리가 중공을 증오하는 또 하나의 이유....😮
@javaxerjack
@javaxerjack 6 ай бұрын
1. 한국 전쟁은 북한의 '기갑 전격전'으로(2차세계대전) 시작된 전쟁이 다시 미군의 상륙 작전으로(노르망디) 역전 되었고 다시 그것이 중국의 심리전으로(손자 병법) 역전 된 참 여러모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전쟁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묻혔죠. 특히 이 심리전 부분은 세부 사항을 연구하기 힘든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작전 구사가 가능하다면 충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2. 현 시점에서 이 부분을 좀 비판적이라기 보다는 미군의 심리 상황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1) 보통 차량도 아닌 험지 주행을 하기 위해 제작된 미군 차량이 못 가는 길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대군이 이동한다는 보고를 설사 미군이 들었다 한들 얼마나 현실적인 이야기로 들었을지 의심이 갑니다. 만약 지금의 역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숨쉬기도 어려운 지형을 타고서 대군이 위회해 들어 올겁니다. 더불어 모든 인원과 장비는 도보, 도수로 이동하구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2) 중공군도 상황이 그리 널럴한게 아닌게, 그 당시 기록을 보면 날씨 맑아 지면 집요할 정도로 미군의 폭격이 폭격을 가해서 사실상 모든 시설이 방공호 형태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입니다. 말이야 쉽지만 매번 이동 때 마다 땅굴을 인력으로 파야 했다는 뜻이고(삽은 제대로 있었으려나?) 제대로 구축된 벙커가 아닌 이상 폭격에 취약해 위치가 발각 당하면 생매장 당하기 일수 였을 겁니다. 거기에 후방의 모태동 아들은 계란 볶음밥을 만들다 죽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후방의 사실상 황제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도 계란 볶음밥 만드는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보급이 열악했다는 뜻입니다.(후방이 이 정도면 전방은 말할 필요도 없구요) 즉,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버티고 버틴 그들의 인내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할겁니다. 3) 2군단 배치는 제가 볼 때는 그나마 2군단을 생각해서 배치한 구성이 아닌가 싶네요. 즉 산악 지형쪽으로는 적이 오지 않거나 와봤자 소수의 병력만 올 것이고 사실상 하나의 방벽으로 작용할 터이니 제일 약한 군에 맞겨도 문제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싶네요. 3. 백선엽은 평양에서 불타는 물자에 눈물을 흘렸다고 했지만 제가 볼 때는 현장에서 뼈가 굵은 워커 장군의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봅니다. 평양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면 모를까, 버리기로 결정했다면 적에게 노획되어 아군에게 향하지 않게 하는게 최 우선입니다. 많은 물자가 써 보지도 못하고 폐기된건 정말 아까운 일이지만, 최소한 그 물자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건 막아야 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물자 이송을 포기 했다는 뜻은, 인력 이동을 최 우선으로 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이것과 정 반대로 행동한 일제군의 전적을(과카디날 전투에서 미군이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버틴건 일제군이 남기고 간 쌀 덕분이었음. 물론 제대로 조리를 못해서 진짜 맛이 없었겠지만) 생각하면 제가 볼 때는 올바른 결정이라고 봅니다.(무었보다 굶주린 중공군한테는 꼭 필요했던게 전차보다 쌀이었겠지만)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갑 전격전으로 승승장구 했던 북한군, 그 북한군이 결국은 해군과 공군이 강력한 국가의 상륙작전으로 역전당했고 다시 해군과 공군이 강력한 국가를 심리전과 지형지물을 잘 활용한 손자병법의 나라가 물리쳤던 전쟁. 한큐에 요약이 되었습니다.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이 우익이 완전히 무너진 관계로 포위가 되지 않기 위해 평양을 포기하고 신속히 후퇴하면서 모든 물자와 무기들을 모두 파괴한 것은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너무나 아까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javaxerjack
@javaxerjack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그 중국군이 사용한 보급품의 상당량이 중국에서 보급한 물량이 아니라 UN군 물자를 노획해서 썻다 해도요?
@javaxerjack
@javaxerjack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근데 투입된 물자의 양을 따지면 그것도 과연 승리냐라는건 별도의 문제고 이때부터 미국이 전쟁을 끝낼 궁리만 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밴 플리트 지휘의 핵심은 보병 보다는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포병 전술에 있었고 더불어 38번 부근이 절묘하게 소위 말하는 중공군의 종말 공세점에 있었구요.
@javaxerjack
@javaxerjack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그래서 최종적 결론이 이 막대한 물자와 인원 투입에도 불구하고(특히 인원 부분은 양쪽다) 전쟁 시작 전과 그렇게 달라진게 없는 휴전선이라는게 참 제일 허망하죠.
