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상위 '0.1%' 장군의 비결 3가지 (임용한 박사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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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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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Пікірлер: 172
@nooneneedtoknow
@nooneneedtoknow Жыл бұрын
박사님 매번 느끼지만 이런 지성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게 복이네요.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RoyBuchanan3
@RoyBuchanan3 Жыл бұрын
임용한 박사님 빠돌입니다 매일 꾸준하게 임박사님 영상 자기전에 보고 잠드네요 ㅋㅋ
@everland45
@everland45 Жыл бұрын
전 박사님 빠순이에요~ ㅋ
@태희김-s9j
@태희김-s9j Жыл бұрын
저도요😂😂😂 박사님 목소리들어야 하루가 끝난거같아요~~~
@knownun5030
@knownun5030 Жыл бұрын
5:10 롬멜 관련 얘기중 제일 놀라운 얘기네요 ㄷㄷㄷ
@No.5813
@No.5813 Жыл бұрын
임용한 박사님이 해주시는 이야기가 제일 잼있어용ㅎㅎ
@유명한-e8q
@유명한-e8q Жыл бұрын
박사님 강의 얘기들은 너무나 다 좋아요 너무좋습니다 진짜
@dodi8109
@dodi8109 Жыл бұрын
돌격에서 실패한 적이 없다니 대단하네요
@user-dv5gi7hv5f
@user-dv5gi7hv5f 10 ай бұрын
사실 실패한 적 많아요, 근데 그건 찔러보는 상황에서가 대부분이고 작정하고 달라붙어서 실패한 건 손에 꼽죠. 롬멜 부관들이 진짜 뛰어났다는 평가가 많아요 같이 달리면서 후방 참모랑 전달을 정확하게 해내니까 그 바지런한 상관 따라서 안 가는 곳이 없는데 그렇게 다니면서 보고 겪은 걸 수기로 펴낸 책들도 있죠. 보면 적 방어진지 보고는 대충 견적이 나오잖아요, 그럼 그걸 제대로 쓰는지 확인하려면 공격을 해봐야하는데 그럼 찔러볼 수 있는 최소 제대를 즉석에서 계산해내서 정확히 그대로 타격하는 부하들도 대단했다고 봐요 전차 1대만으로도 돌격시켰는데 밝은 얼굴로 경례하고는 지뢰지대에서 전차는 격파됐는데 그보다 한참 더 나아간 다중 철조망 중에 3번째를 넘다가 죽었다더군요. 엘 엘러마인 공략하기 전에 영국 방어선 점검한다고 그렇게 희생된 병력들이 꽤 되는데 아무도 거부 않고 죽으러 갔죠. 그리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잘 관리되던 전차참호라던가 방어선은 그대론데 병력들이 헤이해진 틈을 노려서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졌던 도시를 함락시켰고 독일 상부도 그렇지만 영국도 크게 놀랐죠.
@fragrancenomad
@fragrancenomad Жыл бұрын
박사님 영상은 빠지지않고 봐요 ㅎㅎ❤
@philosophos0518
@philosophos0518 9 ай бұрын
왜 교수님을 여기저기서 못뵙는거죠~😢 명강의인데~~본 채널빼고 다른데서도 자주 뵈어요~
@JaeS-pg3nd
@JaeS-pg3nd Жыл бұрын
2:22 와
@user-ec1rp9fv5r
@user-ec1rp9fv5r Жыл бұрын
창의력은 분석에서 나온다..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유명한-e8q
@유명한-e8q Жыл бұрын
임용한박사님 진짜로 존경합니다
@unknown_seq
@unknown_seq Жыл бұрын
이건정말 레전드네요...
@aigoiaoidoi2215
@aigoiaoidoi2215 Жыл бұрын
그것도 군대에서 명령도 없는데 미리 예상하고 진행을 하다니 대단하긴 하네요.
@moonlight_heaven-s3g
@moonlight_heaven-s3g Жыл бұрын
2:10 와 소름
@user-cg7jh9ub5e
@user-cg7jh9ub5e Жыл бұрын
잘보겠습니다.
@이성세-i4v
@이성세-i4v Жыл бұрын
우리는 실현을 하고자 할 때 비로소 어떻게 할 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ㅎ 실현을 하고자 할 때 지식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듯 합니다.
@jspenzer1004
@jspenzer1004 Жыл бұрын
보통 아이큐 100 정도되는 직장인 입장에서 아이큐 140, 150 득실거리는 전략기획실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ㅅㅂ... ... ... 시키는 착착 잘하는 건 나도 하겠는데... 솔직히 지능100의 평범한 사람으로써, 먼저 지르면서 일하라는게 솔직히 현실에서는 불가능임... .... ...(그 아이큐 높은 사람들의 '감'말이야... ... ... 정보가 활자로 형성되어 되어 종합되기 전에 직감으로 , 정보파편만으로 머리속에서 그 복잡한 계산을 끝내고 직감으로 지시하는(지르는) 그거... 그거...) 아차하면 다 죽는건데... 그 직감에 대한 자신감과 스스로의 인생실증이 없으면 불가능... .... ... 아무튼 하지마... 내 상관으로도 오지마!!!
@jamesmillerjo
@jamesmillerjo Жыл бұрын
평사원이 아이큐 100 인 기업인데 기획실의 플랜을 말아먹기도 하지만 따라가기 성공하기도 하는 기업 : 성공 평사원이 아이큐 100 인 기업인데 모두가 '아무튼 나와는 엮이지마' 하는 기업 : 망함
@user-mf7xd4bo8q
@user-mf7xd4bo8q 2 ай бұрын
@@jamesmillerjo 그러므로 위에 댓글 쓴 사람같은 사람이 기업에 많으면 그 기업은 망함 ㅋㅋ
@Thebattleofsalsu
@Thebattleofsalsu Жыл бұрын
21세기 정보가 넘치는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 성공하는 방법 등등 다 알아도 실천하기가 어렵죠. ㅠㅜ
@joinso3744
@joinso3744 Жыл бұрын
죄송하지만.. 패튼보다.. 롬멜이 더 좋다..ㅜ
@doohwanwon8357
@doohwanwon8357 Жыл бұрын
롬멜에 대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네요
@user-de1sg1vt5x
@user-de1sg1vt5x Жыл бұрын
틀에 박힌건 음엄폐가 아니다 똑같은짓거리 하면서 달라지길 바라는건 정신병의 초기증상이다 롬멜의 틀에 박히지 않는 정신과 데이터분석
@EverydayDiary
@EverydayDiary Жыл бұрын
역시 약빨면서 전쟁하는....
@slack1233
@slack1233 Жыл бұрын
전술의 천재이지만 무능한 전략가 롬멜.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왜 글을 새로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반론이 불가능하다면 님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한 것일 수 있습니다. 주장은 님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가능하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근거를 제시하면서 하면 더 합리적 아닐까 합니다. 북아프리카, 롬멜이 공세 아닌 방어에 주력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Never!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독일이 현상 유지로 방어에 집중하며 독소전 수행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Never! 야전지휘관 롬멜의 공세가 2차대전 독일의 대전략 무너뜨려 이길 수 있던 전쟁 패배한 것일까? --------------------> Never, Never, Never! 전투에만 집중하면 전쟁 숲은 안보입니다.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면, 잎과 가지는 흐릿하더라도 숲을 놓치진 않습니다. 북아프리카, 롬멜이 방어에만 치중한다고 패배 못피합니다. 물론 공세를 펼쳤어도 패했죠. 그렇다면 롬멜은 왜 공세를 택했을까요? 어리석거나 명예욕 아닌, 그 전역에서라도 승리할 작은 가능성에 운명 걸었던. 독일의 적은 사실상 그 당시 전세계나 다름 없는 소련-영국-미국 연합. ---------------> 2차대전 독일의 패배는 단지 시간 문제.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만 놓고 봐도, 시간은 독일의 편이 아닌 영국의 편. 앉아서 적의 공세 기다릴수록 적은 나날이 강해집니다. 기다리면 그 전역에서의 승리 조차도 불가능하기에, 적이 더 강해지기 전 승리를 위해 주사위 던진 것. 몰타 보급을 위한 피데스탈 호송선단 규모, 독-이 추축국은 지중해 전역에서도 전쟁 역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45년 영 태평양 함대 task force 57 지원을 위한 보급선단 150만톤이, 이태리가 2차대전 동안 상실한 200만톤에 근접할 정도. 이미 터진 전쟁 상황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롬멜도 알게 되었지만 군인 신분으로 최선을 다해 임무 수행. 2차대전 전체 최종 승리는 불가능. 하지만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의 한시적 승리는 희박하지만 노려볼 수 있는 정도. 방어에만 주력하면 그 희박한 가능성 마저도 사라지는. (롬멜은 일부 전역에서의 승리 내지는 북서유럽 상륙 저지등을 통해 서부연합국과의 협상을 통한 독일의 굴복성 휴전 정도 생각?) (그런 생각을 한 롬멜이라면 전략적으로 독일 최상층부 보다 못하다고 보기도 힘들고.) 독일의 2차대전 대전략은 파탄. 야전지휘관 롬멜에게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국 책임을 전가해선 안될 것. -------------------------------------------------------------------------------------------------------------------------------------------------------------------------------------------------- 독일의 야전지휘관은 탁월했지만, 독일 최고 수뇌부의 판단력과 전략은 참사급 -----------------> 특히 병력, 자원, 생산력 등 고려 불충분 상태서 전쟁 돌입한 것,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패하는 근본 원인.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안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해외 전문가 주장이라도 스스로 판단하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노벨상-필즈상 수상자도 얼마든지 계산 실수나 논리를 벗어날 경우도 있기에 냉정하게 바라봐야. DNA 이중나선으로 노벨상 수상했던 미국학자, 흑인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롬멜 신화를 깨부수는 것은 정말 도전해보고 싶은 멋진 과업일 겁니다. 일단 폼나니까. 롬멜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계기 중에는 그런 도전 정신도 분명 포함. 