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Dynasty, Yeonsan's mother, Deposed Queen Yun [History of Korea]

  Рет қаралды 123,857

역사패치

역사패치

Күн бұрын

Deposed Queen Yun (1455~1482) was the second wife of King Seongjong, the 9th king of Joseong, and the mother of the 10th king Yeonsan. #history #joseondynasty #queen

Пікірлер: 120
@CherryPopcorn
@CherryPopcorn 3 жыл бұрын
윤씨의 변화는 산후우울증이 맞을것 같습니다...ㅜ 엄청나게 힘든건데 저땐 산후우울증을 몰랐으니 윤씨 성격이 이상하다고만 했었겠죠...ㅠ
@타키수녀님
@타키수녀님 Жыл бұрын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윤씨가 질투가 생긴 원인이 산후우울과 스트레스로 생겼을거라고 저도 상각합니다 .
@류지민-i7m
@류지민-i7m 2 жыл бұрын
산후우울증으로 성격이 바뀌었나보네 평범한집아내였으면 괜찮았겠지만 국모에 자리에 있었기에 그러면 안되었는데... 안타깝네
@wpzmfha08
@wpzmfha08 3 жыл бұрын
아들 연산군이 꽃미남 이었으니 어머니 폐비 윤씨도 미인 이였겠죠 성격이 폭군이었어 그렇죠
@파란-u4d
@파란-u4d 2 жыл бұрын
그 시대상으로 보면 내쫓겨날만 하지만 개인적으론 불쌍...한미한 집안이라 다른 후궁들도 은근히 깔봤을거고, 엄격하고 무서운 시어머니에 남편은 다른 여자들 만나러 밤마다 싸돌아 댕기니 아무리 멘탈을 다잡아도 눈이 뒤집어질만 하지.....
@7ob1gj5h
@7ob1gj5h 2 жыл бұрын
인수대비가 시어머니인데 시월드로 홧병 들고 산후우울증도 오고 남편이라는 놈팡이는 후궁만 찾고 있으니 스트레스로 정신이 아플 만 하지.
@타키수녀님
@타키수녀님 Жыл бұрын
그러게요.......
@이도형-x9x
@이도형-x9x 3 жыл бұрын
폐비 윤씨는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준 모든 조건들이 나중에 다 화살로 돌아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건을 봅시다 왕의 사랑 -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 참고로 연산군이 둘째 ...(연산군 이전 조졸한 왕자가 있습니다. 어머니 신분이 밝혀진 것은 아닌데 정황상 폐비 소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검소하고 바른 언행 더 결정적인 것은 가난한 친정 - 사실 이게 크게 한 몫 작용했다 봅니다. 외척이 없으니까요 ... 그런데 폐비가 될 때는.... 왕의 사랑은 증오로 완전히 변했죠 - 원래 아무 감정 없던 사람보다 좋아했던 사람에게 더 증오하는게 인간이지요 검소하고 바른 언행은 한 번 엇나가자 완전히 딱지를 만들어버렸죠 윤씨를 위해 나서줄 이 없던 친정 세력은 왕이 아무 고민 없이 내치게 만들어 버렸죠 인생이란 이리 묘한건가 봅니다
@김진주-y9j
@김진주-y9j 3 жыл бұрын
목소리가 좋아요👍💜
@damien8808
@damien8808 2 жыл бұрын
승자들이 남긴 기록이라 다 몰라요
@오로라-u5p
@오로라-u5p 3 жыл бұрын
폐비 윤씨도 불쌍하네요...
@타키수녀님
@타키수녀님 Жыл бұрын
만약에 소혜왕후가 제헌왕후를 잘 대해줬다면 제헌왕후는 행복하게 살수 있을텐데 ............
@맑음천사
@맑음천사 3 жыл бұрын
장희빈이나 폐비윤씨 같은 용모 가 너무 아름다운 여인은 미인박명의 저주 를 피할수 없나 봅니다
@엔젤우먼
@엔젤우먼 3 жыл бұрын
헬레나와 프시케 같은 끝까지 잘 먹고 잘 살면서 장수하거나 신이 된 여인상도 있어요. 모든 미인들이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에요.
@맑음천사
@맑음천사 3 жыл бұрын
물론 아주 예쁘다고 해서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미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정재웅-b8u
@정재웅-b8u 3 жыл бұрын
@@엔젤우먼 핼래내랑 프시캐는 신화잖아요
@딩고-c4t
@딩고-c4t 2 жыл бұрын
미인들은 남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미인이 아니어도 조심해야 하지만 미인들은 껄떡거리는놈들이 더 많으니까요 옛날에는 미인박명일 수 밖에 없는게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형태라서 미인찾는놈치고 괜찮은남자가 없죠 여자를 이쁜물건취급하던 시대였으니
@CWG-op9td
@CWG-op9td 3 жыл бұрын
Thank you so much for the English subtitles ❤️. Such a tragic figure! I wonder if her son would have fared better with his mom alive.
@sahara8247
@sahara8247 3 жыл бұрын
이건 그냥 성종 잘못이 백번천번 맞습니다. 폐비윤씨에게 좀만 더 사랑을 줬거나 연산군에게 니 어미를 죽여서 미안하다라며 사정을 말했다면 무능한 중종이 왕이 될 일은 없었을텐데 말이죠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저 시대 잣대로는 폐비 윤씨가 잘못한 거였어요... 어짊으로 내명부를 통솔해야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다만 남존 여비 사회, 그리고 거대 권력에 짓눌려 버린 그녀의 삶이 안타깝기는 합니다.
@easyone1441
@easyone1441 3 жыл бұрын
@@꽃말-y6l 맞는 말씀입니다. 당시 시대상으론 어긋난 행동이지요. 작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안타까운 삶이 맞지만
@그래그렇지-q6f
@그래그렇지-q6f 8 ай бұрын
임신 전후가 너무 달라서 산후우울증일수도 있다던데..
