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속 오류 수정합니다. 에도성 앞 동상은 "쿠스노기 마사나리"가 아니라, "쿠스노기 마사시게"입니다. 카마쿠라 시대에 대한 무지가 이런데서 티가 나네요. 지금까지 마사나리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한자 읽기에 또 당했네요...
@박호두해외선물-q2e5 ай бұрын
7:11 카이에다 노부요시(海江田信義)도 오류인것 같습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user-fw7kg1xt8g 복붙 후 한자를 안바꿨네요. 으휴... 지적 감사합니다.
@dominion89985 ай бұрын
저도 쿠스노키 마사시게 메이지시대에 대두된 남북조정윤론때문에 알게됐네요. 일본어 한자읽기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제발.....
@모닝커피_XD5 ай бұрын
어제의 피로가 대뇌의 전두엽으로 퍼지는 느낌이 드는 저녁에 커피 한잔 같은 영상 시청합니다. 다들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표현에 감성이 넘치십니다..😅😅
@あめ-j8w4 ай бұрын
최종후이!!
@dhjeon11635 ай бұрын
사진도 초상화도 안남아서 세이난전쟁때 안죽고 러시아로 망명했는데 추후 니콜라이 황태자 방일때 같이 일본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엄청 퍼졌었다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죠ㅎ
@dominion89985 ай бұрын
저런개소문은 어떻게 퍼진건지 ㅋㅋㅋㅋ
@matelets85385 ай бұрын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오-p8z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samurairomanceАй бұрын
소중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benyu83685 ай бұрын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퇴근길에 시청했네요. 아무나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장르… 감사를 드립니다. 수고하세요.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격려와 응원 감사합니다.
@kdyu1785 ай бұрын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 가고시마가 배경임. 초등학교 교실 칠판 위에 사이고 다카모리 초상화가 걸려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봉건제로 인한 지방색의 관성이 상당히 강하구나 느꼈습니다.
@에르브4 ай бұрын
가고시마사람들기질이 사이고 다카모리랑 기질이 비슷한것보면 신빙성이 충분히 있어요 가고시마현사람들이 야마구치현이랑같이 정한론자도 많고 저돌적으로 외세침략을 주도한것보면 사이고 다카모리기질이랑 일맥상통하는면이 있어요
@rockman23925 ай бұрын
그러고보니 세고돈 주연배우가 스즈키 료헤이 였네요. 사에바료...!!
@강경구-g3r5 ай бұрын
우에노 공원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사냥개와 함께 잇는- 봣네요 그 동상 뒤에 창의대 묘비가 잇더군요 보신전쟁때 막부군으로 마지막 까지 항전 허다 전사한 막부파 전사자들 묘라 더군요
@13579TV5 ай бұрын
존경합니다 !!!!!
@206fa55 ай бұрын
영웅은 역시 좋든 나쁘든 보통 인간과는 다른 것이겠지요
@youTube전성시대5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seokhohong41815 ай бұрын
일전에 사진을 보내드린적도 있었지만, 사이고의 품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료연구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시로야마와 사쿠라지마를 보시는것을 적극 추천드립니다 저는 3번 가서, 그의 생가터를 보고 시로야마를 낮과 밤에 보고 했는데, 도시의 기운 자체가 몹시 호방하고 높았던 기억입니다. 드라마 등에서는 당연히 극적인 요소를 넣고 또 미화를 하기도 하지만, 이름난 인물인것은 분명하고 세이난 전쟁은.... 감히 짐작이 어려운게 맞지만 아마 '죽을 자리를 보고 누운' 마치... 신선조가 하코다테에서 중과부적 상황에서 목숨을 버린 판단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그럴 것 같아요. 그림으로만 봐도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아마미 오오시마 같은 섬도 경영하고, 나아가 류큐까지 복속하고... 바다로 나가 새로운 영지를 개척하는... 사츠마에는 분명 일본에서도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 항상 사츠마에 대한 기본 가정입니다. 일본에서도 상무정신으로는 어디에도 지지 않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 모습을 엿 볼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나중에 사츠마에 다녀와서 함께 내용을 엮어 만들려고 꼭꼭 숨겨뒀습니다. 제 사정상 최대 연속 출장 가능 일수가 7일이라... 어쩔까 싶네요. 타네가시마, 오키노 토리시마까지... 사츠마에 한 달만 체류하고 취재하며 영상 찍고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사츠마에는 뭔가가 있다.... 분명 뭔가가 있다.....
