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uw9lz 저는 공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선생님. 현생을 실아내기도 벅차서 자주 듣지는 못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철학에 대한 열망과 생에 대한 질문들을 품은 채 선생님의 강의들을 듣곤합니다. 감사합니다!!
@서원광-n3y5 ай бұрын
❤😂😅
@cskim71536 ай бұрын
45::이후,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의 긍정성과 정신분석학의 기억의 병리적 부정성에 의한 존재론적 실재의 실체론 그리고 변증법적 반론의 부분은 깊은 통찰을 갖게 합니다.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의 생명적 모체의 일자성에 대한 의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부정적이지만 베르그송 자신에게는 종교적인 확신을 갖게 되어 그 자신은 결국 카톨릭에 귀의하게 된듯 합니다~^^ 예도의 넘나드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맛깔나는 진품 명강입니다. 한번 만나서 멋지게 감사 대접하고픈 마음입니다.
@TV-uw9lz6 ай бұрын
네,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tarraoh23266 ай бұрын
선생님😊 ᆢ오프라인 강의나 수업 모임이 있거나 하지는 않은거죠?
@TV-uw9lz6 ай бұрын
그런 날이 오면 아마도 커뮤니티에 공지하겠지요.^^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얍얍얍-b8h6 ай бұрын
잘들었습니다 유용 무용의 시간 노예의 시간 자유인의 시간 감옥에 멈춰버린 시간 그의 시간은 그렇게 채색되어 갔다
@TV-uw9lz6 ай бұрын
하이~ 얍얍님^^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byung-gohnchoo57336 ай бұрын
추천합니다 🎉
@TV-uw9lz6 ай бұрын
상쾌한 아침입니다. 병곤님^^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김민석-q2f7g6 ай бұрын
욥의 도자기 파편 욥의 일상성이 신과 악마의 내기로 송두리째 무화된다. 일상성의 무화 역시도 지속durée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욥이 하나님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신적 전체성을 나름대로 일자화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이야기이자 지나간 사건으로써 욥의 입장에서 절대자의 권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지나간 과거... 욥의 일상성과 그 일상성이 모두 무화되고 실존의 위협으로써 일상이 그렇게 진행되어 갈 때, 그에게서 과연 시간은 지속에 해당될까? 신실한 욥이 절대자의 의도에 반기를 들때 조차도 언제나 순수가 나머지 공간에 현재에 침투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마저도 절대자의 의도, 우주적 생명 활동의 일부분으로 편입되는 것일지라도 욥의 손에 쥐고 있는 도자기 파편은 그의 몸에 새로운 흉을 지어냄으로써 지속으로써의 시간 밖았에 남아있다. 도자기 파편으로 피부를 긁어냄은 차라리 늘 피부에서 일어나는 과거와 단절된 사건일지 모른다. 욥의 시련은 인과적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과적 고통은 과거에서 태어나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마치 선분의 양 끝을 반복•횡단하는 제한적 운동이지만, 그의 몸에서 용솟음 치는 가려움증은 언제나 몸에 상처를 내야만 하는 제한적 운동 너머의 것이즈 언제나 현현하지만, 그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갱신되는 사건으로써의 새로움이다. 피부-간지러움과 도자기 파편-상처는 피부의 상처에 따라서도 욥이 처해있음에서도 그가 심지어 절대자와 한판 붙고 있을 때조차도 그를 자극했으며 그 상태 위에서 그는 지속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잔여로써의 순수는 욥의 몸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