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이 구약과 분리된 기록이 아니라면 신약을 통해 구약을 볼수 있는 눈을 가질때 비로소 구약이 담고 있는 그 하나님의 본 뜻이 드러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구약을 볼때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하게 되고 자기의 원함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율법을 도적질하여 그 언약을 깨는 자가 됩니다. 그에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이해함(νοημα)이 완고하여 (πωροω:돌처럼 굳어져 딱딱해지고 무감각해져) 그 오늘까지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동일한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그러나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이해할) 때에 수건이 그 마음위에 덮혀 있도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아는 교리적 가르침과는 다르게 "그리스도"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다." 고린도후서4장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이해함을 혼미케(τυφλοω:눈멀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사도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을 장차 반드시 올 좋은 일들을 가리키는 그림자요 모형으로 보는 눈을 얻었고, 그 눈으로 구약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도 성경을 "나" 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글로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첫 머리 창세기는 "나"에 대해 증거하는 글입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나"에 대해 증거하는 글로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이해함이 돌처럼 딱딱해지고 우리의 눈이 멀어 있어 구약을 읽을때에 그 동일한 수건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29장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그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창세기1장~2장3절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경륜의 설계입니다. 그리고 창1장 27절의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을 따라 창조하는 사람은 창2장의 흙으로 지은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신 약속(예정)을 따라 설계(경륜)대로 창조되는 사람 곧 사도바울이 말하는 새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앎)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고 있는 자니라 로마서8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창2장의 땅의 흙으로 지음받은 아담은 하나님이 이끌어오시는 돕는자를 통해 그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부터 나오는 진액을 먹고 마셔 생명을 얻고 또 풍성히 얻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와 합하여져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 생명의 앎으로 충만한 생명적 존재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선과 악을 알게하는 지식(앎)나무로부터 나온 열매를 먹고 생명이 아닌 사망을 아는 사망적 존재로 떨어져 버렸고 그의 παρακοη(파라코에:잘못들음,불순종)로 인해 세상에 'αμαρτια(하마르티아:과녁인 생명을 맞추지 못하고 사망으로 빗나가게 하는 "죄")가 들어오고 그 죄를 통해 그 사망이 모든 사람의 인식과 의식과 생각인 "나"속에 들어와 지배(왕으로)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인식과 자기생각과 자신의 내면속 의식작용과 그 흐름 그리고 자기 지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만이 홀로 모든 사람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그 나의 생각 곧 "나"속에 "죄"가 머물러 있으면서 내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폭로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모든 인간의 육적 생각(사람의 지혜=육체의 지혜)을 지배하는 주체는 죄이고 그 죄의 능력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생긴 율법(의식=마인드=사고)이고 그 죄를 통해 사망이 "육적 나"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성경은 인간실존의 존재상태를 알려줍니다.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이 육신의 생각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인간의 인식과 의식을 지배하는 원리(법)가 "죄와 사망의 법"이고 그 원리가 통치(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인식및 의식상태(땅)를 빛이 없고 공허와 혼돈만 있는 "흑암(어두움)"이라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비신자나 하나님을 비방하는 불신자와 타종교사람이나 이단 종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만 그 믿음과 섬김이 육의 생각이라면 그 하나님을 섬김 그 자체가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는 존재상태입니다. (유대인이 신령과 진정으로 열심을 다해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지만 "너희 아비는 마귀"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은 이유가 율법을 듣는 그들의 들음이 빗나갔기παρακοη에 육을 좇는 땅적 차원의 생각으로 아는 지식을 좇아 땅의 소산으로 여호와를 섬겼다는데 있답니다.) 로마서 8장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세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내 안에 이미 육의 생각으로 있습니다. 세상은 육적 차원의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육의 생각으로 운용되고 육의 생각이 지배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야고보서 4장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사람은 죄와 사망의 원리가 돌아가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달림으로 죽고 무덤에 장사하여 묻힘으로 후패하고, 그 죽은 나를 그리스도를 죽은자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하나로 접붙히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때 내안에 나타나는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내안에 형상화되는 성령의 생각을 할수 있는 새로운 "나"... 잠에서 깨어 "나"와 "내 안"를 볼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길 기도하고 깨어 그 눈으로 나와 내 속을 볼수 있는 이들이 되기를...