@seokhohong41815 ай бұрын
@@samurairomance 그렇습니다. 아직도 그 기질이 남아있다고도 생각되는게, 관광안내원 할아버지와 대화를 해보니 '우리는! 도노가 가라면 가고!! 죽으라면 죽는다!' 식으로 얘기를 하더군요 ㅎㅎ 사쿠라지마야 당연히 가보셔야 할테고... 시로야마랑, 사이고가 할복했다는 동굴, 그리고 현창관(세이난 전쟁 전사자의 묘비가 있는곳), 그리고 유신 후루사토칸 정도만 보셔도 충분히 감을 잡으실거라 생각을 합니다. 사무라이로망스님께서 가시게 된다면 저까지 두근두근 할 것 같습니다 ^^
@hyoobee4 ай бұрын
@@seokhohong4181우삼동이 이르길 살마의 풍속은 일본에서도 괴이하기 짝이 없으니, 누군가 죄를 아뢰면 관에서 처벌하지 아니하고 그 자를 불러 너는 마땅히 죽어야만 한다 이르면, 자신의 집에 돌아가 식솔을 물리고 자해를 함에 있어서 한 치의 어김이 없습니다. 학사(신유한)께서 오해하시는 바는 이러한 풍속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라고 하였다. 신유한의 해유록 발췌
@채문식-f9z5 ай бұрын
사이고라는 흥미만점의 인물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부분을 다루어 주어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드라마틱한 인생 만큼 정말 흥미로운 인물이죠. 내용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Benedicat_me_Dominus.5 ай бұрын
Ai가 그린 사이고 그림을 봤다면 그의 부인이 대성통곡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웅의 풍모는 어디 가고 고집만 센 동네 오야지스럽습니다.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착한 사람도 누군가에겐 악인이 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사이고의 초상화도 시대 배경과 그린이의 마음에 따라 왜곡이나 미화될 수 있으니 그가 사진 한장도남기지 않은게 유감이네요. 근데 사진 안남긴거 가지고 고집스럽다 하긴 뭐한게 민자영(민비)도 그랬듯이 그당시 사람들은 사진에 대한 안좋은 미신도 있었고, 지금처럼 손가락 딸깍으로 금방 찍히는게 아니라 찍는 것도 오래 걸렸다죠. 사이고의 일생 보면 딱히 고집스럽기보다 그냥 촌마게만 자른 흔한 옛날 사람으로서 보일 행동이었고 사진도 그래서 안남긴거 같습니다. 더구나 그가 비만과 무릎관절 문제로 고통받고 음낭수종 때문에 말을 오래 못탔다고하니 사진 찍는거 남들보다 더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각잡고 기다리다 사진 찍으면 알이 아파서 못버틴다는 소리는 차마 못하겠고 그냥 사진 찍는거 싫다고 해서 고집스럽다 소리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22 달러 결제한 저도 울었습니다. 프롬프트를 좀 더 제대로 넣었다면 더 그럴 듯한 영상이 나왔을 수도 있는데, 알아서 잘 그려줄걸로 믿었죠. 사이고가 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요. 다른 사람에게도 찍지 말라고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의 고통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요즘 Chat GPT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요. AI에게 "메이지 시대 초기, 사이고 타카모리가 사진을 꺼린 이유가 무얼까"라고 질문한 결과 다음과 같은 답을 받았습니다. 1. 문화적, 종교적 이유 : 혼이 뺴앗긴다는 미신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 2. 겸허와 도덕 : 사이고 타카모리는 겸허했던 사람으로 자기 표현을 삼가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었음. 따라서 자기 선전 또는 자기 표현적 측면이 강한 사진을 꺼려할 수 있었을 가능성 3. 안전보장상의 걱정 : 사이고는 정치적, 군사적 리더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안전을 고려, 사진이 적에게 이용될 리스크를 피하려 했을 가능성 4. 전통적 가치관의 유지 : 사이고는 일본 전통의 가치관을 중시했던 사람으로 서양의 신기술인 사진촬영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을 가능성 저는 1번 또는, 3번 정도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elvenisar5 ай бұрын
꼭 보면 돈 많이 주는 클라이언트 작품은 시키는대로 다 하면서, 저렇게 없는 사람들이 어렵게 어렵게 모은돈으로 겨우겨우 발주한 작품은 자기 멋대로 예술혼을 끌어내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뭐 그 결과로 현재까지 일본에서는 사이고의 이미지가 "인자함", "포용"의 긍정적 이미지로 자리잡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당시 유족들이나 쇼나이번사들의 마음은 그런게 아니었을텐데 말이죠...