@muno7112
@muno7112 6 ай бұрын
북진은 국군만 했어야 하는데 중공이 미군은 38선을 넘지말라는 말을 너무 무시했네요.물론 그래도 중국이 개입안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elfyuna
@elfyuna 6 ай бұрын
무기지원😢
@asahn2110
@asahn2110 6 ай бұрын
전쟁 명분을 쌓읗려고 그런거지 어쨌든 중공은 참전했음
@user-jp6zi1gi3w
@user-jp6zi1gi3w 4 ай бұрын
무슨영화장면이죠??
@user-sv8xp3lk2z
@user-sv8xp3lk2z 4 ай бұрын
중국에서 만든 영화일거임
@user-rj5jk7vf2v
@user-rj5jk7vf2v 2 ай бұрын
군 전력 강화가 시급합니다. 정신력 인내력 군부대 가면 동태눈
@user-qm4ei8sn3j
@user-qm4ei8sn3j 5 ай бұрын
장계석 예하 800만대군을 중공이 싸우기 유리한 본토에서 싸워 이긴 일본은 대체.....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8년간 계속되었던 중일전쟁, 그 이후 1949년까지 계속되었던 장개석 군대와의 국공내전을 거치며 강력해진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DOPAPA0923
@DOPAPA0923 4 ай бұрын
볼때마다 중국과 북한을 혐오하게되고 우리 북한이라 발언하는 그 당까지 혐오스럽다
@user-jw2br1kr3c
@user-jw2br1kr3c 6 ай бұрын
한국군 2군단이 처참하게 깨진것이 평양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였죠. 2군단이 무너져 후퇴 할때도 워커는 맥아더에게 평양을 사수할수 있다고 했지만 군우리에서 미2사단이 하루만에 사단병력의 절반이 날라가자 미8군병력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나 숙천과순천에 방어선조차 치지 못한채 평양을 포기하고 임진강 까지 후퇴했죠. 청천강에서 2군단이 쉽게 지지만 않았어도 미군이 평양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전선은 평양 원산 라인에서 고착할수 있었는데 참으로 통한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애초에 평양원산선에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채 북진했고 또 후방에 게릴라들이 여러 곳에서 뒤를 긁고 있어서 병력도 부족해서 저 당시 상황에서 평양원산선에서 유지하는 건 아쉽지만 불가능했답니다 ㅜ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평양원산선과 임진강-화천-양양선 사이에도 유엔군이 전략적 후퇴,지연,정비를 위해 설정한 선들이 있었습니다. 해주-평산-신계-이천-평강-김화-화천-양양 선과 예성강하류-금천-토산(시변리)-안협-철원-김화-화천-양양 선이 그것이죠. 그러나 상황이 너무 긴박했고 중공군이 거침없이 밀고 오는데다 유엔군은 많은 병력들이 소실된 상태라 결국 쭉 임진강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bk2111
@bk2111 Ай бұрын
가쓰라테프트니 제국주의 협약이니 왈왈하시는분들 계시는데, 미국이 38선이라도 안그어줬으면, 해방당시 승전국 자격으로 일본진주 목표로 남하했던 소련이 여기 다 먹었다. 지금쯤 이땅은 북한도 아니고 코리아스탄쯤 되어서 우크라이나전에 착출되어 파병나가고 있었을거임.
@hawk8873
@hawk8873 22 күн бұрын
맞습니다. 38선의 역사를 알면 절대 그딴 소리 못하는데 말이죠. 사실 이미 주범격인 쏘련 측 비밀 자료가 다 공개되어서 미제국주의자의 전쟁 유도 운운 하는 썰은 전부 혁파된지 오랩니다.
@user-by9xj7cg2u
@user-by9xj7cg2u 13 күн бұрын
역사에 만약은 없으요.. 그랜 얘기하면 고구려 시대 까지 올라감...ㅠ
@stevenjohn7763
@stevenjohn7763 5 ай бұрын
검차 세워놓고 대회전 벌였으면 됐는데 아쉽아쉽
@user-hh5vv5ok3y
@user-hh5vv5ok3y 2 ай бұрын
진실만이 승리초석이다
@user-dg3gl4fe1p
@user-dg3gl4fe1p 5 ай бұрын
한국전 당시엔 중공군에 대한 연구가 전무했었음... 중공군이 개입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대비가 없었던 것임. 또한 개입하더라도 빈약한 무기로 세계 최강의 미군을 몰아낸다는 것은 소설에 불과하다 생각들 했음. 미국 최고의 장군 맥아더가 그렇게 우기는데 누가 반박을 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 , ' 적을 얕보면 화를 당한다' 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 되는 시기였음. 현재도 한국군의 화력이 북한을 압도한다 하여 북괴를 우습게 보는 밀덕들이 있는데, 그런 자만심이 6.25를 불러왔고 초기의 패배를 불러왔음을 잊어서는 안됨. 완벽한 군대는 존재하지 않고 항상 약점이 있는 법이기에, 우리의 약점을 보완하고 적의 약점을 파악하여 애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못하게 하되, 어쩔수 없이 전쟁이 났을 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반드시 승리해야 할 것임.
