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출나지도 않고 진급도 늦었고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았지만... 아이젠하워가 졸업한 웨스트포인트 1915년 졸업기수가 졸업생 거의 40%가 별을 단 원조 "별들의 기수"라는 건 함정.
@scz83332 жыл бұрын
사실 행운의 역활도 결정적. 1915년 졸업이 아닌 25년 전인 1890년 졸업기수 ------------------> 미군의 1차대전 참전 선포 1917년 이면 대부분 전역 상태 아이젠하워 및 동기생들은 운도 좋았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임관해 1차-2차대전을 겪었다는 행운. 1차대전 때는 초급 장교, 2차대전 직전 까지 오랜 기간 영관급으로 머물던 아이젠하워 역시 2차대전이 없었다면 그냥 영관급에서 전역했을 겁니다. ------------------------------------> 즉 그 기수가 탁월한 역량만으로 별들의 기수가 된 것은 아닐 것. 미국과 영국은 지상군 병력 평시에 크지 않습니다. 아마 2차대전 전에 두 나라 모두 20~30만 정도 되었을 것. 그러다 2차대전과 함께 영국은 육해군 총병력 약 500만, 미국은 인구가 커서 약 1,000만 병력으로 급팽창. 엄청난 장교 수요 때문에 기존의 장교단은 승진할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단기 배출 장교도 아닌 사관학교 출신이라면 더욱 더. 전쟁과 장교들 관계만이 아니라, 타이밍은 모든 분야에서 사실 가장 결정적 요소입니다. 스티브 잡스 - 빌 게이츠, 만일 3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그들에게 컴퓨터 관련 사업 그 어떤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13세기 몽골 초원에 태어났더라면, 사실 유능한 몽골 전사 된다는 그 어떤 보장도 없을 겁니다. 그 공동체에서 필요한 능력 자체가 달랐기에. 스티브 잡스, 특히 행운도 컸습니다. 잡스의 친부모는 모두 현재 오랜 내전으로 완전 난장판 지옥으로 변해버린 시리아 출신. 미국 유학했던 잡스의 친부모는 잡스 낳은 뒤, 미국 가정에 입양시켰던. 잡스는 시기만이 아니라 공간적 행운 까지 겹쳤던. -------------> 잡스 개인 능력이 아무리 유전적으로 뛰어났더라도, 시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애플 신화는 없었을 것. -------------> 잡스를 대체해 새로운 애플 신화가 미국내에서 생겼을 가능성 크고, 최소한 잡스는 능력과 상관 없이 배제되었을 것.
청나라 강희제가 신하들을 평가할 때 성품이 우선이고 재능은 나중이었다고 하죠. 어릴 땐 이해가 안됐는데 나이가 들 수록 그 말이 맞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아이젠하워도 딱 그런 사람인 거 같아요.
@순정파백우-k7f2 жыл бұрын
비인부전~
@KyleKwack2 жыл бұрын
@Osurkra 강희제는 중국인이라기보다는 만주인...
@성이름-v2l3r2 жыл бұрын
그건 본인이 천고일제라서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그런것도 있고 군주는 조금 악할지라도 능력이 있는게 낫고 신하는 믿고 쓸수 있어야해서 인성이 필요해서일수도 있고 그러네요.
@minsugu80232 жыл бұрын
정치는 튀는 인물보다는 원만한 조정자가 더 잘 맞는 분야라.
@루카치-u3m2 жыл бұрын
유럽연합군 사령부의 흔한 풍경 1. 몽고메리가 시비 건다. 2. 패튼이 열받아 날뛴다. 3. 아이젠하워가 머리 싸맨다. 4. 브래들리가 겨우 말린다. 5. 다시 1로 간다... 참고로 아이젠하워의 사관학교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고 합니다.
@나는저승사자다2 жыл бұрын
그런데도 대통령을 해먹고있나???
@도망가자-u4w Жыл бұрын
능력이랑 성적은 별개지 살아보면 알게될꺼야
@다인-g3m Жыл бұрын
시험으로는 정치력이나 대인관계능력을 평가할 수 없기에...
@war.and.peace992 жыл бұрын
육사 졸업 후 20년이 될 때까지 소령에 머물렀다가 유럽전선으로 가서는 2년만에 5계급의 승진을 거듭하였고 대장으로 연합군총사령관이 되었는데,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원수로 승진함에 따라 대장이 원수를 지휘할 수 없으므로 아이크 역시 원수로 승진하게 됨. 소령 때 필리핀 멕아더 대장의 부관이었음.
@kasonk16922 жыл бұрын
남보람 교수님의 "깊이가 다른 분석.제2차 세계대전" 개인적으로 유익하고 꼭 봐야하는 역사 콘텐츠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 내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하고 좋은 내용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깊이있는 연구 내용을 공유해주시는 것에 대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Kimharry96222 жыл бұрын
현대사회에서 더욱 더 필요하고, 흔치 않은 스타일의 리더네요 모든 사람, 그룹들과 소통 잘 되게 하고 조정하고, 잘 들어주면서 끌고가는 리더.. 요즘 세상에 그런 리더 보기 쉽지 않은데 말이죠.. 저도 저런 사람 되고 싶지만, 저 천재적인 조정능력은 하늘이 주신 재능이라 해야할지..