@ELBUG-ku1iq5 ай бұрын
9:48 0을 좀 많이 빼먹으신줄 알았는데 아 옛날물가 ㅋㅋㅋ
@ELBUG-ku1iq5 ай бұрын
2:31 흠 바람의 검심에 나온 사노스케 친구 화가가 생각나네요... 다음 컨텐츠는 적보대 다뤄주시면 안될까요...?
@김경수-h1c5 ай бұрын
재미있는 영상 감사합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응원 감사드립니다.
@paul-qc9rw5 ай бұрын
잘 봤습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lpha_001-15 ай бұрын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__^
@陽光燦爛-e1m5 ай бұрын
아무튼 체격이 건장한 외모인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기습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 사진/초상화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사카모도 료마 사건도 있었으니깐요)
@nuron57005 ай бұрын
에도성 앞 동상은 ‘구스노키 마사시게’ 아닌가요?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맞습니다. 제가 잘못 말했네요. 한자만 보고 지금까지 마사나리로 알고 있었다는.... 오늘 알았습니다. 한자 뒤통수 얼얼하네. 지적 감사합니다.
@Park-iz3sd5 ай бұрын
사이고 다카모리 신정부 수립후 서열 2위인 육군원수로 진급했는데 그걸마다하고 때려친다음 고향으로 내려가 사무라이군병학교를 만들어 다시 사무라이정부를 만들려고 했죠 서난전쟁으로 다 물거품 되었지만..
@늑대와향신료-n9v5 ай бұрын
예전 가고시마가서 동상하고 시로야마 자살한 동굴 갔었는데,, 명장 맞습니다, 다만 군인이였던것 같습니다.,, 정치는 미숙한,,,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1등 하트 드립니다 ! 엄청난 인원이 그를 따랐다는 것이 많은 걸 말해주는거겠죠.
@kdyu1785 ай бұрын
왕좌의 게임, 에다드 스타크 느낌도 좀 나네요.
@ttttttyyyyyy6785 ай бұрын
사이고가 개를 데리고 다닌이유는 당뇨가 있어 산책을 자주 다녔고 그때마다 개를 다니고 다닌것이 이미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사이고가 당뇨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긴 한다고 합니다. 합병증으로 만년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도 하는데.... 당뇨 합병증이 무시무시하잖아요. 그가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한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dong-t2h5 ай бұрын
시바료오타로의 책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 되고 있더군요. 내가 30여년전 가고시마 갔을때 시로야마의 사이고 최후의 동굴 보고 내려 오니 누런 연탄재 같은 것이 바람에 날리는데 주변의 상점들은. 분주히 큰 비닐로 상품을 덮는데 알고보니 한달에 한번 꼴로 사쿠라지마의 화산재가 가고시마 시내로 날아 든다 하더군요. 마침 검은 옷을 입은 내 어깨도 하얗게 화산재가 덮히고 ....와, 이런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지 ? 했던 기억입니다. 내가 가고시마 간 이유는 도오고헤이하치로오의 사당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힘들게 수소문 해 찾아 보니 좀 황당 하더군요 가고시마상업고등학교 담장에 초라하게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지요. 관광 보다는 역사기행에 가까웠던 일본여행이었습니다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쌀 재배도 잘 안되고 했다고 하더니, 확실히 화산재 때문에 환경이 척박한가 보네요. 조만간 사츠마번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사쿠라지마가 눈 앞에 펼쳐질 생각을 하니 벌써 두근두근 합니다.