@user-wj9ln8sp4g
@user-wj9ln8sp4g 2 ай бұрын
'백전백승'도 아니고 '백전불패'도 아니고 '백전불태'가 맞음. 이거 헷갈리는 사람들 은근히 많은 듯. 뜻은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임.
@user-zb2pr7sl6r
@user-zb2pr7sl6r 4 ай бұрын
전략과 전술에서 중공군에 농락당했던 청천강전투~~그당시 세계에서 가장막강한 전투장비를 보유하고도 중공군에 패했던 미군 결과는 다시 남과북이 분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6 ай бұрын
만물상자님 맥아더 중공군 개입 알고있었을까요😤🤬
@user-wj7to9qw2z
@user-wj7to9qw2z 6 ай бұрын
이승만비롯 맥아더 중공군개입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kdwni03
@kdwni03 6 ай бұрын
텅비어서 평양에 방어선을 치지못했군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좋은 지적이십니다. 영상을 다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미 1군단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 안에는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있었죠. 그런데 문제는 미 9군단이었습니다. 미 9군단 예하 미 2사단과 미 25사단이 중공군을 3일동안 막아낸 후 후퇴를 했는데 미 2사단은 전멸, 미 25사단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선 우측이 텅 비어버렸습니다. 중공군의 장기는 후방차단입니다. 중공군이 후방을 차단한다면 그때는 도와줄 부대도 없었습니다. 워커는 그래서 평양에서 시가전조차 안하고 그냥 다 버리고 후퇴해버립니다.
@kdwni03
@kdwni03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안했다기 보다는 못했다고 봐야되나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를 자세히 보시면 미군의 고충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국군 2군단이 통째로 뚫렸고 미 9군단이 대신 막는 사이에 미 1군단은 후방차단이 안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9군단 예하부대인 2사단은 전멸상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측을 방어해줄 병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평양을 방어하다가 또다시 후방이 차단된다면 미 8군 전체가 전멸당할 판이라고 정확히 지도까지 움직여가며 설명을 했습니다. (10:48)
@kdwni03
@kdwni03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북한은 운이좋았던거내요?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운이 좋았어요 북한은
@TV-rm8qe
@TV-rm8qe 4 ай бұрын
영화 제목 궁금해요!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어느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TV-rm8qe
@TV-rm8qe 4 ай бұрын
@@war-history 맨 처음에 나오는 영화 궁금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중국에서 개봉했던 장진호를 말하는 것 같네요.
@user-uc9tl1ek9i
@user-uc9tl1ek9i 6 ай бұрын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미해병대와 미육군7사단은 지도에 안나왔는데 어디에 있었나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좋은 질문하셨네요. 그만큼 대부분 사람들이 6.25전쟁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컨텐츠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셔도 질문에 대한 답은 아셨을 것입니다. (01:11) 북한의 낭림산맥이 굉장히 거대한 산맥입니다. 묘향산이란 북한의 명산도 여기 있죠. 미군은 낭림산맥을 경계로 서부와 동부로 나눠서 진격했습니다. 이번 컨텐츠에서는 서부 전선 즉 워커장군이 지휘하는 미 8군 지역을 다뤘습니다. 이 지역은 서부전선이기 때문에 평양, 서울 라인입니다. 동부전선보다 전략적으로 더 중요했습니다. 평양도 미 8군이 점령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 대한 컨텐츠도 있습니다. kzbin.info/www/bejne/a6vRoquqmtlpmqc 미 해병대의 명예를 빛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전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꿨다.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6 ай бұрын
만물상자님 미국 🇺🇸 중앙정보국 CIA 는 맥아더에게 중공군 개입 정보 제공 경고 안했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지난 컨텐츠인 청천강 전투 1부를 보면 됩니다. kzbin.info/www/bejne/nH7IeKF5jdpkd5I 미국 정부, CIA, 미 합참 모두 맥아더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고 말입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 맥아더에게 그 누군가가 충고를 한 일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미국에서 맥아더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팩트입니다. 지난 컨텐츠에서 얘기를 한 내용임.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미국도 유엔도 중공군이 개입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고 이런 거 듣지도 않고 무시했던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아무리 정찰을 해도 발견 못할 정도로 은폐, 위장에 뛰어났고 낮에는 숨어 있다 어두운 밤에만 행진하고 민간인처럼 보이게 속임수도 썼답니다 ㅜ 결국 유엔도 어쩔 수 없이 당한 게 컸지 중공군 많이 들어온 거 다 확인해 놓고도 일부러 무시하고 취급도 안하지 않았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지난 청천강 전투 1부와 이번 청천강 전투 2부를 끝까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미국이 알았냐? 몰랐냐? 는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1차 공세 (운산전투)에서도 주로 국군이 당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이미 중공군이 개입한 것은 알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 문제였는데 갑자기 중공군이 싹 사라진 것입니다. 그들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미군은 계속 찾았고 그것이 1달 가까이 계속되었다는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더군요.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war-history 동감합니다. 비록 중공군의 전력을 두려워하지 않아 여러 실책들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미국과 유엔군이 이런 중공군의 개입을 일부러 모른척 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 유엔군을 바보로 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user-hl4cz9ti8j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도록 유인, 매복, 포위공격, 개입사실을 알았건 몰랐건 중공군이 어설펐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미군을 보병만으로 절대 이길 순 없었을 것입니다.