공정하게 이성적으로 논리만으로 한다면 좋죠. 불행히도 유럽과 미국의 일부 전문가 및 2차대전 독일 최고 지휘부 일부 등, 고의적 자료 취사선택 성격도. 롬멜의 취약점 최대한 부각하면서, 최전선 야전지휘관 아닌 국가 차원의 거대 삽질에 대해선 의도적 축소. 야전지휘관에게 국가 차원 전략적 오판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적당히 방어전만 했다면? -----------> 그 경우 영국은 토부룩 잃지도 않았고, 엘알라마인까지 후퇴도 없었을 것. ---------------------> 그 경우 영국의 병력 손실도 훨씬 적었을 것이고, 영국의 보급과 물자 축적도 훨씬 증가했을 것. --------------------------------------------> (어떤 분이 다른 댓글에서 주장했듯) 구릉지에서 안뛰쳐나가고 방어 ----------> 지켜지겠습니까? -------------> 롬멜은 토부룩 점령 때 막대한 영국군 군수물자 연료 획득. 그것으로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 롬멜의 고글,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겁니다. 롬멜이 탄 맘모스 지휘 차량도 영국군 노획품. ---------------------> 롬멜이 방어전에 주력해 필요 없어진 보급물자가 독소전에 추가 투입된다고 독소전 승리하겠습니까? ... ... ... ------------------------> 저런 기초적 상황, 당시 독일 최고 지휘부나 독소전 투입 장성들이 몰랐겠습니까? ------------------------> 전후 유럽과 미국의 일부 군사전문가들이 저런 상황 몰라서 롬멜의 전략적 식견 부족 들고나오진 않았을 것. -------------> 저런 조건들 알면서도 그랬다면 무슨 목적일까요? 독일 최고 참모부 및 독소전 투입 장성들 입장에선 자신들 면피 성격도. -------------> 독일의 참전 전쟁 지휘부 아닌 유럽과 미국의 민간 학자들은 왜? 잘모르겠지만 튀어보려는 심리도 포함되었을 것, 분명히. 저렇게 뻔한 측면을 아주 대놓고 싸그리 뭉개댄 주장이라고 비판받을 때 제대로된 반론이 가능하겠습니까? (롬멜전사록에 저런 부분이 언급됩니다. 가만히 앉아 방어에 치중하면 영국의 공세에 결국은 패배당한다. 따라서 영국군이 더 증강되기 전, 영국의 물량 우세가 더 압도적이 되기 전 수에즈를 점령해야만 한다. --------------------------------------------------------------> 롬멜은 자신이 처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승리하려고 몸부림쳤던 것.) 우리가 롬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부 명령에 순응했을 겁니다. 롬멜은 독자적 공세를 취했고, 영국군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밀어붙였고, 엘알라마인에서 최종 패배당하는 순간엔 사수 명령 거부하고 퇴각. 거기서 전멸하면 그 즉시 북아프리카 전선은 종결되기에 명령 거부하고 후퇴했던 것. 롬멜에게 돌던질만한 능력이나 자격을 갖춘 이 찾기 쉽지 않을 것. 탁월한 능력의 야전지휘관, 히틀러 경호대장 출신임에도 결국 헛된 꿈에서 깨어났고 히틀러에게 독살된. 그런 이에게 돌을 던져야 할지. 롬멜은 신화가 될만 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신화는 안타깝게 쓰러져간 경우가 더 비장하고 잘 어울립니다.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승자가 된 몽고메리-패튼-아이젠하워-맥아더... 등에게 신화는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 롬멜에겐 독일 국가 차원의 대전략을 펼칠 기회 없었지만, 주어졌다면 더 합리적 이성적 대응을 했으리란 믿음은 생기는 군요. 야전지휘관에게 국가 차원의 전략적 식견 부족 비판은 어이없는 것. 그것도 호랑이 같은 야전지휘관에게 개같은 수준의 독일 국가 최고지도부 전략적 오판 책임을 전가하는 거라면 더더욱.
@slack1233
@slack1233 Жыл бұрын
@@scz8333 노르망디 상륙한 후의 연전 연패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유리한 상황에서 보급선 부족한 상황에서 몰타 선점령 등 전략적 안목 부재로 결국 연패하고 유럽으로 도망친건? 전체 전황과 무관한 북아프리카 전선에 욕심부리다가 정작 동부전선에 필요한 자원까지 욕심 내고 민폐끼치다가 아작난건? 독알의 명장들애게 받은 평가들은?
@slack1233
@slack1233 Жыл бұрын
@@scz8333 성공한건 롬멜의 천재성이고 패배한건 국가탓을 해버리면 답이 없죠. 호트 모델 같은 롬멜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 사람들이 명장이죠. 프랑스 전역에서도 힘든 프랑스 전차전은 다른 부대에 맡기고 공명만 쫓던 연예인이에요. 롬멜 이상의 전과를 내던 무명의 사단장들은 넘쳐났구요.
@slack1233
@slack1233 Жыл бұрын
글을 지워서 새로 올린건 지만 아는 연예인 장군 롬멜 까는데 무슨 패튼을 들고 나와서 이상한 소리 하길래 다시 올렸어요. 부족한 보급선 뻔히 알면서 수에즈 운하 도달한다고 무솔리니까지 불렀다가 개 망신 당한게 전략적 안목 부족이죠. 눈앞의 전투외에는 주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극도로 무지
@nyq12
@nyq12 Жыл бұрын
니주제에 누굴 ㅋㅋㅋㅋㅋㅋ
@user-iz1sw1em6b
@user-iz1sw1em6b Жыл бұрын
롬멜이 잘하면 뭐하나. 최고 지도자가 콧수염 그 양반인데.
@seokyi8577
@seokyi8577 Жыл бұрын
개소리
@user-rc4kq3wr8y
@user-rc4kq3wr8y Жыл бұрын
그 양반 때문에 독일이 잠깐 유럽을 지배할 수 잇었던 거에요
@손놀희
@손놀희 3 ай бұрын
그 양반이 전쟁을 안일으켰으면 롬맬도 없었겠죠 이순신 장군도 선조가 선출한거고 난세에 영웅이 난다
@dlawodnr93
@dlawodnr93 Жыл бұрын
아니.. 채널로고를 폰허브랑 똑같이 만드냐;;
@user-gf4gj8gk3v
@user-gf4gj8gk3v Жыл бұрын
창의는 분석에서 나온다..😑
@hawk8873
@hawk8873 Жыл бұрын
롬멜은 평가가 헛갈리는 장군이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위, 대위 시절, 즉 말단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말씀하신 대로 출중하였고 그가 큰 공을 세운 카포레토 전투가 비록 약체인 이탈랴 군을 상대로 한 대승이였다지만 어쨌든 무장도가 크게 떨어지는 군대도 아니였기 때문에 그의 전술 능력이 결정적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전선에서, 즉 군 사령관 이상급의 최고위 장성으로서는 특A급이라 할 수 있을가? 라고 따지면 여기서 부터 매우 헷갈려집니다. 간단히 말해 국가는 다르지만 직계 후손 국가인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의 전사 평가에서 롬멜의 평가가 뜻밖에 박한 부분이 있는건 한번쯤은 생각을 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북아프리카, 롬멜이 공세 아닌 방어에 주력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Never!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독일이 현상 유지로 방어에 집중하며 독소전 수행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Never! 야전지휘관 롬멜의 공세가 2차대전 독일의 대전략 무너뜨려 이길 수 있던 전쟁 패배한 것일까? --------------------> Never, Never, Never! 전투에만 집중하면 전쟁 숲은 안보입니다.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면, 잎과 가지는 흐릿하더라도 숲을 놓치진 않습니다. 북아프리카, 롬멜이 방어에만 치중한다고 패배 못피합니다. 물론 공세를 펼쳤어도 패했죠. 그렇다면 롬멜은 왜 공세를 택했을까요? 어리석거나 명예욕 아닌, 그 전역에서라도 승리할 작은 가능성에 운명 걸었던. 독일의 적은 사실상 그 당시 전세계나 다름 없는 소련-영국-미국 연합. ---------------> 2차대전 독일의 패배는 단지 시간 문제.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만 놓고 봐도, 시간은 독일의 편이 아닌 영국의 편. 앉아서 적의 공세 기다릴수록 적은 나날이 강해집니다. 기다리면 그 전역에서의 승리 조차도 불가능하기에, 적이 더 강해지기 전 승리를 위해 주사위 던진 것. 몰타 보급을 위한 피데스탈 호송선단 규모, 독-이 추축국은 지중해 전역에서도 전쟁 역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45년 영 태평양 함대 task force 57 지원을 위한 보급선단 150만톤이, 이태리가 2차대전 동안 상실한 200만톤에 근접할 정도. 이미 터진 전쟁 상황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롬멜도 알게 되었지만 군인 신분으로 최선을 다해 임무 수행. 2차대전 전체 최종 승리는 불가능. 하지만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의 한시적 승리는 희박하지만 노려볼 수 있는 정도. 방어에만 주력하면 그 희박한 가능성 마저도 사라지는. (롬멜은 일부 전역에서의 승리 내지는 북서유럽 상륙 저지등을 통해 서부연합국과의 협상을 통한 독일의 굴복성 휴전 정도 생각?) (그런 생각을 한 롬멜이라면 전략적으로 독일 최상층부 보다 못하다고 보기도 힘들고.) 독일의 2차대전 대전략은 파탄. 야전지휘관 롬멜에게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국 책임을 전가해선 안될 것. -------------------------------------------------------------------------------------------------------------------------------------------------------------------------------------------------- 독일의 야전지휘관은 탁월했지만, 독일 최고 수뇌부의 판단력과 전략은 참사급 -----------------> 특히 병력, 자원, 생산력 등 고려 불충분 상태서 전쟁 돌입한 것,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패하는 근본 원인.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안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해외 전문가 주장이라도 스스로 판단하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노벨상-필즈상 수상자도 얼마든지 계산 실수나 논리를 벗어날 경우도 있기에 냉정하게 바라봐야. DNA 이중나선으로 노벨상 수상했던 미국학자, 흑인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롬멜 신화를 깨부수는 것은 정말 도전해보고 싶은 멋진 과업일 겁니다. 일단 폼나니까. 롬멜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계기 중에는 그런 도전 정신도 분명 포함. 공정하게 이성적으로 논리만으로 한다면 좋죠. 불행히도 유럽과 미국의 일부 전문가 및 2차대전 독일 최고 지휘부 일부 등, 고의적 자료 취사선택 성격도. 