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0일 [영원한 지금 13]_‘나도 이름일 뿐이요 너도 이름일 뿐이다.’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도입부입니다. 스님들이 조계종단은 간화선이잖아요. 화두공부를 참구하시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데, 제일 화두 중에 “無(무)”자 공안이 제일 본참공안이라고 그러잖아요. 스승으로부터 “無(무)”자 화두를 받아서 “無(무)”자를 참구해 가는 공부야. 그런데 지금 보면은 우리도 “無(무)”자 참구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싶어. 우리 이제 여기서 “無(무)”자를 발견했지. 결국은 하나로 귀일되. 그동안 제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린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여태까지 10여년간 “無(무)”자를 발견하려고 온 거야. 그래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이 입체, 삼차원 앞에서는 점이나 선이나 면이 이름일 뿐이다 이미지일 뿐이다. 삼차원만 실재하지 점이나 선이나 면은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게 말씀드리다가, 아 그러니 이름이라고 해서 다 실재하는 것은 아니구나. 이렇게 보다가 저기 종로3가 대각사에 가서 마음뿐이래. 마음뿐이래. 그러니 마음이 몇 차원인지는 몰라도 마음 앞에서는 모든 차원에 모양들이 다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야. 보니까. 그러니까 일차원이나 이차원이나 삼차원이나 사차원 오차원이 다 마음 앞에서는 이름일 뿐이었어. 그것을 두고 반야심경에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랬죠. 모든 차원의 모양이 실체가 없다. 그 실체가 없는 것이 바로 마음이야. 색깔이고 空(공)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래. 한 물건도 없어. 그거 발견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러다 이제 제가 또 금강경에서 석가께서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그것을 보고 아 과거도 우리가 갈 수가 없구나 우리가 그냥 상상하는 이미지로구나. 미래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야. 아는 것이지 실재가 아니야. 현재도 잡을 수가 없어. 그렇게 보니까 공간도 없더라. 우리 각자가 동서남북이 다르다면, 각자가 다른 동서남북이 어떻게 실재할 수가 있게어. 실재한다면 우리의 동서남북이 똑같아야지. 그런데 나의 동서남북과 여러분의 동서남북이 달라. 그러니 각자가 동쪽을 만들어서 서쪽을 만들고 남쪽을 만들고 북쪽을 만들어서 그것이 세상인 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렇잖아요. 이미지이잖아요. 각자가 다른 동서남북이 이미지일 수밖에 없지. 똑같아야지. 그것이 실재한다면은 우리의 동서남북이 똑같아야지. 그것은 이미지일 뿐이야. 이름일 뿐이야. 그러니 한 물건도 없어. 시간과 공간에서는 실재하는 놈을 발견할 수가 없어. 우리가 아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야. 그러니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야. 그러니까 혜능조사께서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이다. 한 물건도 없다. 그랬잖아요.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이야. 그 없다는 얘기야 보니까. “無(무)”자 화두가 없다는 얘기야. 한 물건도 없다가 줄은 말이야. “無(무)” “무..” 우리가 공부했듯이, 한 물건도 없어. 그렇지만 거기서 발견되는 것이, “한.. 물..건..도.. 없..다..”는 발견될 수 있잖아. 그렇지 발견한 것이잖아요. 한 물건도 없다면, “한 물건도 없다.”고 말하는 놈이 없어야 돼. 한 물건도 없으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한.. 물..건..도.. 없..다..”는 문득 발견되잖아요. 그거라요. 한 물건도 없다를 줄여놓은 것이 “無(무)”자 화두야. “無(무)”자 “무..” “무..” 하니까. 한 물건도 없어. 그런데 “무..” 이것은 있잖아요.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어. 그래서 “無(무)”자 화두가 본참 공안이 된 거야. 아주 기본적으로 “無(무)”자 화두 깨치면은 공부가 마친 거라고 그래. 그러니 그 다음에는 우리의 일상 언어가 다 그거잖아요. “뜰.. 앞..의.. 잣..나..무..다..”하면은 “無(무)”자 하고 다를 것이 있어요? “無..”하나 “잣..나..무..”하나 “똥..막..대..기..”하나 똑같은 얘기 아니에요? 한 물건도 없는데 “잣..나..무..다..” 그러잖아요. “잣..나..무..다..” 이게 우리의 둘이 아닌 자리라요. “똥..막..대..기..다..” 