@user-gg6fw5rr2l
@user-gg6fw5rr2l 5 ай бұрын
중국은 우리 의 주적
@user-tc4hc2nf4r
@user-tc4hc2nf4r 4 ай бұрын
맥아더가 중국 본토 에 리틀보이를 떨궛어야 햇었어 .
@user-by9xj7cg2u
@user-by9xj7cg2u 13 күн бұрын
트루먼과 미 합참의장은 3차대전 날까봐 핵무기 사용과 중국 본토공격 반대했음.. 그래서 맥아도장군도 51년 4월인가 해임됨..
@user-ks9gl2gx4n
@user-ks9gl2gx4n 5 ай бұрын
인해전술이라지만 중공군 초기 투입병력은 28만정도. 인민군은 전멸이고 국군과 유엔군은 40만 정도였습니다. 삼국지를 통달한 완벽 중국군의 승리로 봐야합니다.
@user-ks9gl2gx4n
@user-ks9gl2gx4n 5 ай бұрын
하긴 동부쪽 국군 3군단 예하 6사단, 7사단,8사단, 서부쪽 국군 제1사단 은 중국군 나팔소리만 듣고도 도망치고 붕괴되었징. 그래서 유엔군은 국군쪽 방어선이 뚤리니까 할 수 없이 남쪽으로 철수한것이고. 현리전투때 3군단은 완전 궤멸되어 벤틀리트에게 해체명령받고 작전통제권도 이양되었고요.
@grimreaperkim9433
@grimreaperkim9433 5 ай бұрын
용문산 전투, 파로호 전투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나왔으면 좋겠네요. 국군의 설욕전... 중공군 수장시키는 거...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웬만한 영화보다 더욱 감격스러웠던 용문산-파로호 전투는 이미 컨텐츠로 완벽히 구현한 바 있습니다. kzbin.info/www/bejne/e5CsiWyvg7uladE (국군 최초로 중공군 격파! 국군 6사단의 통쾌한 복수전) 용문산-파로호 전투가 특히 감동스러운 이유는 전투의 주인공이었던 국군 6사단이 직전에 중공군에게 대굴욕을 당했고 미군들에게는 온갖 비난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국군 6사단이 중공군에게 뚫려버린 그 구멍을 미군과 호주군, 영국군이 메웠으니 비난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1달 정도 후에 국군 6사단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기를 갖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싸웠고 미국에서는 합참의장 브래들이가 날아와 브리핑까지 받는 등 국군의 자존심이 엄청 높아진 전투였습니다.
@user-jp6zi1gi3w
@user-jp6zi1gi3w 4 ай бұрын
@@war-history왜 지산카센터가 나오죠
@user-hp4hl7px2r
@user-hp4hl7px2r 5 ай бұрын
전투에서 살아 남는자가 강자입니다..일병,이병은 첫 전투에서 절반이 살아남고 다음 전투에서 또 살아 남는자가 나중에 베트랑이 되죠...중공군은 제1차 국공내전 10년,,항일전쟁 8년, 제2차 국공내전 4년을 거친 베트랑 군대들이였기에 전투를 잘했다고 합니다... 인해전술 쪽수로 이긴것처럼 평가절하 하지지만 유엔군의 2배 병력을 넘은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국공내전이 1949년 12월에 끝납니다. 6.25전쟁 반년전까지도 이들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반면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미군은 2차대전의 베테랑들이 해병대에 포함된 인원을 빼면 외엔 많지 않았습니다.
@user-tz5nz1ht5v
@user-tz5nz1ht5v 3 ай бұрын
중공군은 유엔군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습니다. 거기다 제공권에 보급 화력까지 유엔군이 월등했던거 감만하면 지휘관이 무능했거나 중공군 전술이 대단했다고밖에 설명이 안됨.