@reolee-gk2gx
@reolee-gk2gx 3 жыл бұрын
자기아들이 세자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대비가 될건데 뭐가 아쉽고 불안해 저난리(투기와 우리가 아는 사건 사고들..)를 쳐 폐비가 되고 사사되는지.. 폐비윤씨가 정신병적 기질을 보이지않고 조신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까요? 만일 폐비가 되지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면 어찌되었을까 궁금해지네요 성종이 폐비윤씨를 폐위시키고 사사하는데 앞장섰던건 여성편력이 심한 자신을 얽매고 후궁들과 사이안좋고 연산군을 이용해 먹으려 하니 자기선에서 태종이 세종을 위해 악역으로 교통정리 해준것 처럼 하려다가 악화된 것 같네요 성종은 태종처럼 끝까지 냉정하지 못하고 딱 한사람 폐비윤씨에게만 냉정한 사람이고 애엄마를 자기가 죽인 죄책감에 연산군 훈육을 망친게 폐인인듯 보여요 총채적 난국... ㅉㅉ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개인적으로 폐비 윤씨가 산후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중전으로 승격되었을 때처럼 어진 성격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저도 들기는 하네요. 폐비 윤씨 다음으로 중전이 된 정현왕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현왕후도 폐비 윤씨처럼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으로 들어와 자녀 낳은 걸 보면 성종이 그렇게 크게 총애한 여인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1462년: 윤호의 딸로 출생 1473년(만 11세): 성종이 공혜왕후하고 자식이 없자 간택 후궁을 대거 들일 때 선발되어 폐비 윤씨 등과 함께 입궐 1478년(만 16세): 순숙공주 출산 *만 18세에 입궐한 폐비 윤씨와는 달리 어린 나이에 들어와 이 무렵 성종과 초야를 처음 이룬 것 같습니다. 1479년(만 17세): 폐비 윤씨 갖가지 기행을 벌이다 폐출 1480년(만 18세): 연산군의 양육 등을 위해 정현왕후가 중전으로 승격 1485년(만 23세): 요절한 공주 출산 1488년(만 26세): 훗날의 중종 출산 1490년(만 28세): 요절한 공주 출산 1495년(만 33세): 남편 성종 사망, 연산군 즉위, 본인 왕대비가 됨 1498년(만 36세): 연산군이 무오사화 일으킴 1504년(만 42세): 연산군이 정현왕후에게도 장검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진 갑자사화 일으킴 1506년(만 44세): 중종반정 일어나 친아들 중종이 왕이 됨 역대급으로 여자 좋아하고 정력이 강한 성종과의 혼인 생활 중 1남 3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도 드문드문 태어났고요. 한데 꾸준히 아이가 태어난 걸 볼 때 성종이 그녀를 크게 총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중전으로 예우하며 꾸준히 찾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에 부응하듯(?) 물론 폐비 윤씨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중전이 되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일 수도 있지만 역대급으로 여자 좋아하는 왕이었던 성종과 큰 트러블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내명부를 다스렸고, 그녀가 그녀의 며느리 문정왕후 같은 성격이었다면 연산군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걸 빌미로 어떻게든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중종을 세자로 삼으려고 했을 텐데 딱히 그러지도 않았죠. 연산군을 친아들 중종만큼 사랑으로 키우지는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그런 것처럼 박대를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뭔가 얘기가 옆길로 많이 새 버렸는데 정현왕후를 중전으로 삼은 것부터가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이지만 마침 아들이 없어서 연산군과의 후계구도가 꼬일 일도 없고 성격이 참하고 어질어서입니다. 폐비 윤씨가 중전으로 승격되었을 때처럼 그 어진 성격 그대로 가지고 정현왕후처럼 내명부를 묵묵히 다스렸더라면 이미 자신의 아들이 원자인 마당에 다른 후궁들이 아무리 아들을 낳아도 내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었어요. 물론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라 연산군이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는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상상 못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묵묵히 다스리면 성종이 가끔씩이라도 그녀를 찾았을 테고 아들이 더 태어났겠죠. 아무리 후궁 소생 아들이 많아도 중전 소생 아들과의 비교는 무리입니다. 연산군은 정치력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영상에서 이야기하듯 폐비 윤씨 사건을 이미 세자 시절부터 알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이를 이용한 왕권 강화책을 구상하고 있었어요. 이 정치력을 좋은 쪽으로 사용했더라면 명군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연산군이 왕권을 강화하고 대단한 선정까지는 아니어도 이를 이용해서 국정을 안정시키고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질로 조선의 왕의 계보가 이어졌더라면 어땠을까요? 연산군 이후 중종은 그냥 그런 평범한 왕이고 인종은 일찍 죽었고 명종 시절엔 문정왕후와 윤씨 일파가 판을 쳤죠. 최악은 아니었지만 명군 계보로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왕권 강화로 탄탄해진 상태에서 연산군이 계속 정치를 했더라면 어땠을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아무튼 그녀의 산후 우울증이 그녀의 아들의 인생까지도 크게 바꾸었어요. 그저 내명부를 묵묵히 다스리며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걸 기다렸다가 대비가 되어 대접 받으면서 살면 그녀에게도 좋았고 연산군은 자신의 정치력으로 저런 폭정이 아니라 그냥 정치를 했을 텐데 말이죠.
