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에서 루터식 이신칭의가 잘 나가는 것이나 한국불교에서 견성성불의 돈오를 추구하는 선종이 잘 나가는 것이나 한반도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작용하고 있는 거 같아 재미있습니다. 단박에 깨치면 더 닦을게 없다는 거나 한번 천국행 티켓을 끊으면 되물릴 수 없다는 거나 똑같은 한탕주의 발상입니다. 현재로는 조계종 종조가 돈오점수를 주창한 보조 지눌로 되어 있지만 한국 불교계의 루터라 할 성철이 지눌을 치고 돈오돈수를 주창한 것은 부단한 수행에도 게으르고 또 함부로 깨달음을 성취했다 하는 승려들의 나태와 타락을 채찍질 하기 위함이었고, 루터가 칭의를 강조한 건 신도들의 죄의식을 갉아먹으며 기생하는 당대 교계를 혁파하기 위함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의 소산이었지만, 현재는 그러한 사상적 개혁의 본의는 변질되어 인민들의 생활방식과 유리된 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타락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칭의 이후 성화의 중요성을 놓치고 주둥이 터는 것만으로 천국행 티켓이 보장된다는 발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카톨릭 수도사식으로 몸으로 거듭남의 훈련을 해온 종교적 전통을 경시하고 변덕스러운 이성의 말장난으로 생활방식을 짜온 심각한 불행의 결과입니다. 기도조차도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일치보다 달짝지근한 혓바닥을 처놀리는 목사와 광견병을 연상시키는 수다스러운 혓바닥 기도가 의례의 주종이 되고 있습니다. 퇴옹 성철은 돈오돈수로 소박한 승려적 삶의 철저성을 과시했지만 몽중일여나 오매일여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견성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승려들이 신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분명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탕주의 구원에 환장한 학자나 목회자는 자기들 입맛대로 이 말씀을 억지스럽게 윤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재물을 숭배하는 사이비들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선호하는 것과도 마찬가지 입니다. 에고(ego)는 언제나 교묘한 해석으로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은 주여 주여하고 뇌까리는 입에 발린 믿음은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오직 행함이 구원의 기준임을 예수 본인으로 말씀으로 분명히 하는 구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구원은 불가하다는 천명 입니다. 사랑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 입니다. 칭의의 증거가 행함에서만 발견된다는 선포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사는 증거가 행함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겠다는 부자 청년 보고 니 재산 다 버리고 오라고 하는 얄짤 없는 예수가 그들은 두려운 겁니다. 청년의 믿음은 행할 수 있음으로만 증거됩니다. 한번의 칭의로 되물릴 수 없는 구원을 얻었다는 욕심은 자기가 하나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종이라는 교만이 가면을 쓰고 있는 값싼 은혜일 뿐입니다. 여기서는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입니다. 내가 너한테 투항했으니 내가 천국 가는 것을 너는 못돌린다는 건방진 역진방지 독소조항을 누구 멋대로 집어넣는 것일까요? 뿌린대로 거둘 뿐입니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에게조차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따를 때는 사탄을 들먹이며 가혹하게 꾸짖습니다. 칭의 한탕주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에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천국 가겠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영원히 살겠다는 것이요, 그것은 곧 무의식적으로, 죽기 싫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입니다. 죽음이 나와 무관한 비본래적인 삶은 깊이를 상실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 사랑 보다 이웃 사랑이 더 귀중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종교적 마음이 언어의 굴레에 갖히지 않을 때만 나타날 수 있는 보살정신 입니다. 바울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 사랑이 증명됨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천박합니다. 이런 천박한 믿음으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구원 받아야할 나라는 주체가 사라질 때에만 구원의 길은 열릴 거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칼 융은 모두를 위해 매일 태양이 떠오르도록 기도하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종교생활에 감복하였습니다. 이기적인 구원이 목표인 종교의 저등성은 다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bhlee42652 жыл бұрын
