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대형옹관의 미스터리 - 영산강의 고대 왕국 (KBS_2001.09.22.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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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저널 그날

KBS역사저널 그날

Ай бұрын

◼︎ 전남 나주시 반남면 용연마을에는 고대옹관의 파편들이 많이 남아있다. 전남 나주시 오량동에서 옹관가마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대규모 옹관 생산단지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당시에는 추가장으로 인한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해 목관이 옹관으로 대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나주시에 있는 내륙 등대를 통해 영산강 유역에서 활발한 국제해상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가지 유물들을 통해 나주지역에 백제가 아닌 다른 지배세력이 있었음이 밝혀졌으나 왕국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사 #역사 #역사스페셜 #역사저널

Пікірлер: 482
@user-dm1wi4th3z
@user-dm1wi4th3z Ай бұрын
2024년에보고계신분있다면 책보고검색해서 영상보고오시면 이해가 더 잘될껍니다. 우리가알고있는 백제라는 이지역이 백제가아니라는사실
@team4kings-
@team4kings- Ай бұрын
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잊혀지고 왜곡되었던 역사의 진실이 점점 드러나는듯 합니다.
@도b끼자국H모음crI
@도b끼자국H모음crI 6 күн бұрын
↾🍰
@NAYA_ESTJ
@NAYA_ESTJ Ай бұрын
2001년도 방송이네요. 지금 2024년인데 새롭게 업데이트해서 새로운 역사스폐셜 방송을 만들어주시길 고대합니다. 영산강 유역에 추가 발굴 조사된 내용들이 많으니 업데이트된 방송을 해주세요
@kwonjames6651
@kwonjames6651 Ай бұрын
싫어요
@NAYA_ESTJ
@NAYA_ESTJ Ай бұрын
@@user-tj7ht7sp3n 저기요. ㅋㅋ 일본관련 유물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의 유물이고요. 일본보다 앞선 시기의 유물들입니다. 나주지역 사람들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가서 한반도 도래인이 된 것은 까먹으셨나요? 그리고 일본인 무덤은 2개뿐입니다. 나주의 변방을 지키는 무장의 무덤이였고요. 고대 마한,금관가야와 일본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는건 기본 상식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절입니다. 그많은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주하면서 일본에서 많은 유적을 남겼고, 일본 역시 한반도의 영향을 절대 무시못합니다. 일본이 고대 유적을 비공개하는 것은 바로 한반도 세력의 영향을 인정하기 싫은 것때문입니다. 일본고사기 기록에 금관가야의 왕이 넘어가 규슈에서 아소산에서 도래인들을 규합해 군대를 만들고 규슈전역과 오사카까지 정복해 일본 최초의 덴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본은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일본보다 나주 영산강 유물과 유적은 일본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을 알 수 있으니 더욱 공개해야하고요. 일본 교토대 사학과 교수가 밝헜던대로 3~6세기 인구증가율이 전세계 평균의 5배를 넘는 폭발적인 인구증가 역시 한반도 도래인들이 규슈와 간사이 지역에 일본 원주민들 인구에 근접할만큼 많은 수의 한반도 도래인들이 살았다는 간접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일본의 야마토 정권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며, 한반도 도래인들의 기반을 통해 백제 역시 쉽게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것이죠.
@NAYA_ESTJ
@NAYA_ESTJ Ай бұрын
@@user-tj7ht7sp3n 일본관련 유물이 아니라 일본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일본관련 유물이라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딴짓만 하고 사니까 제대로 아는게 없더냐? 방송불가? 니가 뭐라도 되냐? 외부공개를 안한다고? 이미 외부공개된 자료들인데 니가 뭘 안다고 떠들어?
@kristax6803
@kristax6803 Ай бұрын
@@user-tj7ht7sp3n 그럴줄 알았습니다. 학술적으로 연구하면 좋겠죠.
@NAYA_ESTJ
@NAYA_ESTJ Ай бұрын
@@user-fc8nf3bk7p 고분들 발견당시 뉴스, 방송내용 다 확인했지만 일본보다 후대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본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겁니다. 일본거다? 일본식 유물이란게 정의가 뭔가요? 토기부터 무덤양식,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들 전부 영산강 유역의 유적이 훨씬 앞선 시기입니다. 일본인 무덤은 단 2기뿐이였고, 고분 역시 왕의 고분보다 작았고, 가야와 경계지역에서 나주지역을 방어했던 지역의 고분입니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한반도식이라고 일본학자도 인정하고 있는데 님은 무슨 근거로 일본식이라고 떠드는것인지 의도가 궁금하네요.
@user-yc4oj5gg5c
@user-yc4oj5gg5c Ай бұрын
난 국민학교 시절 해남에서 살았는데 학교가는 길이 바닷길로 가면 좀 지름길이라서 바닷가로 다녔는데 산이 바닷물에 침식되어 항아리 하나가 보이고 그항아리가 깨지면서 그안에서 사람 뼈가 보였는데 남자아이들이 해골을 꺼내서 축구차듯이 차니. 깨저버린 기억이 납니다 이런 장례문화가 있었다니 그 지역에서 살았으면서 영상보고 알았습니다
@user-dh5nr8ho8z
@user-dh5nr8ho8z Ай бұрын
유물보관을 뭇했군요 ㅎㅎ
@user-co7dl4rh2b
@user-co7dl4rh2b Ай бұрын
아이들이 죽으면 항아리에 넣어뚜껑을 닫아서 묘는 쓰지안고 집푸라기로 덥어놓은 것을 초분라 했어 습니다 그런곳을 지나갈려면 머리가 쭈빗쭈빗 했죠 60년대 그랫어요
@user-yc4oj5gg5c
@user-yc4oj5gg5c Ай бұрын
@@user-co7dl4rh2b 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user-lr5bj1cp3h
@user-lr5bj1cp3h Ай бұрын
남도 전역에잇엇어요ㅡㅡ해남ㆍ나주 ㆍ영임. 만 잇던게 아니고ㅡㅡ보성 ㆍ고흥. 뿐 아니라 흥 ㅡㅡ 내륙한가운데서도ㅡㅡㅡ보성강유역과( 화순 사평. 동복 능주 보성문덕. 복내. 순천의 주암 ㆍ송광. 별양 해롱 낙안ㅡㅡ순천시 동천 유역의 . 서면ᆢ 섬진강 유역의. 곡성. 서콕 죽콕 ㆍ 옥 과 구레에서도. 경지정리전에 아주 흔하게 보던 장례 형태임ㅡㅡ 경지정리가 파괴함ㅡㅡ가마 ㆍ옹관 묘ㆍ 고인돌 파괴는 ᆢ경지정리. 후로 로 ㅡ근 60프로가. 파괴 사라짐ㅡㅡㅡㅡㅡ(((시골 우리집에도 거대고인돌 4기군. 모여잇어ㅡㅡ돌의 형태 재질이 전혀다름 ㅡㅡ 바위가 이동해온겆--작은 마을에. 지금도 20기이상 있어ㅡ신고는 노 ㅡ시간가면서 추가파괴중ㅗ요즘은 중장비가 원인)ㅡㅡㅡㅡ남해ㅡ 초고대 문자도. 석각도 파괴ㅡ---------ㅡ국 가( (((해방후 친일파와 추종세력들이 권력장악후ㆍ파괴ㆍ 방치 ㆍ방관ㅡㅡ역사논쟁 ㆍ생존게임)))
@user-ze9xe1ow9t
@user-ze9xe1ow9t Ай бұрын
그게 곧 유물이자 유적. 현실적으로 더 피부에 와닿네요
@user-dk8mr4zv3t
@user-dk8mr4zv3t Ай бұрын
나주만 아니고 해남에서도 발견됐어요 제가 어려서 산에가 우연히 발견됐어요 출토물을 해남 군청 공보실에 갔다주었는데. 연락은 없었어요
@user-tn4qy3mm2p
@user-tn4qy3mm2p Ай бұрын
진짜에요?
@user-wv6nv5jo2p
@user-wv6nv5jo2p 25 күн бұрын
@@user-tn4qy3mm2p 나주보다 아래쪽에는 당연히 백제영향권에서 더 멀어졌겠죠
@user-ks4xe1rf8k
@user-ks4xe1rf8k 3 күн бұрын
연락 없었으면 아닌겁니다. 어르신
@user-oo8pm2gb6z
@user-oo8pm2gb6z 10 күн бұрын
우와~ 저기 2023년에 반남면, 대안리 등 고분 구경하다 우니나라에 무덤 길이가 23미터(?)나 된 고대무덤을 보고 많이 놀랐는데, 관리가 소홀한 게 안타까웠습니다.