@park8878 Жыл бұрын
@@R-VD 두 번이나 제 글에 댓글 달아주셔서.. 다른 곳에 올린 댓글이지만 말씀이 스며들어 안에 거하신다면 읽어 보시길... 하나님과 주예수그리스도로부터 긍휼과 은혜가 임하길..
@park8878 Жыл бұрын
@@R-VD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인간의 관점과 기준에서 쓰여진 육적 차원의 문자적 기록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으로 쓰여진 영에 관한 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할 것이다. 이 대전제는 우리의 눈이 아닌 존재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께서 깨달아 발견하고 로마서에 기록으로 남긴 "죄"도 그러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가르침입니다 사람에겐 죄를 판단하고 이해하는 두 시기(καιρος: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한 시기는 죄를 윤리도덕적 규범과 종교적 계명으로부터 이탈하여 그 규범과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육에 속한(내적 외적)행위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죄를 행위적 관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규범과 계명을 어긴 행위를 자기가 했다고 자각하면 양심의 일인 죄책감을 느끼고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 종교가 가르치는 죄용서함의 의식(기독교는 회개나 고해성사) 등을 통하여 자신을 씻는 행위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이 이 차원에 머무르고 끝납니다 그러다 두번째 은혜의 때가 오면 그러한 규범과 계율을 어기는 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나"란 존재가 문제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때가 옵니다. 이 때가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나타나고 그 초보가 버려지는 때이고 또 계시를 통한 율법의 변역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 두번째 시기부터는 "죄"가 행위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적이고 상태적 차원으로 각자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노출하고 폭로한 'αμαρτια(하마르티아:그 죄)는 육체와 상관된 계명을 좇을 때의 그 행위적 죄가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에 계시를 통하여 알기 시작하는 존재적이고 상태적인 원리로서의 죄입니다 이 'αμαρτια(하마르티아)는 모든 사람의 "나" 속에 존재적이고 상태적으로 거하고(μενω메노:머무르다) 있는 내적 원리로서의 실체입니다 이 원리적 실체로서의 죄는 창3장 사건을 통해 인간속에 들어왔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정하든 하지않든 그 죄를 "나"속에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은 규범과 계명을 어겨 탈법적 죄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속에 그 존재적이고 상태적인 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죄인" 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이 각자의 "나"속에 머무르고 있는 죄는 내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내안에서 행하고 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을 듣고 깨달아 "생명"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σκανδαρον(걸려넘어짐)의 일을 합니다 둘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도록 인도하여 사망이 왕노릇하는 존재상태에 붙잡혀 있도록 모든 사람을 속이는 일을 합니다. 이 죄가 행하는 일은 나와 분리되어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죄가 하는 일은 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도 행하고 있는 내 인식과 내 의식과 내 마인드와 내 사고와 내 깨달음(지각)과 내 의지와 내 말로 죄의 일은 (믿든 안 믿든) 나타납니다. 각자의 "내"안에 거하고 있는 죄가 행하고 있는 일과 그 일이 주는 결과적 모양과 형상을 성경은 "육신의 생각"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죄가 일한 결과로 내가 받는 결과(삯)가 무엇인가 하면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인식하고 의식하고 사고하고 지각하는데 그 생각이 "사망" 곧 육신의 생각이고 그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요 대적자 상태라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이고 기준입니다. 이처럼 문제는 내 육적 생각 즉, 내 육적 차원의 인식과 사고와 마인드에 있다는 것이고 그 생각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있는 주체가 나인거 같은데, 문제는 '나'는 이런 하나님과 원수되는 결과(악)를 원치 않는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 원함(선)과는 상관없이 내가 어찌 해볼수 없는 이 죄와 사망의 생각의 법(ο νομος:원리,법칙,법)을 나는 벗어날수 없다는 것이고, 이 생각의 법의 주체는 사실 "내"가 아니고 내안에 또다른 놈이 존재하고 있어 이런 결과를 빚는다는 자기(나)안의 숨겨있던 비밀을 기록한 것이 로마서 5~7장...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수 없는 이 육신의 생각을 할수 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상태(악인)를 발견하고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비참한 자신(모든 인간)의 상태를 애통해 한 것...