엄청난 힘으로 쏟아낸 글 잘 읽었습니다. 루터처럼 작금의 한국 기독교에 만연한 물질주의 천국행을 돈으로 거래하는 위선을 개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철학을 한다는것은 지知에 대한 사랑이고, 새로운 지知를 접할 때마다 사랑을 하게 되며, 그 자체가 즐거운 같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하는것이 구원과 연결되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과연 천국이란것이 있는지 조차 알수 없지만, 철학을 하면 많은것을 볼 수 있고, 인간들이 말하는 그 구원이란것도 더 많은 지를 게속 쌇아가다보면 더 잘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의 생각은, 그냥 철학 ' 지에 대한 사랑' 을 그냥 하다 보면 좀더 먼가가 더 보일지도 모른다. 안보여도 어쩔 수 없고, 보이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네요. 성철의 깊이가 진정 어느정도 일지 감히 알지 못하지만, 성철은 우리 시대에 하나의 지적 존재로 있다 가셨고, 그분의 강의와 말씀을 통해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귀감 example 로써 , 그분의 실존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극이 되어주신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분의 오도송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그 진짜 의미를 알정도의 도량의 사람이 되어 보고 싶네요. 성철 스님 아래에서 공부하셨던 분들이, 살아생전에 성철 스님이 강의하셨던 내용을 녹음한것을 귀가 망가질 정도로 반복해서 이어폰 꼽고 듣는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성철스님이 부처님의 말씀을 강의할때 그 말의 올바름을 보임에 있어 양자역학과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끌어다가 하시는것에 성철스님의 대단한 지식에 감복하는것도 보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감복하고, 아는 사람에겐 평범하게 듣릴 테죠. 구원이란것도, 철학을 하는 '이 세상의 지를 다량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는것과, 주어진 일상을 그냥 살고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것은 또 다르게 보일 테죠. 그래서, 철학을 하는 사람은 그냥 지금 내앞의 '지知' 를 즐기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jshman Жыл бұрын
와.. 예도 선생님 말씀 우연히 듣고 감명 받아서 구독을 했는데, 이 분 댓글도 엄청나시네요.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junjun94712 жыл бұрын
내 머릿 속에서 정리가 안된 물건들을 정리해주신거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나를 믿지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나를 너희들을 사랑한다. 이런 속 좁은 신을 제가 먼저 손절쳤습니다.
@tomjonestevie2 жыл бұрын
이 강의야말로 속이 뻥뚤리네요 그동안에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에요
@김영호-u1h5c10 ай бұрын
공감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저 또한 약자들과 함께하고 불의에 맞서 싸운 인간 예수를 존경할 뿐입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삶이 아닌가 합니다. 위대한인간 예수를 신으로 만든 순간 예수는 죽었다고 봅니다
@마음도둑놈2 жыл бұрын
이 강의를 보고 교회에선 입으로 믿는다 씨부리고, 자본주의의 현혹 속에 욕망대로 살며 이성이 있기에 당연히 스물 스물 밀려오는 신앙 적 모순을 애써 부정하고 값 싸게 규격 화 되어 제공하는 이데올로기 적 기독교를 맹신하며 살았었던 기억들이 떠 오릅니다. 한 편 '맘 편한 믿음' 이 주던 그 때가 그립다는 신앙고백? 도 함께 해봅니다. 니체 적 용기를 갖고 위버멘시를 이루어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려 철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전 우주 적으로 저를 압박하는 자본주의의 '합리? (타협?) 라는 맘 편한 만능 키를 주머니에서 여전히 버리 질 못합니다. 끌끌끌..