@user-dz2qj5wk7x
@user-dz2qj5wk7x 17 күн бұрын
역사스페셜 정말 좋은 프로였는데 다시 부활하면 좋겠습니다
@Ernesto1218
@Ernesto1218 Ай бұрын
너무 좋은 내용이네요
@user-tn4qy3mm2p
@user-tn4qy3mm2p Ай бұрын
♡♥♡
@user-cm4tg2vs7p
@user-cm4tg2vs7p Ай бұрын
영상을 보다가 요르단 에 갓을때 박물관을 여행햇을때 나주옹관과는 다른 모양의 옹관을 봣는데 시기는 같은 시기엿다면 흥미롭군요 요르단의 유적지는 스타디움 건축흔적을 보면 고대그리스 양식이 많이있엇구요 그렇다면 비슷한 시대가 아닐까요? 연구 하시는 분들 요르단 유적지와 비교연구 하신다다좋겟군요
@user-nc1nw1qz3c
@user-nc1nw1qz3c Ай бұрын
고대 한반도도 중국의 춘추시대처럼 소국이 날립한 형세인 듯 하다. 남부는 백제와 신라가 패권국인 춘추형국. 사실 고대국가 라는게 지금 국가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user-tg4ww6ke8t
@user-tg4ww6ke8t Ай бұрын
같은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거임 같은 정서 같은 문화 인식 언어를 공유한 그룹 그런 의미에서 고대중국은 고대한국과 진짜 전혀 다른 그룹임
@us-sdf
@us-sdf Ай бұрын
당연히 다르죠 역사기본기죠 왕국발생단계 부족국가(도시국가 단계) -> 연맹왕국 (왕을 부족장들이 선출하는 단계) -> 고대국가 (부자상속제 즉 하나의 왕조가 등장하는 단계) 이거 외우시고 보시길 이단계는 연맹왕국을 말하조 백제 남부지역을 백제가 아닌 또다른 국가들의 모임이 있었고 백제가 세력이 강성하면 포섭됐다가 약해지면 독립되는 그 단계임
@user-st9vh6yx2d
@user-st9vh6yx2d Ай бұрын
재밋당
@user-tn4qy3mm2p
@user-tn4qy3mm2p Ай бұрын
♡♥♡
@user-lc6kn5rd4o
@user-lc6kn5rd4o 3 күн бұрын
항아리 관은 들어보긴 한 거 같은데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또 새롭네요
@user-eo9vw1so9r
@user-eo9vw1so9r Ай бұрын
고대 무덤을 체계적으로 발굴 역사가 왜곡 되지 않게 하는것이 이땅에 후손들의 의무당
@user-er5xi5vl3h
@user-er5xi5vl3h Ай бұрын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베트남 즉 그 당시의 (월족)들의 옹관묘와 비슷하네요. 왕관의 형태도 미얀마 및 베트남 쪽의 형태와 비슷한것 같습니다. 이 옹관묘에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나주 지역에 또 다른 왕국이 있었다면, 이는 가야의 고분처럼 반드시 밝혀져야 할것입니다.
@user-dk9cs2rj4k
@user-dk9cs2rj4k Ай бұрын
아뇨 나주 지역, 광주 지역같은 전남지역은 이미 연구가 많이 진행돼서 대충 시기적인 출토 연대나 구분이 현재는 되고 있습니다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1930년대 까지 3개주는 우리말 사용? ㅡ 다음 검색 칭기스칸 발해왕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다 ㅡ 다음 검색
@cijjeehh2302
@cijjeehh2302 Ай бұрын
유골 DNA는 일본계로 나왔죠?
@user-dk9cs2rj4k
@user-dk9cs2rj4k Ай бұрын
@@cijjeehh2302 대부분 유골은 산성 토양으로 녹아서 못찾는다ㅜ보면 됨
@kwonjames6651
@kwonjames6651 Ай бұрын
아따 결국 동남아서 올라온 사람들이 나주 정착해서 소왕국세웠다가 백제한테 복속당했당께요
@user-zr6tv8qw1v
@user-zr6tv8qw1v Ай бұрын
3:24 젊은 사람들 이쪽으로 와서 도와주세요! 3:35 3:37 3:42 3:47 "어-화" 제가 당시 중1이었는데 이거 본방으로 봤는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무거운 것을 들어 나를 때 저의 기합이 "어-화"랍니다^^ 역사스페셜은 역사 뿐만 아니라 무거운 거 드는 방법까지 저에게 가르쳐준 셈이네요^^
@parkjake1
@parkjake1 Ай бұрын
도와.도와 했어요 우린.
@user-bd9xe3im2m
@user-bd9xe3im2m 20 күн бұрын
이런 것은 계속 연구해야 하는데 기존의 식민사학과 모순되니깐 사장되버리고 마네요~ 씁씁합니다. 백제사 학자 양심고백 좀 하시죠~ 백제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소? 부여가 그 부여고 웅진이 그 웅진이요?
@totorangnarang
@totorangnarang 17 күн бұрын
당연 아니죠. 이것이 합리적인 결론.
@ghkd5241
@ghkd5241 14 күн бұрын
어딨긴 유물 유적이 말해주잖아ㅋㅋㅋ
@poruz-6095
@poruz-6095 Ай бұрын
드라마 근초고왕편을 보면 백제도 소국으로 시작하여 정복활동을 통해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youngcho2182
@youngcho2182 Ай бұрын
백제전에 어떤 부족이 살고 있었을까 궁금 하네요~!
@kbclean7785
@kbclean7785 Ай бұрын
마한이쥬
@kbclean7785
@kbclean7785 Ай бұрын
韓족
@NAYA_ESTJ
@NAYA_ESTJ Ай бұрын
마한이 있었고 마한 전체를 진나라라고 자칭했습니다.
@Dae-Dong-I
@Dae-Dong-I Ай бұрын
진짜 역사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서 댓글 남깁니다. 의문투성이인 한민족의 역사.. 진짜 한민족의 역사에 다가가시고 싶으신 분들은 sumin park 고대사, 책보고님 영상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문학으로 당시 고대 수도의 위치 기록을 보면 고구려 - 몽골 일대 백제 - 북경 일대 신라(초기) - 중국 동부 양자강 일대 신라(후기) - 한반도 일대로 나옵니다. -백제의 중심은 북경과 산동 반도입니다. 백제 귀족 성씨 8개 중 대다수가 현 산동 반도에 있습니다. 백제는 패망 후 열도로 건너가 신라+가야+빙하기 전 건너온 고대 한반도인을 통합해 '일본'을 만듭니다. 당시 일본 열도의 가장 강했던 세력이 신라, 가야의 '철기병'이었는데 여기에 건너온 백제인들이 추가로 '철기마병'까지 운용해 지배 세력이 됐습니다. 교토 쪽에 있는 '나라'현도 우연이 아닙니다. 이 나라 현은 신라-가야 세력이 지배하다 열도로 온 백제가 지배하게 됩니다. 또한 일본어의 뿌리는 백제어입니다. -'발해'라고 부르시면 안 됩니다. 이는 한족이 '진국', '후고구려'를 낮추어 부르던 말입니다. '대진국'이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역사서인 '고려사'에서는 '고려는 동서가 2000리 남북은 1500리'로 '동서가 남북보다 길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교과서에선 남북이 더 길다고 가르칩니다. 고려 역시 진짜 강역은 한반도와 만주는 말할 것도 없고 북경과 산동 반도 이남까지입니다. -예맥(우리) 동호(선비[수, 당]-거란[요]-몽고족[원]) 숙신(말갈-여진[금]-만주족[후금,청])은 모두 한민족의 갈래이며, 원나라(동호)와 금-청나라(숙신)가 들어서면서 형, 동생의 관계가 역전됩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몽골이 다 쓸어버리던 와중에 괜히 고려만 남겨둔 게 아닙니다. 또 훗날 후금(훗날 청)이 '뿌리를 잊고 이민족에게 사대하는' 조선을 정신 차리게 한 것도 절대 굴욕이 아닙니다. -'여진'이 아니라 '주션Jurchen'이란 발음이 맞습니다. 한문을 그대로 읽다보니 여진이라고 잘못 읽게 된 겁니다. Jucrchen과 Josun이 발음이 비슷한 이유는 (고)조선에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여진족은 대한민국(조선)을 여진족 파벌 중 하나로 인식했습니다. 때문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도와줬습니다. -청 건국자 누르하치의 조상인 먼터무는 이성계의 부하 이지란과 6촌 사이이고, 먼터무는 스스로 이성계를 섬겼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은 129기의 고분군(후한 묘 7기, 북조 묘 2기, 당 묘 33기, 요 묘 33기)에 아파트를 지어 역사를 지우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역사 유물인데 왜 보존하지 않고 그 위에 콘크리트 붓기 바쁠까요? "상식적으로 다가가면 답이 나옵니다." 또 '낙랑군 조선현 사람 무덤'이 '북경'에서 나왔습니다. 식민사학자+일본+한족은 낙랑군이 현 '평양'에 있었다는데.. 무덤은 어째서 '북경'에서 나오나요? 한족, 일본은 과장이나 왜곡이어도 '좋은 건 다 자기네 거'라는데, 대한민국 주류 사학계는 '환단고기와 한민족의 대륙 고대 국가는 환빠'랍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 주류가 되는 사람들의 실태입니다. -일본 열도와 대륙에 사는 한민족의 갈래, 조선족, 고려인 모두 몇만년에서 몇천년을 함께 살아왔고 떨어진지는 고작 몇백년 밖에 안 됐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스스로를 중국인, 일본인 등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몽골과는 통일 후 연합해야 합니다. -일찍이 우리 한민족(동이족:동쪽의 큰 활을 든 민족)은 동아시아에서 뛰어난 역사(홍산 문화)를 지닌 민족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됩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날진 모르겠지만 진짜 역사를 알고 있는 이상 올바른 역사를 알리려는 노력은 해봅니다. 대한민국 만세.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1930년대 까지 3개주는 우리말 사용? ㅡ 다음 검색 칭기스칸 발해왕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다 ㅡ 다음 검색