@user-solakjawr2 жыл бұрын
전혀 평범하지 않으신거 같네요 정말 좋은 상관인거 같네요
@유수윤-m4o2 жыл бұрын
이 영상을 보면서 되돌아 보니 의외로 제가 아이젠하워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게 놀랍게 느껴집니다 엄청 중요한 인물인데....덕분에 이렇게 많은걸 알게 되었어요
@redblues9566 Жыл бұрын
이 프로그램을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남 박사님이 설명도 너무 잘 하시고, 방송 내용도 재미있네요. 부디 전쟁사 관련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주세요. 국방TV도 최고입니다.
@jinjin74452 жыл бұрын
이런 내용을 좋아요 한번에 누리다니 ㅜㅜ 감사합니다.
@gomdorij32132 жыл бұрын
대통령이 된게 우연이 아니군요... 대통령은, 조정능력이 뛰어 나야 되니...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건.... 잘된 일^^*
@Smilehouse_kr2 жыл бұрын
수많은 전쟁영웅 중 미대통령이 된 사람 거의없죠. 대단한 인물은 맞습니다. 평범하지만 웅장했던 인물사인듯 싶내요^^ 잘봤습니다. 원픽 남보람 교수님
@민들레-j5s2 жыл бұрын
명장 틈에 있으니 평범해 보인 거죠 ㅎㅎ 저 자리까지 올라가기가 쉽겠어요?
@kju422 жыл бұрын
아이크는 묵묵히 일하는 뛰어난 행정가스타일이었고 그래서 맥아더는 뛰어난 참모라며 7년이나 데리고 있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지만 아이크는 맥아더를 싫어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최고자리에까지 올랐는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하여간 1940년 아이크는 중령이었다 마셜의 눈에 들어 유럽전쟁에 대한 여러 계획을 짜도록 명령받고 잘 수행하여 마셜의 의지에 따라 초고속 승진 3년만에 대장이 되었다
@ksm69552 жыл бұрын
아이크는 아이젠하워를 말하는거예요? 별명인가요?
@로수맥콤비정Ř18542 жыл бұрын
"Ike" 별명이죠
@kju422 жыл бұрын
@@ksm6955 애칭!
@kju422 жыл бұрын
역사적으로 재밌는 사실은 , 아이크는 독일계로 1840년대 독일에서 의회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다 실패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들의 자손으로 마침내 나치독일을 패망시키고 독일을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복귀시켰다는 것이다.
@mercikim842 жыл бұрын
"노병은 사라진다"를 맥아더의 부관으로서 쓴 사람이라고 합니다
@daewookkim47952 жыл бұрын
사실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패튼, 몽고메리 그 둘을 그나마 잘 다스릴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실제로도 2차대전 당시의 연합군 총사령부는 이런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내가 옳네 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버로우.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뒷머리를 부여잡는다. 6. 브래들리 장군이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래러 간다.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이하 반복. 지들이 잘났다고 뻐기는 패튼과 몽고메리를 다스리면서(?) 전쟁을 지휘해야만 했던 아이젠하워 원수님..... 진짜 엄청나게 힘드셨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회고록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그 두 프리마돈나에게 공평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줘야 하는 일은 진짜 독일군과 싸우는 일보다 더 힘들고 피곤했다.'
@blue1570k2 жыл бұрын
맥아더는 귀족적이며 적이 많고 패튼은 불같은 성질에 독불장군이고 아이크는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에 성격이 좋고 신중하니 정치권에서도 안심하고 대통령 시킨것....실례로 아이크가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에와 한국전 끝내겠다 발표함 정치권 목소리에 충실히 따라주죠
@xtkswjrx2 жыл бұрын
아이젠 하워와 니미츠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맥아더보다 일반 대중에게 덜 알려진것 같네요...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20여년전 장교 리더쉽 교제에서 아이젠 하워의 장점에 대해서 나왔던게 기억 나내요.. 귀족적이고, 정치가들과 충돌을 빚었던 맥아더와는 대척점이 있던 분이셔죠... (개인적으로는 니미츠를 더 좋아는데, 니미츠 평전과 역사상 최강의 해군전력을 지휘했던 오성장군의 단촐한 묘역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 물론 니미츠도 맥아더랑 좀 사이가 ㅎㅎㅎ )
@onlydoingjk2 жыл бұрын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충성심이 흘러 넘칠것 같다
@vthvhfhvhuug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 군인과 정치가로서 아는 정도였지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지만 그의 리더쉽에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도 조직내 문제해결 방식의 접근방법을 달리 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최진규-f8p2 жыл бұрын
조지 마셜 장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실 예정 이실까요?? 마셜장군님도 꼭 소개 해 주셨으면 합니다!!
@gamevideochannel1550 Жыл бұрын
유익한 내용의 영상 감사합니다!
@user-dq6tf9ms6q2 жыл бұрын
능력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듯 치우치지 않고 조정하고 리더쉽과 친화력을 갖는 것도 대단한 능력인듯 ㅎㅎ
@최호준-f5f2 жыл бұрын
정말 유익한 영상이었습니다.
@박준석-b4k2 жыл бұрын
잘봅니다
@쁍삡2 жыл бұрын
지금 우리나라에 제일 필요한 인물상인듯
@calmdown32592 жыл бұрын
위대한 인물중에서의 평범성 뭔가 애매모호한 말이내요
@j86632 жыл бұрын
그 군대 에서는 중간만 하라는 명언이 있던데 그걸 철저히 지킨 사람이 아이젠하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f9e9f7 ай бұрын
I like ike
@3월의라이온2 жыл бұрын
나중에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장군 반대로 최악의 지휘관에 대해 남보람님 주관적 순위 리스트 내주면 좋겠습니다. 나라별로 하시면 더 좋고요.
