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포랑 총을 비교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좀 망했다는걸 의미하긴 함 포는 보급필요량이 총이랑은 달라서...보병노리는 용으론 크게 좋은편은 아님 승자총통류가 좀 도움되는 무기였지 대형화포가 크기가 크고 화려해서 인기는 좋은데 보병전에서 크게 도움되는건 아니었음 포탄한방 쏘면 포 수리비랑 포탄값 이런게 얼마나 드는데...한명한테 쏠 가격이 아니다 구조물파괴용이지 이건...대포있으면 성문부수는거 충차 안쓰고 원거리에서 포탄 쏴서 문이나 벽하나 무너뜨린다음 보병욱여넣으면 되니까
@최병택-k9i Жыл бұрын
고니시가 패퇴하는걸 놓아준 이일의 조선 군대는 참으로 오합지졸 같은짓을 했네요.
@조동규-x7h Жыл бұрын
이 컨텐츠를 기다렸어
@페페-w8z3 ай бұрын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50m입니다. 50m 넘으면 살상력이 급감한다고 다큐에서 그랬네요
@강태윤-j4u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공 전체 일본군 선봉대 역할을 했던 고니시의 1번대는 부산성, 동래성, 상주, 충주 등의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한양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병력 손실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명나라군이 참전한 평양성 전투는 고니시군에게 결정적으로 엄청난 병력 손실을 안겨 줍니다. 평양성에는 고니시의 1번대 외에 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던데 정확한 것인지는 잘모르겠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 전투와 나중에 벌어질 행주산성 전투 이 후 강화 협상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징비록에 저술해 놓은 류성룡의 기록처럼 평양성을 빠져나오는 고니시군을 조선군이 요격하여 전멸시켰다면 한양 및 함경도 일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평양성 전투 이후 벌어진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역습을 받고 패배한 명군 제독 이여송은 충격이 컸던 탓인지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철수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 당연히 조선군 장수들이 그를 말렸고 이와중에 명나라 부총병 장세작은 조선군 순변사 이빈을 발로 걷어찼다고 합니다. 아무리 명나라가 상국이라고는 하지만 중하급 지휘관에 불과한 부총병이 사령관급의 연합군 장수에게 이리 모욕을 주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기도 합니다. 이번 영상도 잘봤습니다.
@dream-rp1opАй бұрын
사실대로 잘 아시네요
@dbrhdwk12-zo7sw2 ай бұрын
너무 재밌습니다
@de3731 Жыл бұрын
이런 애니메이션은 어떤 소프트웨어로 제작한것인가
@한국-o8s Жыл бұрын
손그림 ㅎ
@조영민-t4y Жыл бұрын
이여송에 할아버지는 조선사람으로 죄를짓고명나라로 도망갔던 사람이죠.
@강병록-s2c Жыл бұрын
1593년 3월에 병력을점검했을때에 고니시군은 66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니시군은 행주 산성 싸움(2.12일)에 투입되어서 싸웠기 때문에 평양성에서 탈출했을때의 병력은 6600명 그 이상이 넘었죠. 고니시군이 행주성 싸움에 첫번째 투입되었다가 조선군의 화력으로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 햇기 때문에 행주성 전투 당시에 당연히 병력 손실은 있습니다. 행주성 전투 이후 한달이 지난 후에 서울에 있던 일본군들이 병력 점검했을때에 고니시군은 6600명이 남았죠. 그럼 당연히 평양성 전투 이후 철수할 당시의 병력은 6600명(3월 점검 병력) + 행주성 싸움에서 손실한 고니시 병력 되어야 하죠.
@user-pf5ek9pf7f Жыл бұрын
그리고 평양성전투만이 아니라 고니시군은 그 이전에도 상당히 많은 전투를 치렀었죠
@확찐자 Жыл бұрын
헷갈릴수도 있는거죠 그냥 조선왕조실록님 여기 부분 고치셔야 되요!하고 넘어가면 되지 굳이 이렇게 적어야함?
@Joseon-Dynasty Жыл бұрын
혹시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EVERGREEN_LAND Жыл бұрын
@@Joseon-Dynasty 영상 제목이요~
@Joseon-Dynasty Жыл бұрын
@@EVERGREEN_LAND 아.. 다행이네요 금방 수정할 수 있어서 ㅎㅎ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병록-s2c Жыл бұрын
평양성을 지키는 일본군에는 고니시 군 외에도 또 있습니다. 1592년 가을 정도쯤에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서 경상도를 담당했떤 모리군 3만명중 일부가 평양성으로갔습니다. 그래서 명군의 평양성 공격 당시에 고니시군 외에도 모리군 일부가 평양성에 주둔했습니다. 모리 데루모토 휘하의 부장인 모리 모토야스와 요시미 모토요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양성 수비를 철저히 하라’는 명령에 따라 북상하고 한 것죠. 고니시군과 모리군 일부가 평양성을 수비하다가 조명연합군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user-pf5ek9pf7f Жыл бұрын
패배했다기엔 애매한게 고니시군 3배 많은 병력으로 포위하고도 자력으로 평양성 못 먹어서 결국 고니시 살려서 보내줬죠
@dream-rp1opАй бұрын
뭔 일본군이 패배를 해.?