롬멜의 취약점 최대한 부각하면서, 최전선 야전지휘관 아닌 국가 차원의 거대 삽질에 대해선 의도적 축소. 야전지휘관에게 국가 차원 전략적 오판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적당히 방어전만 했다면? -----------> 그 경우 영국은 토부룩 잃지도 않았고, 엘알라마인까지 후퇴도 없었을 것. ---------------------> 그 경우 영국의 병력 손실도 훨씬 적었을 것이고, 영국의 보급과 물자 축적도 훨씬 증가했을 것. --------------------------------------------> (어떤 분이 다른 댓글에서 주장했듯) 구릉지에서 안뛰쳐나가고 방어 ----------> 지켜지겠습니까? -------------> 롬멜은 토부룩 점령 때 막대한 영국군 군수물자 연료 획득. 그것으로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 롬멜의 고글,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겁니다. 롬멜이 탄 맘모스 지휘 차량도 영국군 노획품. ---------------------> 롬멜이 방어전에 주력해 필요 없어진 보급물자가 독소전에 추가 투입된다고 독소전 승리하겠습니까? ... ... ... ------------------------> 저런 기초적 상황, 당시 독일 최고 지휘부나 독소전 투입 장성들이 몰랐겠습니까? ------------------------> 전후 유럽과 미국의 일부 군사전문가들이 저런 상황 몰라서 롬멜의 전략적 식견 부족 들고나오진 않았을 것. -------------> 저런 조건들 알면서도 그랬다면 무슨 목적일까요? 독일 최고 참모부 및 독소전 투입 장성들 입장에선 자신들 면피 성격도. -------------> 독일의 참전 전쟁 지휘부 아닌 유럽과 미국의 민간 학자들은 왜? 잘모르겠지만 튀어보려는 심리도 포함되었을 것, 분명히. 저렇게 뻔한 측면을 아주 대놓고 싸그리 뭉개댄 주장이라고 비판받을 때 제대로된 반론이 가능하겠습니까? (롬멜전사록에 저런 부분이 언급됩니다. 가만히 앉아 방어에 치중하면 영국의 공세에 결국은 패배당한다. 따라서 영국군이 더 증강되기 전, 영국의 물량 우세가 더 압도적이 되기 전 수에즈를 점령해야만 한다. --------------------------------------------------------------> 롬멜은 자신이 처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승리하려고 몸부림쳤던 것.) 우리가 롬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부 명령에 순응했을 겁니다. 롬멜은 독자적 공세를 취했고, 영국군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밀어붙였고, 엘알라마인에서 최종 패배당하는 순간엔 사수 명령 거부하고 퇴각. 거기서 전멸하면 그 즉시 북아프리카 전선은 종결되기에 명령 거부하고 후퇴했던 것. 롬멜에게 돌던질만한 능력이나 자격을 갖춘 이 찾기 쉽지 않을 것. 탁월한 능력의 야전지휘관, 히틀러 경호대장 출신임에도 결국 헛된 꿈에서 깨어났고 히틀러에게 독살된. 그런 이에게 돌을 던져야 할지. 롬멜은 신화가 될만 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신화는 안타깝게 쓰러져간 경우가 더 비장하고 잘 어울립니다.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승자가 된 몽고메리-패튼-아이젠하워-맥아더... 등에게 신화는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 롬멜에겐 독일 국가 차원의 대전략을 펼칠 기회 없었지만, 주어졌다면 더 합리적 이성적 대응을 했으리란 믿음은 생기는 군요. 야전지휘관에게 국가 차원의 전략적 식견 부족 비판은 어이없는 것. 그것도 호랑이 같은 야전지휘관에게 개같은 수준의 독일 국가 최고지도부 전략적 오판 책임을 전가하는 거라면 더더욱.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 야전지휘관 롬멜의 전략적 식견 부족 아닌. 독-이 추축국 역량 부족으로 패배당한 것. 1942년 8월 operation pedestal 최대 몰타 호송선단 : 상선14, 전함2, 항모5, 순양함7, 구축함32 등. kzbin.info/www/bejne/ZprRg2Wgh7yShpo Operation Pedestal: The Convoy That Saved Malta (2분25초 이후 지중해 진입할 때의 페데스탈 선단 배치 그래픽으로 나옴.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선단 배치 모습.) kzbin.info/www/bejne/Z2KUaGapeZiencU Battle Of The Convoys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jpeWp62piZljl6s Malta Convoy Battle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p5u4noWwgL97Y6c Malta Convoy - Further Pictures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n6WWoYKPgpV9oaM HMS Nelson Hit in Convoy Attack 실제 전투 영상 blog.daum.net/mybrokenwing/387 몰타를 살리기 위한 발악들(5) 국내 블로거 봉달이님 글.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 무의미한 가정입니다. 롬멜의 전략적 식견이 부족해 ... ...? ------------------------> 롬멜 아닌 독-이 국가 차원의 문제. 독일-이태리 추축국 보다 압도적으로 길었던 영국의 해상교통로 및 방어하기 훨씬 어려웠던 환경. 최단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약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이용 못할 때는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지구 차원. 몰타의 위치는 시칠리에서 약 90마일, 북아프리카에서 약 160마일로 지중해 전역은 사실상 이태리의 내해 성격으로 호수와 다름 없는. 추축국 잠수함은 상시 매복, 해상과 공중에서 추축국의 공세로 몰타는 말라죽기 일보직전으로 몰리기도. 영국 최단 직항로 3,500km ------------------> 선단 집결지 지브롤터 기준에 불과합니다. -------------------------------------------------------------> 실제 선단의 출발점은 짧아도 영 본토, 대서양 건너의 캐나다와 미국에서 영 본토 거친. (롬멜-추축국과 영국의 해상 교통로 길이와 방어 난이도가 뒤바꼈다면? 롬멜이 아니라 그 할애비의 할애비의 할애비 조차도 북아프리카에 상륙도 불가능. 애초 지중해에선 전쟁 나지도 않았을 것.) 독일 이태리 추축국의 공격을 뚫고 보급을 성공시켰지만,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거의 모든 함정이 손상당했고 격침된 함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선9, 항모1, 순양함2, 구축함1. 격침된 항모는 장갑항모 이전의 함대항모 이글, 독 유보트에게 격침당했습니다. 장갑항모 인도미터블은 대파. 상선은 14척이 출발해서 몰타엔 겨우 5척만 도착했죠. 불행중 다행으로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이었던 오하이오는 겨우 도착. 오하이오는 원래 미국 유조선이었지만 영국해군이 임대해서 승무원은 모두 영국인. 거의 1만톤급 유조선 오하이오 역시 피해가 커 전승무원이 퇴함하기도 했으나 구축함3척이 양 옆과 앞에서 지탱하며 끌고 반쯤 가라앉은 상태로 몰타 입항. 몰타 도착후에 기름 거의 다 퍼낸 상태에서 결국 침몰했습니다. 4척의 일반 상선과 1척의 유조선 도착으로 보급받은 물자는 약 5만5천톤, 그 중 석유는 약 9000톤, 식량과 탄약 4만5천톤. 페데스탈 작전 피해가 너무 커 다시는 이런 작전을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5만5천톤의 보급은 몰타를 살려냈고, 역으로 살아난 몰타로 인해 롬멜의 보급이 끊기고 몇 달 후 엘알라메인. 동원된 전함중 1척은 어뢰에 피격되었지만 천운으로 별 타격 입지 않았고, 동원된 항모 5척은 장갑항모2척, 구형의 함대항모였던 이글과 퓨어리어스, 그리고 세계최초의 전갑판 항모 아거스. 아거스는 세계최로로 상부구조물이 제거된 전갑판 항모였지만 함대항모가 아닌 소형 호위항모. 퓨어리어스는 항대방공 임무가 아닌, 몰타에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영공군 스핏파이어를 탑재, 몰타 약 1000km 전방에서 항공기를 몰타로 출격시키고 지브롤터로 바로 귀환했습니다. 즉 장갑항모 2척이 몰타 인근 해상까지 함대방공 임무를 수행 하다, 몰타의 영공군이 엄호하기 시작한 직후 역시 잽싸게 지브롤타로 후퇴. 아거스는 대잠 항공작전 위주. 피데스탈 작전 이외 여러 호송작전에서도 영국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그러나 영국 장갑항모는 여러번 직격탄에 피격되었어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일러스트리어스 경우 피격된 상태에서 몰타 입항, 항구에서 다시 공습에 노출되자 밤에 탈출해 미국까지 도피, 수리 때문에. 영국 본토도 폭격에서 자유롭지 않아 병신된 몸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가 수리받음. 인도미터블은 슈투카에게 대형 폭탄 2발 직격당하고도 꾸역 꾸역 후퇴했죠. 장갑갑판이 찢어졌지만 갑판 아래 핵심 선체는 손상당하지 않아서 탈출에 성공했죠. 미국과 일본의 나무갑판 항모였다면 지중해 진입하면 다시는 못빠져나갑니다. 타격당하는 순간 끝이나 다름 없습니다. 몰타 가는 중에 피격되면 살려면 지브롤타까지 도망가야 하죠. 문제는 적 공군이 계속 추격할 수 있는 추축국 점령지대가 튀니지 알제리등 지브롤타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 호송선단은 대략 3일 정도 항해합니다. 그 3일 밤낮으로 항공기, 잠수함, 수상함의 공격을 당했고, 심할 경우엔 한 번의 공습에 대략 300기 정도의 추축 공군기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함대가 생존한 이유는 하늘엔 몰타의 영국 공군도 출격해서 추축국 공군도 대함공격만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몰타의 영공군 엄호가 없는 구간에서는 항모 함재기와 함대의 대공포 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미드웨이나 태평양에서의 항모전투는 몇 시간 이내에 일단 끝나고 휴식기를 가지게 되죠. 항모가 격침되거나 대파되면 전장에서 이탈되어서 쉬는 거고, 항모 피해 별로 없더라도 무장 떨어지면 보급 때문에 후퇴. 지중해의 호송선단 전투는 약 3일간 밤낮 없이 지속되고, 적 항공기들은 육상기지에서 재급유 재무장받고 다시 출격. 즉 공격하는 측의 공군기지는 격침될 위험이 없어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방어하는 함대의 항모는 격침되거나 대파될 위험. 태평양에서 항모 대 항모 전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항모와 공군력의 대결이었습니다. 항모 단독은 아니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타에서 출격한 영국공군의 호위 아래 영국 항모들이 생존했던 것. 