@user-dr7uu5vi3m
@user-dr7uu5vi3m 3 сағат бұрын
예나 지금이나, 수색 및 적 규모 파악이 우선이다....2천년전 손자병법...적을 알고 나를 알때 백전백승......사방으로 수색병만 보냈어도......ㅜㅜ........초기 포로로 잡힌 중공군에게 정보를 얻었으나, 무시 했다고......ㅜㅜ...빨리 전쟁 끝내고 싶은 마음에.......
@war-history
@war-history 47 минут бұрын
청천강 전투 1부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미군의 무시도 무시였지만 중공군의 은폐 능력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kzbin.info/www/bejne/nH7IeKF5jdpkd5I (중공군을 찾아라! 청천강 전투 1부) 무려 60만명의 중공군이 북한의 산속에 숨어 있었는데 단 1명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중공군 1차 공세 후 미군이 1달 가까이 계속해서 중공군을 찾은 사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채널에서 이 상황을 매우 자세히 다뤘습니다.
@hawawa4318
@hawawa4318 6 ай бұрын
이때도 중공군이 강했는데 지금은 더 미친듯이 강해짐.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이 당시 중공군은 장비 측면에서는 오히려 북한군보다도 딸렸습니다만 한반도의 지형을 너무 잘 알았고 이 지형 지물을 이용하는 능력, 그리고 심리전술이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기와 장비 측면에서도 강해졌죠.
@user-tu9kh4xp3o
@user-tu9kh4xp3o 6 ай бұрын
중공군의 초반 허를 찌르는 전술이 좋았던거지 병사들 역량 자체가 나았던 건 아니었음 그 증거가 중공군 춘계공세가 용문산 전투 파로호 전투를 통해 개박살이 난후 유엔군이 본격적으로 다시 북진 태세를 보이자 서둘러 휴전 제의를 해서 시간을 번 거임 이후는 휴전회담 기간동안 전선이 거의 돈좌된 상태에서 휴전을 대비한 요충지 확보를 위해 고지전으로 접어든 휴전회담으로 유엔군의 발을 묶어놓은 후 중공군은 자신들의 화력이 현저히 부족함을 깨닫고 스탈린을 독촉해 포병 세력 강화에 노력했음 국군도 그 즈음에는 중공군을 상대하는 요령을 체득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과거같이 허무하게 붕괴되지 않고 중공군의 제파전술에 대비해 곳곳에 부비트랩이나 네이팜을 이용한 트랩을 만들어놓고 중공군이 인해전술 시도하면 노릇노릇하게 구워주곤 했었음 중공군이 우습게 보던 한국군에 대한 인식이 교활하고 끈질기다란 평가로 바뀌게 됐음 국군이 적성무기까지 적극적으로 노획해서 소수 병력이 부무장(가장 선호하던게 파파샤)으로 갖고 다니며 전선의 중공군 참호에 대해 치고 빠지는 전술을 자주 사용해서 중공군을 괴롭혔음
@unofa
@unofa 5 ай бұрын
핵쏘면 죽을 운명이었는데 뭔 ㅋㅋ
@user-mm1fc9xi8v
@user-mm1fc9xi8v 4 ай бұрын
영화 제목이 뭐죠??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본 채널은 전쟁역사를 다루는 채널입니다. 중국에서 개봉한 장진호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국뽕영화지만 고증에 맞는 장면만 채널에서 다뤘습니다.
@user-ph3yg8db1o
@user-ph3yg8db1o 6 ай бұрын
평양~원산을 지켰다면 어땠을까 생각나네요 전선고착후 휴전 그리고 마찬가지 우리도 평택 ~금강 ~ 삼척까지 후퇴후 고착되었다면 어땠을가요 북한도 스스로 멸망했을테고 남한도 역시나 패망했을거라고 봅니다 평양~원산 청천강라인으로 휴전시 북한 스스로 자급자족 정말 안되었을테고 ( 황해도,평양인근 평야지대 없어서 힘듬) 나머지 죄다 산악지역 평택~삼척 금강라인에서 휴전되어다면 역시나 북한을 공세로 인하여 대한민국을 지키기가 정말 어렸을라고 예상해봅니다 ~~ (서울의 수도권이 전부 공산권이라 나머지 지역으로 버티기 힘듬)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6 ай бұрын
뭐 전자면 북한이 지금보다 매우 불리해졋을 거고 후자면 우리가 지금보다 매우 불리해졌을 텐데 그래도 붕괴되거나 흡수되진 않고 존속 가능했습니다 ㅋ 전자여도 북한은 한반도의 40% 넘게 남아 있고 평양평야, 박천평야, 함흥평야 등 농토들이 있고 후자의 경우 우리도 삼남 지방은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JayKimJr
@JayKimJr 24 күн бұрын
국군 2군단은 차량화가 안됐던 부대라 당했다 하고 미군은 차량이 오히려 짐이 됐었다 하고 먼 소린지
@user-kz1sv1lv8e
@user-kz1sv1lv8e 20 күн бұрын
아무리 화력이 좋아도 아프간 한국같은 험준한 지형이 많은 게릴라,스탈린그라드같은 시가전은 변수가 참 많네요 차라리 유럽,소련처럼 한반도도 평야가 많았으면 독일처럼 당대 최강 미군이 중공북괴 싹다 밀어버렸을텐데
@war-history
@war-history 20 күн бұрын
가느다란 소로가 깊은 산과 계곡 사이에 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진격이 아니라 후퇴로였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공군은 이미 거기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미군이 그 험하고 좁은 도로를 차량으로 이동하는 속도보다 산을 타고 걸어서 이동하는 중공군이 더 빨랐던 것입니다.