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육신의 생각(사망)에 붙잡혀 사망의 그늘인 빛이 없는 흑암속에 "나"란 존재를 가두어 두고 있는 내 안에 거하는 실체랍니다 "나"는 그 죄아래 팔려져 있기 때문에 육에 속한 육적 차원에 붙잡혀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좇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고 어떻게 하면 더 더 더 많이 소유하여 사람들과 세상의 인정을 받고 남들 보란듯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열등감에 쩔은 인간이 되지않고 남들위에 올라 서서 다른 이를 지배할수 있는 우월한 큰 자가 될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죽어서도 장소적 지옥에 안떨어지고 하나님과 예수님 잘 믿어 장소적 천국에 올라가 물리적 고통 안받고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꾸며진 맨션같은 좋은 집에서 염려 죽음없이 영원히 내 가족과 편안히 살수 있을까 등 육적 차원의 육신의 생각을 하고 산다 존재적이고 상태적 죄란 생각을 지배하는 주체이다. 생각을 다스리고 있기에 나의 눈(봄)과 나의 귀(들음)를 지배하고 있는 주체도 내 안에 거하는 죄다 이 죄가 일으키는 육적 인식과 육적 괸점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깨닫고 있는 상태를 성경은 어두움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눈은 몸의 등불이다. 나의 눈이 악하면 나의 온 몸도 어둡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그 본다고 하는 빛이 내속에 거하는 죄가 일으키는 어두움(인식)이기 때문이다 요9장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이 되었었더면 그 죄를 갖고 있지 않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들의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μενω:머물다) 죄를 자백한다는('ομολογηω) 것은 삶속에서 내가 과거 현재 미래 행한 무슨무슨 그릇된 행위를 철저히 낱낱이 시인하고 고백하여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고 다짐하는 그런 반복될수 밖에 없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함이 아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자기(나)의 실존의 상태앞에 눅18장 세리처럼 꼬꾸라 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하나님앞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처분만 바라고 있는 상태이다. 지옥을 가라하시면 두 말 없이 고개를 떨구어 울며 그저 가는 것이다 그저 내가 힐수 있는 것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일 뿐이다 . 이 비천한 상태를 안 자들은 설사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해 영벌로 떨어질지라도 원망은 없다. 그저 그럴뿐 하나님의 긍휼은 내가 볼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은 소경이요 들을 귀가 없는 귀머거리요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팔던 창녀요 온 몸이 썩어 문드러진 문둥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거지의 비천한 상태란 것을 안 자들에게 임한다 마9장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모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 6장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안에 죄가 일으키는 눈과 귀는 감겨야 하고 막혀야 한다 내안에 죄가 일으키는 마음으로 깨닫는 깨달음은 둔해져야 한다 ↓이어서
@park8878 Жыл бұрын
그래야 병자를 치료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눈과 귀를 고치시고 볼수 있는 새로운 눈과 들을수 있는 새로운 귀와 부드러운 깨닫는 마음을 주어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원리(법,법칙)인 성령의 생각(생명)을 할수 있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진 새사람으로 거듭낳아져 앎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할례받지 않은 눈과 귀와 마음인, 죄가 거하는 내 눈과 내 귀와 단단한 내 마음으로만 깨닫는 옛사람의 행위를 반복하는 땅의 일(생각)인 육신의 생각속에 갇혀 멸망으로 들어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인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 가지고 가는 것은 생각과 그 상태는 가져갑니다. 신명기29장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חרפה:헤르파:치욕,외음부, 참소,수치,노출시킴)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유대인이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음에도 그들이 그 율법과 계명을 통해 생명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그들속에 있는 그 죄가 일으키는 인식인 그들 자신의 육적 눈과 육적 귀로 율법과 계명을 보고 듣고 이해하여 그 이해로 안 지식인 육체에 속한 계명의 일만 반복할뿐 그 율법과 계명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모형과 그림자인 줄을 깨닫지 못함으로 보아야 할 율법의 속을 보지 못하고 율법의 겉만 보고 행한 외식함(외식은 사람들이 말하는 위선이 아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계명을 보고 듣고 이해할때 그 계명을 주신 목적인 생명(그리스도의 몸인 성령의 생각)에 이르지 못하게 한 주체가 바로 그들의 "나"안에 있는 죄이고, 그 죄는 그들의 이해를 눈에 보이는 육적 차원의 율법의 겉에 가두어 눈멀게 함으로 문자적 역사적 이해인 율법의 행위만 보고 듣고 행하게 함으로 그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악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에 있는 들보인 '나는 본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그 오른 눈을 부인하고 뽑아 버려 소경이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었어야 