Рет қаралды 166,632
싯다르타는 단번에 실존實存을 떠올렸습니다.
「삼라만상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내자마자 제1원인이 돼 버렸습니다.
‘내가 곧 만물의 제1원인, 實存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싯다르타는 의심을 일으키는 동시에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당연하여 어떤 이유나 근거, 논리의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싯타르타는 「나는 누구인가?」의 근본적 물음을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밖의 세계를 떠올렸습니다.
「존재는 무엇인가?」의 화두를 떠올리자마자 역시 그냥 풀어졌습니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나’와 ‘존재’의 실상實相을 훤히 깨우쳤습니다.
기이하게도 [불경] 어디에도 싯다르타의 성불 과정에 대한 올바른 얘기가 없습니다. 싯다르타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지 알 수 없기에 왜곡된 얘기만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왜곡은 금강발원(金剛發願)입니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보면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으면서, 「내가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질지언정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라고 굳게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금강발원은 싯다르타가 출가한 이후 빠트리지 않고 해왔기에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고, 또한 이런 작심발원은 오히려 아상(我相)을 자극해 수행에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두 번째 왜곡은 中道입니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보면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팔정도(八正道)라는 중도中道의 이치를 터득했고, 이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팔정도가 中道라면 불교의 철학과 수행은 범속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훗날 연기법(緣起法)이나 쌍차쌍조(雙遮雙照)를 中道의 소재로 삼게 되는데, 이 역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싯다르타는 어떤 법法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일까요?
싯다르타가 기존 힌두교의 수행법을 버린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의 어떤 새로운 법을 터득한 것도 아닙니다. 당시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취한 수행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 없는 것에 경천동지할 비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당시 현장으로 몰입해 싯다르타의 수행을 지켜봅시다. 그는 과연 어떻게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