@passoverstory2 жыл бұрын
박교수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dara_bang2 жыл бұрын
저녁 먹으면서 듣습니다.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디지고 나서도.." 😂😂😂
@minsubkim64802 жыл бұрын
격하게 공감합니다^^
@TheSeokmin2 жыл бұрын
종교..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이 동요해야 믿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의 강의는 늘 제게 큰 공감과 통찰, 가르침을 주시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깊이 와 닿습니다. 아마도 사는 곳이 북미라서인지 제 주변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 분들 중에선 저의 무신론적인 자세를 아셔서 전도를 망설이시지만 가끔 졸졸 따라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분들이 계셔요. 하지만 선생님 언급하신 것처럼 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그런 구원.. 저는 전혀 받기 싫습니다" 라는 생각만 맴돌더라고요.. 차마 말로는 못하고 그저 웃음으로만 일관하다 다음 기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교회를 안나가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사는 자가 구원을 받을거라는 믿음이 있어 오늘 선생님의 강의가 더 반갑습니다. (바이블은 불경처럼 좋은 경전이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뒤에서는 돈만 밝히는 성직자들/교회 관계자들의 입(말)로만 하는 종교 활동, 교인들만이 구원받는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해 염증을 느껴왔던터라 이 강의가 빛과 소금처럼 느껴지고요..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박윤희-d4x9 ай бұрын
예수을 믿는다는 것? 새로운 철학적 해석 감사드립니다. ****계속 교회에서 고통은 자기비판 맞습니다.
@ykaproject2526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
@Artistjangbae2 жыл бұрын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를 실천하는 것을 면제하는 것… 큰 통찰을 주시네요..
@박영훈-t2mАй бұрын
잘 들었습니다 사실은 너무나 방대한 내용입니다 宗敎는 형 이상학적인 가르침 이며 단어가 가진 원 뜻 입니다 거두절미 하고 宗敎 가 그동안 인류에게 있었는가?즉 창조주와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에 말 (언) 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종교는 없었습니다 그동안 수천년동안 있었던 종교는 단어 로만 존재 한것입니다 하여 종교인들(지구촌의 모든 종교)이 단어아래 에서 종 노릇을 한것입니다 가르치는자도 배우는자도 어느 종교 어떤 교사들도 다 종교의 단어아래 갖힌것입니다 이 사실은 죽어도 모른다는것 처럼 모르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형은 무지의 지 를 알았지만) 그럼 종교 으뜸되는 가르침은 언제? 할것인가? 성경의 주인인 창조주와 예수님은 처음부터 (창세기) 종말 즉 종교의 종말을 告한것입니다 하여 종교 즉 종교의 주인을 알게 하는 가르침은 말세때에 있어지는 것입니다 말세는 지구촌의 말세가 아닌 종교 세계의 말세 입니다 창세기 1장은 지구촌 창조가 아니며 말세 또한 지구촌의 말세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결론은 종교 곧 종교의 주인을 밝히 알게 하는 시기가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하나님 곧 창조주는 말씀 (言)이며 예수도 말씀(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안다라는것은 그의 말씀을 밝히 아는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를 대단히? 오해를 하셨습니다 바울이 말한것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핵심은 예수님 다시 오실때에 자기가 말한 부분이 도의 초보 라고 한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100 이라면 롬마서는 10밖에 안되는 내용 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기독교 (개신교)가 바울을 오해를 했는가? 단어 아래 종노릇을 해왔기에 종 노릇을 하고 있는자들이 서로 종이 아니라고 자기들의 주석을 쏟아 낸것 입니다 (홍수물입니다 하여 노아때와 같음)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것은 단순하게 예수를 믿는다는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을 말했는가? 예수는 말씀 입니다 하여 예수님의 말씀(言)을 알고 믿는것이 예수를 믿는것입니다 이에대해 모세도 구약의 선자자들도 제자들도 바울도 똑같은 말을 한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자기 말이 아니며 예수님의 계시를 말한다고 했고 자기가 말한것은 부분적인 것이라했고 온전한것이 올때(時)를 말한것이 핵심 입니다 결론은 마지막 때 말세때 곧 예수님 다시 오실때에 예수와 하나님 에 대해 밝히 아는 때(時) 실체들을 가르치는 드디어 종교가 시작이 됩니다 교회도 (敎會) 그리스도의 말씀 을 가르치는 회중 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교회 즉 그리스도를 가르친 교회 곧 교육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수천년동안 단어 아래 다 소경이 었으나 말일에 교육이 시작이 됩니다 그때에 창조주가 누군지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인지 천국은 죽어서 기는지 이땅에 다시 오시는지 밝히 알린다고 예수님도 선지자들도 바울도 증거를 한것입니다 수많은 참고 구절이 있지만 대표적인 구절 올립니다 사46:10~11 창3;22~24 신29:2~4 겔20:49 사29:9~13 사2:1~4 단12:4/9 마13:34~350 막4:10~ 막7:6~ 요14:29 요14:26 요16:13/25 갈3:9~~ 고전 13:8~ 히5:12~ 고전15:51~57 히11:1~ 계1:1 감사합니다
@jshim99932 жыл бұрын
정통교인으로서 루터가 한쪽만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예도tv님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지만 실로 제자도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하시네요. 저는 바울의 이신칭의는 철저히 행동으로 흘러나온다고 생각합니다ㅎㅎ 제 인생의 중심을 성령 하나님에 맡겨 사는 것이 제자로서 사는 것이죵
@energygreen3769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cooljeansguy Жыл бұрын
I thought Mr. Park is Christian. I am confused. Is he still christian?