함에도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자기들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수건이 덮인 육적 이해로 힘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리고 그 나로부터 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를 찾고 구하지 않고 사람의 육적 지혜인 나의 이해와 나보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똑똑한 관원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그 먹지 못할 물을 하나님이 주신 물이라고 먹고 마신 것입니다. (렘2:13) 유대인의 실패는 오늘날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코람데오가 아니라 그 생명의 물이 나오는 근원인 "나" 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나 로부터 나오는 생수를 구하여 마시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의 말씀을 붙잡고, 내 안에 거하는 죄가 주는 인식인 죄의 이해(들음)로부터 그 말씀이 상처입거나 도적질당하거나 노략질 당하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뜻목숨정성 다해 그 말씀을 주신 본 뜻이 샛별이 비추어 마음속에 나타날때까지 보전하여 지킴으로써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인 성령의 생각(생명)을 달마다 맺어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 그와 같아져가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그 로고스를 인내로 지키고(τηρεω:간직하여 보전하다) 있습니다. 그의 그 말씀이 타인의 소리(음성)인 나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가르침이 아니라 아들의 소리(음성)인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가르침(교훈)으로 들려지기까지 τηρεω (텔레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의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나자신으로부터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αφ 'εαυτου:자기자신으로부터) 말하고 있는 자는 자기자신의 영광을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죄의 일함)가 없느니라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그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창세기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 히브리서 저자의 눈이 담겨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소리)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사람들은 "이 때"가 무엇인지 이해할수 없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그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쫓데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르지 않고 도망하느니라" 그들은 주의 계명(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τηρεω:텔레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세상은 이 "조금있으면" 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세상은 그의 말씀을 τηρεω 하지 않고 또 하지 못하여 그의 말씀을 원수와 짐승과 대적들에게 빼앗기는 자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μενω)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τηρεω)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주님)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안에서(εν) 보내실 그 거룩하신 영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안으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히10:1장차 올 좋은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이처럼 그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τητεω) 지식과 지혜의 근원되신 여호와로부터 오는 생수인 성령 τα ρηματα(타 레마타)가 가까와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입에 믿음의 레마로 가득하여 내 입에서 주님과 같이 말할수 있는 상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상태이고 그 상태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의인들의 상태... 의인들은 보이는 육을 좇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자신속에 현재적으로 사실화되고 실상화되어 가까이 오는 하나님의 나라인 그 영을 좇는 자들입니다. 이 영을 좇는 자들에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살아남을 통해 율법의 요구(δικαιωματα:의로움)는 그들속 성전으로 건축되어지고 이루어집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성령의 생각)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말씀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요5:38 살아서 움직이시는 그의 말씀이 안에 머무르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육신의 생각)에서 생명(성령의 생각)으로 옮겼느니라
@양보라-l4t8 ай бұрын
와ㅡㅡ8878님 대단 목사님이시죠? 형상 정확히 꿰뚫고 계시네요 선악과도 그렇고
@geniespianoclass780911 ай бұрын
대리 통치 이전에 통치를 먼저 받고 받은 통치로써 통치 하는것인데 ,그것이 곧 십자가의 사랑.아닌가요? 이 십자가 사랑이란,남을 통치 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 가는것 이라 생각합니다.