하는 것이 둘이 아닌 자리야. 그러니까 우리 일상이 무슨 말을 해도 다 이 자리야 보니까. 그러니까 나머지는 “無(무)”자 화두에서 보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해도 되고 “똥 닦는 막대기다”해도 되고 “동산이 물위로 간다”해도 되고 “오뉴월에 넝쿨이 길다.”해도 되고 무슨 말을 해도 이 자리야. 그러니까 “無(무)”자 화두를 공안으로 삼고 그렇게 애쓰신 것이 결국은 “무..” 이것을 보느라고 하는 것이거든. 그러니 이게 보니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無(무)” 막연히 있지 말고 그것이 한 물건도 없다는 소리다. 거기에서 한번 참구해 보아라. “무..” 한 놈도 없는데 “무..”하잖아. 그게 누가 하는 소리야? 그러니까 우리 여태까지의 공부가 결국은 “무..”를 얻으려는 공부였어. 그것 외에는 한 물건도 없어. 보니까. 이제 공부 마쳤다는 생각 안들어요? “무..” 뿐이야. “하늘이 맑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다.” 한 물건도 없어. 동서남북이 이름일 뿐이야. 각자의 동서남북이 다르니 그 이름일 뿐이지. 과거 현재 미래도 이름일 뿐이야. 갈 수가 없잖아요. 과거가 실재한다면 갈 수가 있어야지. 이미지일 뿐이잖아요. 미래도 이미지, 현재도 이미지야. 시간과 공간의 세계 밖에 모르는데,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만물도 이미지이죠. 이름이지. “지금 10시 40분이다.” 이것 이미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도 너도 이름일 뿐이야. 그렇다면 한 물건도 없다는 것야. 그렇다고 보면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이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누가 보고 누가 듣고 그래? 보는 일은 누구의 일이고, 가고 오고 앉고 서는 것은 누구의 일이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누구의 일이에요? 욕심내고 화내는 것은 또 누구의 일일까?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짓도 다 하잖아요.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할 짓은 다 해. 그거 내가 하는 일도 아니고 네가 하는 일도 아니야? 그러니 누가 하는 일이야? 그 누구라고 할 수가 없지. 그게 우리 공부라요. “無(무)”에서 “무..”를 발견하잖아. 그 자리라요. 한 물건도 없다면, 여기서 “한.. 물..건..도.. 없..다..”를 발견한 거야. 한 물건도 없으면, “한.. 물..건..도.. 없..다..” 말할 놈도 없어야지. 그런데 “한.. 물..건..도.. 없..다..” 그러잖아요. 그게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본래 얼굴이라요. 내 근본 자리라. 그것은 生死(생사)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 이미지나 왔다 갔다 하지. “한.. 물..건..도.. 없..다..” 이 있는 그대로는 아무 관계가 없어. 영원한 지금이고 영원한 여기 일이지. “한.. 물..건..도.. 없..다..” 그것이 “無(무)..”야. “한.. 물..건..도.. 없..다..”를 줄인 것이 “無(무)..”자라요. 그 “無(무)”자 화두를 스님들이 받으셔가지고 평생 공부하시는 게 “무..” “무..” 하는 거예요. 고칙 34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 문수가 세존께 법의 수레바퀴를 다시 굴려주시기를 간청하니 세존께서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문수야 내 마흔아홉 해를 세상에 머물면서, 아직 단 한마디도 법을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네가 다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달라고 하니, 내가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적이 있더냐?” 고칙 35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려 할 즈음에,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 鹿野苑(녹야원)에서 마지막 跋提河(발제하)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단 한마디도 나는 말한 적이 없느니라.” 고칙 36 세존께서 열반에 드실 때에 손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빛나는 금색인 나의 몸을 잘 보아라. 마음껏 우러러보아 훗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만약 내가 없어졌다고 말한다면, 내 제자가 아니요, 내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하여도 내 제자가 아니다.” 이때 백만의 억만 배나 되는 대중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 🙏