@권자유인2 жыл бұрын
평소에 가진 생각이었지만 한 때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분이 이런 생각을 이야기 하니 듣는 제가 속이 시원하면서 반가웠습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
@user-vl1wu6go1t2 жыл бұрын
자연과학 세계관이 뿌리내린 지금 마음 깊숙히 신앙을 가지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럽다고 느끼곤 했는데, 결국 신앙 공동체도 사람 사는 곳이고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날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의 안식처란 과연 있을까 새기게 합니다
@jjl45832 жыл бұрын
저도 기독교를 쓰레기통에 버린지 오래됐군요.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으로 귀의했습니다. ㅎㅎ 사성제와 연기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탐진치를 버리는 마음수행을 배워가고 있는데요.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악취가 진동한다는 기독교임에 동의하지만, 그런 악취나는 쓰레기통을 붙들고라도 삶을 이어나야만 하는 그분들의 삶이 안쓰럽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말하신대로 자본주의 욕망에 찌들고 본래 예수의 가르침은 사라져서 통속화된지 오래지만, 또 그 안에서 나름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순기능도 하고 있지 않나 생각도 드네요. 누군가는 이런면이 아편같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모두가 성자의 삶을 살거나 혹은 위대한 가르침을 깨우쳐 사는건 아니니까요...
@오디세우스-c4n Жыл бұрын
본회퍼목사님의값산은혜를 쫒지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과 비슷한 맥락이네요
@양제상2 жыл бұрын
예민한 주제인데요 용기 있는 강의 고맙습니다 제 개인적 경험으로(직업상 지방을 많이 가는데요) 서울역 대전역에서 예전에 스피커로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지요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일 뿐입니다 비록 저의 짧은 생각이지만 예도님의 강의가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자도 강을 건넜으면 땟목을 버리라 했고 부처도 깨달았으면 부처를 버리라 했고 니체도 각성했으면 차라투스트라를 버리라 했던 거 같습니다 모든 걸 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좋은 강의 고맙습니다
@조정인-k8j2 жыл бұрын
철학자로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죽음과 그 너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bhlee42652 жыл бұрын
멋있어요. '그렇게 가는 천당, 이 예도는 바로 쓰레기통에 쳐 박습니다. 예도는 그렇게 가는 천당이라면, 바라지 않습니다. " 이것은 인간 이성의 힘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이정도로 저의 이성을 키워보고 싶습니다. 으악, 그렇게 가는 천당, 이 예도는 바라지 않습니다. 이말 할때, 바로 탄성 나오네요. 개인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추천했던 톨스토이의 요한복음서 서문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생각에 존경을 가지기도 했죠. 내앞에 있는 자연을 앞에 두고, 이성적으로 신을 경험 하기도 합니다. 신의 천당이란? 내가 여기 존재하고 생각하고 이 강의를 듣고 있는 내가 있다는것 자체부터, 도대체 이게 설명되지 못하는데요. 여기 있으니, 그냥 열심히 강의를 듣고 좋아할 뿐입니다.