@정재웅-b8u
@정재웅-b8u 3 жыл бұрын
@@꽃말-y6l 폐새재 질이 아니라 폐새자 황입니다 폐새자 질은 광해군 아들입니다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거대 권력에 짓눌려 버린 그녀의 삶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그녀의 잘못입니다. 오늘날의 잣대로는 성종도 가정을 돌보지 않은 나쁜 놈이지만 성종은 왕이었고 원하는 여인은 모두 취할 수 있었습니다. 중전은 어짊으로 내명부를 통솔해야 하는 사람이었고요. 세종대왕 시절 후궁이 그렇게 많았고 심지어 세종대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의 나인이었던 사람이었어요. 친정 집안은 시댁에 의해 박살 났고... 그런데도 내명부가 평화로웠죠. 조선 시대 축첩제가 합법이었던 시대에 중전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원인은 명료합니다. 원하는 여인은 모두 취할 수 있는 남편인 왕은 역대급으로 여자를 좋아했고, 본부인은 투기가 강한 성격이었다. 이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원경왕후와 폐비 윤씨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왕의 애정과 자녀의 나이입니다. 태종은 원경왕후를 "정말" 여인으로 사랑했어요-_-;;; 마흔 후반에도 아이를 낳은 원경왕후입니다. 그리고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장성한 아들들의 모친인 그녀를 폐비시키고 새로운 중전을 들이면 후계 구도도 꼬이고 자녀들과도 완전히 척을 지게 되고 하니 그런 무리수를 두기에는 정치적인 부담도 너무 컸던 거죠. 한데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친모라고 속여도 될 정도의 어린 아이였고 무엇보다 성종이 그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식어 버렸었어요. 오늘날에도 뜨겁게 사랑했다가도 이혼하는 커플들 있잖아요. 그거랑 같은 겁니다. 영상에서도 이야기하듯 폐비 윤씨 폐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성종이었습니다. 엄귀인과 정귀인의 나인이 거짓 밀고를 했네 뭐네 다 필요없어요. 성종만 그녀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었으면, 제아무리 인수대비가 뭐라고 한들 절대 지존인 성종만 그녀를 끝까지 감싸면 폐비 윤씨는 중전 자리를 지킬 수 있었어요. 물론 타깃이 소헌왕후가 아닌 외척 세력이긴 했지만 세종대왕이 소헌왕후를 끝까지 감싸자 결국 소헌왕후를 폐비시키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성종만 폐비 윤씨가 기행을 벌여도 감싸면 제아무리 인수대비인들 절대 지존인 성종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며, 심지어 원자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한풀 꺾였을 겁니다. 그런데 성종은 거대 권력 집단의 수장이었고 강력하게 이혼을 원하고 있고 폐비 윤씨는 힘없는 양반가의 딸이었고... 그러니 그녀가 축출당할 수밖에요. 영상에서도 이야기하듯 인수대비vs폐비 윤씨가 아니라 성종vs폐비 윤씨인 겁니다. 1455년: 윤기견의 딸로 출생 *1457년(만 2세): 훗날의 남편 성종 탄생 *1467년(만 12세): 훗날의 남편 성종 공혜왕후와 혼인 *1469년(만 14세): 훗날의 남편 즉위 1473년(만 18세): 공혜왕후가 병약하고 소생이 없자 훗날의 정현왕후 등과 간택 후궁으로 입궁 1474년(만 19세): 첫 아들 낳지만 요절 *참고로 이 해 공혜왕후 사망 1476년(만 21세): 공혜왕후 3년상이 끝나자 임신 중인 데다 성격도 어질고 성종의 총애도 깊은 간택 후궁 폐비 윤씨 중전으로 승격, 연산군 출산 1477~1478년 (만 22세~만23세 사이): 출생년도 불분명한 요절한 왕자 연산군 이후 1명 더 출산 *1478년 훗날의 정현왕후 순숙공주 출산, 숙의 홍씨 혜숙옹주 출산, 숙의 하씨 계성군 출산, 즉 이 시기부터 폐비 윤씨에 대한 발걸음은 뜸해지고 다른 여인 소생 자녀 태어나기 시작, 폐비 윤씨의 투기 바람 시작 *여담이지만 1478년에만 폐비 윤씨까지 포함하면 무려 4명의 여인이 성종의 아이를 낳는 저 위엄-_-;;;; 성종이 얼마나 이 여자, 저 여자 취했는지, 그리고 여인과의 관계를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네요;;; 1479년(만 24세): 연산군의 동생인 왕자 요절, 이후 남편은 자신을 찾지 않고 아이들은 요절하자 갖가지 기행 벌이다 이 해 폐출 1482년(만 27세): 사사 입궁 후 겨우 6년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감정 기복이 큰 역할을 해야 하고 극의 흐름상 좀 더 원숙한 느낌의 여성이 나아서 30대 중후반의 여배우가 연기하는 경우가 많아 이 정도 나이를 상상하기 십상인데 실제로는 겨우 20대 후반의 나이에 사사되었어요. 보시다시피 그 여자 좋아하던 성종이 그녀가 간택 후궁으로 입궁하고 난 후 3년 가량은 오로지 그녀하고 사이에서만 아이를 낳아요. 한참 때 그녀에 대한 총애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네요. 물론 정현왕후는 1462년생으로 입궁 당시 만 11세에 불과해서 합궁까지 기다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성종은 주위 나인들은 얼마든지 취하려면 취할 수 있었어요. 산후 우울증이 맞습니다. 그리고 왜 산후 우울증에 걸렸는지는 십분 이해가 가네요. 아이 셋 중 둘은 요절하고 남편은 날 찾지 않고...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듯 조선시대에 원하는 여인을 모두 취할 수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둔 그녀는 투기를 부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소헌왕후처럼 묵묵히 내명부를 다스리면 자신 소생 아들도 있겠다 중전으로 군림하다 훗날에는 대비가 될 수 있는 것이었어요. 물론 사람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게 그렇게 뜻대로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녀만 소헌왕후 같은 덕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녀 자신뿐 아니라 그녀로 인해 죽어버린 수많은 대신들과 그녀의 아들 연산군의 인생도 크게 달라졌을 텐데 말이죠. 연산군은 그냥 평범한 왕으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사건을 빌미로 왕권을 강화할 만큼 정치력이 있는 왕이었으니 꽤나 명군으로 기록되었을지도요? 연산군 소생 아들도 있었으니 그녀의 손자가 왕이 되고 이후 자신의 후손들로 조선의 왕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사하기까지 걸린 3년의 시간은 그녀를 다시 불러들일지 말지를 고민한 시간이 아니라 원자의 생모이기에 살려줄지, 아니면 그렇기에 사사할지를 고민한 시간이었습니다. 남자들도 위리안치당한 후, 귀양 간 후 고민하다 사약 내리는 거랑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그녀를 왜 불러들입니까? 왕인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여자입니다. 마음도 다 식었고 그녀를 불러들이면 정현왕후는 어떡하고요? 성종은 후자를 택했고 제가 왕이었어도 현실적으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거했을 겁니다. 엄귀인과 정귀인의 모함, 인수대비의 사사 제안, 다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최종 결정은 절대 지존인 성종이 내린 겁니다. 성종이 그렇게 여자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왕도 아니었고 기록을 보면 오히려 강하고 똑똑한 왕이었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 내린 겁니다. 왜냐? 이제 그녀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사라진 걸 넘어서서 증오로 변해 버렸거든요. 그깟 그닥 힘도 없는 양반가 댁 딸 하나 사사하는 게 뭐 대수입니까? 내가 왕인데...
@내사랑브래드피트
@내사랑브래드피트 3 жыл бұрын
재밌게 읽었어요. 불쌍하고 안쓰럽기는 하지만 넘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네요. 저 같아도 주위 미인들 다 물리치고 나만 찾던 남자가, 나를 외면하고 다른여자에게서 자꾸 자손을 보면 뻑 갈수도...... 그래서 중전은 아무나 하는게 아님. 정서적인 사람보다 소시오패스가 오히려 나을지도.....
