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7~20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왕누니-s6b26 күн бұрын
자유주의 인본주의 적 의견이시네요.
@순전-k6i6 ай бұрын
율법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방향이 바로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하진-k2w9 ай бұрын
맞습니다 율법적 생활준수가 믿음의 지표가 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믿음의 타협의 생활을 마련해 주십니다. 율법이 없어졌다 한들 우리가 타협해야 할 자리는 죽을 때까지 따라올 것입니다. 율법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또다른 율법적 고민이 우리에게 따라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협하느냐 마느냐는 우리 삶을 내내 괴롭힐 것입니다
@왕누니-s6b2 жыл бұрын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은 구분해야 하겠죠.
@명탐정꿍꿍이3 жыл бұрын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문안인사 드리러 왔어요.
@pl96575 ай бұрын
거기서 제사가 가능하다고가 왜나오는지 하여튼 들을때마다 이성해
@순전-k6i6 ай бұрын
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다? 이 무슨 궤변?
@jihyeyu30363 жыл бұрын
1만명 구독자 축하드려요
@danielkim30432 ай бұрын
이교의 가르침이나 문화와 풍속과 섞이는 혼합주의 신앙, 타협주의 신앙을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고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웃 사랑과 용서, 선행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계명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웃 사랑과 용서와 선행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의롭다고 하십니다.
@jamikim2662 жыл бұрын
맞습니다
@매혹의중저음2 жыл бұрын
1. 예수님이 신약성경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들었는데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신 부분이 있는데 그것 자체가 예수님이 구약을 구약의 관점으로 보시지 않고 새롭게 해석하신 게 아닌가요? 2.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지금의 우리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구약(율법과 예언서)을 잘 아는 율법학자들,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그렇게도 싫어하고 잡아 죽이기로 모의까지 하고 또 그것을 실행에 옮겼나요? 3. 지금도 유대인들은 우리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구약을 잘 아는데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도 않고 신약성경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서 인정하지 않나요? 4.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구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복음전도자가 되어선 그 생각이 바뀐 게 아닌가요? 5. 예수님이 구약을 잘 아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라고 질문하셨는데 그것 자체가 그들이 구약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약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증거 아닌가요? 또 예수님은 “너희가 (구약)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나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로 구약을 읽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요?
@명탐정꿍꿍이3 жыл бұрын
기독교신앙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는 주장에 일부 동의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제사는 후손들이 돌아가신 부모형제를 추모하며 갖는 형식적인 애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예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성령을 통해 임재하시고 우리 예배를 받으시죠. 그렇다면 반대로 그 예배자가 전통제사의 형식적인 동기에 대한 동의로서 제사에 동참하는 것은 역시 지나칠 수 없는 문제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제사상에 절을 올릴 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분들이 여기 못오셨을텐데.. 내가 드리는 애도의 절은 누가 받을까나..' 하는 합리적 자문이 들지 않을까요? 물론 교회 예배에서 돌아기신 주님을 향한 교우들의 태도에 어울리기 위하여 예를 갖추는 정도로 예배하는 예배자에게는 별 자문이 없겠지만 말이죠.
@가늘한국화3 жыл бұрын
예배라는 말은 누가 썼는지 궁금하군요. 교수님은 일언 언급을 안하신 거 같은데ㅋ;;
@우주고양이-c7h Жыл бұрын
윫법은 두가지 관점에서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초등교사로서 예수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으로서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이미 빛이신 예수님이 오셧기에 그림자는 자연스레 자기역할을 다하고 사라져버리는겁니다. 이미 오신 예수님을 놔두고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 율법을 붙잡는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을 헛되게 하는것입니다. 둘은 율법에 대해 오해 하고 지켜오던 것에서 부터의 돌이킴입니다. 바리새인들부터 지금의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노력은 그 모양은 조금 바뀌었지만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직성경 오직예수 오직믿음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교회에는 자기가 무언가를 지키고 노력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가까이 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또 열심을 냅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 개인으로서는 예수님을 정말 진심으로 믿음이후에 폐지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붙잡고 살아갈것은 율법이 아닌 성령님이고 십자가 입니다. 성령님이 어디로 이끄실지에 대한 설명이 말씀에 기록되어있고 그 말씀과 성령님이 이끌어가는 현실을 비교해보며 성령님이 신실하게 일하고 계심을 봐라보고 기뻐할수있습니다.
@명탐정꿍꿍이3 жыл бұрын
요약: 제사가 남은 후손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함께 하기 위한 예를 갖추는 형식일 뿐이라면, 예배도 교회공동체 일원에 속하기 위한 예를 갖추는 것일 뿐일까요? 저는 이제는 목사님 친척이 그렇듯이 기독교인에게는 더이상 제사를 강제하지 않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문자적으로 제사를 거부하며 핍박받던 우리 문자적인 선배기독교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야동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 후배기독교인들이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에 대하여 싸울 수 있겠죠. 저도 말인지 막걸린지 잘 모르겠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