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익산. 이런 백제사의 한부분이란게, 놀랍고 자랑스럽지만, 잘 모르니 공부를 하고 싶다.
@vitesse704 жыл бұрын
아들데리고 익산으로 역사여행 한번 가야겠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학종-s3t5 жыл бұрын
익산은 미륵사지 석탑과 가람형식의 절을 복원 해야한다 그래서 관광지로 만들어 온국민 전세계에 널리 알려야하는 의무가 있는데 현재의 학자나 정치가 행정가가 방치하고 있는것이다 재정이 빈약하다면 특수 목적으로하는 문화제 복원세를 만들어서라도 복원하라
@user-rh9vz1if5m3 жыл бұрын
근데 미륵사지 석탑이 있는 저 동네가 너무 동 떨어진 촌이라서 ㅋㅋ물론 복원을 잘한뒤에 관광지로 만들면 좋겠지만 정말 휑한 촌동네라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을듯..
@손경훈-d5c7 жыл бұрын
왕이 한번만 결혼을했을까? 아니죠 신라출신 부인 선화공주은 백제에서 왕후로 인정을 안했겠죠ㅜ 그래서 익산으로 옮기기전에 익산 지지세력인 좌평 사택씨와 결혼을 하고서 지지를 얻었다면 맡겠죠
@돈키야해바 Жыл бұрын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johnathanha93403 жыл бұрын
무엇보다도 익산으로 왕궐을 옮기게 된 이유가 그저 왕권 안정을 위해서라는 점이 단정될 수는 없죠. 그리고 삼국이 경우에 따라 동맹이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최우혁-i5j6 жыл бұрын
법왕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무왕때문에 스트레스 받았을듯 아들은 무왕 한명뿐이라 왕위는 줘야되는데 어머니는 그냥 과부 연줄는 아버지인 본인하나 그래서 사택씨한테 장가보내고 닐생을 왕권강화에 매달림 그리도 선화공주 설화는 말이안돼는게 만약에 무왕의 부인이 신라공주면 신하들이 가만히두었을까 게다가 서동이 미쳤다고 신라공주를 부인으로 두었을까 증조할아버지는 신라한테 목이따였고 아버지는 신라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불멸-w5b5 жыл бұрын
백제가 한곳에서 오랜시간을 잇엇으면 유적.유물들이 훨씬 많았을겁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있으니 역사적축적이 약한것같아요. 가장 세련된국가엿는대 아쉬운점이 많네요.
@youngyoum62304 жыл бұрын
ㅂㅂㅂㅂㅂㅂㅂㅂㅂㅂㅃㅃ
@오정임-h6i7 жыл бұрын
왕궁 묻어서 그위에서 농사 를 짓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신라가 숨기려해도 역사는 살아 난다
@미제드론8 жыл бұрын
전북 익산~!!!
@JJ-uq8lp4 жыл бұрын
백제 미스테리한 우리나라 역사
@이원준-j8v2 жыл бұрын
익산 에서는 미륵사지 발굴 훨씬전에 왕관 금관이발굴 되서 금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화제가 된적이 있었어요
@이예찬-o3m8 жыл бұрын
익산 우리할머니댁인데
@전중식-q7j4 жыл бұрын
익산의 전이름 이리다 이리역의 대폭발 사건은 나이가 있는사람은 대부분 기억할겄이다 이리는 백제의 고대도시이고 보석가공의 도시다
@형진신-s4p4 жыл бұрын
이리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전라선을 만들며 김제,옥구 평야의 쌀을 실어가기 위해 철도건설 후에 붙인 이름이고 원 지명은 익산이 맞읍니다.
@전중식-q7j4 жыл бұрын
@@형진신-s4p 그렇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이리와익산은 서로 다른지역으로 알고있습니다 1999년 익산과 이리가 서로 병합하여 익산시가 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VitorJKhan4 жыл бұрын
@@전중식-q7j 이리는 속리 즉 솜리라고 불렸던 지명 마을의 한자음이 이리고 솜리는 익산의 만경강쪽 작은 동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백제가 신라를 병합했다고 하면 백제는 모르겠는데 고구려는 쉽사리 남하 정책을 또 다시 하진 못하지 않았을까요? 백제는 뒷통수에 왜밖에 없는데 왜에서 쳐들어올리는 없었고 고구려는 백제만 신경쓰려고 하엔 뒷통수에 옆통수가 간질간질 한 위치라..