@ruind.85112 жыл бұрын
미군 최악의 지휘관 하면 맥아더 들어갈듯 ㅋㅋㅋㅋㅋ
@itwasjustbored2 жыл бұрын
최악은 역시 그 분이거나 그 분 상관이겠죠ㅋㅋㅋ
@김연준-y4f2 жыл бұрын
명예독립군 렌야 센세는 무조건 들어갈 듯 ㅋㅋ
@성이름-v2l3r2 жыл бұрын
독일에 인성 쓰레기 몇 있고 러시아에 똥별도 있고 몽고메리처럼 적당히 평타치다가 마켓가든 한 사람도 있고 무다구치 렌야선생처럼 독립군도 있고
@user-yn4di5eg1i2 жыл бұрын
프레덴달
@김희록-e1h2 жыл бұрын
윌리엄리히 이야기도 다뤄주세요!!
@뽀둥이-k7r Жыл бұрын
16:02에서 부대원들 돟그랗게 모이고 만들고 그 속에서 개개인별로 인사나누는 방식은 정말 본받을만합니다. 위인의 한가지를 배우고갑니다.
@ParkJongMin2000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미소가 타고난 살인미소네..
@minsugu80232 жыл бұрын
군인이고 정치가라서 성공한것. 군과 정치에선 튀는 인물보다는 묵묵히 할일을 하고 갈등을 원만히 조정할수 있는 사람이 가장 능력있는 인물.
@daewookkim47952 жыл бұрын
튀는 인물은 전쟁때만 쓸모가 있는 법이고 묵묵히 할 일을 하고 갈등을 원만히 조종하는 인물이야말로 전쟁 이후의 평화적인 시기에는 군과 정치계에 더 꼭 필요한 인물인 법이지요. 리버풀의 프렌차이즈 스타인 스티븐 제라드 처럼 말입니다.
@@Travel_over_sea 드골은 저 당시 아이젠하워-패튼-몽고메리 급이 아닙니다. 프랑스 망명 정부의 수장이었고 비록 힘 없는 국가라지만 엄연히 국가 원수급. 드골이 저 당시 미국 영국의 푸대접 때문에, 2차대전 후 집권하고서 핵무장과 독자 노선 걷게 된. 서부연합국 유럽 사령관 아이젠하워 밑의 수하 드골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만일 입장이 거꾸로 되었을 때, 즉 미국이나 영국이 독일에 점령되어 패전한 미영을 떠나 망명 정부 이끌고 투쟁 아무나 할 수 없을 겁니다. 아이젠하워-패튼-몽고메리가 과연 그런 망명 정부 이끌 국가 지도자가 되었을지 솔직히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드골은 행동으로 입증했습니다. 2차대전 때 영국 보다 미국측에서 드골을 더 심하게 무시했었습니다. 영국은 망명정부 위치가 영국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름 자유 프랑스군 위상을 인정했지만, 미국은 북아프리카 상륙 당시 드골 아닌 비시프랑스 장군 다를랑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다를랑이 암살되어 결국 드골로. 그 때문에 드골과 처칠의 사이는 나름 원만했습니다.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고, 처칠이 실각했을 때 처칠은 드골 초청으로 프랑스 국빈 방문 정말 따뜻한 환대 받기도. 드골과 프랑스 정부만이 아니라 수 많은 프랑스인들이 거리에서 진심으로 환영. 아이젠하워 역시 미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드골의 프랑스에서의 위상에 비할 수 없습니다. 투쟁의 성격 자체가 달랐기에.
@scz83332 жыл бұрын
@@Travel_over_sea kzbin.info/www/bejne/m2nZfWemlNdspJI : 1944년 파리 해방 뒤, 드골-처칠 파리에서 헌화 묵념 및 프랑스-영국-미국-캐나다 군 승리 퍼레이드. 저 때면 이미 프랑스도 기력 꽤 회복해서, 프랑스 전통의 근위 기마병들 모습도 보이는군요. 영상에서 보듯 미 대통령은 없더라도, 미군 최고 사령관급이 처칠과 드골 곁에 안보인다는 점에서 미국 꽤 어리숙했던. 약 10년 뒤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이 된 후, 은퇴한 지팡이 짚고 걷던 처칠 초청했을 때도 프랑스인들의 환대는 따뜻했습니다. 캐나다는 사실상, 영 + 프 연합체. 그런 이유로 디에프 상륙 및 노르망디 상륙에서 캐나다군의 참여와 역활이 컸습니다. 드골은 상급자에게 임명되고, 명령 지시 받던 아이젠하워-패튼-몽고메리 급이 아닙니다.