@dong-t2h5 ай бұрын
@@samurairomance 저도 거기 가서 알았는데 사쿠라지마가 원래는 섬이 아니고 반도 였는데 기때기준 140년 전에 지진을 동반한 대폭발로 사쿠라지마가 떨어져 나가 섬이 됐다고 합니다. 어유 가고시마 사람들 진짜 어떻게 사는지 , 한편으론 그들의 이러한 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을 성공 시킨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때 들은건데 그 화산재는 몸에 해롭지는 않답니다. 평균 한달에 한번 바람이 섬에서 육지로 거꾸로 불면 그렇답니다. 또 기억나는 것은 어떤 이자카야 갔는데 안주이름이 모조리 사이고다까모리,오오쿠보도시미치, 구사카겐즈이, 도오고헤이하치로오 등등등 당시의 유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안주이름으로 해서 한참 웃었습니다
신장의 야망 시리즈는 주구장창 해 왔습니다만, 다른 게임은 안합니다. 이제 나이가 40대 후반이라, 게임으로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고요. 다만 가끔 배틀 그라운드는 합니다. 요즘 에랑겔 클래식에서 하다 보니 AI가 거의 등장하지 않다보니, 제 실력으로는 1 Kill도 어렵더라고요.
@kunufelix5 ай бұрын
근대 정치판에는 맞지 않은 인물이라 절묘한 타이밍에 퇴장한 게 다행인 것 같습니다.
@taewonhwang54165 ай бұрын
고집은 쎄고 드세더라도 의리는있었다ㅎㅎ
@marksmithcollins5 ай бұрын
그래도 지인들을 통해 재구성된 얼굴형이나 체격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있군요
@grandstrategy89875 ай бұрын
사이고 타카모리의 사진이 없는 이유는 그가 천황 바꿔치기와 관련된 음모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라는 음모론이 있던데요. 이 음모론에 의하면, 남북조시대의 남조 천황 후손이었던 사내를, 유신세력이 메이지천황으로 둔갑시키고, 원래 천황은 죽였다고 하더군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안중근의사 또한, 이또오 히로부미의 죄악을 열거할 때 이 부분을 지적했다고 하더군요[그의 죄를 열거할 때 마지막으로 고메이천황을 죽인 것을 지적].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와쿠라 토모미와 이토오 히로부미가 작당하고 코메이를 죽였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이 루머에 의하면 사이고 타카모리도 이 사건의 결정적 물증이 되는 사진에, 바꿔치기에 쓰인 젊은 시절의 메이지 천황과 함께 찍은 모습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 때문에 유신혁명세력들은 이 사진이 물증이 되지 않도록 젊은 시절의 메이지 천황의 사진과, 사이고 타카모리의 사진을 모두 없애버렸다는 음모론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이 음모론도 소개해주세요. ^^
서남전쟁 당시 반군의 착검돌격에 관군이 엄청난 인명 손실을 보고 대응하기 위해 경시청 발도대를 창설하게 되지요. 당시 한창 근대화에 열심이었던 유신정부가 제식 무장으로 서양검인 사브르(영어로는 세이버라고 하죠)를 채택했지만, 현장에서 사브르의 도신(刀身)으로는 반군의 일본도를 상대하기 힘들다는 불만사항들이 너무 많이 터져나와서 결국 지휘부에서 검집과 손잡이만 사브르면 도신으로 일본도를 끼워도 그냥 넘어가주었다고 하죠. 이 때문에 탄생한 검이 양손사브르.. 이런 일이 생긴 건 반군이나 관군이나 모두 일본 검술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경시청 발도대가 수련했던 경시청류가 현대 검도의 모태가 되었던 것도 유명한 사실입죠.
@hyoobee5 ай бұрын
또 하나 더. 만화책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주인공 검심의 마누라이자 여자주인공인 가오루의 아버지가 서남전쟁 당시 발도대로 차출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고, 가오루가 어린 나이에 혼자서 도장을 운영하면서 불한당 패거리들과 엮이고 이걸 검심이 도와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수십년 전 본 책인데 갑자기 생각난.. 나중에 작가의 말을 보니까 격동의 시대 전쟁을 거치며 생긴 수많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하더군요.