@오경근-l7k7 жыл бұрын
와.. 광고를 2분 30초짜리를 풀로 봐야 되네요 ㄷㄷㄷㄷ
@mincheol05094 жыл бұрын
저익산에서 살고있음
@사람-c4k5y3 жыл бұрын
저도 익산삽니다
@tmzkdl1119 жыл бұрын
백제사 ytn 사이언스
@호용수-e9f2 жыл бұрын
내가 학부 삼학년 때 백제 땜에 충청도 답사 갔잖아. 걍 걍 아름다워. 서산마애삼존불상 꼭 가야 했고. 답사표지 봉용래산항로야
@geokunquovalloiedewol87765 жыл бұрын
원피스에 잃어버린 100년이 백제였던거임
@파랑새-e7c3 жыл бұрын
미륵사시 복원초기에 몇번다녀왔지요 그근처 강경에 살고있고 친정도 가깝거든요 산속이라 공기좋고 놉지않은 산세가아름답죠 근처에 계백장군 묘도잘조성돼있고 유명한 견훤왕능도 근처에있고요 이지역에는 백제라는 상호명도많고 백제병원도있지요 물론 익산도 바로근쳐고요
@신-w2p9 жыл бұрын
무왕이 비정상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 하다보니 귀족과의 연합이 중요하였을것이고 백제 귀족중에서 힘이 있던 사택씨 가문과 결탁하여 익산으로 수도를 옮겼을수도 있겠죠. 그러나 마나 그건 잠시간이고 백제가 망할때 수도는 사비였기에 익산으로 옮겼다해도 결국 실패했거나 일시적으로 봐야죠. 미륵사는 사택씨의 여인이 지었다고 나오는거 보면 익산이 사택씨가 다스리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고 지지세력이 필요한 무왕이 사택씨와 연합했을수도 있죠. 선화공주를 무왕하고 연결하는건 무왕을 추정한거지 삼국유사에 무왕이라고 나오지도 않고 무강왕이던가 그렇게 나옮니다. 무왕이 왜군을 호위로 데려와서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반발 세력이 없었을리가 없으니 만약 무왕이 익산에 수도를 건설해서 천도를 했다고 해도 무왕이 죽고나서 수도가 사비로 원위치 되었다고 봐야죠.
@정명환-p6s8 жыл бұрын
공감이 가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무왕의 왕위가 비정상적이 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요?
@rl59528 жыл бұрын
저도 그리생각.
@ForDFC69727 жыл бұрын
gokcha Kwon 백제 후대왕들 모두의 공통점이긴 한데, 즉위 당시 마땅한 지지기반이 없었습니다. 남송이 그러했듯 애초에 나라의 수도를 뺏기고 남하한 왕족이 제대로 된 위엄이 있을리가 만무했죠. 의자왕 폭군설 또한 무왕 때부터 내려져온 왕권강화정책에 반발한 토착귀족세력의 음해가 와전된 것이 아닌가하는 설도 있습니다. 총명하고 지극한 효자였다는 기록과 삼천궁녀라는 비상식적인 숫자는 아무래도 그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죠. 의자왕이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신라에대한 보복성 전쟁을 개시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병을 희생하게되어 세력이 약화된 귀족들의 반발과 , 그에 맞춘 나당 연합으로 안과 밖의 적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멸망한게 아닌가하는 추측이요.
@sexpower46637 жыл бұрын
gokcha Kwon TheGogu0980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구준회-m6k7 жыл бұрын
근대 우리가 알고있는 사비가 현중국의 곡부로 밝혀지고 있읍니다. 좀더 지켜바야 겠지요. 즉 한반도의 백제영역은 백제본국의 번국중믜 하나로 보입니다. 백제 왕릉중 유일한 무열왕릉은 자손에 암살당하여 쫒끼듯 한반도로 넘어와서 매장했을것임. 묘지매입내용이 그걸 말해주는것임. 석실고분도 전축고분으로 양나라 방식이라하는데 양나라도 백제 번국중의 하나임. 백제는 사서에 성과 건물 축성에 흙을 쪄서 벽돌로 쌓다는 기록이 많이보임. 한반도에 그런유적이 없음.