@scz83332 жыл бұрын
@@Travel_over_sea 1. 처칠의 프랑스 국민을 향한, 프랑스어 연설. 1940년 10월, 프랑스 항복 후. kzbin.info/www/bejne/eXmldICgrq2rrbM 2. 그 연설의 영어 번역 원고 justpaste.it/m3op 처칠의 프랑스어 연설 끝 부분 일부만 옮기면 ( 직역 보다는 의역 섞어), ---------------------> " 좋은 어둠이 되기를, 밝아올 아침을 위해 어둠 속에서 힘을 모으기를. " ---------------------> " 용기 있는 이들, 대의를 위해 고통받는 이들, 이미 쓰러져간 영웅들, 모두에게 새벽의 빛은 밝아올 겁니다. " ---------------------> " 프랑스 만세 ~ ... " 처칠이 프랑스 국민을 상대로 프랑스어로 저렇게 연설했는데, 드골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임명직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선출되었거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이들은 참으로 결정적 역활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2차대전 종전 무렵 철의 장막 대처에서 보였던 미영의 차이, 막 최강대국 된 미국의 어리숙함. 2차대전 이후 중동부 유럽인들이 겪었던 철의 장막과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본다면 처칠은 냉철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1,999년~2,000년 세기가 바뀌던 무렵. 유럽인들을 상대로 했던 여론 조사에서 처칠은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단 1인으로 선정되기도. 아이젠하워-패튼-맥아더-몽고메리 ...등과 처칠-드골은 아예 레벨이 다른. 아이젠하워는 훗날 선출직 미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처칠-드골 반열의 리더는 아닙니다. 사병 뺨싸대기 날린 패튼이나 오만 콧대 높았던 맥아더는 더욱 더 안드로메다급 수준 차이가 있고.
@로렘2 жыл бұрын
사관학교를 미식축구 하기 위해서 들어갔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그래서 객관적으로 전적도 실력도 떨어지는 웨스트포인트보다 미식축구 실력이 더 좋은 아나폴리스를 노렸다는 얘기가
@승아-v7m2 жыл бұрын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이 중간에서 이하 정도 많이 놀아본 사람들이 사회에서 더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다...???😄
@azatos009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가 정말 위대했던 것은 군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세금을 펑펑 끌어다 쓰며 끊임없이 전쟁을 조성하는 군사기업들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걱정했다는 것이지
@daewookkim47952 жыл бұрын
사실 미군 내의 장군들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었을 겁니다. 그 당시 미군의 장군들 모두가 아이젠하워에게 꼼작도 못했는데 그 이유가 아이젠하워 본인이 평생을 직업군인이자 참모장교로 살아온 분인 데다가 2차 세계대전을 승전으로 이끈 전쟁영웅이기 때문에 미국의 장군들 중 어느 누구도 아이젠하워를 상대로 더 군대를 잘 안다고 할 배짱도 없었고 참모장교로만 보낸 분이기 때문에 국방예산의 꼼수 부분을 찾아내는 데는 진짜 귀신같았기 때문에 그런 꼼수 부분의 돈을 미국인들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Jordan-gc2ch2 жыл бұрын
쉽게 말해서 관운이 좋다
@청솔향-g9u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의 강점은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주위에 그를 긁어대는 아부꾼이 없었던것! 겅반대로 아톨프 히틀러는 제 입으로는 면밀히 계산 한다지면 결국엔 감정에 휘둘리는 직관에 의지했기에 결국 마지막에는 아부꾼만 넘쳐났었음! 즉, 히틀러의 패배가 바로 아이젠하워의 승리임.
@ttlqk48472 жыл бұрын
딸이 자기와함께 일했던 부통령 닉슨 하고 결혼한걸로 알고있고, 한국전쟁에도 당선인 신분으로 방한하고 나중에 60년?에도 방한했는데 우리나라는 그당시에 미대통령오니까 구경거리여서 사람몰리고, 이 영상에서는 경청 대화를 잘했다는게 나오는데 이승만 대통령하고는 갈등이 있었음 그러고보니 트루먼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역사와도 인연이 꽤있음
평범했지만 개성이 강하고 거칠었던 몽고메리, 조지패튼을 다독여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인물,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가 두쪽으로 쪼개질 위기에 여러번 처했던 영미 연합군을 하나로 잘 끌고 나갔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나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한 가지를 관심사가 같으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데요. 지상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 작전을 하느냐 마느냐 결단을 내린 것은 아이젠하워였습니다. 총사령관이 그였으니까요. 당시 상륙작전이 반드시 성공할거라는 확신은 없었기에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아이젠하워의 결단력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kzbin.info/www/bejne/rai9Z4qceM9mjqM) 이 영상 10:07 에 그의 위대한 결단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해서 공유합니다.