@김진묵-i6f2 ай бұрын
신앙이 성장하면 예수를 떠나게 돠지 않을까요
@decider12 жыл бұрын
베란다 문을 열어놓으니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 이 와중에 예도님 영상을 보고 있으니 저도 존재의 숲에 있는 기분입니다.😂 잘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댓글 달아보겠습니다. 신,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또한 투사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도님이 예수는 인간의 표본이 되는, 삶의 지표 혹은 목표가 될 수 있는자 라고 하셨듯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런 모습들을 부러워한다 거나, 자신도 예수와 같은 삶을 살고싶다 거나, 예수처럼 되고 싶다는 투사가 아닐까 합니다.ㅎㅎ 거기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중에 한 가지가 영생이 있기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기대 심리도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종교집단이 매우 약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인 영생을 가지고 휘두르는 것이다 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 천국에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니까요. 긍정적으로 본다면 예수를 믿음으로서 예수처럼 행동하고 삶을 살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 본인은 분명 행복하겠지요. 반대로 부정적으로 본다면 예수가 진리인 것처럼 모든 행위의 주체를 예수로 돌린다는 짓은......음.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저도 무신론자 입니다.ㅎㅎ🙈🙈
@hinova772 жыл бұрын
예수의 실천 하는것과 예수를 믿는건 다르지요. 믿고 구원받고 천당간다 라는 이분법적이고 무책임한 교리는 믿지 않습니다. 오역 몰이해의 원인이되는 인간들이 쓴 성경보다 예수어록 114개를 이해해고 현대의 관점에서 실천한다면 그것이 복음이고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랑시에르2 жыл бұрын
공감합니다.
@gadasd1342 Жыл бұрын
교회 대다수의 기도내용을 살펴봐도 이웃,타인 가족에대한 사랑보다 자기자신의 보신과 안녕에 더매달리죠 이게작금 교회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저또한 배우고나니 그런믿음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종종 헤이해질때 이강의를 돌려봅니다
[마태복음 22:29-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는데 율법에 처찌들어 증오와 혐오에 영혼을 파는구나.니들은 예수와 바울의 이 두마디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김용식-y3e2 жыл бұрын
예수가 절대가치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예수는 위대합니다. 예수님은 2022년과 상관있지요 bc와 ac. 예수님이 한 말인가요? 헛되고 헛되다.예수님이 찾은 참의 것? 사랑과 이웃사랑 이건 헛되지 않겠죠
@hbm70422 жыл бұрын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행위가 아니라요.행위로 구원 받으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 형벌 당했겠습니까.모든 죄를 대속 하셨고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 하는 겁니다.행위 구원은 불교에도 있고 타종교에도 있는 겁니다.그러면 믿음만 있고 행위는 없어도 되냐 이게 논점인거 같은데,믿음이 있으면 행위는 필연적입니다.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행위로 발전 합니다.야고보서에서 너희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왜 행위가 없냐고 반문합니다.그건 행위를 강조하는게 아니라 믿음없음을 지적 하는 겁니다.믿음 안에는 죄의 고백과 용서구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용서받은자는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그 믿음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장성한 자의 믿음이 있습니다.행위구원을 빠지면 율법주의가 됩니다.자기 행위를 자랑하게 되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루터가 구원은 믿음이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단지 기성교회처럼 믿음의 프로세서를 다루지 않고 막연한 믿음으로 구원을 설명한다면 그건 잘못입니다.핵심은 진짜 믿음은 행위가 따라옵니다.예수님을 믿는다는것은 다시 한번 강조 드리지만 나의 죄를 용서 받는 겁니다.근데 내가 용서 받을 죄를 인식하지 못하면 믿음에 대해서 막연할수 밖에 없습니다
@_blue49422 жыл бұрын
하나님은 완전하게 거룩하신 분이기에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와 의로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의로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로움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아담안에서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로움을 우리 스스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즉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것이죠. 행함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것과 믿는자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복종하며 따르는 삶을 사는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조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논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지 절대적인 보편적 원리가 아닙니다. 믿음과 순종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죄와 악과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구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이리 크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과 슬픔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끝으로 역사성이 배제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키에르 케고르의 도약이 아닙니다. 그런 기독교라면 저를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소망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예도님께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학책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반틸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