@손원식-d4n6 жыл бұрын
역사를 모르면 나라가 망한다 정확한 역사는 언제나 밝혀질랑가 ㅋㅋ
@TheKoreanjjh6 жыл бұрын
삼국각축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방의 안정이 었습니다. 선대왕 성왕이 전사한 후 복수를 꿈꾸기 전에 우선 중요한 것은 나라와 왕실의 안정과 번영이 이었다. 무왕이 익산 천도를 결정한 이유는 왕궁과 미륵사 등 대가람을 지을 수 있는 석재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익산이 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웅진이나 사비는 평야에 있는 흙산일 뿐이고, 성이나 왕궁을 지을 수 있는 돌을 캐내는 돌산이 없다. 당신의 운송 기술로 무거운 돌을 옮겨서 왕궁을 건축하기 보다는 건축자재인 석재를 캐낼 수 있는 익산을 새 도읍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미륵사지석탑 축소 양식에서 나타나 듯이 당시는 건축자재가 목재에서 석재로 발전하는 시기로서 위대하고 안전한 왕국을 건설하려던 무왕은 석재로 지은 왕궁과 대가람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완성한 것이다. 지명이된 익산을 전북지방에 가장 큰 현무암 바위산으로 현재 익산시 북쪽에 위치해서 산성을 쌓아 고구려 등 외침을 막는 외성 역할을 할 수 있고, 산성으로 도피 할 수 있다. 실제로 익산 위에는 산성터가 있으며 백제 부흥군 안승 등의 요새였다고 전한다. 현재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쓸모없은 황량한 돌산이 이름대록 익산으로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우수한 품질의 현무암이 석탑 등 석물과 고급 건축자제로 해외로 수출되면서 지역사회경제를 부흥시켰다. 나는 고등학새이던 73년 여름방학에 전라도 기행을 하면서 금마 친구집에 들려서 당시 들판 가운데 서있던 왕궁리 석탑과 미륵사지석탑을 보았고, 일제시대 벼락을 맞아 시멘트로 보수한 미륵사지 석탑에 기념으로 올라갔다가 동네 청년이 몽둥이로 매맞을 뻔했다. 그 후 고고학계 노력으로 의 미륵탑이 복원되고 미륵사지 가람터와 동탑 자리가 발굴된 것은 큰 성과이다. 고고학자들은 발굴현장 만 주목하지 말고, 역사적 배경과 지형지물들을 넓은 시야로 잘 관찰해야 그 배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선대들의 고난을 기억하고 반복하고 싶지 않은 무왕은 불교에 대한 간절한 신앙과 더불어서 돌로된 안전한 천년왕국을 건설하고자 했을 것이다. 성왕의 전사와 이어서 두 왕의 단명의 이유는 무엇 일까? 선화 공주는 버림받은 것일까? 그녀와 추억이 어린 웅진을 버리고 새도읍지에 가서 새왕비를 맞이한 것일까? 그래서 결국 이십년 뒤에 백제가 멸망당할 단초를 제공한 것일까? 역사는 비밀을 안고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왜 의자왕은 부여로 다시 천도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백제가 그대로 익산 왕궁리에 수도를 두고 부여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도 그렇게 쉽게 멸망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여나 공주는 평야에 강을 끼고 협공당할 수 있고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왕의 깊은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의자는 왕국의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ㅠㅠ
고구려 백제 신라 이런게 삼국이 우리에역사입니다 저는 우리는 한민족이고 한피에 내려는 사람이라는거 역사잘알고 있다 또다시 고종황처럼 대풀되는 역사죄인되면 안되고 생각합니다
@박소영-i4d8x7 жыл бұрын
박상민
@환타랑7 жыл бұрын
해외 교포세요?
@kojihwan5 жыл бұрын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엄밀히 다른 나라이다. 우리가 현재 속한 대한민국이 지리적으로 한반도라 해서 한반도에 있었던 고대 국가들을 현재 우리의 역사고 우리의 조상이라고 동일시 하는것은 무리가 있다. 중국이 발해나 고구려역사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라는것과 다를바 없다. 민족을 혈통을 따진다면 얘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는 절대 단일민족이 아니며 중국 몽골 북방계 그리고 일본과도 복잡히 연관되어있다.