@kkullkkullkim4135 Жыл бұрын
아이크❤
@lukelkh10182 жыл бұрын
항상 겸손하라
@fierwalt2 жыл бұрын
일단 프로야구 1군에는 들어가고 난 뒤의 평범함이군요 ㅋㅋㅋ
@피부암통피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 재밌게도 그는 독일계 미국인 사령관....ㅋㅋㅋ저도 연합군 사령관 중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제일 좋아함..ㅎㅎ
@scz83332 жыл бұрын
미국인들의 조상 출신 분류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부계 성씨 제도 사용하는 지구촌 모든 공동체의 특징이기도 하는 사항을 고려하면서 봐야. 미국의 역대 대통령 모두는 모계와 함께 따질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오마바 포함 잉글랜드계 되기도. 이런 가정을 해보죠. 모계는 모두 100% 잉글랜드계 + 부계는 1/4 독일계인 아빠 (친할아버지만 순수 독일인, 나머진 다른 출신) ----------------------------------------------------------------------------------------------> 저런 경우 그냥 독일계로 분류됩니다. 즉 의미 별로 없는. 미국내의 거대한 출신지 집단 중, 잉글랜드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거대 집단 조차도 자신들의 출신을 기리를 행사가 존재. 즉 독일계-아일랜드계-스코틀랜드계-웨일즈계는 미국 전역에서 개최되는 자신들 출신을 기념하는 행사가 존재하지만, 잉글랜드계는 미국 전역에서 실시되는 행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있다 해도 메이플라워 등의 지역적 행사. 그 공동체의 주도 세력은 그런 행사가 필요 없기에. 1970년대 무렵 까지의 미국 인구조사에선 언제나 1위가 잉글랜드계. 하지만 그 이후에 1위가 독일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 중에는 분류 항목에 북미대륙 출신 백인 카테고리 때문. 스스로를 북미대륙 출신의 백인으로 여기는 이들도 기억으로 2,000만 가까이 될 겁니다. 자존심 엄청 강한 미국내 용가리 통뼈 백인 집단은 자신들의 출신을 유럽의 특정 국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북미 출신. 그들 거의 대부분은 아마도 잉글랜드가 북미 식민지 개척하던 초기 이주민들의 후손일 것. 그리고 독일계와 달리 영국 제도 출신은 3 + 1 로 세부적으로 분류됩니다.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를 따로 분류하며, 특히 아일랜드계는 단독으로도 잉글랜드-독일계에 약간 뒤질 정도로 규모 큰. 과거 역사의 감정적 대립으로 아일랜드계는 영국제도 출신으로 분류 자체도 거부할 것. 잉-스-웨일즈도 함께 분류되는 것 좋아하지 않고 통계적으로 뭉퉁거려 브리튼제도 출신으로 분류되는 정도. 아일랜드를 제외한 영국 제도 출신인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계 >= 독일계 아일랜드를 포함해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영국 제도 출신인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아일랜드 >> 독일계 잉글랜드계+자칭북미출신백인 > 독일계 -------------------------------> 부계 성씨로 분류해도 저렇게 됩니다. -------------------------------> 부계 아닌 모계 까지 포함해 분류하면, 독일계 비중은 낮아지고, 잉글랜드계 비중은 높아지고. 그리고 미국독립 이후, 이민 통계 자료가 상세히 남아 있는 19세기 100년간 인구 이동에서, 영국제도에서 미+캐+호+남아공+뉴...전세계로 유출된 인구는 독일을 몇 배나 압도합니다. 영국제도에서의 인구 유출은 미국이 많긴 했지만 상당 부분은 여러 국가로 분산, 하지만 독일은 거의 미국행. 독일에서 미국 다음으로 이민 많았던 곳은 아르헨티나, 그 때문에 2차대전 후 나치 생존자 상당수가 아르헨티나로 탈출. 19세기 100년간 영국제도에서 전세계로 유출된 인구는 기억으로 1,000만이 넘습니다. 이민 1세대가 1,000만이 넘으니 그 후손들은 거대한 수치가 될 것.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제도 전체 인구가 약 1,000만. 현재 영국 본토 즉 잉+웨+스+북아일랜드 인구는 6,500만 넘는. 나폴레옹 때 영국 1,000만은 아일랜드 포함한 인구. 21세기 현재 아일랜드 자체는 정말 작은 인구지만, 미국내 아일랜드계는 어마어마한 집단.
@scz83332 жыл бұрын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부모 계통 분류, 오바마는 부모의 조상이 무려 9개국으로 최다. 2분 37초 kzbin.info/www/bejne/oH7HYYaajayefMU 대통령의 부모의 성씨를 부계로만 따졌을 때, 출신지별 통계는 그레이트 브리튼 출신이 압도적입니다. 2분 57초. 즉 어머니의 어머니 쪽은 생략, 어머니의 아버지 쪽으로만 따졌을 때. 부모 모두 모계 다 따지면 모두 잉글랜드계와 연결. 잉글랜드 38, 얼스터 스콧(북아일랜드, 개신교 지역) 21, 스코틀랜드 17, 웨일즈 15 하지만 미 대통령 가계는 엄청난) (오히려 잉글랜드계가 개신교 북아일랜드-스코-웨일즈에 비해 단위 인구당으로는 대통령 부모 배출 꽤 쳐지는) (과거 켈트의 후예인 연합왕국 UK 내부에서 소수계가 신대륙 이주 후 정치적 야망을 더 키웠다고 해석할 수 있는.) 미합중국 건국 초기에는 사실상 브리튼 제도 출신만 대통령이 배출되었지만, 세월과 함께 점차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주류는 개신교 출신 이민자들입니다. 따라서 브리튼제도+독+네 등의 북서유럽 출신이 주도. 카톨릭 계통으로는 프랑스 9, 아일랜드 4 정도며 부모 모두를 합했기에 실제 미 대통령 수는 더 적습니다. 네덜란드계에는 유명한 대통령이 2명 있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미국의 거대 기업 카르텔을 분쇄하고, 미-스페인 전쟁 영웅인 테어도오 루즈벨트와 2차대전 루즈벨트. 루즈벨트 ---------------------> 영어로 옮기면, 로즈가든. 우리 말로는 장미 정원. 오바마의 아버지는 영연방인 케냐의 한 지역 부족장 아들입니다. 2차대전 후 미국 유학 중에 백인 여성을 만나 오바마 낳았다고. 정말 미국은 꿈을 꾸면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기도. 오바마 할아버지가? 2차대전 인도-버마 전선에 영연방군으로 참전했다고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 미 대통령 당선되었을 때, 부계가 잉글랜드계가 아니면 일단 언론에서 어디 어디 계라고 보도됩니다. 아버지 쪽으로 걸치기만 하면 무조건 그 쪽으로 분류되는 식. 아버지 성씨는 확실하지만 부계 피의 농도는 보장 안되는. 최근의 트럼프 전 미 대통령, 독일계라고 언론에 나오듯. 트럼프가 스코틀랜드에 골프장 소유하고 자주 방문한 이유는 트럼프의 모계가 스코틀랜드. 현재 미국의 인구 구성은 히스페닉의 가파른 증가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아마 조금만 세월이 지나면 히스패닉 출신 대통령이 배출될 겁니다. 미국이 과거 멕시코로 부터 텍사스-아리조나-캘리포니아 등 현 미국 본토의 약 1/4~1/3 사실상 무력 탈취했는데, 늘어나는 히스패닉으로 인해 미국 자체가 라틴 아메리카에 내부에서 잠식당하는 중. 역시 하늘은 공평한 것 같습니다.