@user-zj5vx3dh5f
@user-zj5vx3dh5f Ай бұрын
평양 아닌 고구려에도 경주 아닌 신라에도 강성한 지방의 독보적 호족세력은 있었지요 가야쪽은 더욱 그렇고요 딱히 백제만의 문제는 아님다 옹관묘제는 영산기ㅏㅇ 유역에만 있었던 것 아니고 전북 충청지역에도 산재되 있었지요 능산리 고분군에도 옹관이 여러곳에 쓰였음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답글 5개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user-vn2ec7ob2c 한자로 돼 있는걸 번역한게 엉망이네 ㅋㅋㅋ
@user-hw4qy2vh2d
@user-hw4qy2vh2d 28 күн бұрын
아~ 우리 민족의 진실한 역사를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돌아가보고 싶습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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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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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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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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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user-gd9fb1jc6y
@user-gd9fb1jc6y Ай бұрын
해수면~~~날씨가~~~서안 해양성기후 였을수 있습니다~~~실크로드도 초원지대가 많았다고하죠~~~몽골기병들이 말타고 뻔질나게 다녔겠죠~~~(풀먹는 몽골말)
@no_name_fifa_mobile
@no_name_fifa_mobile Ай бұрын
23년 동안 바뀐 건 없나요
@yj-rn2ow
@yj-rn2ow Ай бұрын
일본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동일한 옹관 77개가 나왔어요
@user-pe5my6kd6s
@user-pe5my6kd6s Ай бұрын
오 전문가다
@user-jq4tg2bu1u
@user-jq4tg2bu1u Ай бұрын
어떤 왕국일까!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왜국임. 광개토 대왕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을 하자, 신라가 왜를 한반도에 다시 불러들인거임. 이것 때문에 백제가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거. 신라가 왜를 불러들인 이유는 고구려와 싸우라는 목적임.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 하나만 상대하다가 다시 신라 백제 왜 3국과 대치해야 할 상황이니 남진할 엄두를 못냄. 이렇게 다시 들어온 왜국이 바로 임나임. 이후 신라 진흥왕때 몰살당함. 이때의 참상이 일본서기 흠명천황 23년조의 기록에 나와 있음.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키고 관가를 불 태웄으며 임나의 남녀노소를 모조리 찢어죽였다는게 일본서기의 기록임. 일본 천황이 이 사건으로 병을 얻어서 결국 죽게 되고 유언은 임나를 수복하라였음. 신라에게 병탄당했다는 명확한 증거.
@onlibertykevin8063
@onlibertykevin8063 Ай бұрын
왜. 그걸 몰러., ..
@nature5120
@nature5120 Ай бұрын
동남아 세력임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nature5120 똥내나 세력 아님 ^^
@seokinsong6154
@seokinsong6154 Ай бұрын
마한이라는 나라를 일부러인지 언급을 자제하네... 그냥 어떤 나라...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마한과 상관없음. 저게 마한이면 옹관묘가 세게 최대로 발굴되는 중국이 마한이라는 소리가 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주장임. 옹관묘 묘제는 중국에서 시작해서 한국 일본으로 전파가 되는 양식임.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저렇게 맞댄 옹관묘형태의 묘제가 수천기가 무더기로 발굴이 되었음.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user-lk5yk1dp6x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을 마한이라고 하진 않았을거임. 아마도 쿠다라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가 싶음. 그래서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쿠다라가 무엇인지 의미해석이 안되니 이걸 이제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한이 되었지 않나 싶음. 그렇게 따지면 변한, 모한도 변다라, 모다라, 혹은 변라, 모라, 이런식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임. 만약 그 시대의 한반도인들이 자기들을 쿠다라라고 불렀다면 그 국명의 어원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를 따져봐야 하는데 자기들을 말의 민족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음. 그렇다면 그 유물이 분명히 나올 것인바, 그게 바로 마형대구임. 마한의 강토에서 엄청난 숫자가 나오고 일부는 일본에서도 나옴. 그리고 부여에서도 역시 엄청난 양이 나옴. 즉, 마한인과 부여인들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임.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인류시원은 한반도다 왜 ㅡ 다음 검색 기미가요는 고대 김해김씨를 찬양하는 노래 ㅡ 다음 검색
@ttongttenggom9112
@ttongttenggom9112 Ай бұрын
일본 애니중에 섀도 하우스라는게 있음. 그것도 생각남.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들이 대저택에 일하러 갔는데 그 곳의 그림자들과 인격이 동화되다가 어느새 육신을 빼앗김. 물론 본인은 그게 성장한 자기 자아라고 생각함. 그 저택 주인들은 수백 수천번 그렇게 새상을 살아온 것. 영혼을 빼앗긴 아이들이 있으면 오래된 육신은 버려졌을테고 어떻게 처리됐을까? 애니 제대로 안봐서 잘 모르지만..
@ttongttenggom9112
@ttongttenggom9112 Ай бұрын
파묘 생각남. 우미보즈 같은것도. 나는 왜 저 무덤 방식이 시신으로 진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느껴질까.
@seungheelee1094
@seungheelee1094 Ай бұрын
나주 대형옹관은 단순히 백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라고 한다. 영산강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와 해상교역이 이루어져서 다른 나라의 토기가 발굴되어 고대 왕국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재미있게 잘 시청했습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witchss4298
@witchss4298 2 күн бұрын
와 처음보는 관인데 신기하다..
@user-wl3vz4xf4c
@user-wl3vz4xf4c Ай бұрын
옹관은 울산 옹기 마을에 가면 볼수가 있어요.
@user-vv4oh6le3c
@user-vv4oh6le3c Ай бұрын
쌀하고 콩 한반도가 원산지인가 뭔가 그렇다던데 왕국이든 뭐든 다른곳보다 사람살기 좋았을듯
@user-ge8we3or1f
@user-ge8we3or1f Ай бұрын
역사스페셜
@user-ze9xe1ow9t
@user-ze9xe1ow9t Ай бұрын
백제에 의해 소멸(멸망)된 옹관국은 이곳의 토착민이었다는 결론이 아닐런지..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백제에 의해 소멸된게 아니라 광개토 대왕에 의해 소멸되었고 이후 전방후원형 세력이 등장했다가 신라 진흥왕에 의해 몰살당하고 퇴출됨. 백제와는 우방이었기 떄문에 백제가 왜국을 멸하지 않음. 둘의 출자가 모두 중국이었기 때문에 상호간에 전쟁을 하지 앟음.
@user-wv6nv5jo2p
@user-wv6nv5jo2p Ай бұрын
@@user-tj7ht7sp3n 뭔소리지?? 광개토대왕이 ?? 개소리를 하고 있네
@totorangnarang
@totorangnarang 17 күн бұрын
백제의 위치가 다른곳이란 얘깁니다. 우리 고대역사는 조선창업자의 모화사상과 일제식민사관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축소되었어요.
@user-ze9xe1ow9t
@user-ze9xe1ow9t 17 күн бұрын
@@totorangnarang 어차피 우리 고대사는 자료가 없어요 중국처럼 사마천의 사기나 당서가 있는 거도 있는거도 아니고 역사학자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린를 내는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라 해봤자 12세에 중엽에 나온 삼국사기가 전부이지 아닙니까 ㅎ일본 서기에 나온 임나일본부설도 그런 연유죠 우린 우리 입장에서 말하는 것일 뿐..