@TV-DOCJON5 жыл бұрын
@@kojihwan 역사서로 볼때,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오고,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해 옥저로 갔던 고구려유민이 신라를 세운 것입니다. 중국 사서에서 굳이 이걸 거짓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위장염4 жыл бұрын
@@kojihwan 이보세요 그럼 한국인의 조상은 누굽니까? 조선인이지요? 조선인의 조상은? 고려인이겠죠. 고려인의 조상은 통일신라인이겠고 통일신라인의 조상은 누구겠소? 이 간단한 이치를 무시하네 중국의 동북공정이 문제인건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 해서 문제가 아니라 '한족의 역사' 라고 구라쳐서 문제인거요
@hdcho44862 жыл бұрын
무왕이 정말 서동이었을까 무왕의 전력을 말해 주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허점이 있다. 이름은 장(璋)이며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다. ‘못의 용’이 은근히 왕족의 냄새를 피우지만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가 확정적으로 법왕의 아들이라 한 것과 다르다. 선화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는 설정도 어색하다. 진평왕에게는 나중에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과, 용춘에게 시집 가 김춘추를 낳는 천명공주가 있을 따름이었다. 선화는 가공인물이다. 서동이 금을 장인에게 보내주고 나아가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대목은 더욱 앞뒤가 안 맞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피건대, 무왕의 재위 시 백제와 신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간헐적으로 벌였다. 무왕 3년의 아막산성 싸움을 필두로, 6년(동쪽 변경), 12년(가잠성), 17년(모산성), 19년(가잠성), 24년(늑노현), 25년(신라의 6성 차지), 27년(왕재성의 싸움)으로 이어져 있다. 장인과 사위의 나라 사이가 이렇듯 나쁠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다. 무왕 28년에는 왕이 신라가 침탈해 간 땅을 회복하고자 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진으로 나가 주둔하였다. 진평왕은 이를 듣고 급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도저히 감당 못 할 상황에 대국의 힘이라도 빌려보자는 심산이었다. 이 사실을 안 무왕은 주둔을 풀지만, 싸움은 29년(가봉성), 34년(서곡성), 37년(독산성)으로 이어졌다.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는 [삼국유사] 쪽의 기록이 무색하기만 하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곤란한 증거가 나왔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의 창건 내력을 담은 금판에 적힌 글이었다. 2009년의 일이다.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639)에 지은 것’이라는 기록이다. [삼국유사]에서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지은 것으로 나와 있다. 용화산 밑에 있는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공주가 왕에게 큰 가람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지명법사가 이번에도 신통력으로 못을 메웠고, 미륵상 셋과 회전(會殿), 탑, 낭무(廊廡)를 각기 세 군데에 세운 미륵사가 완성되었다. 심지어 진평왕이 온갖 기술자들을 보내 도왔다고도 했다. 아무래도 믿자면 탑에서 발굴된 금판의 기록이다. 639년은 무왕 4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다. 사택적덕은 미륵사 주변의 유력한 호족이고, 서동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로 보인다. ‘못의 용’의 아들인 서동은 법왕의 서자 정도로 본다면,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운 데다, 처가의 강력한 후원까지 더해져 왕위에 올랐으며, 40년 통치에 이제 마지막으로 부인의 소원을 들어준 이야기로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도 [삼국유사]가 전하는 설화는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백제 사회가 능력 있는 자의 무한한 도전 가능성에 열린 구조였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무왕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더 드라마틱하게도 사택적덕의 딸이 드디어 선화공주로 바뀌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왕 [武王] - [서동요]의 주인공, 백제의 30대 왕 (인물한국사, 고운기, 장선환)
@sonikaita65056 жыл бұрын
성스러운 땅. 전북익산
@qwer4k40964 жыл бұрын
물론 비용이 많이 든다는건 알고 있지만.....그래서 어쩔수 없겠지 최선을 다하신거란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몇백년씩 나라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옷을 저렇게 입었을거라고 생각이 들지가 않아요..ㅠㅠ 모자요 바가지 뒤집어 쓴거 처럼 보이고 늘 역사컨텐츠 볼때 마다 아쉽네요
@유창준-f7u3 жыл бұрын
이 당시 신라가, 남의 힘을 빌어 통일을 한게 후세를 사는 우리민족에게는 비극였든 것 같다. 고구려나 차선으로 백제였서야 했다고 봅니다.