미국 일본의 항모전단이 만일 그 당시 지중해에 진입했다면, 항모전단 자체 세력만으로 살아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무 갑판이라 피격되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적 공군과 잠수함이 끊임없이 추격 반드시 격침시킵니다. 태평양의 항공모함전 때는 잠수함들 활약 어렵죠. 잠수함이 항모 따라다닐 속도가 못되니. 잠수함을 전장에 항상 미리 배치 매복시킬 수도 없고. 하지만 지중해에선 잠수함들은 상시 매복 상태. 강력한 대잠세력을 가지지 못한 항모전단 자체 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태평양과 달리 대서양에선 독일 상대로 항모 대 항모 전투는 불필요, 북해에선 적 공군력 위협이 너무나 커 무르만스크 호송과 같은 임무 이외엔 항모가 진입도 꺼렸고, 지중해에선 몰타 보급 때문에 정말 목숨걸고 들어가 죽다 살아나왔습니다. 물론 영국공군 엄호 아래서 겨우 생존했죠. 그러한 지형적 작전 제한 조건 때문에 영국은 장갑갑판을 채택하면서, 함재기 탑재수를 희생했고, 여러 곳에 산재한 영국 공군기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전쟁 전 함재기 개발 필요성 덜 느겼던 것. 전쟁 터진 이후엔 독일 상대하기 바빠 2차대전 중엔 대부분 미 함재기 의존, 45년 종전 후에야 고성능 씨퓨리와 제트기.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 보급 측면에서 살펴보면, 독일 이태리 추축국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수백km 해상교통로, 영국은 최단거리 직항로라고 해도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이 악화되어 지중해 직항로를 택할 수 없을 경우엔 대서양-희망봉-인도양-홍해-이집트로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짧디 짧은 해상교통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보급이 말라버린 것, 그 자체로 추축국은 승리할 기본 자격이 없었던 것.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롬멜 신화, 직접 교전했던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 롬멜 신화 깨부수기, 롬멜에게 당해본 적 없는, 더군다나 적이 아닌 독일에서 시작. 롬멜 신화와 신화 깨부수기의 출발을 보면 바로 확인이 됩니다. 특히 깨부수기의 순수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롬멜 신화는 조작된 신화다. 전투 패배를 반복하던 영국이 오점을 감추기 위해, 적장인 롬멜을 고의적으로 띄웠던 조작된 신화로 롬멜은 독일의 전쟁 수행을 오히려 방해했다. -----------------> 그럴듯 합니다. 문제는 저 주장을 전략적 파국의 책임이 있는 독일군 최고 지휘부 또는 독소전에 투입된 장성들이 제기하면 문제 될 수 있죠. 독일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 독소전에 투입되어 악전고투 하며 물자 부족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찼던 이들이 롬멜에 대해 싸늘한 시각 아닌 따뜻한 시각 가질 수는 없을 것. 영국은 지난 수백년 압도적 승률 1위. 무수히 많은 전투에 패했지만, 전쟁 자체는 단 1번의 예외 미국독립을 제외하곤 패배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투 패배를 감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국이 제작했거나 제작에 참여한 수 많은 군사 역사 다큐나 영화 속에서, 자신들의 패배를 대놓고 사상 최대의 패배, 사상 최대의~...스스로 과장 왜곡해서 전세계에 배급 뿌려대는데. 70년대 전쟁 영화, 마켓가든 다룬 머나먼 다리. --------------------> 그 영화 보고 몽고메리와 영국군 하찮게 여기는 수 많은 대한민국 사람이 생겼죠.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자신들의 패배를 감추려하지 않고, 지극히 싸늘하게 비판하는 것. 우린 아직 그래본 적이 없고. 수백년간 전쟁에서 패해본 적 없는 자존심 강한 군이, 롬멜에게 전투 패배를 반복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종 승리의 의지를 다졌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뛰어난 적이었기에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롬멜 신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처칠이 전시 영국 의회에서 적장 롬멜을 추켜세운 것이 영국군 무능을 감추려했다고 착각해선 안될 것. 비록 전투에서 뛰어난 적장에게 패배당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를 물리치고 전쟁 승리를 하겠다는 의지로 읽어야 할 것. 교활한 영국이 조작한 신화라고 소설 쓰기보다는, 롬멜의 조국 독일측에서도 롬멜 신화 깨부수기가 나타난 원인에 의문을 가질 필요. 이런 미묘한 문제들은 확증은 없을 겁니다. 인간의 심리상태가 결정적 요인이라. 즉 심증은 있지만, 증명은 어려운. 어짜피 인간 심리가 중요하다면, 롬멜은 신화가 될만 했습니다. 탁월한 야전지휘관, 비극적인 최후. 적군 조차도 인정했었고. ---------------> 구태여 신화를 깨야 할까요? 롬멜 신화가 깨진다면, 2차대전 독일군 그나마 있었던 변명거리 하나 더 잃고 더 깊은 야만으로 추락하는 겁니다. 2차대전 독일군 최상부 및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이 조국과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 했던 의도와 정반대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롬멜 신화 깨부숴서 얻는 것 ----------------> 개인의 정신적 쾌감, 성취감 수준 넘기 어려울 것.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롬멜 신화를 깨부쉈다고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것. 깨부쉈다는 생각으로 롬멜의 전술적 역량 부정되지도 않고, 롬멜이 하지도 않은 거대 전략 삽질 생겨나지도 않는 것. 2차대전 독일, 탁월한 전술 지휘관에 어울리지 않는 파탄난 거대 국가 전략. 사실 독일은 세계대전 원해서 주도적으로 도발한 것도 아닌,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갔다가 정확할 것. 오스트리아 합병 + 체코 독일어권 지역 합병 ------------------> 여기 까지는 독일어권이라 영, 프가 수치스러운 인내 그 직후 독일은 자신감 충만해 폴란드 침공, 폴란드를 점령하더라도 영프가 기존과 같이 인내할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하지만 영국은 독일에 시한 정해 그 때 까지 폴란드에서 철군할 것 요구했고, 독일이 응답하지 않자 바로 대독 선전포고. --------------------------------------------> 독일 최고 수뇌부는 세계대전 원치 않았지만, 자신들의 오판으로 세계대전 끌려들어간. ------------------------> 행운과 실력이 함께 해 서부전선 전격전에서 프랑스는 항복시켰지만, 영국을 항복 휴전시킬 수 없게 되자, ----------------> 스멀 스멀 올라오는 두려움, 혹이나 영국과의 전쟁 상태에서 소련에게 뒤통수 맞으면 패전으로 몰린다는. ----------------> 어짜피 배후에 신대륙과 거대한 식민지들이 버티고 있는 영국을 항복 시키거나 휴전으로 몰기 불가능하기에, ----------------> 우선 소련을 제거하고, 연합할 것이 명백한 미영 세력과의 최종 승부에 대비하겠다고 노선 수정. ----------------> 우랄 서부 소련 핵심지대 점령하고 버티기 모드, 미영과의 최후 결전에서 서로 승리 불가능한 조건은 확보. -------------------> 하지만 불행하게도 소련이 바바로사의 충격을 몸으로 버텨내면서 그 꿈 마저 사라진. -------------------> 프랑스와 달리 광활한 국토가 독일 전격전의 충격을 흡수 소련은 버틸 수 있었던 것. -------------------> 만일 프랑스가 소련과 같이 광활했다면 절대로 항복 안했을 것, 소련이 프랑스 처럼 협소했다면 항복 당했을 것. --------------------------------------> 바바로사 실패한 바로 그 순간 사실상 독일의 패전은 확정, 단지 시간 문제로 전락. 바바로사 이전 영국과의 전쟁에서 영국에 대한 승리는 불가능, 그렇다고 영국이 단독으로 독일을 패배시킬 수도 없는. 하지만 바바로사 실패한 순간, 독일의 패전은 확정된. 냉정하게 독일이 세계대전 양면전쟁으로 끌려들어간 과정 살펴보기를. 롬멜이 북아프리카에 파견된 것은 바바로사 몇 개월 전, 롬멜 파견 부대 따위 독소전에 몰빵했다고 바뀔 것 없음을 인지하길. 이미 첨부 소개한 영국과 미국의 능력을 감안한다면, 롬멜이 시키는 대로 방어만 한다고 북아프리가 전선이 현상 유지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될 것. 만일 시키는 대로 방어만 했다면 아마도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은 더 일찍 압도적 물량 우열로 연합국측 승리로 종결되었을 것. 20년~30년 전, 처음 원서로 독일측 일부의 롬멜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접했을 때 얼마나 신선했을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그 자료 접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가슴 떨렸고 신대륙 발견한 충격을 느꼈을지도 이해됩니다. 하지만 그 자료를 냉철하게 바라보며 수용했을지 의문이군요. 일부 독일군 최고 지휘부 및 독소전 참전 장군들 시각, 비판 없이 그냥 수용해야만 합니까? 독일 최고 지휘부는 독일의 파탄난 대전략과 연계되었고, 독소전 참여 장군들은 부족했던 보급 때문에 롬멜을 곱게 볼 수 없는. 그들은 독일 패전 근본 이유를 롬멜에게 전가하는 의도를 충분히 가질만한 위치-조건임을 고려해야. 독일 내부에서 그런 시도가 일어나자, 영미의 일부 민간 학자들도 동참하기 시작. 영미 학자들에겐 구미 당기는 매력적 소재. 마셜-아이젠하워-맥아더-패튼-몽고메리-쥬코프-니미츠 ... ------------> 비판할 때와 느낌과 성취감 자체 레벨이 다른. 입맛 구미 당김은 매니아건 학자들이건 최초 작동하는 결정적 요소. 패튼 신화 부수기 실질적 자료는 널렸지만 구태여 할 필요도 못 느끼는. 롬멜 신화 깨부수기, 그 출발점에 대한 의문과 비판적 시각도 필요합니다.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kzbin.info/www/bejne/aWXSg2V6ZqyJi5Y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1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kzbin.info/www/bejne/pl6cqGWAathjrrc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양의심공
@양의심공 Жыл бұрын
순신 형님 미만 잡임.(펄럭~)
@shpark1227
@shpark1227 28 күн бұрын
순신이도 본토이니까 명장이 된거지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했으면 명장이 아닐거야
@HyeopSang
@HyeopSang Жыл бұрын
선추!