@엔젤우먼
@엔젤우먼 3 жыл бұрын
가만히 있던 폐비 윤씨를 그렇게 분노로 치를 떨게 만든 성종의 지독한 바람기와 왕의 불륜을 후궁 제도란 이름 하에 합법화하는 조선사의 남존여비 사회가 가장 큰 원인이죠. 성종의 바람기만 없었어도 폐비 윤씨는 가만히 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면서 내명부나 통솔했을 테고, 왕비로서의 호강을 누릴 대로 다 누리고, 인수대비와 성종 같은 방해 요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나서 왕실 최고 장로로서 아들 연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는 순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엔젤우먼 제가 위에도 썼듯 성종은 원하는 여인은 모두 취할 수 있는 왕이었고 본부인은 투기가 강한 성격이었고... 이게 원인이었던 거죠. 다만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남존여비와 일부다처제(조선은 정부인 자체는 1명이니 축첩제)는 시행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1부 1처제였던 서양권이나 고려와 같은 나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데이터베이스화되어서 관리하는 세상에도 딴집 살림하는 사람은 있기도 하는데 이 때는 비공식적으로는 다들 애인이 있었죠. 사실 일부다처제라는 게 여성에 대한 차별인 줄 아는데 역사 좀 공부해 보시면 이게 사실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근대화 이전에는 남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거든요. 기록도 없는 선사 시대에는 사냥으로 먹고 살아야 했고 이미 이 시대부터 존재했던 전쟁으로 인해 남성 사망률이 워낙 높았거든요. 그런데 근대화 이전, 그러니까 회사에서 문서 작업하면서 여자가 돈벌이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여인에게 혼인 않고 혼자 살라고 하는 건 동네 남자들에게 끌려가서 윤간당하거나 들짐승에게 먹혀 죽거나 몸 팔아서 먹고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남자들도 사냥하다 많이들 죽고 다치는 마당에 여자가 어떻게 사냥을 합니까? 농경 사회가 도래하고 난 이후로도 여인이 할 수 있는 건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죠.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살아야 하던 시절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잡아온 짐승이나 수확물 손질해서 음식 준비하고 남자들 잠자리 상대해 주고 애 낳아주는 것밖에 없었어요.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전세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남자가 우대 받는 풍조가 생겼고, 힘세고 사냥 잘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이 생겨났고,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영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에 자손을 많이 보기 위해 자연스레 일부다처제가 생겨났고 여러 여인 거느릴 수 있는 남자는 재력과 권력을 지닌 남자가 된 거죠. 조금 더 사회가 발달하고 난 이후로도 역모에 휘말리면 남자들은 구족을 멸한다고 할 정도로 많이 죽어나간 반면 여자는 노비로 전락시키는 수준에 그쳤죠. 어차피 여자들은 살려줘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든요.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사회가 꽤나 발달했던 조선 시대에도 여자가 남자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비, 궁녀, 비구니, 무당, 기생, 주막집 운영밖에 없었어요. 다 사회 하층민 직업이고 노비는 사실상 주인 어른이나 남자 노비들의 좋은 먹잇감이고 기생은 애초에 직업 자체가 몸 파는 일, 궁녀는 왕과 혼인한 것으로 치니 남자가 있는 직업, 무당과 비구니는 종교 쪽 일이라 속세와는 인연을 끊은 직업, 주막집 운영은 남자 없이 했다가는 오늘날에도 자영업자들이 주폭에 시달리는데 남자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라는 걸 볼 때 속세와 인연을 끊지 않는 한 남자 없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성폭행을 당할 가능성이 높거나 몸 파는 일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혼자 살면 윤간당하기 딱 좋고요. CCTV와 방범 장치로 치안이 안정된 오늘날에도 혼자 사는 여성들 대상으로 성범죄 많이 일어나는 거 보시면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한마디로 근대화 이전 여자가 남자 없이 산다는 건 성적인 문제나 정서적인 문제를 넘어서 정말 "생존"에 관련된 일이었어요. 제가 박경리의 토지 좋아하는데 거기서도 남편이 가해자 입장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아이 셋 데리고 떠난 여자가 어떻게든 아이들 데리고 먹고 살기 위해 "정말 보리밥 한덩이를 위해 지나가던 장물아비에게 치마끈을 푸른 적도 있었고... " 이런 식의 묘사가 나와요. 이런 이유로 조선 시대에도 체면 따지고 안전이 보장되는 양반가 여성이나 재혼하지 않았지, 일반 백성들은 암암리에 재혼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다 규제할 수도 없고 여자들 입장에서도 남자 없이는 못 먹고 살고 남자들도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절 사별하거나 하면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누구나 처녀하고 재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서로간에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거죠. 시앗은 돌부처도 돌아눕게 만든다고는 하지만 일부다처제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막장 같아 보이는 형사취수제나 서모취수제 모두 부인이 많았던 남자는 애초에 정략결혼이었으니 그 동맹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녀들이 가져온 지참금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부인들 중 미천한 신분 출신 여성도 있었는데 남자 없이 살아야 하는 그녀들이 사회에서 겪을 수모를 막아주기 위해 그녀들을 지켜주기 위해 시행되었던 제도인 겁니다. 폐비 윤씨 폐출 사건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폐비 윤씨입니다. 축첩제가 합법인 시대에 본부인은 어짊으로 다른 부인들을 끌어안아야 했던 것이었어요. 심지어 그녀의 남편은 원하는 여인은 모두 취할 수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듯 왕은 여색을 탐하는 게 오히려 권장되던 시절이었어요. 왕실 번영을 위해 왕손 많이 보라고 일부러 간택 후궁을 들이던 왕실입니다. 다만 하필이면 그 남편이 역대급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는 거. 그리고 본부인은 역대급으로 투기가 강한 성격이었다는 거. 남편은 거기에 완전히 학을 뗐다는 거. (그래도 성종이 그녀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으면 폐출되지는 않았죠) 이게 원인인 겁니다.