@JinBaGeuMeok2 жыл бұрын
미 펜타곤 초청받아서 갔을때 아이젠하워는 경력 등등 여러가지 부각을 많이 받았는데 반면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지휘하는 모습 말곤 하나도 안보였는데
@맑은하늘-g9d Жыл бұрын
맥아더는 2대전때 필리핀에서 탈출한 이후 해군이 주축이된 태평양전선에서 허울뿐인 사령관으로 활동했으니 어쩔수 없었죠. 그사람은 능력이나 지성은 좋았지만 본인의 에고가 너무강해 몰락했습니다.
참된 리더임..."결단력,지휘력이 탁월했다기보다 신중하게 남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견이 있을때 갈등없이 잘 조정했다는거" 에 공감합니다 경청은 하되 모든 의견을 다 수용할 수 없죠....그걸 걸러내고 판단하는것도 리더의 능력이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폐망한 이유중에 기수,꼰대문화 때문에 밑에 장병들 의견을 무시하고 고집부리다가 망한게 가장 크죠 안타까운건 우리나라 군문화가 일본을 모티브로 했다는거임...장단점이 있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단점이 더 많을것같음
@강연우-j3z5 ай бұрын
마셜 장국은....... 가면 큰일 나요..... 행정에 천재이자 사기캐들을 어떻게 보내요....
@charliecharlie25103 ай бұрын
이순신 있그요 세계 최강이구요
@parmenideskim97397 ай бұрын
아이젠하워는 육사 졸업 성적도 시원찮았꼬 진급도 동기 중 꼴찌... 그런데 아이젠하워를 눈여겨 본 사람은 바로 마셜 장군이라고 합니다. 마셜 장군이 어느 훈련을 지켜보다가 아이젠하워 부대가 보여준 뛰어난 활약을 보고 그때부터 아이젠하워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고 하며 실제 아이젠하워의 전술 지휘 능력도 탁월했다고 합니다. 2차대전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선을 시찰하면서 한 눈에 수비 부대의 배치가 잘못됬고 사단장의 역량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했고 곧 패튼으로 사단장을 교체했습니다. 벌지전투에서도 독일군이 벌지에 나타났다는 보고에 주변 부관들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지만 아이젠하워 만은 이게 히틀러의 대규모 공격임을 즉각 알아채고 즉시 가용 가능한 모든 부대를 전부 벌지로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Travel_over_sea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 앞에 있다 정맞은 인물중 1인 : 패튼 (.....)
@인도양의제왕나갈플Ай бұрын
2차 세계대전 최고 명장 딱 둘만 꼽는다면 구데리안 만슈타인이 아니라 마셜과 아이젠하워다
@Inceptor_key2 жыл бұрын
神奇卓異 非至人 至人 只是常! 신기하고 특이한 재주가 있다하여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뛰어난 사람은 그저 평범할 뿐이다! 채근담에 근거하면 아이젠하워는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다.
@CME-qn7lp8 ай бұрын
아이젠하워에게 진급이 늦었다고 하면 제임스 밴 플리트는 어떻게 하라고...웨스트 포인트 동기인데...아이젠하워가 대장으로 유럽총사령관 할때....밴플리트는 대령으로 82공정사단 연대장으로 노르망디에서 낙하산타고 낙하했는데...조지 마샬에게 찍혔다는 이유로...나중에 동기인 아이젠하워가 왜 밴플리트가 물을 먹는지 물어보니...밴플리트가 자신에게 술주정 부렸다고...이때 아이젠하워가 밴플리트 술 안마시는데? 조지 마샬이 알아보니 자신이 착각해서 엉뚱한 사람을 계속 진급 누락 시켰던것...이후 장군 달아주고...전쟁말기에는 사단장까지...이후 6.25전쟁때는 대장까지...6.25때 2차대전때 영웅이라고 불렸던 장군들도 많이 참전...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101공수사단장이었던 맥스웰 테일러 대장도 왔었고...
@codeDoll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는 그냥 펑범한 천재였을뿐... ㅋㅋ
@초보미식가 Жыл бұрын
아이젠왈: 마셜장군모든걸 배웟다...