@jamikim266 Жыл бұрын
너무 좋아요
@조철호-u7g8 ай бұрын
인간은하나님과 같은존재입니다
@짱구-t3q Жыл бұрын
선생님..감사합니다... 오늘의 신학공부 자주 보는 평신도입니다.. 선생님의 강의 통해 히브리어 원어로 성경맣씀의 더 깊은 뜻을 배울 수 있어 기쁩니다.. 히브리어 지식이 이 오늘의 신학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andomuri9321 Жыл бұрын
선악과 먹기 전에는 선악도 몰랐는데 무슨 통치? 선악도 모르는데 신이 인간한테 어떻게 책임을 물어요?
@원빈-f2r Жыл бұрын
성경읽어보긴 하셨어요?
@andomuri9321 Жыл бұрын
@@원빈-f2r "일부" 한국인들은 말하는 방식이 참 특이해 ㅋㅋ
@물랭면-m4y Жыл бұрын
선악을 모른다가 핵심이 아니에요. 선과 악을 판결하는 그 권한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제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원빈-f2r Жыл бұрын
쩨렘을 왕들에게만 사용되었다고 하시는데, 창세기를 왕정시대에 쓰여졌다고 생각하시는건가요?
@gwangsekim925 Жыл бұрын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제외한 주변 모든 나라들은 왕국 혹은 제국이었습니다.
@alanjang72549 ай бұрын
첼렘이 히브리어로 기본적인 의미가 갈라진 것,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하셨는데, 근거가 궁금합니다. TDOT에서 첼렘의 어원을 봐도 고대근동어의 동족어들 모두 imgae, idol, likeness 정도라서 여쭤봅니다.
@개혁주의소리 Жыл бұрын
창세기 1장 26절 칼빈주석에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I do not scrupulously insist upon the particles ב, (beth,) and כ, (caph90) I know not whether there is anything solid in the opinion of some who hold that this is said, because the image of God was only shadowed forth in man till he should arrive at his perfection."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칼빈은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오신공까지 상술에 말려들지는 몰랐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히브리어가, 헬라어가 필요하다면 다시 중세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아니 중세를 넘어 고대 이스라엘로 가자는 거지.
@이상은-j5d Жыл бұрын
한글로 된 성경이 우리에게 이해를 시켜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되면서 충분히 원래 언어의 그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영어로는 뜨거운걸 먹으며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표현은 어떻게 번역해야할까요?) 우리, 2023년의 대한민국의 한국어 사용자가 2000년도 훨씬 더 전의 중동의 이스라엘의 히브리어 사용자들에게, 먼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텍스트를 더욱 깊이 있게 알고자 노력하는 모습으로 봐주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랑에 깊이 스며드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David08012 Жыл бұрын
종교개혁가들이 누구보다 원어에 진심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원의를 정확히 밝혀내려고 시도함으로써 가톨릭의 그릇된 교류들을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죠. 다음은 루터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원어가 나에게 말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확신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사슬에 묶인 수도사로 남아 로마의 오류를 조용히 설교하는 일에 몰두하고, 수도원의 어둠 속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교황, 소피스트들, 그리고 그들의 반기독교 제국은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 역시 평신도들이 원어를 배워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교회의 말씀교사들은 반드시 원어를 수고로이 배워서 양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줘야 한다고 부단히 강조하였습니다.
@David08012 Жыл бұрын
그러므로 전원희 목사님은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을 따라 성경교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구독자-l5r Жыл бұрын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건 통치. 지배. 관리가 아니고.........지구의 모든 생물을 잘 돌보라는 봉사.헌신, 사랑 이다......... 하나님이 지구에 하는 일을 보면 .....하나님 형상을 받은 인간의 역할이 보이지 않느냐?....... 하나님이 널 지배하고 , 통치하고 관리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