@shh35436 ай бұрын
250M ~ 380M 둘레가 왕궁이에요? 그냥 지역 행정 요충 아닌가요?
@스타시퀀스2 жыл бұрын
백제란 말이 어디잇을가요? 신라도 그렇고 신라라 간판이 어딨을까요 어떻게 알수있지?
@sknam7767 жыл бұрын
삼국시대중 백제기술이 일본에 들어간 역사가 일본이 현제 우리나라보다 산업혁명이 앞선 결과라고 보고싶네요. 일본이 한국에게 많은 혜택을 보았는데 왜 역사왜곡과 참탈침략한지 배은망덕한 놈 세상에도 없다. 일본에 있는 우리나라 국보급 유물들 수십만건을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조만간 사장될 역사이고, 중국에서 백제는 중국사라고 주장할 역사인데 굳이 가르칠 필요도 없는 역사죠. 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이 한국과 일본으로 넘어가서 국가를 세웠다는걸 이미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고고학 유물로 증명이 되니까요.
@하태환-v3z6 жыл бұрын
박정희이정권 개색퀴들이 백제를 역사에서 지운것입니다.
@권태호-l7y5 жыл бұрын
아니지요 왜냐하면 중국정사 동이열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이민족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사 될수 없음.
@TV-DOCJON5 жыл бұрын
이것도 한번 보세요. m.kzbin.info/www/bejne/o3KupaqKiciDb5I
@madebycorea4 жыл бұрын
@@大신라혼 허구헌날 백제 꼬봉 왜구한테 줘털리고 왕자까지 왜놈에게 인질로 보낸 흉노족의 나라에게 大신라래 ㅋ 불국사도 황룡사도 백제 기술자들이 지어준건 아는지 모르겠네...
@오빠므찌나3 жыл бұрын
사카자키 료의 전북익산 신비의땅 전북익산
@글쎄그러려니5 жыл бұрын
아~!!! 백제여~ 중국과 일보네까지 영향려글 끼치면서 해상강구그로서 강대했던 백제가 어찌~? 백.신 연하플 하여 한강유여글 수보칸후 신라가 비여라게 뒤통수를 쳐 버릴거슬 미리 대비했더라면~ 원래 한강유여기 백제땅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백제가 삼국통일했더라면 현재의 중국과 일보니 존재해쓸까~?
@김방석-k3j2 жыл бұрын
선화공주 설화는 그냥 설화일 뿐이다 이미. 사택적덕의 딸인.황후가 시주 했다고 명문이 나왔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강콩-s2w Жыл бұрын
백제는 대륙에
@강나은-h3x Жыл бұрын
익산에 금나오나보네
@skimlines6 жыл бұрын
이 시리즈 교육적이고 좋은데 배경 음악 절반이상이 NHK 일본 사극 드라마 일본 애니메 배경음악인데.... 우리나라 얘기하는건가 일본 얘기 하는걸까. 묘하다.
@호용수-e9f2 жыл бұрын
이영문선생 동무네ㅎㅎㅎ
@전병철-l4h4 жыл бұрын
익산시♡♡♡♡♡♡♡♡♡♡♡♡♡♡♡♡♡♡
@hdcho44862 жыл бұрын
세종대왕 마누라가 몇명이더라? 수 십명일걸? 무왕은 60세 넘게 살았고, 재위 기간만해도 41년인데, 무왕의 마누라가 첫째 왕비 선화공주 한 명일리는 없는데, 문서로 된 기록이 아무 것도 없으니.....
@아투비4 жыл бұрын
백제에 성이 동서로 두개있었다는건 하나는 요서에 하나는 반도에 있었던것으로 해석해볼수도 있다고 본다.
@VitorJKhan4 жыл бұрын
마한 옹관묘 세력과 백제 석실분 세력 그런데 광개토왕비에는 한번도 마한은 나타나지 않고 왜만 등장한다. 왜지역도 옹관묘 세력이다. 무슨 뜻?