@정용우-d5d2 ай бұрын
별보내... 효과는 글세...
@오미영-f2b5 ай бұрын
정한론을,펼쳤지만 싫지 않은 인물- 타협이 없다는건 원칙주의자라는거고 이러니 미움도 있었을테나 그는 애국자이지요 일본에서~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의 본능이라고 할까요. 안보 라인 방어선을 일본 밖에 두려고 하는 시도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가 전략과 잠재적국이 일본과 동기화 되지 못하면 일본을 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사이고의 정한론에 대해서도 무력 침공이 아닌, 협력 관계 구축을 위한 대사 파견이라는 측면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게 무엇이든 러시아의 남하 위협에 대한 일본의 1차 방어선을 대륙으로 올리기 위한 전략이었죠. 사이고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 현인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은 한국과 일본의 국가 전략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언젠가 한국과 일본의 잠재적국이 일치하지 않는 시점이 오면 그 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겠지만 말이죠.
@오미영-f2b5 ай бұрын
@@samurairomance 다 동감이예요 늘 즐겁게 재미나게 보고있어요
@이윤성-u6u5 ай бұрын
정한론자????????????????????
@samurairomance5 ай бұрын
YES !!!!!!!!!!!!!!!!!!!!!
@청솔향-g9u5 ай бұрын
저 인간이 일본의 생존을 위해 조선을 치자고 했단 말이지???
@kdyu1785 ай бұрын
시간 차이가 나긴 하지만, 고려도 여진족 정벌했고, 고구려도 말갈,숙신 등을 정벌했었죠. 일제 강점기가 현대사까지 이어지는 근대의 일이라서 감정적으로 생각하는거 이해는 하는데 그런식이면 유럽같은 나라는 역사공부 못합니다. 다 서로 죽일놈들인데요 ㅋ
@청솔향-g9u5 ай бұрын
@@kdyu178 //서로 죽일 놈인 것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어느 서양 현자가 그랬다더군요! "처음 속으면 니가 나쁜 놈, 두번 속으면 내가 나쁜 놈."우리더러 나쁜놈 되라고요????
@모닝커피_XD5 ай бұрын
@@kdyu178 공감합니다^^
@이녹-u4b5 ай бұрын
사이고 타카모리가 단신으로 조선을 방문할려는 의지를 일본 막부에서 말렸다고 하죠, 의외로 일본에서는 사이고를 정한론자가 아닌 견한론자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좀 더 심도있게 연구를 해봐야하는 인물인건 분명한거 같습니다. 저의 사족이지만 청렴한 사이고가 일본의 정한론의 야망을 조선정부에 일찍히 경고하려 갈려다가 양의 탈쓴 일본 정부에게 계획이 무산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왜 먼저 사이고가 정한론의 카드를 일찍히 뺴들었을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선을 도와줄려고 폼 잡는척 하는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조선에 일찍히 언질 해줄려는 계획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러니 일본 정부에게 숙청을 당하고 저런 조리돌림을 당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솔향-g9u5 ай бұрын
@@이녹-u4b //아! 그렇습니다. 사실 당시에 정한론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원시적 형태의 대동아 공영권 즉, 전아시아가 대동단결하여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살아남자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유키치 였는데 청이 형편없이 밀리고 조선이 그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세우지 않는것을 보고 일본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국가는 근대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미개하다라고 섯부른 결론을 내립니다. 바로 그때부터 후쿠자와는 세양에 당할바에는 우리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는게 낫다라고하면서 정한론의 맹아를 틔웁니다. 많은 이들이 후쿠자와를 단순한 개혁가 정도로 여기지만 어림 없는 소리! 그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은게 사이고 다카모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좀 알아보자, 서로 교류를 해보자 했을테지요! 하지만 큰 어른이 글럿다라고 한다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집어먹어 버리자.'심리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이고의 정한론도 실은 이와 같은 선점론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소릴 하고 자빠졌으면 발끈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