@Minkyu_Han2 жыл бұрын
서류작업을 더 잘하는 장교
@kinsevenb67352 жыл бұрын
푸틴 암수술 담당 의사 수술당일날 결단을 내리세요. 손 한번 까딱하면 수많은 인명을 구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을수 있습니다.ㅋ
@koreafox20642 жыл бұрын
ㅋㅋㅋ 평범이 너무 하드코어 하구마이~~
@EolaRobstar7772 жыл бұрын
개인적으로 의문인게 아이젠하워가 야전에서 대부분 활동하셧다고 표현하셧는데, 제가 알기로는 1차대전 참전도 한 적이 없으며 맥아더 부관으로 필리핀까지 간 기간 치면 9년간을 야전에 떠나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야전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햇다는 표현이 의문입니다. 이로인해 유럽원정군 총사령관 자리에 오를 때도 실전경험이 없는 사람이 자리에 오른다고 논란이 있엇던걸로 기억해서요. 물론 이후 15 보병연대 휘하 대대장을 맡고 41년 대령을 달고 3군 참모장으로 있으며 루이지애나 기동훈련에서 눈부신 성과를 낸걸 알고는 있지만 이걸 대부분의 시간을 야전에서 보냇다는 표현은 애매하다고 봅니다. 남소장님이 더 다양하고 깊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으실테니 실례가 안 되신다면 그렇게 판단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성이름-v2l3r2 жыл бұрын
야전에 없던 사람 기준이 마셜인가봄 ㅋㅋㅋ
@markpark64502 жыл бұрын
미국이니 아이젠하워가 성공함
@남자탁용삼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 장군에서 대통령으로 맥아더장군편도 했으면 좋겠다
@은하수-l1u7 ай бұрын
평범이 평범이 아니다 ㅎㅎ
@usergwhsj12 жыл бұрын
625때 우리나라를 구해준 대통령
@인생이레이스화이팅동2 жыл бұрын
😅😅😅😅😅😁😁😁😁😁
@만물상자TV전쟁의신2 жыл бұрын
국방TV에서는 왜 연합국 장군들만 다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젠하워가 드라마틱한 면은 확실히 부족하네요. 갈등많은 영미 연합군 가운데서 조정자 역할은 인정합니다만.
@calmdown32592 жыл бұрын
사료가 독소일은 정확하지도 교차검증도 안나외서 이런 공적인 곳에서 이야기하기 힘든면이 많죠
@bunningshouse2 жыл бұрын
앞에 독일장군 일본장군 편만 몇십편 인데 뭔 개소리임?
@무뎅이2 жыл бұрын
롬멜 모델 렌야등등 추축국도 많이 다뤘는데요
@manhan952 жыл бұрын
@@bunningshouse 구데리안 같은 인물 보고 싶은데 그냥 연합국 나왔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으니까 떼쓰는거지 뭐 ㅋㅋㅋ
@만물상자TV전쟁의신2 жыл бұрын
@@bunningshouse 발터모델에 대한 영상은 저도 봤는데요. 영상 내용에서 몽고메리, 브래들리만 예를 들기에 한 말입니다.
@averageman5792 жыл бұрын
고속도로 (freeway) 만들면서 부유한 흑인동네와 이민자들 동네를 두동강 내버리고 거기다 고속도로 놓은거도 있긴 하죠... 영화 Cars 에서 나오는거 처럼 이로인해 경제적으로 버림받은 동네들도 생겼지요
@승아-v7m2 жыл бұрын
아이젠하워 MBTI 혹시 INFJ 인가??ㅋ
@border19002 жыл бұрын
막판 뒤집기! 꿈도 희망도 니껀 엄써.. ㅋㅋㅋㅋ
@이희진-n7r2 жыл бұрын
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자가 살아남는다
@mercikim842 жыл бұрын
이승만 대통령과의 심한 마찰도 있었다고 합니다
@coffeetar2 жыл бұрын
한국이엇다면 극혐될 리더쉽 에휴 그놈의 카리스마
@machienshock2 жыл бұрын
사실 한국전쟁을 승리했다면 맥아더가 대통령 됬음. 하지만 대통령과의 정치적 마찰로 노병 발언과 함께 정치적 생명이 은퇴해버림 마지막 경쟁자까지 처리되니 당근 아이젠하워가 될수밖에
@daehwankang85002 жыл бұрын
진정한 장군은 오직 패튼이고 진정한 애국자이며… 스탯도 사기고 책임감도 넘사인 레전드임
@scz83332 жыл бұрын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scz83332 жыл бұрын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kzbin.info/www/bejne/aWXSg2V6ZqyJi5Y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렬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scz83332 жыл бұрын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kzbin.info/www/bejne/pl6cqGWAathjrrc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scz83332 жыл бұрын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kzbin.info/www/bejne/mWmXZXikbb2peZY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scz83332 жыл бұрын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선언은 1917년 하반기, 하지만 대서양 건너고 프랑스 전선에서의 준비 과정 등으로 미 지상군이 본격 전투에 투입된 것은 종전 몇 개월 전인 1918년 5월 이후.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이군요.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패튼 북아프리카 상륙 첫 등장 이후, 시칠리에서 빰싸대기 사건으로 문책 보직 해임 까지 전 기간이 고작 6개월. 특히 캐서린 협곡 미군의 전멸급 패배 후 패튼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해서 북아프리카 전선 종결 까지 고작 3개월. 튀니지 전역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보조 수준으로 패튼이 뭐 대단한 전과 세울 기회도 없었음.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 시점은 1943년 5월, 시칠리 상륙 개시는 7월, 시칠리 전투 종결은 8월. 시칠리 상륙 작전 개시 전 준비 기간 2개월 빼고 나면 실제 전투 기간은 고작 1개월 정도. 그 상황에서 문책 보직 해임당했던. 생각해보길 --------------------------> 패튼이 북아프리카에서 무슨 기갑 전술로 돌파를 했을지를.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영연방군이 독일 기갑부대 80%와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상대할 때, 독일의 거의 모든 예비대가 영국군 지역에 투입되어 발생한 미군 지역의 약화된 방어선 빈 틈으로 브레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패튼은 코브라 돌파 이후에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을 지휘하면서 투입되었던. 패튼은 코브라 돌파 아무 관련 없습니다. 생각해보길 ---------------------------> 정말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이 패튼에 의해 분쇄되었습니까? Never!!!!!!!!!!!!! 미 지상군이 독일 지상군 주력을 첫 상대한 것은 종전 몇 개월 전인 벌지 전투. 벌지 전투는 그 때 까지 미국 지상군 역사상 단독의 최대 승리, 따라서 패튼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던 측면.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벌지 당시 독일군은 패튼의 지휘 여부 상관 없이 미군 지휘관이 누구였던 돌파 불가능했습니다. 패튼이 벌지에서 전선 붕괴를 막아내, 서부전선 독일의 대역전승을 불가능하게 한 주역이라고 착각해선 안되는. 날씨만 잠깐 개이는 정도로도 독일군은 즉시 공습에 의해 무력화되는 넝마 상태였음을 인지하길. 연료도 부족해서 작전 계획상에 미군 연료 탈취해서 작전 수행하는 수준으로 서부 연합국 역전패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 정말로 냉정하게 벌지 전투 바라본다면, 독일군이 왜 최후의 대공세를 하필이면 거기를 택했겠습니까? -----------------------------------------> 미국과 미군에겐 좀 그렇지만, 거기가 서부전선 가장 약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 설마 독일이 자존심 걸고, 가장 강력한 곳을 선택했겠습니까?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입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패튼을 바라보길.