@건강방4 жыл бұрын
[우울증 그림처방],,, 클릭 하면요, 고칠수 있어요,
@김민주-c6s7e4 жыл бұрын
감추고 싶다! 역사1천년이상*!! 또 1천후 발견 뭐라 대변핳래 후손아
@루비나찌4 жыл бұрын
이리 아닌가 ㅋㅋ
@phanatommr62973 жыл бұрын
옛날로 따지면 이리시가 아니라 익산군
@사랑인가5 жыл бұрын
도대체 백제수도가 익산이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없고, 삼국유사에도 없고, 일본서기에도 없고, 삼국지위지동이전 등 중국역사서에도 없는데, 전형적인 역사왜곡을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juyoungpark28699 жыл бұрын
혹시 이도학 선생님머리가 가발? 예전영상에는 머리가 대머리 였는데 ㅎㅎㅎ
@広瀬賢淑-t5w6 жыл бұрын
하하웃어
@WonJeong12193 жыл бұрын
얇은 깊이의 YTN역사 추적스토리.. 아직YTN은 멀었음..KBS열심히보시게.. 입체적,실증적,논리적 프로그램 만들기를..
@stevejaison28289 жыл бұрын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고려시대때 지어진거라 수백년전에 존재했던 삼국시대에 대해 사실적으로 적는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추측이나 자기들에 입맛에 맞게 적은게 아닌가싶기도 하고
@peterpark84868 жыл бұрын
Steve Jaison 삼국사기도 추측이 아니라 여러가지 자료를 토대로 만들었지.
@stevejaison28288 жыл бұрын
Mr. Park 삼국사기에 적힌 내용들이 틀린게 많이 있으니 하는말입니다.
@luxurylife20237 жыл бұрын
일본놈들이 그 많은 역사책을 훔쳐가면서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남겨놓은 이유가 있음......
@peterpark84867 жыл бұрын
Steve Jaison 통일신라가 개줮같이 써놨는데 그럼 어떻해요ㅋㅋㅋ일본서기를 봐야합니다...
@ForDFC69727 жыл бұрын
전상호// 거기서 일제가 왜 나옴;;;; 그냥 적대국 왕조가 멸망하면 건물부터 기록까지 싸그리 멸망시키고 불태워버리던 동북아 문화를 탓해야지;;;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삼국 기록은 없었어;;;;
@hoonsong6615 Жыл бұрын
큰 고대도시는 큰강을 끼고 발전했다는데 익산은 그런면에서 천도하기에는 좋은 입지가 아닌데다 관상성 전투후 쇠약해진 나라가 뭔 천도냐? 국력을볼때 진시황제급 무리수다. 특히 중국 일본과의 교류하기도 불리한 입지고...판단착오로 나라가 쇄한듯
@호용수-e9f2 жыл бұрын
99’
@잼-t2g4 жыл бұрын
백제의반대국가는흑제
@호용수-e9f2 жыл бұрын
난 구석기 전공인데 ㅋ
@yonghanpark96327 жыл бұрын
강단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고증없이 만드는 역사조작은 중단되어야 한다. 백제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에 존재했었고 역사서도 존재한다. 식민사학으로 밥벌이 하는 강단사학자들이 비밀을 풀고 역사의 진실을 공개하는 날이 꼭 오기를 기대한다.
@user-rx4od4fb8h6 жыл бұрын
Yonghan Park
@TV-DOCJON5 жыл бұрын
백제가 중국 대륙으로 부터 왔죠.중국 대륙에 오래 존재한게 아닙니다. 식민사학만 역사 왜곡이 아니라, 본인들도 똑같은 왜곡 하고 있네요. m.kzbin.info/www/bejne/o3KupaqKiciDb5I
@peterpark84868 жыл бұрын
신라가 뒷통수만 까지 않았으면
@호용수-e9f2 жыл бұрын
이영문선생님 조국통일 완수요! 메롱
@napleongyi42665 жыл бұрын
기록이 너무 없다고 하더이다.문자가 중국 문자니 기로가기 어려웠을것
@마당쇠-p8g4 жыл бұрын
무왕을 전하라 부르다니? 고증을 조선시대에 맞췄나?
@g0nny3838 ай бұрын
한반도 익산에 무슨 백제의 왕궁이 있었다고 참네... 그냥 익산 지배자의 저택이겠지ㅡ..사기치고 있네
@TheJork664 жыл бұрын
대부분추측... 확실한건하나도없네... 그냥 지방귀족성터쯤...
@이샹그리라3 жыл бұрын
핵돼중때 깊은연구를 했어야했다고본다~~~
@inkoansong59095 жыл бұрын
피타고라스 정리가 B.C.530 년 즈음에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 조상의 문화는 무어냐고요?