@St.Petersburg88
@St.Petersburg88 6 ай бұрын
한국전쟁에 中공군인 줄..
@user-zd3ek4lc4i
@user-zd3ek4lc4i 6 ай бұрын
625전쟁에서 국군은 없는게 차라리 나았음
@user-cc9jf2xg9h
@user-cc9jf2xg9h 5 ай бұрын
없으면 왜 지켜주겠냐 다른 나라도
@antoniojo6559
@antoniojo6559 4 ай бұрын
저출산으로 국군은 곧 멸망할겁니다..시급합니다..
@user-pi1te3xy9v
@user-pi1te3xy9v 5 ай бұрын
그 때 핵을 썼어야 했는데..
@user-nv4wu7hc3f
@user-nv4wu7hc3f 5 ай бұрын
Why not
@user-lk7tv3ye7o
@user-lk7tv3ye7o Ай бұрын
한국군 최악의 흑역사 ㅠㅠ
@war-history
@war-history Ай бұрын
사실 사료를 보며 저도 놀랬습니다. 중공군의 가장 결정적인 공세였던 중공군 2차공세. 그 때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다름아닌 국군이었습니다. 심지어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이 권총으로 저지하는데도 국군은 무질서하게 도망쳤습니다. kzbin.info/www/bejne/oJ-udWNnjZalZ7s (국군의 흑역사)
@user-xh2gu5de4f
@user-xh2gu5de4f 5 ай бұрын
미군이 은근히 전투를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때 밝혀졌다. 허허벌판의 사막같은 곳에서는 댜량의 폭탄과 무기로 전투를 잘하지만 숲과 협곡같은 좁은 공간에서는 전투를 잘 못하는 것이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이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단순히 중공군이 나타난 것을 간과하고 진격했다가 패배했다.는 너무 심플한 이야깁니다. 개입 초반에 중공군은 비행기 하나, 탱크 한대도 없는 군대였습니다. 스탈린이 공군지원을 해주기로 해놓고 해주지도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미군은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험준한 산악지대는 미군 차량의 네 바퀴보다 중공군의 두 다리가 더 빨랐습니다.
@fastvirus79
@fastvirus79 4 ай бұрын
패튼 전차를 타고 후퇴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평야지대였다면 중공군은 저렇게 공격도 못하고 몰살을 당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험준한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미군은 기동을 못했습니다. 기동을 못하고 근접전이 벌어지면 강한 화력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탱크를 타고 후퇴를 할 수도 없죠. 앞에 아군의 차량이 폭발되어 길을 막고 있는데 아군을 깔아뭉개고 도망갑니까? 그래서 이 컨텐츠에서 북한같은 지형에선 잘 갖춰진 장비가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jtk6911
@jtk6911 4 ай бұрын
@@war-history 북한 평양평야나 황해도는 거의 평야지대인데 그럼 거기서도 중공군에 패배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user-wu2fs7nf5t
@user-wu2fs7nf5t 4 ай бұрын
니가 그때 사단장해봐라? 애들 몇만명 몰살시키게 생겼구먼..