@user-ze9xe1ow9t
@user-ze9xe1ow9t 17 күн бұрын
@@user-tj7ht7sp3n 광개토 대왕에게 공격당한 건 백제가 아니었나요 옹관국이 아니라ㅎ
@TV-pv3qe
@TV-pv3qe Ай бұрын
백제 천도 기간에도 번성했었던 고대국가가 있었군요 ㄷㄷ
@user-kv1yq3cu7g
@user-kv1yq3cu7g Ай бұрын
성우분 성함이 궁금합니다. 오래전 kbs에서 방영했던 NHK 다큐 실크로드 성우분 같아요.
@jaeikshim9248
@jaeikshim9248 Ай бұрын
일본에도 옹관묘가 있ㅇ슴.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중국이 세계 최대임. 꼭 같은 양식의 옹관묘 묘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시작이 되었고 실제 수천기가 무더기로 발굴된 사례도 있음. 그 묘제를 사용하던 무리들이 한국으로 넘어온거임. 즉, 원시 중국인들이 한반도 전라도에 넘어왔고 이들이 역사에 왜라고 기록이 된거임. 그리고 그 무리들중 일부가 또 일본으로도 간 거. 그래서 삼국지 위서를 보면 왜인들이 자신들이 중국의 회계지방에서 넘어온 태백의 자손이라고 한거임. 태백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 나라의 개국시조임. 즉, 중국 남방에서 살던 오나라인들이 한반도와 일본으로 넘어온 거. 한국의 양식이 3세기 양식이기 때문에 삼국지 시대 당시 손견이 건업, 회계, 오나라등을 평정할 떄 여기 살던 원주민들이 손견과 손책을 피해 한반도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음.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rosemary50650
@rosemary50650 Ай бұрын
마한사람들이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옹관묘가 있는겁니다
@metalkokorea
@metalkokorea Ай бұрын
still mystery? then, what do they do? the historians.
@user-wx1lv5jq2q
@user-wx1lv5jq2q Ай бұрын
한반도 남부 나주 영산강지역의 고대왕국은 비류백제(중국 사마염의 진나라 역사서인 진서晉書의 부여 의려왕) ♥비류의 비류백제는♥ 대륙인 대방고지에서 부여 위구태가 건국했고, 서기 238년에 비류백제(고이왕=부여 의려왕)가 영산강지역도 차지하고, 일본열도까지 진출.
@user-wx1lv5jq2q
@user-wx1lv5jq2q Ай бұрын
일본서기 응신천왕 14년,16년에 등장하는 백제 궁월군이 120현(縣)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285년에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나라현의 전방후원분을 만든 것으로 보이고,비류백제 궁월군 세력이 일본열도를 장악하여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이 번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user-wx1lv5jq2q
@user-wx1lv5jq2q Ай бұрын
♥문헌 근거♥【일본서기】 응신천왕 14년, 16년에 등장하는 궁월군(궁월 君임금)이 백제 고이왕( 진서의 부여 의려왕)의 아들이고, 1) 283년 : 궁월군이 백제(영산강 지역)에서 왜로 오겠다고 함(일본서기),고이왕 신라공격(삼국사기)
@user-wx1lv5jq2q
@user-wx1lv5jq2q Ай бұрын
2) 285년 : 모용외 공격으로 의려왕 사망(진서 부여), 궁월의 인부(군사)가 왜로 건너감(일본서기) 3) 286년 1월에 신라와 화친하고 11월에 고이왕 사망(삼국사기)
@user-wx1lv5jq2q
@user-wx1lv5jq2q Ай бұрын
♥☞ (문헌 근거 해석) 1) 238년 하북성 창주시의 부여 의려왕(궁월君)이 군사를 이끌고 영산강 지역 비류백제 영토로 이동하고, 일본열조로 진출했고, 283년 고이왕(의려왕)의 아들(궁월군)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고이왕(의려왕)이 신라를 공격했다
@user-wx1lv5jq2q
@user-wx1lv5jq2q Ай бұрын
2) 285년 부여(비류백제) 의려왕이 하북성의 자리를 비운사이 전연의 묘용외가 창주시의 비류백제(부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진서는 의려왕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user-mw7oc8fi8g
@user-mw7oc8fi8g Ай бұрын
초기 고대국가는 아스달연대기처럼 그랬을거 같은데ㅎㄷㄷ
@user-gd9fb1jc6y
@user-gd9fb1jc6y Ай бұрын
나주에~~~있을수 있죠~~~해수면이 낮아서 너 넓은 국토였을수도 있고~~~가야가 있었을수도 있고~~~😊
@user-kv8dq9kd1t
@user-kv8dq9kd1t Ай бұрын
이거 유네스코문화제됐나? 일본은 더거지같은것도 다 문화재로 올려서 관광상품화하던데 제발 우리것을 잘지켜 후손들에게 자긍심을갖게해주었으면한다
@user-sv3vn8vb9l
@user-sv3vn8vb9l Ай бұрын
양산박이 있었구만. 3백호를 다스리는...
@user-qd2le3ic1k
@user-qd2le3ic1k Ай бұрын
중국이 아니라 중원의 나라이름을 일컬어야 한다
@rainbowsea9679
@rainbowsea9679 Ай бұрын
마한(백제)은 지리적,경제적으로 당시 선진국인 중국산동지역과 중국 중부, 남부인 절강성(상하이),베트남 그리고 지리적,경제적측면에서 후진국인 일본간의 해상중심지에 위치해 3국간의 무역중심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특히 당시 일본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떨어져 있어 문명이 뒤쳐져 있었고 당시 글로벌언어인 한자보급이 거의 안된 상태에 사실상 원시적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신라(가야)에 비해 교류는 적었으나 무역에 관여하는 소수일본인들이 잠깐잠깐 당시 선진국인 마한(백제)에 들러 마한의 선진문명과 풍습을 배워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뭏든 마한(백제)경제적측면에서 자체적으로 평야지대인데다 교역으로 인해 타지역에 비해 풍요로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호남 +충청)은 경기도를 기반으로 한 경기호족 왕건과 호남(나주)호족인 나주오씨간의 연합정권차원의 고려를 개국하기 직전인 917년까지 사실상 독자성을 유지한채 존재했음 .
@user-dp4oh1db6d
@user-dp4oh1db6d 8 күн бұрын
마한(전라)는 백제(서울경기)의 식민지였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충청도 금강 이남부터는 백제의 식민지입니다.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user-dp4oh1db6d 백제의 본국은 서울이 아닌 요서지역 현 베이징 일대입니다
@user-tn4qy3mm2p
@user-tn4qy3mm2p Ай бұрын
2024/6/6
@hyunjungpark4163
@hyunjungpark4163 5 күн бұрын
지금은 독무덤이라고 하죠.나주박물관에 독무덤이라고 나와있습니다
@ryu870149
@ryu870149 Ай бұрын
신라의 왕중한명이로 보면 될것 같은데요. 신라의 경주는 황제가 있고. 백제라고 하는 금동관은 고구려의 왕중 한명으로 한반도는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중으로 해석 하면 딱 맞네요. 한반도에는 백제가 없고 지금의 중궁의 황하강에 있었다는 것이 성립 됩니다.