@user-fx3kq1rn4m
@user-fx3kq1rn4m 4 ай бұрын
롬멜은 훌륭한 전술가였지만 훌륭한 전략가는 아니었음. 공세종말점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 못한 거 같다. 아무리 전술적 능력이 탁월해도 공세종말점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지 않으면 좋은 전략가가 될 수 없음.
@kwangyeolpak2157
@kwangyeolpak2157 Жыл бұрын
롬멜은 패장이예요. 보급을 무시하고 오직 닥돌만하다 평범한 몬티에게 박살났죠. 아프리카에서 1개군이 전멸했으니 완전히진겁니다. 보급을 모르는 장군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거같습니다.전쟁은 전투만으로 못이겨요
@stimp2970
@stimp2970 Жыл бұрын
전쟁은 전투만으로 못이기는거 맞고 지휘관에게 일선 병사에 대한 최대한의 보급이라는 책임이 있는거 맞는데. 후방에서 지원해줘야 하는 최고지도부 책임이 좀 더 크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군은 전쟁물자생산을 못하고 물자배분할 권한이 없잖아요. 롬멜이 닥돌을 한 이유는 앉아서 방어하면 점점 늘어나는 영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월등해서 100% 진다는 제약이 걸려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이견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영국군 보급창고까지 털면서 공격하자 / 알렉산드리아까지 가면 영국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도전한거죠. 독일군이 리비아에 눌러앉아서 뭐 트리폴리 등에 요새쌓으면 영국군이 우월한 기갑병력으로 포위하고 지중해 제해권으로 보급끊어서 훨씬 빠르고 명확하게 졌을겁니다. 제해권이 있고 방어력이 월등했던 투브루크도 함락되잖아요. 후방에서의 보급 없이 싸운 지휘관이 한니발이랑 이순신 정도인데 한니발은 졌고 이순신은 이겼죠. 둘 다 현지조달을 하든 둔전을 하든 자체 보급선을 유지할 수 있는 / 먹이기만 하면 전투력이 유지되는 전근대 전쟁이었습니다. 시대를 생각하면 자체적으로 화약과 포탄과 화살까지 조달한 이순신이 좀 더 탁월했죠. 그런데 현대전에서 기름 없이 전차나 트럭이 움직입니까. 결국 현대전에서의 보급은 후방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조직이 만들어져서 후방에서의 노력이 훨씬 중요합니다. 일개 군사령관이 정유시설 만들고 포탄공장 돌릴 수 없잖아요.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 야전지휘관 롬멜의 전략적 식견 부족 아닌. 독-이 추축국 역량 부족으로 패배당한 것. 1942년 8월 operation pedestal 최대 몰타 호송선단 : 상선14, 전함2, 항모5, 순양함7, 구축함32 등 kzbin.info/www/bejne/ZprRg2Wgh7yShpo Operation Pedestal: The Convoy That Saved Malta (2분25초 이후 지중해 진입할 때의 페데스탈 선단 배치 그래픽으로 나옴.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선단 배치 모습.) kzbin.info/www/bejne/Z2KUaGapeZiencU Battle Of The Convoys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jpeWp62piZljl6s Malta Convoy Battle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p5u4noWwgL97Y6c Malta Convoy - Further Pictures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n6WWoYKPgpV9oaM HMS Nelson Hit in Convoy Attack 실제 전투 영상 blog.daum.net/mybrokenwing/387 몰타를 살리기 위한 발악들(5) 국내 블로거 봉달이님 글.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 무의미한 가정입니다. 롬멜의 전략적 식견이 부족해 ... ...? ------------------------> 롬멜 아닌 독-이 국가 차원의 문제. 독일-이태리 추축국 보다 압도적으로 길었던 영국의 해상교통로 및 방어하기 훨씬 어려웠던 환경. 최단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약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이용 못할 때는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지구 차원. 몰타의 위치는 시칠리에서 약 90마일, 북아프리카에서 약 160마일로 지중해 전역은 사실상 이태리의 내해 성격으로 호수와 다름 없는. 추축국 잠수함은 상시 매복, 해상과 공중에서 추축국의 공세로 몰타는 말라죽기 일보직전으로 몰리기도. 영국 최단 직항로 3,500km ------------------> 선단 집결지 지브롤터 기준에 불과합니다. -------------------------------------------------------------> 실제 선단의 출발점은 짧아도 영 본토, 대서양 건너의 캐나다와 미국에서 영 본토 거친. (롬멜-추축국과 영국의 해상 교통로 길이와 방어 난이도가 뒤바꼈다면? 롬멜이 아니라 그 할애비의 할애비의 할애비 조차도 북아프리카에 상륙도 불가능. 애초 지중해에선 전쟁 나지도 않았을 것.) 독일 이태리 추축국의 공격을 뚫고 보급을 성공시켰지만,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거의 모든 함정이 손상당했고 격침된 함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선9, 항모1, 순양함2, 구축함1. 격침된 항모는 장갑항모 이전의 함대항모 이글, 독 유보트에게 격침당했습니다. 장갑항모 인도미터블은 대파. 상선은 14척이 출발해서 몰타엔 겨우 5척만 도착했죠. 불행중 다행으로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이었던 오하이오는 겨우 도착. 오하이오는 원래 미국 유조선이었지만 영국해군이 임대해서 승무원은 모두 영국인. 거의 1만톤급 유조선 오하이오 역시 피해가 커 전승무원이 퇴함하기도 했으나 구축함3척이 양 옆과 앞에서 지탱하며 끌고 반쯤 가라앉은 상태로 몰타 입항. 몰타 도착후에 기름 거의 다 퍼낸 상태에서 결국 침몰했습니다. 4척의 일반 상선과 1척의 유조선 도착으로 보급받은 물자는 약 5만5천톤, 그 중 석유는 약 9000톤, 식량과 탄약 4만5천톤. 페데스탈 작전 피해가 너무 커 다시는 이런 작전을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5만5천톤의 보급은 몰타를 살려냈고, 역으로 살아난 몰타로 인해 롬멜의 보급이 끊기고 몇 달 후 엘알라메인. 동원된 전함중 1척은 어뢰에 피격되었지만 천운으로 별 타격 입지 않았고, 동원된 항모 5척은 장갑항모2척, 구형의 함대항모였던 이글과 퓨어리어스, 그리고 세계최초의 전갑판 항모 아거스. 아거스는 세계최로로 상부구조물이 제거된 전갑판 항모였지만 함대항모가 아닌 소형 호위항모. 퓨어리어스는 항대방공 임무가 아닌, 몰타에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영공군 스핏파이어를 탑재, 몰타 약 1000km 전방에서 항공기를 몰타로 출격시키고 지브롤터로 바로 귀환했습니다. 즉 장갑항모 2척이 몰타 인근 해상까지 함대방공 임무를 수행 하다, 몰타의 영공군이 엄호하기 시작한 직후 역시 잽싸게 지브롤타로 후퇴. 아거스는 대잠 항공작전 위주. 피데스탈 작전 이외 여러 호송작전에서도 영국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그러나 영국 장갑항모는 여러번 직격탄에 피격되었어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일러스트리어스 경우 피격된 상태에서 몰타 입항, 항구에서 다시 공습에 노출되자 밤에 탈출해 미국까지 도피, 수리 때문에. 영국 본토도 폭격에서 자유롭지 않아 병신된 몸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가 수리받음. 인도미터블은 슈투카에게 대형 폭탄 2발 직격당하고도 꾸역 꾸역 후퇴했죠. 장갑갑판이 찢어졌지만 갑판 아래 핵심 선체는 손상당하지 않아서 탈출에 성공했죠. 미국과 일본의 나무갑판 항모였다면 지중해 진입하면 다시는 못빠져나갑니다. 타격당하는 순간 끝이나 다름 없습니다. 몰타 가는 중에 피격되면 살려면 지브롤타까지 도망가야 하죠. 문제는 적 공군이 계속 추격할 수 있는 추축국 점령지대가 튀니지 알제리등 지브롤타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 호송선단은 대략 3일 정도 항해합니다. 그 3일 밤낮으로 항공기, 잠수함, 수상함의 공격을 당했고, 심할 경우엔 한 번의 공습에 대략 300기 정도의 추축 공군기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함대가 생존한 이유는 하늘엔 몰타의 영국 공군도 출격해서 추축국 공군도 대함공격만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몰타의 영공군 엄호가 없는 구간에서는 항모 함재기와 함대의 대공포 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미드웨이나 태평양에서의 항모전투는 몇 시간 이내에 일단 끝나고 휴식기를 가지게 되죠. 항모가 격침되거나 대파되면 전장에서 이탈되어서 쉬는 거고, 항모 피해 별로 없더라도 무장 떨어지면 보급 때문에 후퇴. 지중해의 호송선단 전투는 약 3일간 밤낮 없이 지속되고, 적 항공기들은 육상기지에서 재급유 재무장받고 다시 출격. 즉 공격하는 측의 공군기지는 격침될 위험이 없어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방어하는 함대의 항모는 격침되거나 대파될 위험. 태평양에서 항모 대 항모 전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항모와 공군력의 대결이었습니다. 항모 단독은 아니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타에서 출격한 영국공군의 호위 아래 영국 항모들이 생존했던 것. 미국 일본의 항모전단이 만일 그 당시 지중해에 진입했다면, 항모전단 자체 세력만으로 살아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무 갑판이라 피격되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적 공군과 잠수함이 끊임없이 추격 반드시 격침시킵니다. 태평양의 항공모함전 때는 잠수함들 활약 어렵죠. 잠수함이 항모 따라다닐 속도가 못되니. 잠수함을 전장에 항상 미리 배치 매복시킬 수도 없고. 하지만 지중해에선 잠수함들은 상시 매복 상태. 