@내사랑브래드피트
@내사랑브래드피트 3 жыл бұрын
@@꽃말-y6l 맞아요. 지금 사람들 사고로 역사를 읽으면 안되죠. 저 어릴때도 동네에 암암리에 두집 살림히는 어른들 꽤 됐어요. 동네 어른들 앞에선 쉬쉬하고, 뒤에선 쑥덕거리고.... 불과 얼마전 일인뎇세상이 많이 달라졌죠~~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내사랑브래드피트 지금의 잣대로는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지만 남자들 수명이 더 짧아서 심지어 그 부인들끼리 형님, 동생하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노년을 보내죠... ㅋㅋ 영화 춘희 막이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문정왕후도 중종 사후 관례에 따라 궐을 나가 비구니가 되려던 창빈 안씨 등 몇몇 후궁을 자신이 적적한 마음에 친구 하려고 만류해서 궁에 머무르게 했었고요. 우리가 보기엔 어떻게 남편을 공유했던 여자들을 저러나 싶지만 저 때는 또 축첩제가 합법이라 나이도 비슷하고 처지도 비슷해서 서로 의지할 만한 사람들이 그들밖에 없었어요. 심지어 제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로 알고 자란 분이 있었는데 철이 좀 들고부터는 이상하게 엄마는 외할머니랑 그다지 친밀해 보이지가 않더라는 생각이 좀 들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리고 큰이모랑 큰외삼촌이랑은 자주 연락하고 교류하는데 작은 외삼촌이랑 작은 이모 얘기는 그닥 하지도 않고 명절 때가 아니면 교류도 없고요. 외할머니도 자신이랑 자기 동생을 막 그렇게 예뻐해 주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 어쨌든 자신이 외할머니로 알고 자랐던 그 분이 자기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돌아가셨는데 그제서야 엄마가 진실을 알려주더랍니다. 그 사람은 사실 아버지(제 친구 입장에서는 외할아버지)가 엄마가 어렸을 때 들인 첩이었는데 엄마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친구의 진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사실상 본부인 역할을 했고 엄마 형제들 입장에서도 아버지가 홀로 여자 없이 사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서 그냥 그렇게 데면데면 지내면서 지냈던 거라고요. 무슨 때가 아니더라도 자주 교류하고 친한 쪽은 친형제 지간이고 특별한 때가 아니면 안 만나는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첩이었던 사람 소생 자녀들이었던 거죠. 이런 경우가 지금의 50~60대 이상인 분들의 부모님 세대에서도 꽤나 많았을 겁니다. 시골로 가면 갈수록요.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거죠. 일제 시대 독립 운동하다 사망한 분들도 대부분 남자분들이고 한국 전쟁이랑 베트남 전 파병을 거치며 남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이런 가운데 딸이 시집 못 가면 지금처럼 취업해서 먹고 살 길도 별로 없는데 그런대로 밥이라도 먹고 살 만한 집이면, 비하 발언 아니고 부잣집 딸이면 그런 집에 세컨드로 갈 일은 없고 완전 가난한 집이나 혹시 춘이 막이의 사례처럼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는 딸이거나 하면 그냥 딸을 세컨드로 보내는 게 혼자 늙게 하는 것보다 더 나았던 거죠. 지금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가는 오히려 남성에 대한 차별이 될 겁니다. 전쟁과 사냥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지만 않으면 자연 성비는 남자가 약간 더 많이 태어나는 게 신이 만든 섭리거든요. 결혼 못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해질 겁니다. 심지어 숨겨진 여자 취급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부인이 될 수 있다면 평범한 남자의 첫번째 부인보다 재벌가의 2번째, 3번째 부인 되겠다는 여자들 수두룩할 거거든요.
@박순행
@박순행 Жыл бұрын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종이 어질다는 것은 단순히 만들어진 이미지이고 실제로는 어진 임금은 커녕 소시오패스였을 것이라고 보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임. 연산군이 폭군이 된것도 엄마 없으니 가정교육이 잘 될리도 없을 뿐더러 삐뚤어진 효심 + PTSD 조합으로 폭군이 안되는게 더 이상하지 않았을 까 싶음. 결국 연산군도 어찌보면 불쌍한 인물임. 결국은 성종이 썩어먹을 소시오패스이고 연산군은 평생 PTSD에 시달린 불쌍한 왕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어진 임금을 꼽는다면 세종밖에 없다고 생각함. 장영실처럼 천민이라도 능력만 되면 벼슬을 준다던지... 이런건 어진 모습이 맞음. 하지만 성종이 어질다는 것은 헛소리이고 그냥 신하들이 큰소리 쳐도 다 받아주니까 만만하게 보고 간신배들이 임금 마음껏 휘두르고 나서 '성종은 어진임금' 이러면서 아첨하고 성종은 주요업무 신하들 한테 다 시키고 자신은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이러면서 성종 스스로 이미지관리되고 하고싶은일은 다 하러다니는 소시오패스의 전형....
@kkh1395
@kkh1395 3 жыл бұрын
죄없는 사람도 죄받는 시대가 조선시대.뒤집어 쓰고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ㅎㅎ
@baek6468
@baek6468 2 жыл бұрын
뱀정희 전두암이 시대에도 그랬어요 어디 이씨조선 시대뿐이겠습니까 ~ 님이 모랐을 뿐ᆢ
@guesswho9463
@guesswho9463 2 жыл бұрын
@@baek6468 이런애들은 언제 정신차리나
@정호연-b6d
@정호연-b6d 3 жыл бұрын
궁궐에 사는게 더 지옥일지도 후궁 왕비 한창 나이에 급사한거도 스트레스 원인 각자 사람마다 체칠 성향 다른데 궁궐 왕비로 사는게 이름없는 아낙네 보다 더 불행한 인생일수도
@inyeobseo9369
@inyeobseo9369 3 жыл бұрын
윤씨가 후궁이 된 배경은 모친이 신숙주의 친척이란 점이 작용하였고 후임 정현왕후가 결정된 것도 정희왕후와 같은 파평 윤씨 집안이라서 그렇습니다. 정현왕후가 후덕하고 처세술이 좋은 점도 있었지요. 회묘는 지금도 서삼릉에서 비공개 구역입니다. 경계선이 아니라 경계성 성격장애입니다. 폐비와 비슷한 질투를 보인 원경왕후와 명성황후도 폐위되지 않았는데 성종이 엄했나 봅니다.
