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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일뿐
2020년 9월 9일 선재선생님 법문입니다.
1. 主客合一의 지금 여기 이 일뿐 한 물건도 따로 없다.
주객합일은 지금 여기 이 일뿐이다.
그러므로 주객합일의 지금 여기 이 일이 아닌 나누어진 主와 客, 나누어진 萬物은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다.
지금 여기 主客合一의 覺뿐 한 물건도 따로 없다.
지금 여기 視覺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지금 여기 聽覺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지금 여기 嗅覺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지금 여기 味覺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지금 여기 觸覺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지금 여기 생각이 지금 여기 이 일이다.
그 외 한 물건도 따로 없으니, 모두 이름일 뿐이요 이미지일 뿐이다.
그래서 석가는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한 것이다.
즉 主客合一의 지금 여기 이 일뿐 한 물건도 따로 없다는 가르침이다.
2. 世上을 두고 無常하다고 말한다.
마음만이 무상한 것이 아니다.
무상하여 어제의 몸도 잡을 수 없고, 오늘의 몸도 잡을 수 없고, 내일의 몸도 잡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 만물도 어제의 것을 잡을 수 없고, 내일의 것을 잡을 수 없고, 오늘의 것을 잡을 수 없다.
이는 지금 여기 主客合一의 覺만이 실재한다는 뜻이다.
現存一念 現存一覺의 覺뿐이다.
3. 어떤 時間帶의 일을 말해도 그것은 지금 여기 이 일일 뿐이다.
어떤 空間帶의 일을 말해도 그것은 지금 여기 이 일일 뿐이다.
지금 여기 이 일을 떠난 그 시간대, 그 공간 대는 이미지요 이름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일 現存一念이요, 現存一覺의 覺만이 實在다.
4. 지금 여기 이 일을 떠나 한 물건도 따로 없어,
어제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이, 현실 역시 어제로 돌아갈 수 없으며, 오늘을 잡을 수 없고 미래로 미리 갈 수가 없다.
그것은 主客合一의 지금 여기 이 일만이 實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제의 시공간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내일의 시공간이 지금 여기 이 일이요, 오늘의 시공간이 지금 여기 이 일이다.
千年前 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요, 천년 후 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요, 오늘 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다.
동쪽 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요, 서쪽 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요, 미국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요, 서울 일을 말해도 지금 여기 이 일뿐이다.
지금 여기 이 일이 아닌 말을 따라가고 모양을 따라간 천 년 전 일 천 년 후 일 오늘 일 동쪽 일 서쪽 일 미국 일 서울 일은 모두 이름일 뿐이요 개념일 뿐이다.
5. 지금 여기 主客合一의 지금 여기 이 일뿐이니.
지금 여기 걸어오면서 보았던 세상도 이미 실재하지 않는 이름일 뿐이요,
꿈에서 보았던 세상도 이미 실재하지 않는 이름일 뿐이요,
낮에 본 세상도 잠들면 이미 실재하지 않는 이름일 뿐이다.
오직 오롯이 지금 여기 깨어있는 지금 여기 이 일 뿐이다.
6.지금 여기 이 일은 이름일 뿐인 과거 현재 미래 시간으로부터, 이름일 뿐인 동서남북 상하좌우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아는 것으로부터 놓여난 해탈의 자리다.
이름 지을 수 없어 알 수가 없는 자리다.
그래서 언제나 새롭다.
日日新 又日新이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나날이 새롭다.
그것은 이름이 우리 日常을 헌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름이 同一性을 부여하여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요, 미래의 나로 만든다.
그러므로 이름으로 파악되는 이 시공간의 세상은 늘 헌 것일 수밖에 없다.
이름으로 파악되는 아내는 어제의 그녀고, 오늘의 그녀이며, 내일의 그녀이다.
이름으로 파악되는 남편은 어제의 그 남자이고, 오늘의 그 남자이며, 내일의 그 남자이다.
이 부부는 늘 헌 것으로 만나고 헌 것으로 헤어진다.
7. 늘 새롭다면 언제나 단 한 번의 만남뿐이다.
영겁을 두고 언제나 단 한 번의 만남뿐이다.
一期一會다.
그러므로 늘 새롭다.
8. 禪家에서는 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묻는다.
즉 결국 실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다.
지금 여기 現存一念이요 現存一覺인 覺뿐이다.
그래서 이를 묻는 제자에게,
덕산은 고함으로,
임제는 몽둥이 맛으로,
조주는 뜰..앞..의.. 잣..나..무..다
운문은 똥..을.. 닦..는.. 막..대..기..다
하여 그 現存一覺을, 그 現存一念의 覺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