강력한 대잠세력을 가지지 못한 항모전단 자체 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태평양과 달리 대서양에선 독일 상대로 항모 대 항모 전투는 불필요, 북해에선 적 공군력 위협이 너무나 커 무르만스크 호송과 같은 임무 이외엔 항모가 진입도 꺼렸고, 지중해에선 몰타 보급 때문에 정말 목숨걸고 들어가 죽다 살아나왔습니다. 물론 영국공군 엄호 아래서 겨우 생존했죠. 그러한 지형적 작전 제한 조건 때문에 영국은 장갑갑판을 채택하면서, 함재기 탑재수를 희생했고, 여러 곳에 산재한 영국 공군기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전쟁 전 함재기 개발 필요성 덜 느겼던 것. 전쟁 터진 이후엔 독일 상대하기 바빠 2차대전 중엔 대부분 미 함재기 의존, 45년 종전 후에야 고성능 씨퓨리와 제트기.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 보급 측면에서 살펴보면, 독일 이태리 추축국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수백km 해상교통로, 영국은 최단거리 직항로라고 해도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이 악화되어 지중해 직항로를 택할 수 없을 경우엔 대서양-희망봉-인도양-홍해-이집트로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짧디 짧은 해상교통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보급이 말라버린 것, 그 자체로 추축국은 승리할 기본 자격이 없었던 것.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2차대전 직전 1939년 선박 보유량 영 1,700만톤 > 미 870만톤 > 일 540만톤 > 노르웨이 470만톤 > 독 420만톤 > 이 330만톤 > 프 280만톤 2차대전 국가별 잠수함의 격침 전과 독 1,500만톤 > 미 500만톤 > 영 150만톤 > 일 90만톤 > 이 70만톤 > 소 40만톤 2차대전 국가별 잠수함의 교환비, 잠수함 1척 격침당할 때 격침시킨 적 함정 수 미 1 : 25 > 영 1 : 9 > 독 1 : 4 > 소 1 : 1.16 > 이 1 : 1.15 > 일 1 : 1.14 항공기 기종별 적 함정 격침 기록, 탑은 소드피시, 2차대전 참전국 모든 항공기 중 믿기지 않게도 구닥다리 복엽기 소드피시, 50만톤 격침. 소드피시가 격침한 유보트 22척. 최초 항공기 잠수함 격침, 최초 레이더 장비 야간 유보트 격침, 최초 로켓탄 격침 등. 적 제공권 위협 없는 적당한 작전 환경에서, 적 잠수함이나 수송선단엔 복엽기 조차도 저승사자였던. 사상 최대 레이테 해전에 동원된 미일 양측 합산 배수량 약 200만톤, 합산 격침 약 30만톤 대비한다면 소드피시 전과는 엄청난. 소드피시 단일 기종 격침 전과 > 전함 모두의 격침 전과 (미+영+일) 잠수함 전과 요약하면 1. 독일 : 전쟁 초 압도적 교환비에서 전쟁 중후반 연합국 대잠전에 강철관으로 전락 교환비 다 까먹음. 2. 미국 : 일본의 대잠 능력 부실함으로 독일 유보트 함대 대비 압도적 손쉬운 작전 환경에서 최고의 교환비 기록 3. 영국 : 북해-지중해 적 육상기지 항공기 초계 + 상대적으로 적은 먹이감, 저 정도로도 롬멜 무력화. 4. 일본 : 대서양에는 못미치지만 매우 풍족한 먹이감 + 최악 수준의 대잠 능력, 많은 먹이감에도 전과 못얻음. 대서양에서 독 유보트 함대는 엄청난 전과에도 전멸급 패배. 자침 포함 약 780척 격침되며, 승조원 75% 전사로 2차대전 참전국 모든 병과중 최고 손실률. 독 수상함대 대부분과 독 유보트 격침의 3/4은 영국과 영연방 해공군에 당함. 독일 유보트 전과 가장 큰 부분은 대서양에서 격침시킨 영국 상선. 독일과 이태리 선단 대부분은 2차대전 기간 중 잠수함과 공중 공격에 의해 격침 또는 무력화. 2차대전 동안 미국 + 영국 + 영연방이 신규 건조한 모든 군함 + 화물선 = 약 4500만톤 미국이 대부분 건조했지만 영국과 영연방이 각각 약 600만톤씩 영 + 영연방 약 1200만톤 건조. 즉 미국은 약 3300만톤 건조. -----------------------------------------> 저 선박 건조 물량을 체감하게 쉽게 독 최강 타이거 전차로 환산하면, -----------------------------------------> 계산 편의상 타이거 1대 무게를 100톤이라고 하면, 4,500만톤 / 100톤 = 45만대. -----------------------------------------> 하지만 실제 타이거 무게는 약 50톤 이므로 x 2 하면 -------------------------------> 타이거 약 90만대 분량 강철 투입. -----------------------------------------> 2차대전 독일이 생산한 모든 버전의 타이거 전차 총합이 3천대 안될 것, 소련이 전후 생산분 포함한 t34 전체도 약 10만대. ----------------------------------------->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영국-영연방이 건조한 선박을 타이거로 환산하면 약 20만대 분량. -----------------------------------------> 소련의 자체 장비와 엄청난 병력을 고려하지 않고도 저런 레벨 차이가 존재했던. 종전 당시 영국은 전쟁 직전 보다 선박 톤수에서 약400만톤 줄었고, 종전 무렵 미국은 2차대전 기간 대량 생산한 리버티선의 영향으로 세계 1위가 되었지만, 미국이 보유한 선박 대부분이 리버티선으로 항구에 계류되어 보관 폐기 과정을 겪으며 몇 년 후 실제 운항 선박에선 다시 2위. 리버티선의 설계도는 영국이 미국에 제공. 2차대전 직전 세계 해양 무역은 대서양이 압도. 만일 대서양에서 영국이 일본과 같은 대잠능력을 가졌다면 -------------------> 영국은 최소 휴전 몰렸거나 항복 만일 태평양에서 일본이 독일 유보트와 같은 전과를 거두었다면 -------------------------------> 최소 종전 몇 년 더 길어졌을 것 영국이 독일 전격전 초기 적당한 조건으로 휴전을 선택했다면, 미국의 엄청난 대량 생산능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기술 지원 불가능한 중립 내지는 독일편에 설 수 밖에 없는 영국 조건에선, 미국은 당시 영국-독일에 뒤쳐진 과학기술 수준으로 볼 때 단독 능력으로 대서양전투에서 승리해 대서양을 건너 유럽대륙에 상륙 독일을 패배시킬 수 없었을 것.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거의 모든 첨단 과학기술 즉 레이더, 근접신관, 제트엔진, 소나, 핵임계질량, 페니실린, 마그네트론, ... 영국이 제공한 기술로 시작된 것 고려한다면 미국 단독으로는 대서양 건너의 대륙을 장악한 독일을 패배시키 긴 어려운. 그런 조건에선 소련이 독일에 승리하는 것도 불가능, 독일은 독소전에서 우랄 서부 소련 핵심 지대 점령한 상태에서 소련에 휴전을 강요할 능력은 되었을 것.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1945년 종전 무렵 영국 태평양 함대, task force 57 오키나와 상륙전 task force 50 소속 미영 각기 1개씩 2개 항모전단 중 하나인 영국측 함대. 함대항모 4(모두 장갑항모), 호위항모 15, 전함 4, 순양함 11, 구축함 약 40, 잠수함 약 30. 기타 수 많은 보급함. 탑재 함재기 약 750기 탑재된 함대방공전투기의 과반 이상은 콜세어. 방공 전투기로는 콜세어, 핼켓, 씨파이어.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도 미제 영국제 기체 섞인.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 및 43년 하반기 대서양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 후 독일 유보트 함대 철수로 영국 해군에 대한 독일의 압력이 많이 약화되어 인도양과 태평양으로의 전개 여력이 매우 커짐. 하지만 미 해군 총사령관인 킹 제독과 태평양의 미 함대 최고 지휘부 내 할시 제독 등은 영국해군의 태평양 진입 반대. 처칠과 루즈벨트의 담판에 의해 영국해군이 태평양 해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보급 문제 때문에 준비가 필요. 44년 2월 영해군성은 각종 보급선 약 130척, 톤수로 약 150만톤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추산. 1945년 영국 해군 일부 파견, 그것도 단 몇 개월간 보급에 투입된 물량 150만톤은 이태리가 전쟁 전 기간 손실당한 200만톤에 비교될 정도. 태평양의 영함대 보급 거점으로 필리핀을 제안했지만 미국측 거부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와 인도 등 기존 영국령 사용. 일본군과 실제 교전했던 대다수 미 해군 장병들은 영국해군의 참전을 반겼지만, 미 해군 최상부의 입장은 전혀 달랐던 것. 전쟁 때 마다 흔히 일어나는 정치적 목적, 즉 미 해군 단독의 승리를 더 원했던 것. 1. 카미카제에 거의 동시에 2 군데 공격당한 HMS Victorious kzbin.info/www/bejne/bmazlmiwjbWUa9U 2.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Indefatigable 45년 4월1일 kzbin.info/www/bejne/a6GZfZ9thbCYpqM 3.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Illustrious 45년 4월6일 kzbin.info/www/bejne/r5DWoqJ6hrmap68 4.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Formidable 45년 5월4일 kzbin.info/www/bejne/q2aaloCqr5KDd6c -----------------> 5분50초 ~ 6분50초, 장갑갑판 패인 부분 시멘트로 복구. 카미카제에 직격당하는 영 장갑항모들. 나무갑판이었던 미 항모와 달리 직격당한 후에도 잔해 치우고 바로 작전 가능했습니다. 카미카제에 손상당한 함교 부분과 화재 진압 및 직격당한 장갑갑판 일부가 조금 패인 모습 보이고, 저 때 이미 출격했던 영 콜세어는 쾌속 건조 시멘트로 장갑갑판 패인 부분 메꾼 후 착륙했다고 합니다. 즉 시멘트 붓고 건조하고 갑판 정리 뒤 바로 항모 작전 가능. -----------------------------------> 여기 영상에는 카미카제 공격당해 불타고 완전 무력화된 미 항모 플랭클린 모습도 나옵니다. 장갑갑판은 차원이 다른 방어력. 2번 영상 초반부에 항모 내 레이더 관제실 모습이 나옵니다. 2차대전 후반기면 영국과 미국은 거의 동일한 레이더와 관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저 무렵이면 이미 함대 대공포의 포탄도 근접신관이 장착된 최신형 포탄 사용. 