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일깨워준 성령충만의 교본 (2) (요한복음 16:7-14) --- 안성삼목사 주일설교 - 목자들의교회 - 2024/06/23

  Рет қаралды 78

안성삼목사

안성삼목사

Күн бұрын

설료 요약:
1. 성령충만함이란 생수의 강이 배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2. 성령충만함이란 가르침 받은 모든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다.
3. 성령충만함이란 드러 내는 삶의 모습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4. 성령충만함이란 세상을 책망하는 것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요16:7-8)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보혜사성령)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을 가리켜 [파라클레토스] 곧 [보혜사]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위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끊임 없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까? 그는 위로의 차원을 뛰어넘어 성령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죄]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는 [과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녁과 벗어난 화살만 봅니다. 그러나 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는 것은 과녁판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조준이 이미 잘못된 탓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속의 잘못된 조준을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책망으로 우리가 잘못된 생각이 조정되지 아니하면, 우리가 화살을 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과녁판을 벗어나지만 않았을 뿐 잠재되어 있는 죄성은 기회만 있으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책망에 귀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책망 속에서 우리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정직해야만 이 사회를 살리는 소금이 되고 이 사회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치러야 할 대가를 마다하면 머지 않아 삽시간에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결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5. 성령충만함이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누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까?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은 세 가지로 풀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① 먼저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자의로 곧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진리 가운데 있다는 것,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훈련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곧 말의 훈련입니다. ②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예배 시간에 똑 같은 설교 말씀을 듣는데도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다 다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③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음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 위에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시선은 먼곳을 향해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자만이 오늘의 고난에는 반드시 뜻이 있으며 그 결국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 성령충만함이란 내것을 갖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충만한 사람은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성령충만하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님의 자리보다 자기 자리를 더 위에 올려놓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럴 때 그를 통해서 어떤 성령의 은사가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진정 성령충만한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자요, 성령의 열매는 인격이 변화될 때에만 맺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인격의 변화 없이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변화없이는 맺힐 수가 없습니다. 인격이 변화된 자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그는 결정적일 때 자기를 부인하고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배당은 커가고 십자가의 첨탑은 높아가지만, 교인들은 사라지는 날이 반드시 올지도 모릅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람만 만나고 간다면 그 한계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영광만 드러내고 우리의 이름은 자꾸 지워가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존귀해 지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끝난 다음에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종교개혁자 요한깔뺑의 묘가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있습니다. 양화진에서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의 무덤은 가장 볼품 없는 한 구석에 자리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기에 영광을 돌린다면 그분 외에 어느 누구에게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7. 성령충만함이란 주님이 내쉬는 숨을 받아들여 사는 것이다. (요20:21-22)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호흡 즉 숨을 “후”하고 내뱉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호흡을 지닌 자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상황 변화에도 흔들림 없는 깊은 호흡 말입니다. 사람이 흥분하면 호흡이 변합니다. 주님은 사지가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깊은 영적 호흡을 가지고 계셨기에 용서를 선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을 때,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구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말씀할 수 있었던 것도 깊은 호흡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깊은 호흡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깊은 호흡은 삶의 의미, 나의 사명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즉 내 삶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찾을 때 우리는 깊은 호흡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깊은 호흡을 가진 자입니다. 이것을 다른말로 표현하면 성령충만한 자는 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롬12:1)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인간의 맹신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다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려 할 때에는 그 이성만이 우리에게 깊은 영적 호흡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Пікірлер
Nastya and balloon challenge
00:23
Nastya
Рет қаралды 60 МЛН
Will A Guitar Boat Hold My Weight?
00:20
MrBeast
Рет қаралды 226 МЛН
[최성은 목사 설교]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십자가 / 누가복음 22장
34:00
[세상 종말과 주님의 재림] 다시 오시는 예수님
1: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