@skc0
@skc0 Ай бұрын
이 뭔 개소리야.. 마한 진한 변한도 모르나? 전라도 나주영암쪽인데 뭔 신라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나
@GingorangNews
@GingorangNews Ай бұрын
국사책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많다 역사학자들은 더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란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user-ob4pp5dg1b
@user-ob4pp5dg1b Ай бұрын
그리스처럼 작은 폴리스가 여러 있었죠
@user-bj9lw6fy9c
@user-bj9lw6fy9c Ай бұрын
영산강 지역을 백제 담로로 인정한다면 일본 열도의 몇몇 지방도 백제의 담로가 된다. 그런 이유로 백제 담로 개념으로 영산강 지역을 해석하는것은 조선총독부 사학파들이 싫어한다. 게다가 수서는 7세기초에 후쿠오카/축자국 부터 동쪽은 왜국의 부용국이라 했다. 그 서쪽은 왜倭가 아니라는 기록이 존재.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user-gk5lw1xn8y
@user-gk5lw1xn8y Ай бұрын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 왜는 스스로 말하기를 태백(太伯) 의 후예라고 한다. 풍속으로는 모두 문신을 한다. - 倭
@user-gk5lw1xn8y
@user-gk5lw1xn8y Ай бұрын
@@user-vn2ec7ob2c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 왜는 스스로 말하기를 태백(太伯) 의 후예라고 한다. 풍속으로는 모두 문신을 한다. - 倭
@user-gz7fk6hb2y
@user-gz7fk6hb2y Ай бұрын
전라도 자랑 1. 9223년 전 (세계 최초 국가 환국 건국)보성군 벌교읍 고읍리 부족이 고흥군 풍양면 팔봉산에서 건국.도읍은 나주 자미산 일대로 정함.(일만년 전라도 문명편. 일봉 곽춘근 선생) 약 3000년 후 천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신시배달국 건국. 이후 한 부족은 북쪽으로 올라가 우수리(소머리)강 일대에서 정착하다가 서진 하여 수메르국 건국. (수메르는 소머리 라는 뜻임. 소설가 윤정모:수메르 한민족 머나먼 원정길).한 부족은 산동반도로 건너가 신시배달국 건국.(월드컵때 붉은악마 가면은 치우천왕 가면임) 산시성 함양시 일대에 5000년 이상된 동이족 피라미드 수십개 발견 되었음. 구글지도로 확인 가능합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인 이병도(이완용 조카),신석호,경성제국대 교수16명과 이마니시 류(금서룡)가 조선태고사 환국,신시배달국 역사 5000년을 없애 버리고 한민족 역사를 대부분 왜곡 시킴.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민족,역사,문화 말살 정책으로 조선인을 이간질 시켜 반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정책. 2. 세계 고인돌의 60% 이상이 전라도에 분포.(소멸된 것 포함.약 4만여 기가 전라도에 분포.도올 김용옥 선생) 탄소측정해 보면 대부분이 10000년 이상으로 나옴. 세계역사가 한꺼번에 풀릴 열쇠. 3. 전라도 언어는 10000년 전 언어이고 동,서양 언어의 뿌리 입니다.범어(산스크리트 어),인도어,유럽어,영어로 발전(강상원 박사) 범어는 대부분이 전라도 언어 입니다. 거시기: 머리 속에서 생각 해서 말해 줄게.산스크리트 어 옥스퍼드 사전에 그대로 나와 있음. 머시기:계산하다,헤아리다,기계(machine). 긍게: ghin ge(산스크리트 어) 동의하다.(agree). 그랑게:그렇게 이해하고 밝힌다. 그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진행한다. 띠어 브리제: 제거하다. 꼬막(작은 것이 기어 다닌다)꼬마,깐난이,까나리는 모두 적다는 뜻. 시아: 했시아,먹었시아,갔시아,왔시아 등. 잉:확인하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0591john
@0591john Ай бұрын
이 야, 2미터 짜리 옹관을 고대에 만들어 냈다는거 참 미스테리네요.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중국에서 춘추전국 시대부터 등장하는 묘제임. 진시황이 등장하면서 중국 내부에 전쟁이 발발하니까 그걸 피해서 한반도로 도주해온 무리들임. 보트피플이라고도 하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user-wv6nv5jo2p
@user-wv6nv5jo2p Ай бұрын
2미터짜리 공관이 참 미스테리면 그보다 2~3천년전에 만들어진 피라미드는??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차마 더 치기 힘들다 미스테린가요??
@ediya4499
@ediya4499 Ай бұрын
역사스페셜 댓글 관리 안함? 대륙 사이비 신도들 너무 많네
@PrettyT-rex
@PrettyT-rex Ай бұрын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 뭘 관리하란거임??
@user-gv3ni2sw9i
@user-gv3ni2sw9i Ай бұрын
대륙백제, 대륙신라, 대륙고구려 듣기만 해도 싫어하는것을 보아하니 중국놈인듯??. 중원의 중원는 고대 한나라 초기땅 뿐이다 중국인아
@rosemary50650
@rosemary50650 28 күн бұрын
​​@@PrettyT-rex100%화하족 ㅋㅋㅋ 맞아 표현의 자유 근데 너는 날조와 왜곡을 밥먹듯이 하잖아 그래 서 저런말이 나오는겨 알았냐? ㅋㅋㅋㅋㅋ
@rosemary50650
@rosemary50650 28 күн бұрын
​@@PrettyT-rex오늘 점심은 짜장이나 먹어라
@rosemary50650
@rosemary50650 28 күн бұрын
​@@PrettyT-rex근데 중국은 표현의 자유 없잖아 근데 표현의 자유를 아네? ㅋㅋㅋ
@user-uc9uq5mg4c
@user-uc9uq5mg4c Ай бұрын
CIS-AB형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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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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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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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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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중국학자가 중화민족(華夏族)=상고시대 한국민족(東夷族)임을 유전공학을 통하여 논증하는 글 上古中华史,其实是帝俊集团黄帝集团炎帝集团三集团历史 中华最古海 2018-01-04 投诉 阅读数:790 ​​ 真的假不了,假的真不了。分子人类学研究是探索上古中华史的重要参考。上古中华文明,实际是帝俊(东夷)集团,黄帝集团,和炎帝集团的集合,是海洋文明和内陆文明的集合,是风龙图腾集合。司马迁因为是陕西人,所以写《史记》没有重视东夷集团,误导历史。 中华民族,除了炎黄,还有帝俊。《山海经》多次提到帝俊。帝俊比炎黄更早。司马迁搞不懂《山海经》,自然没有将帝俊单独拿出来讲。《山海经》反映的信息不仅仅是大禹时期,更多内容比大禹时期更早。 一个很简单的道理,内陆没有海,没有海的概念,也不会有对海的感情,只能写《山经》,怎么可能写《海经》?龙,是陆地的龙大,还是海里的龙大?山东有山有海有东方,对太阳对风鸟对海龙的崇拜很正常。孔子讲智者乐山仁者乐水。孔子讲道不行,泛舟于海上。内陆的江湖可以和海比吗?《山海经》一开始只能是帝俊东夷集团神话体系。后期黄帝集团主导后,又纳入黄帝神话体系。 黄帝集团在打败东夷集团后,特别是黄帝孙子颛顼绝地天通后,东夷帝俊神话体系或取消或被合并到黄帝体系,只剩龙图腾体系,只尊黄帝。帝俊体系是风龙图腾并举体系。 说我们是龙的传人,其实,我们是风龙的传人。三星堆青铜神树就是帝俊东夷神话体系。是一部分东夷集团避战祸,将宗教神话祭祀礼器护送转入四川保护起来。黄帝集团打败东夷集团后,一部分东夷集团向西向南迁移。不用说山东境内近一万年前到春秋战国时期形成完整链条的考古发掘,就是分子人类学研究,也有重要参考。当然有不同意见和反对意见正常,可以在争论中和不断发展中,不断逼近历史事实真相。 分子人类学研究基本原理 DNA大部分存于生命体细胞核内,在细胞核以外如线粒体内存在线粒体DNA(mtDNA)。男性精子线粒体位于精子尾部。受精时,精子头部进入卵子体内,尾部自然脱落,所以子女的mtDNA只能来源于母亲,是母系遗传方式。父系遗传方式是男性精子细胞核中的Y染色体(Y-DNA),卵子没Y染色体。mtDNA只在母亲和女儿之间传递,呈严格母系遗传。Y-DNA只在父亲和儿子之间传递,呈严格父系遗传。 分子人类学研究的是父系遗传和母系遗传DNA序列,不是基因。 以下转自前些年复旦大学和其他机构分子人类学研究的一些结论。不当之处请指正,欢迎讨论。 O3是东亚的主人,也是汉族的主体。山东威海地区汉族O3比例全国最高,达到71.1%。(复旦大学生命科学院文波) 根据2007年相关研究,山西陶寺遗址的龙山文化居民中,上层贵族100%为O3类型,而根据2008年金力、李辉的数据,陕西仰韶文化的居民的Y染色体SNP类型也是O3,所以,我们可以清晰的看出,古代汉族先民,尤其是贵族,都是O3占有绝对主体的,仰韶文化和龙山文化居民的Y染色体成分是基本相同的,种族上是同一成分。 今天13亿汉族的绝大多数,都是5000年前中原原始居民的直系后代。主体是仰韶文化和龙山文化的O3(两种文化居民的父系成分相同),O3也就是来自中原仰韶文化和龙山文化的居民构成了各地汉族父系远祖的压倒性绝对多数,其次是河北的磁山文化的O1,红山文化的O3、O2和O1,和良渚文化的O1,其次还有湖北大溪文化和江西吴城文化的O2a,今天广阔的中国土地,仍然为5000年前中国远古汉族先民的子孙所占据。 数万年前NO单倍群诞生出O3-M122,再诞生O3a-M324,而O3*-M122是O3-M122的原型,仍保持不变。O3a-M324再分为O3a1-L127、O3a2-P201。