@TV-DOCJON5 жыл бұрын
미륵사나 무령왕릉 같은 건축물이 수학 없이 가능하다고 봅니까? 석굴암 등등도 미스테리립니다. 안타까운건 연결이 이어지는 사서가 부족하다는거죠.
@毛豬襲5 жыл бұрын
그렇게 따지면 그리스 지금 허접쓰레기 나란데 ㅎ 조상잘둬서 뭐함 ㅎㅎ
@KOREA_DAEGUMAN4 жыл бұрын
피타고라스 보다 먼저 나온 중국 진자의 구고현의 법칙은 ?
@왓더쿼카4 жыл бұрын
수학을 서양학으로 배우니 피타고라스 정리만알지 ㅋㅋ 당시에 동양엔 수학이 없었을것같음?
@user-rh9vz1if5m3 жыл бұрын
건축이야말로 그 당시의 수학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요?
@user-mookee5 жыл бұрын
역사냐 소설이냐
@joneshubert37914 жыл бұрын
충청남도, 전라남북도정도의 국토에 대궐을 두개나 짓고 살면 백성들이 퍽도 좋아하셨겠군..!?
@우보-k4e Жыл бұрын
이놈들. 또 시기칠궁리 하고있다.
@youngkim36386 жыл бұры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 했는데
@세상만死6 ай бұрын
고대 강성했던 국가가 여기저기 궁성을 만들어서 아쉽다? 정말 강성했는데 왜 여기저기 지라시 짓을 햇것나? 그건 당연한 사실이다. 내가 역사가나 심도있는 고고학자가 아니라도... 쇼는 짧은 것이다. 스스로 자성과 자정의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부조리적 성향은 100년도 가지 못해 내부에서 단합력이 붕괴하기 시작되고, 조그마한 외부의 침략이나 영향에 무너지는 것이다. 이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쉬이 본성적으로 알고 있는 본연의 생명력 유지, 보존의 질서인 것이다. 본질적 결합적 조직력이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시스템도 영원할 것이라.... 기대하고 그랬던 것처럼 또 왜곡하고 멋진 것처럼 호도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 것이다. 지금의 그 본성이 그대로 인데, 예전이라고 달랐게는가? 뭐가 그리도 대단했건만, 뭐가 그리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겠는가?
@육룡나타샤4 жыл бұрын
한성>웅진>사비>익산... 일본으로~~~
@Light-jy5yb6 жыл бұрын
이 한반도에 그것도 백제가 있었다면 수도가 두 곳일 필요가 있었을까? 아주 단순한 논리다. 백제는 이 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있었으며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추측 가능하다. 신라가 통일을 한 뒤 오경 즉, 5개의 수도가 있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다. 그것이 이 반도에서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강단 사학자들은 스스로 창피한줄 알아야 할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 반도로 국한하여 일본 식민사학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면 영원히 우리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살아갈 것이다.
@girl48146 жыл бұрын
박종인역사의땅
@TV-DOCJON5 жыл бұрын
전체적으로 쭉 연구하세요. 부분부분만 틀렸다고 하니 우기기에 지나지 않죠.
@kil29672 жыл бұрын
잃어버린 우라의 역사서 5먼여권이 일본에 가잇습나다. 어서 일본을 굴복시키고 돌려받아야갯습니다. 일제시대때의 왜곡된 역사를 자금껏 학교에서 가르치다니요
@구준회-m6k7 жыл бұрын
백제의 고토는 어디인가? 중국은 왜 백제도 중국사라고 주장하는가? 우리사학에서 주장하는 백제가 한반도에서 번영을 했다면 속지주의도 인정이 않되는데 왜 그럴까? 중국 사학자들이 멍청해서 그랬을까? 한국사학에서 백제사는 버린역사라고 할수있는가!
@강인하-c5v5 жыл бұрын
저딴탑하나 복구를 30년넘게... 아직 반도안됐네;; 세금살살녹는다 ㅁㅊ;;
@은나라가고조선4 жыл бұрын
그것은 신라흉노지배층이 배제의 고조선정통성을 지가 분명히하려는의도엿고 사실 이설화도 중간에 무왕이라고한것도 음모로ㅡ엮어진것이다 무왕이 그 먼곳까지 왜가며 그가 웬수 흉노에딸을 왜좋아하겟니
@김종길-g2k7 жыл бұрын
헉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한 유적이라 저기서 나온것도 손댓을 가능성이 농후하군요 글씨체가 우째 저런지 돌에 세긴글시도 저것보다 글씨체가 좋아 보이더만 한문 무지 못쓰는 사람이 급하게 쓴 글씨체로 보이니 우찌된일일까요??
