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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류씨 정려각 및 비
高興柳氏旌閭閣𠕨碑
Goheung Ryu's Jeongryogak and Bi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낮은 야산에 남향으로
세워진 류 씨 부인(1371∼1452)의 정려각(旌閭閣)이다.
1996년 3월 27일 대전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고흥류씨정려각은 조선초기 문신 송유(宋愉, 1389~1446)의
어머니인 고흥류 씨(高興柳 氏, 1371~1452)의
명정(銘旌) 현판(懸板)을 보관하는 건물이며
비(碑)는 류 씨의 행적(行跡)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낮은 야산, 정려공원 내에 세운 것이다.
은진송 씨 쌍청당공파 종중 소유이다.
*정려각(旌閭閣)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상징적인 건물로,
정려비(旌閭碑)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旌閭記)를 모시고 있다.
정(旌)은 깃발을 뜻하고, 려(閭)는 마을을 뜻한다.
먼 곳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국가에서 풍습으로 권장하기 위해, 모범이 되는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앞에 세우는 건물이다.
류 씨 부인은 류준(柳濬, 1673-1753의 딸로,
송극기(宋克己)에게 시집갔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친정부모가 재가(再嫁)를 시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개경에서 수백리를 걸어 회덕의 시댁에 내려왔다.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잘 보살펴
훌륭히 키워냈다 하여
1653년(효종 4)에 열녀로 정려가 내려졌다.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4면에 붉은 살을 두른 내부에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정려각 오른쪽에 현종 4년(1665)에 세운 정려비가 있다.
명정기(命旌記)에는 "癸巳五月日"이라 되어 있고,
비에는 "崇禎癸巳五月日銘旌乙巳四月日立石"이라 되어 있어
1653년(효종 4)에 정려가 내려졌고 1665년(현종 6)에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정려문(旌閭門)에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일가가
상의 하고 조정에 아뢰어 정려의 은전을 받게 된 내력
및 부인의 행적 등이 적혀 있다.
220여 명의 자손이 정려를 진정했고,
관찰사가 품신하는 장계(狀啓)를 올리자,
예조에서는 여론과 각종 증거를 수집하라고 하였다.
김경여(金慶餘)와 유생 80여 명이 공동으로
유 씨 부인의 행실을 품의하고,
묘표(墓表)의 사본을 올리자,
예조판서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이
주청(奏請) 하여 명정을 윤허(允許)받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와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이에 동조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갱(金坑), 우의정 이시백(李時白)
등도 정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53년(효종 4) 5월 공문이 내려와 작설(綽楔 정문)을 갖췄으며,
쌍청당(雙淸堂) 앞에 정문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1칸, 옆면 1칸이고,
내부에 내부에
‘열부고려진사송극기처고흥유씨지려계사오월일명정
(烈婦高麗進士宋克己妻高興柳氏之閭癸巳五月日命旌)
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구조는 장대석 기단 위에 팔각 초석을 놓고
짧은 원형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주각에도 공포를 두어 화려함을 더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정려다.
1665년(현종 4) 정려의 오른쪽 암반 위에
열부고려진사송극기처고흥류씨지려
(烈婦高麗進士宋克己妻高興柳氏之閭)라고
음각한 비를 세웠다.
정려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4면에 붉은 살을 두른 내부에 명정 현판이 걸려 있으며
구조는 장대석 기단 위에 8각 기둥 모양의
긴 주춧돌을 놓고 짧은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무출목이익공 계통으로 구성하였고
창방 위에는 1구씩의 장화반을 놓았는데
이 화반은 밖1출목 안2출목으로 짜서 특이하다.
정려의 주변에는 사괴석 담장을 쌓았다.
대전 대덕구 중리동 498-1
498-1 Jungri-dong, Daedeok-gu, Daejeon
202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