@김연구자2 жыл бұрын
이 영상에 실망했습니다. 맥아더 이야기는 나올 줄 알았는데 미국의 시저라는 맥아더 밑에서 9년 동안 전속 부관을 했으니 협상의 도가 틀 수밖에 없죠. 맥아더의 오만함은 하늘? 우주를 돌파한 영웅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1주일도 못 참았을 것입니다. 9년동안 못된 스승 만나서 박박 기어다니 스승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죠. 그리고 미국의 시저는 미국입장에서는 칭찬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시저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고 아시다시피 트루먼을 3선 못나가게 막았지만 자신은 여러가지 복잡하지만 아이젠하워에서 밀려서 대통령 출마도 못했습니다.
@Utd52 жыл бұрын
맥아더의 오만도 이해가 가는게... 일단 명문가 금수저 출신에 머리나 운동능력 피지컬 외모 등도 좋았고, 최연소 기록들은 다 갈아치우면서 승승장구... 몇 번의 작전상 실패도 많았지만 상대는 북한 아니면 일본이고 본인은 미국의 장군이라 빵빵한 지원으로 쉽게 일어날 수 있었죠.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최고라는 오만함을 가질 수 밖에 없을지도요...
@Wh1087 ай бұрын
실제로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은 너처럼 인류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하나도 내세울게 없는 일반이의 ㄱ관점에서는 오만해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맥아더는 오만한게 아니라 실제로 뛰어난 사람이었지 결과를 봐봐 결국 인천상륙작전 어떻게든 성공시켰고 중공군 싹 밀어버려야한다 이렇게 의견을 표출한것도 자신만의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으니 저렇게 말한거지 지금으로 따지먄 일론머스크나 스티븐잡스도 니 기준에는 오만해 보이겠지? 근데 그런 사람들은 오만한게 아니라 너보다 몇백배 노력했을 뿐더러 너보다 재능있게 태어난거고 너보다 더 인류에 가치있는 일을 시도했다는 거 뿐이야 패배자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보면 오만하다고 질투하기 쉽지 그 사람한테서 배울점을 찾아낼 생각을 해여지
@권순덕-p6o Жыл бұрын
원래관운이뛰어난인물은 이렇게다른사람의천거에의해 높은자리에오르고 명성을얻게됩니다
@권순덕-p6o Жыл бұрын
뛰어난리더싶세계적인물로 손색이없네요
@권순덕-p6o Жыл бұрын
2차대전의영웅 아이크 타고난지휘관전역후대통령까지오른 영웅 관운도따랐으니큰이름으남기게되었죠
@권순덕-p6o Жыл бұрын
적이없다는것이또이분의큰자산이였겠조 좋게좋게하면서화합을도모하는지휘관이였겠네요
@국어-v2o10 ай бұрын
패튼 조차 아이젠하워장군 밑에서 일했으니까 답 나옴 ㅇㅇ 패튼 독불장군인데 그 조차도 아이젠하워 밑에서 일함 ㅌㅋㅋㅋㅋㅋㅋ
@권순덕-p6o Жыл бұрын
뛰어난지휘관 우리나라 박정희와같이탁월한군인이였읍니다
@TV-nr8nl Жыл бұрын
다들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군요. 주변에 이미 능력이 차고 넘치는 장군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정과 조율에 뛰어난 아이젠하워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 장군들의 의견이 모두 맞는 말이고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것들인데, 서로 통합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관점과 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변에 능력이 부족한 장군들 뿐이었다면 아이젠하워는 똑같이 그저 그런 지휘관으로 남았을 겁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또 다른 오해가 있는 듯하여 지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아이젠하워와 같은 리더는 필요 없습니다. 온통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것들이 리더 자리에서 병x짓하고 있으며, 그 꼬라지를 잘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절대 다수니까요. 남 얘기하는 거 아닙니다. 윤석열 찍은 너 말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