其中O3a2-P201,由此诞生出:O3a2b-M7(华中汉族、苗瑶族群)、O3a2c-M134(中原汉族、藏缅族群)、O3a2c1-M117(藏羌族群、华北汉族),也就是说O3a3-P201是中原汉族、苗瑶族群、藏缅族群和华北汉族的共祖原型,也是同源兄弟。而O3a2*-P201(属于O3a2-P201的原型,仍保持不变),高频分布在中国东南地区及其台湾少数民族。 东夷haplogroupO3*-M122的年龄为2.5-3.0万年 中原haplogroupO3a2c1-M134的年龄约为1.6万年 古羌haplogroupO3a3c1a-M117的年龄约为1.3万年 东夷haplogroupO3a1-002611的年龄约为1.1万年 东夷haplogroupO3a1c1-F11的年龄约为0.7万年。 O3a1-L127诞生出O3a1-002611,最后诞生出O3a1c1-F11,是O3系内最晚出现的一类,高频分布在东亚沿海,是典型的东夷标志基因,在汉族O3系中占有最大比例,但在国外几乎没有了。因此,O3a1-002611是中国汉族独有的单倍群类型,确实是最正宗的中国人。O3*-M122是O3系原始祖型的最早一支,也高频分布在东亚沿海,是汉族O3系的共祖原型,因而也是最早的中国人。 O3*-M122、O3a4-002611高频分布图与东夷文化分布图完全吻合。 姬姓是中国上古八大姓之一,不是汉族的全部,而是汉族的一部分。姬姓(相传祖先为黄帝)出自于古羌族,Y染色体以O3-M134为主体类型,和羌藏族群有渊源关系。周朝统治800年之久,分封了姬姓诸侯国。现在,姬姓后裔O3-M134约占现代汉族O3系的40%。 上古八大姓是指姜、姬、姚、嬴、姒、妘、妫、妊。其中嬴姓(少昊)、姚姓(大舜)、姒姓(伯益)、姜姓、妫姓、妊姓(远祖为太昊,出于帝俊)均属东夷姓氏。 太昊、少昊、大舜、伯益和帝俊均属著名的东夷部落首领,嬴姓、姚姓、姒姓、姜姓、妫姓、妊姓等东夷姓氏,Y染色体以O3-M122为主体类型,现在,东夷姓氏O3-M122约占现代汉族O3系的60%。 黄河上游藏缅族群及其西北汉族特有的O3e-M134高发频率,但O3-M122比例低。黄河下游以O3-M122为最,O3e-M134比例低。 O3-M122是O3e-M134的祖型,O3-M122最早进入黄河中下领域成为第一批居住先民,迫使O3e向西迁徒,与羌藏D系共处融合,形成了藏缅族群。有O3e-M134的地方一般都有O3-M122,但有O3-M122的地方不一定有O3e-M134。 从黄河流域的整个趋势来看,O3e-M134是西部比东部高,越往东越低。在黄河下流域,O3-M122的含量明显超过O3e-M134,显示它自东往西扩散的趋势。 在O3-M122的细分谱系中,O3*-M122、O3a4-002611主要分布在黄河中下流域,显然是东夷集团的主体类型,因为这个单倍群在藏缅语人群中很稀少,但是在汉族里的比例却能占较大的比例。 东夷人以O3-M122为最,几乎没有羌藏D系,和现代汉族的主体部分完全一致。东夷O3-M122与周族O3e-M134同样都是汉族父系祖先的两大来源。​​​​ 답글
@user-xk7bg3gs5z
@user-xk7bg3gs5z Ай бұрын
백제점령군을 피해 일본으로 이주한 고대 전남사람과 일본인의 조상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백제가 왜를 점령한 사실이 없음. 고고학 유물상으로도 백제의 침략흔적이나 전쟁기록도 전혀 없음. 왜가 전쟁을 한 대상은 초기에는 고구려, 이후에는 신라임. 백제와는 전쟁관련 기록자체가 한국이건 일본이건 아예 나오지 않음.
@metropark2ne1
@metropark2ne1 Ай бұрын
고대 삼국이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설이 생각나네. .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책보고' 유튜브좀 보세요 ㅎㅎ 그 얘기 잘 나옴
@gtsac1
@gtsac1 Ай бұрын
팔구천년전 빙하기에 연결되어있었는데 왔다갔다했겠지
@shr2800
@shr2800 Ай бұрын
저때는 정신이 그금 박힌듯
@user-fv4br4mi6v
@user-fv4br4mi6v 2 күн бұрын
백제는 중국 사서에 보면 자치권을 부여받은 담로국(제후국)을 거느린 황제국이었다
@user-km3yh9cr4t
@user-km3yh9cr4t Ай бұрын
잡니다
@user-ze8hc4yy1w
@user-ze8hc4yy1w 23 күн бұрын
기원 후보다 기원 전에 만들어 진 것 같다 ㅋ.
@hansoli
@hansoli 27 күн бұрын
그 시대나 우리나라가 단군 시대와는 연계성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user-ho7ur2bv5c
@user-ho7ur2bv5c 29 күн бұрын
경상도만 와도 무슨무슨 도시국가 같은 나라가 있었음. 당연히 백제지역도 있었겠지만. 마한/변한/진한 - 삼한 지역.
@user-pe5my6kd6s
@user-pe5my6kd6s Ай бұрын
물건 옴길때 오가 하는거 개웃기네요. 저희 아버지 전라도 사람인데 실제로 저렇게 말함 ㅋㅋ
@parkjake1
@parkjake1 Ай бұрын
경상도는 도가 도가 했어요. 오랫안에 듣네요.
@user-pe5my6kd6s
@user-pe5my6kd6s Ай бұрын
@@parkjake1 엥 저는 부산,울산인데 왜 하나둘 했던거 같죠 ^^
@user-bf1pu2fl5t
@user-bf1pu2fl5t Ай бұрын
삼한중 하나 마한의 역사라고 합니다 6세기초까지는 독자적 정치체제를 유지했고 그후 백제에 병합됩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mg7gu9ev7e
@user-mg7gu9ev7e 2 күн бұрын
한반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있엇다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거죠!
@user-dh2zr8br8v
@user-dh2zr8br8v Ай бұрын
바남이 우리시골이다 근래에 많이 발굴했지
@user-cd1by2vf5f
@user-cd1by2vf5f Ай бұрын
나주와 인근의 다양한 고분군을 볼때 백제와의 역사적 긴밀성은 크지않다. 흔히 근초고왕 때 정복되었다고하나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전방후원분의 시기로 봐서 왜의 세력권이었고 그 이전의 정치세력이 마한이라고하나 이것도 사료적 고고학적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무덤 양식으로 볼때 토착세력과 중국의 이주민세력, 마한의 패주세력, 왜 세력 등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혼재했고 백제 동성왕 전후로 백제의 세력권 내지는 영토가 되었다고 보는것이 합당하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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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DltptkddldnldpsirkdlTek
@DltptkddldnldpsirkdlTek Ай бұрын
삼국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소수의 북방민족들이 들어와서 지배계층이 되고 기존 토착민이 피지배계층이 된 듯
@wolfman33333
@wolfman33333 Ай бұрын
우리의 주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임 한반도는 원주민이 따로로 있던 변방이였고 그걸 고구려 백제 신라가 따로 관리하다가 신라가 통일 되고 관리하다 망하고 고려때 되어서는 거진 방치되던 곳인데 조선국 이성계가 대륙의 대륙 고려땅을 명나라에 떠넘기고 도망치듯 천도 한곳이 한반도 한양땅임 근데 이곳이 오랜동안 버려진 곳이라 원주민들쓰는 말이 중국과 말이 달라 인재 양성이 어려우니 훈민정음을 만들어 널리쓰이겠끔 하였나 ㅎ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한반도도 원주민이 별개는 아니고 낙랑국 -> 고구려로 이어졌습니다.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중국동부지역 점거하고 있다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으로 밀려난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양인이상) 이주를 택하겠죠.
@Dae-Dong-I
@Dae-Dong-I Ай бұрын
우리의 대륙 역사가 왜곡되니 한반도에 있던 고대 왕국이 미스터리 해지는 게 당연한 이치. 가야 영향권에 속한 왕국이었거나, 가야와는 또 다른 왕국이 아니었을까.
@user-dk9cs2rj4k
@user-dk9cs2rj4k Ай бұрын
이 정도면 정신병원에 가야될듯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한 나라의 역사를 현재 국가의 국경에 따라 생각하니 생기는 문제가 많죠. .ㅎㅎㅎ 일본과는 60% 정도, 중국동북부와는 40%정도 교집합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중국 사천운남서방은 10%이내
@user-su2it8se8e
@user-su2it8se8e 21 күн бұрын
로가? 고대일본꺼?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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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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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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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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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cskim277
@cskim277 11 күн бұрын
거긴 가락국이다 마한 실직국 파사국 등 부족국가들 많음
@my4202
@my4202 Ай бұрын
Malay people arrived at the Korea Peninsula at that time, ? !