@RoyHalladayy Жыл бұрын
벽제요~~
@muchsoso8468 Жыл бұрын
삼국지의 백제와 헷갈리셨나?
@라그나로크-y7n2 ай бұрын
조선이든 명나라든 답답하네. 명군은 남의나라이니 대충싸운다 쳐도 조선은.. 에휴
@zse2602 ай бұрын
그나마 당시 조선측과 소통이 되던 고니시는 철저하게 망하고 가토는 편하게 죽은걸 보면 아이러니 ㅋㅋㅋㅋ
@user-pf5ek9pf7f Жыл бұрын
고니시군이 조선에 상륙할 당시 18700명이었는데 그 이후 10차례 가까이 전투를 치르고 나서 점검한게 6600명입니다. 평양성 전투 이후에도 비전투 손실, 행주산성에서 잃은 병력도 상당함. 4차 평양성 전투 이전에도 전투 엄청 치뤘죠
@nicasionohart3 ай бұрын
조선에는 참수당했어야 할 장수들이 참 많았구나 ..
@dream-rp1opАй бұрын
오합지졸 조선군이 뭔 반격. 삼십육계 줄 행랑.
@오나의여신님 Жыл бұрын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진왜란을 막는데 가장 큰 공이 있는사람이 석성이고 이순신은 그 다음이라고 할정도로 석성을 높이 평가했죠
@nickke1745 Жыл бұрын
벽제관 ?
@cijjeehh2302 Жыл бұрын
벽제관일텐데요
@전민식-x7f Жыл бұрын
벽제관 이요
@오르니-u6e Жыл бұрын
독일나오다가 갑자기 왜 조선 ㅠ
@daebak111 ай бұрын
중국사람들 허풍은 쎄네😂 그 허풍으로 장사도 잘하고 협상도 잘해서 일본이 평양성에 오래 머물러있었네요😂
@별2별13 ай бұрын
딱 개판.. 1여덜
@장표홍-h8v Жыл бұрын
.aia생명보험은 절대들지마세요 보험료만챙겨먹고보험금지급은일절안하는사기보험입니다.
@얼씨구지화자좋네 Жыл бұрын
갑자기요?
@conut933 Жыл бұрын
(존잼)
@금강산-r5w Жыл бұрын
섬나라근성 자업자득 입니다
@dream-rp1opАй бұрын
일본 근성만 닮아! 원자탄 투하에 항복외에는 역사에 외세에 침략이 없었다.임진왜란 전에 서방과 국가외교 유학생 보냄
@dream-rp1opАй бұрын
뭔 도망을쳐 ,? 개소리 작작 일본내 내전 심화 기미로 자진 퇴각했는데 !
@광화문-n9p Жыл бұрын
아니 그냥 여기 부분 수정해야 됩니다 라고 부탁을하지 구지 구태여 그렇게 써야 하시나ㅋㅋ
@Joseon-Dynasty Жыл бұрын
혹시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zichikichi Жыл бұрын
@@Joseon-Dynasty 백-> 벽제관 말하는거 같아요
@광화문-n9p Жыл бұрын
@@Joseon-Dynasty영상 열심히 만들고 계신데 이런 경미한 실수 할실수도 있죠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칼라브리아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에선 명군의 역할이 축소된 경향이 있는데 명군 참전 이후로 조선 육군은 거의 해산하고 육지는 거의 명군에게 맡겨버립니다. 임진년엔 조선군 17만 명군5만이던 조명연합군이 정유년엔 조선군3만 명군10만으로 바뀝니다. 각 나라의 국뽕을 위해 세 나라에서 생각하는 큰 전투들도 다들 다르다고 하네요.
@kjihun1310 ай бұрын
3만은 진짜.... 명나라가 심하게 내정간섭 하거나 반대쪽에 문제 발생해서 발 빼면 어떡할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네
@부산행-w2k3 ай бұрын
군대로 많은 사람을 운용하면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해져서 생산량이 급감하니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고 농사에 전념하게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