지상 방공포의 경우 최전선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해군의 함대 방공포탄은 적군에 노획될 위험이 없었기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지상 방공포대엔 영국 본토의 v-1 요격용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영국이 미국에 제공한 마그네트론과 근접신관 기술로 미국이 대량 생산 공급한 레이더와 근접신관. 씨파이어는 육상기인 스핏파이어를 급하게 개조했기에 약한 착륙기어와 착륙기어간 좁은 간격으로 착륙 때의 비전투 손실율이 매우 컸습니다. 2차대전 미 함재기 최고 성능 기체 콜세어, 항모 운영은 미 해군 아닌 영국 해군이 시작. 콜세어 앞 부분이 길고 커서 항모 착함 때 전방 시야를 가려 미 해군은 항모 도입 포기하고 해병대 육상 기지 항공기로 사용. 하지만 영국 해군은 지중해에서 고성능 독일기를 상대해야 했기에 콜세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했고 결국 새로운 항모 착함법 개발. 직선 아닌 항모 좌현에서 선회하며 날개 아래 쪽으로 갑판을 보며 착함. 미 항모에 착함법 이전되며 미 항모도 콜세어를 주력 함재기로. 지중해, 북해 전장 특성상 독일 공군 상대는 영국 해군 아닌 영국공군이 주역이였기에 함재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미제 함재기 의존율이 높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전 말 영해군의 주력 방공전투기는 미제 콜세어였고, 종전 직후에야 영국제 고성능 씨퓨리가 배치됩니다. 하지만 이미 45년 12월에 영국은 제트 함재기의 항모 이착륙 실험에 성공했기에 고성능 프로렐러 함재기는 수명이 매우 짧았고. 콜세어와 씨퓨리 모두 한국전쟁에서 미그15기 격추 전과를 세웠죠. 미그기 격추한 씨퓨리는 현재 호주 비행 동호인 소유라고 합니다. 미그기 격추시킨 콜세어는 그 공중전에서 다른 미그기에게 격추당했다고. 4. 씨퓨리 Hawker Sea Fury - Awesome Footage of the fastest piston fighter ever kzbin.info/www/bejne/gWKUf4eYlt2trNU ( 기록용으로 개조된 씨퓨리는 프로펠러기 비공인 최고속도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으론 시속 약 870km/h ) ( 미국-영국-독일의 2차대전 당시 프로펠러기 최고 속도는 대략 시속 750km/h ) ( 씨퓨리는 2차대전 종전 직후 배치되었고 엔진 최대 출력은 3500마력 정도.) ( 씨퓨리는 독일의 도살새 포케불프와 외형이 비슷한 느낌. )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 ~ 평범한 몬티에게 박살났죠. ) --------------------------> 몬티가 평범한 편이지만, 그 집구석은 용가리 통뼈일 수도 있답니다. 몽고메리 : 정복왕 윌리엄 휘하의 정복군 후손, 1000년 전 출발지 노르망디로 역상륙 1066년 노르만 정복, 정복왕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출발해 노르만 바이킹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정복합니다. 그 정복군에 가담한 군인의 후손이 약 1000년 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지상군 최고사령관 몽고메리. 몽고메리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얽힌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 이름 부터 웬지 영어 같지 않은 느낌이 들죠. 그렇습니다. 프랑스 계통의 이름입니다. 알프스의 몽블랑, 몽은 마운틴, 블랑은 화이트,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백두산. 몽고메리의 몽은 바로 불어로 산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몽고메리는 고메리 산이라는 것이죠. 노르망디의 한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을 딴 지명에서 유래된 성씨인 겁니다. 몽고메리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1000년의 세월을 건너 뛴 우연이라고 보기 애매한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 올립니다. 1000년 전 조상이 침공군으로 출발했던 땅, 후손이 1000년 후 침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온 노르망디. 바이킹의 일족이 프랑스 북서부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행패를 부리자,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던 프랑스 국왕은 그 우두머리를 영주에 봉하고 점령된 지역을 영지로 하사해 달랩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노르만족, 그들이 사는 땅이라는 말 뜻의 노르망디. 프랑스 국왕의 신하 영주로서 노르만공. 하지만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노르만족의 위세는 극에 달해 프랑스 내부의 영지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 보다 넓은 정도에 달했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00년 전쟁이 터지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100년 전쟁의 패배, 패배였지만 새로운 출발 이었습니다.. 노르만 지배층과 앵글로색슨 피지배층이 프랑스 영토를 상실한 이후 하나의 국민 국가로 거듭나게 되죠. 영화로도 유명한 헨리5세 시절이면 이미 왕족과 귀족들도 국민 다수의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미 전쟁 드라마 제목,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바로 셰익스피어 연극 대사, 아쟁꾸르 전투에서의 헨리5세 연설. 100년 전쟁 아쟁꾸르 전투 직전 병력의 압도적 열세로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자, 헨리5세가 그들을 격려했다는.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수는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이 전투에 참여-지원하지 않고 고국에서 편하게 지내는 귀족들은 후회할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함께 피흘리며 싸우는 우리는 국왕, 귀족, 평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형제다. 형제들의 모임 무리! 참고로 헨리5세는 아쟁꾸르 전투 승리 후, 잉글랜드와 프랑스 통합 국왕에 오르지만 얼마 안되어 이질인가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죠. (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에는 아마도 이 두가지가 포함될 것. 스타워즈와 터미네이터 대사. 스타워즈 대사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대사 -------------------> 내 돌아올끼다, 셰익스피어 따라갈려면 멀고도 먼. ) 프랑스어가 섞인 노르만 바이킹의 언어가, 대다수 앵글로색슨의 고대 게르만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오늘날의 영어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이킹의 사법제도, 관습 등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오늘날 영미법의 근간인 배심원제 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 노르만 정복으로 오늘날 영국, 그 영국에서 갈라져 나간 미국이 생겨난 겁니다. 브리튼 제도, 로마 시절 로마화된 문명화된 켈트족들이, 로마에 저항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로 쫒겨난 켈트를 두려워해, 로마군 철수 이후 동족인 야만족 켈트를 막기 위해 용병으로 독일 북서부와 덴마크에 거주하던 앵글로색슨을 고용했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용병이 주인을 쫒아내고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한 겁니다. 그 잉글랜드 왕국 조차 최종적으로 노르만 바이킹에게 정복되어 오늘날 영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만 정복자들의 수가 워낙 적어 그들은 결국 앵글로색슨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죠. 원래 거주자 켈트, 굴러들어와서 박힌 돌 빼낸 앵글로색슨, 앵글로색슨을 정복한 바이킹 노르만, 그 모두가 뒤섞인 공동체. 참고로 잔다르크 말 뜻은 잔 of 아크 : 아크 라는 동네의 잔, 불어로 of 는 de 드, 발음은 연음되어 잔드아크 아닌 잔다르크. 몽고메리 이름도 원래는 앞에 de 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 de 몽고메리, 몽고메리 동네에 사는 ~~~ < 몽고메리 이름에 대한 인용입니다.>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Gomeric의 산'이란 뜻의 옛 노르망디어에서 왔다고 한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서부의 지방으로 바이킹으로 알려진 북유럽인들, 즉 노르만족이 정착한 땅이다. 노르망디어는 노르만족의 원 언어가 아니라 노르망디에 정착한 후 사용하게 된 현지 방언으로 프랑스어와 같은 방언군에 속한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가장 흔한 철자는 Montgommery이며 발음은 [mɔ̃ɡɔm(ə)ʀi] '몽고므리'이다. '몽곰리'로 적으면 [몽곰니]로 발음하기 쉬우니 [ə]가 발음되는 것으로 보고 '몽고므리'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르망디에는 아직도 생트푸아드몽고므리(Sainte-Foy-de-Montgommery), 생제르맹드몽고므리(Saint-Germain-de-Montgommery), 콜빌몽고므리(Colleville-Montgomery) 같은 지명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신하 로제 드 몽고므리(Roger de Montgommery) 역시 이때 잉글랜드에 건너갔으며 후에 초대 슈로즈베리 백작(Earl of Shrewsbury)이 되었다. 이후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도 퍼졌으며 영어권에서 흔한 이름이 되었다.