@user-ig3wq2vp2f4 жыл бұрын
백제의 주세력은 중국대륙에 있었고 한반도는 백제 속국 소국이 널려 있었다 평양 한성 울진 부여 경주 익산 나주 등등 익산 왕궁리 궁전 미륵사는 익산 소국이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h5q5 ай бұрын
익산이 호남인의 원한? 고려와 신라(경상도, 중국)이거늘 외 고려(북한), 중국을 옹호하는지? 우파를 공격하는지!
@ack31456 жыл бұрын
백제 똥통!! ㅎㅎㅎ 신기하네요
@최동현-n7v3 жыл бұрын
갱상도에사는중국인들의 잘못된역사오류가 한두가지가 아니죠.
@박애족애국8 жыл бұрын
국보인 창왕명석조사리감은 창왕명 석조 라고 읽어야하겠지요. 창왕 명석조가 아니고...........^^ 한자를 배우지 않은 탓, 한자 문맹이 심합니다.
@mikastar14338 жыл бұрын
박애족애국 그걸 굳이 한자문맹탓이라고할 수 있을까요?원래 문화제명은 띄어 씌기를 안하니 그렇게 헷갈릴 수도 있는것이죠.그리고 상식적으로 창왕에서 끊어 읽지,창왕명으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보통은 사람들이 생활하거나 공부할때 한자를 모른다고해서 큰 불편함도 없습니다.오히려 그런 한자가 문맹률을 더 높일 뿐이죠.기존 법학이나 의학 서적 보십시요.또한 역사책의 기존 용어들도 무슨 말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오히려 한글 순화 작업으로인해 기존보다 현재의 법,의학,역사 용어들 덕분에 학문적으로도 훨씬 다가가기 수월해졌죠.그런것만 봐도 한자 필요성은 기존보다 적어졌습니다.가끔 동음이의어때문에 헷갈리는것들은 대부분 문장 안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거나 특이한 어휘같은겅 사전알 사용하면 되고요.
@user_IVVVI4 жыл бұрын
@@mikastar1433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고 어려운 말을 순화해야 하는 것도 동의하지만, 솔직히 하신 말로는 오히려 윗댓글을 뒷받침하는 것 밖에 안 되겠네요... 당장에 문화재를 축제처럼 '문화제'라고 쓰셨잖아요. 어려운 용어를 순화한 것은 일상에서 쓰이는 좀 더 쉬운 한자어로 바꾼 것이지 한자어를 없앤 게 아니구요, 일본어처럼 국한문혼용으로 쓰자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것까지 한자교육무용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역사문화를 다루는 영상에서 잘못 끊어 읽는 게 바람직하진 않겠죠.
@바다도깨비6 жыл бұрын
무슨왕궁이 이리도 작은가요 .작은 사찰보다도 작아???
@napleongyi42665 жыл бұрын
커요 안가봤지요? 축구장 15개로 느껴졌었는데
@빡따구리6 жыл бұрын
바늘 구멍만한 조그만 것을 확대해서 허황된 소리를 하는 역사학자란 인간들.
@TV-nn4ym4 жыл бұрын
아직도 전라도는 분리 독립을 못했냐?
@sarang1 Жыл бұрын
간첩인가요? 좌경용공세력
@kwe213df9 жыл бұрын
한국의 역사는 없다
@広瀬賢淑-t5w6 жыл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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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DOCJON5 жыл бұрын
어느나라도 역사가 없지.
@한규강-s5i6 ай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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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k4e Жыл бұрын
엉터리 역사 이치에도안맞아.
@손경훈-d5c7 жыл бұрын
왕이 한번만 결혼을했을까? 아니죠 신라출신 부인 선화공주은 백제에서 왕후로 인정을 안했겠죠ㅜ 그래서 익산으로 옮기기전에 익산 지지세력인 좌평 사택씨와 결혼을 하고서 지지를 얻었다면 맞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