@디케이-d3k
@디케이-d3k 2 жыл бұрын
역시 태종의 핏줄들이라 형제도 죽이고 욕망에 야심있긴하나 똑똑한 왕들도 많이 배출되었네
@Zzangdukhoo
@Zzangdukhoo 2 жыл бұрын
연산군 폐비윤씨 불쌍함 조선왕 생모 중 사약받고 죽은 경우는 폐비윤씨 밖에 없으니깐
@에델바이스-j9y
@에델바이스-j9y 2 жыл бұрын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도 한때 중전에 올랐다가 폐위된뒤에 사약을 받고 죽었지요
@에델바이스-j9y
@에델바이스-j9y 2 жыл бұрын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도 한때 중전에 올랐다가 폐위된뒤에 사약을 받고 죽었지요
@딩고-c4t
@딩고-c4t 2 жыл бұрын
폐비윤씨만 불쌍하죠 연산군이 그렇게 막장만 아니었으면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남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어요
@비공개채널-r6g
@비공개채널-r6g Жыл бұрын
@@에델바이스-j9y 장희빈은 폐위는 되지 않았습니다. 중전에서 정1품 빈으로만 강등됬죠. 페비윤씨하고 과정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급이 틀립니다
@에델바이스-j9y
@에델바이스-j9y Жыл бұрын
@@비공개채널-r6g 오 그렇죠 중전에서 다시 빈으로 강등됐죠 원래자리로 돌아간거죠^ 근데 왕비자리에서 폐위가된건 맞다고 봐야죠. 폐위란건 어떤 지위에서 내쳐지는걸 의미하거든요. 중전에서 쫒겨난건 사실이니까요.
@빼꼼-r8x
@빼꼼-r8x 3 жыл бұрын
나두 나두 넘죠아~~~
@별이-e4c
@별이-e4c 2 жыл бұрын
그닌까초심을 생각하고 살아야지~~
@로버트레드포드-p6y
@로버트레드포드-p6y 3 жыл бұрын
폐비윤씨도 그렇고 장희빈도 그렇고 참 안타깝죠. 아들을 낳지만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을텐데 하긴 왕비 였다 사랑 잃고 내쳐진 신세면 살아 무엇하리요 만 그런 죽음 만도 못한 수모를 견디며 살고 있었던건 자기가 낳은 아들이 언젠간 왕이 되어 지원극통 한 한을 풀어줄날이 올거란 희망이 있기에 삶을 연명 했을텐데 그래도 신하들은 윤씨를 지켜주려 했건만 사도세자처럼 윤씨도 광증으로 해석해야 하는건지 어찌 겁없이 지나친 행동을 했을까 안타깝고 측은 하고 연산군도 불쌍하고 경희의료원 자리 회묘 근처에 연화사 라고 보이는데 지금도 윤씨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글을 본 적 있습니다. 윤씨의 외모는 노국공주를 닮았다는 설 도 있고 암뜬 이뻣던건 사실 같죠.
@맑음천사
@맑음천사 2 жыл бұрын
야사에 의하면 등장하는 것만해도 주위가 서늘해질만큼의 엄청난 미모였다고 하네요
@kbyoung87
@kbyoung87 2 жыл бұрын
성종 제1계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 제헌왕후, 오늘날의 평범한 부부사이였으면 이해가 되는데 조선시대같은 경우 일부 다처제라....... 성종은 마마보이였다..
@Mosquitocatching
@Mosquitocatching 3 жыл бұрын
얼마나 이쁘셨으면 여신과 비유했을까요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실제 미모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는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장희빈은 외모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자못 자태가 아름다웠다'고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모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죠. 다만 각종 야사에서 미모에 대한 찬사가 있는 걸 볼 때, 중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벼슬아치가 사약 내리러 갔다 사약 받으러 나온 폐비 윤씨의 자태를 보고 감탄했다는 야사 등도 있는 걸 볼 때 이런 야사가 있다는 것부터가, 심지어 그 여자 좋아하던 성종이 한참 때는 오로지 그녀하고만 아이를 낳을 정도로 대단히 총애했다는 걸 봐도 대단한 미인은 맞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hera_avria9265
@hera_avria9265 2 жыл бұрын
I will admit I am a little similar with Queen Jeheon, so I couldn't really get mad at her.
@샤롱-n4n
@샤롱-n4n Жыл бұрын
우왕 내 조상님
@Happy-th5fv
@Happy-th5fv Жыл бұрын
잘은 모르지만 질투심 보다는 현대 의학으로 약간의 기복과 우울증 불안증 같네요.여성 이라면 누구나 질투는 있죠ㅡ
@비올라-Asd678
@비올라-Asd678 9 ай бұрын
왕이 사약을 내려 마시고 죽은 여자들ㅡ 김씨 ㆍ 윤씨ㆍ 장씨
@셩셩셩k
@셩셩셩k 3 жыл бұрын
웰컴백!! 어디계셨어요!
@권헤라-i6q
@권헤라-i6q 2 жыл бұрын
성종 나쁜놈이지 지금같으면 성종 죄가 더 큼 살인자
@맑음천사
@맑음천사 3 жыл бұрын
저 시대에는 정신질환 에 대한 인식이 잘 없어서 행실이 사악하다고 하여 투기죄로 폐출 사사 시켰나 봅니다
@Ijv_6
@Ijv_6 Жыл бұрын
세조가 그랬듯 그 후손들도 끝이 나쁘네요.
@정수영-f7s
@정수영-f7s Ай бұрын
에휴...사심때문에 연산군도 미남이엇다하니 상당한 미인이엇듯..
@김민수-t2j8u
@김민수-t2j8u 2 жыл бұрын
지금 나의 삶이 연산군과 다를바없다
@정호연-b6d
@정호연-b6d 3 жыл бұрын
모든 원이 불행 씨앗 세조 단종이 그대로 승계 했으면 세종시대 승계된 집현전 학자들 새로운 르네상스 도약할 기회 있어는데 세조 단종 보좌하면서 왕실 어른신 남아다면 두아들이 비참하게 병으로 안죽고 천수누리고 살아게죠 양녕대군 정도 수준 방탕한 짓 하고 다녀도 구지 선조 아들 처럼 사람만 잔인하게 안죽이다면 지장없다고 생각합니다
@Ijv_6
@Ijv_6 Жыл бұрын
저도 조카를 죽이고 조카사위까지 거열형으로 죽인 후 왕이된 세조가 업보로 자식들 일찍 죽었다고 봐요. 정통성이 사라진 조선의 앞날이 이때부터 난장판이 된게 아닐까 합니다.