@fastvirus79
@fastvirus79 4 ай бұрын
@@user-wu2fs7nf5t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물어볼수도 있는거지
@warriet29
@warriet29 5 ай бұрын
패튼 18대....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네. 맞습니다. 백선엽 장군 회고록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당시 미 육군의 최신형 전차였던 M46패튼 전차는 6.25전쟁에 투입된 바 있었습니다. 북진을 위해서 뒤늦게 열차에 실려서 평양으로 왔던 M46 패튼전차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파괴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user-zf1bu5ms9i
@user-zf1bu5ms9i 3 ай бұрын
지금도제2의헌국전이발밯된다면미군읔서뷰전선야만치중하고나머지는한국군이대항할것이다,미군은산악전을싫어한다,아니훈련이전혀않되었다
@user-vz6hd3yf3c
@user-vz6hd3yf3c 4 ай бұрын
당시 평양에서 진격을 멈춘다는 생각을 못했을 만한 것이 일단 패퇴하는 적은 추격하여 섬멸하는 전술상의 기본교리수행문제, 그리고 중공의 참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하여 과실을 따지긴 어렵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진격을 멈춘다는 건 북괴군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줄 것이 분명하고, 이는 전쟁을 더 오랜기간 끌겠다는 건데 이건 누가봐도 선택할 만한 옵션은 아니니까요. 또한 우리는 중국을 공격하려는 의도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므로 중공이 자청하여 대군을 파병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었거든요. 당시 미국 정보부도 중공의 참전가능성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첩보능력은 지금보면 비참할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아무튼) 지나간 역사를 완전히 아는 우리들 입장에서야 뭐라할 수 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건 예측가능한 변수가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중공군의 참전을 여러모로 확인한 후에도 매카사가 "그들이 중공군이었을리 없다"라고 한 근거가 미 정보부에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죠.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사료에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가 중공군 참전을 미리 알고 있었고 맥아더에게 이야기까지 했다는 유언비어가 많은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누구도 맥아더에게 이래라 저래라 안했습니다. 그리고 앞날을 훤히 내다보는 신이라면 당연히 청천강 위로 안올라가고 방어태세로 전환했겠죠. 그러나 그것은 신이 되야 가능한 것이고 당시 미군이 중공군이 나타날지 모르니 일단 정지! 이랬다면 한국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정부가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user-vz6hd3yf3c
@user-vz6hd3yf3c 4 ай бұрын
@@war-history 맞습니다.
@user-rj5jk7vf2v
@user-rj5jk7vf2v 2 ай бұрын
난 개성공단에 갔었다 살아있던 눈빛 북한군을 보았다 남한은 섞은 동태눈
@B--eb1th
@B--eb1th 5 ай бұрын
만약 미국이 핵을 썼다면 소련도 남한에 핵을 투하했을것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지금은 6.25전쟁 관련 중국과 소련 자료가 공개되어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탈린은 핵은 커녕 직접 미국과 부딪힐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실제로 북한의 김일성에게 전쟁을 승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설사 북한이 밀린다해도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magekweon8335
@magekweon8335 4 ай бұрын
소련은 그 당시 미국과 연합군 신세라 ㅋ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magekweon8335 지금 하신 말씀은 2차대전 당시와 헷깔리시는 것 같습니다~
@magekweon8335
@magekweon8335 4 ай бұрын
@@war-history 넵!
@user-vz6hd3yf3c
@user-vz6hd3yf3c 4 ай бұрын
당시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를 투발할 수단이 없었고 스탈린은 독소전의 피해복구와 동유럽의 공산화를 인한 시간을 벌려는 생각으로 불개입했을 확률이 99.9%였습니다. 전후 드러난 사실은 소련은 북한이 밀리더라도 직접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고 막판에 미그기를 이용한 작전에 자국조종사를 좀 보낸거 빼곤 지상군의 투입이나 항공세력을 이용한 폭격은 전혀감행하지 않았죠. 이건 현명한 것이, 소련은 독소전의 피해를 복구한 것이 1960년대 초반이었을 정도로 극심한 파괴를 입은데 반하여 미국은 피해가 1도 없었으므로 소련으로서는 미국과의 직접전쟁은 극구피했던 겁니다.
@user-dn8il4pc1l
@user-dn8il4pc1l 5 ай бұрын
백선엽이 눈물을? 믿지 못하겠게!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사실 관계만 말씀드리면 당시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 예하부대였습니다. 그런데 05:09 에 지도로 상황을 설명했듯이 미 9군단이 중공군을 막아주는 틈에 미 1군단은 거의 손실없이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은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그냥 평양까지 한걸음에 후퇴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싸움조차 못해보고 후퇴한 셈이었으니 회한에 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습니다.
@user-dq6tf9ms6q
@user-dq6tf9ms6q 5 ай бұрын
영프가 5-60 정도만 파병해줬더라면 ㅎㅎ
@user-dg2kg4ht7n
@user-dg2kg4ht7n 25 күн бұрын
성범죄사건에 미군올려치기하지마라~
@gogozzzz
@gogozzzz 5 ай бұрын
장코로 군을 가장 잘 다룰줄 알던 군대는 역쉬 일본군이었지,,,,이상하게 장코로군대는 쪽군에게는 완전 밥이었지
@cosmicdust22
@cosmicdust22 6 ай бұрын
백선엽은 미국간첩.. 지금도 백선엽후배들이 열심히 활약하고 있다.
@unofa
@unofa 5 ай бұрын
미국간첩이라는 용어가 있네 ㅋㅋㅋㅋㅋ씨벌
@user-cc9jf2xg9h
@user-cc9jf2xg9h 5 ай бұрын
미국 간첩은 뭐하는 애들이냐?