@vcapell4370
@vcapell4370 Ай бұрын
옹관은 가야, 백제도 있음..그러나 그냥 가야 백제에선 그냥 옹관묘일뿐
@jswhite9088
@jswhite9088 Ай бұрын
왕건이 나주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당시 나주지역 호족들의 핏속에 백제에 의해 자기들 정치집단이 멸망당한 저때의 악감정이 남아있어서 견훤의 후백제를 좋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주지역 호족들은 저 옹관묘 주인들의 후손이었던건 아닐까요?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한반도의 나주 아님...
@user-wp4xc6hn4y
@user-wp4xc6hn4y 24 күн бұрын
한글 자막을 넣어 주세요. 아나운서를 제외한 영상에 나오는 모든 분들의 설명이 귀에 잘 안들립니다.
@user-mi8ln4pe3f
@user-mi8ln4pe3f Ай бұрын
이주세력이죠 1. 기원전 184년에 망한 기자 조선의 준왕이 충청도에 오죠 2. 기원전 18년 소서노와 비류가 금강에 와요 보세요 - 백제는 100家에요 온조백제는 10제=10가 비류백제는 90제=90가... 백제의 몸통은 비류 백제에요!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baek6468
@baek6468 9 күн бұрын
야마다 대국이었나 보네 ?
@user-bu2tj1tf8y
@user-bu2tj1tf8y 6 күн бұрын
蘇我😂氏. 舒銘天皇😊
@user-iz6yt8np5b
@user-iz6yt8np5b Ай бұрын
매금이말이 일리가 있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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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hinova77
@hinova77 Ай бұрын
끝까지 남아있던 마한 또는 왜로 나중에 일본으로 넘어간 세력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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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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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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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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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user-ly9ty7cu4n
@user-ly9ty7cu4n Ай бұрын
큐슈에 마한 가야 무덤이 발굴되는데 그럼 큐슈는 가야, 마한의 영토인가?
@user-kt5io6cy1d
@user-kt5io6cy1d Ай бұрын
지배층이 그쪽이라면 가능한 이야기란게 정설로 굳어짐.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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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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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user-mf9re3ey4z
@user-mf9re3ey4z 4 күн бұрын
대가야
@user-mg7gu9ev7e
@user-mg7gu9ev7e 2 күн бұрын
한반도는 에덴 묘지 신성한지역이였다.
@user-qu4hz4kw4f
@user-qu4hz4kw4f Ай бұрын
솨~야ㅋㅋㅋ
@TheTruthComesOut.
@TheTruthComesOut. Ай бұрын
좁은 땅덩어리에 참 잘 설명하네 역사를 이따위로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상님들이 아시면 통곡하시겠다!!!
@user-zl5cr6st6j
@user-zl5cr6st6j Ай бұрын
옹관의 고향은 인도 남부 타밀 지역이에요 인터넷 검색 조금만 해보면 금방 알아요. 한국어도 타밀어와 수천 단어 일치하고 전통 국악 장단도 똑같아요 가야 허황후와 관련이 있어요 라주를 마한이라고 역사왜곡해서 전남 라주에 국립마한박물관을 만들어 놨어요 청주 한씨들이 마한의 왕족인데 청주한씨들은 청주를 마한의 고도로 여깁니다. 라주는 신라의 라를 따서 신라가 통일후 라주로 개명했고 라주로 바뀌기전 백제시대 그쪽 지명은 일본처럼 현이 들어가요. 완전히 일본식 지명이고 ebs 한반도의 왜 3부작 라주 옹관묘는 한반도 왜의 유적이라고 했어요. 왜 가야 백제 다 같은 혈연 관계
@xtreemsjyu
@xtreemsjyu Ай бұрын
신라 때 금성 고려 때 나주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1930년대 까지 3개주는 우리말 사용? ㅡ 다음 검색 칭기스칸 발해왕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다 ㅡ 다음 검색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인도가 아닌 중국임. 중국의 옹관묘 세력이 한반도로 넘어온 거임. 꼭 같이 옹관을 맞댄 묘제가 중국에서 수천기가 무더기로 발굴이 되었고 그 시작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이 되었음.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인류시원은 한반도다 왜 ㅡ 다음 검색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인류시원은 한반도다 왜 ㅡ 다음 검색 기미가요는 고대 김해김씨를 찬양하는 노래 ㅡ 다음 검색
@user-hw6gc3eh9s
@user-hw6gc3eh9s Ай бұрын
한국의백제땅은 묘지터 만 쓰고 본토는 중국 우리땅에ㅡ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뭔가 종교적 성지같은 역할이었나봅니다. 문명이나 유적이 또 없으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또 계속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서해바다를 낀 국가를 형성했었고
@user-ec5oc8ku5z
@user-ec5oc8ku5z 6 күн бұрын
뭔가 종교적 성지같은 역할이었나봅니다. 문명이나 유적이 또 없으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또 계속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서해바다를 낀 국가를 형성했었고
@user-hm5br9hf3z
@user-hm5br9hf3z 11 күн бұрын
KBS? 일본이 지배했다 할건가?
@user-nn2zz2lt1d
@user-nn2zz2lt1d Ай бұрын
고대왕국이 아니고 그냥 여기는 높은 왕족 묘 쓰는 땅임..주거터가 없잔쏘.. 이젠 안 속음
@user-ys7tf1uy5r
@user-ys7tf1uy5r 22 күн бұрын
어쩐지...저짝 출신들은 뭔가 다르더라고.생각자체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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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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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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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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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ineon99
@ineon99 Ай бұрын
신미제국 신라 와 매금 ?!
@yj-rn2ow
@yj-rn2ow Ай бұрын
일본과 나주에 동시에 살던 왜의 유물입니다 월지국과 일부가야로 인식되던 집단이며 일본으로가서 야마다이를형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다 야마토에 멸망한걸로보입니다 양국유물을 다 직접확인한 제소견입니다 거주구역이발해만 해변가에서 남해안 나주 큐슈지역까지 바다를 중심으로 아주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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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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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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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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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21 күн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deletekey123
@deletekey123 Ай бұрын
임나가야의 초기 형태ᆢ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답글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user-xf8xl6sy1f
@user-xf8xl6sy1f Ай бұрын
백제는 서울인근 이후 충청도로 중심으로한 정권이고 저들은 왜 일 가능성이 있음.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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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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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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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KoreaFirst
@KoreaFirst Ай бұрын
일본인들은 과거 한반도 남부 지방에 살았습니다.
@msrt9860
@msrt9860 Ай бұрын
말을 꺼꾸로 하네. 한반도 남부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지금의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산거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거지, 부모가 자식을 닮았다고 표현하나.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msrt9860 전라도의 옹관묘 양식이 나올 떄 이미 한반도에는 삼한이 존재했고 그 이전엔 진국이라는 국가가 또한 존재를 했음. 왜가 전라도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한이 존재했기 때문에 제대로 정착을 못했고 그래서 일본으로 갔던거임. 일본의 영토가 한반도보다 3배나 더 컸고 인구도 작았기 때문에 왜구들이 넘어가 살기 유리했던 조건임. 그래서 4세기가 되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쟁이 엄청나게 벌어진거임. 한일 양국의 고고학 공통점이 4세기에 전쟁관련유물들인 갑옷, 화살, 철기등이 엄청나게 나온다는거임. 그 이전까지는 무기류들이 그렇게까지 나오지 않음. 즉, 4세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전쟁이 벌어졌다는거고 한국의 경우에는 기록이 비교적 잘 남아 있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내부에서 벌어진 전쟁 관련 기록들이 없기 때문에 알지를 못하는거임. 고고학 유물로 보면 한국이 삼국시대일때 일본 역시도 삼국시대였다고 추정해볼 수 있음.
@msrt9860
@msrt9860 Ай бұрын
@@user-lk5yk1dp6x 당연하죠 요즘은 역사를 안 가르치니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구나
@user-tj7ht7sp3n
@user-tj7ht7sp3n Ай бұрын
@@user-lk5yk1dp6x 일부는 동족이긴 함. 대표적인 유전자가 C3와 O2b*유전자.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한국과 일본이 서로 공유가 됨. 즉, 같은 민족이라는 이야기임.
@user-vb8jq9iq5t
@user-vb8jq9iq5t Ай бұрын
인류시원은 한반도다 왜 ㅡ 다음 검색 기미가요는 고대 김해김씨를 찬양하는 노래 ㅡ 다음 검색
@seoktaeseong6989
@seoktaeseong6989 10 күн бұрын
영산강 고대왕국? 그게 바로 왜.