@이도형-x9x
@이도형-x9x 3 жыл бұрын
참고로 용안 손괘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게 ... 용안 손괴 했으면 폐출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 할 정도입니다 실록을 통해서 보면 윤씨의 폐출 원인은 지금 법정에서 다퉈도 양육권 빼앗길 정도의 막나가는 언행이 정말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요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없던 당대 현실을 반영해도 .... 폐비 자신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kyp5175
@kyp5175 2 жыл бұрын
무식하고 용감하면 이기적이고 잔인하지,,
@박정민-o5o
@박정민-o5o 2 жыл бұрын
진실은 당사자들만 아는거요.
@김미애-i3j
@김미애-i3j 6 ай бұрын
엘리베이터 비슷한 모습 채경 안간다. 제자리 버리고 버티기 버렸다. 귀구멍 파서 염증 유발 닫다.
@정재웅-b8u
@정재웅-b8u 3 жыл бұрын
성종 싸대기 때린 폐비윤씨(재헌왕후)
@박정민-o5o
@박정민-o5o 2 жыл бұрын
아니면 벌 받을래요.
@SayoungS2
@SayoungS2 3 жыл бұрын
저어... 말씀하시는 것이 경계선이 아니라 경계"성" 인격장애인 듯 합니다. 확인부탁드립니다.
@Namm22222-j
@Namm22222-j 2 жыл бұрын
검색해보니 경계선이 맞아요 찾아보세요
@아그래요-t3t
@아그래요-t3t 2 жыл бұрын
보더 라인 입니다 라인은 선이잖아요 성격의 경계선이 모호해서 왔다갔다 한다고 해서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부르는 거에요
@이도형-x9x
@이도형-x9x 3 жыл бұрын
참고로 우리나라 사극 불패 소재 중 하나가 폐비 윤씨죠 설중매는 말할 것도 없고 한명회도 그렇고... 왕과비는 정태우 단종 시기 너무 인기가 없어서 조기 종영 이야기 나왔다가, 태조 왕건 제작이 덜 되어 어쩔 수 없이 폐비 시대까지 연장했는데 이때부터 시청률이 상승해 연산군 시기까지 갔죠 단 한 건 빼고 최소 중박은 치게 한 소재죠 하나는 뭐였냐고요? 고주원 구혜선 오만석이 주연한 왕과 나 대본도 안 좋고 캐릭터 해석도 별로고 주연 배우는 오만석 빼고 연기도 안 좋고 .... 성공하면 기적인 수준이었죠 경쟁작은 이산인데 역사 왜곡 덩어리 이산만 흥했죠(가장 큰 왜곡은 정순왕후. 80 - 90 년대부터 정순왕후가 저 정도로 악독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가 사학계의 중론이었죠 이리 저리 기웃대며 간본다는 정도는 몰라도요)
@이도형-x9x
@이도형-x9x 3 жыл бұрын
그리고 정귀인과 엄귀인의 모함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후궁과 왕비의 관계는 신하와 왕 관계의 여성 버전이라 보면 됩니다 왕비가 후궁을 투기하면 ... '중전 체통을 좀 지키세요!' 로 끝나기 마련인데 ... 후궁이 왕비를 투기하면 ' 저 못된 년을 매우 쳐라'로 끝나기 쉽습니다 애초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정말 했다면 저 두 후궁들도 목숨 걸고 저걸 했다고 봐야 합니다 엄귀인이야 양반 소생이지만 정귀인은 천민 소생이라 그 정도 까지만 해도 분에 넘치게 성공한 겁니다 그런 그녀들이 무엇하러 왕비를 음해하겠습니까? 왕비가 피해망상으로 달려드니 자기들도 살자고 한 일이라 봐야 합니다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중전과 후궁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죠. 드라마에서는 흔히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를 강조하려고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다소 무례하게 구는 장면도 넣기는 하는데, 그랬다가는 당장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장렬왕후부터가 아무리 자신이 총애하는 여인이었어도 내명부 전체에 대한 도전장이라고 보고 장희빈의 종아리를 쳤을 겁니다. 말씀하시듯 정귀인과 엄귀인이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건 오히려 폐비 윤씨 사건을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하고 싶었던 연산군의 누명이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죠. 다 떠나서 당시 대비가 그 카리스마 짱짱인 인수대비입니다;;; 감히 후궁 따위가 중전에게 대든다? 법도에 밝고 꼰대 중의 꼰대 기질이 강했던 인수대비가 오히려 나서서 그녀들을 응징했을 겁니다. 내명부 전체에 도전장을 낸 것으로 보고요. 영화 사도는 고증에 상당히 공을 들인 영화인데 여기에서 숙의 문씨가 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에게 말대답을 했다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인원왕후(대비)가 분노해서 세자빈과 영빈 이씨가 보는 앞에서 회초리를 치는 장면이 나오죠. 이거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실화입니다. 미천한 신분 출신 후궁임에도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다른 후궁이 말대답했다 대비의 분노를 살 정도로 위계질서가 강한 조선 내명부에서, 일개 후궁들따위가 대비에게 가서 중전을 모함한다? 오히려 그 후궁들이 폐출감입니다. 인수대비부터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폐비 윤씨를 모함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폐비 윤씨만 성종이 자신들을 총애한다는 이유로 해치려고 하지 않으면요. 님도 말씀하시듯 엄귀인은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이지만 자녀가 공신옹주 1명뿐이었어요. 물론 정현왕후도 중전으로 승격된 시점에는 아들이 없기는 했지만, 평생 성종과의 사이에서 저 공신옹주 1명밖에 못 낳았어요. 귀인까지 오른 건 그녀가 간택 후궁이라 숙의를 달고 들어와서 아이를 낳은 공 등으로 귀인까지 오른 것으로 추정되고요. 성종이 그닥 많이 총애한 여인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왕의 총애만으로 중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기는 하지만 폐비 윤씨가 폐출된다 한들 그녀 스스로가 남편 성종이 자신을 찾는 발걸음이 뜸하다는 걸 아는데, 자신이 중전이 될 가능성도 그닥 없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귀인 정씨는 성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기는 했지만 님이 말씀하시듯 천민 출신이었죠. 오히려 왕의 눈에 들어 여기까지 온 거에 대해 감지덕지하며 왕실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 그녀 인생의 베스트 초이스일 여성이었습니다. 자세히 어떻게 승은을 입은지는 모르겠지만 '숙용 정씨(귀인 정씨)의 동생과 인수왕 대비전의 시녀인 상궁 조씨의 동생을 다 영구히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가하라고 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 신분은 천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걸 볼 때 나인이었다가 승은을 입었을 것 같네요. 천민 출신인 자신이 폐비 윤씨가 없다고 한들, 자신에게 아들이 있어도 그녀가 중전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쳤다고 살벌한 왕실 속에서 절대 지존 다음인 중전을 음해합니까? 심지어 그 중전에게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이 다음 왕이 되고 그녀는 대비가 될 텐데요? 지금이야 남편인 성종이 자신을 총애한다고 해도 왕이 죽고 난 후 그 아들에게 능지처참당한 후궁들이 한둘입니까? (ex: 후궁은 아니고 중전이었지만, 그리고 자신도 이미 죽은 상황이었지만 태조 사후 태종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신덕왕후, 세종 사후 단종의 유모라는 이유로 세조에게 죽은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귀인 정씨보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인조 사후 제거된 인조의 후궁 귀인 정씨, 영조 사후 정조에게 제거된 숙의 문씨 등) 완전 연산군이 씌운 누명이 정설인 것처럼 굳어진 비운의 여인들이죠. 딱히 그녀들이 어떤 인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폐비 윤씨를 음해하기는커녕 숨죽여 지냈을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그 연산군에게 "정말로" 맞아 죽죠...