@user-nv4wu7hc3f
@user-nv4wu7hc3f 5 ай бұрын
WTF
@user-yd2gu7gd8z
@user-yd2gu7gd8z 5 ай бұрын
짜장 풀뜯어먹는 소리 하고있네
@hie-eunlee6213
@hie-eunlee6213 5 ай бұрын
근데 영상 제목은 좀 마음에 안든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구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제목이었으나 방금 의견을 반영하여 제목을 바꿨습니다.
@user-jz4ib1ol5z
@user-jz4ib1ol5z 5 ай бұрын
조선족 중국인인데 중국인민지원군은 한국전쟁때 아주 대단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1953년 하계반격작전 제2단계 금성전투서 한국군 만여명 섬멸 ❤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금성전투는 그마나 국군의 전투력이 중공군 개입 초반보다 엄청나게 강력해졌을 때였기 때문에 국군의 반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실한 영토를 모두 회복하진 못했습니다. 금성전투 또한 채널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었습니다. kzbin.info/www/bejne/ani4loqLobGWnrM (국군과 중공군 최후의 결전,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 금성전투)
@LEGEND-ux7hk
@LEGEND-ux7hk 5 ай бұрын
시진핑 엄마 마오쩌둥~
@user-kz1sv1lv8e
@user-kz1sv1lv8e 20 күн бұрын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해줘서 고마워 동무 힘내자고
@user-wj9ln8sp4g
@user-wj9ln8sp4g 2 ай бұрын
아메리카의 자업자득이다. 그러길래 왜 1945년에 한반도를 분단시켰냐? 애초에 1905년 7월에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 ㅡ 당시 대한제국 ㅡ 의 뒤통수를 친 것도 아메리카였지. 그리고 일본이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과 아메리카를 상대로 전쟁을 함에 있어서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던 것도 일본한텐 도움이 컸었지.
@user-tu8jg9dt4h
@user-tu8jg9dt4h 2 ай бұрын
개소리하네 미국이 일본 냅뒀으면 자력으로 광복도 못하던것들이 광복시켜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하고 있네 ㅋㅋㅋㅋㅋㅋㅋ 하긴 그냥 일본 밑에있었으면 일본인으로 살았을텐데 미국은 욕도 안먹고 ㅋㅋ 이런 민족을 해방시켰으니 욕쳐먹지 ㅋㅋㅋㅋㅋ Un들어와서 같이 총선거하자해도 지가 권력잡고 싶어서 안한게 김일성이고 다 중국하고 소련 전쟁 허가받으려고 뛰어다니던 김일성때문에 일어난건데 미국을 왜찾아? 소련을 쳐 욕하든가 일본 밑에있어야하는 인간들을 해방시켜줘 김일성 밑에 있어야 할 인간들을 해방시켜줘 다 해방시켜줬는데 고마운줄모르고 검은머리 짐승이네이거
@taeseongjo4506
@taeseongjo4506 2 ай бұрын
당시 조선은 미국의 관심 밖이었고 도리어 일본이 미국의 친구였어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쭈욱 미국과 일본은 아군이었을걸요. 한반도를 분단한건 미국이 아니라 연합군입니다. 미국은 이미, 2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으로 지친상태라서 소련도 참전을 요청했고 그 일련의 상황으로 남북으로 분단된거죠. 분단된 후 김일성이 다당제를 무력으로 없앤 후 모택동과 스탈린을 꾸준히 설득해서 일어난 전쟁이 6.25입니다.
@velociraptor7871
@velociraptor7871 2 ай бұрын
이런 인간들 의견엔 댓글 다는 거 자체가 낭비다.
@cherryy9361
@cherryy9361 Ай бұрын
38선 그린 새끼들이 나쁜놈임
@vanilla_ice_no1
@vanilla_ice_no1 Ай бұрын
방구석에서 편히 자판 때리고 퍼질러 늦잠잘수있는게 누구덕인거같 은지 오늘 벽보고 깊히 생각해보도록
@koreabye9529
@koreabye9529 5 ай бұрын
조선족은 주한중공군입니다 명심하세요
@user-xd7mo4pe2m
@user-xd7mo4pe2m 4 ай бұрын
ㅎㅎㅎ 이런 한심한 사람같은이라고 허모 탈북자는 주한인민군이고 고려인은 주한쏘련군이가? 말갖지 않는 마녀사냥하덜 말고 잠자코 있으레이.
@user-ex9os6qp8n
@user-ex9os6qp8n 6 ай бұрын
백선협장군님 눈물이 😢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6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를 보시면 아셨겠지만 이 당시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 예하부대였습니다. 국군 1사단은 미 9군단이 국군 2군이 무너진 빈 자리를 메꾸며 시간을 벌어줬기에 후퇴는 성공했지만 중공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미군의 최신형 M46패튼 전차가 싸우지도 못하고 불타는 모습을 봤으니 아쉬움이 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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