@t4czzang
@t4czzang 8 күн бұрын
왜 같은소리하고 자빠짓네
@user-oh4vk2ee5i
@user-oh4vk2ee5i Ай бұрын
마한 목지국 진왕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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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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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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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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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중국학자가 중화민족(華夏族)=상고시대 한국민족(東夷族)임을 유전공학을 통하여 논증하는 글 上古中华史,其实是帝俊集团黄帝集团炎帝集团三集团历史 中华最古海 2018-01-04 投诉 阅读数:790 ​​ 真的假不了,假的真不了。分子人类学研究是探索上古中华史的重要参考。上古中华文明,实际是帝俊(东夷)集团,黄帝集团,和炎帝集团的集合,是海洋文明和内陆文明的集合,是风龙图腾集合。司马迁因为是陕西人,所以写《史记》没有重视东夷集团,误导历史。 中华民族,除了炎黄,还有帝俊。《山海经》多次提到帝俊。帝俊比炎黄更早。司马迁搞不懂《山海经》,自然没有将帝俊单独拿出来讲。《山海经》反映的信息不仅仅是大禹时期,更多内容比大禹时期更早。 一个很简单的道理,内陆没有海,没有海的概念,也不会有对海的感情,只能写《山经》,怎么可能写《海经》?龙,是陆地的龙大,还是海里的龙大?山东有山有海有东方,对太阳对风鸟对海龙的崇拜很正常。孔子讲智者乐山仁者乐水。孔子讲道不行,泛舟于海上。内陆的江湖可以和海比吗?《山海经》一开始只能是帝俊东夷集团神话体系。后期黄帝集团主导后,又纳入黄帝神话体系。 黄帝集团在打败东夷集团后,特别是黄帝孙子颛顼绝地天通后,东夷帝俊神话体系或取消或被合并到黄帝体系,只剩龙图腾体系,只尊黄帝。帝俊体系是风龙图腾并举体系。 说我们是龙的传人,其实,我们是风龙的传人。三星堆青铜神树就是帝俊东夷神话体系。是一部分东夷集团避战祸,将宗教神话祭祀礼器护送转入四川保护起来。黄帝集团打败东夷集团后,一部分东夷集团向西向南迁移。不用说山东境内近一万年前到春秋战国时期形成完整链条的考古发掘,就是分子人类学研究,也有重要参考。当然有不同意见和反对意见正常,可以在争论中和不断发展中,不断逼近历史事实真相。 分子人类学研究基本原理 DNA大部分存于生命体细胞核内,在细胞核以外如线粒体内存在线粒体DNA(mtDNA)。男性精子线粒体位于精子尾部。受精时,精子头部进入卵子体内,尾部自然脱落,所以子女的mtDNA只能来源于母亲,是母系遗传方式。父系遗传方式是男性精子细胞核中的Y染色体(Y-DNA),卵子没Y染色体。mtDNA只在母亲和女儿之间传递,呈严格母系遗传。Y-DNA只在父亲和儿子之间传递,呈严格父系遗传。 分子人类学研究的是父系遗传和母系遗传DNA序列,不是基因。 以下转自前些年复旦大学和其他机构分子人类学研究的一些结论。不当之处请指正,欢迎讨论。 O3是东亚的主人,也是汉族的主体。山东威海地区汉族O3比例全国最高,达到71.1%。(复旦大学生命科学院文波) 根据2007年相关研究,山西陶寺遗址的龙山文化居民中,上层贵族100%为O3类型,而根据2008年金力、李辉的数据,陕西仰韶文化的居民的Y染色体SNP类型也是O3,所以,我们可以清晰的看出,古代汉族先民,尤其是贵族,都是O3占有绝对主体的,仰韶文化和龙山文化居民的Y染色体成分是基本相同的,种族上是同一成分。 今天13亿汉族的绝大多数,都是5000年前中原原始居民的直系后代。主体是仰韶文化和龙山文化的O3(两种文化居民的父系成分相同),O3也就是来自中原仰韶文化和龙山文化的居民构成了各地汉族父系远祖的压倒性绝对多数,其次是河北的磁山文化的O1,红山文化的O3、O2和O1,和良渚文化的O1,其次还有湖北大溪文化和江西吴城文化的O2a,今天广阔的中国土地,仍然为5000年前中国远古汉族先民的子孙所占据。 数万年前NO单倍群诞生出O3-M122,再诞生O3a-M324,而O3*-M122是O3-M122的原型,仍保持不变。O3a-M324再分为O3a1-L127、O3a2-P201。其中O3a2-P201,由此诞生出:O3a2b-M7(华中汉族、苗瑶族群)、O3a2c-M134(中原汉族、藏缅族群)、O3a2c1-M117(藏羌族群、华北汉族),也就是说O3a3-P201是中原汉族、苗瑶族群、藏缅族群和华北汉族的共祖原型,也是同源兄弟。而O3a2*-P201(属于O3a2-P201的原型,仍保持不变),高频分布在中国东南地区及其台湾少数民族。 东夷haplogroupO3*-M122的年龄为2.5-3.0万年 中原haplogroupO3a2c1-M134的年龄约为1.6万年 古羌haplogroupO3a3c1a-M117的年龄约为1.3万年 东夷haplogroupO3a1-002611的年龄约为1.1万年 东夷haplogroupO3a1c1-F11的年龄约为0.7万年。 O3a1-L127诞生出O3a1-002611,最后诞生出O3a1c1-F11,是O3系内最晚出现的一类,高频分布在东亚沿海,是典型的东夷标志基因,在汉族O3系中占有最大比例,但在国外几乎没有了。因此,O3a1-002611是中国汉族独有的单倍群类型,确实是最正宗的中国人。O3*-M122是O3系原始祖型的最早一支,也高频分布在东亚沿海,是汉族O3系的共祖原型,因而也是最早的中国人。 O3*-M122、O3a4-002611高频分布图与东夷文化分布图完全吻合。 姬姓是中国上古八大姓之一,不是汉族的全部,而是汉族的一部分。姬姓(相传祖先为黄帝)出自于古羌族,Y染色体以O3-M134为主体类型,和羌藏族群有渊源关系。周朝统治800年之久,分封了姬姓诸侯国。现在,姬姓后裔O3-M134约占现代汉族O3系的40%。 上古八大姓是指姜、姬、姚、嬴、姒、妘、妫、妊。其中嬴姓(少昊)、姚姓(大舜)、姒姓(伯益)、姜姓、妫姓、妊姓(远祖为太昊,出于帝俊)均属东夷姓氏。 太昊、少昊、大舜、伯益和帝俊均属著名的东夷部落首领,嬴姓、姚姓、姒姓、姜姓、妫姓、妊姓等东夷姓氏,Y染色体以O3-M122为主体类型,现在,东夷姓氏O3-M122约占现代汉族O3系的60%。 黄河上游藏缅族群及其西北汉族特有的O3e-M134高发频率,但O3-M122比例低。黄河下游以O3-M122为最,O3e-M134比例低。 O3-M122是O3e-M134的祖型,O3-M122最早进入黄河中下领域成为第一批居住先民,迫使O3e向西迁徒,与羌藏D系共处融合,形成了藏缅族群。有O3e-M134的地方一般都有O3-M122,但有O3-M122的地方不一定有O3e-M134。 从黄河流域的整个趋势来看,O3e-M134是西部比东部高,越往东越低。在黄河下流域,O3-M122的含量明显超过O3e-M134,显示它自东往西扩散的趋势。 在O3-M122的细分谱系中,O3*-M122、O3a4-002611主要分布在黄河中下流域,显然是东夷集团的主体类型,因为这个单倍群在藏缅语人群中很稀少,但是在汉族里的比例却能占较大的比例。 东夷人以O3-M122为最,几乎没有羌藏D系,和现代汉族的主体部分完全一致。东夷O3-M122与周族O3e-M134同样都是汉族父系祖先的两大来源。​​​​ 답글
@user-gk5lw1xn8y
@user-gk5lw1xn8y Ай бұрын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①…의문 제기 (2019.05.19) - 전라도 지역
@user-rd8mz4nw6o
@user-rd8mz4nw6o Ай бұрын
역시적 문헌을 찾아야 한다. 전라도의 또다른 왕국은 무엇인가? 놀라운 문명국가었음에도 백제나 신라메 가리워저있는 것이 안타갑다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Ай бұрын
(정렬 기준을 최신순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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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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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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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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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ow8lc7jo4u Ай бұрын
역사스페셜 좋아하는데 유인촌이 나오면 바로 아웃
你们会选择哪一辆呢#short #angel #clown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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