@이도형-x9x
@이도형-x9x 3 жыл бұрын
@@꽃말-y6l 숙의 문씨가 영빈에게 말대답했다고 하는 건 대천록의 기록입니다 실록이 아니라 그리고 숙의 문씨는 영조 28년의 그 이유 모를 선위 파동 2년 후 옹주를 낳고 직첩을 받으면서 역사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러니 말대답 사건은 정조 즉위 후 숙의 문씨가 몰락하고 난 후 만들어진 야사로 보여집니다 - 생전 싸가지가 없었을 가능성은 별개로 하고 현대로 비유하면 이제 좀 잘 나가기 시작한 대리가 회사 넘버 4고 사실상 2위인 임원한테 대들었다는 건데... 그걸 그냥 둘 임원이나 사장이 있을까 합니다
@이도형-x9x
@이도형-x9x 3 жыл бұрын
@@꽃말-y6l 정귀인 엄귀인이 선택된 건 폐비 윤씨 가문에서, 덕종의 후궁, 즉 윤씨에게는 작은 시어머니가 되는 권씨 집에 투서를 넣은 사건에서 기인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거기서 윤씨가 정씨 엄씨를 언급했거든요. 물론 두 사람에게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겠지요
@꽃말-y6l
@꽃말-y6l 3 жыл бұрын
@@이도형-x9x 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네요;;; 지금 찾아보니 그녀들의 비운도 비운이지만 정귀인 소생 아들 2명은 연산군의 명으로 1명은 자기 어머니인 줄 모르고 진짜로 어머니를 마구 쳐서 죽음에 이르게 했고 다른 1명은 어머니인 줄 알고 안 때리려고 했지만 결국 연산군이 마구 쳐서 때려 죽였고, 이 둘도 유배 보낸 후 사사했네요. 딸 정혜옹주도 함께 유배 보냈다 여자라 죽이지는 않아 중종반정 이후 옹주의 지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중종반정 다음해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일찍 죽었고요. 엄귀인의 딸 공신옹주는 역사패치에도 관련 영상 있죠.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본인도 연산군에 의해 유배 가고 거기서도 남편에 대한 예를 다해 사람들이 칭송했다고요. 그런대로 오래 살며 중종반정 이후로는 편하게 산 것 같기는 하지만 썩 아주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인생이네요.
@pele2434
@pele2434 3 жыл бұрын
@@꽃말-y6l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 숙종실록 1686년 12월 ​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 숙종실록 1686년 12월 ​ 내전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 숙종실록 1686년 12월 이러한 기록을 보아 장희빈이 실제로 인현왕후에게 불경죄를 많이 저지른 것은 실록에 기록된것이라 사실입니다. 후궁이 중전의 신하라고 해서 무조건 예의를 지키는것은 아니었죠. 경종을 업신여긴 노론만 봐도 그렇고 이방원을 때린 일개궁녀만 봐도 신분제가 있다고 거기에 순응하는 사람만 있는건 아니니까요 물론 폐비윤씨의 경우는 정귀인과 엄귀인이 억울한거고요
@러미오
@러미오 3 жыл бұрын
@아그래요-t3t
@아그래요-t3t 2 жыл бұрын
시대상이 여성에게 극도로 불리했으니까 생존먼저 해야했는데 배운게 없고 머리가 나쁜듯. 생각을 길게 못해서 사달이 남. 친정빽이 없으면 정치적인 자기편을 많들던가 그 머리가 안되면 아들이 세자가 될때까지만 버티면 자기편이 생김. 고새를 못참아서 나대다가 살해당함.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 됨
@1프로부족한미모
@1프로부족한미모 2 жыл бұрын
경상도윤씨구나 김거니처럼점쟁이를좋아했네 그래도연산군이엄마를닮앗네
@김미애-i3j
@김미애-i3j 6 ай бұрын
낙하 지영과 비슷한 여인 닫다.
@baek6468
@baek6468 2 жыл бұрын
아들 낳았다고 방자하게 굴어 화를 차초했었네 가난한집 딸이어서 ᆢ 부잣집 딸같음 책도 많이 읽고자라서 여유로왔을 텐데 ~ 저런성격이 다 여유로움에서 오는거다
@90j조은진10
@90j조은진10 3 ай бұрын
2013.기미월에74년생.이기영.치드만. 왜이럼 2025.을사.철인왕후.윤씨로.일부러그랫구만
Officer Rabbit is so bad. He made Luffy deaf. #funny #supersiblings #comedy
00:18
Funny superhero siblings
Рет қаралды 16 МЛН
🍉😋 #shorts
00:24
Денис Кукояка
Рет қаралды 3,8 МЛН
Как подписать? 😂 #shorts
00:10
Денис Кукояка
Рет қаралды 8 МЛН
Officer Rabbit is so bad. He made Luffy deaf. #funny #supersiblings #comedy
00:18
Funny superhero siblings
Рет қаралды 16 МЛ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