@seokyi8577
@seokyi8577 Жыл бұрын
2대전 전차전술 갑은 패튼인데 희한하게도 한국인들은 롬멜은 지장으로 알고 패튼은 달돌무뇌로 착각하지. 패튼이야말로 용의주도함과 과감힘이 함께한 천재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 야전지휘관 롬멜의 전략적 식견 부족 아닌. 독-이 추축국 역량 부족으로 패배당한 것. 1942년 8월 operation pedestal 최대 몰타 호송선단 : 상선14, 전함2, 항모5, 순양함7, 구축함32 등 kzbin.info/www/bejne/ZprRg2Wgh7yShpo Operation Pedestal: The Convoy That Saved Malta (2분25초 이후 지중해 진입할 때의 페데스탈 선단 배치 그래픽으로 나옴.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선단 배치 모습.) kzbin.info/www/bejne/Z2KUaGapeZiencU Battle Of The Convoys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jpeWp62piZljl6s Malta Convoy Battle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p5u4noWwgL97Y6c Malta Convoy - Further Pictures (1942) 실제 전투 영상 kzbin.info/www/bejne/n6WWoYKPgpV9oaM HMS Nelson Hit in Convoy Attack 실제 전투 영상 blog.daum.net/mybrokenwing/387 몰타를 살리기 위한 발악들(5) 국내 블로거 봉달이님 글.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 무의미한 가정입니다. 롬멜의 전략적 식견이 부족해 ... ...? ------------------------> 롬멜 아닌 독-이 국가 차원의 문제. 독일-이태리 추축국 보다 압도적으로 길었던 영국의 해상교통로 및 방어하기 훨씬 어려웠던 환경. 최단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약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이용 못할 때는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지구 차원. 몰타의 위치는 시칠리에서 약 90마일, 북아프리카에서 약 160마일로 지중해 전역은 사실상 이태리의 내해 성격으로 호수와 다름 없는. 추축국 잠수함은 상시 매복, 해상과 공중에서 추축국의 공세로 몰타는 말라죽기 일보직전으로 몰리기도. 영국 최단 직항로 3,500km ------------------> 선단 집결지 지브롤터 기준에 불과합니다. -------------------------------------------------------------> 실제 선단의 출발점은 짧아도 영 본토, 대서양 건너의 캐나다와 미국에서 영 본토 거친. (롬멜-추축국과 영국의 해상 교통로 길이와 방어 난이도가 뒤바꼈다면? 롬멜이 아니라 그 할애비의 할애비의 할애비 조차도 북아프리카에 상륙도 불가능. 애초 지중해에선 전쟁 나지도 않았을 것.) 독일 이태리 추축국의 공격을 뚫고 보급을 성공시켰지만,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거의 모든 함정이 손상당했고 격침된 함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선9, 항모1, 순양함2, 구축함1. 격침된 항모는 장갑항모 이전의 함대항모 이글, 독 유보트에게 격침당했습니다. 장갑항모 인도미터블은 대파. 상선은 14척이 출발해서 몰타엔 겨우 5척만 도착했죠. 불행중 다행으로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이었던 오하이오는 겨우 도착. 오하이오는 원래 미국 유조선이었지만 영국해군이 임대해서 승무원은 모두 영국인. 거의 1만톤급 유조선 오하이오 역시 피해가 커 전승무원이 퇴함하기도 했으나 구축함3척이 양 옆과 앞에서 지탱하며 끌고 반쯤 가라앉은 상태로 몰타 입항. 몰타 도착후에 기름 거의 다 퍼낸 상태에서 결국 침몰했습니다. 4척의 일반 상선과 1척의 유조선 도착으로 보급받은 물자는 약 5만5천톤, 그 중 석유는 약 9000톤, 식량과 탄약 4만5천톤. 페데스탈 작전 피해가 너무 커 다시는 이런 작전을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5만5천톤의 보급은 몰타를 살려냈고, 역으로 살아난 몰타로 인해 롬멜의 보급이 끊기고 몇 달 후 엘알라메인. 동원된 전함중 1척은 어뢰에 피격되었지만 천운으로 별 타격 입지 않았고, 동원된 항모 5척은 장갑항모2척, 구형의 함대항모였던 이글과 퓨어리어스, 그리고 세계최초의 전갑판 항모 아거스. 아거스는 세계최로로 상부구조물이 제거된 전갑판 항모였지만 함대항모가 아닌 소형 호위항모. 퓨어리어스는 항대방공 임무가 아닌, 몰타에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영공군 스핏파이어를 탑재, 몰타 약 1000km 전방에서 항공기를 몰타로 출격시키고 지브롤터로 바로 귀환했습니다. 즉 장갑항모 2척이 몰타 인근 해상까지 함대방공 임무를 수행 하다, 몰타의 영공군이 엄호하기 시작한 직후 역시 잽싸게 지브롤타로 후퇴. 아거스는 대잠 항공작전 위주. 피데스탈 작전 이외 여러 호송작전에서도 영국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그러나 영국 장갑항모는 여러번 직격탄에 피격되었어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일러스트리어스 경우 피격된 상태에서 몰타 입항, 항구에서 다시 공습에 노출되자 밤에 탈출해 미국까지 도피, 수리 때문에. 영국 본토도 폭격에서 자유롭지 않아 병신된 몸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가 수리받음. 인도미터블은 슈투카에게 대형 폭탄 2발 직격당하고도 꾸역 꾸역 후퇴했죠. 장갑갑판이 찢어졌지만 갑판 아래 핵심 선체는 손상당하지 않아서 탈출에 성공했죠. 미국과 일본의 나무갑판 항모였다면 지중해 진입하면 다시는 못빠져나갑니다. 타격당하는 순간 끝이나 다름 없습니다. 몰타 가는 중에 피격되면 살려면 지브롤타까지 도망가야 하죠. 문제는 적 공군이 계속 추격할 수 있는 추축국 점령지대가 튀니지 알제리등 지브롤타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 호송선단은 대략 3일 정도 항해합니다. 그 3일 밤낮으로 항공기, 잠수함, 수상함의 공격을 당했고, 심할 경우엔 공습에 대략 300기 정도의 추축 공군기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함대가 생존한 이유는 하늘엔 몰타의 영국 공군도 출격해서 추축국 공군도 대함공격만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몰타의 영공군 엄호가 없는 구간에서는 항모 함재기와 함대의 대공포 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미드웨이나 태평양에서의 항모전투는 몇 시간 이내에 일단 끝나고 휴식기를 가지게 되죠. 항모가 격침되거나 대파되면 전장에서 이탈되어서 쉬는 거고, 항모 피해 별로 없더라도 무장 떨어지면 보급 때문에 후퇴. 지중해의 호송선단 전투는 약 3일간 밤낮 없이 지속되고, 적 항공기들은 육상기지에서 재급유 재무장받고 다시 출격. 즉 공격하는 측의 공군기지는 격침될 위험이 없어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방어하는 함대의 항모는 격침되거나 대파될 위험. 태평양에서 항모 대 항모 전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항모와 공군력의 대결이었습니다. 항모 단독은 아니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타에서 출격한 영국공군의 호위 아래 영국 항모들이 생존했던 것. 미국 일본의 항모전단이 만일 그 당시 지중해에 진입했다면, 항모전단 자체 세력만으로 살아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무 갑판이라 피격되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적 공군과 잠수함이 끊임없이 추격 반드시 격침시킵니다. 태평양의 항공모함전 때는 잠수함들 활약 어렵죠. 잠수함이 항모 따라다닐 속도가 못되니. 잠수함을 전장에 항상 미리 배치 매복시킬 수도 없고. 하지만 지중해에선 잠수함들은 상시 매복 상태. 강력한 대잠세력을 가지지 못한 항모전단 자체 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태평양과 달리 대서양에선 독일 상대로 항모 대 항모 전투는 불필요, 북해에선 적 공군력 위협이 너무나 커 무르만스크 호송과 같은 임무 이외엔 항모가 진입도 꺼렸고, 지중해에선 몰타 보급 때문에 정말 목숨걸고 들어가 죽다 살아나왔습니다. 물론 영국공군 엄호 아래서 겨우 생존했죠. 그러한 지형적 작전 제한 조건 때문에 영국은 장갑갑판을 채택하면서, 함재기 탑재수를 희생했고, 여러 곳에 산재한 영국 공군기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전쟁 전 함재기 개발 필요성 덜 느겼던 것. 전쟁 터진 이후엔 독일 상대하기 바빠 2차대전 중엔 대부분 미 함재기 의존, 45년 종전 후에야 고성능 씨퓨리와 제트기.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 보급 측면에서 살펴보면, 독일 이태리 추축국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수백km 해상교통로, 영국은 최단거리 직항로라고 해도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이 악화되어 지중해 직항로를 택할 수 없을 경우엔 대서양-희망봉-인도양-홍해-이집트로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짧디 짧은 해상교통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보급이 말라버린 것, 그 자체로 추축국은 승리할 기본 자격이 없었던 것.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kzbin.info/www/bejne/aWXSg2V6ZqyJi5Y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kzbin.info/www/bejne/pl6cqGWAathjrrc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니지-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scz8333
@scz8333 Жыл бұрын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미국의 1차대전 대독 선전포고 1917년 4월경. 하지만 미국이 대규모 징집하고 훈련한 다음 본격 유럽에 지상군 투입한 것은 1918년 5월 부터. 독일의 항복이 1918년 11월임을 고려한다면, 미군의 1차대전 실전 경험은 몇 개월에 불과. 1차대전 참전한 롬멜-몽고메리 대비 패튼 실전 경험 무시해도 되는.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롬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라면 패튼은 비판의 칼날을 더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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